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유고 - 조선 중기의 명재상 양파 정태화 문집
정태화 지음, 박세욱 외 옮김, 이장우 감수 / 연암서가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중기 재상 양파 정태화
시대를 불문하고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스승과 제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스승은 자신의 뜻을 잘 펼 수 있는 방향성을 잡아 올바른 길을 가는 지침을 얻기 위해서 일 것이고 제자를 잘 두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일구어 온 업적을 후대에 남기며 빛을 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리라 생각된다. 스승에서 자신 그리고 제자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그 분야의 성과가 오롯이 남겨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당대를 당차게 살았던 사람들이나 조용히 초야에 묻혀 오직 자신의 학문의 성취를 이뤄가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 중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 사람의 흔적이 기록물로 남아 있거나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서만 알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잊혀져간 사람과 그들의 업적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안타까움마저 일어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지만 잘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난다. 수 백 년이 지난 오늘 그 사람의 문집 [양파유고]를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는 사람 정태화다. 안동김씨와 동래정씨가 명문집안으로 실세를 보였던 시기 정씨집안에서 태어난 양파 정태화는 조선시대 선조 때 태어나 인조, 효종, 현종 대를 거치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살았다. 그것도 평범한 삶이 아니라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으로 20여년을 지낸 사람이다. 인조 때 최명길에 의해 인정받기 시작한 후 병자호란을 거쳐 조정에서 능력을 인정 받았으며 이후 접반사로 봉직하며 민감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효조의 북벌정책에 호응하였으며 송시열과 송준길 등을 정계로 이끌기도 했다. 자식을 효종의 딸과 혼인시켜 왕족과의 사이가 더욱 긴밀하게 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대, 당색에 의해 목숨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던 시대를 권력의 핵심부에서 오랫동안 재상을 역임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 사람이다. 저서로는 포사일기, 서행기, 음빙록, 기해일기 등이 있다.

[양파유고]는 바로 양파 정태화의 문집을 번역한 책이다. 권력의 핵심부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문인들과 교류하며 나눈 시문과 임금의 부름에 답하는 상소문, 일상적인 삶을 기록한 글을 비롯하여 연행록, 접반사, 기해일기 등 다양한 글들을 담고 있다. 1권부터 6권까지는 주로 자신의 창작시, 답시, 만시 등 시문을 기록하고 7권과 8권은 상소문을 모았다. 주로 사직에 관련된 상소문이 주류를 이룬다. 9권은 제문이나 발, 표전 등을 수록하고 10권은 포사일기로 각화사에 있던 사고를 살펴보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11권은 기해일기로 효종이 승하한날부터 국상을 준비하고 치루는 전체 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2권은 원접사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 송별하는 과정을 기록한 서행기다. 13권과 14권은 중국을 다녀온 기록으로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다. 15권은 사직 상소를 허락하지 않은 답글과 어찰을 기록하였다. 부록으로 김석주의 글을 비롯하여 임금의 교서 등이 수록되어 있다.

1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고 익숙하지 않은 한문본을 번역한 글이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권력의 실세로 살며 22년이나 재상을 지낸 사람의 글이라고는 하지만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스러운 마음,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묻어나는 사직상소문, 문인들과 나눈 시문 등에 담긴 지극히 개인적인 글들이 있어 딱딱하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국가 중요행사나 개인적인 교류에서 사람들이 시문을 짓고 나누는 모습이 생소하지만 또한 부러움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학문에 대한 공부가 부럽다는 것이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효종의 죽음으로 시작된 예송논쟁,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중요한 때 청에 대한 북벌론 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보는 것이다. 목숨이 달린 혼란스러운 시대를 당파에 메이지 않고 나름대로 처세한 정태화의 모습이 보이는 듯싶다. 11권의 기해일기 또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모시던 임금이 죽음과 그 후 처리과정을 날짜별로 상세한 기록을 처음 접하는 나로서는 대단히 흥미로웠다. 지난해 전직 대통령의 죽음과 그 후 장례절차를 보며 왕의 나라에서 왕의 죽음과 관련 된 복잡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또한 13권과 14권에 수록된 중국 방문에 대한 기록이다. 힘들고 거친 일정을 다녀온 사람의 마음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후대 사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생각하며 읽어가는 맛이 좋았다.

방대한 분량을 한권으로 옮겨 놓는다는 점의 어려움이 있지만 본문과 주석의 구분이 별 차이가 없어 처음 책을 읽어가는 동안 어려움이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의 경우 주석이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겠지만 본문보다 작은 글씨로 눈에 들어오게 편집이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사족을 보텐다. 그만큼 그 부분에 아쉬움이 있다는 말이다.

황희 정승하면 누구나 알지만 그와 버금갈 정도로 오랜 기간 정승을 지낸 사람 정태화는 낯설기만 하다. 무엇이 이렇게 달리 보이게 만들었을까? 역사적 인물을 후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계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사람이 살았던 당시 삶을 비롯하여 다시 그 사람을 보게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다. 한사람의 삶은 개인적인 것 뿐 아니라 당시를 사는 시대정신이 함께 들어있기에 한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문집을 오늘에 되살려 내는 노력이 세삼 소중한 일임을 알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치는 여자 - 푸른 파도 위에서 부르는 사랑 노래
김상옥 지음 / 창해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북춤으로 이어지는 사람의 마음
가끔 바다에 간다. 일부러 바다를 보기위해 가기도 하지만 바다와 마주선 순간은 늘 먹먹한 기분이다. 바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없이 다 받아주고 있다. 싫든 좋든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태생이 그렇다. 하여 넓고 깊은 품에 세상을 말없이 받아들이다가도 때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격정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한때 바다의 그러한 넉넉한 품이 그리워 마주선 바다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깊고 깊은 그 속에 담겨져 있을 말없는 슬픔을 감내하는 바다의 깊은 마음을...

[북 치는 여자]는 바로 진도북춤의 근원지인 진도가 무대이고 그 진도북춤을 추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김상옥이라는 작가의 신작 소설인데 작가의 대표작이로 할 [하얀 기억 속의 너] 이후 한 여자의 너무 슬퍼 차라리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적 문화유산과 섬사람들의 질박한 삶이 잘 이어져 오는 진도의 부잣집 외동딸 은서와 한 5년 전 진도 땅에 자리 잡은 작가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갯바위 낚시에서 보기 드는 대물을 낚았지만 다시 바다로 놓아주는 은서의 행동에 관심을 보인 하윤은 그 여자의 행방을 찾아 수소문 하지만 여의치 못하고 국립진도국악원 공연장에서 진도북춤을 추는 사람이 찾았던 그 여자임을 알고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은서라는 여자와 직접적인 대면 없이 주변 사람들의 머뭇거림 속에서 들은 이야기는 그녀의 파란 만장한 이야기를 짐작하게 한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은서는 북춤에 매료되어 국악을 전공하게 되고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외국 공연단에 뽑혀 미국공연을 하던 도중 아버지의 사고소식을 듣고 귀국, 어머니와 아버지의 간병을 지극정성으로 하지만 두 분 모두 돌아가시고 만다. 부모를 잃은 슬픔도 잠시 아버지의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고 뒷수습을 하면서 범인을 잡으려는 은서의 행동은 계속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범인은 죽었지만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이후 다시 진도북춤을 추면서 생활하지만 그 충격은 내내 가슴속에 자리 잡아 삶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하윤과 은서의 만남은 다시 낚시로 이어진다. 갯바위 낚시에서 풍랑에 휩쓸린 은서를 구하면서 본격적인 대면을 하게 되는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삶을 누르고 있는 무게로 인해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은서는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삶의 무게를 고백을 통해 하윤에게 털어 놓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마음을 터놓은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지만 각기 다른 길을 떠난다.

자전적 소설을 쓴다는 작가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 여기저기 등장하여 굳이 전작 [하얀 기억 속의 너]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어떤 사람이든 가슴속 묻어둔 이야기 하나쯤은 있겠지만 작가의 경험은 상식을 넘어서는 애절함이 있다. 다소 무겁고 어두운 내용이지만 읽어가는 속도를 멈출 수 없게 하는 흡입력이 있는 글 솜씨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만큼 단숨에 읽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여운을 깊고도 길게 이어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구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가족, 배신, 사랑의 모습이 주인공들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아 있고, 진도 사람들과 진도 북춤이 보여주는 내면의 모습과 은근히 이어지고 있다. 바다, 낚시, 섬 그리고 북춤을 매개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당당하고 숙연하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북장단에 넋을 놓고 진도 북춤을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국립진도국악원의 마당에서 바라본 바다의 전경도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진도북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병천 선생님의 사후 진도 북춤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많다고 한다.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누구나 갈망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그 모습과 형태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사랑, 하윤의 경험이나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 주부의 경험이든 은서가 바라는 사랑이든 이 모두 모범 정답은 아닐 것이다. 누구든 자신 만이 개척하고 누려나가야 할 삶의 굴레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키워드 한국문화 3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작을 넘어서는 구운몽을 읽는 방법
특정한 사물이나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다양한 경로가 있다.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이야기에 대한 정확한 접근으로 이끄는 낱말이나 키워드를 찾기가 수월치 않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안다고 할 때 어떤 기준을 스스로 세워 판단하게 될까? 사전의 해석이나 검색을 통해 접근하다 보면 다분히 자의적인 근거에 의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나도 알고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얼마나 근거 없는 추측인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게 한 것이 바로 [구운몽도]라는 책을 통해서다. 우선 구운몽이라는 소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아는 것이 몇 가지 단편적인 단어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쑥스러워 실없이 웃어본다.

[구운몽도]는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아닌 그림으로 표현되어진 바를 통해 이야기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구운몽에 접근하는 특이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이 책 이야기 중심인 구운몽에 대해 알아보자.

구운몽은 조선 선조 때 사람 서포 김만중이 유배간 곳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소설이다. 성진이라는 불제자가 8선녀를 희롱한 죄로 성진을 포함한 8선녀 모두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업보를 받고 양소유와 8명의 여자로 태어난다. 양소유는 속세의 삶을 통해 8명의 여자와 처와 첩으로 만나 원하는 바를 다 이루며 살지만 말년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고 불법에 귀의하였다는 이야기다. 양소유와 8명의 여자가 만나는 과정의 에피소드를 주요 줄거리로 한다.

[구운몽도]는 이런 구운몽의 줄거리 중 특정한 장면을 나타내는 그림, 즉 저자가 본 30여장에 이르는 구운몽도를 통해 구운몽이 제시하는 주제와 구운몽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는 사상적 배경을 비롯하여 비슷한 주제를 보여주는 그림들과 비교분석을 통해 소설 구운몽에 대한 자세한 접근을 하고 있다. 구운몽도가 그려지게 되었던 배경뿐 아니라 구운몽이 가지는 미학적 의미까지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 책 [구운몽도]에서 제시하는 주요장면으로는 성진과 8선녀가 돌다리에서 만나는 모습, 인간 세상에 양소유로 다시 태어나 진채봉을 만나는 장면, 낙양 기생 계섬월을 만나는 장면, 여장하고 정경패를 만나는 장면을 비롯하여 자객 심요연을 만나는 장면, 남해용왕의 딸 백능파를 만나는 장면, 난양공주와 정경패의 칠보시 장면, 낙유원에서 기예를 겨루는 장면, 육관대사가 찾아오는 장면, 꿈에서 깨어나 불법에 귀의하는 장면 등 8명의 여자들을 차례로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 많지 않다고 본 저자는 그림은 종이 위의 이야기라고 하며 그림 읽기를 통해 구운몽도를 차분하게 살펴본 내용을 담고 있다. 구운몽을 그린 그림들은 각각의 장면을 똑 같은 모습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고 그린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표현방법을 쓰고 있지만 내용이 제시하는 방향성은 다 비슷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본다. 사용의 용도에 맞게 병풍이든 민화풍의 그림이든 구운몽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은 꿈속의 세상과 현실세계가 중첩되게 나타나고 있는 소설의 이야기를 반영하며 환상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구운몽은 결국 남녀 간의 사랑이 중심이면서 서로 속고 속이는 이야기의 흐름이지만 그 속이는 것에 악의가 배재되어 있어 흥미와 재미를 준다고 파악하며, 익히 알려진 구운몽의 중심사상인 인생무상이라는 무거운 텍스트로만 읽지 않고 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옛 선인들의 삶이 보여주는 활달함과 자유 그리고 낭만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구운몽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 직한 당대의 그림과 이야기를 함께 살펴봄으로써 구운몽과 구운몽도가 갖는 가치와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또한 키워드 속 키워드는 구운몽도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자료와 그 근거들을 비롯하여 당시 구운몽과 관련되어 있었던 이야기를 다양하게 알 수 있어 책 속의 또 한권의 책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특정한 사물이나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찾아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확인하는 키워드 한국 문화는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찾아가는 계기로 작용하기에 환영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홍주의보
엠마 마젠타 글.그림, 김경주 옮김 / 써네스트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홍빛 아지랑이가 피어 난다
사람이 색깔에 담을 수 있는 감정은 가시적인 색깔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따스하고 온화하며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색깔이 있다. 바로 분홍색이다. 너무 짙어 경계를 넘어서는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옅어서 못 알아보는 것도 아닌 딱 그만큼의 색이 아닐까 한다. 진한 빨강색은 너무 과도한 감정의 노출로 인해 불안하지만 분홍은 그 경계에서 봄날 아지랑이 같은 설레임을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사람이 지금 자신의 감정 상태를 색으로 표현 한다면 주로 어떤 종류 색감이 될까? 봄날 청춘들의 마음엔 분명 분홍색이 스며들며 조금씩 물들어가지 않을까?

[분홍주의보]는 바로 이렇게 처음 사랑의 감정을 조심스럽지만 소중하게 가슴에 담아가는 사람과 그 시기를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초록 대문에 살며 태어나서 한 번도 말을 해보지 못한 벙어리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고백이다. 그 고백은 봄날 피어나는 아지랑이에서 여름 창가로 드는 햇살로 가을날 발등에 머물다가 겨울 온기 가득한 침대로 들어온다. 세상의 중심이 나에서 둘로 바뀌는 시기가 바로 분홍주의보가 발하는 시점이다.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으며 온 몸으로 느끼는 이상야릇한 스멀거림일 수도 있는 그 감정은 꿈꾸듯이 내게로 오며 세상을 바꿔놓는다.

이 작품은 한편의 시이기도 하고 성장 드라마며 동화로도 볼 수 있다. 분홍주의보가 발하며 생기는 몸의 변화와 마음에 머무는 시간이 달콤함만을 전해주진 않는다. 눈사람과 초콜릿이 소리 없이 녹듯이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잠 못드는 긴 밤의 뒤척임이 있다.

이 책 [분홍주의보]는 지금 분홍주의보가 발하는 시점에 있는 청춘인 사람은 스며드는 감정을 조심스럽게 햇살에 꺼내 보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고, 여름 한창 피어나는 마음에 즐거워하는 사람은 처음 마음을 돌아보게 하며, 가을처럼 온갖 색깔로 떨어지는 낙엽으로 시름에 젖어드는 사람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지나간 그리움이 있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사람은 그 성장통을 온몸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이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하지만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나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옛사랑을 추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금 봄날 아지랑이를 피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여 다시금 꿈속에서 고래를 찾을 수 있고 높다란 사다리를 올라 먼 바다를 바라볼 희망을 찾게 한다.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사랑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어설프게 보이는 그림도 글의 구성도 책에 전해주는 색감도 모두 사랑이다. 안으로만 감추려드는 사랑의 감정을 삶에게 그대로 보여줄 용기를 얻게 하는 힘이 있다.

역자 김경주의 말대로 ‘천천히 사랑이 밀려오는 어떤 무렵...’에 잠시 발걸음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로 삼기에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소한 발견 - 사라져가는 모든 사물에 대한 미소
장현웅.장희엽 글.사진 / 나무수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나와 시간을 공유한 물건들
문득 낯설어 보이거나 전혀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날마다 다니는 길이거나 익숙한 책상 또는 차안 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왜일까? 그때그때 달라지는 감정에 의해 늘 대하는 사물도 달리 다가오는 것이랑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한다. 한때 너무도 소중한 물건이어서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가 이내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시간이 흐린 뒤 발견하게 되어 마냥 기뿐 그런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늘 함께 있어 일부러 주의를 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사소한 발견]은 바로 그런 물건들에 대한 저자의 마음을 담았다. 사진을 전공한 형제간에 함께 공유했던 물건도 있고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한때는 소중했지만 이제 그 존재의 의미가 더 이상 없는 그렇고 그런 물건들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물건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단추, 선인장, 탁상달력, 안경, 냉장고, 필름, 가위, 클립, 낡은 운동화, 알약, 지우개, 뽁뽁이, 노트 등 60가지에 달하는 이러한 물건에 얽힌 저자의 지극히 사소한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서 더 좋은 사소한 발견은 지나온 시간이나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공유한다.

이 책 [사소한 발견]은 먼저 이 물건들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실어 놓았다. 하나하나 읽어 보면 아~ 이런 뜻이 있었구나 하고 의미가 새롭게 다가서는 물건도 있다. 60여 가지에 달하는 사소한 물건들의 이야기를 네 가지 테마로 분류해서 담았다. 일상의 사물에서 비일상을 꿈꾼다에는 단추를 시작으로 지구본, 냉장고, 옷걸이, 안경, 칫솔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두 번째 따스한 시선으로 본 추억의 몽타주에는 어린시절 추억과 관련된 물건들로 선풍기, 레코드, 흑백사진, 모기향, 아버지구두, 연필 등이다. 세 번째 아날로그의 냄새와 감촉이 좋다에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며 점점 잊혀져 가는 물건들로 깡통로봇, 양초, 전화기, 뽁뽁이, 성냔, 노트 등이 담겨있다. 네 번째 삶과 느림에 대한 소소한 발견에는 알약, 손목시계, 압정, 구둣솔, 돋보기, 자물쇠 등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들이지만 나 역시 공유하는 추억이 있다. 그중에서 유독 마음에 남는 것은 흑백사진이다. 부모님이 거주하는 집에 들러 옛날 사진을 보던 중 막 결혼하고 찍은 젊디젊은 부모님을 보았다. 내가 커가는 것은 알지만 부모님이 그와 함께 늙어 간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때 새롭게 다가선 사진 한 장이다. 그 옆에 나란히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내 돌 사진으로 윗옷만 입고 빙그레 웃고 있는 그 사진을 핸드폰으로 옮겨와 가끔 보곤 한다.

이렇듯 이 책 [사소한 발견]은 잊어버린 시간을 돌려주기도 하고, 친구를 생각나게 하고, 슬픈 기억에 잠시 젖어들게도 하는 물건들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 획기적인 편집 스타일에 여백의 미를 살린 넉넉함 속에 담긴 사진 하나하나도 정겹게 다가서는 책이다. 굳이 필요 없는 물건들의 사전적 의미를 첫머리에 실어놓은 의도를 책장 마지막을 넘기며 알 것 같다. 시간을 함께 하며 나와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 온 물건들이기에 사전적 의미와는 다른 감성이 담긴다는 것을 암시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 주변을 돌아보며 나와 함께 소중한 시간을 공유해 온 물건들에게 눈을 돌려볼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