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소녀시대 (문고본) 요네하라 마리 특별 문고 시리즈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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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제  : Usotsuki Anya No Markka Na Shinjitsu (거짓말쟁이 아냐의 새빨간 진실)


 

이 작품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 여성 중 하나인 저자의 프라하에서의 어린 시절을 담아낸 것이다. 저자는 일ㆍ러 통역가이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저자가 다닌, 체코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배경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196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소녀 시절, 일본 공산당 간부인 아버지를 따라 체코에서 살게 되면서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4년간 다녔다.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주의 운동 이론지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편집위원회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사무실이 프라하에 위치해 있었다.

프라하 소재 소비에트 학교는 세계 각국의 대사관이나 외교관,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가 수학하는 국제 학교였다. 1960년대이니 만큼 소비에트 학교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프라하로부터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요네하라는 프라하의 친구들과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그 연결고리는 차츰 헐거워졌다. 저자 자신이 일본의 교육제도와 인간관계에 적응하느라 지쳐갔고 또 현실의 비중이 점차 커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추억의 옥석을 가리면서 옛 친구들의 모습과 그들에 대한 기억은 더욱 또렷해졌다.

19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동유럽에 크고작은 격동적인 사건이 동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 요네하라는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녀는 수행 통역을 하기로 했던 러시아 주요 인사의 일정이 갑자기 취소되자 옛 친구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단서는 1964년 소비에트 학교에서 헤어질 때 친구들이 이별의 메시지와 주소를 적어준 ‘추억의 노트’뿐이었다. 그리하여 1995년 11월, 프라하 - 부쿠레슈티 - 신 베오그라드를 가로지르는 2주간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두 가지 이야기로 엮여 있다. 한 가지는 요네하라가 1960년대 초반 소비에트 학교에 다니면서 겪었던 학교 생활과 친구들과의 일화이다. 특히 가장 절친했던 3명에 대한 추억이 중심이다. 소련의 영향력하에 있던 시절, 체코의 소비에트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에서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

두 번째는 1995년 그녀가 친구들을 찾아가고 만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30년이 지난 세월과 사회주의 체제 해체라는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친구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

조국의 운명에 휩쓸려 이상과 현실의 괴리와 맞닥뜨리고만 저자의 동유럽 친구들의 모습은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동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해 온 사회주의를 들여다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소속감을 느끼는 자본주의 사회제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프라하 시절 요네하라가 친했던 친구 3명은 그리스인 리차와 루마니아인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인 야스나였다. 이들과 함께 보낸 프라하에서의 5년은 그 후 40여 년 동안 그녀에게 깊고 깊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국’이나 ‘민족’에 대한 그녀의 경험은 인상 깊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자신과 관련된 조상, 문화를 이끈 자연조건, 그밖에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갑자기 친근감을 품게 된다고. 이것은 식욕이나 성욕과도 같은 줄에 세울 만한, 일종의 자기보전 보능이랄까. 자기긍정 본능이 아닐까.”(112쪽)


 

그녀가 기억해 내는 1960년대 소비에트 학교의 모습은 이데올로기적인 교과 이외에는 필자가 자라난 1970년대 대한민국의 의무교육과는 천지 차이였다. 학생들을 존중하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은 21세기 한국의 교육 현실보다 앞서 있는 듯 느껴진다.

“소비에트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의 재능을 발견하면 과장될 정도로 법석을 피우는 버릇이 있다. 너무 좋아서 그 기쁨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동료와 반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 서구로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이것 만큼은 러시아가 뛰어났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있어요. 그건 재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죠. 서구에선 재능이 자기 개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에선 모든 이의 재산이랍니다. 그러니 이곳에선 재능 있는 자를 시기해서 어떻게 하면 끌어내릴까 안달이죠. 러시아에선 재능 있는 자는 무조건 사랑받고 모두가 받쳐주는데….”(179~180쪽)


 

친구 리차는 한 번도 봤을 리 없는 그리스의 파란 하늘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그건 말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라며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긴 눈썹으로 테 두른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였다.”

“단 한 점의 구름도 없는 새파란 하늘이, 또 새파란 바다에 비쳐서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거야. 파도는 방금 빨아 넌 냅킨처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정말이지 마리한테도 보여주고 싶어.”

리차는 그리스 군사정권의 탄압에서 벗어나 동유럽 곳곳을 전전하다가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한 공산주의자의 딸로, 외모에 관심이 많았고 성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빠삭한 아이였다. <레닌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계몽영화를 보면서는 “마리, 레닌은 꽤나 잘살았나봐”라고 꿰뚫어볼 정도로 냉철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리차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명문 대학인 카렐 대학에 입학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지만, 믿기 힘들 정도로 공부를 못하고 언제나 낙제의 위기를 맞던 친구였기에 요네하라는 그 소문을 믿을 수 없었다.

헤어질 때 적어준 주소지에도 리차의 흔적은 없다. 요네하라는 현 소비에트 학교의 교장이 일러준 그리스인 민단民團을 통해 리차의 소식을 묻기로 한다. 리차의 본명을 알게 된 곳은 카렐 대학 입학생 명단이었다. 리차는 몇 번이나 재시험과 추가시험을 보고 두 번의 낙제를 겪으면서도 의대생으로 무사히 졸업해 독일에서 이주민들을 돌보는 ‘봉사하는 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외교관이었던 아냐의 아버지는 루마니아 공산당을 대표해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의 편집위원으로 프라하에 오게 됐다. 인도 델리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자란 아냐는 남다른 언어감각으로 소련 본국 아이들을 제외하면 가장 러시아어를 잘했고 이야기 솜씨도 빼어난, 사랑스러운 몽상가 타입이었다. 다만 심심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흠이었다. 어린 시절의 마리로서는 일종의 병이라고밖에, 절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짓말들이었다.

성인이 된 아냐는 영국 유학중 사귄 영국 남자와 결혼해 영국에서 살고 있었다. 조국 루마니아에 대한 마음이 깊어, 절대로 루마니아를 떠나지 않겠다던 아냐였지만, 이제는 자신을 90%의 영국인으로 믿는 국제인으로 성장했다. 아니, 루마니아인이었던 과거의 모습은 버리고 최선을 다해 서구문명에 적응했다. 귀족 대접을 받으며 성장한 특권층이었음에도 루마니아인으로서의 자신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중상류층으로 지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 만족해하는 아냐를 보며 요네하라는 말로 설명하지 못할 씁쓸함을 느낀다.

 

야스민카가 본명인 야스나는 ‘명쾌하다’라는 뜻을 가진 애칭 그대로였다. 모든 과목에 천재성을 보이는 총명한 친구로 유치한 장난에 초연하고 아이답지 않게 객관적이었다. 아버지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우스타시에 대항한 파르티잔 출신이었다. 야스나가 일본 중세의 호쿠사이 판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마리와 야스나는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1년간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지냈다.

요네하라가 야스나를 찾는 일은 어느 때보다 어려웠다. 구 유고슬라비아가 민족분쟁으로 분열되면서 보스니아에서는 끊임없이 내전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녀는 야스나가 어느 민족인지 알지 못했다.

분란의 와중에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야스나는 무슬림이었다. 자신이 무슬림이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야스나였지만 이 때문에 함께 투쟁해온 친구들과 직장동료, 이웃들에게 외면당하게 되었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대통령을 역임한 야스나의 아버지는 탈출을 거부한 채, 언제 폭격당할지 알 수 없는 사라예보의 방공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요네하라의 소비에트 학교 친구들의 인생은 운명이 뒤바뀌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들이 겪은 운명의 배후에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탄압으로 짓밟힌 ‘프라하의 봄’과 19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권 격변시 벌어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의 붕괴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선언이 발단이 된 유고 다민족 전쟁이었다.

역사와 민족이라는 화두,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운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화법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지만 가슴을 두드리는 울림이 있다. 그러면서도 이데올로기가 개인에 미친 영향에 대한 저자의 지적은 상당히 날카롭다. 저자는 “소비에트 학교 아이들은 모두 자국에 대한 애정과 동경을 가지고 있는데, 빈곤과 혼란 상태에 빠진 나라의 아이들일수록 애국심이 강했다”고 평하고 있다.

 

작품을 읽고서 필자가 느낀 점은, 1950년대 ~ 1990년대 동서 냉전이었던 기간 동안 서구 사회에서 과도하게 선전하고 폄하했던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과 그 체제와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은 서구 사회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나 사회주의 체제 모두 장점과 단점이 존재했다. 자본주의는 ‘돈이 만능’이지만 사회주의는 ‘가난한 대신 사람들이 사는’ 사회였다. 특히 동유럽 사회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도 공기처럼 문화가 숨 쉬고 있었다.”고 독일 의사 리차는 말한다.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는 단순한 이념의 대결 문제가 아니었다. 요네하라의 친구 중에는 소비에트 학교 졸업 후에 기쁨에 들떠 귀국했지만 동란으로 목숨을 잃은 아이도 있었고 조국에 실망해 다시 외국으로 떠난 아이도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는 현실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20세기 후반 동유럽의 격동의 현실을 보여준다. 동유럽의 현대사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기득권층과 자본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이 책은 몇 달 전 여자 후배가 꼭 읽으라며 선물해주었다. 그 후배는 필자에게 “추상적인 인류의 일원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존재할 수 없어”라는 요네하라의 고백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소개해준 후배가 고맙다.


 

“파랑, 하양, 빨강. 그러고 보니 이는 자유, 평등, 박애의 색깔이 아닌가. 이것이 인류의 지고한 표어가 되기까지, 또 인류가 이를 지향하게 된 이후에도 수많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인간은 언제쯤이나 사고방식 하나로 서로를 죽이려는 것을 그만두려는지 많이 걱정스럽다.”(옮긴이의 말)


 

[2017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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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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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오빠가 돌아왔다. 못생긴 여자애 하나를 달고서였다.”로 시작되는 소설가 김영하의 소설집이다.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는 열네살 하층민 동네에서 자란 아이 다운 소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열네살 소녀의 가족은 술주정뱅이에 ‘고발꾼(사소한 범법행위를 관공서에 고발하여 보상금을 받는다)’인 아빠, 미성년자 동거녀와 집에 돌아온 오빠, 아빠와 헤어지고 함바집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이다.

열여섯 살때까지 아버지에게 늘상 두들겨 맞던 오빠는 가출한 후 4년 만에 군에서 제대하여 집에 돌아왔다. 동거녀와 함께 오빠가 집에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란이 가족에 대한 소녀의 냉소적인 시각에 담겨 거침없이 그려진다. 소녀의 냉소주의는 가족의 사랑을 표현하는 반어적 화법이다.


 

그밖에도 일상의 평범한 사건 속에 숨겨진 헤아릴 수 없는 긴장을 예리한 감성으로 포착한 「이사」와 「마지막 손님」, 기발한 상상력이 아이러니와 조롱에 섞여드는 번뜩이는 순간들을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로 풀어낸 「너의 의미」와 「보물선」(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등에서는 새로운 감수성과 다양한 소재로 동시대 한국문학을 갱신하고 있는 작가 김영하의 역량이 잘 드러난다.


 

우리 일상 속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듯한 사건사고가 통쾌한 유머와 섬뜩한 아이러니를 업고 짜임새 있게 펼쳐지고 있다. 특히 가치 파괴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내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특히 「오빠가 돌아왔다」는 8편의 작품 중에서 압권이다.


 

일자는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대화 중에 「오빠가 돌아왔다」를 종종 인용하곤 한다.  「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가정과 ‘오빠’의 캐릭터가 유별나게 보이지만 실제 한국현대사가 각 가정에 각인시켰던 여러 굴곡점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성들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는, 어렸을 때는 프로이트 심리학처럼 ‘어머니’를 두고 경쟁하는 관계일지 몰라도 나이들어서는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어떤 존재’라 할 수 있다. 아버지와 관계가 특별하면 특별할수록 그런 필요성은 커진다.

아버지와의 관계와 별개로, 전세계적으로 드물게 ‘국방의 의무’가 부여되는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은 대부분 ‘군대’라는 관문을 거쳐 성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질풍노도의 시대’라는 청소년기를 막 지나면서 군에 입대하게 되면 많은 남성들이 변화를 겪게 된다. 군대라는 조직의 경험이 남성들에게 여러가지 장점과 단점이 있지만, 집단 속에 홀로 견디는 2~3년은 개인을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계기와 과정이 된다.(물론 연간 150명이 넘는 군대 내 사망자와 수많은 폭력, 학대 사건은 국방부의 무책임한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전히 위험한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오빠가 돌아왔다」의 ‘오빠’의 경우에는, 군대라는 경험을 통해 체격과 힘이라는 면에서 성인으로 당당하게 성장하여 ‘폭군’ 아버지를 제압한 경우에 해당한다.

‘폭군’ 아버지가 보호나 애정은 커녕 어머니를 내쫒고 청소년 시절까지 자신울 폭행한 경험을 가진 남자 아이가 무엇을 배웠겠는가. 가정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 어디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남자 아이일텐데. 그가 4년 만에 십대 소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폭력’으로 아버지를 제압한다는 설정은, 한국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필자가 아는 지인 중에도 「오빠가 돌아왔다」의 가정과 비슷한 경우가 여럿 있다. 그 중 두 곳의 가정은 아버지가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 세대다. 각 아들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폭력성에 시달리면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아직이다. 경제적인 독립이 여의치 않고 한 명은 정신적으로도 아직 독립하지 못했다. 공통적인 특징은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가정을 경험한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동일한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들이 특이한 점은, 바깥에서는 ‘호인’이나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밖에서 다른 이들에게 자상하고 배려심도 보인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중인격일텐데 정신장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필자는 사회생활 중에 ‘호인’으로 평가되고 지인들을 자상하게 배려하는 남성들을 보이는 그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한국사회는 이중인격이 가능한 사회구조이자 인간관계가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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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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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두환이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5.18은 폭동”이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국의 헌정체제는 1988년 국회에서 실시된 광주청문회를 비롯하여 1995년~1997년 사법부의 최종 판결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국가반란과 살인혐의를 확정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비록 확정 판결 후 1년 만에 정치적인 이유로 석방되었지만..)

문제는, 전두환 등이 국가반란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그들을 배출해낸 유신군사독재 체제와 그들이 한국사회에 강제한 5공화국 적폐구조는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5공화국은 집권 7년 동안 한국사회 곳곳에 인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심어놓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무수히 많은 적폐들은 유신군사독재와 5공 군사독재의 적폐가 뿌리깊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전두환은, 자신이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국가반역자임이 명확하게 확정되어 있음에도 왜 한국인들에게 “5.18은 폭동”이라는 도발을 할까? 필자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 대한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의 법적 정치적 역사적 심판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2014년에 출간되었지만, 이 작품의 등장은 독자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5월 광주민중항쟁의 사회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한다.

이 작품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우던 중학생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 그후 남겨진 사람들이 고통받는 내면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5월 항쟁 당시의 처절한 장면들도 현장감 있게 묘사했다. 소설은 주인공과 함께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이 겪은 5.18 전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작가는 광주에서 쓰러져간 무고한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진심 어린 문장들로 어느덧 그 시절을 잊고 무심하게 5.18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여전히 5.18의 트라우마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저자는 주인공들이 겪은 5.18 전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야기는 5월 광주항의 치열한 현장에서 곧바로 시작된다.

1980년 5월 광주, 열다섯 살 동호는 친구 정대를 찾아 합동분향소가 세워진 도청 상무관에 갔다가 그곳에 먼저 와있던 수피아여고 3학년 김은숙, 미싱사 임선주의 부탁을 받고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매일같이 합동분향소가 있는 상무관으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열다섯 어린 소년은 '어린 새' 한 마리가 빠져나간 것 같은 주검들의 말 없는 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를 밝히고, ‘시취를 뿜어내는 것으로 또 다른 시위를 하는 것 같은’ 시신들 사이에서 친구 정대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정대는 동호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되고,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공장에 들어와 자신의 꿈을 미루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정대의 누나 정미 역시 그 봄에 행방불명되면서 남매는 비극을 맞는다.

얼마 후 도청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이들은 시신을 두고 밖으로 나갈지 아니면 안에서 계엄군을 맞을지 고민한다.
계엄군의 총소리가 도청을 중심으로 온 도시에 울려퍼진 그 날이 지난 후, 은숙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지만 검열에 걸려 경찰에게 피멍이 들도록 뺨을 맞는 폭행을 당한다. 선주와 진수는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극렬분자', '빨갱이'로 분류되어 성기 고문, ‘모나미 볼펜’ 고문 등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사실 한국의 사회과학 등 학계와는 달리 문학계나 예술계에서 5월 광주항쟁은 잘 보이지 않았다. 5월은 현대사의 한 단락으로 역사서에 기록되거나 정치나 사회분야에서 분석의 매개로만 적용된 듯하다. 물론 정치나 사회과학에서도 빈도수는 낮다.

문학이나 예술, 영화 등에서 5월 광주의 모습이 적은 이유는 아픈 기억에 대한 ‘회피’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 한국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5공의 부역자와 기득권자들이 5월 광주를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삼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또는 문학과 예술을 한다는 이들이 5월 광주의 문학적, 예술적 형상화를 해낼 수준과 능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5월 광주를 회피하는 동안, 5월 광주는 여전히 당사자들과 한국인 모두의 무의식과 유전자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잠복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이 작품 <소년이 노래한다>의 출간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5월 광주에서 시민들, 젊은이들, 학생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동족의 군인들이었다. 공수부대와 군인들에게 대검과 몽둥이와 군화발로 살상을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들을 유린한 군인들은 과연 어떤 낯짝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군인들이 한 해 전 부마항쟁을 잔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던 이들, 베트남전에서 몇백만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닐까 암시한다. 그리고 이들의 핏줄이 2009년 1월 용산에서, 2014년 세월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라고 적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p.212)

작가는 인간의 잔인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잔인성을 강요하는 권위 앞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인간도 있다는 믿음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작가가 재조명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1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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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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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게 된 고귀한 자들은 비참하게 죽는 순간에도 이 세계 전부를 얻은 셈이에요..”

이 작품은 1930년대 초반 북간도의 항일유격근거지(한인 소비에트) 내부에서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사건,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에 착안한 소설이다. ‘민생단’은 만주를 침략한 일제가 친일파를 조직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500여 명의 독립투사이자 혁명가가 적이 아니라 동지의 손에 의해 죽어간 사건이라하니 기막힌 사연이 많았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6년여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고 독립투사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수는 그 사이 작품을 위해 중국과 일본, 연변과 러시아, 미국과 독일을 분주히 오갔다.

“1930년대 조선인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먼저 중국혁명을 외쳐야 했던 시작부터 모순을 껴안았던 독립투사들, 국제주의자로서의 이중임무를 띤 채로일제가 아닌 동지의 손에 의해 봄날 꽃잎처럼 죽어간 수천의 젊은 목숨들, 자신이 누구인지는 결국 죽고 나서야 시체로서만 말할 수 있었던 그 기막힌 사연의 인물들을 찾아 작가는
관련자료와 사료들을 뒤적이고 복사하고 칼로 오려 노트에 붙여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곳’이 아닌 ‘현재-이곳’에 앉아 그들의 삶과 내면을 짐작하기란 말 그대로 ‘상상불가’의 영역이었으니. 작가가 내린 결론은 적어도 그들이 죽어간 연변 땅에 가서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소설이었기에 그 갈증과 열망은 더했다.”(출판사 소개글)


<밤은 노래한다>는 죽음 직전의 연인이 써 보낸,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한 장의 편지에서 시작된다.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초, 저마다의 사연과 핏빛 서러움을 간직한 이들이 몰려든 북간도 땅을 배경으로, 박도만, 최도식, 안세훈, 박길룡 등 혁명과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네 명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친구인 이정희라는 신여성, 그리고 만철(滿鐵)의 조선인 측량기수로 이정희를 사랑했던 주인공 김해연에게 찾아온 잔혹한 운명, 가혹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인을 꿈꾸었지만 내지인마냥 일본인과 함께 일하고 술을 마시며 그저 운명적인 단 하나의 사랑을 맘에 품었다가 어느 순간, 조국과 이념, 혁명과 죽음에 직면하면서 세계의 복잡한 이면에 눈떠가는 한 남자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손을 저주하며 삶을 저버리고자 했지만 다시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또 한 하나의 순정에 가슴 치는 애틋한 연애기이기도 하다.

“북간도 고난한 삶의 흔적이 몸으로 스며든 사람들의 얼굴이 인화지 위에 검은 꽃처럼 피어나”듯 이번 소설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직원으로 대련에서 일하다가 용정으로 파견된 김해연은 측량작업을 하면서 간도임시파견대의 중대장인 나카지마 타츠키 중위와 친해지게 되고, 박길룡(박타이=양도생)의 소개로 이정희를 알게 된 뒤, 그들과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독립군이자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는 이 모임을 통해 토벌대의 정보를 수집하여 조직에 보내다가 발각되자 김해연에게 어서 피하라는 메시지를 내포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해연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과거 공산주의운동을 하다 전향하여 영사관 경찰보조원으로 있던 최도식을 만나게 된다. 조사를 받고 풀려난 김해연은 대련으로 돌아갔으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련 봉판정의 아편굴에 빠져들게 되고, 직장에서 쫓겨난 뒤에는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이정희가 목을 맨 나무에 자신도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한다.


김해연은 죽지 않고 살아났으나 그 심리적 후유증으로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는 용정의 한 사진관에서 일하게 되는데 하필 그 사진관 역시 혁명조직과 연결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심부름하던 여옥이라는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야학 선생님을 통해 ‘혁명의 도리’를 깨친 뒤 이슬을 맞으며 조직의 연락원으로 일해온 순수하면서도 열정을 지닌 여자다.
“엉겅퀴나 산국(山菊) 날카로운 이파리들이 종아리에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어놓았습지”라고 당당히 말하는 여옥과 김해연은 서로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랑에 빠진다. 김해연은 고등공업학교 시절의 은사인 나카무라 선생의 권유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여옥과 함께 경성으로 떠나기로 한다.

경성행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김해연과 여옥, 그리고 사진관 식구들은 여옥의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러 유정촌에 가다가 운명처럼 토벌대의 습격을 받는다. 그 일로 여옥은 오른쪽 다리를 잃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김해연만 홀로 살아남게 된다. 다리를 잃은 여옥은 혁명조직의 재봉대에서 일하게 되고 김해연 역시 유격근거지에 남아 혁명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만철 직원 출신인 지식분자 김해연의 입당을 승인하고, 그를 대련으로 다시 보내 사업을 시키려 한다. 대련으로 떠나기 전, 여옥에게 인사를 하려 유격대장 박도만과 함께 약수동으로 향하던 김해연은 중간에 토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방향을 바꿔 어랑촌 소비에트에 이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민생단 혐의자로 체포된다.

만주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싸우려면 먼저 중국혁명부터 해야 한다는 현실적 입장의 ‘국제주의자’ 박도만과 동만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민족적 성향이 강한 중국공산당 순시원 박길룡(=박타이)은 민생단 문제로 격돌하게 되고, 결국 박길룡이 박도만을 사살하고 만다. 학생 시절부터 얽힌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살아남은 김해연은 혼미한 정신으로 권총을 품고 ‘잔인한 세계’에 맞서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세계를 저격”하려고 용정의 총영사관으로 찾아가 최도식을 죽이려 한다. 누구라도 죽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영사관 앞에서 조직의 일원인 서일남에게 발견된 김해연은 최도식을 죽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간도임시파견대의 중대장 나카지마를 찾아가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김해연은 나카지마를 납치하여 어랑촌 근거지에 고립된 주민들을 빠져나가게 하는 것을 나카지마의 석방 조건으로 내건다. 지팡이를 짚은 여옥도, 중국공산당과 결별하여 오직 조선 사람만으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겠다던 박길룡도 이때 포위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한 발 총성이 울리고, 박길룡은 죽음을 맞는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김해연은 다시 용정으로 가, 총영사관 경찰을 그만두고 만주중앙은행 용정사무처에서 일하고 있는 최도식을 찾아가 그 모든 혼돈의 진원지가 된 정희의 마지막 모습과 정희의 편지가 전해진 사연을 듣는다.


“정희가 내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출판사는 김연수 작가가 일찍부터 타인의 배제,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세계―조국, 민족, 이념보다는 ‘인간의 조건’에 매료되었다고 평가한다. 일제 강점기하, 중국과 일본, 조선의 점이지대(漸移地帶)였던 북간도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조차지 ‘영국더기’를 둘러싸고 전해지는 가슴 저릿한 사연들은 소설가로서 저버릴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더구나 엄혹한 세계에서 조선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고상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혁명에 투신했던 동지들이 서로를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 마치 마녀사냥을 하듯 무차별 처형을 감행하고 급기야 3,4년 만에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기막힌 ‘민생단 사건’의 사연은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민생단 사건’과 만주의 항일독립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친 독립투사이자 혁명가들이었지만, 한국사회에서 ‘민생단 사건’에 대해 언급하거나 연구하는 것은 금지된 것처럼 보인다.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학자 중에서 극히 일부만 그 사건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민생단 사건’을 비롯한 만주에서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주축이 민족주의 세력(좌파와 우파를 포함하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이후 한반도 남단을 장악하고 지배한 것은 반일 독립투사나 항일운동가들이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일제에 빌붙어 일신의 안녕과 부귀를 추구한 친일파와 민족부역자들, 그리고 기회주의자들이 해방과 동시에 또다시 미군정에 빌붙어 ‘반공’과 ‘친미’를 외치며 한국사회의 기득권과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지배했던 한국사회의 70년 현대사에서 만주에서의 민족주의와 좌파 성향의 독립운동, 무장투쟁에 대한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눈과 입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만주항일무장투쟁과 ‘민생단 사건’이 기피되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북한과의 ‘대결의식’ 또는 남한 지배계층의 ‘정당성 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만주항일무장투쟁이 조선노동당과 국가의 형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상적, 문화적 뿌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지도부 또는 지배계층 스스로도 그런 부분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에서 정당성이 턱없이 부족한(없는) 남한의 지배계층 입장에서는 항일무장투쟁과 ‘민생단 사건’이 남한사회에 알려지는 것이 죽도록 싫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밤은 노래한다>를 읽고 싶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만주의 항일무장투쟁과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한민족의 근현대사가 궁금한 부분도 있었지만, 북한에서 정치와 사상적인 측면에서 지주로 삼는 ‘주체’와 ‘자주’라는 개념의 출발이 바로 ‘민생단 사건’을 겪은 북한 지도부의 1세대에서 비롯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는 점에서, 1927년 낡은 세계를 부숴버리겠다며 밤마다 영국더기 동산교회에 모여 열에 들뜬 목소리로 혁명을 떠들어대던 네 명의 중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뒤질세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서둘러 선언했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당신도, 나도,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247쪽)

인터넷과 세계화로 인해 지구촌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21세기에도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연결된 만큼 사람 사이는 멀어지고 개인들은 더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것 같다. 혼란과 갈등의 수준 역시 인터넷 이전 시대에 못지 않다. 각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밤은 노래한다>의 시대적 배경은 인터넷도 없고, 대중매체도 변변치 않았던 1930년대다. 더군다나 동아시아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격변기였다. 조선반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짓밟히고 더렵혀졌다. 일제와 그 주구들의 날선 감시와 곳곳에서 도사리는 총구를 피해다니기도 벅찼다. 조선인 모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다. 그런 시대적, 지리적 상황에서 패기와 열정만 있었던 20대의 조선 청년이 만주 벌판을 뛰어다니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민생단 사건’으로 숨져간 수많은 조선 청년들과 항일독립투사들의 명복을 빈다.

-인상 깊은 문장


“먼저 사랑이 오고, 행복이 오고, 질투심과 분노가 오고, 그리고 뒤늦게 부끄러움은 찾아온다. 나카지마와 정희를 향해 까닭 모를 분노를 느꼈던 그때의 일이, 편지를 펼쳐 그 안에 씌어진 글을 읽고 나서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던 일이 지금은 너무나 부끄럽다.”(48쪽)


“1933년 여름, 유격구에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 물음의 정답은 없다. 그들은 조선혁명을 이루기 위해 중국혁명에 나선 이중 임무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구국군이 일본군에 패퇴한 뒤에도 끝까지 투쟁한 가장 견결하고 용맹스런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동시에, 한편으로 일단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면 제아무리 고문해도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던 일제의 앞잡이들이었다. 누구도,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날, 박도만이 유격구에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고 해도, 혹은 유격구를 생명으로 보위할 마음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 두 가지 모두를, 혹은 그 어느 쪽도 믿거나 믿지 않을 도리밖에 없었다. 1933년 간도의 유격구에서 죽어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간도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객관주의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213쪽)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체만이 자신이 누군지 소리 내 떠들 권리를 지녔다. 시체가 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납득했으니. 유격구에서 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그 시체들은 저마다 이렇게 떠들었다. 나는 민생단으로서 동지들의 골수를 적에게 팔아먹었다. 나는 혁명을 보위하기 위해 내 살과 피를 팔아먹었다. 그 아우성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간도 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죽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경계에 서 있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민생단도 되고 혁명가도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항상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므로, 시시때때로 운명이 바뀐다는 뜻이므로.”(248쪽)


“그거 알아사 씁네. 내사 동무한테 애당초 맘도 없었는데 이 손일랑 그만 정이 붙어버렸소. 동무 처음 왔을 때, 송 영감이 희대의 영웅이 나왔다며 떠들었습지. 마작하다가, 혁명하다가, 특무질하다가 목 매달리는 사내는 많아도 여자 때문에 자기 목을 매는 사내가 간도 땅에 흔치는 않습지. 그런데 용정 나가는 길에 마바리에서 손 아프다고 우는 걸 옆에서 보니 그 맘은 또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데. 마음이야 어디 붙었는지 내사 모릅지. 하지만 손이야 눈에 보이니 만져주고 싶었습지. 그러다 그만 정 깊이 들어버렸소.”(273쪽)


“나는 광주 코뮌에 참가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요. 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잊어버린 적은 있어도 내 조국을 잊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계급과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소. 국민당 특무들에게, 일본 제국주의 군대들에게, 헌병들에게, 지주들의 사병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죽어갔소.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소. 고문당할 때 비명을 지르는 사람조차 본 일이 없었소. 하지만 여기 동만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죽어가고 있소. 이런 게 진정한 공산주의의 길이라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오. 나는 동무와 계급이 먼저냐, 민족이 먼저냐를 따질 마음이 없소. 우리에게는 필요한 건 오직 우리만의 나라, 우리만의 국가일 뿐이오. 그게 바로 모든 조선인의 꿈일 뿐이오.”(278쪽)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이젠 그걸 알겠어요.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러기에 말했잖아요.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당신과 그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때, 이 세상은 막 태어났고,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평안 속으로 나는 막 들어가고 있다고.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324-325쪽)

[2017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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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이기영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0
이기영 지음, 이상경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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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일제 강점기 농촌마을의 실상

이기영 <고향> 1933년작, 2015. 11. 문학과지성사


<고향>은 1920년대 중반 원터라는 충청도의 한 농촌마을을 무대로 식민지 자본주의가 강요되는 상황에서 일제의 착취와 그에 따른 농촌의 황폐화, 식민지 자본주의화에 따른 광범위한 농민계급의 분해와 반프롤레탈리아적 성격을 지닌 빈농의 속출, 그에 따른 농민의 노동자화와 노동동맹의 필연성, 그리고 파업과 소작쟁의 등을 통한 빈농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원칠, 김선달, 조첨지처럼 땅을 지키고 살아온 원터 마을의 여러 빈농들과 새로운 것에 대한 지향을 강렬하게 품고 성장하는 인순이, 인동이, 방개, 막동이 등 농촌의 젊은 남녀들을 한 축으로 하고, 마름 노릇을 하면서 중간에서 농민들을 수탈하는 안승학과 고리대금업을 하는 권상철 등이 다른 한 축을 이루어 전개된다. 거기에 소작농의 아들로서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향한 전위적 지식인 김희준이 농민들을 의식화하고 그들의 집단 의식을 매개하여 마름 안승학에 맞서는 소작쟁의까지 이끄는 고리 역할을 하며, 안갑숙, 권경호처럼 자기의 계급을 마침내 뛰어넘어 민중의 편에 서는 지식인까지 광범위한 인물이 등장한다. 


작품은 주인공 김희준이 5년 동안 동경 유학을 마치고 고향인 원터 마을로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마을은 한편으로는 전등과 전화가 가설되고 읍내에는 제사공장도 들어서면서 시골 읍내가 도회지로 변하는 눈부신 발전을 했지만 농민들은 점점 못살게 되어 술지게미까지 사다가 먹는 판이다.

농민들은 희준이가 번듯하게 출세할 것이라는 선망과 기대를 가지는 한편 마름인 안승학과 일제의 순사는 희준이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희준이는 농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직접 농사를 지으며 마을 청년회 일을 보고 야학을 연다. 농민운동보다는 여가 선용에 더 관심이 많은 청년회원들은 소시민성을 깨달으면서 그는 야학을 바탕으로 두레를 모은다. 마름 안승학은 두레를 놀면 소작인들이 합심하여 힘을 가지게 될까 두려워하여 학삼이로 하여금 방해공작을 펴게 하지만 실패한다. 

방개를 놓고 사랑을 다투던 인동이와 막동이, 소가 뜯어 먹은 콩잎 때문에 큰 싸움을 벌인 백룡이 모친과 쇠득이 모친 등도 두레를 놀면서 화해하고 서로 한마음이 될 수 있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유식꾼으로 살아온 경력 때문에 늘 진보적 견해와 보수적 견해로 대립해 온 김선달과 조첨지도 두레를 통하여 합심하게 된다. 


서울 유학을 가 있던 안승학의 딸 갑숙이는 고향에 와서 소꿉동무였던 희준이의 변화한 모습에 찬탄하며 경호와의 연애 문제로 부녀간의 충돌을 일으키고 가출하여 읍내 제사공장의 여공이 된다. 제사공장에는 가계를 돕기위해 이미 씩씩한 여공이 된 인순이와 인동이에 대한 애정을 누르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시집을 갔다가 못 참고 뛰쳐 나와 건강한 여공이 되어 새 생활을 시작한 방개도 있다 그리고 갑숙이와 연애 문제가 꼬이면서 자신이 읍내 부자 권상철의 아들이 아니라 구장집 머슴 곽서방의 아들임을 알게 된 경호도 새 생활을 꿈꾸며 이 공장의 사무원으로 들어와 있다. 

원터 마을의 농민들이 모처럼 풍년의 꿈에 들떠 있을 때 홍수가 나서 논은 모두 물에 잠기고 인동이 네 담이 무너져 그 아내가 유산을 하는 등 마을 전체가 큰 피해를 보게 되자 사람들은 안승학에게 소작료를 탕감해 달라고 청원하나 들어주지 않아 민지주에게 직접 요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지주는 모든 것을 마름에게 일임할 뿐이다. 마름 안승학은 오히려 지주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여론의 중심이 된 인물들만 탕감해 주겠다는 술책을 쓰려 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희준이의 지도로 단결하여 벼를 베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시일을 끌면서 농민들은 당장의 배고픔 때문에 벼를 베어야겠다고 동요한다. 


이들의 동요에 희준이는 크게 당황하고 그 동안 자신이 행한 조직사업과 농민들에 대한 의식화사업의 수준에 회의하게 된다. 그 때 갑숙이, 방개 등이 기금을 내놓아 급한 변통을 하고 인동이와 김선달이 농민들을 설득하여 단결을 흐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안승학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갑숙이와 경호의 비도덕적 계를 폭 로하겠다는 위협으로 안승학을 굴복시키고 농민들은 승리를 거둔다.


작품의 배경이던 1920년대는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산 계획의 여파가 농촌을 황폐화시킨 시기이다. 소지주와 자작농이 몰락하고 소작농이 급증하며, 급격한 계층 분화 현상을 보이던 때였다. 곡가는 폭락하고, 이에 따라 기승하는 고리대금업, 가혹한 소작료 등이 농민을 극심한 기아와 유랑으로 내몰았다. 

이기영은 <고향>에서 이러한 농촌의 가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였고, 농민들의 단결과 저항을 통해 이를 타개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식민지 조선의 항일운동가로서, 그리고 봉건적인 착취체제를 타파하려는 실천적인 문학가로서 일제시대의 적나라한 사실을 보여주고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작가가 이 작품을 선보였던 1930년대 중반은 상당수 지식인들과 계몽운동가들이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한 때였다. 


현대 문학계에서 <고향>은 ‘프로문학의 정점’이자 한국 근대 장편소설에 사실주의(리얼리즘)의 확립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로문학’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줄임말로, 1923년을 전후하여 사회의식을 강조하며 등장한 신경향파 문학이 1925년 8월 ‘카프(KAR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결성과 함께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문학사조를 말다.

저자 이기영(李箕永, 1895. 5. 29 ~ 1984. 8. 9)은 일제 강점기 카프의 맹원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이다. 도쿄 세이소쿠(正則)학교를 중퇴하고,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4년 문예지 《개벽》 현상문예에 〈오빠의 비밀 편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서화〉, 〈인간수업〉, 〈고향〉, 〈신개지〉, 〈땅〉, 〈두만강〉, 〈봄〉 등을 발표했으며, 희곡 작품으로 〈그들의 남매〉, 〈월희〉 등이 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의 득세와 위협으로 월북하여 북한에서 조선예총위원장 등 각종 기관의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집단성과 프로 문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을 쓴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영등포공부모임의 작년 11월 세미나 교재로 선정되었고, 참가자들의 큰 관심 속에 열성적인 토론과 평가가 진행되었다.


[ 2016년 7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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