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동아리에서 2021년 현대미술 책 읽기를 시작했다. 텍스트는 발칙한 현대미술사. 저자 윌 곰퍼츠는 영국 테이트 갤러리 관장을 역임한 아트 디렉터이자, 예술전문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현대미술의 역사를 재미있게 전달한다.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생동감 넘치게 글을 썼다.


인상주의 또는 후기 인상주의부터 시작하는 다른 책들과 달리, 그는 뒤샹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유명한 소변기가 미국 독립미술가협회에 출품된 계기와 배경과 반응들을 다루고 있다. 인상파로부터 시작해서 입체파와 미래파, 개념미술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흔적을 남긴 뒤샹은 개념미술의 큰 분기점을 마련한 예술가이다. 과거의 주류 예술이 고집하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예술을 찾아나서는 현대예술의 중심에 있는, 뒤샹을 첫머리에 둔 것은 의미가 있다.


2장부터는 다시 인상주의로 시작하여 후기 인상주의로, 원근법과 형태를 무시하고 주관적인 색채를 사용한 세잔으로, 세잔으로부터 마티스의 야수파로, 브라크· 피카소와 입체파로, 다시 미래파로 역사를 이어간다. 그리고 현재(2008)의 미술로 마치고 있다. 주의(~ism)가 생겨난 사건과 화가들의 우정와 경쟁, 당대 화상들, 전시회 등의 에피소드를 쉽고 흥미 있게 전달하고 있다. 주의할 점은 가끔 영국식 유머에 입 꼬리가 올라간다는 것, 아쉬운 점은 도판이 많지 않아서 찾아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쉽고 재미있는 설명 때문에 인터넷이나 다른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그렇게 수고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함께 병행해서 읽은 책이 여러 권이다.


먼저 전영백의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현대미술사의 큰 획을 긋는 전시와 화파(~ism)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부제처럼 이즘을 만든 전시의 역사를 공부하게 된다. 19세기 프랑스 앙데팡당살롱 도톤으로부터 베를린 분리파 춘계전, 국제 다다 페어, 유명한 현대미술관들 MoMaTate 등의 전시와 정기출판물도 소개되고 있다. 전시회 사진과 당시 전시회에서 화제를 일으킨 작품들과 도록들, 기사들을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의 역사를 전시라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긴요한 책이다.

 

“1913년에 개최된 아모리쇼이전에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소개한 곳이 ‘291갤러리.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는 1905년에서 1971년까지 뉴욕 5번가 291번지에 갤러리를 운영하였다. 그는 291 갤러리에서 중요한 모던차트 전시를 기획하여 마티스, 세잔, 피카소, 뒤샹 등 유럽 작가들의 전시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했다. 대표적으로 1908로댕을 시작으로 하여 1908년과 1912년에 마티스, 1911세잔, 1912년과 1914년에 피카소그리고 1915년 브랑쿠시를 개최하였다.……

그는 아모리쇼의 전시를 위해서도 미술품을 빌려주는 등 이 역사적 전시가 개최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249p, 알프레드 스티글리와 291갤러리,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 전영백)

 

다음으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중인상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체계 있는 미술사 공부를 위해 필요하다. 깊이 있는 미학적인 설명과 그림을 읽는 사유가 추가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위의 책들과 겹치는 내용들도 있지만 동시대의 경향과 철학, 전망, 과거의 미술이 미친 영향도 설명하고 있다. 도판도 충실하게 담겨 있어서 진지하게 공부하기에는 적합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어렵지만 진중권의 현대 미학강의도 병행한다면 더 진지해질 수 있다.^^ 가끔 나는 왜 이렇게까지 파고 있나 자신에게 의아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병인가 하여하던대로 한다.

 

아직 조금밖에 읽지 못했지만 조주연의 현대미술 강의도 읽고 있다. 말 그대로 강의다. 공부하는 학생들의 개론서로 쓰일법한 구성이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중 현대미술에 해당하는 3(인상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 한권으로 읽는 방법도 좋을 듯하다.

 

현대미술은 화가의 주관적인 형태와 색채를 표현함으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세잔이라고 한다. 고갱과 야수파, 입체파에 영향을 준 거장 세잔을 읽기 위해 전영백의 세잔의 사과를 읽고 있다. 세잔의 작품을 읽는 사상가들의 통찰을 담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멜랑콜리, 프로이트의 성, 바타유의 에로티즘, 들뢰즈, 라캉, 메를로퐁티, 베르그송이 각각 읽어낸 세잔을 설명하고 있다. 항상 경험하지만 한 작품에 담긴 많은 의미들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목록의 책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은 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지는 않지만 대표적인 한 작품을 부분으로 나눠서, 디테일하게 작업과정과 색채 형태의 의미들을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나타난 세잔의 영향과 원시주의, 그리고 아직은 미미하지만 입체주의의 태동을 설명하고 있다. 분석해서 보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어서 감상보다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공부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정말 왜 샀나 싶은 책은 현대미술 글쓰기. 예술을 전공하거나 예술 분야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안내서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미술관련 책에 대한 서평을 쓸 때 항상 느끼는 언어와 표현의 결핍을 보완해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샀다. 정말 욕심이었다는 생각이다. 대략 살펴보니 아트라이팅뿐 아니라, 비평을 읽을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모두 병행해서 함께 진도를 나가고 있다. 전공자도 아니고 종사자도 아닌데 미술책을 사들이고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좋아서!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최근에 추가한 뱅크시도 있다. 아마도 <아트 오브 뱅크시>에 맞춰 기획된 책인 듯하다.


내가 발표할 챕터는 이렇게 정리한다. 오래 걸리긴 하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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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31 11:4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미술사 동아리 멋지네요 보람되어 보입니다.
한 해 마무리하며 뿌듯하시겠어요.
제게도 세잔의 사과는 정말 매력적인 오브제입니다. 저 책 담아가요. 그레이스 님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

그레이스 2021-12-31 10:49   좋아요 6 | URL
예 두고 두고 읽어야할 책입니다^^
프레이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장정 2021-12-31 10: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책들을 정리. 발표 ☆☆👍 대단하십니다. 미술은 어려워요. 뒤에 혹시 이번에 받으신 일력.... 그레이스님. 새해 🙆 복 마니마니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1-12-31 11:01   좋아요 6 | URL
예 이번에 받은 알라딘 선물 맞아요.
최애 컬러라고 딸이 가져갔다가 딱히 쓸일이 없는지 다시 돌려준 ㅎㅎ
대장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ini74 2021-12-31 11:0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레이스님 넘 부러운 분 ㅎㅎ저랑 겹치는 책이 많아서 더 좋아요 ~~ 진중권책 표지가 바뀌었군요. 그래이스님 글 읽으며 참 좋았어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님 *^^*

그레이스 2021-12-31 11:07   좋아요 6 | URL
진중권 책 개정판 나오면서 하드커버에 표지 비닐까지 ... 예술적인 느낌 ! 보기도 편하고요.
아무래도 전에 곰브리치 공부할때 샀던 <진중권 서양미술사 고전예술>도 바꿔야할듯요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니님~

scott 2021-12-31 11:56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깊이 있는 독서에 감탄과 존경!
보르헤스가 말한 [책으로 만들어진 우주]
그 우주속 작은 별이 그레이스님 서재인것 같습니다.
새해 기쁜 일만 가득 🐯

그레이스 2021-12-31 11:59   좋아요 6 | URL
부끄럽습니다;;;
감사해요. 스콧님!
날씨는 추운데 후끈합니다~^^
스콧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새파랑 2021-12-31 12:5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미술사 동아리 멋지네요. 미술하면 이제 그레이스님과 미니님 인가요? ^^ 제가 미술에 취약하지만 이렇게 글로 보니 읽고싶어지네요~!! 저렇게 발표도 하시니 왠지 논문 쓰는 기분일거 같아요 😆

그레이스 2021-12-31 13:29   좋아요 5 | URL
저 말고도 회원분들이 텍스트 한권만 읽고 정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열심히 해야해요^^
새파랑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미미 2021-12-31 12:5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렇게 깊이 파고파고 하시는 모습 언제나 존경해요!!!<발칙한 현대미술사>다시담으면서 진중권의 <현대미술강의>도 챙겨갑니다. 미술사와 신화는 그레이스님과 미니님덕에 항상 욕심이 있습니다. 비문학 관련서를 읽다보면 꼭 해내야할 숙제같기도 하고요.발표하실 자료사진 아름답네요^^*

그레이스 2021-12-31 13:21   좋아요 6 | URL
미미님한테 칭찬 받으니 넘 좋은데요?^^
<현대미학강의> 말씀하시는거죠?;;

미미 2021-12-31 13:25   좋아요 6 | URL
pc에서 보고 그 책인줄 알고 잘못담았네요!😅

그레이스 2021-12-31 13:26   좋아요 6 | URL
새해 인사 잊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미미 2021-12-31 13:27   좋아요 6 | URL
그레이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1-12-31 13:04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와, 그레이스님!
미술에 대해 이렇게 깊이 들어가셔서 책읽기 하시니 글의 향기에 늘 예술이 묻어나오는군요^^
감탄&존경**
언젠가 미술입문 길잡이가 되어 주십시오 ㅎㅎ
올 한해도 수고 많으셨어요
내년에도 건강하고 즐겁게 서재 활동 같이 해요
새헤 복 많이 받으세요♡♡
전 지금 친정 가는 중입니다^^

그레이스 2021-12-31 13:25   좋아요 8 | URL
KTX로 가시겠죠?
오랜시간 읽을 책도 챙기셨을테구요~
잘 다녀오세요.
어머님도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페넬로페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거서 2021-12-31 13: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미술 관련 책들도 찾아서 읽고 싶었는데 앞으로 저한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레이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1-12-31 13:56   좋아요 3 | URL
제가 감사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얄라알라 2021-12-31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관련 분야, 전문인들의 스터디 모임이신가봐요. 마지막 사진의, 발제문 이미지를 보니, 그 자체가 짧은 에세이나 완결형 기사의 퀄리티로 보여요...

‘이것도 병인가 하여’라고 하셨는데,
이런 ‘축복받은 병‘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고, 없죠. 그레이스님은 타고나신 거 같아요. 참 멋지십니다!

그레이스 2021-12-31 16:30   좋아요 2 | URL
그냥 일반 사람들 모임인데 전공자 한분 계시고 저처럼 혼자 미술책 읽기에는 많은 의지가 필요한 분들이 모여서 읽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님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얄라알라 2021-12-31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술사 수업 들을 때, 세상에서 젤 멋진 직업 중 하나가 미술사연구가겠구나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찾았던 공간(건축물, 박물관, 미술관...) 십년 이상 텀을 두고 찾고 또 찾고 기록 업데이트하고, 좋아하는 일 하면서 여행도 하고 사람들과 나누고^^ 그레이스님 페이퍼 보니, 옛날 수업 들을 때 사두었던 두꺼운 미술사 책들을 다시 건드려보고 싶어지네요^^

그레이스 2021-12-31 16:31   좋아요 1 | URL
미술사 수업들으셨다니 제가 몸둘바를...
종종 와서 가르쳐주세요~♡

나뭇잎처럼 2021-12-31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파는 게 병이라고 하셨는데 좋은 병이죠. 하고 나면 막 몸이 좋아지는 병. ㅎㅎ 동지를 만난 거 같아 반갑네요. 많이 알려주세요^^

그레이스 2021-12-31 20:32   좋아요 0 | URL
나뭇잎처럼님도 그러시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1-12-31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관련 책들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현대미술은 더 낯선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엔 더 좋은 일들 함께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1-12-31 22:1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 🌞 🐯

희선 2022-01-01 0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술사 동아리라니 멋지네요 그런 공부를 하시니 미술을 잘 아시는군요 좋아서 하는 게 가장 좋지요 발표도 하시는군요 발표할 걸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보람 있겠습니다 앞으로도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러블리땡 2022-01-01 0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진짜 많은 책을 정리하셨네요 대단하세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건강하세요🙂😀😁

그레이스 2022-01-01 09:4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2-01-01 08: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올 한 해 목표하신 계획 많이 이루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레이스 2022-01-01 09:41   좋아요 3 | URL
감사드려요
겨울호랑이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2-01-01 18: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2022년 임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고,
가정과 하시는 일에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2-01-01 21:35   좋아요 3 | URL
예~
서니데이님도 건강하시고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래요

페크pek0501 2022-01-02 21: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대미술 시리즈~~ 멋집니다. 저도 이런 독서를 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림에 관심이 있어서 저는 화가들의 생애가 나오는 책들을 재밌게 읽었었죠.

그레이스 2022-01-02 21:36   좋아요 4 | URL
감사해요~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 있으면 조금 수월하게 되요^^
페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서괭 2022-01-09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미술사라니..! 전 미술 진짜 모르는데, 지금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 읽고 있거든요.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2022-01-09 23:13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 시작할때는 그랬어요
오래 읽고 감상하다보니..^^
예술가들을 조금 이해할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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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블랙웰스 섬을 지날 때, 백인 기사가 모는 리무진이 우리 곁을 지나갔다. 차 안에는 세련된 흑인 셋, 즉 흑인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거만하게,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우리를 향해 달걀노른자 같은 눈동자를 굴렸고, 나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 위대한 개츠비피츠제랄드

 

1925년, 피츠제랄드의 소설에 표현된 이미지즘이다.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뉴욕의 풍경을 바라보는 한 백인의 감상이다. 탁월한 유미주의로 읽혀지지만 리무진에 탄 그들 흑인들을 우스꽝스럽게 보고 있는 동일자의 사유가 보인다. 패싱1929년에 쓰여진 것이니 동시대의 작품이다.

 

패싱은 주로 어떤 구성원을 특정한 범주로 생각하거나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유색인종의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혈통을 감추고 백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소설 중 브라이언이 말하듯 흑인사회의 사람들은 패싱을 비난하면서도 용납하고,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고, 극도로 멀리하면서도 눈감아준다.

 

아이린의 피부색은 어둡지 않다.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시카고 드레이튼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에서 아직 흑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장소가 있던 시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흑인인 것이나, 심지어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이 드레이튼 측에서 취하리라 예상되는, 제아무리 정중하고 세련된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랬다.”(23p)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선의 주인공은 오래전 뉴욕 할렘에서 함께 자란 클레어다. 잠시 백인 행세를 하던 아이린은 백인사회의 일원이 된 하얀 피부의 클레어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인종을 감추고 백인과 결혼해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2년 후 클레어는 아이린을 찾아온다. 남편의 눈을 피해 뉴욕에서 파티에 참석하고 그들과 교제한다.

 

아이린의 눈에 어렸을 적 클레어는 모질고,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15p) 그녀는 항상 위험의 극단에 서있다. 타인의 감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천성적으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다. 아이린은 클레어와 연관되면 자신은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느낀다.”(71p) 클레어의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아이린으로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63p) 아이린은 클레어가 불편하고 피하고 싶으나 그녀를 만나면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그런 자신이 싫다. 그렇게 클레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아이린은 클레어 켄트리에 대해 의구심과 죄책감을 갖게 되고 그것들은 커져간다. 클레어를 초대한 댄스 파티는 아이린의 삶에 흔적을 남기게 될 중요한 시점이 된다. 클레어는 아이린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고 아이린 부부의 가라앉아 있던 불안한 요소들을 떠오르게 한다. 클레어가 자신의 삶으로 퇴장할 때 마다 브라이언은 불행과 불안에 휩싸이고, 자기 안으로 깊숙이 틀어박히고, 아이린은 그의 상태에 대해 무력감을 경험한다. 집에서 열리는 티파티에서 클레어를 바라보는 브라이언의 복잡한 시선을 깨닫고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남편이 아내가 흑인임을 알게 되거나, 클레어가 병에 걸려 죽는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조용히 부르짖었다. 인종 때문에 겪는 고통이 아니더라도 여자로서, 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느냐고,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부당했다.”(133p)

 

아이린의 존재 안에는 이미 여러 개의 경계가 새겨져 있다. 클레어의 내면에 침투한 동일자는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 가장하게 한다. 아이린의 경우 배제를 겪고 있다. 인종과 성과 관련된 권력으로부터. 경계의 철학자 푸코에 의하면 동일자가 타자를 배제하고 추방하는 지식 권력은 신체에 새겨지는 생체권력(bio-pouvoir)으로 작용한다. 클레어와 아이린 모두 양상은 다르지만 그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

 

브라이언과의 갈등을 오래된 것으로 여기려는 아이린의 생각은 무력감만 더한다. 할렘가의 흑인사회와 미국의 인종주의에 환멸을 느낀 브라이언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고 싶어 했으나 아이린은 뉴욕에서의 삶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녀는 남편의 상실을 메꿔주기 위한 그녀의 모든 노력, 모든 수고로움, 그녀의 방법이 최선임을 증명하기 위한 그 모든 조용한 노력들, 그를 위한 모든 헌신, 드러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덧없어진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아이들 남편에게 닥칠 일들을 떠올리며 불안해한다. 그 불안은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경계와 배제와 관련된 존재의 불안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노력이 덧없게 느껴지고 실제로 덧없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상상이 현실로 나타날 때, 그것이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상상일 때, 그 상상의 주체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추락한 클레어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 아이린은 안타깝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클레어의 팔에 손을 댄 장면 이후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에, 그녀의 혼란스러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을 모호함으로 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클레어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린의 불안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클레어의 죽음은 아이린의 상상 속에서 이미 여러 번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죽음에 안도한다. 클레어는 아이린이 지키려는 가정, 남편, 아이들을 무너뜨리는 존재였으니까. 아이린이 감사의 흐느낌이 밀고 올라오는 걸 막으려 했다”(156p)는 극단적 감정 상태는 추방당하고 감금된 타자의 몸부림이라는 생각이다.

 

하얀 흑인, 그것은 배제와 억압 속에서 타자들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동일자의 가치척도를 내면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자는 이처럼 자신이 핍박한 타자들의 피부, 타자들의 내면에까지 침투한다.”

(342p 철학자와 굴뚝청소부,2003년판, 이진경)

 

우리에게 경계가 많아질 때 그것은 언젠가 나를 배제하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이미 우리는 많은 경계를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 경계들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타자로 배제되는 경험을 한다. 혹시 배제된 경계 안으로 잠시 외로운 패싱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경계가 사라지게 되면 패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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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9 00:1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감사의 흐느낌,,,,
다인종 다문화 시대에도 경계를 구분짓는
피부색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인 것 같습니다.

갯츠비 올려주신 문장 영화 속에서 스치듯 별 생각 없이 봤는데 패싱 작품과 영상을 보고 나니 달리 보이네요 ^ㅅ^

그레이스 2021-12-29 07:05   좋아요 6 | URL
다인종 다문화 시대인데 그 경계는 더 높아지는 듯 해요
저는 이 시대 뉴욕하면 개츠비와 바틀비의 월스트리트가 생각나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1-12-29 02: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경계가 사라질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차별하거나 다르게 보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사람은 그런 걸 쉽게 하기도 하네요 자신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보이고 싶어하기도 하는군요 있는 그대로가 가장 좋다고 하지만...


희선

그레이스 2021-12-29 07:12   좋아요 5 | URL
또다른 경계가 생기겠죠
그 시대 사회를 장악하는 지식권력에 따라 경계는 생길테죠. 따라서 경계 허물기 담론은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희선님 항상 감사합니다.

mini74 2021-12-29 08:01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읽으며 예전 남과 북이란 미드에서 흑인과 백인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하얀피부로 백인으로 자란 여주인공이 생각났어요 진짜 엄마는 유모로, 혹여 밝혀질까 두려워하던. 하얀 흑인 이란 말이 참 슬프네요. 경계허물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그래이스님 글에 공감합니다 ~~

그레이스 2021-12-29 14:40   좋아요 7 | URL
저는 왜 이렇게 대댓글 달때 실수를 할까요?
아차 하고 다시 수정하려고 하니 이미 좋아요 누르심. ㅎㅎ

scott 2021-12-29 11:27   좋아요 3 | URL
저도! 눌렀습니다 좋아요! 🖐

미니님 그 드라마 혹쉬!
리처드 아미티지가 나왔던 북과 남!??


그레이스 2021-12-29 08:4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드라마 봤어요
그때만해도 굉장히 놀랍게 보였는데.
자꾸 읽고 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죠?
경계허물기는 예술부터 ^^
공감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29 08:5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경계가 사라지는 날이 오겠죠? 미국사회 뿐만아니라 우리나라도 이런 경계가 많은것 같아요. 사람대 사람으로만 서로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레이스 2021-12-29 09:12   좋아요 6 | URL
새파랑님 글 보니 경계를 걷어낸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서니데이 2021-12-30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회마다 서로 다른 차별과 차이가 있겠지요. 그게 좋지 않은 것들이어도 달라지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레이스님, 날씨가 다시 차가워졌습니다.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12-30 23:27   좋아요 2 | URL
예!~오랜시간 걸려왔고, 걸리겠죠
이제 2021년도 하루 남았네요
Happy new year! 서니데이님~!

Breeze 2021-12-31 09: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경계도 많죠.
그 경계가 사라지는 날이 올까요? 의문이긴 합니다.
그레이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레이스 2021-12-31 09:43   좋아요 1 | URL
예~
브리즈님~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생겨나고 하겠죠.
Happy New Year!
브리즈님

페크pek0501 2022-01-02 2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 중 브라이언이 말하듯 흑인사회의 사람들은 ‘패싱’을 비난하면서도 용납하고,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고, 극도로 멀리하면서도 눈감아준다.˝ - 인간의 이중성이 느껴지네요.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라는 소설에서도 이런 게 많이 포착됩니다. 본래의 인간과 보여지는 인간의 차이를 느끼게 되면서 저 자신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

그레이스 2022-01-02 21:32   좋아요 2 | URL
케이크와 맥주 얼른 봐야겠어요;;
사놓고 아직 못 읽었거든요^^

독서괭 2022-01-09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엇 저도 이 책 읽고 개츠비가 생각나서 리뷰에 써야지 생각만 하고 못 쓰고 있었는데! 이제야 이 리뷰를 봤네요. <패싱> 참 인상적인 소설이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01-09 23:15   좋아요 1 | URL
같은 생각이셨다니 반갑네요
예~ 제게도 오래 기억될 작품인듯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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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우골리노와 아들들>의 조각상, 이 소설을 장악하고 있는 이미지다. 왜 주인공 루시는 이 조각상에 마음이 붙들려 있었던 것일까? 처음 이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 하고 속으로 외쳤다.”(103p) 13세기 이탈리아, 권력싸움 끝에 아들들과 함께 탑에 갇힌 우골리노와 아들들은 굶어 죽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아들들이 자신들을 먹어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다.(이 이야기는 각색된 것으로 그의 시체에서는 육식의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루시는 그 조각을 보기 위해 몇 번이나 그 미술관을 일부러 찾아갔다.

<Ugolino and His Sons>, Jean-Baptiste Carpeaux(French, 1872-1875), 대리석, 1865-1867


두 번째 이미지는 병실 창밖 밤이면 환한 불빛이 기하학적으로 밝혀지는 크라이슬러 빌딩의 풍경”(9p)이다. 병실을 찾아온 어머니와 4일 동안 병실에서 기억의 아픈 파편들과 대비를 이룬다. 가난한 유년 시절에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화려한 세상, 자신에게 꽂히던 사람들의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을 상징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지독한 가난, “너희 식구들한테서는 냄새가 나”(18p)하고 달아나던 아이들, 배고픔, 방임과 체벌, 유기와 폭력의 기억들과 겉도는 대화의 대조는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따금 예고 없이, 부모님이 충동적으로 사정없이 우리를 때리기도 했는데때리는 사람은 대체로 엄마였고, 대체로 아빠가 보는 데서였다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푸르죽죽한 피부와 침울한 태도를 보고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19p)

 

고립되고 지적 성장에 있어 자극과 도움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예절, 말의 뉘앙스, 눈초리의 의미들에 대해 스스로 터득해 갈 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일에 무지했었다. 시간이 흐른 뒤 길을 걷다 떠오른 기억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음과 자신의 유년이 얼마나 어두웠는가를 깨닫는 순간의 묘사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역설적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 차는 순간들이예기치 않게찾아오기도 한다. 그 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21p)

 

사람들도 이런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통과해나가겠지만 그들은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타인을 잘 알지 못하고, 삶은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는 그녀의 생각이 슬프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조차 알지 못했던 소녀가 유년의 루시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의 고통스런 기억으로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도 가둬두었다. 그녀가 갇혀 있곤 했던 트럭에서의 기억은 모호하고 희미하지만 존재의 그림자로 남아있어 순간순간 두려움으로 튀어 나온다. 그녀의 기억 속의 집은 갇힘, 돌아가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운 장소였다.

 

추수감사절이라 집에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생활이 꿈일까봐 두려웠고, 눈을 뜨면 다시 이 집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안 돼. 그 생각을 한참 하다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35p)

 

외로움은 루시가 맛본 인생의 첫 인상이었고, 그것은 숨어 있다가 존재를 일깨워주곤 했다. 그런 그녀는 나는 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았어요”(98p)라고 한 블랑시 뒤부아의 대사를 기억한다. 그 대사처럼 그녀는 사람들의 친절에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린다. 헤일리 선생님, 제러미, 몰라, 세라 페인, 그리고 매일 병실을 찾아오는 친절한 의사.

 

우연히 만났던 소설가 세라 페인의 워크숍에서 참여하고, 세라페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루시를 격려한다. 그것은 학대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이고 전쟁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124p)라고 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흔들리지 말고 쓰라고 한다. 그러나 세라 페인의 글 역시 뭔가를 피해 빗겨 서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게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기 어렵다. 작가 엘리베스 스트라우스 자신의 고백이기도 하다.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204p)바로 이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냉혹함이다.

 

<우골리노와 아들들> 조각을 바라보던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도 알고 있겠구나하고 그 조각가 말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103p) 라고. 무엇을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

 

딸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못하는 엄마, 과거에 딸에게 했던 잘못을 입에 올리지 조차 못하는 엄마는 지인들의 실패한 결혼과 불행에 대해서만 이야기 한다. 겉도는 이야기 속에서 엄마의 진심은 무엇일까? 엄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 딸에게 제발 가달라는 애원을 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조각가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것일까?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며, 입을 찢고 있는 우골리노의 고통을! 조각을 바라보는 은밀한 순간 그녀가 조각상에서 얻은 사실은 우린 모두 불쌍한 인간”(104p)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상처를 갖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상투적일까? 하지만 누구나 상처를 갖고 있다. 치유 되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족으로부터 전혀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던 그녀가 의지한 것은 오히려 낯선 사람들의 친절이었다. 루시의 치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냉혹한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냉정함이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이제 병실 창밖의 크라이슬러 빌딩의 불빛처럼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당당할 수 있다.

자신을 가두었던 기억들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은 고백한다.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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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8 00: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루시의 마음이 느껴져서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배움의 발견이란 책 속 주인공과 닮았단 생각도 했었지요. 문장들 다 좋지만 특히 마지막 두 문장 넘 와닿습니다 그레이스님 ~~

그레이스 2021-12-28 00:31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문장들이 아름다워서 더 슬프구요ㅠ

scott 2021-12-28 00: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 상처 받은 인간 ㅠ.ㅠ
루시 바턴 작가님의 자전적 스토리!
그레이스님 리뷰는 언제나 내게 감동을 ^ㅅ^

그레이스 2021-12-28 00:46   좋아요 4 | URL
자려고 하다가 댓글 달아요.^^
감사해요 ~~♡

새파랑 2021-12-28 06: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전적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상처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 다를 것 같아요.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너무 공감가고 멋진 말이네요~!!

그레이스 2021-12-28 06:57   좋아요 5 | URL

새로운 풍경 속에 있는 그녀의 말에 감동했습니다.
작가는 루시 바턴이기도 하고 세라 페인이기도 한듯요.

다락방 2021-12-28 09: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루시 바턴을 두 번 읽었거든요. 그런데 그레이스 님의 이 리뷰를 보니 완전히 새로운 루시 바턴을 읽은 느낌이에요. 이 리뷰를 읽은 후에 읽는 루시 바턴은 또 새로울 것 같아 다시 루시 바턴을 보고 싶네요. 그러고보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야말로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독한 가난에 대해서 썼지만 그것에 대한 작가 개인적 감정이나 관심은 떨어뜨려 둔 것 같아서요. 아 또 읽고 싶네요, 정말.

그레이스 2021-12-28 10:10   좋아요 3 | URL
다락방님 읽으신 감상을 보고 싶어요
서재에서 찾을 수 있겠죠?
제가 워낙 늦게 읽어서...^
감사합니다 🍊

공쟝쟝 2021-12-31 15:30   좋아요 2 | URL
저도... 동감해요... 제게는 올해의 발견이었던 <루시바턴>
루시바턴에 나오는 이미지들을 이렇게 그레이스님의 소개로 읽으니까, 정말... 감동이네요... ㅜㅜ 그리고 진짜.... 아...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까 싶고, 이렇게 멋지게 독해해내는 이웃이 있어 좋고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12-31 16:28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의 말씀이 더 감사합니다.
몇시간 남지 않은 2021년 책읽기로 마무리하시겠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1-12-28 11: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니 오타와 비문 작렬!
수정하면서, 역시 밤에 쓴 편지는 부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
이런 글을 읽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感謝萬萬입니다. ;;

희선 2021-12-29 0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상처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어릴 때부터 사랑 많이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살면서 다른 사람한테 상처받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걸 마주하면 모든 삶이 감동을 주는군요 그런 걸 느낀다면 좋을 텐데...


희선

그레이스 2021-12-29 19:56   좋아요 3 | URL
직면하는게 쉽지 않으니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겠죠. 저도 쉽지 않은것 같아요. 글을 쓸때 저 자신을 보면.

scott 2022-01-07 17: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 추카!!
탑에 갖힌 우골리노가 용돈을 줌요 ^ㅅ^

그레이스 2022-01-07 18:55   좋아요 3 | URL
굶주린 그에게서?^^ㅋㅋ
감사드려요~

mini74 2022-01-07 17: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이스님 축하축하 ~ 무슨 책 사실지 궁금해요 ㅎㅎ

그레이스 2022-01-07 18:56   좋아요 4 | URL
살 책이야 많죠!
고민해야할듯요 ㅋ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1-07 17: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축하드려요~!! 그레이스님 글은 뭔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어요 ^^

그레이스 2022-01-07 18:54   좋아요 4 | URL
감사해요~^^

미미 2022-01-07 18: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바구니 담았어요~!!당선 축하드려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2-01-07 19:02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물감 2022-01-07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당선 축하해요 ㅎㅎ
기회되면 이 책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당

그레이스 2022-01-07 21:45   좋아요 2 | URL
물감님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1-07 2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전 지금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기 시작했어요.읽고 나면 이 책도 읽어 보려구요^^

그레이스 2022-01-07 21:45   좋아요 2 | URL
예~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2-01-07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그레이스 2022-01-07 21:45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

thkang1001 2022-01-07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1-07 21: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22-01-07 21: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제 리뷰 쓰기 활활 불타실듯요^^

그레이스 2022-01-07 21:4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러블리땡 2022-01-08 0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밤 되세요 ~

그레이스 2022-01-08 09:16   좋아요 2 | URL
감솨합니다
좋은밤이었습니다^^
북플도 못 들여다보고 잤네요~
좋은 주말 되세요~♡

페넬로페 2022-01-08 0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축하드려요.
같은 책 2권의 투혼입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2-01-08 09:1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연말연초에 넘 바빴는데 리뷰 상금주시니 감사하고 ㅎㅎ
책 사들이고 더 바쁠듯요 ㅋㅋ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1-08 09:18   좋아요 3 | URL
아아!
같은책?!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한 권은선물해서 리뷰상금 받았나봐요.~♡

희선 2022-01-08 0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축하합니다 어쩐지 살면서 자신과도 화해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레이스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그레이스 2022-01-08 09:38   좋아요 2 | URL
끝이없죠 ㅠ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잘못하니까...!
감사합니다~~♡

bookholic 2022-01-08 1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2022년 쭉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2-01-08 22: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제 알라딘 서재 글쓴지 1년 됐으니(1년적 쓴 글들 알라딘에서 알려주는데 못읽겠더라구요^^)
새내기는 벗었죠ㅋㅋ
감사합니다~
북홀릭님 2022년도에도 함께 쭉 이어가요~♡

독서괭 2022-01-09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2-01-09 23:15   좋아요 0 | URL
감사드려요 ~♡

하나의책장 2022-01-10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2-01-10 05: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목신의 오후 (앙리 마티스 에디션)
스테판 말라르메 지음, 앙리 마티스 그림, 최윤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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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욕망, 슬픔...을 상징적인 언어로 그려낸 말라르메의 시 위에, 말을 덜어내고 압축하듯 마티스는 색과 선들을 제거하고 에칭한 곡선들로 변주한다. 상징계의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상상계의 이미지를 전하듯 곡선과 곡선이 마주치고 빗겨가며 의미를 생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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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3 1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받으셨군요 그레이스님 *^^* 축하드려요 ~ 상징계와 상상계라 넘 멋진 비윤데요~

그레이스 2021-12-23 12:02   좋아요 1 | URL
^^
받았습니다.
읽어보니 마티스의 그림에 더 눈이 가네요.
잠시 라깡에게 양해를...!^^

바람돌이 2021-12-23 1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자평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느낌요!!!

그레이스 2021-12-23 12:02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ㅎㅎ

scott 2021-12-24 1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행복 가득 !
메리 크리스마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O
  い_cノ (ニニニ)
 c/・・ っ (>∀<* )
 (˝●˝ )___とと )
  ヽ  ⌒、 |二二二|
  しし-し ┻━┻

그레이스 2021-12-24 13:08   좋아요 2 | URL
스콧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 🎅

페크pek0501 2021-12-24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목신의 오후가 있는 시집 읽은 적 있어요. 말라르메 맞아요. 그때 설레며 시집을 펼쳤던 기억이 있어요. 좋은 시간 많이 가지시길 바랍니다. ^^

그레이스 2021-12-24 13:10   좋아요 3 | URL
예~
감사합니다.
페크님도 좋은시간 되시길 바래요
메리 크리스마스 🎄 🎅

서니데이 2021-12-24 2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그림이 마티스 라서 앙리 마티스 에디션인가봅니다.
그레이스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날씨는 많이 춥지만, 가족과 함께 따뜻하고 좋은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레이스 2021-12-24 2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라르메의 시 중에서 마티스가 선집을 만들면서 판화를 넣었어요. 수록된 시 중 목신의 오후를 시집의 제목으로 붙이고..

서니데이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 ~

서니데이 2021-12-25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날씨는 오늘 더 추운 것 같아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그레이스 2021-12-25 21:14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 🎄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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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청원의 대상이 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드라마 여주인공의 이름이 원래 영초였는데 영로로 바뀌게 된 이야기까지. 집에 꽂혀있던 영초언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몰입되었으나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부채의식 같은 감정이 삐죽삐죽 살아나서 불편하고 괴롭기 때문이다.

 

고려대 교육학과 76학번 서명숙은 제주도 출신이다. 4·3을 겪은 변방의 섬에서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이듬해에 서울의 대학에 합격했다. 학교 신문사에 입사한 당시 휴교령이 내려지고 학교 안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사복경찰들이 상주하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검열을 거쳐 수정되고, 대체를 반복하며 스스로 자기검열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보관 건물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던 낯익은 중년 남자의 정체를. 그 남자는 중앙정보부에서 업무 협조차 신문사로 파견 나온 요원이었다. 그 말고도 자주 눈에 띄었던 또다른 중년 남자는 우리 대학 관할인 성북경찰서 정보과 형사였다. 일개 대학신문사 주변이 이럴진대 방송사나 신문사의 검열은 오죽할까 싶었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뉴스들은 과연 얼마나 진실된 것일까?”

(44p)


첫 여성편집국장을 꿈꾸던 그녀는 끊임없는 자기검열을 경험하면서 대학 내의 기득권이자 귀족 집단으로 스스로 타협하고 안주하는 건 아닌지 자문하며야학과 편집국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시점에 천영초라는 선배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본 회퍼의 옥중서신과 시몬 베유의 평전 불꽃의 여자와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받는다. 서명숙은 야학에 투신한다. 영초선배와 함께 살면서 그녀의 따뜻함과 역사의식과 정의감에 젖어갔다. 여자들의 모임이 형성되고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되짚기도 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2의 성을 읽으면서 한국의 여성이 맞닥뜨린 현실을 통탄하기도 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으면서 유신체제를 깨뜨리지 못하는 자신들을 되돌아보기도 했다.”(58p)

 

그들 모두 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경찰간부의 딸, 의사의 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딸, 고단한 삶을 사는 반공주의자 어머니의 딸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모른척 외면하고 살고 싶은 캠퍼스의 사랑을 꿈꾸던 학생들이었다. 그때를 돌이키며 저자는 <오래된 정원>에서 주인공이 딸에게 말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그래, 바보 같았던 거지……

(73p)

그 시절의 그들이 그랬다. 아니, 혼자만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유인물을 팔이 아프도록 인쇄해서 교정에서 뿌리며 독재타도를 외치던 그들은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나고 다시 잡혀가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풀려나와 들려주는 고문이야기는 너무 두렵기만 하다. 영초가 체포되고, 교생실습을 위해 제주에 내려와 있던 서명숙은 서울의 안가로 끌려가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1년의 수감생활을 한다. 유신이 막을 내리고 잠깐의 서울의 봄은 끝이 나고, 광주에서의 비극적인 뉴스를 접하는 영초는 다시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찍어내고 도피와 체포, 수감 생활을 거듭한다. 결혼을 한 후에도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던 영초는 기자로서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서명숙과는 달리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캐나다 이민을 가지만, 행복은 잠깐이고 육체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운동권 출신 소수 인사들의 뒤에 가려진 천영초, 그녀의 남편 정문화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역사를 끌어안고 함께 불행한 삶을 살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출소 후에 서명숙이 회복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겪은 아픔 역시 그들의 가족들의 겪었을 고통을 말해주고 있다.

 

감옥 간 것보다 돌아온 뒤가 더 힘들었저. 감옥은 겅해도 언젠간 나오겠지 하는 희망이라도 있어신디, 정작 돌아와보난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부난. 창도 어멍한티 큰소리는 쳤지만 네가 장차 사람 구실 제대로 헐 건가 걱정했주.” (228p)

 

풀각시 같던 영초언니에게 하는 헌사로 글을 마무리 하며 고대에 글 잘 쓰는 4대 문장가 중의 하나라고 자화자찬하며 웃던 얼굴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선택했고 갔던 그 길에 대한 긍지마저 앗아가지 않기를. 그저 잠시라도 행복했던 시간들만 남기를.

 

드라마와 관련된 논쟁들을 읽으며, 강경하게 방영중단을 외치는 쪽도, 그들을 비난하는 쪽도 아픈 역사를 품은 우리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논쟁이 있는 것 자체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지닌 역사의식, 세계관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그저 소설일 뿐이야, 영화일 뿐이야, 드라마일 뿐이야 라고 한다면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읽을 것이고, 볼 것이기 때문에 의식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작가가 책임질 일이다.

 

제주에 가면 서명숙이 만들었다는 올레 길을 걷고 싶다. 그녀가 고향에 내려가 치유를 경험한 자연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시절 내게 가장 큰 위안을 가져다준 건 고생했다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말없는 자연이었다. 지금은 올레 7코스로 유명한 외돌개 주변의 솔숲은 가장 사랑했던 공간, 오래 머물던 곳이었다.”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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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0 20:4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모진 고문끝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죠 남편분이. 동참하진 못했지만 그 시대룰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 가집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0:45   좋아요 5 | URL

맞아요!

얄라알라 2021-12-20 23:03   좋아요 2 | URL
저는 그레이스님께서 올려주신 리뷰 읽고 바로 ‘서명숙 이사장‘ 검색했습니다. 예전부터 이분의 기사는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읽었지만 이런 역사는 알지도 상상도 못했네요,

감사한 마음 가지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3:08   좋아요 2 | URL
저도 집에 있었어도 안 읽고 있다 우연히 듣고 몇시간만에 읽었어요
서명숙님도 당시 모든 분들도 고초가 대단했다는 생각입니다.
그 위에 현재의 시간이 있구요

scott 2021-12-20 20: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그 올레길 걸어 봤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1-12-20 20:54   좋아요 5 | URL
그러게요
저도...!

미미 2021-12-20 21: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제 kbs에서 오래된 영상을 잠시 봤는데요 전두환씨가 방송국에가서 담배피우며 이야기하고 국장?은 옆에서 쭈그리가되어 굽신굽신하더라구요. 말없는 자연이 위안이 되었다는 말에 올레길이 슬프게 떠오릅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1:35   좋아요 4 | URL
저도 올레길을 서명숙씨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고 새롭게 다가왔어요. 슬프기도 했구요
많은 사람들의 치유의 길이 되는데는 누군가의 경험이 있기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새파랑 2021-12-20 22: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ㅠㅠ 올레길의 명칭 유례도 저런 사연이 있군요. 드라마 관련 논쟁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네요. 관심을 가지고 지켜 봐야 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12-20 22:52   좋아요 5 | URL
미리 시놉시스가 나왔는데 안기부 미화와 운동권 폄훼 내용이 있다고 하네요

희선 2021-12-22 0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이야기 조금 봤는데, 그 드라마인지... 그 글 대충 보기만 했군요 역사왜곡이 있다는 말이 있다는 말과 꼭 그렇지 않다는 말도 있었어요 자신만 잘 살기 어려운 시대였다니, 지금은 정치는 아니지만 코로나19로 그런 시대가 됐네요 예전에 싸운 사람이 있어서 지금 같은 세상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1-12-22 06:3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드라마 역사왜곡 논쟁을 보며, 여전히 건드리면 성이 나는 상처를 확인했습니다

han22598 2021-12-29 04: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마..유시민이 추천해서.. 저 이거..몇 년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 70-80년의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제대로 평가 받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드라마로 나왔나 보네요..

그레이스 2021-12-29 07:19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드라마로 나온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했던 학생들중 간첩이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나봐요
그 주인공 이름이 영초였다가 영로로 바뀌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