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삐딴 리 - 전광용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9
전광용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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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전광용은 1919년 한경남도애서 태어나 경성경제전문학교,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1953년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5년 조선일보에 단편 소설 <흑산도>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1962년 이 작품 <꺼삐딴 리>로 제7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8년 작고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책은 저자의 단편소설 작픔을 모아놓은 것이다. 책 속에는 <꺼삐딴 리>를 포함하여 '흑산도', '진개권', '지층', '해도초', 'GMC', '사수', '크라운 장', '충매화', '초혼곡', '면허장', '곽 서방', '남궁 박사', '죽음의 자세', '세끼미' 등 15개 작품이 실려 있다.

저자의 작품에 대해 해설을 하는 평론가 김종욱은 "1960년대에 발표된 전광용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물질적인 환경이나 신체적인 외양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중략)... 문제는 이러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삶 또한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과는 다른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증오심에 사로잡혀 폭력을 쓰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에서 찾지 못한 채 사회의 규칙과 질서에 전면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인간적인 타락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작품 중에서 <꺼삐딴 리>는 왜곡된 인간 심리를 민족적,역사적 차원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경우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서울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종합병원에 버금가는 명성과 수입을 올린다. 그는 일제 감정기 동안  '국어 상용의 가'라는 액자를 받기 위해 아이들을 일본인 소학교애 보내 일본어만 쓰게 강요하고, 마침내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밉보일 것이 두려워 형무소에서 풀려난 사상범을 외면한다.
이인국 박사의 이러한 행동은 식민지인이라는 열등감을 벗어던지기 위한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서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인들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일본인과의 교제에서 열등감을 벗어던지고 "떳떳한 구실"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인국 박사가 "내선일체의 혼인론"을 통해서 심리적인 우월감을 얻었다는 것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인국 박사는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다시 지배자의 언어인 러시아를 익히고 우연한 기회에 스탠코프 소좌의 수술에 성공함으로써 재기하게 된다. 이러한 면모는 월남한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병원의 고객을 권력층이나 재벌과 같은 부유층으로 제한하고, 영어를 부지런히 배우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이 일제 치하,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민족사적 비극과 역경을 이겨낸 정신적 승리자가 아니라 자기 일신만을 위한 처세술로써 민족적 위기를 외면했던 정신적 패배자를 만나게 해준다. 속물근성에 젖은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과 같은 일제 시대의 지식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수 천명의 친일부역자들은 '친일,부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 속의 이인국 박사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물적 지식인, 부도덕한 지식인, 권력지향적 지식인은 살아 남아 한국 현대사에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이 작품은 저자의 실제 인생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평론가 이시형은 <인간 수호의 서신 - 전광용론>(현대한국문학전집 5, 신구문화사)에서 전광용을, 작품의 소재를 앉아서 구하는 작가가 아니라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는 "발로 쓰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할 때 직접 체험할 뿐 아니라 간접 경험에서도 소재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문단 데뷔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광용의 창작 방법론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저자 본인도 <전광용, 정한숙>(산구문화사, 1968)에서 "내가쓴 작품에는 현지의 답사에서 힌트를 얻거나 취재한 것이 적지 않다. '흑산도'는 흑산도의 학술답사에서, '진개권'은 휴전선 오지에 있는 찬구의 미군 쓰레기칸에서, '지층'은 태백산맥의 탄광에서..."라고 직접 애기한 바 있다.

한국은 민족의 위기를 외면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한 친일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현대사를 이어 왔다. 그런 현대사가 해방 후 60년 동안 한국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쳐왔는지는 오늘의 현실이 뼈저리게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민족과 다수의 국민, 약자와 정의를 외면하고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영합하는 자들이 지식인들의 상당수를 구성하고 있으며, 사회 전체에 공동체의 이해와 공존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21세기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한국사회 공동체를 되살릴 수 있는 철학적,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모범이 확산되어야 할텐데...

[ 2012년 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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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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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주인공이 완전 마초야!" 새해 들어 두 번째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친구 하나가 꺼낸 말이다. 물론 그 친구는 그렇게 애기한 후에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 몇 권까지 더 소개해 주었고...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열 입곱번째 것이다. 법정스님이 추천도서 50권은 '닥치고' 읽기로 마음 억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을 뇌 한 구석에 담아두고 계속 읽었다.
스님은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조르바의 말을 인용한다. "요 몇 해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도대체 무엇이오?" 조르바의 이 질문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묻는 준엄한 질문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읽고쓰고 하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토록 많은 종이를 씹어 삼키면서 얻어 낸 게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본질과 이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낱 종이벌레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그리스의 역사와 저자의 삶에 대해 먼저 알아야했다. 작품 자체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하여 구성된 것이고 작 중 주인공인 '조르바' 역시 실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르바'에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크레타는 터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크레타 사람들이 터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르는 중에 그가 성장한 것이다. 크레타의 신들을 길로 낸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가. 욕심 많고 거짓말 잘하고 난폭하고 거칠기로 소문 난 크래타안들의 섬인 것이다. '평화시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불길에 ?기게 한다'는 섬...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섬은 "한 번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기적이나. 내가 크레타 사람이라는 것은..."인 것이다. 그는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74년의 생애를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눕고 다녔다고 한다.
역자인 이윤기는 카잔차키스의 삶을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만을 읽어 본 나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카잔차키스는 1917년 그의 나이 34세 때 조르바를 만났다.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조르바라는 일꾼을 고용하여 펠로폰네소스에서 갈탄을 캐려고 시도했다, 이 경험은 1915년 벌목 계획과 결합되어 뒷날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발전된 것이라 한다.

소설은 광산사업을 하러 크레섬으로 떠나는 배를 그리스 본토의 어떤 항구애서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공부하고 글쓰며 영혼의 구원을 찾는 사람이다. 절찬한 친구가 카프카스에서 위험에 처한 그리스 동포들을 구하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주저했다. 친구는 그에게 "안녕! 책벌레야!"하며 떠났다. 그는 원고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갈탄광으로 향한 것이다. 책벌레 족속과 거리를 두고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선착장 근처 술집에서 주인공은 조르바를 처음 만난다. 술집 안에서 조르바와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인공은 산투르(그리스의 전통 악기)애 대한 조르바의 말을 듣고 조르바를 일꾼으로 고용하려고 마음먹는다.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을 보고 철자법 배우겠다는 생각은 당신도 안 하시겠지? 물래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인간의 이성이란 그거지 뭐.." "산투르를 다룰 줄 알개 되면서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되니까..."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에요. 마누라가 한 마디로 될 것을 열마디 잔소리로 늘어놓는다면 무슨 기분으로 산투르를 치겠소?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끽끽거리는데 산투르를 어떻게 치겠소? 산투르를 치려면 온갖 정성을 산투르에만 쏟아야 해요. 알아듣겠어요?"
주인공은 조르바의 애기를 듣고 그를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고 느꼈다. (이 부분도 공감하기 어렵다. 내가 좀체로 주인공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은 주인공과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 들어가 여관에 자리를 잡고 인부들을 불러 갈탄광애서 석탄을 캐는 과정을 기본 구조로 서술된다. 주인공이 조르바와 함께 지내면서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 조르바의 말과 행동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르바는 낮에는 일꾼들을 데리고 탄광에서 죽으라고 일하면서 주인공은 여관에 머물게 한다. 조르바는 여관 도착 첫날부터 여관의 주인 여자와 눈이 맞아 사귀게(?) 되고 주인공은 과부를 두고 마음 속으로 갈등을 거듭한다. 과부를 짝사랑 하던 마을 지주의 아들이 자살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성을 잃고 과부를 때려죽인다. 조르바는 석탄을 캐고 이동시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철탑과 캐이블을 구사,설치하였으나 처음 시범운영하는 날 실패하고 만다. 두 사람은 탄광사업 실패를 받아들이고 그날 밤 함깨 해방의 춤을 춘다. 실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와 헤어진 후 그리스의 장관을 역임하고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주인공은 조르바와 함께한 몇 개월 동안 조르바를 통해 것들을 느끼고 배우고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고 말보다는 몸짓에 익숙한 사람이다. 질그릇을 만들려고 물레를 돌리는데, 새끼손가락이 거슬린다고 도끼로 잘라 버렸다.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열정과 자유를 발견하였다. 조르바가 내뱉는 말은 조르바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주인공의 이제까지의 인생을 깡그리 씻어 내고 조르바에게서 배운 것들로 다시 채우기를 소망한다.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 땐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산다는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요? 허리띠를 플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물애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마시지... 안 마시면 목이 마르지... 두목,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릴리다."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씌여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읍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역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과 작품의 핵심에 위치하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그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성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매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이는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라고 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게 물리적 변화이고 포도즙애 포도주가 되는 게 화학적 변화라면,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성체)'가 되는 것, 그것이 '매토이소노'라고... 역자는 조르바가 사업채 하나를 '춤,으로 변롸시킨 것도 '매토이소노'라고 설명한다.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책을 덮고 나니 나 역시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지금 종이벌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다. 몇 년 전부터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것은 책... 나는 이들 책 속에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 혹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결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혹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은 아닐지...

친구가 애기한 '마초'의 전형같은 조르바, 그리고 법정스님의 화두... 어쩌면 20세기 초의 그리스에서는 마초처럼 '책벌레'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 2012년 1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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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옥중에세이, 개정 복간본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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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7일 밤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 1층에서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회단체 '나눔문화(www.nanaum.com)'의 11주년을 기념하는 '후원의 밤'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약150여명의 회원들과 '나눔문화 '연구원들이 함께하는 자리였고 나 역시 회원 자격(1년 밖에 안됐지만..)으로 초대받았다. 2000년 설립 후 11년 동안 정부나 대기업의 후원 없이, 언론이나 기타 매체를 통한 홍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회원들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박노해씨가 단체의 설립자고...

단체의 활동 중에서 내가 직접 참여한 것이라고는 1년에 두 차례 진행되는 '평화나눔아카데미'라는 강연에 참여하는 것.. 광화문 근처에 있는 '나눔문화'에 도착하면 마음은 푸근하다. 그 이유는 젊은 연구원들이 한결 같이 상냥하고 친절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눔문화는 연구원들이 대부분의 단체 활동을 주도하고 있고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도 열심히 진행한다. '희망버스'에서 연구원들을 만나면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박노해씨는 단체 설립 이후부터 자금까지 주로 해외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레바논, 팔레스타인, 아프카니스탄, 아체, 캄보디아 국경 등 주로 소외되고 탄압받는 소수민족과 소통하고 희망을 나누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다닌다. 그래서 나는 박노해씨의 진정성에 대한 갚은믿음이 있다.

사실 '후원의 밤' 행사에 참여했지만 행사 기간 내내 '회원'으로서 깊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단체의 설립 취지와 활동에는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지만 단체의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연구원이나 다른 회원들과 공감,소통하는 자리가 부족하게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나 스스로가 단체와 더 밀집하게 다가가지 않았던 태도가 가장 크겠지만...
 
이 책은 여름에 나눔문화는 놀러가는 연구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체에서 선물로 받은 것이다. 1997년 출간된 박노해씨의 옥중에세이인『사람만이 희망이다』는 2002년 절판된 후, 10년 만에 재발간된 것이다. 처음에 1997년 ‘무기수’로 수감 중이었던 박노해 시인의 옥중 구술과 메모를 토대로 출간된 책이기에, 2011년 개정 복간본에서는 박노해씨가 직접 문체를 다듬고 편집과 디자인을 변화해 새롭게 펴냈다.
 
 이 시집은 1997년 출간 다음날 전국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기록, 30만부 가까이 읽히면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수많은 독자들과 진보인사들은 물론 주요 보수 인사들과 대선주자까지 암송하며,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단 한 문장은 이념과 세대를 넘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1990년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이념에서 사람으로”라는 급진적이고 근원적인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음 출간 당시 이 시집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면.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시'나 메사지는 거의 없었다.
돌아보면 박노해, 그는 언제나 “최초의 목소리”였다. 1980년대 군사독재와 노동탄압의 시대에 ‘노동해방’을 화두로 던졌고, 이 땅에서 금기였던 ‘사회주의’를 최초로 공개 천명했으며, 1990년대 낡은 이념과 시장 만능에 대항하며 다시 ‘사람’이 중심이라는 새로운 주체 선언을 한 것이다. 나아가 ‘삶의 일치’라는 새로운 진리의 거울을 제시함으로써 ‘불편한 진실’의 책이기도 했다.

물론,박노해라는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단적이기도 하다. 내 주변의 어떤 친구들은 1990년대 초 박노해씨가 체포될 당시 언론에 보도된 온갖 추문들이 사살이라고 주장하가도 한다. 당시 상황이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었고 여전히 정보와 사실이 통제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나는 소문과 전언을 전후하여 그 사람이 보러온 모습을 통해서, 내가 사실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 그를 평가하고 싶다. 내가 감히 그를 평가할 입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사회 모순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의 고통과 꿈과 투쟁을 기적처럼 한 몸에 구현했던' 투사였음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그의 삶은 곧 시대 정신의 표상이었다. 이름 없는 현장 노동자에서 해고자, 수배자, ‘얼굴 없는 시인’, 사회주의 혁명가까지. 격동의 역사를 정면으로 뚫고 나온 그는,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안기부에 구속되어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가슴에 777번을 새긴 푸른 수의를 입은 서른네 살 젊은 혁명가는, 그로부터 7년 동안 1평 남짓한 감옥 독방에서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아낸다.
자신이 ‘인간해방의 길’임을 믿고 온몸을 던져 밀고 온 사회주의 붕괴 앞에, “죽더라도 정직하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자”며 “실패한 혁명가”로써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불가능한 이상을 향해 한 시대의 끝 간 데까지 밀고 나간 젊은 혁명가의 투쟁과 묵상의 기록, 그것이 1997년 출간된 『사람만이 희망이다』이었다.
 
 2011년 올 한 해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앞으로의 세계가, 한국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할 때가 많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없다, 대안이 없다’는 2011년 오늘, 오직 돈과 권력만이 희망이라는 듯한 이 시대에, 왜 다시 사람만이 희망인가?
그래도 "이 시집을 통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시집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리 속에 맴돌던 생각이었다.

박노해시인은, 희망의 주체가 사라진 시대 사회를 향해서는 누구나 옳은 말을 하지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직접 살아내는 ‘희망의 주체’가 보이지 않는 지금, ‘세상을 혁명할 것인가 나를 먼저 혁명할 것인가’ 그 처절한 떨림 위에 피어난 뜨거운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아니, 오늘 더욱 절실하다고...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지금 내가 딛고 선 자리, 내 삶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희망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길 잃은 날의 지혜」),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나 하나의 혁명이」).
지극히 단순하나 큰 깨달음이다. 이것이 바로 박노해씨가 제시하고 있는 ‘21세기 새로운 해방 주체’의 시작 지점이다. 물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남아 있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순간부터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또 다른 질문... 좋은 삶이 사라진 시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좋거나 나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를 말하고 '나쁜 삶과 행위'를 말하지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내용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생각은 진보일지라도 생활은 보수로 분열되어 괴롭게 헤매고 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불의한 사회 체제에 저항하는 ‘사회 혁명’과 동시에, 그 적들이 나의 욕망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생활 속의 진보’를 이뤄가는, “안과 밖의 동시 혁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가혹한 일상의 광기는 / 우리 몸과 생활과 관계와 내면의 구석구석까지 / 쉴새없이 파고들어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면」).

우리 삶의 억압의 실체들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도, 그 적을 닮아가는 나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에 죽비를 치고 있다. 나아가 신세대 문화에서 농사마을까지, 몸철학에서 마음살핌까지, 적은 소유로 기품 있는 삶에서 나눔의 삶까지를 생생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박노해가 말하는 ‘지구 시대의 새로운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금 바로 좋은 삶을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이념이 사라진 시대 ‘이익’과 ‘실용’이라는 가장 타락하고 가장 강력한 이념만이 남은 지금,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상, 과거 ‘유일주의’를 넘어 삶 전체를 품어 안는 온전성의 사상은, 10여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짙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묻습니다 / “아직 사회주의자입니까?” / 나는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 “예!” “아니오!” / 사회주의는 삶의 당연當然이 아닌가요 / 삶의 본연을 긍정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진보할 리 있겠습니까 / 삶의 당연을 품에 안지 못한 자본주의가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 이상을 갖지 못한 현실이 허망하듯 / 현실을 떠난 이상도 공허한 거지요 /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주의자’입니다 // (…)나는 흑이면서 백이고, 흑과 백의 양극단의 떨림 사이에서 / 온몸으로 밀고 나오는 까마귀의 세 번째 발입니다 / 중간 잡기가 아닙니다 흑백 섞은 회색이 아닙니다 // (…)세 발 까마귀 / 다시 시작하는 발, 또 하나의 발, 우리 희망의 발이여!”(「세 발 까마귀」).
여기서 자본주의는 19~20세기의 자본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는 20세기에 멸망한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돈과 권력이 삶의 전부인 듯해도, 이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강제할지라도, 한사람 한사람 저마다의 깊은 곳에 선함과 사랑과 정의가 숨쉬고 있다. 그것이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믿음을 끝내 놓지 않는 이유이다.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다시」), “저마다 지닌 / 상처 깊은 곳에 / 맑은 빛이 숨어있다 // 첫마음을 잃지 말자 // 그리고 성공하자 /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 첫마음으로”(「첫마음」)라며 “길 잃은 날의 길 찾는 그대”를 다시, 간절히 부르고 있다.
새로운 억압과 불안 속에서도, 늘 새로워진 사람과 사람들의 물결은 존재했고,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그 빛나는 사람의 등불을 믿는 것이다. 희망은 결코 그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대가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우리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속삭이듯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년초에 박노해씨의 최근 시집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감명 깊게 읽었다. 그 시집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향수와 배움, 2000년대에 그가 보고 느꼈던 한반도 밖의 또 다른 진실과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작은 풀잎 하나에서부터 희망의 씨앗을 찾는다. '나눔문화'를 시작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담담하게 그려낸 시에는 그가 희망을 싹틔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보다 이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박노해씨가 1997년에 부딪혔던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타락하지만 강력한 이념과 이데올로기 속에 놓여진 나, 담론과 거대흐름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소리만 높이는 나,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나, 희망보다 무력감을 쉽게 느끼고 믿음 보다는 불신이 뿌리깊은 나...
이런 나에게 이 시집이 무언가 자그마한 깨달음을 던져주고 있다.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야, 시 속에 파묻혀 느껴야만이 그 속에서 나의 믿음과 희망과 시작을 더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겠지...
 
사람에 상처받고 사람에 눈물짓고 사람에 절망하면서도, 그가 그래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꿈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10년을 훌쩍 거슬러 오늘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길 잃은 날의 길 찾는 그대”를 다시, 간절히 부르고 있다.
 
<< 기억에 남는 시 >>

'아직'에 절망할 때 / '이미'를 보아 /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 먼저 허리 숙여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아직과 이미 사이 」 p.23)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 (「 다시 」 p.63)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십시오 //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 길 잃은 날의 지혜 」 p.67)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이 지구 위 60억 인류 모두가 / 나처럼 먹고 쓰고 생활한다면 / 이 세상이 당장 좋아질 거라고 / 떳떳이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 // 내가 먼저 적게 벌고 나눠 쓰면서 / 덜 해치고 덜 죄짓는 맑아진 얼굴로 / 모두 나처럼만 살면 좋은 세상이 되고 / 푸른 지구 푸른 미래가 살아난다고 / 내가 먼저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 //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희망의 모든 것이다 / 그것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 천지간에 나 하나 바로 사는 것 (「 나 하나의 혁명이 」 p.69)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 주저앉지 마십시오 / 돌아서지 마십시오 / 삶은 가는 것입니다 /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 굽이 돌아가는 길 」 p.106)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묻습니다 / "아직 사회주의자입니까?" / 나는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 "예!" "아니오!" / 당신은 쉽게 물을지 몰라도 / 나는 지금 온 목숨으로 대답하는 겁니다 // 자본주의가 삶의 본연本然이라면 / 사회주의는 삶의 당연當然이 아닌가요 / 삶의 본연을 긍정하지 않는 사회주의가 진보할 리 있겠습니까 / 삶의 당연을 품에 안지 못한 자본주의가 진보할 수 있겠습니까 / 이상을 갖지 못한 현실이 허망하듯 / 현실을 떠난 이상도 공허한 거지요 / 삶과 인간과 현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얻기까지 / 나는 '아무 주의자'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주의자'입니다 // (...)나는 흑이면서 백이고, 흑과 백의 양극단의 떨림 사이에서 / 온몸으로 밀고 나오는 까마귀의 세 번째 발입니다 / 중간 잡기가 아닙니다 흑백 섞은 회색이 아닙니다 // (...)세 발 까마귀 / 다시 시작하는 발, 또 하나의 발, 우리 희망의 발이여! (「 세 발 까마귀 」 p.111)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하는 게 숙명이어서 /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는 오직 /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어서 / 나는 진실로 경계하는 거야 // 자신을 변화시켜 미래 희망을 키우지 못하는 / 변하지 않는 그 노래 그 몸짓 그 목소리를 / 불변하는 것들 안에 든 치명적인 독소를 / 눈 맑게 뜨고 경계하자는 거야 // 이렇게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지키기 위해 / 우리가 앞서 적극 변화하지 않는다면 / 스스로 변질되고 마는 거야 저렇게 // 우리가 먼저 날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거야 그렇게
(「 불변의 진리 」 p.117)

생명농사 지으시는 농부 김영원님은 / 콩을 심을 때 / 한 알은 하늘의 새를 위해 / 또 한 알은 땅속의 벌레들을 위해 / 나머지 한 알을 사람이 먹기 위해 / 심는다고 말씀하십니다 // 지금도 만주 들판에는 삼전 三田이 전해오는데 / 일제 때 쫓겨 들어간 우리 조상님들이 / 눈보라 속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논을 3등분해 / 하나는 독립운동하는 데 바치는 군전 軍田으로 / 또 하나는 아이들 학교 세우는 학전 學田으로 / 나머지 하나는 굶주림을 이겨내는 생전 生田으로 / 단호히 살아내신 터전이 바로 삼전인데 //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오늘 / 내가 번 돈 / 나의 시간 / 나의 관심 / 나의 능력 / 어디에 나눠 쓰며 살고 있나요 // 지금 나는 콩 세 알의 삶인가요 / 삼전의 뜨거움 삼전의 푸르름 / 셋 나눔의 희망을 살고 있나요 (「 셋 나눔의 희망 」 p.197)

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 저마다 지닌 / 상처 깊은 곳에 / 맑은 빛이 숨어 있다 // 첫마음을 잃지 말자 // 그리고 성
공하자 /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 첫마음으로 (「 첫마음 」 p.245)

- 그 여자 앞에 무너져 내리다 - (p.8)
 
그 해 첫눈이 펑펑 내리던 밤
엉금엉금 기어가는 마지막 호송차는 만원이었지요
그 바람에 규정을 어기고 나는 그 여자 옆에 앉혀지게 되었습니다
눈송이 날리는 창 밖만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그 여자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검은 눈이 어느덧 젖어 있었습니다
자기는 아이 둘 가진 노동자인데 교통사고로 들어와서
합의를 못 보다가 오늘에야 나가게 되었다고
내 시를 노래로도 부르고 이야기 많이 들었다고
항상 죄송하고 마음 아팠다고...
 
눈이 내리니 어두운 세상도 참 고와 보이네요
아까 내내 창 밖을 내다보며 저 이런 생각 했어요
죄수복에 포승줄 묶인 내 모습이
차장에 비치는 게 그렇게도 싫었는데,
아니야 아니야 나야말로 이 모습 이대로 죄인이구나
난 지금까지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노조에도 참여하고 가진 자들 욕도 하고
잘못된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고 원망도 많았는데
이제 생각하니 그게 다 도둑놈 마음이었어요
죄가 어디 홀로 지어지는 건가요
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죄짓고 사는 건데
저들의 큰 죄 속에는 제 자신의 죄가 스며들어 있고,
제 욕심과 비겁함과 힘없음이 저들을 더 크게
더 거칠 것 없이 죄짓도록 부추겨온 건데요
제 자신이 먼저 참되고 선하고 정의롭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 평화와 정의를 바랄 수 있겠어요, 도둑 마음이지요
가진 자들의 탐욕과 부정부패는 사납게 비판하면서도
왜 제 자신의 이기심과 작은 부정들은 함께 보지 않았을까요
왜 네 탓이오 네 탓이오만 외치고 제 탓이오가 없었을까요
'제 탓이오 제 탓이오 그리고 네 큰 탓이오!'
라고 해야 옳은 게 아닐까요
왜 저는 못 갖는 한이 아니라 안 갖는 긍지를 지닌
떳떳한 인간으로, 진실로 당당한 노동자로
사회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지 못했을까요
첫눈 내리는 오늘 밤에야 제가 자유의 몸이 된다니까
지난 삶이 부끄럽게 돌아봐지네요
좋은 세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전 솔직히 공짜로 바란 거에요
좋은 세상, 좋은 세상, 하면서도 사실은
가진 자들의 부귀와 능력을 시샘하면서
좋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몫의 행복을 훔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며 살아온 겁니다
선생님을 뵈니 더욱 죄송하고 자꾸만 눈물이 나네요
어디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오나요, 단번에 오나요,
우리 빼앗긴 게 한꺼번에 되찾아지나요
설사 빼앗긴 돈과 권리는 되찾을 수 있을지라도
빼앗긴 삶과 인간성과 제 상한 영혼은 어디에서 찾을까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변하려는 노력 없이
가난한 제 돈과 시간과 관심을 쪼개서
참여하고 보태려는 구체적인 실천 없이
좋은 미래를 어디에서 누구에게 바랄 수 있겠어요
좋은 세상은 어찌 보면 우리 안에 이미 와 자라고 있는 건데,
지금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건데, 좋은 사람으로 살면서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착실히 힘 모아나가면
사실 저들은 껍떼기에 지나지 않는데
선생님, 저 이제 나가서는 잘 살겠습니다
좋은 세상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제 자신과도 싸우면서 그 힘을 보태겠습니다
 
마치 고해성사하듯 떨리는 목소리로 다짐하던 그 여자
서울 구치소로 가는 어두운 밤길에
함박눈이 가슴 미어지도록 흐득흐득 내리고
느리게 기어가는 만원 호송버스 안에서
오누이처럼 스스럼없이 어깨를 기댄 채
젖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순결한 연꽃송이 같은 말씀들.....
무기징역 선고받고 돌아오던 내 마음은
환하디 환한 슬픔이었습니다
 
운명의 그날 밤, 산처럼 무너져내린 그날 밤!
 
선생님, 제 마음 속에 품어온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회주의가 정말 우리가 바라는 그런 좋은 세상인가요?
그렇게 평등하고 경쟁 없이 편한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습니까?
그렇게 정의롭고 도덕적인 사회에서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사회가 누구 힘으로,
어느 세월에 이루어지겠습니까?
언제쯤 이기적인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이
그런 성인으로 변화하겠습니까?
 
그 여자의 소박한 물음 앞에서
나는 산산이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성실하게 땀 흘리며 살아온 한 여자가
온 삶으로 던져오는 화두 앞에,
태산처럼 육박해오는 준엄한 심문 앞에,
아아 나는 꼼짝없이 무너지고 깨어졌습니다
 
선생님 저는요, 선생님처럼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며 살지는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맞벌이로 잔업까지 뛰지 않으면
매달 카드 결제와 시동생 학비 지불,
친정 어머님 병수발을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머리에 이고 살아가야 할 제 인생의 의무입니다
제 생활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제 인생이 참되고 보람찰 수 있을까요
일 년에 한두 번 임금인상 때 반짝하고 마는
노조활동 같은 거 말구요 회비 잘 내고 서명하고
집회나 시위 있을 때 참여하는 그런 거 말구요
제 일상생활 속에서 제가 주인이 되어서
제가 살아있다는 느낌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나이 들수록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을 닮아가면서
생활 속의 작은 걸음들이 곧바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그런 실천이 무엇인지요
정말 저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고 싶어요 선생님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가슴 미어지게 눈은 내리고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아무 변명도 비껴섬도 없이
그저 정직하게 산처럼 무너질 뿐이었습니다
무너지고 깨어지는 게 내가 할 일이고 남은 희망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산덩이만한 패배와 무너짐, 마지막 한 껍떼기까지
철저하게 깨어지고 쪼개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지난 7년 동안 나는 이 벽 속에서 죽음을 살았습니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가'를 찾는 것이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참혹했습니다
그날 밤 그 여자가 내게 내린 화두가 나를
죽더라도 정직하라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이렇게 아픈 침묵 절필 삭발
정진의 삶을 살게 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이제야
내 안에서 싹이 트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야 고요한 희망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그날 밤 하늘이 내게 보내신 그 여자 앞에
자신 있게 다시 서는 날까지
나의 기다림과 정진은 계속될 것입니다
 
[ 2011년 1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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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소설 전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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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먹어 보지 않은 아이들이 혹시 아직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자..." <광인일기>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식인(食人)사회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이 소설의 마지막에 남긴 말...
 
"틀림 없어요! 틀림 없이 나을 거요. 그렇게 뜨거울 때 먹었으니. 사람의 피를 묻힌 만두는 어떤 폐병이든 즉효야!" <약>
찻집 주인의 친척이 찻집 주인에게 '인육만두'의 효험을 장담하면서 하는 말...
인육만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아들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 첫 번째의 보영활명환은 쟈씨네 제세 약방에만 있는 겁니다." <내일>
죽어가는 아들을 데려온 엄마에게 한약방 의원에게 데려갔을 때, 의원이 처방전을 주면서 다짐하는 말...
결국 아이는 죽었고 아이의 엄마는 가지고 있던 모든 돈과 패물이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인력거꾼은 그 노파의 말을 듣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여인의 팔을 부축하여 한 발짝식 파출소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사건>

내가 그 인력거꾼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내 자신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중국인이 이 별것 아닌 머리털 때문에 괴로움과 수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었는지 알 수가 없네!" <머리털 이야기>
신해혁명 이후 중국 내에서 변발을 자르냐 마냐를 두고 소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이 교대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변발을 두고 민중들을 괴롭힌 것을 말한다...
 
"명절이 지나면? ....... 여전히 관리 노릇이나 해야지...... 내일 가게 주인이 돈 달라고 오거든 초여드렛날 오후에 오라고만 해" <단오절>
지방관리인 주인공은 지방정부의 재정부족으로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 괴롭다. 부인이 이를 하소연하면서 신문이나 서점에 글을 써서라도 생활비를 구해오라고 말하자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리고 중얼중얼 [상시집](중국 최초의 현대시집)을 읽는다.
 
"나는 더는 가르치러 갈 생각이 없네. 여학교라는 게 도대체 어떤 꼴로 되어 갈지 모르겠어. 우리같이 단정한 사람은 확실히 함께 어울릴 수가 없어...." <까오 선생>
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처음 지방의 여학교에 들어온 까오 선생은 여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여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세상 풍속을 걱정한다.
 
"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뎌야만 한다. 나는 진실로 마음의 상처를 깊이 감추고 묵묵히 전진하려고 한다. 망각과 거짓말을 나의 길잡이로 삼고서...." <죽음을 슬퍼하며>
둘이 사랑하여 여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를 시작했지만, 빈곤과 실업으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한 주인공은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고 여자는 가족에게 돌아간 후 죽는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난 후 주인공이 내뱉는 말...
 
 
지난 8월 개인적으로 루쉰 소설 선집을 읽은 후, 10월 독서모임에서 루쉰 소설에 대해 세미나를 하기로 논의가 되었다. 9월에 이 책 [루쉰 소설 전집]을 구하여 읽었다. 참가자들이 여러가지 바쁜 사정으로 11월 초로 연기되면서 며칠 전에야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루쉰 소설 전집]은 여러가지 번역서 중에서 서울대 중문과 김시준 교수가 번역,해설한 것으로 골랐다. 이 전집에는 루쉰이 1918년 발표하여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로 인정받는 <광인일기>부터 1935년 12월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죽은 자 살리기>까지 총 33편이 실려있다.
 
이 책은 루쉰이 일생 동안 발표한 소설들을 엮은 소설집 [납함], [방황], [고사신편] 등 3권에 수록된 33편을 번역한 완역본으로, 중국의 유교적인 가족 제도가 지니는 병폐와, 예절이라는 이름의 굴레가 인간을 얼마나 속박하는지를 미친 사람(狂人)을 통해 들춰 보인 처녀작 <광인일기(狂人日記)>와 중국이 역사적으로 계승하여 온 중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자기 만족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사는 정신 승리법과 우매성, 약점을 아큐에 집약하여 중국 국민적 성격의 전형을 풍자한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도 수록되어 있다.
 
루쉰은 강렬한 민족의식에 기반을 둔 작품을 통해 후대의 문학사조나 형식 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자는 루쉰이 이처럼 위대한 민족의 문학가로 평가받게 된 것은 그가 몸소 민족의 수난기를 살아가면서 민족의 고뇌를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선각자로서 포용하는 의연함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나간 작가적 태도 때문이다고 평가한다.
 
그의 소설은 중국이 봉건주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통하던 과도기에 중국인들이 체험하였던 고통과 혼란과 방황을 주제로 하고 있다. 2천여 년간 쌓이고 쌓여 왔던 봉건주의 전통 사회의 거대한 탑이 붕괴되는 현상은 중국인들로서는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루쉰은 봉건주의라는 전통 사회의 미망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문학 작품을 통해 계몽하여 봉건 윤리라는 미신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앞장서서 중국의 근대화에 공헌했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이 신문에 연재되었을 당시 중국의 많은 지식인 독자들이 마치 자신들의 심장을 향해 비수가 날아오는 것을 보듯이 전율했다고 평한다. 루쉰은 문학의 위대함을 국민들에게 일깨워주었으며 그의 문학사상의 위대함 또한 이것에 있다고 하겠다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 천두슈는 근대화 과정의 필수요소를 ‘과학’과 ‘민주’라고 했다.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와 과학주의의 도입을 근대화의 첫걸음으로 여겼다. 이에 호응하여 나온 것이 후스의 문학 혁명이다. 그의 문학 혁명은 ‘백화문’의 보급이다. 그는 모든 국민이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근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근대화의 필수 조건인 문학 혁명을 실천하고 성공으로 이끈 것이 루쉰이라고 할 수 있다.

 
루쉰의 작품에 대한 역자의 해설이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평을 읽어 보면 이구동성으로 루쉰이 대단히 뛰어난 작가였다고 애기한다. 나는 루쉰의 몇몇 작품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들의 감상만큼의 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것이 작품을 보는 '눈'이나 '마음'의 차이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내가 20세기 초반의 중국사회나 역사, 그리고 다른 작품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내가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루쉰의 작품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미신과 미몽에 빠져있는 중국인들의 모습, 격동하는 중국 근대사의 물결 속에서 당황하고 절망을 느끼는 중국인들의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구체적인 단편소설 속에서 표현하여 중국인 일반에게 보여주려 했던 루쉰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느낀 현실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얼추 오버랩될 수 있다. 사교육이라는 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학생들, 스펙과 일자리, 등록금으로 고통받는 대학생들, 실업과 비정규직,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청장년층, 방황하는 노년이라는 지옥같은 현실 속에서도 서울시장 투표율이 50%를 조금 넘었다는 결과를 보면...
 
[ 2011년 1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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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2011년 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우리 세대의 청춘과는 너무도 다른 지금의 20대... 
농사꾼의 자식으로, 공장 노동자의 자식으로, 장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돌보는 사람 없이 동네에서 끼리끼리 친구들과 '방목'되어 자라던 이들이 대부분의 우리 세대일 것이다.
그렇게 자란 우리 세대는 20대에 30년 가까이 이어온 군사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에 새로운 분위기를 가져왔고 세계적인 경제호황기를 맞이하여 큰 어려움 없이 직업을 선택했고 상당수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를 향유했다.
 
요즘의 20대들은 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시기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평균 1만 달러이고 한창 고도성장기였기에 노동력이 부족하여 '실업'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집안의 아이들도 평균 1~2에 불과하여 우리들 세대와 달리 아주 '귀한' 자식들이었기에 과잉보호되어 자랐고 도시화의 발달로 아이들끼리 어울리기 보다 대부분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또한, 사교육과 부동산 투기에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미디어나 일부 학자들은 그 20대들의 차별성 때문에 'Y세대'나 'Z세대'로 분류하거나, 20년만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경험한 '촛불세대'로 분류하지만 그들은 우석훈씨의 정의대로 '88만원 세대'이기도 하다.
 
외형적인 기준이나 잣대로 지금의 20대를 분석하거나 분류시킬 수 있으나, 실제 그 20대들이 그러한 외적인 환경, 가족의 구성,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고 세상을,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수 있는 정보는 얻기가 힘들다.
 
이 소설은 그러한 20대들에 대해서 다뤘다.
이 책은 IMF 이후 변화된 사회의 문제들을 혼자의 몸으로 뚫고 온 혹은 뚫고 가고 있는 청년 세대에 바치는 소설이다. 성공한 삶이라고 주변에 얘기할 수 있는 그때,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 노력했던 스스로에게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청년들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최선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이 세계를 헤쳐 나갈 것인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그리는 슬픈 비망록이 펼쳐진다.
 
저자는 요즘 세대를 이른바 '표백 세대'라 지칭한다. '표백 세대'란 너무 완벽해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흰색 같은 세상에 순응해야만 하는 요즘의 청춘들을 말한다.
저자는 섬?할 정도로 이 시대 청춘들의 모습을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누가 봐도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최고의 자리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보여주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주된 줄거리다.
또한 자살선언문의 성격을 가진 유언적 잡기(雜記)와 주인공의 현실 세계를 번갈아 배치하여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하도록 만든다.
이 책이 던지는 차갑고도 절박한 메시지는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것이다.
 
<줄거리> 
 
주인공은 7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상위 10개 대학의 뒤쪽에 위치한 A대학에 입학해서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다. 그는 대학입시를 다시 준비하든 편입시험을 보든 더 상위권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어떤 것을 시작해도 이미 늦어버린 나이라고 생각하며, 미래의 암울한 현실을 깨닫지만 딱히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취업 선배들과의 대화’ 행사 뒤풀이 후에 전교적으로 유명한 ‘21세기 지도자 장학생’인 세연, 경영학과 동기인 휘영, 후배 병권, 세연의 친구 추윤영 등과 어울리게 된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자살을 준비해온 세연은 친구들을 설득하며 5년 후에 자살할 것을 강요하며, 자신이 가장 주목받는 선구자가 되기 위해서 죽는다. 5년 후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며 표백되고 있던 주인공과 친구들은 우연찮게 한 사이트(와이두유리브닷컴whydoyoulive)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친구들은 5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후에 자살을 한다고 선언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모든 틀이 다 짜여 있는 세상에서 옴짝달싹 할 수밖에 없게 된 젊은 세대를 ‘표백 세대’라고 칭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어떤 것을 보탤 수도 보탤 것도 없는 흰 그림인 ‘완전한 사회’에서 청년 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회에 표백되어 가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위치에서 가장 성공했을 때 사회에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밖에 없다며, 와이두유리브닷컴(www.whydoyotlive.com) 사이트에 자살 선언을 올리고 24시간 후에 자살한다.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꿈이나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청년 세대들의 고달픈 일상과 정해진 채 다가올 미래와 표백되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을 보여주면서 면밀하고 명확하게 우리 사회를 그려낸다.

 
젊은 세대들이 자살하는 세태를 정확하게 그려내며 현실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 사회 청년들의 삶과 일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을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한 때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자살 사이트나 자살 동호회 회원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75년생인 작가가 다룬 20대의 모습이 실제 20대의 고민과 갈등과 선택을 반영하고 있다면, 20대들이 보여주고 있는 탈정치, 탈구조, 탈공동체의 태도는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중고등학생들의 자살, 뚜렷한 이유없는 자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에밀 뒤르켐은 19세기 말 [자살론]에서 '사회적 응집력의 부족'을 자살의 주요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바, 현대의 자살현상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표백세대'의 좌절... 그것은 현실세계를 '무궁무진하게 변화가능한 세계'로 인식시켜주지 못하는 사회(가정,학교,정부등)에 대한 그들의 심리적 좌절, 인식상의 좌절이 아닐까?
 
 
* 책 속의 문장 :
-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p.77~78)

-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을 주장했지만, 공산 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과 이 세대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넓은 의미의 선언자다. 누군가가 와이두유리브닷컴을 '부모 덕택에 고생 모르고 자란 배부른 녀석들의 복에 겨운 헛소리'라고 매도하려 들 때 '그 방식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라고 맞서며 우리의 논리를 그 자리에 소개한다면 당신은 선언자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p.182)

-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p.199)

- 자살을 꿈꿔본 적이 없냐고? 왜 없겠어. 그런 건 누구나 밤마다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밤마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창문을 깨고 원룸에서 뛰어내리는 공상을 한다고. 때로는 분노에 차서, 때로는 사는 게 허무해서. 세연이 쓴 선언문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외길로 몰아간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일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선언문 덕에 위안을 받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왜지?). 그러나 내가 그 선언문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었다. 설사 선언문의 내용에 내가 찬성한다 해도, 그 선언문과 실행 지침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행 지침에선 자살을 하려거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하라고 했는데, 나는 적어도 업무에서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성취는 앞으로 영영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p.241)

-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p.332)  

 
[ 2011년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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