그건 부당합니다 - Z세대 공정의 기준에 대한 탐구
임홍택 지음 / 와이즈베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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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라는 말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이건 지금 시대뿐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라도 공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특히 '공정'이라는 말이 젊은 세대의 주장인 듯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느 사회든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면 항의를 하고 개선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공정하지 않음을 공정함으로 바꿔가는 변화를 이루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공정'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철학, 윤리적 정의가 이 책에서 필요하지도 않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왜 '공정'이 강하게 대두되었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청년세대들의 특징으로 이야기하는데, 그건 문제가 있다고 한다.


공정하지 않음이라는 말보다는 부당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부당이라는 말에는 적당으로 고쳐야 한다는 개선의 욕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공정하지 않다는 말은 부당하는 말이고, 이는 사회에서 고쳐야 할 문제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렇게 공정이라는 말 대신에 부당함이라는 말로 바꾸니, 어느 특정한 세대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된다. 부당한 것은 누구에게도 부당하기 때문이다. 즉, 부당함은 고쳐야만 할 문제이다. 그것도 한 세대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이 점에서 이 책의 장점이 나타난다. 젊은 세대가 느끼는 부당함이 과연 그들만의 불만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아니라고, 그 부당함은 누구에게나 부당함이라고 한다. 즉 부당함을 고치려는 쪽으로 행동을 해야 한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에 전에 부당했음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넘어갔던 일들을 공론화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당하지 않았던 문제가 지금 부당해진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부당했던 문제이기 때문에, 요즘 젊은 세대는 왜 그래?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왜?나 무엇을?보다는 어떻게?에 중점을 두자고 한다. 어떻게 그 부당함을 고칠 것인가에 중점을 두면 세대 갈등이나 젠더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부당함은 세대를 막론하고, 젠더를 막론하고 부당하기 때문이다. 함께 고쳐나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육아 문제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겠는가? 육아 문제는 모든 성들에게 해당하는 문제고, 성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도 해당하는 문제다. 그러니 경제적 지원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출생률이 낮아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육아 문제에서 여성들에게 부당한 것은 남성들을 비롯한 다른 성들에게도 부당한 것이고, 그 부담은 모두가 지게 된다. 이는 결국 사회의 부담으로까지 전가되니, 이런 육아 문제들처럼 함께 고쳐나가야 하는 문제들이 많다. 저자는 그런 문제들을 부당함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평등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절대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당하다고, 공정하지 않다고 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어느 사회도 절대적 평등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맺음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의 공정한 규칙은 간단하다. 첫 번째, '평등한 출발'이 보장돼야 한다. 두 번째, '반칙 없는 경쟁 과정'이 진행돼야 한다. ... 나는 스포츠에 경기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수준의 공정을 우리 사회에 접목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본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반칙이 없는 경쟁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 계속 변화해나가야 한다.'(351쪽)


젊은 세대만이 지닌 특징이 '공정 추구'라고 해서는 안 된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소리내는 목소리가 있음을, 그들은 이미 변한 사회에서 그것이 부당함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쳐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단지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이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공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하면 부당함이 없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떻게'에 해당하는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 


저자가 두 번째로 주장한 '계속 변화해나가야 한다'는 말, 그 말이 정답이다. 시대는 고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규칙도 달라져야 한다.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은 글이었다.


덧글


이 글을 읽다가 국가 예산이 이렇게 쓰여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통일을 대비한다고 할 수도 있고,(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통일부가 있는데, 굳이?) 또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영토를 관할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무래도 이건 예산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북5도 도지사라는 직책이 있다는 사실.(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이렇게 쓰여 있다. 


현재 분단 상황인 만큼 우리나라는 이북5도를 실효 지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일이 될 경우 헌법에 따라 이북5도를 관리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게다가 이북5도지사와 같은 미래의 관리자로는 평양지사를 추가하고, 도 이하 군/시/읍/면 동/리를 포함하게 되므로 군수,시장, 읍,면,동장까지 포함해(2020년 기준) 총 1,013명의 북한 관리자가 존재한다. ... 대부분의 업무가 통일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업무와 겹친다. ...지난 10년간 이북5도 관지라 인건비로 들어간 비용이 834억 원에 달한다(191-192쪽)


이런 비경제적인 부처부터 정리해야 하지 않나? 한 해에 약 83억 원이 들어간다는 얘긴데... 이건 부당함이지 않을까? 예술원 회원제도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면서 이북5도 도지사 이야기도 언급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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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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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313쪽)


이 책 마지막 문장이다. 사람이 사람을 실격시킬 순 없다. 이 당연한 말이 당연하지 않으니, 현실은 실격당한(실격시킬 권리가 없음에도 이상하게도 실격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자신들이 실격당하지 않기 위해서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아니라,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더 강하게, 그들보다도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려 한다. 그들과 비슷해지려 하기도 한다. 비슷해질 수 없음에도.


그러다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나는 나대로 살아야 한다는 자각을 한다. 내가 왜 남과 비슷해지려 노력해야 하는가? 남과 다르다고 해서 남을 따라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남을 따라가려 하다가 내가 잘하는 것을 놓치고 또 나를 사랑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나만이 책임져야 할 문제일까?


나만의 책임이라는 말은 실격과 관련이 된다.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해서 내가 관여하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장애에 왜 나만이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남들과 비슷하게가 아니라 나로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사회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인권을 지니고 태어나니까, 그 인권은 장애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모두에게 지켜져야 하니까. 그러니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문제가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를 바꾸려고 해야 한다.


지금까지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해온 일이 이런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과격하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까? 물론 귀 기울여 주는 사람도 있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사회를 바꾸려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사회는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런 사회에서는 누구도 실격당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누구도 실격시켜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인간적 상호작용(1,2,3장), 개인의 윤리적 결단(4,5장), 법과 제도의 관행(6,7장), 사랑과 예술이라는 특수한 맥락(8,9장)으로 구성하여 '잘못된 삶'이라는 관념과 태도에 맞서려 했다(16쪽)'고 구성한 저자의 글은 사람이 실격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다.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 법에 치우친, 형식을 중시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쓸 수 있는 품격주의라는 말과, '오줌권'(이런 권리를 공식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동권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없던 말이라고 했으니)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오줌권'이라? 인간의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는 권리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장애인들이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지금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


소위 먹자골목이라고 하는 음식점이 주욱 늘어선 곳에 가면, 각 음식점들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경우도 있고, 건물에 공동 화장실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 계단으로 갈 수밖에 없거나 또는 턱이 있어서 휠체어가 갈 수 없는 곳이 많다.


그렇다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회식을 하더라도 화장실이 어떠한가를 미리 고려하고 음식점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비장애인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텐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을 갈 수 있도록 하는 일, 그것이 장애인의 책임일까?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책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되면 누구도 실격당하지 않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는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실현되는 사회, 그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하는 말로 끝맺으려 한다.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려는 미적 ·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 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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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말은 쓰지 않습니다 -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새로고침이 필요한 말들
유달리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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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끝부분 나가는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모를 수 있다는 건 곧 특권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사실조차도 모른다.'(250쪽)


그렇다. 모를 수 있다는 것, 즉 자신의 삶에 불편함으로 다가오지 않았기에 알지 못하고 지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다. 권력이다.


이런 힘이 있는 자들은 약자들의 고통을 모른다. 자신은 겪어보지 않았기에... 겪어보려 하지도 않았기에,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결코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 그러니 그들은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힘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런 모름이 권력이 된다. 힘이 된다.


하지만 약자들은 모를 수가 없다. 생활에서 늘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점을 강자가 아닌 약자에게 두어야 한다. 약자가 행복한 세상은 강자도 행복한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강자들은 의식적으로 불편해지려 해야 한다. 자신이 겪지 않는 일에 무관심하기보다는, 그런 일에 관심을 두는 불편함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바뀐다. 


출퇴근 시간에 권력자들이 꼭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함을 겪어보기를.. 몸에 손상이 없는 사람도 고통을 겪는 그런 대중교통. 몸에 손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임을... 그 지옥도 잘 이용할 수 없음을...


특히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속적으로 듣게 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뿐이 아니라 행동까지도 규정할 수가 있다.


차별 언어가 만연하면, 그 사회는 차별을 당연시하게 된다. 차별 언어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무지의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차별 언어들을 다루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쓰는 말들도 있지만, 일부러 쓰는 말들도 있다. 그런 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왜 쓰면 안 되는지, 그 말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내용 중에 김도현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있다. 장애에 관해서.


'손상은 손상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 (234쪽) 


그렇다. 선천적 장애도 있지만 후천적 장애가 많다. 그런데 장애와 손상을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이 문장을 보면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손상은 손상일 뿐이라는 말. 이 말은 풀어서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다.


'다리의 '손상'은 휠체어를 이용한다면 평지에서는 장애가 아니다. 웬만하면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단을 마주하였을 때 다리의 '손상'은 장애가 된다.' (234쪽)


손상이 장애가 되지 않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불편해져야 한다. 불편함을 몸으로 느껴야 한다. 불편함을 모르고 그냥 지내다보면 손상이 장애가 되어도 모르고 지나가기 쉽다.


최근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벌이는 지하철 출근 투쟁에 관한 글이 있다. 왜 이들이 그런 투쟁을 하는지, 그것은 이들의 손상이 장애가 되는 구조 때문이다. 구조만 바꾸면 이들의 손상은 손상으로 그칠 수 있다.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통계의 문제가 이 부분에서도 작동한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2022년 4월 기준으로 공사가 관리하는 지하철 역사 275개 중 254개 역에선 교통 약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지상 출구부터 승강장까지 하나의 동선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른바 '1역사 1동선'이 확보된 역들이다. 수치만 보면 92.3%로 높다. 그러나 문제는 환승역이다. 환승역 69개 중 50.7%(35개 역)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환승할 수 없다. 환승하려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거나 휠체어 리프트를 사용해야 한다.'(230-231쪽)


환승하는 곳에서 꼭 필요한 엘리베이터가 절반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 빙 돌아서 환승해야 한다고 하니,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고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설치되어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냥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잖아 하면 그것은 바로 무지의 힘이다.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런 시설말고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한 번 발화되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이다. 차별의 말들... 상처주는 말들.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힘을 구사하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들에게는 모르는 게 힘일 수 있지만, 이는 약자들에게는 독이 되고 칼이 된다. 그들의 마음에 몸에 상처를 낸다. 그러니 알아야 한다. 불편해져야 한다. 알아서 불편해지면, 고치게 된다. 고치도록 한다.


손상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또 말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더 행복해진다.


이 책 제목대로 '이제 그런 말은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다. 먼저 '그런 말'이 어떤 말인지 알아야겠다. '그런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힘을 알게 모르게 발휘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런 말들' 모르고 넘어가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알아서 고치는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지가 힘이 되지 않게... 아는 것이 힘이 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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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헤아리는 마음의 이름 이름앤솔러지 1
오준호 지음 / 생각과느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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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에는 '자유'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 연설에 자유가 몇 번이나 나왔는지를 세어 발표하기도 하겠는가? 


자유는 중요하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속박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유가 남을 착취할 자유, 또는 굶어죽을 자유여서는 안 된다. 자유는 평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강자의 논리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평등이 자유와 대립되는 개념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도 있지만, 평등과 자유는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가 아니다. 평등과 자유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가는 개념이다.


자유 없는 평등 없고, 평등 없는 자유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러니 자유란 말이 넘치는 이 사회에서 우리 평등이란 말도 그만큼 넘쳐나도록 하자.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작은 책에서는 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1장에서 6장으로 나아가는데 동심원을 그리듯이 점점 더 평등의 개념과 내용을 확장해가고 있다.


1장은 불행 배틀 시대, 평등의 의미를 묻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불행 배틀은 경쟁으로 바꾸어도 된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삶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경쟁도 마찬가지다. 경쟁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에 남과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경쟁에서 진 사람들의 삶이 힘들어져서는 안 된다. 경쟁은 서로가 발전하기 위해서,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서 할 때 의미가 있다. 그런데 경쟁이 서로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런 경쟁사회는 지양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치열한 경쟁, 승자독식주의로 흘러가고 있으니, 경쟁에 대해서 다시 물어야 한다. 경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경쟁을 공정하게 하자고 하는데, 공정에 대한 개념이 또 문제가 된다.


무엇이 공정한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2장으로 넘어가면 평등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을까? 라는 질문을 한다. 평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평등이냐다. 형식적 평등이냐, 실질적 평등이냐를 묻는다.


우리는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3장, 평등한 시민들, 공정한 분배를 말하다로 넘어간다.


공정한 분배,,, 이것, 산수처럼 딱 1/N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분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공정한 분배다.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과 육상 선수가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똑같은 선에서 출발한다고 하면 그것이 공정일까? 아닐 것이다. 신체적 특성에 따른 출발선의 차이. 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공정한 분배란 환상일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공정한 분배를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자연스레 4장으로 넘어간다. 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여러가지 제도들이 마련이 되고,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져 왔다.


이 장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바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 '평등한 시민들의 공정한 분배는 '차등의 원칙'을 포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차등의 원칙을 단순히 호소하는 정도를 넘어 제도로 만들어야 합니다.'(104쪽) 


이 차등의 원칙을 지킨다면 당연하게 5장에서 이야기하는 능력주의는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게 된다.


능력주의는 결코 평등이 아니다. 능력에 따라서 대우를 받자는 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기회가 제공되고, 과정이 공정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진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누구나 똑같은 기회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면 '지역균형주의'라든가, '소수자 우대'는 불평등하다고, 능력주의에 반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아니다. 자신이 발휘하는 능력이 오로지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능력은 다르게 발현된다. 기회가 똑같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능력주의를 숭상하게 되면, 그 사회는 차별이 공고화되는 사회가 된다. 자, 능력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지막 6장이다. 한 걸음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장에서는 기본 소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적어도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기본 소득이 주어지는 사회. 그래서 저자는 '먼저 능력에 따라 소득을 분배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추가 소득을 준다'(174쪽)는 분배 정의에 관한 통념을 '기본 소득으로 삶을 보장하고 더 일한다면 추가 소득을 올리게 한다'(175쪽)로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기본 소득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있는데, 기본 소득이란 말을 기본 배당이라는 말로 바꾸자. 공유 자원은 누군가가 독점하고, 거기서 나오는 소득을 자신만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공유 자원에서 나오는 소득은 모두가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생각.


그러니 이는 소득이 아니라 배당이라고 해야 한다. 공유 자원의 정당한 배당. 우리는 이 지구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지구에서 나오는 이익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배당받을 권리가 있고, 그런 배당이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좀더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헤아리는 마음의 이름'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등은 나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평등은 나와 남을 우리라는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야 한다. 결국 다른 존재를 헤아리는 마음이 평등인 것이다.


이렇게 평등이 실현되면 개인의 자유는 더 커진다. 평등한 사회일수록 자유가 더 크게 보장되고,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자유가 제약을 받는다.


'자유, 자유'하는 이 시대,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도 우리는 '평등'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헤아리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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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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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 민주주의가 트럼프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민주주의 국가의 전범으로 불리는 미국에 전제주의 국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는 인식.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붕괴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재앙이 된다.


민주주의 붕괴는 제도를 무시하는 개인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갑자기 튀어나온 개인... 갑자기라고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그 위기를 구원할 수 있는 인물로 제도권에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권에 대한 기대를 접고, 그 밖에 있던 사람에게서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능력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에게 많은 권한을 넘겨주게 된다. 그는 그 권한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하지만, 권한을 내려놓지 않고 기존 제도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도 한다.


한 개인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면,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만다. 전제주의 또는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미국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나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아니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이 된 이후 얼마나 많은 민주주의 후퇴가 있었던가? 이 책은 민주주의 후퇴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충분히 적용이 가능하다.


첫째는 심판을 매수하는 일이다. 심판이라 함은 삼권 분립이 이루어진 나라에서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입법부, 사법부를 자신의 의도대로 행하도록 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견제할 수 없게 된다. 입법부를 장악하기는 힘들다. 대신 사법부를 장악하기는 쉽다. 미국에서 어떻게 연방 대법관 자리를 놓고 대통령과 입법부 사이에 견제와 투쟁이 일어났는지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대법관뿐만 아니라 헌법재판관 임명을 놓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그래도 우리는 임명이 안 되는 경우는 없었는데, 또한 재판관 수가 정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미국은 대법관의 수가 정해져 있지 않아 법적으로는 권력의 입맛에 따라서 조정이 가능하다고 하니...


여기에 언론에 대한 통제까지 곁들이면 심판 매수는 끝나게 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에 출입을 금지한다든지,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몰아붙인다든지 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일을 한다.


트럼프는 이 일을 극단적으로 한 인물이지만, 과연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 정치는 심판을 매수했다는 말에서 자유로운가 생각해 볼 일이다.


둘째는 정적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다. 이는 상대편에서 유력한 정치인이 제대로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그에게 여러가지 죄를 뒤집어씌운다든지 또 그를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든지 하는 일이다.


트럼프가 힐러리를 범죄자로 몰아붙였듯이, 또는 오래 전 미국에서 매카시 상원의원에 의해 정적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듯이 그렇게 정적이 자신과 같은 정치판에서 활동할 수 없게 만든다.


성공하기 힘든 전략이라고 하겠지만, 의외로 이 전략은 잘 먹힐 때가 있다. 바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다. 경제가 침체되어 있거나 이념적으로 양분되어 있을 때 이런 전략은 잘 통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종북좌파'라는 말이 가장 잘 통했다. 여기에 요즘은 부패한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동원되고 있으니... 이는 상대 진영의 사람이 정치 활동을 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자기만 선수로 뛰겠다는 발상, 이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 민주주의란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이념을 박멸하기보다는 토론을 통해서 더 나은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 데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일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대표적인 예가 선거구 조정이다. 미국은 게리맨더링이라고 해서 선거구 조정을 하는데, 인종과 경제적 차이를 반영하여 선거구 조정을 하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판을 짤 수 있다.


또 선거에 참여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어 소수가 자신들을 대변하는 사람을 선출할 수 없도록 하는 일도 가능하다. 


미국보다는 우리나라가 이런 일을 하기에는 좀더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선거제도에서는 소수 정당이 원내에 진입하기는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은 확실히 양당체제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역시 양당체제라고 해야 한다. 다른 정당들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민주주의를 위기에 처하게 하는 사람이 어떻게 등장할까?


이 책은 그 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떻게 트럼프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한 정당의 대표로 출마할 수 있을까?


트럼프를 극단주의자라고 한다면 예전에는 극단주의자를 걸러낼 능력을 정당이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극단주의자가 등장하면 서로 힘을 합쳐 그가 선출되지 못하게 하는 능력. 그것을 저자들은 민주주의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극단주의자들이 등장하고 많은 표를 얻어 정당의 후보자로 추천된다. 그 이유는 바로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된 데 이유가 있다고 한다.


정치를 정당이 해야 한다는, 특별한 개인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는데, 정당에 대한 불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정당 밖에 있는 인물이 선출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인물은 자신의 인기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쉽다는 것. 그가 권력을 휘두를 때 기존 제도는 무력화된다는 것. 이런 무력화는 다음 정권에서도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상대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일, 지금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 상대에 대한 관용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트럼프 시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다.


그 다음 제도적 자제는 법에 있더라도 자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불법이 아니면, 또 법에 명시되어 있으면 그 법을 활용해 자신의 권력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도 타협해서 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제도적 자제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제도적 자제는 한쪽이 법의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권이 교체되어도 이 관행은 지속될 수 있으므로, 일방이 아닌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기도 하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이지만 어쩌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지표를 적용하면 트럼프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가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을 해야 한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의회와 법원, 그리고 선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한다. ...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는 권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274쪽)


'극단적인 양극화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 사회적 분열을 인정하면서 엘리트 집단 간의 협력과 타협을 도모하는 것이다. (277쪽) ... 미국의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두 가지 요인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요인이란 인종적, 종교적 재편, 그리고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경제 불평등을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 대변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279-280쪽)'


미국의 상황에서 저자들이 제시한 대책이지만 이를 우리나라에 변용해서 적용할 수 있다.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는 일. 그리고 정당들이 국민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정당 개혁을 하는 일... 그렇게 하도록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그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트럼프가 물러났다고 해결되었을까? 여전히 지속적이지 않나? 우리 역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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