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지음, 주혜명 옮김 / 아르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서평] 조안 말루프(Joan Maloof) 저, 주혜명 역 <나무를 안아보았나요? Teachong the Trees, Lessons from the Forest >를 읽고 / 2005. 11., 199쪽, 아르고스


동양 사회에서는 옛적부터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 만가지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소중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성찰이 존재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생영체로서 무의식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동물과 식물을 먹고 산다하더라도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는 명제는 천지의 진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성현들을 통해 대대로 내려온 동양의 세계관인 셈이다.
<나무를 안아보았나요>의 저자 조안 말루프 역시 선현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나무를 사랑하는 식물학자다. 그는 <나무를 안아보았나요>에서 서정적인 언어로 우리를 숲 속 나무 사이로 이끈다.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숲은 나무와 새와 곤충, 진균류 등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그는 이들이 서로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지 보여준다.

“숲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공기'였다!”(15쪽)
저자는 지구상 많은 이들에게 상식이 되어 버린 이야기를 다시금 꺼낸다. 제도교육을 하는 나라들의 경우 보통 위 문장 중에서 ‘공기’가 아닌 ‘산소’로 가르친다.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이 지구 전체에 필요한 산소 중 얼마를 생산한다는 식으로. 물론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산소가 아니라 공기라고 표현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즉 산소 이외에 인간과 생명체의 활동에 소중한 각종 화학물질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본 원소들과 화학 합성물질이 포하된 지구의 공기를 통해 인간은 진화해왔던 것이다.
또한 화학 합성물질의 요소인 질소나 탄소, 수소 등과 같은 기초 원소들 역시 공기와 물, 흙과 바위를 구성하고, 식물과 동물 등 샘명체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은 숲 속 공기 안에서 120개의 화학 합성물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나마 제대로 성분을 분석할 수 있는 화합물은 단지 70개뿐이었다.”(16쪽)

“너도밤나무는 붉은등도룡뇽, 비치드롭, 리스테라 오스트레일리스, 버섯파리 외에도 다양한 진륜류에게 서식처를 제공한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은 단지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너도밤나무 씨앗과 그 씨앗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너도밤나무 열매는 다람쥐, 쥐, 새 등 작은 동물뿐 아니라 곰도 무척 좋아한다.”(54쪽)
사람들은 보통 ‘숲’이라고 하면 으례 ‘나무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는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게 아님을 알려준다. 숲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은 셀 수조차 없다. 숲은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 나무의 수액을 먹고 사는 벌레와 곤충과 딱따구리, 나뭇잎과 열매, 나무에 달려 있는 잎에서 살아가는 벌레, 열매를 먹고 살아가는 벌레와 곤충과 새, 떨어진 나뭇잎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작은 벌레와 균류, 나뭇잎이 흙과 섞여 썩도록 만드는 균류와 박테리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죽은 나무는 하늘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보금자리였다.”(61쪽)

“왜 서양의학은 아직도 숲 속 화학 합성물질의 효과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18쪽)
“메릴랜드 주에는 대략 80억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나무들의 95%가 지름 13cm 이하의 작은 나무라는 사실이다.”(79쪽)
“사람들은 대개 현대 과학이 대부분의 식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농작물이 아닌 대다수의 식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우리는 달나라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이 뒷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94쪽)
저자는 인류가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화자찬하며 엄청난 과학기술을 자랑하지만, 인간의 수준이라고는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준임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돈 중심의 세계관, 황금만능주의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발한다.
인류는, 특히 미국이나 유럽같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정부와 자본은 오직 돈이 되는, 이윤이 되는, 자본증식이 가능한 분야에만 편향된 과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는 숲과 식물 그리고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자연스러운 지구의 생태계를 조작하고 교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구와 자연, 숲의 생태계를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은 숲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할 필요조차 없다며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상처받은 땅에 대해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풀을 벨 필요 역시 없다. 숲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좀더 빨리 숲을 보고 싶다면 새들이 쉬어갈 수 있는 3m의 푯대를 세우면 된다. 기다리기만 한다면 자연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준다.”(120쪽)
“식물은 탄산가스를 들어마셔서 세포 안에 가둔다. 그것이 숲을 지키고 나무를 베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121쪽)

이렇게 <나무를 안아보았나요>는 ‘살아 숨쉬는 나무와 숲 공동체’에 대해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꼼꼼하게 설명한다. 그와 동시에 조금이라도 현실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스스로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체제에 의한 숲 파괴, 숲 생태계 파괴, 생물다양성 파괴, 지구공동체에 대한 파괴를 경고한다.

숲 속 공기 안에 들어 있는 피톤치드 이야기,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싶어하는 독수리 이야기, 바구미가 들끓는 도토리를 좋아하는 다람쥐 이야기 등을 읽다보면, 자연과 호흡하며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지은이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성찰을 담은 릴케의 시와 소로우의 글, 200년 전에 그린 존 애보트의 삽화가 지은이의 경험과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 책은 나무에 관한 과학 책이면서도 자연에 관한 수필로도 손색이 없다.

역자는 ‘나무를 껴안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tree hugger’를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로 번역했는데,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

“사람들은 동물의 종들이 계속 변화해왔듯이 식물의 모습 또한 변해왔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최근에 진화에 성공한 식물들이다. 공룡 시대의 숲은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꽃을 피우는 식물보다는 양치류와 소철이 더 많았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인간이 지구에 등장한 것은 그 이후다.”(153쪽)

“독수리의 시력은 아주 좋아서 8km 이상 떨어진 곳도 우리가 망원 렌즈를 통해 보는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수리는 인간이 땅에 그은 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177쪽)

“달팽이, 의갑류, 파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무들이 숲 바닥에 몸의 일부를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이들은 숲에서 살 수 없다. 나는 숲 바닥에서 살고 있는 일부 생물들의 삶에 대해 알고 나서 불필요하게 생명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맨발로 숲을 걷는 자이나교 승려들을 존경하게 됐다.”(192쪽)

이 책은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중 서른 일곱 번째였다.

[ 2015년 10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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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서평] 빅터 프랭클 저, 이시형 역 <죽음 수용소에서,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 승리>를 읽고 / 2005. 08., 246쪽, 청아출판사


법정스님 추천도서 중 서른 여섯 번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겪은 생사 엇갈림 속에서도 삶 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 승리를 보여준 프랭클 박사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

저자는 잔인한 죽음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기나긴 죄수 생활에서 자신 벌거벗은 몸뚱아리 실존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모두 죽고,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인간으로서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핍박 속에 몰려오는 죽음 공포를 견뎌내고 미있는 삶을 발견하고 유지했다는 저자 이야기는 독자들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미치료'란 뜻이며 빈 제3정신학파로 불림)를 이룩한다. 조각난 삶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미와 책임 확고한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 프랭클 박사가 스스로 창안한 현대 실존 분석과 로고테라피 목적이자 추구하는 바다.(책 후반부에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론, 치료방식 등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음)

강제수용소에서 저자를 생존시키고 삶이 미있도록 한 것은 아래와 같이 개인적인 깨달음과 노력이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닥치더라도 설령 변할 수 없는 운명에 닥치더라도 인생에서 미를 찾아야 한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해서 인간 잠재력을 증명하는 것은, 개인 비극이 승리로 변하는 것과 동시에 곤경에서 인간이 성취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을 때 - 불치 병이나 수술이 불가능한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우리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도전을 해야 한다.”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신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책에는 이때 사람들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과 무감각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제일 먼저 그들은 자신 운명에 대해 냉정하고 초연한 궁금증을 갖는 것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런 다음에는 곧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남아있는 삶을 지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가까이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종교에 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으로, 나무나 황혼 같이 마음을 치유해주는 아름다운 자연을 단지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은 굶주림과 수모, 공포 그리고 불에 대한 깊은 분노 감정들을 삭인다. 
하지만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에서 더 큰 미를 찾도록 도와주지 않는 한, 위에서 얘기한 순간적인 위안들은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지를 북돋아 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을 실존주 중심적인 주제와 만나게 해준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라는 것이다.

저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강제 징병과 강제징용, 위안부 등으로 동원되어 일본과 만주, 동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떠올랐다. 2차대전 현장에서 일본군에 해 학살된 징병 조선인들, 일본과 만주 곳곳에서 강제노동 후 몰살된 징용 조선인들, 아시아 전쟁터 곳곳에 위안부로 끌려가 학대되고 살해된 위안부 조선인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서 미국 원자폭탄에 해 사망하고 피폭을 당해 고통받으며 숨져간 조선인들...
히틀러 나치 홀로코스트와 일제 조선인 학살 및 한반도 내 항일 조선인 학살은 학살 규모와 방향은 달랐지만 비인간적인 학살과 제노사이드 수준 만행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나치 유대인 강제수용과 학살과 탄압은 독일군과 독일인에 해 이루어졌지만, 조선인에 대한 학살과 탄압 맨 앞에는 친일파 조선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일제 잔혹함과 일부 친일파들 굴종이 면면히 이어져 온 후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앞일을 가늠할 수 없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조차도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성 승리를 일구어낸 한 '보통 사람'이 보여준 나치 치하 강제수용소에서 경험은 이제는 개인경험이 아닌 인류 경험이 되었다."라고 극찬한다. “우리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일정 부분 출판사 평가에 동하고 공감한다. 100년 넘게 이어지는, 외세에 유린당하고 친일친미 사대주 세력과 냉전수구세력 폭압 속에서 한국 민중들과 엘리트 계층이 보여주는 사대주와 굴종과 비겁함과 좌절과 변절 속에서도 결국 개인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는 아우슈비츠 저자 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과 저자에게 쉽게 동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듯한 방향성에 공감하기 어렵다. 주어진 문제를 개인 문제로 치환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 간 식민지 쟁탈전에서 시작된 것이고 히틀러 유대인 학살은 증오와 공포를 이용한 통치술이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주어진 인생 조건을 저항 없이 수용하면서(나치 잔혹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개인적으로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않기 위해 개인이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고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와 같은 아주 능력있는(?) 개인 소수이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 중에서도 저자와 같이 정신적으로 망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수백 만 명 유대인들이 자신들처럼 강제로 끌려와 수용되었고 차례로 학살되고 있음을 알았음에도(비록 나치 힘과 폭력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민족적, 집단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저항할 방법을 모색하기 보다 쉽게 굴복하고 수용소 내에서 외부 도움만을 바라는 자세를 선뜻 공감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들 그런 모습이, 즉 유대인 강제 동원에 협력했던 유럽 내 유대인 조직 엘리트들 태도와 일반 유대인들 체제 및 폭력에 순응이 홀로코스트 후 유대인 학살을 빌미로 서방 문명국가(?)폭력에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인들을 ?i아내고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파렴치한 행위로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건국 후 이스라엘 정치권과 정부, 엘리트들이 미국과 서방 국가들을 (서로)이용하여 중동인들과 중동 국가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공격하고 있는 현재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 속애서 발견한 한 가지 미심장한 이야기...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때는 1944년 성탄절에서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짧은 기간이었다고 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날 것을 예상했다가 예상이 틀리자 급속하게 희망을 잃었고 그런 절망적인 태도가 사람들 살고자 하는 지를 꺽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많은 친일, 부일 협력자가 발생한 것도 1945년 해방 직전 몇 년 동안이었다.
즉, 현재 박근혜 정권 또는 미국에 종속과 냉전수구세력을 극복할 수 없다며 절망하고 좌절하게 되는 순간 한국인 누구나 변절하거나 육체적, 정신적 죽음에 처할 수 있으니 스스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2013년 12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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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사는 즐거움 -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의 여유와 지혜, 개정판
허균 지음, 김원우 엮음 / 솔출판사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서평] 허균 저 <숨어 사는 즐거움 :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의 여유와 지혜>를 읽고 / 2010. 06., 325쪽, 솔

조선 중기 혁명가이자 개혁가 허균(許筠, 1569~1618)의 <한정록 閑情錄>을 작가 김원우 씨가 우리말로 옮긴 이 책에는 하기 싫은 일은 철저하게 하지 않은 은자들의 행적이 실려 있다. 허균이 인용한 <한정록> 안에는 처음 보거나 듣는 고서들이 많다. <준생팔전 遵生八牋>, <고사전 高士傳>, <사문유취 事文類聚>, <열선전 列仙傳>, <하씨어림 何氏語林>, <유후당서 劉煦唐書>, <후한서 後漢書>, <빈사전 貧士傳> 등이다.
허균은 빼어난 문장과 넓은 학식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광해군 10년에 역적모의를 했다는 모함을 받고 참형을 당했다. 소설가 김탁환은 작품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허균이 혁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한다는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 바 있다. 
조선시대에 역적 혐의로 참형을 당한 반역자 중에 조선 말까지 사면,복권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허균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지배계층에 충격적인 인물이었고 사상가였던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허균은 경직된 양반사회를 향해 신분계급의 타파와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않는 과감한 인재등용을 주장했는데, 이 같은 자유롭고 혁신적인 발상은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홍길동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허균은 나이 42세 되던 광해군 2년(1610)에 명나라에 파견되는 천주사가 되었으나 병을 얻는 바람에 맡지 못하고, 그 대신 휴가를 받아 틈틈이 중국의 고서들을 보면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는 독서를 하는 중에 예전 선비들의 글을 추려서 일종의 자신만의 독서노트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정록>이라 한다.
그는 <한정록>의 서문에서, "평소 세상일에 급급하여 조그만 이해에도 어긋날까 마음이 두려워졌고. 보잘것없는 자들의 칭찬이나 비방에도 마음이 요동하는 자신을 안타까이 여겨 옛 문인들의 글을 읽으며 옛날의 어진 이와 자신을 비교해보니 제 어리석음이 얼마나 막중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다.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자연과 벗하며 한가로이 지내는 삶의 즐거움이나 독서의 즐거움에 관한 글들이 주로 엮여 있어 ‘훗날 숲 아래에서 세상을 버린 선비를 만나게 될 때 이 책을 꺼내가지고 서로 즐겨 읽고 싶다"고 말한다. 

출판사는 "여기에는 세속을 떠나 숨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 중 기이한 행적을 남긴 자와 고상한 생활을 한 사람들의 일화 등이 들어 있다. 또한 은거하며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도가에서 흔히 거론되는 양생술에 관한 희귀한 정보도 읽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동양의 유구한 역사상에 나타난 유명한 인물과 저서들 가운데서 동양적 사고의 진수라 할 만한 일화, 잠언, 성찰들로 이루어져 있는 아주 값진 책이라 할 수 있다.”고 이 책을 높이 평가한다.

조선왕조 500년은 유교이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거대한 사유의 바다였다. 주린 배를 끌어안고서도 눈에 불을 켜고 자아 인식, 나아가서 도덕의 최고선으로서의 자아실현을 고집하는 무서운 엄숙과 자부심 앞에서는 수많은 사유의 집적을 낳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유물이나 유적보다 찬란히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선집(選集) 문집(文集) 휘집(彙集) 실록(實錄) 등의 형식을 빌린 그 숱한 글들은 한문으로 쓰여진 기록물이긴 해도 조선조가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를 구가했다는 받을 수 있는 자료이다.
한편으로 아무리 전형적인 엄숙주의 아래서 질식할 것 같은 유교 사회라 할지라도 숨통을 틔어주는 혁신 사상은 어차피 도출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이른바 안티테제로서 사유의 또 다른 미덕이다. 환기 장치로서의 그런 사유 양식, 곧 혁신 사상이 여러 부족한 조건들 때문에 발붙일 땅을 찾지 못할 때 그 사회는 붕괴하고 만다.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은 때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 다. 한반도의 새로운 시대의 개척에 필요한 개혁과 혁명은 새로운 계급과 계층에게 맡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농민계급과 서민, 상인 등 신진계층이 새로운 사상을 마련하고 새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 것이 바로 18~19세기 전국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과 갑오농민혁명이라 할 수 있다. 지배계급은 내부개혁에 실패한 데다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를 끌여들였고 급기야 국가사회 전체를 일제에게 빼앗겼다. 

허균이 예교라는 원시 유교의 실천 강령만을 씨가 닳도록 쓰다듬어온 따분한 조선조 유교 사회에서 혁신 사상의 선각자였음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사상 자체가 안티테제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도 <홍길동전>이 없었다면 조선조는 내일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원시 유교 사상이 철저히 지배한 고리삭은 왕조였다는 지탄을 면키 어려울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선조는 그처럼 보수 지향적 측면이 여실했던 폐쇄 사회였다. 그에 대한 도도한 반기가 실학 사상의 대두였다. 불행하게도 실학 사상은 어떤 소기의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고, 사대주의 매국세력으로 평가받는 개화파의 선구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런데 실학을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허균이었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실물은 <홍길동전>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알다시피 <홍길동전>은 이상향 유구국(琉球國)을 건설하기까지의 의적(義賊)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썼을 허균의 복잡한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가 고집불통의 조선조 유교 사회에 얼마나 염증을 내고 있었으며,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는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숭불 자체가 탄핵의 대상이었던 유교 사회에서 허균이 불교에 깊이 경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비범한 개혁 사상을 웅변하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 독실한 불교 신앙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양반계급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면서도 늠름했다는 허균이 도교 사상, 나아가서 은둔 사상 및 신선 사상에 심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는 신분질서를 금과옥조로 섬기는 양반 사회에서 신분 계급의 타파와 적서(嫡庶)를 구별 않는 과감한 인재 등용까지 내놓았다. 
또한 그가 전개한 부국강병책과 붕당배척론은 비록 새로운 내정 개혁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뒤이어 일어난 실학 사상의 비조로서 손색이 없는 경지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호학(好學)의 선비답게 천주교의 천리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일찌감치 수렴하여 새로운 문물 및 서학(西學) 이론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허균은 아웃사이더였다. 
아웃사이더는 어떤 사회에서도 모든 기성 제도를 뒤짚어 생각하는 선각자이다. 아웃사이더는 어느 시대라도 질시와 핍박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어떤 막강한 기득권도 부정하지만 그의 꿈과 이상는 흔들림이 없다. 
허균이 바로 그런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파란 많은 한평생은 그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도구였을 뿐이다. 실천 없는 사유의 세계를 거침없이 질타한 허균의 쟁쟁한 육성은 빡빡하고 시난고난했던 조선조의 각성제였다.

허균의 여러 저서들 가운데 은둔 사상의 실천적 국면을 조리정연하게 편찬한 <한정록>은 그의 철저한 아웃사이더 정신의 산물이다. 
이 책은 그의 나이 42세 때, 그로서는 극도로 불우한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틈틈이 중국의 고서들을 보면서 예전 선비들의 한적한 삶의 모습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이야기들을 손수 가려 편집한, 일종의 독서노트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세속을 숨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 중 기이한 행적을 남긴 자와 고상한 생활을 한 사람들의 일화, 그리고 벼슬을 물러난 뒤 한가롭게 살다간 이야기, 산천을 두루 보아 정신을 수양하는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 또한 은거하며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다룬 글과 도가에서 흔히 거론되는 양생술에 관한 희귀한 정보도 읽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이 책은 동양의 유구한 역사상에 나타난 유명한 인물과 저서들 가운데서 동양적 사고의 진수라 할 만한 일화, 잠언, 성찰들로 이루어져 있는 아주 값진 책이라 할 수 있다. 분주한 현대의 삶과 자신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나날의 반복에서 차분한 현대의 삶과 자신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나날의 반복에서 차분한 성찰의 계기를 가져다 줄 것이다.
혁명가이자 사상가였던 허균과 ‘숨어 사는 즐거움’을 음미하는 허균이 한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법정스님이 사랑한 책 ‘50권’ 중 40권째이다.

* 인상 깊은 문장

"옛사람이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는 것은 이름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몸을 오래토록 속세를 떠나서 한거하게 하여 그 은거의 즐거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선비란 살면서 세상을 경영하는 포부를 갖는 법인데, 어찌 금방 요순 같은 임금을 결별하고 오래도록 산림 속에 은둔할 계획을 하겠는가. 마음과 일이 어긋나거나, 공적과 시대가 맞지 않거나 또는 몸이 쇠하여 일에 권태롭거나 하면, 비로소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자기 허물을 잘 고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퇴거한 사람은 맛 좋은 음식이나 화려한 의복을 취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검소해야 돈도 절약이 되고 복도 기를 수 있다."

"장부의 처세는 마땅히 가슴이 탁 트이도록 가져야 하니, 상황에 따라 마음을 크게 먹고 순리로써 스스로를 억제하면, 인품이 고상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자연 고상하게 된다."

"한가한 곳에서 혼자 살면서 담박하게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일상 생활하는 일이야 그 일을 당하면 역시 하게 된다."

"글은 고요한 데서 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한거하는 이가 글이 아니면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며 흥을 붙이겠는가."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작품 중 마흔번 째이다.

[ 2014년 1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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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사리드 지음, 신선영 옮김 / 문학의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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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무사 앗사리드 저, 신선영 역 <사막별 여행자>를 읽고 / 2007. 8., 248쪽, 문학의숲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34번째인 이 책 역시 나에게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사하라 사막에서 대대로 살아언 유목민 투아레그족의 열세 살 소년이 어느 날 사막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주워 읽고 생텍쥐베리를 만나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파리로 간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편리해 보이는 문명. 그는 그 문명의 이면에서 비인간적이며 허구적인 삶으로 엮어진 맨얼굴을 발견한다. 그 문명세계가 서구 문명의 하나인 파리의 모습이지만 서구문명, 특히 프랑스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된 미국의 문화가 범람해 있는 한국의 모습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사막에서 온 여행자는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서구인들의 풍경과 관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비록 많은 걸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 여행자의 시선을 전하고 있다. 그의 시각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의 기적, 자동문의 마법,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음식에 감탄한다. 동시에 문명인들의 결핍된 열정, 고독을 감춰 버리는 높은 건물, 뭐든 빨라야 하는 조급증, 있는 그대로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끝없는 욕망을 발견한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자랑해 마지않는 이 문명이 벗어나 있는 참된 길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입는 옷 색깔 때문에 ‘푸른 사람들’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투아레그족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는 뜻의 ‘이모하’라 부른다고 한다. 

소설보다 더 놀라운 이 실화의 주인공 무사 앗사리드는 파리의 첫날 밤 호텔에서 사막의 천막 속 아이들이 함께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호텔 침대와 마법처럼 열리는 자동문, 다양한 식물과 꽃, 넘쳐나는 음식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는 며칠 만에 그처럼 많은 것을 가졌건만 문명세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소중하게 음미하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달려가는 문명인, 이웃과 단절된 채 고독하게 욕망을 좇으며 살아가는 도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기적으로 가득 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즉 이 순간의 행복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적대적인 곳 중 하나가 사하라 사막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 인디고빛 두건과 푸른색 베일을 둘러 쓴 신비의 부족이 있다. 새로운 물과 풀을 찾아 유목생활을 하는 투아레그족.
그 투아그레족 젊은이는 사하라 사막의 삶과 문명세계의 삶을 비교하면서 단봉낙타가 내딛는 발걸음의 리듬에 맞춰 한걸음씩 나가가는 삶과 테제베를 타고도 더 빨리 가지 못해 조급해 하는 삶, 자연의 신호에 응답하는 삶과 기술의 발견에 응답하는 삶, 단순함과 복잡함, 관계 중심적인 삶과 이해 중심적인 삶, 진지함과 가벼움, 본질적인 것에 충실한 삶과 현실적인 것에 충실한 삶의 충돌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잃어버리고 있는 참된 삶을 위한 기억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막은 늘 비어 있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유한한 이 삶에서 우리는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왜 그토록 불안한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우리 삶을 장식하고 있는 복잡한 그 많은 것들은 허구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책과 함께 사막별 여행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본다면 사라져 가는 유목민 문명이 들려주는 행복의 방법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법정스님은 추천서에서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지혜로운 유목민의 삶이, 도시의 사막에서 끝없이 표류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 인상 깊은 문장 :

"여행은 자기 자신에게로 떠나는 것이며, 또한 그 여행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삶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순간에는 소유해야 할 것도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34쪽)

"유목민들은 늘 새로운 초목을 찾아 길을 떠난다. 황폐해진 땅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과 새로운 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는 배움이 있다. 나는 삶을 여행하며 내가 가진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들을 나누어 받는다. 알고, 배우고, 깨닫는 것, 그것은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12~13쪽)

"우리는 인내심을 통해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내를 통해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다. 우리 부족에 이런 말이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관조할 시간도 없이 소멸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시간과 짝이 되어 여유 있는 행동을 하게 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충실하도록 도와준다. 참을성이 있으면,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없다. 실제로 서두르다 보면 흥분하고 놓치는 것들이 많아져, 우리의 온 존재는 조화를 잃어버린다. 지각했을 때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성급한 사람에겐 고통이겠지만, 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겐 매우 풍요로운 시간이 될 수 있다.
행인들과 예쁜 여자들, 거리에서 펼쳐지는 삶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버스는 뜻밖의 선물이 된다. 더 이상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쳐 지나는 삶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풍부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128쪽)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불멸의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고, 흐르는 세월은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우리 조상들은 말했다. “인내의 끝에는 하늘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몹시 놀랐다. 시간은 우리 것인데! 시간에 전념할 줄 안다면, 시간의 곡선을 따를 줄 안다면 시간은 우리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언제나 기다림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기다림의 신기루를 양식으로 삼으며..."(130쪽)

"투아레그족 사람들이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이다. 이는 곧 진정한 자아와 만나고, 자기 안에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고, 그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가 이 삶에서 겪는 모든 경험들은 영혼의 성장을 위해 주어진 것들이다. 삶이라는 커다란 운동장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배움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안에 평화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평화로워져야 한다."(34쪽)

[ 2013년 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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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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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달라이 라마(Dalai Lama), 빅터 챈(Victor Chan) 저, 류시화 역 < 용서 The Wisdom of Forgiveness >를 읽고 / 2004. 09., 292쪽, 오래된미래

"만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니 나쁜 감정을 키워 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그 즉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달라이 라마)

이 문장만 보면 많은 지구인들의 영적인 스승이라는 달라이 라마의 뜻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부정과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으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책은 법정스님 추천 도서 중 33번째다. 티베트의 영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절친한 중국인 친구가 나눈 '용서'를 주제로 한 대화를 담은 것이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강제 점령한 이래 티베트 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 왔으며, 그 고통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정신 개혁’과 ‘문명화’라는 명분 하에 중국 정부는 수많은 티벳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동양의 심원한 사상을 간직한 티베트의 사원과 경전들을 불태웠다. 티벳인들은 승려들 중심으로 비폭력 평화적인 방식으로 중국정부의 폭력에 저항해 왔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승려들이 생명을 바쳤다.

티벳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침략과 탄압은 천안문 사태와 문화대혁명와 더불어 중국식 사회주의를 회의하도록 만든 초기의 여러가지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지금도 티베트의 수도 라싸는 물론 외딴 지역까지 중국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여전히 티베트 인들은 중국인들의 경멸과 감시 속에 힘든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 챈의 말에 따르면 티벳인들의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는 순박하면서도 상대방을 따뜻하게 포용하려는 티벳인들의 미소엔 폭압보다 강한 힘과 평화에의 의지가 어려 있다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에 따르면, 승려들과 티벳인들의 그 '웃음'은 오랜 세월 동안 티베트 인들의 평화로운 정신세계를 한결같이 지켜온 ‘용서’의 철학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대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세속적인 행복뿐 아니라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전생애에 걸쳐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가며, 그것은 또 다른 생의 비극을 가져오는 인과관계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질투와 원한의 감정'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며, 그 장애물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 용서'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하지만 용서는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나 큰 공동체의 차원에서나 상처는 깊고 오래 간다. 여러 종교를 통해 늘 용서의 의미와 가치를 설득당하지만, 현실에서 우리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안겨주는 이들에 대한 감정의 골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준다. 전쟁터와 같은 무시무시한 폭력의 현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 순간 우리를 미워하고 의심하며 상처 입히려는 수많은 적들과 맞닥뜨린다. 그것은 단지 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을 힘들게 만드는 모든 고통의 요인들까지도 포함된다. 용서 역시 사람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요소와 비극적인 상황까지도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수행'이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자비로운 심성과 더불어 오랜 성찰과 명상, 그리고 인과관계의 문제와 사물의 실상에까지 이르는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용서의 실천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다. "상처의 진정한 치유는 용서에서 온다."

빅터 챈은 달라이 라마의 수행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두 가지 기둥이 '공(空)과 자비' 그리고 '지혜와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만 있고 자비심이 없는 사람은 산속애서 풀이나 뜯어먹고 사는 외로운 은자나 다를 바 없고, 지혜가 없이 자비심만 있는 사람은 호감 가는 바보일 뿐이다."
이 문장을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의 많은 종교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수행과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깨닫고 대대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 속에서는 현실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물론 그가 전세계적으로 정부나 정치권, 종교세력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달라이 라마와 빅터 챈의 대화 속에 종교의 수행과 현실에 대한 참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 점이 무척 아쉽다.
내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마도 사람의 삶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증오나 미움이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개인적인 행복 추구를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는 것이며,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전제할 때만이 외적인 노력이나 조직적인 저항 역시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달라이 라마는 한국인들이 얼핏 아는 것과는 달리 티벳이 중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하는 것을 목표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티벳인들은 중국이라는 전체 속에서 자치와 자립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렇게 된다면 티벳과 중국이 서로 조화롭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달라이 라마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 2013년 7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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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