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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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
IMF 구제 금융이라는 상황을 겪으며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소비풍조의 쇄신과 개인적 차원의 절약생활이나 국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금모으기 국민운동을 대대적으로 벌리기도 했다. 그 와중에 제도적인 모순이나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일상의 커다란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 수 없이 많았다. 한 순간 일자리에서 쫓겨나 생활의 근거지를 잃기도 했으며 소중한 가정이 파탄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양산된 것이 노숙자라는 사람들이다. 연일 중앙방송에서는 그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고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무료 급식소가 생겨났다.

IMF 구제 금융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다만 변했다면 그때처럼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한발 나아가 상대적인 소외감이 훨씬 크리라 짐작해본다. 이기주의,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 가난이란 죄악처럼 느껴진다.

세계 대공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1920~30년대 유럽의 중심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의 상황도 우리의 IMF 상화에 못지않은 혼란의 시기였던 모양이다. 당시 파리와 런던에서 부랑자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을 쓴 조지 오엘의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도 우리의 그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동물농장]으로 친숙한 조지 오엘의 첫 소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밑바닥 생활을 직접 체험한 자전적 이야기라는 호기심이 더 강하다. 에릭 아서 블레어라는 본명 대신 조지 오엘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 그는 어린 시절 상류층 아이들과 계급적 차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의 식민지 버마에서의 경찰 생활은 이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 한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주인공 ‘나’가 가난과 없음의 상징인 뒷골목 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악취와 벌레가 오히려 친숙한 여인숙 잠자리는 그나마 행복한 고민일 정도로 극도의 빈곤을 체험하고 있다. 동전 한 잎 없어 먹지도 못하고, 그나마 혹독한 고통이 수반되는 일자리마저 구하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곳 뒷골목 역시 같은 처지를 이용하여 배신하거나 빼앗으려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서로의 고통과 어려움을 나눠가며 따스한 마음을 보이는 사람도 분명 있다. 1부 2부에 공통적으로 주인공과 함께 하는 친구가 있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뒷골목 생활에 적응해서 그 속에 안주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삶의 방법을 찾기도 하고 또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무대만 다를 뿐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주인공을 통해 직접 뒷골목에서 생활하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러한 상황을 전달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이 세세하게 그려지지만 슬픔이나 외로움 등 뒷골목 생활자의 절절하게 심정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저자의 관조적인 글쓰기에 요인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조지 오엘은 작가를 지망하는 중산층인 자신의 존재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구세군에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이것이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를 비롯한 사회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면서 그 책임 전가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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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 시선 시인선 50
황시은 지음 / 시선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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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어떤 이도 못 말리는 일방통해
언젠가부터 인지 부럽기만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일상에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 사람의 가슴이 부러울 뿐이다. 그 사람은 바로 시인이라는 사람이다. 같은 시간,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 사람에게서 표현되는 느낌은 다르다.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보이게 하는 것일까? 내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렇더라도 모든 시인에게 부러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시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 부러움은 사라지고 이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

[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는 새롭게 만나는 황시은 시인의 시집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어떨까? 일상의 사소한 사건이나 물건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 보인다. 시인의 무엇이 그토록 가슴에 남는 울림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일까?

4부 60여 편에 달하는 시인의 작품이 담긴 [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에는 우리 내 어머니와 누이의 그리움이 잔잔한 물결로 흐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무심하지 않는 사람의 일상이 있으며 늘 상 시인과 함께하는 시간의 흐름이 간혹 멈춰서는 지점에 닿아 있는 여인의 속내가 보인다. 그 멈춰선 지점은 시인에게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모티브가 존재하기에 누구나 잠시 머뭇거리게 하고 있다. 바로 그 머뭇거림이 있기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따스한 마음과 그리움이 머물 수 있는지도 보금자리가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모두 시詩네요'

우리 내 삶 중에 시 아닌 것이 있을까 싶다. 시라는 문학 장르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잠시 시선을 붙잡는 무엇 하나라도 마음에 울림을 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시라는 것이다. 봄 새싹이 돋는 것, 지나가는 아가씨의 옷차림, 생선장수의 삶의 외침, 가슴에 묻은 어머님의 깊은 속내 심지어 오빠의 병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詩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 황시은의 눈이 머물고 마음이 깊든 그 모든 것이 시라는 느낌이다. 

'봄
어떤 이도 못 말리는 일방통해'

깊은 겨울의 움츠렸던 기운을 힘으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봄에 대한 이만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굳이 여인내의 가슴이 아니라도 터트리는 꽃망울, 바람결에 전해지는 꽃내음에 취할 수 있는 가슴이라면 아무도 못 말리는 일방통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봄은 그렇게 다가오기에 시인은 봄이면 입덧을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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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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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떤 작가의 작품은 첫 장부터 호기심으로 함께하는 동안 내내 깊은 공감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읽어가는 동안 도무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흐름 파악에도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일단 읽던 책장을 덮고 한순 돌릴 수밖에 없다. 호흡을 더 느리게 가져가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절차를 가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을]은 그렇게 낯설게 다가왔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고 있는 신예작가 박솔뫼의 [을]은 제목에서부터 알지 못하는 벽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단지 ‘젊은 작가의 새로운 시도라 그럴 것이다’라는 위안을 삼아보지만 쉽지 않다. 전통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인간의 관계와 소통에 대한 현 시대를 흐르는 새로운 문제제기가 그렇게 낯설게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을]은 막연하게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이 머물 순간도 없이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출발한다. 다섯 젊은이 을, 민주, 프레니, 주이, 씨안은 어떤 이국의 장기 투숙자를 위한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다. 을은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민주는 을의 열 살이나 어린 유일한 친구다. 프레니와 주이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 이곳에 머물고 있는 사촌지간이면서 연인이다. 씨안 역시 여행자 신분으로 이 호텔의 하우스키퍼로 일하며 일상을 보낸다. 을과 민주, 프레니와 주이 둘 사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개입하기도 하면서 관계의 변화를 이끌어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심리적 상태를 대표할 수 있는 말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홀로 독립적인 존재 상태로 살 수 없기에 관계와 소통의 중요성이 날로 대두되는 사회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그 전통적인 인간의 관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본다. 을에 등장하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로 그러한 인간의 관계가 보인다. 이것이 국적도, 성별도, 인종도, 직업도, 인생의 목표도 중요하지 않은 다섯 남녀의 일상이 스냅사진이 한 장 한 장 흘러가듯 무심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데나 갈 수 있잖아”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살아온 시간의 흐름에서 특정한 부분을 잘라 낯선 곳으로 옮겨 놓는다면 이 소설과 같을까? 자신을 둘러싼 갖가지 조건에 의해 규정받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린 삶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가지게 만들고 있다. 1+1의 둘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에 새로운 +1이 등장함으로써 틀어지는 소통을 통해 이것을 감당해야할 각자들의 심리적 상황은 작가가 주목하는 사람간의 소통에 대한 문제 제기라 생각된다. ‘국적도, 성별도, 인종도, 직업도, 인생의 목표도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은 그 상황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2와 3 사이의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해 오히려 관계와 소통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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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짠
노희정 지음 / 책나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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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나에게는 로망
아는 화가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반겨주는 술자리가 시작되고 딱 ‘한잔’ 만 마시는 나를 두고 어의 없어하던 모습에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술꾼들이 말하는 주도를 모른다지만 너무도 모른다는 핀잔이 날아온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날 이후 ‘술 한 잔’이 나의 로망이 되었다. 술이라고 하면 종류에 불문하고 똑 같은 반응을 보이는 내 몸을 어쩌지 못하기에 ‘나도 술 한 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속에는 내 가슴에 담긴 사람과 소통하고자 하는 기대감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을 스스로 알기에 ‘벗’으로 사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여지없이 나오는 탄식이다.

하지만, 술을 못 마신다고 술자리의 여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술자리에 가장 늦게까지 어울리는 것은 그 속에 녹아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소중한 시간을 함께 누리면서 못 마시는 안타까움을 더해갔다.

술이 주는 여유롭고 넉넉한 장점으로 인해 술에 대한 찬사는 시대를 불문하고 있었다. 사람 수 만큼이나 종류도 많고 그 술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도 많다. 우리에게 술은 언제나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늘 사람들의 사귐 속에 존재하며 그들의 깊은 속마음을 달래주며 사람들 곁에 함께 했다. 술에 담긴 것, 바로 사람들의 따스한 삶이었다.

나에게는 로망인 이 술이 주는 혜택을 톡톡하게 누리는 사람이 있다. 시인 노희정이 그 사람이다. [술짠]은 술 예찬에 삶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는 저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뻐서 한 장, 성나서 한 잔, 슬퍼서 한 잔, 즐거워서 한 잔. 바로 술과 사람의 사귐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희노애락에 각 열 잔씩 마흔 잔에 달하는 술자리가 담겨 있다.

저자 노희정의 [술짠]에는 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청춘이 있고, 가족의 애달픔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며, 애처가 남편이 있고, 술로 인해 생기는 삶의 여유와 아픔이 함께 있고, 시와 사람들의 따스하고 깊은 속내가 있다. 저자는 이 모두를 품에 안은 것이 바로 술이라며 술에 대한 열정을 보인다. 

‘황진이 이래로 술을 다룰 줄 아는 가장 강력한 여전사!’라고 추천사를 쓴 허시명 작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술은 이렇게 마셔야 하는가 보다.

술은 안주와 함께 있어야 한다. 안주는 때에 따라 허기진 속을 채우기도 하고 술을 마시는 핑개 거리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안주는 술자리에 함께 있는 ‘그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의 속 깊은 마음이 가장 좋은 안주가 아닐까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갇혀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수 있는 소통의 매개 ‘술 한 잔’이 그리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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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 여자, 당신이 기다려 온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 1
노엘라 (Noella) 지음 / 나무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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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과 음악 사이, 사랑의 다리를 놓다
대금을 손에 잡은 지 2년, 아직 발걸음도 때지 못한 수준이지만 어느 순간 ‘아~ 그래 이 소리다’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불고 또 불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때 마음에 와 닿았던 그 느낌과 순간적인 전율이 있어 어렵기만 한 대금을 다시 손에 들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은 가슴 속에 품은 바가 있기 때문이오. 음악이라는 것은 가운데 맺힌 바가 있어 밖으로 새는 것을 말한다. 잘 우는 것을 가려 뽑아 그것을 빌려 울게 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송나라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였던 문학가 및 사상가 한유라는 사람이 악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여덟 가지 재료 팔음을 두고 이른 말이다. 창작하는 예술가의 마음 깊은 울림이 있어야 비로소 예술일수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소리든 예술이라는 영역에 포함되는 그 어떤 것이든 다 사람이 창작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 창작자의 내면이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속 깊은 울림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 것, 그것이 예술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요소로 인해 창작을 하는 예술가와 그 예술품을 감상하는 관객 사이에 소통이 이뤄지고 비로소 공감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은 예술가와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그 순간을 잡아내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과 음악, 어떻게 보면 전혀 다른 영역 같지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감정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저자 노엘라는 남다른 눈으로 이 점을 잘 활용하여 그림과 음악사이 보이지 않은 끈을 이어주고 있다.

저자 노엘라의 가슴 깊은 공감에 의해 선택된 그림과 음악, 화가와 음악가들은 우리 눈과 귀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모네와 드뷔시, 실레와 베르크, 들라크루아와 베를리오즈, 모로 와 바그너, 클림트와 시마노프스키, 칼로와 뒤 프레, 미켈란젤로와 데 프레, 뭉크와 쇤베르크, 발라동와 말러 등 40여 명에 달하는 활동했던 시대를 불문하고 예술가들의 작품과 그 작품들 사이에 소통되는 공감대를 찾아 보여주고 들려준다. 저자는 그 소통의 기준을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으로 선택한다. 바로 ‘사랑’이라는 지고지순한 감정 말이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이 음악을 듣고 얻는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고, 둘 사이에는 오히려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장벽을 허물려는 강한 파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로 닮아있다. 바로 처음 보는 남녀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 그 소중한 감정을 공유하며 또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일련의 시간처럼 말이다. 저자는 음악과 그림 사이 공존하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저자 자신을 삶을 이입시키고 있다. 외롭고 힘들었던 유학생활 그리고 사랑을 하는 동안 자신의 얻은 희열, 열정, 배신, 질투, 불안, 고독, 그리움 등의 솔직한 속내를 그대로 내 보이고 있다.

이 책은 고독, 외로움, 갈망, 그리움 그리고 사랑 등의 감정을 다스려가는 성찰의 길의 한 순간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지친 영혼과 마음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음악과 그림이 공존하지만 나에게 이 책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음악에 있어서는 저자의 감성만큼 공감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부록으로 저자가 이야기 하는 음악이 함께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저자 노엘라는 젊다. 그래서 삶과 사랑의 가능성에 대단히 열정적이다. 그 속에는 ‘내가 알고 있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해보는 것, 그것으로부터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잠재해 있다. 예술가로, 삶을 영위하는 한 인간으로, 세상을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여성으로 사랑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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