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나라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은근슬쩍 핵발전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소형 핵발전은 해롭지 않다고, 오히려 친환경 발전이라고도 한다. 친환경 발전에 원자력을(그들은 절대로 핵발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포함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가 아직 해결도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은 좀 오래 되었다. 10년도 전에 나온 책이다. 그렇다고 유효하지 않을까? 몇 십 년 만에 핵방사능이 다 사라졌다면 이 책은 과거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일 뿐이겠지만, 체르노빌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뒤에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일본 정부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고 하고, 오염수들을 바다로 방류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 책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왜 나한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 (172쪽)


지금 많은 나라들에서는 말해주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핵발전은 오히려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체르노빌 전에도 그랬단다. 러시아 주전자(사모바르)보다도 더 안전하다고. 모스크바 크렘린 궁 옆에다 지어도 안전하다고.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아왔다. 그런데도 안전하고 환경적인 에너지가 핵에너지라고 한다.


체르노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평화적 핵도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264쪽) 이 말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미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에서 평화적 핵도 죽음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나? 그렇다고 또다른 핵폭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핵폭발뿐만이 아니라 핵발전으로 인해 나오는 엄청난 방사성 물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도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당장 눈 앞에 닥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핵발전을 고집하다가 당을 대표했던 사람이 했던 말을 또다시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는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합리화한다. "나는내 시대의 사람이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346쪽)


이 말로 끝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또 미래 사람들도 살기 힘든 땅이 되었다. 폭발 사고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해결하는 방법은 신속해야 했다. 우선 사람들을 대피부터 시키고 봐야 했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했다. 감추었다. 사람들을 자원봉사 명목으로 제대로 된 장비도 지급하지 않고 폭발 현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일한 사람들, 나중에 죽어갔다. 나중에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된 채. 그런 나라는 사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사람의 나라가 아닌 권력의 나라였다. 국가가 중요하다는 데엔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 생명의 귀중함은 온데간데없다." (361쪽) 이것은 권력의 나라에 불과하다. 이런 비극이 재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핵발전은 여전히 위험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 소모돼야 폐기물을 처리할 수가 있다. 고준위, 저준위 물질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이들은 모두 사람에게 해롭다. 그래서 이 물질들을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완전히 처리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양보다 새롭게 다시 나오게 되는 폐기물의 양이 더 많다. 그러니 이들이 완전히 안전해지는 데는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 


현재 세대가 사용해도 그 책임은 미래 세대가 질 수밖에 없다. 이 책 작은 제목에 '미래의 연대기'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에 사용한 사람들, 건설한 사람들이 책임을 다 지지 못한다. 책임을 미래에 전가한다. 과연 그런 에너지를 청정에너지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발전을 환경적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곳에 잠시 다니러온 손님이다. 손님이 남의 집에 들어가 그 집에 해로운 물건을 남겨두고 오면 되겠는가? 손님은 그 집에 가능하면 쓰레기를 남겨서는 안 된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물건들만, 또 방문한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그 집에서 주인인 양 지내고, 나중에 주인이 치워야 할 쓰레기, 그것도 엄청나게 부담되는 쓰레기를 남기고 와서는 안 된다.


이 지구, 미래세대에게 빌려 현재를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에 우리는 손님으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손님으로 머물다 간다면 손님 역할을 해야지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 땅에 손님으로 왔다는 걸,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것을 신이 보여주신 거야. 우리는 손님으로 왔어." (234쪽)


이렇게 손님으로 왔음을 체르노빌을 통해서, 후쿠시마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손님이기를 거부하고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손님, 자신이 불편하다고... 주인집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생각해서 물건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쓰레기로 남긴다. 


그러면 안 되는데... 기후 재앙이라고 할 정도의 변화가 심각한 현대... 잠깐의 기후 재앙을 벗어나겠다고, 미래의 기후 재앙을 예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구에 들른 손님이라는 생각을 하면, 지구에 살아갈 주인은 미래세대를 비롯해 모든 생명체임을 생각한다면, 어떤 에너지를 써야 할지 더 깊게 생각해야 한다.


핵발전을 옹호하는 사람들, 이 살아있는 목소리들을 먼저 들었으면 한다. 듣고 생각하고 판단했으면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26 1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기차, 원자력발전소 보다는 수소차, 대체에너지 쪽인데 정책은 당장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는것을 선호하지요

kinye91 2022-08-26 13:05   좋아요 2 | URL
저도 에너지 문제는 장기적으로, 그리고 미래 세대와 환경을 생각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레이스 님 말씀처럼 당장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선호하는 정책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베카 솔닛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읽을 때마다 실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페미니즘이 한 범주로만 정의될 수 없듯이 솔닛의 책도 그렇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말은,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주장한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솔닛이 무지권(priveloblivious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보았듯이 (특권을 뜻하는 'privilege'와 무지 혹은 무심함을 뜻하는 'obliviousness'를 합한 말이라고 한다.특권 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241-242쪽) 이미 권리가 있는 쪽은 권리에 대해서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고, 이 침묵을 깨는 말하기가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에 실린 글이 '침묵의 짧은 역사'인데, 얼마나 많은 침묵들이 강요되어 왔는지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은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반대하는, 또는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말할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고난을 겪고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꾸 같은(비슷한) 질문을 한다. 이것은 아직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단 태도다. 발언을 인정하지 않고 발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하는 질문들이다.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질문이 계속될 때 피해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왜냐,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니까. 결국 같은 질문은 침묵의 강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이 '침묵의 짧은 역사'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짧은' 역사가 아니라 '긴' 역사일텐데, 솔닛이 짧은 역사라고 한 이유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할 역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했고, 침묵에서 발언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자이언트'로 끝맺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볼 때마다 영화에서 느끼는 점이 달라졌음을 이야기하면서, 솔닛은 영화 '자이언트'를 '거대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사람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규정해서도 안 됨을. 어느 범주에 사람을 가둬놓고, 그 범주 안에서만 판단해서는 안 됨을. 영화를 보면서 솔닛은 같은 영화임에도 볼 때마다 관심을 두는 주안점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만큼 영화에는 많은 요소가 담겨 있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다양함이 사람들에게는 있다. 남성이라고 여성이라고 또는 백인이라고 흑인이라고 딱 규정지을 수 없다. 범주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해야 한다.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아왔던 존재들은 기존에 권력을 지고 있었던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던 존재였다. 그리고 약자들은 범주 속에서 녹아들어버렸지, 개별성을 인정받지는 못했었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존재들이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솔닛은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범주 속에서 개별성을 인정한다면 같은 질문을 자꾸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19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권리가 있는 쪽에서는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없죠. 약자가 불편함과 권리를 주장해서 스스로 쟁취해야할 것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죠. 솔닛을 페미니스트의 범주에 넣기에는 그가 문제삼는 범주가 그보다 넓고 확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inye91 2022-08-19 10:3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어느 한 분야로 규정짓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권리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이 같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둠 속의 희망 - 절망의 시대에 변화를 꿈꾸는 법, 개정판
리베카 솔닛 지음, 설준규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주로 부시(아들)가 당선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에서 9.11테러 사건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고... 그럴 때 절망에 빠진다. 사람들은 부시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힘들어졌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공습하겠다고 했을 때 어둠은 더 짙어졌다. 그렇게 솔닛은 그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어둠이라고 했다. 어둠, 앞이 캄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즉,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에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 또 희망은 어둠 속에 있는 문이라고 했다. 어둠이라는 벽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물론 문을 열었다고 해서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다. 또다른 어둠이 있을 수 있고, 또다시 벽을 짚으며 나아가야 한다. 희망이라는 문을 향해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어둠이다. 어둠은 포기가 아니다. 나아가게 한다. 어둠 속에 주저앉는 일. 그것이 바로 절망이다. 때문에 솔닛은 희망은 어둠이라고 한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동기를 주는.


그러므로 한번에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세상에 '헤라클레스'처럼 강물을 끌어와 마굿간을 한번에 청소할 수는 없다. 희망은 그런 마굿간을 치우는 일과 같다. 지난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치워야 한다. 혼자서만이 아니라 함께 치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깨끗해진 부분이 나온다.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더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 하는 역할이다.


솔닛은 이런 점에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해결책은 없다고 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그들의 연대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


연대가 잘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벽을 짚으며 나아가지만, 문을 찾지 못할 때도 있지 않은가. 또 서로 부딪칠 때도 있고. 


이때 포기하면 안 된다. 자신의 방식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일. 그렇다.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차이를 행동을 통해서 메워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어둠 속의 희망'이다.


이 책은 2001년 9.11사건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을, 아니 희망을 보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개정판을 내면서 그 뒤의 이야기들을 몇 편 실어서 아주 오래 전 이야기만은 아니다. 또 미국이 과연 2001년보다 많이 좋아졌는지, 그들이 희망의 문을 찾았는지 의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는 희망을 찾았는가. 어쩌면 우리도 솔닛의 이 책이 쓰여질 때와 비슷하게 어둠 속에 있지 않을까.


어둠 속에 있다면 이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희망으로 함께 행동해야 한다. 저건 아니야에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하자고 해야 한다. 자신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 행동하는 일, 어둠 속의 희망은 바로 이런 행동에서 나온다.


좀 지난 책 같지만, 아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자로서 우리나라가 지닌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는데, 가끔 이런 책을 읽으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런 말을 한다. 문제는 명확히 지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을 이야기해 달라는 사람이 많다고. 방법? 있다. 그런데 구체적이지 않다. 사회의 문제다.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이 정도? 


이러면 안 된다.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내용은 우리 사회는 집단을 중시하면서도 책임은 개인에게 묻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즉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하며 집단주의를 공동체의식과 혼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다는 점. 그래서 집단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집단의 안녕을 해치는 행위를 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


또 이 상황에서는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괜찮아 하면서 집단의 힘 속에 옳고 그름을 묻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남들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공연히 튈 필요없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집단의 움직임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바꿔 내 행동을 합리화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세상은 원래 그래 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니,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해결책은 찾지 않은 상태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으니, 저자는 그 점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다시 인식하게 해줬으니 말이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런 문제 행동을 하는 집단, 사람들과는 반대로,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고... 


자본주의 사회니까, 그들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하면 된다고...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행위 자체로도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그냥 손 놓고 있기보다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고.


물론 집단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함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한다. 그것이 바로 후원이다. 지출의 방향을 바꾸면 되니.


'웃자고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회를 튼튼하게 하는 데 지출하지 않고 사회가 좋아지길 희망하는 건 모순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정치인들을 감시할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주면 결국 사회는 한 단계 성장한다. 내가 발 뻗고 잘 지름길이다' (272-273쪽).


이런 일부터 시작한다면 저자가 말한 '고통의 평준화 정신'(252쪽)으로부터 벋어날 수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야라고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도 힘들테니, 그 힘듦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해야지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삶을 꾸준히 성찰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고통이 평준화 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고통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다들 힘드니까 견뎌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그러니 '고통의 평준화 정신'은 사라져야 한다. 고통은 평준화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일상으로 만든다. 고통의 일상화는 사람들을 집단 속에 가두게 된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니 라는 말로.


하야 이 책은 이러한 '고통의 평준화 정신'을 버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일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이 말부터 해야겠다. 그건 아닙니다라는 말부터. 이렇게 하면 좋겠습니다라는 말도 할 수 있는 그런. 집단주의와 공동체주의를 혼동하지 않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뭉뚱그리지 않고 그렇게... 하나도 괜찮지 않은 세상에서 괜찮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15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 자주 하는데...^^;;
읽고 보니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할 순간이 많았네요.

kinye91 2022-08-15 10:43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에요.
 
짱깨주의의 탄생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보리 인문학 3
김희교 지음 / 보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짱깨주의의 탄생]이라니. 짱깨라는 말이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 비하하는 말로 쓰이는데, 책 제목에 짱개라는 말과 이념을 뜻하는 주의가 합쳐졌다. 그런데 이 말이 과연 긍정적으로 쓰일까?


짱깨주의라는 말은 중국을 대할 때 흔히 지니는 선입견을 말한다. 편견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한 나라를, 또는 그 나라 사람을 비하하는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유사인종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본을 쪽바리라고 하고, 중국을 짱깨 또는 짱꼴라라고 하는 말을 흔히 하는데, 같은 동아시아에 속한 나라들인데 이상하게도 좋은 감정으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일본이야 우리나라를 식민지배 했던 나라이고, 또 제대로 된 사과도 변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다치더라도, (그렇더라도 제국주의 일본과 일본국민은 구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일본과 지금 일본도 구분해야 하고. 다만,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것은 반드시 따져보아야 한다)


중국은 왜 그럴까? 예전에 사대를 했기 때문에, 또는 한국전쟁 당시 적대국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등 다양한 요소가 많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국은 우리보다 못하다는 깔보는 마음이 그런 말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중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 대한 마음까지 더해져 그런 관점을 강화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러한 짱깨주의에 대해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런 관점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석하고, 앞으로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짱깨주의 프레임을 네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유사인종주의, 신식민주의체제 옹호, 자본의 문제를 중국의 문제로, 신냉전체제 구축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을 유통시키는 매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 언론에 나타난 중국의 모습을 분석하고 있다.


긍정보다는 부정이 많은 보도들, 이런 관점에는 우리나라에서 진보냐 보수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다들 비슷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짱깨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과 교류를 단절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고, 중국과 미국이 경쟁을 하는 시대에, 중간 지대에 있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최근에 중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고, 중국과 교류하기보다는 미국 쪽에 확실히 서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왜 그런 태도가 문제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미 세상은 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다극체제, 또는 다자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와 무역을 하는 나라로 어느 나라와만 단절할 수 없다. 게다가 중국은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이지 않은가.


그러니 현명한 대처를 해야 한다. 현명한 대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처지에서 중국과 미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한다. 미국의 관점에서, 또는 서구의 관점에서 중국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현재 처지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결국 외교와 무역이란 우리가 손해보려고 하는 활동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관계를 맺는 활동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한다. 짱깨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짱깨주의가 이미 왜곡된 틀이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나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두터운 이 책은 중국에 관해서 너무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중국에 대해서 그간 지녀왔던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 대한 편향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중국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중국도 문제는 있다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우로 한참 굽은 것을 중간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좌로 더 굽혀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서술이기도 하다.


양비론을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짱깨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중국이 지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이야기해주고, 그런 점을 포함한 중국과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에 대한 주장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 사이에 놓여 있다. 그들만의 경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그들의 경쟁에 어떻게든 관련이 되어 있으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때 '짱깨주의'로 표방되는 중국 무시 또는 중국 배제 정책이 우리에게 실효성이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데는 이 책이 도움이 된다.


우리의 처지에서 중국을, 미국을, 또는 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혹 중국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든다면 혹시 나에게도 짱깨주의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중국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온 2022-08-0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맘에 안든다. ˝글로벌 오랑캐의 탄생˝이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