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폭식 사회 : 기술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잠식하는가? -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2023년도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우수과학도서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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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공지능에 환호하고 있을 때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이나 인공지능이나 또는 메타버스나 다 기술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진보라고 보고, 이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다른 나라보다도 더 빨리, 더 강하게 디지털화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학교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학습을 시켜야 하며, 칠판은 전자칠판으로 바뀌어야 하고, 교과서는 디지털 교과서가 되어야 하며,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디지털 기기를 하나씩 보급해야 한다.


대면으로, 서로 몸을 부딪히며 경험해가는 교육에서, 교사와 학생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을 하던 장면에서 이제는 중간에 디지털 기기가 끼어들어 교사는 디지털 기기를 작동시키고(또는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를 작동하며), 학생들은 그 기기를 통해 배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미래 교육의 모습이다. 과연 좋을지?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졌음에도, 학교라는 공간에 나오더라도 학습은 디지털 기기와 하는 비대면 교육이 강조되고 있으니, 가히 디지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학교가 이런 정도에 이르르면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는 더욱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교육은 어떤 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을 우선시 하는 태도는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인수공통감염병조차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는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런 사회를 '디지털 폭식 사회' 또는 '기술 폭식 사회'라 부르고 있다. 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기술 폭식 사회는 이렇다.


'기술 폭식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사회가 기술에 매달리고, 기술 그 자체를 사회문제의 직접적 해결책으로 보고, 자본주의 기술 그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성찰의 여유가 적을 때 발생하는 이상 현상이다.' (205-206쪽)


과학기술이 초래한 문제는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보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자신들의 생활 형태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 또 그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에 대한 논의도 없이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추진한다.


이런 사회에서 기술을 통제하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좋아요' 아닌가. 팔로워 숫자와 좋아요 숫자로 자신의 처지를 가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검증되지 않은 일들을 얼마나 빠르고 쉽게 유통시키는가?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가 몇 해 동안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술 권력의 문제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도덕성, 개인의 책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술 권력의 품에 안기게 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기술 권력의 문제는 곧 기술을 오남용하는 사회에 대한 급진 정치적 개입이나 기술 실험과 연결되어야 문제의 해결 지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인의 데이터 역량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에 대한 개인 성찰 능력에 더해, 묵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의 도시설계 속 배합과 앙상블, 거의 모든 연령과 세대에 두루 친숙한 기술의 보편적 접근과 사회 공통의 보편적 '기술 감각' 마련,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 도입 시 시민 숙의 과정의 정례화, 풀뿌리 대안 생태 기술의 장려 등 기술 대안의 상상력을 동시다발적으로 창안해내야 한다.' (236쪽)


이런 주장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에 대해 과연 시민 숙의 과정을 거친 적이 있었던가?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가 되었다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더욱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있지만, 여기서 잠시 멈추고 디지털 사회가 초래할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주장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소수에게서 나오고 있지만, 더이상 퍼지지 않는다. 지지자를 획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술 권력을 쥔 자들이 이런 주장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은 쉽게 퍼뜨리지만 반대하는 주장은 묻어두는, 그

런 행태. 이것이 바로 기술 권력이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지금. 성장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가 겪었던 큰일들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저자는 묻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이대로 나가면 우리가 겪었던 감염병이나 기후 재앙보다 더 심한 일들을 겪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모두가 우 몰려 가는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한다.


특히 이런 기술 개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더욱 극한 상황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그리고 디지털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저자는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기술 개발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에서만은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연-사회 생태계에 걸쳐,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의 문제를 전면화한 채 인공-자연, 생명-기계, 가상-실제, 물질-비물질 사이의 기술 배합 비율을 적정 수준에서 조절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구 곳곳에 만연한 기술 독성을 치유할 자율 능력을 우리 스스로 익히는 길이기도 하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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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3년 가을호 - 통권 1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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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을 읽다. 길을 잃은 시대에 길찾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여전히 녹색평론에서 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내는 녹색평론에 응원을 보낸다.


후쿠시마 오염수...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처리수라고 하자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흘러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그렇게 하자고 한다면 제 나라니까, 자기들 이익이 걸려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익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피해만 쌓여갈 뿐인 우리나라에서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기는커녕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으니...


무엇이 과학인지 정말 알고 떠드는지 궁금하다. 원자력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쓰고, 핵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는 집단에서, 인체에 해롭지 않은 피폭량이 있다고 하는 말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 몸에 들어온 방사능물질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나? 아주 작은 양은 몸이 견뎌낼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말이 과연 과학적인가?


진정 과학적이라면 아주 적은 양이라도 인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오랜 시간 동안 검증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주어진 자료만 보고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핵 오염수부터 시작하여 기후재앙, 그리고 정치의 후퇴 등을 다루고 있는데, 진정 민주주의라면 과학이라는 이름을 오용하면서까지 국민들 정서에 맞지 않는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너무도 후퇴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국한시킨 결과이기도 하겠고.


문제는 경제야가 아니라 문제는 정치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당연히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적인 사람들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4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늘 함께 할 수 있는 민주주의, 남에게 자신의 권리를 맡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면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왈가왈부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또한 국회의원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제대로 하지 않는 선거법 개정, 예전에 이루어졌으리라.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루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형식마저도 하나하나 무너져 가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 후퇴는 삶의 퇴보를 부른다. 아니 퇴보가 아니라 위기다. 재앙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재난을 보라. 이는 정치의 퇴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향을 잃은 정치인데, 견제를 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공론을 모으는 일을 하지도 않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지금 정치의 모습, 또는 경제 성장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이제석 광고가 떠올랐다.


앞으로, 적에게 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총구는 자신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광고..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6-157쪽.>


이것이다. 성장을 외치는 지금의 모습은 이렇게 앞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성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성장, 성장 하고 있을텐가? 지금의 삶을 방식을 유지하면서 기후재앙을 벗어난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 성장이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 광고처럼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8-159쪽.>


그러니 우리는 삶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녹색평론 이번 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자급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공업이 아니라 농업을, 그것도 소농 중심의 농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큰집단보다는 작은집단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곳에서 생활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다. 계속해서.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바위가 언젠가는 뚫리고 깨진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녹색평론을 꾸준히 외치고 있다. 아직까지도. 한편 한편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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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건 - 1988~1992년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
조영남 지음 / 민음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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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내게는 그냥 '등소평' 그는 '부도옹'이라고 불렸다고 알고 있는데... 부도옹(不倒翁), 넘어지지 않는 사람... 그렇다. 그는 마오쩌뚱과 더불어 중국 혁명을 했던 사람. 그럼에도 마오에 의해 쫓겨났던 사람. 다시 문화혁명 이후 복귀에 중국 최고지도자가 된 사람.


그는 작은 키에 담배를 엄청 피웠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작은 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그는 크디 큰 중국이 현대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그의 잘못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마오를 평가하면서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 평가가 자신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는 자신에게는 잘못이 30%는 안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덩샤오핑 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쥐를 잡는 데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상관이 없다는 소위 흑묘백묘( 黑猫白猫)론.


여기서 쥐는 바로 국민들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국민들의 빈곤을 해소하는 데는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시장이냐 통제냐 하는 것에 매몰되지 말고 무엇이 진정으로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서 그 방법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그는 시장경제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경제 개방을 실시하고, 이윤을 허용했으며, 높은 경제성장률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몇몇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해서 경제성장을 도모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성과는 몇몇 도시일 뿐이다. 중국 전체는 아니다. 이미 성장의 맛을 본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할 뿐이다.


여기에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정치 분야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독재와 시장이 함께 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즉 시장이 형성이 되고, 시장이 경제의 중심이 되면 자연스레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정치와 무관한 시장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처음에는 고도성장을 이루기 쉽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정체되기 마련이다. 이때 시장에 간섭을 하는 정치가 걸림돌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덩샤오핑의 시대 후반에 중국은 이런 상황에 도달한다. 공산당의 지도를 포기하지 않는 보수파는 전면적인 경제 개혁보다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성장률을 낮추고, 공산당의 지도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방향. 여기에 반발이 있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아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라고 하면 반발이 생긴다. 중국의 80년대 후반이 그렇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언급할 수가 없는 '천안문 사건'이 이때 벌어진다.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도 있지만, 현대화된 중국에서 경제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과 경제 분야만으로 국한시키려는 세력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은 학생들일 경우가 많다.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얻고, 또 자유로운 상황에 있는 학생들. 여기에 이상을 추구하는 나이까지 합쳐지면 학생들은 지지부진한 개혁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 원인을 정치에서 찾게 된다. 이들은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게 된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사고라기보다는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정부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물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집단에서랴... 이 책을 읽으면서 '천안문'과 '광주'가 자꾸 겹쳐지는 이유가 뭘까 했는데... 읽으면서 많이 불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국민을 위해야 하는 군대가 국민에게 총구를 겨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정통성을 상실한 일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래서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 되는데...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천안문은 금기 사항이다. 왜냐하면 책임자를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임자를 처벌한다면 그들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덩샤오핑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과(잘못)'라고 하자. 얼마나 될까? 아마 덩샤오핑도 자신이 비판하고 옹호했던 마오와 같은 평가를 받지 않을까. 여전히 중국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이념, 등소평 이념이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하니까.


이 책은 덩샤오핑 시대를 다룬 것 중에서 마지막 시기에 해당한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 위기에 처했다가 다시 실시되는 과정... 이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 지도자들 간의 갈등들에 대해서 여러 자료를 통해 서술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닌, 찬양이 아닌 자료를 통한, 역사를 통한 덩샤오핑 시대의 공과 과를 살피고 있어서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천안문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를 정리해주고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사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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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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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일들. 자세히 보고, 자신의 관점만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일들. 제 생각과 분명히 다르지만, 왜 다른지 고민해 봐야 하는 일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그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 자신의 관점만을 고수한다.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잘 적용되는 일들이 많다. 자기에게 유리한 면들만 보고, 그것들로 자신의 관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고, 고려할 가치가 없는 편협한 주장일 뿐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관점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관점이나, 이것도 그르고, 저것도 그르다는 양비론적 관점을 택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들에는 분명 옳고 그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힘들다면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살피고, 원인을 파악하여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저자의 관점을 빌리자면 잘못된 주장을 하는 집단들이 존재하는 일들 열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소수자, 악성 댓글, 폭력(운동선수), 비정규직(노동자 사고), 빈곤(복지), 기업의 비윤리성(가습기 살균제), 코로나19(재난), 성착취, 낙태죄, 세월호, 대통령 탄핵, 입시 문제(공정)


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다. 사실 성소수자가 논란이 될 이유는 없다. 성적 취향이 어찌 논란이 된단 말인가? 그럼에도 아직도 성소수자는 차별을 받고 있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히기도 어렵다.


소수의 성소수자들이 방송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많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극소수에 해당할 뿐이다. 고 변희수 하사는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당해야 했다. 아직도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반대가 아니라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여기에 안심 화장실 문제... 모든 성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자신들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악성 댓글이 단지 댓글 창만 없앤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사회가 바뀌어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운동선수들의 폭력 문제나, 입시의 공정성, 비정규직 노동 환경(단지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함을, 노동자들의 사고는 바로 이런 노동환경의 개선이 있어야 함을, 사회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노동환경의 개선에 개입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의 개선,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데 선별 복지냐 보편 복지냐에 대한 접근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까지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의 사안은 그 사안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회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만 해도 그렇다. 피해자는 있는데, 그 피해를 온전히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몇 년 전 일을...  최근에 국가에서 가습기 피해를 인정했다고 하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던가. 또한 아직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피해를 보상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기업이 이윤을 추구할 자유를 무한히 허용했다가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세월호 역시 가습기 살균제와 마찬가지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개조를 하고, 규제를 무마하기 위해 벌인 로비, 이런 것들로 인해 벌어진 사고... 국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정하기 걸린 오랜 시간처럼 세월호 역시 국가가 책임지고 진실을 규명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런 일들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이는 한 개인을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대통령이 지닌 책무가 무엇인지, 대통령은 한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헌법에 부여된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자리임을, 그런 일을 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음을 잘 보여준 일이라고 한다.


여기에 낙태나 성착취는 여성을 어떻게 보는가? 성착취야 착취라는 말에서 이미 잘못임을, 범법 행위임을 알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던 사례들이 있었음을, 그것은 바로 성착취에 대한 과거의 인식에 머물러 있었음을 이야기하면서, 낙태에 관한 관점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낙태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성문란 또는 방종으로 연결시키는 관점들이 있음을... 낙태죄가 법적으로 이미 폐지가 되었음에도 이런 관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처럼 이 책은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면서, 저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사안들에 대해서 이런 관점과 저런 관점이 있고, 또한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단지 하나의 관점에 갇히지 말고,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한 주장이 득세를 하는 세상인데, 그 강한 주장이 적절한 근거를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근거를 들어 그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어려운 길일지라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 기억해야 한다. 유효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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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 간호사가 들여다본 것들
김수련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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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노동'


꼭 필요한 일이다. 사회를 유지하는데, 또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이다. 그런데 이 '돌봄 노동'은 '그림자 노동'이 된다.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여서는 안 된다. 그냥 당연한 듯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 고마움을 표하기보다는 이상하게 비난이 앞서기도 한다.


왜냐고? 그들이 눈에 보일 때는 바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때이기 때문이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이대로는 돌봄이 지속될 수 없겠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아니다. 자신들의 권리가 아니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권리'라고 해야 한다. 그들의 권리가 침해당할수록 돌볼 수 있는 권리가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보일 때 그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그동안 한 '그림자 노동'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꼈을텐데 그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당장 자신의 불편함만 볼 뿐이다.


그래서 돌봄 노동은 역설적이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돌봄 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 중에서 간호사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 그것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상황을 자신의 경험이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너무도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고,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힘든 그런 상황인데도 처우는 개선되지 않는 현실.


중환자실에 간호사 한 명 당 환자 2명인 경우가 복받은 경우라고 하는데, 한 환자에게 일이 생겼을 경우엔 간호사 한 명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어서 최소 3-4명의 간호사가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그런데 만약 2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중환자실에 있는 간호사들이 또 투입되어야 하고, 나머지 중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인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좋다고 하는 병원에서도 이런데 한 명의 간호사 당 중환자 3명이상이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할까? 또 간호사들의 업무를 이렇게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과연 제대로 된 돌봄이 가능할까?


간호사들이 건강하고 편해야 환자들도 건강하고 편해질 수 있다. 세상에 돌봄을 하는 사람이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게 돌봄을 받는 사람이 치유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지...


간호사를 더 많이 고용하면 병원 운영이 지장을 준다? 글쎄? 병원이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환자를 돈을 물어오는 고객으로 생각한다면(물론 영리병원은 그런 목적으로 존재할테다. 영리병원 이야기는 이제 남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과연 의료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운영에 필요한 이익은 거두어야 한다. 우리나라 모든 병원들이 '장기려' 박사와 같은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공공의료기관은 확충해야 한다. 이제 겨우 5%정도가 공공병원이라고 하는데(210쪽 참조), 이는 적어도 너무 적다. 이를 확충해야 한다. 여기에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10년을 근무하지 않고 퇴직하는 간호사가 속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간호대학을 나온 사람은 많은데 정작 일선에서 간호사는 부족한 현실. 그래서 외국인 간호사를 고용하겠다는 말도 나오는데, 예전에 독일로 파견간 간호사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파견 간호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왜 간호사들은 많은데 실제로 일하는 간호사들은 적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낼 수 있다.


이 책에서 김수련 간호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책임간호사나 선배가 챙겨주지 않아도 밥 먹고 물 마실 수 있고 선배가 관대하지 않아도 실수 때문에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 설령 괴롭힘을 당하면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할 때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한 인력 구조를 방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충원을 요구해야 한다. 강력한 처벌 조항을 가진 간호사 대 환자 비율 법안을, 간호인력인권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공공 병원을 더 세워야 한고,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247쪽)


이것이 무리한 요구일까? 돌봄을 제대로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인데 아직도 실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돌봄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받는 돌봄이 의미가 있을까?


돌보는 주체도 돌봄을 받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권리를 누리면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책이기도 하고... 요즘 '보건의료노조'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최소한 그들의 요구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간호사들과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으므로.


돌봄 노동자가 돌봄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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