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8 - 위기와 극복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8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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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의 부제는 ’위기와 극복’이다.

8권은 네로가 죽은 뒤부터 트라야누스가 등장할 때까지인 서기 68년부터 97년까지를 다룬다. 
이 30년도 안되는 기간에 제위에 오른 사람은 무려 7명(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우스아누스, 네르바)이나 된다.
이들이 집권하고 사라지는 과정은 로마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무척이나 정신이 없다.
 
- 서기 69년 -
갈바는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다. 갈바는 네로가 집권 중 에스파냐 동북부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임명한 자다.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오토의 명령으로 갈바 암살.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되고 원로원도 승인.게르마니아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하고 저지 게르마니아 군단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
비텔리우스 군단이 오토 군단을 격파. 오토 자결.
원로원 비텔리우스의 황제 취임 승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 5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 지지 선언.
키빌리스, 게르만족, 게르만계 갈리아인이 모여 ’갈리아 제국’ 창설 결의
베스파시아누스 군단과 비텔리우스 군단이 이탈리아 반도 내 크레모나와 로마 도심에서 내전.
비텔리우스 군단이 패하고 비텔리우스는 포로 로마노에서 피살.
 
- 서기 70년 -
원로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 승인
73년 국세조사 실시
 
- 서기 79년 -
베스파시아누스 사망. 공동 지접관 티투스 황제 등극
베수비오 화산 폭발. 폼페이 매몰.
- 서기 80년 -
로마 도심에서 대화재 발생
 
- 서기 81년 -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염병 발생
티투스 사망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등극
 
- 서기 83년 -
도미티아누스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 착수
110년 만에 병사들의 급료 인상
 
- 서기 96년 -
도미티아 황후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해방노예를 시켜 도미티아누스 암살.
원로원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 원로원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
원로원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
 
- 서기 98년 -
네르바 사망
트라야누스 황제로 등극
 
이 시기에 대해 동시대 역사가 타키투스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되었고 본국의 평화조차도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4명이나 비명에 죽고(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로마 시민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세 차례나 된다. 속주민이나 외적을 상대로 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도 로마인끼리 벌인 전쟁의 여파에 불과하다."
또한,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해온 야만족에 대해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의 충성심은 흔들리고 브리타니아는 제패가이루어졌는데도 방치되고 사르마타이족과 수에비족은 로마 군단에 소해를 끼치고 다키아족은 로마에 패했을 때도 기세를 올리고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를 자칭하는 가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려 하고 있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다도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신분도, 재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마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도 친구 때문에 파멸당했다." 
네르바에 이르러서야 로마는 안정되었고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부터 후세의 역사가들이 ’오현제(五賢帝)’라 부르는 황금기로 접어든다.
 
작가는 30여 년 간의 이 시기를 ’위기’과 ’비탄’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는 로마의 위기라고 하면, 제2차 포에니전쟁으로 16년간 이탈리아 반도가 한니발에게 점령당했을 때, 기원전 90년 당시 반도의 여러 부족이 단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든 ’동맹시 전쟁’, 마리우스와 술라가 내전을 벌이고 수 천명을 숙청했을 때,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국가 형태를 둘러싸고 벌인 내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붙은 14년간의 내전 등 수 없이 존재했다는 것...
그럼에도 로마는 다시 ’위기’와 ’분열’을 극복하고 지중해의 패권자로서 서기 1세기까지 군림하였던 것이다.
즉, ’위기’를 극복하면 ’위기’는 ’기회’가 되는 것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멸망’하는 것...
8권에 그려진 로마는 타키투스의 이야기 만큼 로마 제정, 원로원과 시민, 속주민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작가가 8권의 부제를 칭한 대로 극복해낸 ’위기와 극복’의 시기이기도 했다.
 
이는 자연도 그렇고 세상 사는 이치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상황 역시 ’동전의 양면’,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자어 ’위기(危機)’가 ’위기’와 ’기회’를 함께 의미하듯...
 
로마는 기원전 2 ~ 기원전 1세기 동안 정책 브레인이자 지도자 집단이었던 원로원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관계로 카이사르에 의하여 제정(또는 원수정)으로 체계가 강제로 변경되었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로 이어지는 일인자 통치시대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로마 공화정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서 지중해 전역과 멀리 갈리아, 브리타니아, 도나우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고 관리하는데 기존의 체제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집정관-원로원-민회로 이루어진 삼각체제가 무너지고 일인 통치시대로 접어든데 따른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포함한채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제정은 강력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통치할 때에는 더 없이 적합한 체체지이지만, 그렇지 않은 지도자가 통치할 때에는 늘 암살과 반란, 외적 침입과 정책실패를 거듭할 수 밖에 없게 된다.
8권은 후자에 해당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혼란기에도 로마가 튼튼하게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아래와 같지 않을까 싶다.
1. 외적(이민족 or 야만족)의 침입이 적었고 세력도 약함. 파르티아도 잠잠.
2. 로마 내부의 내전이 일어나더라도 외부의 도움 없이 자신들끼리 전투를 치름
3. 로마 건국 이래의 기본 정책 유지
  - 기본 방위체계 유지, 패자 동화 정책(국내외 포함), 로마 시민권 유지/확장, 제국 내 경제 활성화, 세제/재정/행정/통화정책 유지, 사회간접자본 정비 계속, 군사력에 의한 외교 실시 등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법’ 등 일부 기존과 맞지않는 정책이 실시되기는 했으나, 그 뒤의 통치자에 의하여 복원됨...)
 
이 시기의 특이한 사건은 서기 66~70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진압되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다.
유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망자는 무려 60~110만명이고 포로의 수는 10여 만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유대인 포로들은 노예가 되거나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통치자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예루살렘 대신전을 불태우고 파괴하면서 이후 로마 지배지역 내에서는 유대교도가 유대교의 총본산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대신전에 해마다 바치던 2드라크마의 봉납금을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납부하도록 한다. 이것이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 납부하는 세금이라는 명분의 ’유대인세’...
이 사건으로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되어 120년 동안 이어지던 로마의 유대 관용정책이 크게 바뀌게 된다.




 

[ 2010년 10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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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악명높은 황제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7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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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의 부제는 ’악명높은 황제들’이다.

7권은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새로운 임페라토르로 등극한 서기 14년부터 다섯 번째 임페라토르인 네로가 암살된 서기 68년까지를 다룬다. 
로마제정의 통치자는 아우구스투스 - 티베리우스 - 칼리쿨라 - 클라우디우스 - 네로로 이어진다.
이 닷서 명의 통치자 중 3명이, 7권 기간인 54년 동안에 자살 또는 타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로마의 제정체제는 확고하게 정착되는 동시에 제정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역기능이 반대급부로 나타난다.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로마의 두 번째 통치자인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의 자손이었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하지만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면서 이름마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핏줄로 제정을 이으려는 집념이 강했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인 게르마니쿠스에게 통치자를 물려주기 위한 징검다리 통치자로 지명되어 임페라토르에 등극한 뒤에도 아무런 불만 없이 선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지키고자 했다.
자신의 재임 중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인 칼리쿨라를 후계자로 지명해 놓는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정착시킨 로마 제정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고자 하는 데 자신의 임기를 모두 바쳤다.
아무리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당시 로마의 귀족으로 태어난 그로서는 남모를 울분과 분노를 삼킬 수 밖에 없었을 터...
그는 자신을 더욱 강하게 채찍질하였고 그래서 말년에 로마 근처 쏘렌토 반도 인근 카프리섬에 쳐박혀 통치자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년의 모습은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반감을 샀다.
 
티베리우스는 동시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와 중세 시대 역사가들에게도 줄곧 나쁜 평가를 받아왔다.
다행히 근대 이후 많은 사적과 유물이 발굴되면서 티베리우스의 통치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이 들어나면서 ’나름 훌륭한 통치자’로 복권되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가 제정을 다지고 로마의 궁극적인 3대 과제 - 방위, 식량, 내정 -에 기여한 것은 큰 편이다.
그는 임기 초기의 군단 봉기를 제압하고 재임 기간 내내 긴축 재정을 실시하여 재정 건전성을 높였으며,
라인 강 국경을 확정하고 방위체계를 구축하고 군사력을 기반으로 동방의 아르메니아-파르티아와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안정시켰으며,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하여 군단기지를 세우고 속주를 재편하면서 방위체계를 구축하고 두 번에 걸친 로마 시내의 화재를 복구하였다.
그리고 근위대 막사를 수도인 로마 부근에 배치하여 근위대 9,000명이 통치자의 보호와 로마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한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족운이 따르지 않았다.
큰아들 드루수스가 35세의 나이에 죽고 가족 중에 반정을 꾀한 자를 유배시키는 등 가족과도 계속 불화가 있었다.
그는 카프리섬의 별장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77세, 23년간 통치...
 
세 번째 통치자는 약관의 나이 24세의 칼리쿨라.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였다.
칼리쿨라는 티베리우스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였고 본인도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는 임기 첫 해를 시민들에게 선심을 써서 인기를 얻을 전차 경주와 체육대회, 검투사 시합으로 보냈다.
물론, 로마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신설(신규 수도 라인 건설 착수), 유지하는데도 앞장섰다.
로마 시내의 화재에 대한 피해를 국가가 전액 보상해 준다.
매상세 1%를 폐지하고 대규모 유흥 선박을 건조한다.
대부분의 정책이 ’인기 영합’에 따랐다.
 
다만, 그는 재정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부유층을 타깃으로 하여 ’국가반역죄’로 자신의 누이동생들을 유배시키고 군단 사령관에게 자살을 명령한다.
사소하고 자잘한 세금항목-땔감세,공창세,짐꾼,상속세갈취-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도 버림받기 시작했다.
결국, 칼리쿨라는 근위대 대대장에게 살해된다.
그의 나이 28세, 3년10개월간 통치...
 
그리고 국방과 외교정책도 실패했다.
특별한 의미없이 게르마니아 원정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유대교도를 차별적으로 대했으며,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왕국과 브리타니아에도 위기의 싹을 만들었다.
 
여기서 작가의 명언 한 마디...
"테러 행위은 문명이 미숙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선거로 낙선시키는 수단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죽이면 정치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미국과 모든 제국, 그리고 독재자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다.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
공식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그는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고 칼리쿨라의 숙부인 명문 귀족 출신이다.
갈리아 속주(리옹)에서 아버지가 총독으로 근무했던 시절...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의 딸이다.
 
근위대들은 칼리쿨라를 죽인 뒤 칼리쿨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어 근위대 병영으로 데려가 ’황제’라는 환호를 받게 한다.
본인도 예기치 못한 등극이었고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고...
다행히 칼리쿨라를 죽인 근위대 대대장 2명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죽음에 승복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살해에 가담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역사가였고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를 절었다고...
그는 통치자가 되기 전에 <에트루리아 역사> 20권과 <카르타고 역사> 8권, 그리고 키케로의 전기를 썼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칼리쿨라의 실정을 뒤처리 했다. 
재정을 다시 건전하게 돌리고 수도공사를 재개하였으며,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최고의 설비로 갖추도록 공사에 착수한다.
또한, 중부 이탈리아의 피치노 호수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바꾼다.
매상세 1%를 부활시키고 구경거리와 검투사 시합을 축소한다.
칼리쿨라가 실패한 방위/외교 문제 - 마우리타니아,유대교,브리타니아- 도 안정적으로 정리한다.
 
제정 체계도 개편한다.
통치자 아래에 ’비서관 체계’를 구축하고 34년 만에 국세조사를 실시하여 징세의 폭을 넓혔으며,
우편제도를 재편하고 원로원에 갈리아인을 받아들이도록 개혁했다.
노예해방 규제법도 신설...
 
클라우디우스도 비서실장인 해방노예 나르키소스와 아내인 아그리파나 사이의 분쟁과 갈등을 겪으며 말년을 보낸다.
그리고 어느날 죽었다. 역사가들은 아내가 클라우디우스에게 독버섯을 먹였다고 말한다.
이?날 네로가 근위대장과 나란히 황궁에 나타났다.
그의 나이 63세, 13년간 통치...
 
다섯 번째 통치자인 네로... 그 유명한 네로...   
 
클라우디우스의 사망을 확인한 네로는 곧장 근위대 병영으로 가서 근위병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는다.
원로원도 재빨리 17세의 네로에게 전권을 부여키로 의결한다.
네로는 근위병들에게 1인당 15,000 세스테르티우스의 증여금을 약속했다.
네로는 원로원 연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돌아가고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하며 사법집행에 관여하지 않고 사저와 관저를 분리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네로에게는 세네카라는 원로원 의원이 한동안 정책을 보좌했다. 근위대장 부루스와 함께....
 
네로는 어머니 아그리파나와 갈등이 심했다.
아그리파나는 공석, 사석에서 자신이 네로를 통치자,황제로 만들었다고 말하고 네로에게도 그 말을 계속 주입했다.
네로가 그녀의 양자 브리타니쿠스를 죽였을 때 권력을 상실할 우려를 하고 맹렬하게 반격하다가 네로에게 살해된다.
네로는 여자 문제로 어머니와 갈등이 심한 끝에 해방노예와 근위대를 시켜 어머니 아그리파나를 살해한다.
 
그 이후 네로의 선정과 악정이 복잡하게 얽혀진다.
세네카의 퇴장과 부루스의 사망도 영향을 일부 미쳤을 것이다.
선정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여 그 후 400년 동안이나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악정으로는 그리스 올림픽을 빗대어 로마 올림픽을 창설하였다가 몇 년 후 네로 사후에 비웃음만 받고 없어졌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와 전투와 외교에 실패하여 분란의 싹을 남겨놓았다.
로마 대화재 발생 후 후속처리에 미숙하여 원로원과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역사적 사실은 로마 대화재 발생시 네로는 로마 시내가 아닌 50km 떨진 해변도시 안치오에 있었다.)
그리고 로마 대화재를 기독교도의 방화로 몰아 200~300명을 처형한다.
임기 말에 황제암살 음모가 발각되어 20~30명의 원로원 의원과 근위대 간부들이 처형된다. 군단병들의 반란 음모도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그 후 속주 총독 3명이 네로에게서 자살을 강요받았다.
 
네로와 관련하여 작가의 말...
"존경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존경받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플러스 알파’, 즉 파급효과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심성의껏 해나가면 남들도 알아줄 거라고 믿어 버린다.
유감이지만 인간성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인간이란 존재는,마음 속으로는 남에게 기분좋게 속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재주의 달인이었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인에기는 두말할 여지없는 ’신격’으로 자리잡고,세계 역사에서도 제일급 스타라는 사실이 인간성의 이 진실을 증명해 주는 건 아닐까 "
 
네로의 임기 말 갈바 숙주 총독 루푸스가 反네로의 깃발을 들고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오토와 베티가 속주 총독대리 카이키나가 갈바를 지지한다.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과 저지 게르마니아 군단은 중립을 지켰다.
갈바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자 네로의 측근들은 사라지고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다.
네로는 로마 교외로 도망치다가 병사들에게 포위되자 자결한다.
그의 나이 30세, 24년간 통치...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부터 시작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실제 7권의 통치자 4인에 대한 작가의 평가 결과는 부제와 달리 그다지 ’악명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칼리쿨라가 조금 모자란 것 같기는 하지만...
칼리쿨라와 네로가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잊고 자신의 취향을 멋대로 부린 것은 부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로마의 3대 과제인 방위, 식량(경제), 내정(사회간접자본 포함)을 망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그런 부족한 통치자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개척하고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뿌리내린 제정의 시스템 덕에 굳건하게 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쿨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마지막 죽음은 역으로 통치자 일인이 전권을 쥐게되는 제정 시스템은 항상 반란과 암살, 테러를 맞이할 수 있는 구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로마 제정의 한계이기도 했다.
 
다시 작가의 말...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가진 자질의 우열이 아니라, 갖고 있는 자질을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 로마와 유대교 -
작가는 7권에서 로마와 유대교 및 기도교와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길게 정리한다. 
로마는 건국이래 서기 4세기까지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의 종교정책을 유지했다.
전쟁으로 지배한 지역의 신까지도 포용하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위대한 통치자도 신격화한데다가 ’관용’같은 개념에도 신격화를 시도했다.
따라서 로마에는 신부나 목사, 전도사, 제사장과 같은 종교 직업군이 없었다.
다만, 모든 신들의 으뜸신을 유피테르신으로 모시고 1년에 한 번, 그리고 개선식 등에서 집정관이나 통치자가 예를 갖춘다.
즉, 로마인에게는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신이 도움을 주는 정도로 신의 지위에 선을 그었다.
그런 면에서 유일신을 추구하고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유대교나 기독교도는 로마에 적합하지 않았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데 있었다.
패배한 여러 민족 중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유대의 헌법인 모세의 ’십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유대인들이 그것을 우상처럼 받들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다신교가 지배적인 당시 시대에 살면서 유대교가 그것을 지키려면,
그것도 약자의 처지에서 지키려면 ’선민사상’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분석한다.
 
예를 들어, 로마와 그 속주, 자치국들이 군사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로마 제국의 방어선을 지키고 전쟁을 치를 때,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군대에 지원하지도 않았고 행정력에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칼리쿨라나 네로처럼 일부 통치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로마 지도자들은 외국에서 다른 신을 모시고 믿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포용하였고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통치자들은 유대교도에게는 한 단계 더 자치를 인정하였다.
유대 속주에서 살인이나 일부 죄를 제외하고는 유대교도 자체의 사법 체계도 인정하였고
군무나 공무도 면제해 주었으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갖고 싶은 요망도 인정했다.
(예수는 당시 유대 행정장관인 빌라도가 제대로 로마 법을 집행했다면 사형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는 자신이 신이라고 자처하더라도 사형을 받을 만한 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빌라도는 그런 실정 등의 사유로 행정장관에서 짤리고 로마에 호출된다.)
 
그럼에도 종교 때문에 유대교 내부의 혼사를 장려한 유대민족의 많은 수는 거주지를 도시로 택했다.
그것은 도시에 살아야만이 경제적인 부를 이룰 수 있기 때문...




 

[ 2010년 9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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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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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6>의 부제 : 팍스 로마나

6권은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새로운 최고사령관과 제일인자로 등극한 기원전 29년부터 그가 조용하게 생을 마감한 서기 14까지를 다룬다.
옥타비아누스는 34살에 지도자로 등극하여 77세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어 40년간 통치하면서 로마를 공화정 체제에서 제정 체제로 확립시켰다.
그가 40년이란 긴 시간동안 최고일인자로 로마를 통치했던 것이 로마를 제정으로 확고히 다지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초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정원을 900명에서 600명으로 줄이고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였다.
반대파를 물리치고 집권하였으나 숙청하지 않은데다가 ’공화정으로의 복귀’까지 선언하였기에 원로원과 귀족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안심하고 환영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제정체제에 가장 중요한 집정관, 최고사령과, 제일인자, 호민관특권 등의 권력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호칭을 얻는다.
아우구스투수 이후의 로마 제일인자이자 황제들은 모두 공식 명칭에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이 따라 붙는다.
그는 50만명이나 되는 로마의 군대를 절반으로 감축하여 재정의 부담을 구조적으로 감소시켰으며, 국세조사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틀를 재정비했다.
훗날 ’황제묘(마우솔레움 아우구스타)’를 건립하여 황제들에 대한 신격화를 앞장서서 실현했고 카이사르가 처음 실시한 원로원고 국가정책에 대한 정보공개를 확대 실시하였다.
상설 내각과 국세청과 같은 기관을 창설하고 화폐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근위대를 창설하고 세제를 개편하였고 선거제도를 개혁하고 방위선을 재편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통치시절에 들어서서 로마와 로마의 세력권에 포함된 자치국, 속주국가들은 로마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 시대에 들어선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 군대에 의하여 세력권의 평화가 유지되다는 의미, 즉 자치국과 속주국가들은 내정과 경제에 집중하기만 된다는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카이사르가 시작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이래 로마가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릴 때까지 무려 200년간 지속된다.
그 기간 동안 로마는 ’팍스 로마나’의 책임자로서 로마 군대를 이끌고 가끔씩 제국 내부의 반란, 이민족의 침입, 분쟁조정 등을 치르게 된다.
(여러가지 면에서 20~21세기의 ’팍스 아메리카나’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작가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야기할 때 ’균형감각’을 제시한다.
그가 카이사르의 제정을 충실히 구축하면서 동시에 반대파인 원로원의 요구도 충실하게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그 양 극단에 휘둘리지 않고 양쪽을 쉼없이 움직이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갔다는 것...
천재적인 자질을 가졌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행정적인 성과를 이룩한 양아버지 카이사르와 비교되면서 로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것에 후한 점수를 준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로마 정계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권력쟁탈전에 뛰어든 안토니우스와의 전투에서 당당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일인자로 당당히 등극할 수 있었다.
그가 안토니우와 전투에서 승리하고 국내외 정치,외교에서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명장 아그리파 장군과 마이케나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그리파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여주었고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선발한 사람이었고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야망보다 권력자의 성공에만 주력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옥타비아누스는 여러가지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전임 황제인 카이사르가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방위선을 구축한데다가 여러가지 법률과 정책으로 제국의 기틀을 갖추어 놓았고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까지 갖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원로원은 공화정을 담당할 능력을 한동안 상실한 상태였고 로마 시민들 역시 카이사르가 통치한 시기의 전과 후를 겪으면서 제일인자 통치체제가 가장 당시의 로마에 적합한 체제라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물론,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고 해서 누구나 그 조건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조건이 갖추어진 시대에 맞게 로마를 완벽하게 제정으로 확립시키는 시대에 타고난 것이고 그에 걸맞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수 많은 왕과 집정관, 황제, 장군들 중에서 드물게 후세 역사가들에게 위대한 통치자로 인정받게된 것이다.
그 시대에 걸맞는 지도자가 존재하는 사회는 운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그런 지도자의 출현 자체도 그 사회의 당연한 역량일까...
 
옥타비아누스는 40년간의 성공적인 치세와는 다르게 카이사르처럼 가족사는 불행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받들듯이 말년에 후계에 대해 상당히 집작하였다.
직계손자 중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일찍 죽었고 게르마니쿠스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는 법률을 제정하면서까지 가정의 소중함을 로마에 심고자했지만,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외손자 아그리파 포스트무스, 외손녀 율리아를 처벌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권력을 이양하게 된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로마의 제정을 ’제국주의’ or ’독재국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로마의 제정은 근현대 관점에서 당연히 독재이고 제국주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1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로마의 제정을 평가해보면 현대의 평가결과와 다르지 않을까 싶다.







 

[ 2010년 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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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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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의 부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하)’다.
작가는 15권 중 무려 2권에 카이사르를 할애했다. 거의 카이사르 전기 같다...

제5권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기원전 49년부터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승리한 기원전 30년까지를 다룬다.
 
그 기간 동안 카이사르는 반대판 장군이던 폼페이우스측과 마르세유,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디카리움에서 계속 전투를 치른 후 결국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대파하여 로마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여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 후 소아시아에서 폰투스 왕 파르케나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로 돌아온다.
소아시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 원로원에 보낸 편지 내용이 그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였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왕국과의 전쟁을 마친 후 로마 제국의 영토 경계를 확정한다.
북으로는 북해, 남으로는 사하라사막, 서로는 이베리안반도, 동으로는 라인강과 도나우강, 그리고 소아시아와 시리아, 유대왕국까지...




카이사르는 그 이전의 승리자들과 달리 내전에서 승리한 후에도 반대파와 군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관용’정책을 편다.
(하지만, 결국 그 관용정책이 불씨가 되어 나중에 살려둔 공화정주의자들에게 암살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원로원과 민회를 권력을 약화시키고 1인 중심의 집권체제를 구축한다.
그는 거부권을 행사하는 ’종신독재관(딕타토르)’, 최고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호칭인 ’임페라토르’와 ’조국의 아버지(파테르 파트리아이)’, ’호민관 특권’ 등등....
 
로마의 ’제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페르시아나 이슬람,히틀러, 영국, 미국의 ’제국’과는 체계가 많이 다르다. 그것은 공화국과 제국의 절묘한 줄타기와 같다.
카이사르 당시, 그리고 로마 말기까지도 ’임페라토르’가 곧 ’황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에게만 부여되는 칭호였다. 다만, 카이사르는 일시적으로만 사용되던 ’임페라토르’를 언제나 사용할 수 있게된 것 뿐이다.
단지 중세 이후 사람들이 라틴어 ’임페라토르’를 번역할 때, 황제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페라토르’나 ’종신독재관’, ’조국의 아버지’, ’호민관 특권’ 등은 모두 기존 공화정 체제에 존재하던 직책이었고 카이사르가 그 모든 권력과 지위를 동시에 누렸던 것이다.
영어로 7월인 July(라틴어로는 율리우스)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게 헌정한 것이다.
실제로 그 모든 직책과 호칭, 그리고 법률 제정과 외교수립 등은 원로원의 승인을 거쳐야했고 시민들에게 인정받아야 했다.
또한 카이사르 이후 일인자였던 네로와 칼리쿨라, 도미티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공화국의 역적’으로 사전,사후에 단죄되기도 했다.
절대왕정이나 제국의 황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런 체제는 카이사르 이후 아우구스투누스를 이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에도 동일하였다.
카이사르나 그 이후 일인자들이 그렇게 제정을 구축한 이유는 귀족, 기사계급, 시민, 평민들이 기원전 509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공화정 체제 중에서 원로원의 무능을 경멸하기는 했지만, 공화정 체제 자체에 대한 믿음은 줄 곧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일인체제를 구축한 후 대대적인 체제개혁에 나선다.
달력을 개정하고 통화제도를 개혁했으며, 원로원과 시민권을 속주민에게도 개방했다.
외지인이라도 로마 내에서 의사와 교사업무를 할 경우 시민권을 주었으며, 금융과 행정부분도 개혁했다.
재판 배심원의 수와 계급을 확대하고 사회복지제도도 개편한다.
카이사르와 로마는 이 모든 것을 법률을 제정,개정하면서 완성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한 말은,
"종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철학은 그것을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부두 노동자에게 소크라테스의 교묘한 논법으로 접근한다 해도, 철학이 그 사람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처형을 아테네 시민이 압도적으로 찬성한 사실은 이런 종류의 ‘바로잡기’가 지닌 영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법률은 다르다. 법률은 종교를 달리하거나 철학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의 제국을 이룩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로마 가도와 로마 통화 및 로마 달력과 더불어 로마 법률도 ‘로마 세계’의 공통항으로 만들어야 했다.
법의 정신은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규범이 아닐까... "
 
로마의 법 체계는 근대 이후 서구의 법 체계를 결정지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심원 제도와 변호사가 검사로 나설 수 있는 제도, 로스쿨 효시, 법률 제정시 입안자의 이름으로 명기하는 방식(예를 들어, ’밀 배급에 관한 율리우스법’), 현실에 맞지 않는 법률의 경우 폐기하기 보다 개정하거나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방식 등....
 
4권과 5권(그리고 6권)을 읽다 보면, 왜 그를 서구인들이 칭송하고, 추앙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법 하다.
말하자면 근대 이후의 서구(미국 포함)는 카이사르에 의해 규정된 셈이기 때문이다.
로마를 건국한 이는 로물루스이지만, 유럽을 문명화시킨 장본인은 바로 카이사르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수렵민족이던 이베리아반도와 갈리아족을 농경민족으로 탈바꿈시키고 문명화시켰기 때문에 이후 갈리아가 프랑스, 독일, 스위스, 네덜라드, 벨기에, 스페인, 포루투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행운아이기도 하지만 그의 가족은 불행했다.
직계 자손들이 모두 전사하거나 병사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핏줄로 제정을 완성하고자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동생인 율리아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입적하고 후계자로 키운 것이 그나마 로마 제정의 기틀을 제대로 수립하게 된다. 
 
이 책은 일종의 역사서, 고대로마사이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의 관계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사 과정에 나타나는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영리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잠깐 애인’ + 속국의 여왕 정도로 생각하면서 상대하고 말았고 클레오파트라가 야심을 가지고 선택한 안토니우스는 일인자 역량은 커녕 말년에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못난이’였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는 로마 역사 1,200년 중에 가장 뛰어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다.
로마가 공화정 체제에서 꺼꾸러지지 않고 제정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영토를 확장하고 그 영토 속에 편입된 수 천만 명의 인구를 ’로마 체제’에 동화되도록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사회, 문화, 인프라 등 모든 부분을 정착시켰다.
로마 역사에서 그의 업적은 건국 후 700년 정도에서 멸망할 수도 있던 로마의 운명을 500년 동안 더 연장할 수 있게끔 전환시킨 것이다.
 
2,000년을 뛰어넘는 시간적 차이, 그리고 지중해와 한반도의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위정자들과 우리들이 카이사르와 로마에서 배울 점은 무지무지하게 많아 보인다.
물론, 카이사르가 직접 말한 대목이 있긴 하다.
"인간은 보통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보이는 것만 본다..."

 

[ 2010년 9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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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4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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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의 부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상)’이다.

작가의 < 로마인 이야기 > 전15권 중 네 번째 책으로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전 30년까지의 로마사를 다루었다.
이 시기는 카이사르가 태어나서 로마의 전권을 모두 장악할 때까지...
두 번째와 시기가 겹치는 이유는 작가가 로마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만을 독자적으로 떼내어 4권과 5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한국인들에게는 영어식 이름인 ’줄리어스 시저’로 알려진 로마 황제다. 기원전 100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44년에 죽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내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인 ’수부라’의 단독주택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37세에 ’최고제사장’에 선출되어 관서로 이사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로마의 귀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보통 시내 7개의 상징적인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가 도시국가로 성립된 초기에 형성된 전통있는 명문 귀족가문임에도 카이사르가 태어난 집안은 경제적으로 그렇게 부유하지 못했다.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상당히 활약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에 이르러 300년 가까이 높은 공직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한니발 전쟁’시 율리우스 가문의 인물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겨서 그 공로로 카이사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별칭이 결국 가문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에 접어들어 카이사르의 친척(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가 어렸을 때, ’동맹시 전쟁’과 내전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 친척인 집정관과 고모부뻘 되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참전한다.
아버지는 법무관을 엮임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내에 살면서  ’동맹시 전쟁’과 그 후의 내전을 거쳐 술라의 독재관에 의한 로마 내 반대파 숙청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술라가 재판도 없이 수 천명(4,700명)을 처형하여 포로 로마노 광장에 효수된 것도 지켜보았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서로 반대파를 처형하면서 카이사르는 양측 친척(루키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이 모두 살해되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당시 로마의 귀족들은 정략결혼이 주류였고 카이사르는 당시 16세에 집정관의 딸과 결혼한다.
결혼 후, 술라가 반대파를 처형하면서 작성한 ’살생부’에 카이사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술라의 측근들이 어린 카이사르를 살려줄 것을 요청하여 술라는 킨나의 딸고 이혼할 것을 조건으로 살려주는 것을 제안하였으나,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망친 후 술라가 죽고나서 6년 후에 로마로 돌아온다.




카이사르는 30세에 이베리아 반도의 군대 대대장과 회계감사관(전체 20명)으로 첫 공직에 나섰다. 
그리고 35세에 안찰관(4명)에 선출되고 37세에 최고제사장에 선출되었다.(38세에 법무관)
작가는 이 때부터 카이사르가 본격적인 중앙 무대에 나선 것으로 분석한다.
카이사르가 공직에 선출된 후에도 공화정 체제의 낙후함과 원로원의 전횡은 여전하였다.
카이사르는 39세에 이베리아 반도의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고 40세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선거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밀약을 맺고 ’삼두정치’를 개시한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가 20대 시기부터 카이사르에게 자금을 대출한 기사계급이었고 카이사르에게는 일종의 경제적인 후원자였다.
폼페이우스는 몇 년동안 로마군을 지휘하며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진압과 동방 원정도 성공리에 마친 개선장군이었기에 로마군과 제대군인들에게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취임한 후 10년 넘게 ’삼두정치’를 통해 원로원을 견제하면서도 기존 제도를 활용하여 각종 법률과 정책을 입안,결정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목표는 기존 제도의 외형은 보존하되 내용적으로는 제정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이 때 100년 넘게 문제가 되던 농지문제를 해결하는 ’율리우스 농지법’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나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갈리아 전쟁(원정)에 나선다.
갈리아 전쟁은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간 계속되는데, 카이사르는 이 갈리아 전쟁을 통해 갈리아지역을 로마의 속주로 확대,정착시키고 로마의 국경을 북해와 라인강 유역가지 확장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전쟁을 통해 중요한 심복들을 확보하고 6만명이 넘는 로마군이 충성을 확보한다. 












갈리아 전쟁(원정)을 끝내고 카이사르가 로마에 귀환할 즈음에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고  ’삼두정치’의 한 축인 폼페이우스를 동원하여 카이사르에 대한 무력화를 시도한다.
이로써 ’삼두정치’는 해체되고 카이사르는 50세가 되던 해에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 때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권까지 읽다보면 작가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5권을 15년 간에 걸쳐 집필하여 출판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보다도 당시 로마의 실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와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키아밸리나 타키수스와 같은 역사가나 작가들이 정치와 군사 중심으로 로마사를 작성한 것에 비하여 작가는 아주 일상적인 생활과 문화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연구하고 조사한 흔적이 책의 곳곳에 배여있다.
그것은 가정교육, 체육, 주거문화, 의복, 성년식, 군대조직, 전투상황 등 상당하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20대 시절부터 상당한 부채를 짊어지고 생활하였으며 부채를 힘들어하기는 커녕 어려운 가정형편에 굴하지 않고 부채를 통해 자신의 생활, 유학, 취미, 사교, 정치에 활용하였다는 점과 수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 여인들과 단 한 번도 갈등을 겪지 못했다는 작가의 글은 카이사르에 대한 새로운 면모를 알게 해준다.

카이사르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점 중의 하나는 그 시대에, 그런 악조건에서,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서 <갈리아전쟁기>라는 기록을 하고 책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 기록이 원로원을 상대로하여 자신의 공적을 알리고 견제하기 위함이라 하더라도 작가가 표현하듯이(난 잘 모르겠지만...) 사실정보와 전개과정을 비롯한 객관적인 전투보고서를 적절한 문체로 썼다는 것이 정말 놀랍니다.
서구 사람들의 ’기록문화’가 결국 로마제국에서 비롯되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기록’은 ’정보’이자 ’힘’이다.

 

[ 2010년 9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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