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서두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대서양 상공에 기압계상 최저기압이 자리하고 있었다.”로 시작한 묘사는 카메라처럼 대기와 달과 태양계로 상승했다가 다시 하강해서 대기 중의 수증기 장력은 최고치를 나타냈고, 대기 습도는 낮았다고 언급한다. 갑자기 땅으로 쑥 내려와 자동차들의 질주를 실타래 같은 보행자 무리를 앵글에 담는다. 그 이미지 안으로 소리가 삽입된다.

 

한층 강렬한 속도의 선들은 다소 느슨하게 움직이는 보행자 무리를 가로지르는 순간 굵어졌다가, 나중엔 더 빨라지더니 약간의 진동 끝에 다시 고른 리듬을 유지했다. 수많은 소리들이 철선처럼 억센 하나의 소음으로 뒤엉켰다. 그 소음에서 뾰쪽한 끝이 여기저기 튀어나왔고, 소음을 따라 날선 모서리가 길게 이어지다가 다시 평평해졌으며, 소음에서 명확한 소리들이 산산이 부서져 공중으로 흩어졌다. …… 지그시 눈을 감고 이 소음에 귀를 기울이면 지금 자신이 제국 수도이자 황궁이 자리 잡은 빈에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111p)”

 

정말 기가 막힌 표현들이다. 19138월의 빈이라는 시간과 장소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시청각적 묘사들은 처음부터 작가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 작품 전체의 글에 담겨있는 비유와 상징 언어들은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

 

그렇게 작가의 앵글은 자동차 사고를 포착하고 이것을 구경하는 구경꾼들 무리들 중 한 여인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이 사고를 목격하고 그 원인을 제동거리라는 과학적 설명을 해주는 행인1과 그 사고원인을 듣는 행인2(중년여성)의 안도는 과학의 진보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무엇인가 설명 가능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현상을 보여준다. 한편, 이 사고는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1914년의 전쟁을 암시하는 듯 불안하기도 하다.

 

이것이 어쩌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보하는 과학적 사고에 발맞추어 사고하도록 요구받는 특성! ‘특성이란 그가 속한 세계에서 존재가 가져야 할 것으로 요구되는 정체성이나 자질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특성 없음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주인공 울리히는 실제로 특성을 거부하고 가능성 감각을 추구한다. “열린 문을 잘 지나가려면 문에 단단한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123p)” 그의 아버지 노교수의 좌우명은 시대의 특성에 부응하는 현실적 감각을 가진 인간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그에 반하는 것이 가능성 감각이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경계를 넘어 새로움을 추구하고 창조한다. 그는 사회에서 환영받을 천재성과 특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그를 자극한 것이 살인범 모스부르거다. 모스부르거는 사회적 관습, 도덕, 법과 같은 어떤 규범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사람이다. ‘특성없음의 왜곡되고 극단적인 존재다. 울리히의 모스부르거에 대한 관심은 잊혀지지만, 그의 친구인 화가 클라리세는 모스부르거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그녀는 니체의 해를 생각해내고 살인과 초인을 연결시키는데까지 나아간다. 클라리세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이러한 정신은 남편 발터를 지배한다. 발터의 열등의식은 클라리세의 욕망과 결합되어 울리히를 살인하라고 압박하는 꿈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에는 울리히와 연결된 4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보니파티아, 디오티마, 클라리세, 아가테이다

보니파티아는 울리히의 정부이고 가벼운 성적 상대일 뿐이다. 그녀의 도착적 성충동을 관찰하는 울리히의 시선에서 나는 오히려 그녀의 고독을 본다

디오티마는 평행운동의 중심에서 준비 위원회를 모집하고 주도한다. 본명이 에르멜린다 투치인 그녀를 디오티마라 부르는 것에 상징성이 있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에 관한 디오티마의 말을 인용한다. 지혜로운 여인이란 뜻일 테다. 울리히와 사촌관계인 그녀는 상징적 지도자나 공허한 이상주의자로 인식된다. 그녀가 주도한 평행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클라리세는 어릴적 친부에게서 받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녀의 결핍은 니체적 의지에 전도되어 초월욕망으로 변형된다. 그녀의 욕망은 광기를 띈다. 울리히는 그녀에게 이념이란 페티시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모스부르거에 집착하고, 그를 만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아가테는 울리히의 이란성 쌍둥이로 마치 울리히에게 그동안 잊혀져 있던 듯 갑자기 등장한다.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오누이는 재회한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 아래 억눌린 삶을 살았던 그녀는 첫 번째 남편과 사별하고 다시 재혼했다. 그녀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하다. 울리히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고 자유를 찾아 오빠와 함께 살기 위해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다. 울리히의 사상, 책을 통해 영향을 받아 진정한 자유가 주는 삶을 꿈꾸고 실행하지만, 한계에 부딪친다.

이들은 각각 여성으로서 상처를 갖고 있고 억압된 욕망을 발현시키려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지만 모두 실패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을 갖도록 억압당하고, 그것을 거부하기에는 신체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욕망, 허영, 광기, 의지를 마주하면서 울리히의 사유는 변하고 발전한다. 그녀들과의 대화나 관계는 울리히의 사유에 변화를 가져오는 촉매역할을 한다.

 

울리히에게 중요한 사람은 없는 듯하다. 사람들을 대하는 고정된 태도나 사상이 없다. 그러기에 아른하임 앞에서는 디오니소스적이고, 클라리세 앞에서는 아폴론적이다. 이들과의 대화(1권)에서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오버랩된다. 그가 희구하는 사상은 그의 시대 사유를 벗어나는 어떤 것이기에 그런 듯하다. 디오티마와의 이야기 중 다이아몬드에 대한 비유가 힌트를 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 둘 다 다른 환경에서도 그 속성이나 사용가치가 변하지 않음을 들어 인간의 고유함을 설명한다. 그 변하지 않는 고유한 개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특성 없음을 견지하고 가능성 감각을 열어놓는 이유는 이 본래적 특성을 찾기 위함이다.

 

특별히 고향에서 재회한 울리히와 아가테는 대화를 통해 정신적 합일의 순간을 맛본다. 아가테가 묻고 울리히가 답하는 식의 대화는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도덕에서 무엇이 비본질이고 본질인지를 알려면 습관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울리히와 아가테의 대화는 구체적으로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나 도덕의 계보를 연상시킨다. 도덕은 외부로부터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을 지킬 힘 역시 그 내면에 있고, 사회의 도덕적 와해는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는 선악의 문제와 같은 이분법적 논리를 거부하고 해체한다. 이런 해체는 무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시대와 세계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찾기 위한 것이다. 울리히는 그것을 사랑이라 깨닫고 아가테와의 동거를 통해 완벽히 이루려는 꿈을 꾼다. 외부의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자유함 속에서 맛보려했던 천년의 제국이라 이름붙인 그 세계는 종말론적인 빛을 띄고 의미만을 전달한 채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1960년대 해체주의나 현대 철학에 가까운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을 1932년에 썼다는 데 작가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동시대 니체의 사상에서 앞으로 나타날 사상을 전망한 것일까? 그는 철학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산중의 쓰러진 나무나 벤치에 앉아 풀을 뜯어먹는 소떼를 보면서도 한순간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150p,3권)”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울리히는 아가테에게 습관을 벗어나는 순간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어떤 순간적 깨달음의 상태, 혹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체험의 순간이 그들의 대화 중 찾아온다. 그들이 경험한 환영(幻影)”과 대화의 내용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기로 변화하는 변용(Verwandlung)”을 연상시킨다.

 

인내심 많은 정신은 이 모든 무겁기 그지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의 사막을 달려간다. 가득 짐을 실은 채 사막을 달리는 낙타처럼.

하지만 고독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정화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정신은 사자가 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려 하고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자유를 쟁취하고 의무 앞에서도 신성하게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사자가 되어야 한다.…… 정신도 한때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서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은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미혹(迷惑)과 자의(恣意)를 찾아내야 한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해 내려면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탈을 위해 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닌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서는,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35-38p, 민음사)“

 

울리히와의 대화 중 자유를 쟁취하려는 사자가 된 아가테는 빈으로 오고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와 사랑만이 존재하는 천년제국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완벽한 자유보다는 의무가 주어진 삶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칸트가 잠깐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1866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7일 전쟁 이후 통일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1879년 동맹을 맺는다. 1879년 독오동맹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대등한 동맹에서 의존적 동맹으로 그 관계가 이어진다. 그 관계는 경쟁적이지만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통치 아래 있던 발칸반도 슬라브족의 독립요구가 높아지고,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한다.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범게르만민족운동과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면서 긴장상태가 이어졌다. ‘평행운동은 이런 배경에서 추진되었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종교적 권력 하에서 평행운동과 같은 거대 담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모임을 만들고 이끈다. 그러나 평행운동거대 담론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드러내는 소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담론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포섭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 모임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자들조차 소외되고 있다. 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몰락 직전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시대정신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혈통, 민족, 사상을 지지해줄 무리와 모임 속으로 재편된다. 또한 모스브루거와 같이 어떤 담론 어떤 가치로도 포획되지 않는 존재도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의 발산과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경계를 넘지는 못한다. 아가테가 실망하고 교외로 나갔을 때 그녀만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473p,3)”고 깨닫고, 세상은 그녀 없이도 완벽하다고 느낀 소외감은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노라!(475p,3)”라고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는 아가테의 감정은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을까?

 

길거리의 포고문과 광고를 읽는 울리히는 일상적 시민 세계에 대한 허기(313p, 3)”를 그것들로 채우려고 한다. 이 의도에서 울리히가 일상적 시민들과는 이격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벽보판의 내용들은 당시 유럽, 혹은 오스트리아의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 특히 자본주의 정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광고를 보면서 아가테가 느끼는 소외나 불안을 느낄 것이다. 울리히는 도덕의 부재, 삶의 실재성이 가져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을 남긴다. 그야말로 가능성 감각을 갖고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사유다.

 

시대가 요구하는 특성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세계 속의 인간은 평온함을 지켜내기가 어렵다. 철학적 사유와 실천을 견지하며 살아가더라도 급변하는 세계와 그로부터 압박해오는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AI’는 이 시대의 화두이자 여러 담론을 파생시키는 제시어가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전문성을 박탈당하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전문성 뿐 아니라 인간을 규정하던 특성들도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친절, 인내, 관용, 배려와 같은 미덕을 장착한 인공지능이나 휴머노이드가 돌봄이나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교류하게 될 미래를 전망한다. 이 시대는 인간에게 어떤 특성을 요구하게 될까? 그러면 나는 무엇을 거부해야 할까? 그 시대 특성 없음이란 그리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해체는 어디까지 용인하게 될까? 아직 상상이 안 되지만 이상하게 암울해진다.

 

철학적 에세이즘이라고 이름붙일 만큼 철학적 질문들이 제시되는 소설이다. 이 책을 통해 다른 방향에서 본 니체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목적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해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은 독서였다. 하지만 더 확장된 사유를 통해 인간의 본래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고유함은 사랑에 있었다.


* 니체 전집이 있으나 번역도 활자도 읽기가 불편하다. 일단 <비극의 탄생>만 새것으로 나머지는 장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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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2-28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라~~~이렇게 말했다, 는 저의 애독서예요.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죠.^^

그레이스 2025-12-28 10:24   좋아요 0 | URL
저는 애독서까진 아니고 가끔씩 들쳐보게 되는 책이예요.
니체가 현대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페크님 행복한 연말되시고,,, 2026년에도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바래요~~

젤소민아 2025-12-28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하이퍼텍스트 좋아해요~~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12-29 07:12   좋아요 0 | URL
과찬이시네요.~감사합니다.~

독서괭 2025-12-29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특성없는 남자 너무나 어려울 듯 합니다. 저는 더 식견을 넓히고 도전하기로.. ㅠㅠ

그레이스 2025-12-29 16:57   좋아요 1 | URL
저도 일단 저지르고 봤죠.
함께 읽는 동아리 회원들이 있어서,,, 숙제하듯 했습니다.ㅎㅎ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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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한 편지에서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와 같은 작품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1805년 제1차 나폴레옹 전쟁 직전부터 조국 전쟁이라 불리는 1812년의 제 2차 나폴레옹 전쟁을 지나 1820년까지 15년 동안 559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하소설이다. 역사소설, 전쟁소설, 성장소설 등으로 불릴만한 서사가 담겨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를 거론할 만 하다.

 

작가는 유럽 국가들의 대 나폴레옹 동맹과 전쟁의 역사를 서술하고 평가한다. 이 산문 부분에서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보게 된다. 3권에서 제논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가설의 오류를 논증하는 부분은 독특하다. 역사는 인류의 운동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 운동은 무수한 인간들의 의지로부터 흘러나오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연속적인 사건들 가운데 임의로 한 사건만을 떼어 고찰한다 해도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없다.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인간 의지의 총합으로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관찰을 위해 무한소 단위역사의 미분, 즉 인간들의 동질적인 욕구를 가정하고 적분법(이 무한소의 총합을 취하는 것)을 가정할 때만 우리는 역사의 법칙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 있다.(33519p)”

이 작품을 두 번 혹은 여러 번 읽으면 작가의 독특한 역사관에 더 관심을 두고 읽게 된다. 조급한 마음으로는 얼른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다.

 

특별히 작가는 이 소설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나폴레옹이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이 연속되는 인류의 운동에 의해 움직인 인물이다. 그는 애초에 이런 전쟁을 일으킬 욕망이 없었던 인물이라고까지 말한다. 한 인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무수한 인간들의 의지의 총합에 의해 생성된 운동 에너지-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의 흐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개인이 책임을 회피할 명분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적 영웅주의를 부정하고 권력을 부정하는 관()이다.

 

러시아의 제1차 대 나폴레옹 전쟁(1805)이 러시아의 의지와는 다르게 협상(틸지트)으로 끝난 후, 2차 전쟁(1812)의 시작은 개인들의 모욕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국경부근에서 시작된 긴장과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1812624일 나폴레옹은 50만 명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러시아 원정길에 나섰다. 나폴레옹군이 승리할 때는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이 모스크바를 향하도록 진행된다. 보로지노 전투는 사실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치러진 전투였고, 러시아 군 사령관 쿠투조프는 러시아군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만큼 프랑스에도 희생이 많았던 전투였다. 양군의 많은 희생에 쿠투조프는 눈물을 보이고, 이후 그는 러시아군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명령을 한다. 모스크바를 비우고 피난과 퇴각을 결정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폴레옹 군대는 1812914일 목표하던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화재의 원인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화재가 상징하는 것은 모스크바에 들어온 프랑스군의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이다.

 

모스크바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6개월을 버틸 수 있는 군량이 모스크바에 있었음에도, 약탈을 허용함으로 스스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반면 모스크바를 떠난 러시아군은 페테르부르크를 향하는 가도를 따라 북쪽을 향하다 모스크바를 끼고 우회해서 남쪽을 향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측면 행군(42141p)”이다. 이 지역은 식량이 풍부했다. 106일 프랑스군의 퇴각이 시작되고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쪽을 향해 가고자 했지만, 남하해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막혀 북쪽 루트를 따라 서진하게 된다. 프랑스군의 퇴각과 러시아군의 추격이 시작되고, 양 군 모두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많은 사상자와 낙오자가 나왔다. 다 떨어진 신발 혹은 신발조차 갖추지 못해서 천으로 칭칭 감고 행군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퇴각의 절정은 베레지나강 도하다. 프랑스군은 다리를 급히 놓아 수만 명이 건너지만 많은 병사가 얼어 죽거나 공격으로 희생되었다. 겨울 혹한과 굶주림, 질병으로 대부분의 병력이 소멸한 상태에서 간신히 국경을 넘어간다. 원정군 60만 명 중 살아 돌아간 병력은 극히 일부였다. 그들의 퇴각은 모스크바에서 스몰렌스크로 오르샤, 보리스, 민스크, 베레지나 강(181211월 말), 빌뉴스를 지나 폴란드 국경에 이른다. 러시아 사령관 쿠투조프는 러시아군이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나폴레옹을 생포할 수도 있었다. 사실 러시아군 역시 지쳐있었고 정면으로 부딪히면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작전명령은 내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이로 인해 황제의 신임을 잃고, 비난을 받는다. 톨스토이는 전설적인 노장 쿠투조프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바로 잡는다.

 

세 가문을 중심으로 젊은 남녀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죽는 서사보다 전쟁 부분이 더 부각되어 다가왔다. 러시아 사교계라든지 귀족들의 사랑이야기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이라 식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812년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장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참관인이었던 피에르가 모스크바에서 프랑스군의 포로로 잡혀 끌려가다 풀려나는 과정에서 보인 변화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와 함께 포로가 되었던 농민 출신 플라톤은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훼손되지 않은 인간의 선함이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미사여구도 어떤 책의 인용도 아닌 말에 울림이 큰 이유는 그 정직하고 선한 마음 때문이다. 말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농노제가 있던 시절, 징병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이 자신에게 속한 농노를 할당된 수만큼 나라에 제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국가에 바칠 것인가를 결정하는 귀족회의는 숫자로 계산되는 농노들의 처지를 실감하게 한다. 왕정국가의 전횡과 부조리다. 1805, 출정 전 들판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왕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마음과 1812년 모스크바를 탈출하면서 남긴 왕의 메시지(칙령)를 듣는 민중의 마음은 확연히 다르다. 모스크바를 버릴 리 없다고 믿었던 왕이 나는 만찬 무렵에 돌아올 것이다.’라고 한 말은 민중을 낙담하게 한다. “민중의 이해는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데 그 말은 너무 단순하고 지나치게 쉬웠다. 그것은 군중 가운데 누구나 내뱉을 수 있는, 따라서 최고 권력으로부터 나온 칙령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33660p)” 곧 그 낙담은 분노로 바뀐다. 1917년 차르를 몰아내고 혁명을 일으키게 될 분노의 싹이 튼 시점이지 않을까?

 

20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볼콘스키가의 안드레이, 마리아와 로스토프가의 니콜라이, 나타샤, 그리고 피에르 베주호프는 방황하고 사랑하고 상실하고 자아를 찾아간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 쿠투조프 총사령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등 실존하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에 배치하고, 거기에 이 주인공들과 다른 가상의 인물들을 투입한다. 이들은 러시아에게도 개인에게도 어려운 사건들을 통과하며 구도하고 사랑한다. 러시아가 치러낸 전쟁을 리얼리즘으로 엮고, 그 위에 인간 실존의 주제를 그려간다. 긴 시간동안 많은 양이었을 것이 분명한 자료와 문헌연구를 통해 그의 역사에 대한 꿰뚫는 통찰력 위에 인간의 삶이 구체화되고 있다.

 

역사에서 숙명론은 비합리적인 현상(우리가 타당성을 납득할 수 없는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불가피하다. 우리가 역사의 그런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쓸수록 그것들은 우리 눈에 더욱 비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쓸수록 그것들은 우리 눈에 더욱 비합리적이고 불가해한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를 위해 살고,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를 이용하며, 지금 이런저런 행동을 할 수 있거나 없는 것을 자신의 온 존재로 느낀다. 그러나 행동을 하는 순간 어느 한순간에 행해진 그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역사의 자산이 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 행동은 자유로운 의미가 아닌 숙명적인 의미를 띄게 된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두 가지 측면의 삶이 있다. 하나는 그 관심이 추상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지는 개인적 삶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법을 불가피하게 따라야 하는 불가항력적이고 집단적인 삶이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지만 모든 인류의 역사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일단 행해진 행위는 돌이킬 수 없으며, 인간 행위는 시간 속에서 다른 인간들의 무수한 행위들과 엮여 역사적 의미를 띠게 된다.(3118-19p)“

 

발레를 배웠다는 오드리 햅번의 날아갈 듯이 추는 나타샤 댄스는 전장에서 병사들의 싸우는 발, 부상당해 피흘리는 발, 필사의 탈출과 추적을 하는 군인들의 헐벗은 발의 이미지로 변해버렸다. 지도에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이동과 전투가 있었던 지역을 이은 긴 선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 길을 걸었던 혹은 그 길에 묻힌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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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5-12-25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벽돌책의 아우라가 대단합니다!
그것을 읽으신 그레이스님도 멋지고요.^^

그레이스 2025-12-25 1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메리크리스마스~ 모나리자님!감사합니다.
모나리자님도 멋지세요^^
2026년에도 열독하세요~~♡


고양이라디오 2025-12-26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윽 4권을 아직 안 읽어서 스포 때문에 리뷰를 읽을 수가 없네요ㅎㅎㅎ 얼른 4권 읽고 리뷰 읽어보겠습니다.

행복한 연말 되세요^^

그레이스 2025-12-26 16:54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럴 때 많죠!^^
리뷰 기다릴께요.
고라님도 행복하고 평안한 연말 되세요~~♡
 
내 어머니의 자서전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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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태어난(1949) 앤티가 섬이 속한 앤티가 바부다(Antigua and Barbuda)는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섬나라이자 영국 연방의 회원국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도미니카 연방(Dominica) 역시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섬이고(도미니카 공화국과는 다른 나라다), 작가의 부모의 출신지다.

 

15세기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유럽 국가들(주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영토 쟁탈전의 각축장이었다. 이들은 이 섬들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다.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원주민이나 유럽인들의 노동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 자리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로 채워졌다. 이것은 원주민 사회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질서의 형성을 이끌었다. “플랜테이션 경제는 엄격한 인종적, 계급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현대 카리브해 사외의 불평등한 구조적 특성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인간의 역사와 문명: 서인도 제도 사탕수수 농장과 노예 노동김상철)”

 

이 섬들의 사람들에게 무역풍은 노예를 가득 채운 배들이 바다에서 들어오던 비참한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바람이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그래서,

내 등 뒤는 언제나 황량한 검은 바람이었다.(7p)”

라는 문장은 섬의 역사와 그것을 개인적 사건으로 취하는 화자의 삶을 동시에 의미한다. 매 순간 이 무역풍이 그녀의 삶에 불어온다.

 

내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 죽었다(7p)”라고 하는 화자의 실존적 문장은 반복된다. 이 명제는 화자인 에게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230p)” 지독히도 외로운 존재의 고백이다. 그래서 평생 동안 와 영원 사이에 서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고, ‘는 평생 동안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고(8p)” 생각했다.

 

는 어머니의 꿈을 꾸지만 사닥다리를 내려오는 어머니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본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 본적이 없기에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유니스의 집에 맡겨졌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간 날, 처음으로 꿈에서 어머니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아마도 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 들었던 기억때문인가 한다. 더욱 애절한 느낌을 받는다. 사닥다리, 발꿈치는 영적 교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발꿈치는 의 어머니처럼 이 땅을, 그녀가 사랑했던 땅을, 맨발로 걸었던 여성들의 애환의 역사를 그려보게 한다.

 

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사람(Scots-man)인 아버지와 아프리카 족속(African people)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피부는 타락의 빛깔을 띠었다-구리, , 광석의 빛. 그는 스코틀랜드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돈과 권력을 쫓는 사람이었다. ‘는 아버지를 도둑, 압제자로 부른다. 실제로 그는 관료의 자리에 있으면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사람(man)’족속(People)’의 구분은 지배세력과 지배당하는 자의 차이다. 아버지는 ‘man’이고, 어머니는 ‘People’이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를 돌보지 않는다. 그는 에게 정복자이고 지배자다.

 

는 자신이 받은 교육, 식민지에 행한 유럽식 교육을 부정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신은 신발과 양말로 상징하고 있다. 그 때문에 발이 붓고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찢어져도, 길이 들도록 신어야하는 강요당하는 유럽 문명이다. ‘가 받은 교육은 배우면 얻게 되리라던 만족감을 안겨 주지 못했다.” 대답 없는 질문들과 분노만을 채웠을 뿐이다. 그리고 피부색 그이상의 영속적인 굴욕을 주었을 뿐이다.

 

'나'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리처드슨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수엘라 클로데트 데바리외. 수엘라는 어머니가 수녀원에 버려질 때 그녀를 싼 천에 새겨진 이름이었고 클로데트 데바리외는 그녀를 발견하고 거둬 키운 수녀의 이름이다. 이처럼 이 나라 사람들은 굴욕적인 이름으로 불리운다. 앨프레드, 앨버트, 유니스 ……. 그녀는 수엘라라는 이름이 아닌 화자로 등장한다.

 

가 굴욕적이고 억압적인 삶을 거부하는 방식은 자신의 목소리와 몸을 사랑하고, 섬의 하늘과 대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니, 자신을 사랑하고 그 땅을 사랑하기에 그 치욕스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

 

는 남성들과의 사이에서 성적 욕구를 채우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잉태한 아이를 없앤다. ‘의 죽음을 무릎 쓴 임신 중단은 처음엔 그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겠다는 저항으로 보인다. 여러 번 이 행위가 반복되었을 듯한 시간들이 지나고, 그 행위는 에게 존재적 선언이 된다. “나는 단 하나의 아이도 낳기를 거부했다.(207p)” ‘는 수태하길 갈망하면서, 그 결정에 애통해 했다고 말한다. ‘가 수태를 거부하고 자궁을 말리는 것은 인종에 속하길 거부했고, 국가를 받아들이길 거부(234p)”하는 선언이다. 불편한 묘사들이 이어지는 이 주제는 참담하고 처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제목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임에도 어머니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고 아버지의 태생과 불의한 삶, 그에 대한 의 분노, 그리고 의 이야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아버지도 남편도 죽고, 그녀는 오랜 시간 반복해왔던 세상과 존재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대답한다. 한 사람이 수태되고 태어나는 것부터가 미스터리이고, “어느 날 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음을 내딛지만, 거기에 바닥은 없고 밑도, 벽도, 색도 없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추락도, 그 멈춤도……, 그러기에 그가 누구인가는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라고. 인간 실존에 관한 사유는 정체성의 선언으로 나아간다.

 

나는 족속(people)이 아니고, 국가(nation)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 행동들이 한 국가의 행동들이 되기를 이따금 바랄 뿐이다.(223p)”

-

, 제목을 내 어머니의 자서전이라고 했을까? “내 인생에 대한 이 이야기는 내 인생의 이야기인 만큼 내 어머니 인생의 이야기이기도하고 동시에 내가 가지지 않은 아이들 인생의 이야기(207p)”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모두 의 안에 뿌리를 두었기에 의 이야기이고,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것은 를 둘러싼 제국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와 그 폭력과 억압을 향한 복수의 이야기다.

 

우리는 인종, 성별, 외모, 지능, 성격, 부모, 계급, 국가, 역사적 시간 등, 그 모두를 선택할 수 없다. 왜 그렇게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들은 역사적 주술 속에서 살아간다. 이 역사적 주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하고,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에 저항하고, 자신의 존재는 스스로가 정하겠다고 결정하면 그 삶은 급진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인 모양을 갖게 된다. 그 에너지는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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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의 원제는 질병 통역사·Interpreter of Maladies’.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은 이민자의 삶과 자기 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조금 더 깊이 읽어보면 이야기를 지탱하고 있는 깊은 층위에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일상의 삶과 심리를 세밀하게 엮어내는 구성력과 통찰이 뛰어나다.

 

단편들 중「축복받은 집, 일시적인 문제, 그리고 질병 통역사가 내게는 한 주제로 다가왔다. 질병 통역사에서 관광 가이드 카파시 씨가 다스 부부에게서 눈치 챈 것처럼,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부부들에게는 말다툼, 무관심, 긴 침묵 같은 징후(93p)”를 보게 된다

 

일시적인 문제」의 '일시적'은 며칠 동안의 일시적인 정전과 부부 관계의 일시적인 상태를 지시하는 다의성을 띈다. 저녁 8시부터 한 시간 동안의 단전이 예고된 5일 동안 그들 사이에 있었던 무심함과 침묵이 깨진다. 각자가 따로 하던 식사를 함께 하고, 어둠 속에서 마음에 있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추억과 가벼운 이야기들로 시작하여, 자신의 약점들 그리고 죄의식에 대한 고백들이 이어지고, 그들 부부관계는 회복되는 듯 보인다. 단전이 끝난다는 통보가 전해지고 슈쿠마는 아쉬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그들의 관계는 이전으로 돌아갈까? 불을 켜고 쇼바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슈쿠마는 이제까지 감춰왔던 진실을 전한다. 다시 불을 끄고, 알게 된 진실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그들은 5일 동안 회복된 듯한 그 관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진심을 전할 수 없을까? 긴 침묵으로 이어져 오던 갈등상태의 원인은 무엇일까? 단지 불행한 사건과 환경의 문제였을까? 언어는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말이 없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 헤아려지는 마음은 언어보다는 안아줌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상처에만 시선과 마음을 쏟는 우리는 원래부터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 하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평일에는 질병 통역사를 하고 있는 여행 안내인에게 오래된 죄의식의 문제를 고백하는 낯선 여인에게서 인간의 질병의 징후를 읽는다.

 

작가는 질병 통역사에서 여행안내인 카파시를 통해 보이듯 언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카파시는 구자라트어를 쓰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의사에게 통역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 사이, 국가의 국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그 자신만이 양쪽 모두를 이해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길꿈꾸었다. 그는 힌두어, 벵골어, 오리야어, 구자라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로 대화하길 원했고(92p)” 독학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의 징후였다(92p)”고 말한다. 인도가 여러지역의 방언으로 나뉘어져 소통하기가 어렵고, 외국어를 아는 것은 성공을 위한 힘, 권력임을 알 수 있다. 벵골어, 영어, 이탈리어로의 언어 이민을 한 작가는 그녀가 의지하고 작가로서 명성을 안겨다준 주된 영어를 떠나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작가는 영어를 포기했을 때 권위를 포기한 것이라고,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92p)

 

그러니, 소통은 언어의 문제일까?

축복받은 집이란 제목은 산지브와 트윙클의 어두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어 역설적이다. 겉으로 요란하게 싸우지도 않고, 자극적인 말이 오고 가지도 않으면서 부부간의 미묘한 어긋남을 섬세하게 그려낸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들의 갈등은 조금 더 요란하다. 신혼인 산지브 와 트윙클 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언어의 부재도 대화의 단절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이유를 외면하는 그들의 마음 때문이다. 신혼집에서 발견되는 성상들과 성화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도 이유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고 이제는 아내가 필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산지브가 트윙클과 결혼하기로 한 것은 그녀가 적절히 높은 카스트 출신에다 곧 석사 학위를 받게 될(235p)”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혼은 서로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결혼은 자신의 생활 속에 다른 성격과 태도, 생활 습관 등 나와 부딪힐 가능성을 가진 타인을 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때로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을 그에게서 발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두 사람도 여러 번의 충돌 후에 침묵하고 서로를 외롭게 하는 단계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과연 대화의 문제일까?

 

일시적인 문제, 질병 통역사, 축복받은 집세 편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아내(여성)의 마음을 전혀 서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심리만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서로가 타자화 하는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지층에 깔려있는 가부장적인 남성위주의 사고를 발견하게 된다.

 

함께 있어도 서로를 외롭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고통스럽고 외롭게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강의 단편아기부처」에서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를 가리는 남자와 안으로 멍든 여자의 만남, 그들의 출발이 잘못되었음을 는 뒤늦게 깨닫는다.

 

의 꿈에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아기부처는 어머니가 그리는 불화 3000장과 연결되어 있다.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라는 말과 함께 아프게 때리던 어머니의 손길과 혹독한 훈육에 상처 입은 그녀의 자아다. 어머니가 불화를 그리는 행위는 자신 안에 있는 한을 비워내고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다. 어머니가 불화 3000장을 그리는 것과 가 견딘 3년의 시간은 서로 병행하고 있다. ‘의 남편에 대한 감정에는 동정과 연민이 뒤섞여 있었다. 살면서 점차 인식하게 되는 남편의 몸에 대한 혐오의 감정 때문에 남편의 신경증적이고 폭력적 언행을 감내한다. 3년이란 시간 동안!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충실하려 했던 그녀의 방식이고, 자신의 과오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한편 남편은 애인에게 버림받고 술에 취해 들어와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로 스스로를 고독하게 가두고 어둠에 매몰된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고 외롭게 한다. 그것은 차가운 침묵과 외면, 폭력적인 언어와 가해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관계는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인간의 마음은 왜 그렇게 허약한 것일까? 그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관계를 지속할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만 집중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호소하고 변명만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완벽한 이웃>이란 다큐를 떠올렸다. 이웃을 총 쏘아 죽게 하고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상황만을 호소하고 변명하던 사람! 극단적이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병아닐까

내 안에도 이 모습이 있다. 이 깨달음은 통렬했고, 그로 인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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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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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서사시 대심문관은 이 소설 전체를 덮는 주제를 담고 있다. 대심문관의 배경은 예수그리스도가 이겨낸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반이 쓴 서사시의 배경은 16세기 종교재판이 극심했던 스페인 세비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다시 기적을 베풀지만 추기경은 그를 체포하고 심문한다. 추기경은 대심문관으로 신약의 세 가지 시험과 관련된 질문을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빵과 돈, 권력으로 당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하였고, 그가 속한 교회는 이것으로 사람들을 구제하고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강변한다. 교회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빵과 기적과 권위를 제공하며 통제한다고 말한다. 죄수(예수)는 그런 그에게 조용히 다가와 입을 맞추고 그(추기경)는 전율한다. 그들의 헤어지는 장면은 이 서사시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추기경은 죄수를 풀어주며 그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앞으론 절대 찾아와선 안 되오……. 절대, 절대로.”라고 말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영적인 파문이 일었지만 다시는 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돈과 권력을 포기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인간이 그런 것 아닌가? 마음에 감동이 와도, 양심에 자극을 받아도 욕망에 휩싸이면 결코 돌아서지 않고 더욱 강퍅해지는 것! 교회는 진리,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없이 권력과 돈만을 쫓는 부패한 모습을 갖고 있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과 시취와 그에 동요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교회의 부패를 상징하는 후각적 장치와 심리다.

 

인간의 욕망은 러시아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믿었던 정교회 뿐 아니라 가정마저도 파괴하고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의 삶과 그의 아들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의 태생과 성장기, 현재의 모습을 소개함으로 무너진 가정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방탕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삶은 아들들에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성격으로 상처로 방어 기제와 병적 기질 등으로 남아있다. 그들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그릴 수밖에 없다.

 

<대심문관> 이야기는 드미트리의 심문과 병행한다. 드미뜨리에 대한 심문을 세 개의 수난으로 이름 짓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 번의 심문 과정의 패러디다. 그 수난은 수치를 자극하는 것이다. 드미트리는 수치심 때문에 갖고 있던 돈의 출처에 대해 진술을 거부한다. 그가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했던 것들 그리고 친부살해의 혐의와 재판을 받는 것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수치심(부끄러움)은 이 소설을 끌고 가는 감정이다


수치심과 죄의식이 한 개인을 장악하는 것의 부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그 감정이 공동체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수치(羞恥)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염치(廉恥)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이등 대위 일류세츠카가 알렉세이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로 인해 당할 수치를 생각했기 때문이고, 염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치와 염치의 긍정적 효과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우리가 겪는 많은 부끄러운 일들, 불의가 많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가난한 이등대위의 가정과 부유한 까라마조프가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표도르 빠블로비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무자비하고 무정한 스메르쟈코프가 태어나고 길러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심문을 받던 드미트리는 아기 꿈을 꾼다. 울고 있는 아기를 농부는 아귀라고 부른다. 그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꿈속에서 괴로웠던 그는 깨어나서 자신의 머리 맡에 베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그 친절함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린다. 미쨔의 영혼은 눈물로 온통 전율하고 있었다고 한다. 꿈속의 아귀는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던 드미트리의 자아이다. 그는 베개를 고여 준 누군가의 손길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만큼 외로웠던 것이다. 연민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3000루블은 욕망, 자존심, 수치심, 죄의식을 건드리며, 갈등과 사건을 만들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돈의 행방이 시작부터 재판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의 운명의 향방을 정하고 있다. 이반의 <대심문관>의 주제와도 닿아있다. 욕망과 힘에 관한 메시지다.


이제 <대심문관>은 재판정 풍경으로 변형된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소설은 검사 이뽈리뜨 끼릴로비치에 대해서, 변호인 페쮸코비치에 대해서, 재판장에 대해서, 증인들에 대해서, 방청객들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한 사람의 운명이나 정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방청객들은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 중 자신이 관심을 두고 귀기울인 것만을 기억한다. 검사 이뽈리뜨는 논고에서 이 재판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다. 그 내용은 이 집안의 형제들이 왜 이렇게 불행한 상황에 빠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가 알료샤가 애국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부분은 작가의 생각이라고 추측된다. 러시아가 당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원인이 바로 그 두 가지라고 보고 있다. 애국주의와 신비주의는 어쩌면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변호사의 논고에서 밝힌 정황과 증거 논리적이고 정확한 추론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이 판결의 오류를 보이는 것은 이 재판정은 정의를 받칠 힘이 없음을 보게된다. 전통적 도덕의 잣대, 심정적 호소에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정의조차 허약하게 느껴진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반과 드미트리는 정신적 파멸을 보여준다. 인간 정신의 복잡하고 연약함을 새삼 느낀다. 그것이 차라리 미덕임은 그렇지 않을 때 인간 사회가 향할 지점이 끔찍할 것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그리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와 국가(사법에 나타난)가정 등 모든 영역에서 붕괴를 겪고 있는 러시아에서 희망은 일류샤의 장례식에 모인 또래 친구들미래 세대에 있음을 역설한다그들이 어떤 지식과 정의감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 부서지기 쉬운 마음, 신앙, 도덕....사법, 국가... 다시 읽을수록 새롭게 발견되고 생각할 주제가 많아지는 영원한 고전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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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1-09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상권 일부만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꽤 흥미진진하더군요. 시리즈를 종이책으로 사 놓고 못 보고 오디오북으로만 접했어요.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모자라고 그럽니다.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완독할...ㅋ^^

그레이스 2025-11-09 14:14   좋아요 0 | URL
완독 응원합니다
다 읽고 리뷰하는데,,, 전권이 나와있는게 없어서 한권만 올렸어요 ;;;

고양이라디오 2025-12-19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레이스님 엄청난 리뷰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너무 다시 읽고 싶어지는 리뷰입니다. <전쟁과 평화>리뷰가 벌써 기대 됩니다ㅎㅎㅎ

그레이스 2025-12-19 11: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전쟁과 평화 바빠서 못쓰고 있었어요.
이렇게 말하니 핑계같네요.
곧 써야겠어요^^
고양이라디오님 전쟁과 평화 리뷰 올라올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감동하시는 포인트가 뭔지 너무 잘알겠는 기분, 그래서 넘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