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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린다는 것'
드러냄은 꽃의 일이다. 꽃은 그래야 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자신만의 색이나 한껏 멋부린 모양을 내고 독특한 향기를 발하며 자신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야 매개체가 와서 나와 너를 이어준다.

이 드러냄은 받아들림이 전재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애를 써서 드러냈지만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받아들여 공감하고 공유코자하는 열린 마음일 때 드러냄이 빛을 발하게 된다.

드러내고 받아들임의 과정에 과대포장이나 축소, 은폐, 왜곡, 오해 등이 있다면 역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다. 이는 상호 간에 혼란과 무기력함, 상대에 대한 원망만 키워 원하지 않은 결과를 만든다. 

드러냄과 받아들임의 과정을 통한 감정과 의지의 상호작용은 관계의 질적변화를 불러온다. 이 질적변화는 순방향으로만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의 원활한 소통이 필요하다. 드러내고 받아들임은 이렇게 상호작용이 순조롭게 이뤄져야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도 알리라. 드러내고 받아들임의 이 숭고한 과정에 함께 있었기에 오늘도 산 너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을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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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로움과 동행한다는 것"
꽃을 보는 마음들은 알까? 화려하게만 보이는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깃들어야 하는지를ᆢ.

꽃에 주목하는 이유야 명확하다. 모든 생명들의 절정의 순간을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꽃피고 열매맺기까지 들여야하는 수고로움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다.

힘들게 언땅을 뚫고 나와서도 눈보라, 비바람에 혹은 강렬한볕에 마르지 않을까 하는 노심초사에 꽃을 피우고서도 벌나비 날아들지 않아 열매맺지 못할까 염려하는 그 모든 수고로움을 짐작이나 할지 모르겠다.

사람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각기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 온 독립된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를 형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어야 하는지를 망각하고 그 결과에만 주목한다.

결과에만 주목한다는 것은 과정에서 겪는 수고로움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가치를 과소평가하여 조그마한 일에도 좌절하는 자신을 합리화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계의 형성은 때론 긴 호흡이 필요하며 문득문득 침입하는 가슴시린 아픔 마져도 묵묵히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맺는거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 모든 과정은 수고로움을 견뎌내는 소극적 기다림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때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대에게 가는길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나에게 주어진 수고로움을 기꺼이 받아안고 순간순간 행복한 과정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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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로 가는 길'

달에 꿈을 심었다. 바다 위 저 달에 내 꿈인 그대가 있다. 그 달에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하고 바다를 건너려면 배가 있어야 한다. 반야용선, 나를 달에게 데려다줄 배다. 달에게 나를 데려다줄 배의 돛은 이 모양일거다.


하지만, 달에게로 가는 길을 모르기에 달을 내 가슴에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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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한다는 것'
막연한 꿈이었다. 가능할거란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심장은 뭐라도 해야한다고 자꾸 부추킨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 무엇에 주목해야 가능해지는 걸까?

그 중심을 '간절함'으로 보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 역시 그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 간절함을 이루는 길은 '정성'에 있다. 지극정성의 그 정성이다. 하여, 정성이 조금씩 쌓였는지 닿지 못할거라 짐작했던 것이 어느 사이 희미하게나마 산 너머의 하늘빛으로 나타났다.

이제, '귀한 사람 정성으로' 라면 이루지 못할 것 없다고 확신한다. 시공간의 제약도 방해못하는 감통感通에 심통心通을 확인하며 어느덧 눈빛에 깃든 마음까지 본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질적변화한 그날 그 새벽의 바다에 다시 섰다. 같은시간 같은 바다 위지만 그날과 또다른 심장박동이 감동으로 온다. '그대 여기까지 잘 왔다'고 눈부신 빛으로 감싸는 새벽 빛이 가슴 깊숙히 박힌다.

오늘 이곳 바다 위에 굳건하게 설 수 있었던 의지처는 '중용 23장'에서 찾았다. 정조대왕에 주목했던 영화 '역린'에서 왕 정조는 상책의 입을 빌려 중용 23장을 대신들 앞에서 설파한다. 왕의 입이 아닌 상책의 입이였기에 그 울림은 더 깊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베어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것이다." (중용 23장)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기차는 치곡이니 곡능유성이니 성칙형하고 형칙저하고 저칙명하고 명칙동하고 동칙변하고 변칙화니 유천하성성이야 위능화니라.

변화의 힘은 정성이었다. 간절함이 이루고자한 그 것으로 가는 여정의 안내자가 정성이었다. 다시 그날 그바다 위에 선 오늘 그 정성을 의지삼아 여기까지 멈추지 않았듯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걸을 것이다. 하나의 심장이니 그 심장 멈추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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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9-28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간절한 마음 끝에 매달리는 정성은 저 달처럼 빛이 나기에 다른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걸까요?
또르르 굴러내릴 것 같은 달이 이슬방울처럼 매달려있는 풍경이 좋습니다.
 

'마주본다는 것'
가능한일일까? 사람과 사람이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 그 사람을 통째로 알아버리는 일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걸까?

감정을 담지 않고 존재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은 객관적인 해법에 대입하면 답을 얻고 만다. 감정은 완고하고 수시로 변하기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이미 벽을 두르고 상대를 대하는 모든 행위는 그래서 애초에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ㅈ출발한 경우와 같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공정하지도 않고 또한 벽을 두른자의 일벙적 감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라는 벽을향해 돌진하는 것은 그것이라도 해야만할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절박함은 때론 기적을 만들어 왔음을 알기에 그 기적에 의지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해를 마주보는 것은 여전히 버거운 일중 하나다. 그렇더라도 마주보지 않으면 일생을. 한번 볼까 말까하는 명장면을 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나, 그대를 마주보고자 함은 이렇게 간절함 보테 기적이라도 불러오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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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9-2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광이 매력적인 이유는 덧입혀진 색을 버리고 편견없이 윤곽으로 다가오는 대상 때문이죠. 해를 바라보는 지 주변을 바라보는 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화면 가득 아름다운 장면이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마주본다는 건. . 용기를 필요로 하는 멋진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바라보는 대상과 그 주변을 통째로 안고자 하는 마음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