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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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의 부제는 ’최후의 노력’이다.

13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한 서기 337년까지의 5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시작과 끝에 해당하는 단 2명의 황제만 취임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내에서도 후세의 역사가들에게서도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출생지도, 출생년도도 불명확한 상태라고 한다.
다만, 오늘날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바닥’에서 태어나 로마군대에서 한 단계씩 진급하여 경호대장까지 하다가 황제가 된 인물이었음에도 권력에는 욕심이 없었다.
자신이 즉위한 해에 친한 친구였던 막시미아누스를 처음 ’카이사르’에서 몇 개월 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격상시켜 공동 황제로 함께 취임한다.
디오클레레티아누스는 당시 야만족의 침입과 방위선에 대한 대처가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음을 인정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서방을, 자신은 동방의 방위선을 담당한다.
황제로 즉위한 이후 약9년 동안 두 황제는 서방과 동방에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국을 위협하고 도적떼를 소탕했다.
 
그리고 그들은 293년 역사적인 ’사두정치’를 선보인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가 각자 ’카이사르’를 한 명씩 임명한다.
서방의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쿠스를, 동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둘 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골랐고 모두 군단에서 경력을 쌓았다.
군장교 출신의 4명의 황제(정제와 부제)는 각자의 담당지역에서, 그리고 일부 협동작전으로 방위선의 야만족을 격퇴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어 150년 전의 로마제국 영토와 방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 병력 증강 : 기존에 30만명에 달하던 로마군을 두 배로 증가시켰다.
  이는 군사력의 질을 떨어뜨리고 4두 정치를 담당한 황제들 사이의 유동성을 약화시켰고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은 엄청난 방위비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 민군 분리 : 갈리에누스 황제가 원로원 의원이 로마군 장교에 취임할 수 없게 하였는데 그에 더하여 민간 경력과 군대 경력을 완전히 분리해 버린다.
- 황제에 대한 개념 변경 : 기존과 같이 대관식은 별도로 없었지만, 보석을 아로새긴 ’디아테마’라는 호화로운 관이 황제의 머리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호화로운 옷차림과 함께...
- 관료조직 확대 : 4두정치에 이어 황제를 대리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도록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그에 따라 관료조직이 늘어나고 인력도 늘어나고 비용도 늘어났다.
네 황제는 자신의 근거지에 모두 수도를 지정하고 황궁과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다.
- 세제 개편 : 제국이 1년에 필요한 액수를 황제가 결정하고 시민들의 수입과 관계없이 납세자에게 부과. 세무는 모두 통합하여 중앙정부가 관리. 세금은 ’토지세’와 ’인두세’로 양분.
- 가격통제 정책 실시
- 기독교 탄압(303년) : 기독교 교회 파괴. 신도들의 모임 금지. 성서와 미사에 쓰이는 소품 소각. 기존 특전 박탈. 법정에서 보호받을 권리 박탈. 교회 재산 몰수. 공직 추방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제국이 위기임을 느끼고 자신의 생각대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황제는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일방적인 권력으로 밀어붙이면서 로마제국의 기반을 또 다시 무너뜨리게 된다.
원로원과 지식인층만 소외되었던 로마제국의 황제권력은 잘못된 군대 개혁과 세제개편으로 부유층 뿐 아니라 로마시민과 속주민들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준다.
로마의 역사이자 기반이었던 제도와 시스템이 무너진 것이 다시 제도와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악순화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서 욕심 없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너무 일찍 은퇴해버려(막시미누스를 강제도 동반 퇴임시킴) 또 다른 분란이 싹트도록 한다.
 
2차 사두정치는 305년에 콘스탄티우스 클로투스가 브리타니아/갈리아/히스파니아를,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북아프리카를, 갈레리우스가 발칸과 그리스를,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오리엔트 전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여 사두정치가 붕괴되고 황제가 6명으로 난립한다.
310년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이 강요로 자결하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다.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 손잡고 막센티우스를 공격하여 전사시키고 325년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항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다.
이리하여 기독교도가 추앙해 마지않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단독으로 집권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집중적으로 추진한 일은 무엇일까...
그는 313년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황제의 재산을 기독교에 기증하도 기독교 성직자가 공무를 맡지 않도록 결정하다.
316~317년 도나우 강을 건너서 야만족을 격퇴하고 강화를 맺다.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방위선의 로마군대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여 ’파트타임’ 군인으로 바꾼다.
325년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삼위일체’파를 공식적인 해석으로 결정한다.
글자 그대로 로마제국과 로마시민, 속주민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다.
대신, 로마제국을 약화시키는데 앞장 선 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왜 기독교를 공인하고 진흥하려고 애쓰고 수도를 옮겼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재임 중 기독교로 개종한 것일까...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로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음 직전에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 313년 기독교를 ’공인’시킨 황제의 칙령의 문구는 그 이전까지 금지하고 박해하던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로마제국에서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하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진흥하기 위해 애쓴다.
실제 아주 편파적으로 기독교와 성직자들이 부와 권력을 잡도록 제도화시킨다.
 
작가는 콘스탄티누스가 ’지배의 도구’로서 기독교를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군대의 반란, 황제 참칭, 원로원과 지도층의 무능, 정국 불안정 등을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 또는 중단기적인 대책의 하나로 기독교를 품에 안았다는 것...
콘스탄티누스가 그동안 황제를 추대하고 승인하고 인정하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유일한 ’신’이 권력을 황제에게 주게되면 주요 성직자 한 두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로부터 황제의 권력이 안정되리라고 예상 or 판단했다는 것...
기독교의 ’왕권신수설’에 기울었기 때문이라나...
콘스탄티누스 치세 하에서 진행된 과정만 보면 그렇게 분석할 수도 있다...
나쁘지 않게 해석하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콘스탄티누스의 의도가 그랬다면 그는 아주 머리가 나쁜 황제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교활하고 야비하고 사악한 기독교도인 것이고...
’콘스탄티누스 로마제국을 다시 융성시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자 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팩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후세의 역사가들이나 기독교들이 붙여주는 호칭인 ’대제’는 전혀 아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3개 과제’에 제대로 기여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3개 과제’를 무시하고 파탄시킨 측면이 컸다.
로마군에 대한 정책을 엉망으로 만들어 방위선을 지키기는 커녕 소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야만족으로부터 침입, 약탈 당하도록 방치했으며,
끝없이 늘어나는 로마시민과 속주민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로마의 주요 재산인 ’황제 재산(황제 재산은 황제에 위임된 로마제국의 재산일 뿐 개인 재산은 아니다.)’을 자기 멋대로 기독교도에게 기증하는 횡포를 부렸다.
하드 인프라와 소프트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기는 커녕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수도 로마를 그대로 둔채 임의로 비잔티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로마제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제국의 자산을 탕진한 황제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가 즉위한 해부터 로마사를 더 이상 쓰지 않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많다고 하는데 많은 부분 동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콘스탄티누스 이후 1,000년을 뒤로 돌리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서구에서는 결국 모든 종교를 공인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그런데 왜 그런 황제에게 ’대제’라는 표현을 쓸까나...?? 
 
작가는 여러번 책 속에 카이사르의 명언을 제시했었는데 나는 비로소 13권 서평에 그 말을 옮기고자 한다. 13권에 그 말이 제일 어울릴 것 같아서...
"비록 나쁜 결과를 낳은 사례라 해도 그것이 시작되었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2010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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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2 - 위기로 치닫는 제국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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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의 부제는 ’위기로 치닫는 제국’이다.

12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즉위한 서기 211년부터 카리누스 황제가 암살되고 경호대장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서기 284년까지의 73년간을 다룬다.
이 기간 동안 로마제국에는 22명의 황제가 취임했다가 사라진다.
그 사이 14명의 황제가 경호대, 근위대, 군단병, 측근들에게 암살되거나 살해된다.
이 시기, 즉 3세기 로마의 위기는 그 이전의 위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로마 황제가 전쟁에서 산 채로 적에게 붙잡혔을 뿐 아니라 제국이 3등분으로 분리되기도 하면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진데다가 제국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 황제가 일방적으로 결정,집행하는 ’칙령’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제국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힘있는 권력자들만이 일방적으로 국가를 움직이는 ’독재정권’이나 ’왕정’과 다를 게 없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3세기 위기의 원인을 제국 지도자층의 질적 수준 저하, 야만족 침입의 격화, 경제력 쇠퇴, 지식인 계급의 지적 능력 감퇴, 기독교의 대두로 꼽는다.
하지만 작가는 기독교의 대두를 제외한 나머지 위기 요인은 그 이전 로마에도 자주 부딪혔다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정국 불안정’에 두고 있다.
로마 황제가 73년간 22명, 약 3년 반만에 한 번씩 바뀌게 되면 아무리 로마가도가 제국 전체에 깔려있다고 해도 서기 3세기의 통신 수준으로는 정보의 전달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제국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마사를 돌아보면 서기 1세기에 이미 30년간 7명의 황제가 즉위(3년에 한 명꼴...)하고 그 중 4명이 암살 또는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도 로마는 위기에 처했지만 곧바로 극복하고 로마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웠던 네르바와 트라야누스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오현제’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두 세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기 1세기를 다시 분석해보면,
네로 황제는 원로원과 시민, 군대의 신임을 잃은 후 측근에게 암살되었다.
갈바는 속주 총독간 내전으로 다른 속주 총독 오토에게 암살당하고, 오토는 뒤이어 군단장 출신에게 살해된다.
비텔리우스는 내전에서 패배한 후 도망치다가 살해된다.
도미티아누스는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노예에게 암살된다.
즉, 1세기에는 암살과 살해가 특정한 경향을 띠지 않았고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는 실정과 측근에게, 나머지 황제들은 내전의 패배에 따른 여파로 암살, 살해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원로원의 정치력과 지도층이 살아있었고 황제들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무서워했다.
로마 군대 역시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은 원로원의 결정을 존중하였고 자신들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서기 3세기는 상황이 무척이나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황제들의 사망 원인은 전투 중의 전사(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나 병사(고티쿠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단병들에게 황제로 추대되고 피살되었다.
원로원은 황제를 추인하는 ’거수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로마군대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속주 총독이나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한다.
내가 추측,평가해 볼 때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이후 국방/외교에 대한 안일한 인식과 정책, 속주민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과 정책 변화가 로마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린 것으로 보인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23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19년, 콤모두스 치세 12년, 내란기 20년... 모두 합하여 64년 등 약70년 동안 로마의 황제들은 로마군대의 군사력과 방위선 체계, 인프라를 유지,보수,관리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이전 황제들이 쌓아놓은 업적에 안주할 뿐이었다.
이에 더하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로마군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결정한 정책들이 로마군을 안정지향형으로, 기득권층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황제 추대에 대한 로마군의 집착은 로마군단이 더 이상 평화수호와 방위선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기득권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카라칼라는 로마군을 기존에 편성했던 로마시민병과 보조병 대신 젊은 병사만으로 기동부대를 편성했다.
가정을 가진 나이 든 병사들은 군단기지를 지키도록 하고 젊은 기동부대만으로 전선을 이동하여 전투를 치르게하여 상당수의 로마군을 노령화되도록 만들어 방위선이 취약화되는데 일조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갈리에누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을 로마군 장교급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법률을 통과,시행시키면서 그나마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던 민간 지도층과 로마군 간의 인적교류와 경험, 제국 상층부의 정치적이고 군사외교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막아버렸다.

다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방위선 정책으로 대표되는 ’로마화’ 동화정책은 역설적으로 ’오현제’ 시대에 그 의미가 퇴색하여 더 이상 진화,진보하지 못하였다.
서기 3세기이면 이미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로부터 약200년 이상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국방/외교정책이 수립되어야 했으나 어떤 황제도, 원로원이나 지도층도 이에 대한 입장이나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서기 212년에 발표한 ’안토니누스 칙령’이 또 하나의 로마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카라칼라는 로마 제국 영토내의 속주민들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속주민들이 로마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로마군 보조부대에서 20년간 근무하거나 교육/의료 등 공공사업에 기여하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제국에 기여하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취득권’이었으나 212년부터 ’기득권’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 여파는 장기적이고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
로마의 정기적인 직접세는 속주민에게 부과하는 10%의 세금이 가장 컸다.
그 이외의 상속세(5%)와 관세(5%)는 비정기적인 세금이고 매상세(1%)는 규모가 작았다.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영토 확장과 전쟁이 없었기에 그에 따른 전리품이나 노예판매금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원로원의 무능, 지도층의 질 저하, 새로운 야만족의 출현과 침입 등은 모두 외부적인 조건에 불과할 뿐이고 어찌보면 이 부분 역시 제국의 시스템이 오히려 그러한 경향을 확대시킨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다른 시각으로 로마사를 보면 인류사회의 전개과정에서 늘 존재하던 결말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동안 군대와 문화를 통해 지배공간을 넓혔으니 때가 되면 힘을 갖게된 원동력이 결국 그 힘을 빼앗아 다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리는...
작가 말대로 로마 역시 ’로마적인’ 이유로 쇠퇴한다고 볼 수 있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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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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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의 부제는 ’종말의 시작’이다. 

11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서기 161년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은 서기 211년까지를 다룬다.
11권의 부제가 ’종말의 시작’이기는 하지만, 실제 로마가 ’종말’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후손인 콤모두스가 황제로 올라서면서부터, 즉 180년부터가 된다.
로마는 왕국에서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서기 직전에 제정으로 체제를 변경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자로 자리를 굳혔고 ’오현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시점이 로마 제국의 가장 최고의 전성기라면 이제 그 이후 제국의 역사는 줄곧 내리막길이 될 수 밖에 없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골은 로마를 강대하게 만들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아 제정 시스템이 더 깊게 만들게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자연도 인간도 그렇게 활짝 피고 지는 것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마르쿠스 황제는 동시대인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거의 2천년 동안 줄곧 높은 평가를 누린 황제다
그는 ’오현제’의 마지막 인물이고 ’철인(哲人)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가 ’철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명상록>이라는 저서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명상록>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같은 통치,정책 서적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각, 성찰과 사색을을 기록한 책을 남겼기에 ’철인(哲人)’으로 남았을 것이다.
업적과 능력으로 보면 마르쿠스보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누스가 더 위대한 통치자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기마상을 남겼고 그 기마상은 로마 황제의 기마상 22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있는 동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일곱 언덕 중의 하나인 카일리우스 언덕에서 서기 121년에 태어났다.
그는 베루스 집안 출신이었기에 엄청나게 부자였다. 물론, 그 가문도 히스파냐 속주 출신이다.
마르쿠스가 태어나기 100년 전에 로마로 이주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여러번 집정관에 선출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아버지는 그가 세살 때 여의었다.
10대때부터 그리스 철학과 학문에 빠지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어린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됨됨이와 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베루스를 고려하여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마르쿠스를 후계자로 삼으려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17세의 어린 나이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후계자를 위한 양자로 삼았을 때, 황제와 협상할 정도로 자질이 있었다.
(물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내와 마르쿠스의 아버지는 친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아들이 없었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마르쿠스를 양자로 삼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도 마르쿠스나 로마에게는 운이 따른 것이었다.)
마르쿠스는 18세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고 ’카이사르’라는 호칭을 받았다. 차기 황제로 지명된 것이다.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19살의 마르쿠스를 집정관 2명 중에 한 명으로 추천하여 선출되도록 하였다.
마르쿠스는 24세에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였고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이 재위기간 23년 동안 로마 이외의 지역을 방문하지 않았을 뿐더라 마르쿠스에게도 속주 경험이나 군단 경험을 시키지 않았다.
그것이 나중에 황제가 된 마르쿠스에게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게 된다.
 
마르쿠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뒤를 이어 40세에 황제에 취임한다.
그리고 로마 제정 사상 처음으로 ’공동 황제’ 체제를 출범시킨다. 함께 양자이자 후계자로 키워졌던 31세의 루키우스와 함께 황제에 취임한 것이다.
마르쿠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로, 루키우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로...
그의 치적은,
161년 악천후로 홍수와 기근 처리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파견한 카파도키아 1개 군단이 궤멸됨.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프리스쿠스를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시리아로 진격
163년 프리스쿠스 군대가 아르메니아 전투에서 승리. 친로마 왕을 앉힘.
165년 프리스쿠스 군대와 시리아의 카시우스 군대가 파르티아군 격파
168년 마르쿠스와 루키우스가 도나우강 전선 시찰
169년 루키우스 도나우강 전선에서 돌아오다가 병사
170년 다키아 속주 총독 클라우디우스 프론토가 게르만족과 전투에서 패배. 2만명이 포로로 붙잡힘.
          마르코마니족과 코스토보치족이 도나우강을 건너 그리스 중부까지 쳐들어옴. 270년 만에 방위선이 뚫림.
171년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인이 이베리아 반도 베티카 속주에 침입. 빅토리누스 군대가 소탕
172년 1차 게르마니아 전쟁. 고전 끝에 마르코마니족과 전투에서 승리함.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진압.
          아르메니아에서 쿠데타 발생. 카파도키아 총독 베루스가 외교로 해결
173년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과 전투에서 승리. 강화를 맺음.
175년 마르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믿고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황제를 자칭
          원로원이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
          콤모두스가 성년식을 치르고 ’카이사르’ 호칭 받음.
          마르쿠스 도나우 전선에서 계속 전투를 치르고 게르마니아 족들과 강화를 맺음
          카시우스 부하 백인대장에게 살해됨.
177년 콤모두스 집정관에 취임. 마르쿠스가 공동 황제로 지명
179년 2차 게르마니아 전쟁 시작.
          로마군 총공세로 마르코마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 격파. 도나우강 북쪽 120km까지 진격
180년 마르쿠스 겨울철 숙영지인 빈에서 사망(58세)
 
마르쿠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 : 그는 비록 황제로서는 무난한 인물이었지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하여 뒤를 이은 여러 황제들과 원로원, 로마시민, 속주민들이 정착시킨 로마의 시스템과 정책, 로마군에 힘입어 경험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속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그럼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정비하지 못한 인프라와 방위선은 뚫리게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시절 다른 속주민들처럼 살고 싶다고 요구했지만 안토니누스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종합적인 준비와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고 그것은 마르쿠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 콤모두스 >
19세에 황제로 취임한 콤모두스...
콤도두스는 황제로서 부적격자였다. 마르쿠스는 왜 실력이 부족한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정했을까?
작가는 마르쿠스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실력이 있는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정하면 자식인 콤모두스 주변 사람들로 인해 내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과연 그랬을까...??
나는 네로 황제 사후에 벌어진 로마의 30년 간의 대혼란 역시 콤모두스 시대와 비슷하게 전개된 것으로 생각한다.
마르쿠스가 네로 사후의 위기를 제대로 분석,평가했다면 더 적절한 선택과 판단, 준비를 하지 않았을지...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한 나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콤모두스 치세의 과정을 보면,
180년 콤모두스 황제로 취임
          게르마니아 전쟁을 끝내고 부족들과 강화를 맺음.
181년 콤모두스의 누나 루킬라가 황제 암살을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유배된 후 살해됨.
          근위대장 파테르노 황제 암살기도 혐의로 살해됨.
182년  원로원 의원 8명 비슷한 혐의로 숙청됨
           근위대장 페렌니스 통치의 실권 장악
184년  브리타니아 1개 군단이 칼레도니아에서 침입한 야만족에게 패하고 군단장 전사.
          페렌니스 라인강 방위선에서 마르켈루스를 급파하여 패배를 설욕
185년  브리타니아 속주 군단이 콤모두스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하고 군단장을 황제로 추대
          페렌니스가 파견한 페르티낙스가 군단병을 설득
          콤모두스의 하인 클레안드로스의 음모로 페렌니스 살해. 클레안드로스가 근위대장이 되어 실권을 장악
186년 황제암살 기도 혐의로 매형 마메르티누스와 매제 부루스를 처형
189년  배급용 밀이 부족하여 일어난 폭동으로 클레안드로스가 민중에게 살해됨
          그 후 콤모두스의 애첩 마르키아, 남편 에클렉투스,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가 권세를 휘두름
192년  페르티낙스 콤모두스와 집정관에 취임.
          콤모두스 애첩 마르키아와 하인 에클렉투스, 나르키소스 등에게 암살됨(31세)
 
콤모두스가 살해된 이후 로마는 또 다시 내란에 휩싸인다.
 
< 내란의 시대 >
193년 페르티낙스,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황제로 취임.
         원로원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함.
         페르티낙스, 레토 휘하의 근위병들에게 피살됨.
         전 아프리카 속주 총독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황제에 취임.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세베루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알비누스가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시리아 속주 총독 니게르도 군단병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
         원로원 세베루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
         율리아누스가 근위병에게 피살됨.
         원로원, 세베루스에 대한 ’국가의 적’ 규정을 취소하고 황제 취임을 요청
         원로원 세베루스와 알비누스의 공동 황제 취임을 승인
         세베루스 비잔티움 서쪽 페린투스에서 니게르와 전투에 패함
194년 소아시아 니카이아에서 세베루스가 니게르에게 승리. 니게르 전투 중 사망.
195년 세베루스가 니게르를 지지한 파르티아에 쳐들어감. 동방 방위체제를 재구축
197년 세베루스가 리옹 근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에서 승리. 알비누스 자결함.
         세베루스가 원로원 26명을 알비누스파라는 이유로 숙청
198년 파르티아를 원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속주화
201년 오스티아에서 테라치나까지의 세베레니아나 가도 공사 착수
202년 세베루스 아들 카라칼라 집정관에 취임
205년 카라칼라와 게타가 집정관에 취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가 카라칼라에게 살해됨
209년 브리타니아 원정. 하드리아누스 성벽 넘어 북쪽으로 진격
211년 세베루스 브리타니아 요크에서 사망
          카라칼라와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
          칼레도니아인과 강화를 맺고 로마로 귀환
212년 카라칼라가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에서 게타를 살해
 
이 내란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점은 국가의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사망하면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고 이를 견제하고 제어할 세력이 없게 되는 것....
제정 시대에도 원로원이 제기능을 했다면 얼마든지 황제 공백 상태든, 내란 상태든, 군단이나 속주의 반란을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원로원은 카이사르 집권 시기 때부터 이런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군인 출신의 속주 총독겸 사령관을 황제가 임명하는 것도 부작용이 되었다.
지도층에 대한 장병들의 존경과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에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기만 하면 장병들이 황제를 추대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이런 경향을 정비하지 못한 데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추가적으로 로마군대를 약하게 만든다.
 
세베루스는 재임기간 중 로마군에 대한 처우개선책을 몇 가지 시행했다.
1. 기존에 데나리우스 은화 300개를 지급하던 장병들의 기본 봉급을 375개로 인상했다. 115년 만에 인상이었다.
2. 모든 군단병이 금반지를 낄 권리를 주었다.
3. 일개 졸병이라도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백인대장이나 기병대장으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한다.
4. 정식 결혼을 허가한다. 동거는 불가.
 
그런데 이 처우개선책이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로마군을 약하게 만든다.
군대 생활이 너무 편해진 것이다.
봉급은 인상되고 출셋길도 열리고 20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근무 중 결혼도 가능해졌다.
이제 예전처럼 만기 제대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 것이다.
작가는 이것들이 제국의 ’군사정권화’의 시초라고 보았다.
카이사르는 강력한 군대를 원하되 제대한 후 민간 신분으로 돌아가서 정착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의원 출마 자격도 군단병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퇴직 후 정착할 수 있도록 퇴직금 제도를 만들었는데 장병들이 군대에 안주하면 헛일이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세베루스를 ’비로마적인 전제군주’로 평가한다.

 
 

[ 2010년 10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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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0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0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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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부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0권은 도로, 수도 등 로마의 인프라, 즉 사회간접시설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작가는 가도, 다리, 수도 등 하드 인프라와 의료, 교육 등 소프트 인프라에 대해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인프라를 정리한 것 치고는 내용이 조금 부실해 보인다.
하드 인프라만 하더라도 항만, 성벽, 군단기지, 목욕탕, 신전 등을 추가할 수 있고 소프트 인프라만 하더라도 의료, 교육 이외에 법률, 세금, 재정, 국방, 지자체, 식량 등 훨씬 많은 것을 다룰 수 있는데 다 빠져있다.
작가 말로는 ’각 권에 틈틈히 충실하게 다루었다’고 하는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작가에게는 조금 실례일지는 모르지만, 혹시 15권을 맞추려고 중간에 인프라를 끼워넣은 것은 아닌지...ㅋ
 
작가가 정리한 하드 인프라는 가도, 다리, 수도다.  

우선 로마 가도는 작가 말대로 굉장하다. 그리고 가도는 수도와 더불어 인류역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로마 가도의 특징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가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가도를 단순하게 ’통행로’나 ’군사로’가 아니라 종합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건설했다는 점과
  목적지를 연결하는 가도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가도와 가도를 연결하여 로마식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로마 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가도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즉 종합적으로 이용되었다.
  또 중요한 점은 로마 가도는 국가와 지도급 인사들에게 있어 ’당연히’ 건설해야 하고 확장해야 하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가 재정 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는 기본이고 원로원 의원이나 유력자들이 모두 앞다투어 가도를 건설하여 기증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120년에 이미 최초의 ’샘프로니우스 도로법’을 제정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로마의 기본적인 인프라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둘째, 건설 주체
  가도를 실제 건설한 주체의 경우 간선도로는 대부분 로마군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가도 건설의 최초 목적이 대부분 군사용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나 사도의 경우 민간 사업자에게 용역을 의뢰하여 건설한다.
셋째, 가도의 구조...
  로마 가도의 수평구조는 4m의 차도, 차도 양 옆에 3m 전후의 인도, 그리고 배수로 등 평균 약10m로 이루어져 있다.
  수직구조는 4개층으로 구성되어 최하층은 자갈층, 2층은 돌+자갈+점토, 3층은 잘게 부순 돌, 최상층은 접합면이 딱 들어맞도록 70x70cm의 마름돌
  차도는 양 옆으로 기울기를 두어 빗물이 흘러가도록 하고 양측에 배수로를 만들어 빗물을 차도의 바깥으로 빼내도록 한다.
  차도 옆에 숲이 있을 경우 적당한 폭으로 나무나 풀을 제거하여 나무 뿌리로 인하여 가도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한다.
  이 로마 가도는 로마인들이 유지보수를 포기하기 시작한 서기 3세기 중반부터 150년이 지난 후에도 가도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0권을 읽다보면 연말이 될 때마다 시내의 도로와 인도를 들어내고 다시 아스팔트와 보도석을 까는 국내 상황이 우울해진다...)
넷째, 가도의 체계...
  최초 로마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을 X로 교차하도록 건설했다.
  모든 로마 가도에는 1로마마일(약1.5km)마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돌기둥을 세워 가도 사용자들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도록 설치했다.
  로마인들은 조선시대의 파발처럼 국영 우편제도를 활용했고 적정한 거리마다 말을 갈아타고 마차를 정비하는 ’스타티오네스’를 설치하고 그곳에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을 만들어 놓았다.
다섯째, 가도의 길이...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500년 동안 로마인이 건설한 도로의 총길이는 간선도로만 80,000km이고 지선까지 합하면 무려 15만km나 된다.
  이 길이는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갈리아 속주, 브리타니아 속주, 히스파냐 속주, 발칸반도, 소아시아 속주, 이집트, 북아프리카 모두 포함한다.
여섯째, 가도의 활용과 시스템...
  가도에 대한 로마인의 인식은 ’건설’ 뿐 아니라 ’유지보수’ 역시 정책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로마 집정관이나 통치자, 황제, 속주총독과 지방자치단체장은 로마 가도와 인프라의 유지보수에 적절한 예산을 배정,집행하고
  집행부서(내각)과 공식적인 직책에 인프라 유지보수 담당자를 임명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작가는 10권에서 로마의 가도를 정리하면서 중국 진나라 시대의 만리장성과 비교한다.
진나라의 만리장성은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건설했고 총 길이는 5,000km이다.
작가는 국가규모의 대규모 토목사업이 로마는 가도로, 진나라는 방벽을 건설했는지를 비교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결론은 양측 국가와 민족의 사고방식 차이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방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가도는 사람의 왕래는 촉진한다는 것...
로마의 역사는 1,200년이고 진나라의 역사는 20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벽과 가도를 단순하게 비교하면서 두 나라 민족의 사고방식과 문화, 정책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작가가 방벽과 가도를 통해 두 나라를 비교하려면, 중국의 진나라와 그 전후 시대에 대해 로마사만큼 연구한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방벽으로만 보면 로마 역시 로마 제국의 국경을 결정한 후 그 경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나머지 지역의 경계에 방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 경계가 천연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은 바다(북해), 서쪽도 바다(대서양), 남쪽은 사막, 동쪽도 바다(흑해와 에게해)와 사막(아라비아 사막)...






아무튼 두 번째 하드 인프라인 로마의 다리도 상당히 역사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특히 배수 설비와 교각 공법, 수도교가 그렇다.
로마인들은 21세기에도 사용되는 교각 설치공법을 기원 전에도 사용했다.

 
 
로마의 수도는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수도교’였다.
로마의 수도라인 설치는 기원전 312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진나라는 기원전 224년에 건국되었다. 일본에는 국가다운 국가도 없었지만...)
가장 많았을 때 로마 시내에는 수도 라인이 최초 라인인 ’아피아 수도’ 등 총 11개에 이른다.
총 길이는 무려  449.5km에 달하고 하루에 로마로 들어오는 수돗물은 1백만 세제곱미터에 이른다.
인구가 100만명이라면 1인당 1세제곱미터의 수도를 공급하는 규모다.(누수 고려하면 0.5~0.6세제곱미터)
20세기 말에 서울, 도쿄, 로마, 파리, 런던시내의 수돗물 공급량은 약 0.5세제곱미터 정도였다.
수도는 로마의 문화인 목욕장과 특히 관련이 크다.

  
로마인들의 하드 인프라는 동시대 지구상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한 뿌리가 있었기에 뿌리를 되살린 르네상스 이후에 서구가 다른 대륙을 뛰어넘어 또 다시 전세계를 지배,재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이런 뛰어난 역사를 한 입에 말아먹어 인류 역사의 발전(통상적인 의미에서)을 가로막은 것은 기독교도였다.
(내가 지적한 것은 당시의 기독교도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소프트 인프라 역시 로마가 다른 제국과 다를 수 밖에 없는 창조성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솔직이 작가가 10권에 직접 다루는 의료와 교육은 로마의 인프라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그것은 로마의 시스템이자 문화 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이다.
의료와 교육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의료 부분은 로마인의 ’인생관’ 또는 ’죽음관’과 관련이 있다.
로마인은 ’달이 차면 기울게’ 되듯이 사람이란 늙으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태도였다.
그래서 로마인, 특히 상류층이나 귀족으로 올라갈수록 크게 아프거나 죽을 때가 되면 식음을 전폐하여 죽음을 앞당기려고 했다.
어린이나 청장년층의 경우 신전에 들어가서 기원을 들이거나 도시 외곽에 집단 휴양소를 지어서 병과 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는 유아 사망율도 높았다.
로마에는 공식적인 의료기관이나 병원이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 출신 중 의료를 연구한 학자들이 로마에 와서 사설로 의료기관을 운영하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전투 중에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규모 병원시설을 건립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대기시켜 놓기는 했다.
로마군대의 군단 규모는 약6,000명인데 그 중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기본적인 지원병력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에서는 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민간이 주도하였다.
로마는 그리스의 종교를 받아들여 로마화하였는데 교육의 경우에는 그리스의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로마의 상류층이나 기사계급의 자제들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받았다.
로마가 망할 때까지 유지한 정책과 시스템 중에는 ’잘하는 사람(지역)이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기’가 있다.
그리스의 경우 일찍부터 예술과 교육, 학문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굳이 로마 내에 예술이나 학문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다.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면서도 예술과 교육의 경우 그리스의 전통과 강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로마의 일반적인 교육방식은 10세 이전까지는 노예나 어머니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10세가 넘어서면 그리스 학자를 초빙하여 가르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로마 시내에 소규모로 개설한 학원에서 배우도록 한다.
10세 이전에 배우는 초등교육() 교과목은 라틴어로 읽기, 쓰기, 셈하기...
10대에는 중등교육(그람마티키 스콜라)은 17세까지이고 그리스어, 문학, 역사를 배운다.
10대 후반이나 20대에 들어가서 법률을 공부하거나 더 높은 학문을 배우려면 그리스 도시국가로 가게 된다.
(지원병으로 바꾸기 전까지 로마인들은 17세에 군대에 입대했다.)
17세에서 20세까지는 고등학교(레토리스 스콜라)에서 변론이 주요 과목이었다.(변호사나 정치가를 키우는 것이 목적...)
17세 이상부터 추가적인 전문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나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 유학을 간다.
 
법률 등 다른 소프트 인프라는 생략... 

 [ 2010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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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과 사진들을 쭈욱 살펴보니 금방이라도 로마에 다시 가보고 싶어지는군요.
 
로마인 이야기 9 - 현제賢帝의 세기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9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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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의 부제 : 현제의 시기

9권은 네르바가 병사한 뒤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승인받은 서기 98년부터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역시 병사한 서기 161년까지를 다룬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기간과 더불어 베르나 통치 시점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한 시점까지를 ’오현제(五賢帝)’ 시대라 부른다.
작가도 9권의 부제를 ’현제의 세기’라 붙였고 후세 뿐 아니라 동시대 로마인들도 이 시기를 ’황금시대(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세대도 동시대인들도 ’현제’고 ’황금시대’라 이름을 붙였으니 당연히 이 시대의 로마는 국가의 3개 과제인 안보와 식량(경제)와 내정(사회간접자본등)에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점수를 줄만 했다.
 
그렇다면, 왜 동시대인들도 후세대들도 그 시대를 ’오현제의 시대’ 또는 ’황금시대’라 불렀을까?
우선, 9권에서 다루는 3명의 통치자들이 이룩한 업적을 살펴보면,
 
< 트라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98년 ~ 117년
- 즉위 전 :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서기 53년 에스파냐 남부 베티가 속주의 이탈리카에서 출생.
아버지는 로마 군대의 군단장 출신 원로원 계급
서기 75년 로마 군대의 대대장 진급. 라인강 군단 근무 -> 28세에 회계감사관 당선 -> 대대장 복귀 -> 원로원 진입 -> 34세 법무관 당선 ->
에스파냐 7군단 군단장 임명 -> 91년 집정관 선출 ->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겸 속주 총독 임명
서기 97년 네르바가 공동 황제로 지명하여 원로원에서 승인. 98년 네르바 사망 후 원로원 승인으로 황제 취임.
- 즉위 후 :
저지 게르마니아 및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체제 완비
트라야뉴스 투자법 제정 : 농업 투자금액 중 이탈리아 반도 내에 1/3 이사 투자하는 법안
육영자금 설립 : 황제 세입에서 출자. 법률 시행은 지방자치단체에 위임.
제1,2차 다키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다키아 지역을 속주로 편입
공공사업 추진 : 목욕탕, 수도, 포룸 건설, 오스티아항 개조, 아피아 가도 복선화
파르티아 전쟁 승리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속주로 편입
유대 반란 진압
로마로 귀환 중 병사







< 하드리아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17년 ~ 138년
- 즉위 전 :
두 번째 속주 출신 황제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서기 76년 이베리아 반도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 출생(트라야누스와 같은 고향)
조상은 카이사르 시대에 원로원에 진출. 아버지는 10세때 사망.
아버지가 트라야누스와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후견인으로 지명
열 살 때부터 로마에서 퀸틸리아누스의 학교에 다님 -> 그리스 문화에 너무 심취하여 고향으로 보내짐 -> 사냥에만 열중하여 로마로 돌아옴
-> 안찰관 근무 -> 판노니아 속주 제2군단 대대장 취임 -> 도나우강 하류의 먼 모에시아 속주 제5군단 대대장 -> 서기 101년 회계감사관 당선
-> 원로원 의사록 편집 -> 사비나와 결혼(사비나는 트라야누스의 누나 마르키아나의 딸인 마티디아의 딸) -> 제1차 다키아 전쟁 참전
-> 제2차 다키아 전쟁시 제1군단장 근무 -> 법무관 당선 -> 먼 판노니아 속주 총독 부임 -> 집정관 당선 -> 실업자(장군들의 반감) -> 파르티아 원정 참전
전쟁 후 파르티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 -> 트라야누스 황제 로마 귀환 중 사망. 사망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동방 군단 장병들이 하드리아누스에게 충성 맹세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Trajanus Hadrianus Augustus)
파르티아 전쟁 종결
로마에서 황제 암살 음모 발각. 근위대장을 통하여 전직 집정관 출신 원로원 4명 숙청
1차 방위선 현장 시찰(호위병과 문관들만 동행하여 진행)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 론강 -> 리옹(루그두눔) -> 트리어(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 ->
고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게르마니아 방벽 보강 -> 마인츠 -> 저지 게르마니아 방위선 -> 본, 쾰른 -> 브리타니아 반란 진압 및 하드리아누스 성벽 건설 ->
히스파니아 속주민 내부 갈등 해소 -> 시리아 안티오키아 -> 파르티아 국왕과 강화조약 체결 -> 소아시아 서부 -> 아테네 -> 로마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랑베즈, 팀가드 -> 랩티스 마그나 -> 로마
’로마법 대전’ 집대성
베누스 신전 건립, 판테온 개축, 하드리아누스 별장 건축
2차 방위선 시찰 : 아테네 -> 소아시아 에페수스 -> 시노페 -> 카파도키아 사탈라, 말라티아 -> 시리아 라파네아이 -> 안티오키아 -> 팔미라, 다마스쿠스
-> 아라비아 속주 제3군단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유대 반란 진압 -> 로마
유대 반란 진압 결과 : 예루살렘 함락, 50개 도시 / 985개 마을 파괴, 사망 유대인 50만명, 예루살렘에서 추방, 지명 변경(유대 -> 팔레스타인), 할례 금지
매부 세르비아누스 주도의 후계자 옹립 움직임을 파악하여 세르비아누스와 손자를 처형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후계자 지명 -> 판노니아 속주로 군단 경험 중 병사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 지명. 안토니누스는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다.
 

< 안토니누스 피누스 황제 > 재위기간 : 서기 138년 ~ 161년
- 즉위 전 :
서기 86년 로마 인근 라누비오에서 출생. 집안은 보르넨시스 속주의 원로원 계급
아버지가 공무로 자주 집을 비워 친할아버지+외할아버지 댁에서 어린시절을 보냄
서기 111년 회계감사관 -> 116년 원로원, 법무관 -> 120년 집정관 -> 아시아 속주 총독
- 즉위 후 :
황제명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Imperator Caesar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하드리아누스의 인력을 그대로 승계, 연임시킴
브리타니아에 안토니누스 성벽 추가 건설

안토니누스 피우스 재임 기간에는 외적 침입이나 반란이 없었고 자신의 업적을 쌓는 것을 원하지 않아 특별한 기록이 없음
선임 황제들이 결정한 정책과 법률을 성실하게 집행하기만 함.
하드리아누스의 유언을 받들어 루키우스와 안니우스(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양자로 받아들임.
 
네르바 황제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시기가 로마의 ’황금시대’이자 ’오현제’의 시기였던 것은 외형적인 결과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네르바 이전 시대가 30년간 네로 황제 암살부터 시작하여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연이어 살해, 암살되었고
황제 암살은 동시에 로마 군대 내부의 내전에 따른 로마 시민의 사망, 원로원과 관련 인물들의 살해가 동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쉽게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를 지난 후 네르바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까지의 황제들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집착도 없었고 실제 혈통을 이어 황제가 될 자식들도 없었다.
혈통이나 군대 반란 등 내분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안정화될 수 있었고 28개 군단의 군사력은 외적,야만족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즉, ’오현제’ 시기는 로마로서는 외부적인 조건도 내부적인 조건도 따라준 셈이다.
물론 그 황제들 역시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로마 제국의 평화와 성장을 중심으로 정책을 편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시대 들어 특징적인 것은 연거푸 4명이나 속주 출신이 황제로 등장한 것이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히스파니야 속주 출신이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보르넨시스 속주 출신이다.
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 내보다 속주 출신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실제 2 곳 모두 카이사르 황제가 갈리아를 속주로 삼기 이전부터 로마의 속주였기 때문에 200년 이상 ’로마화’한 지역이고
따라서 이들의 조상 대부분과 자신들도 로마의 시스템(군단장, 법무관, 회계감사관, 집정관)을 거쳤다.
그 사실은 서기 100년 전후부터 속주 출신이 기존 로마 지도층보다 통치력이 더 양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로마가 국가로 탄생한 시기부터 시작하여 일관되게 추진했던 ’로마화’ 정책과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제정 시스템과 속주 출신에게 원로원 등을 개방한 것이 성공적인 정책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로마는 서기 100년부터 인물난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로마 역사는 1,0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서히 지워졌을 것이다.

 
 
[ 2010년 10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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