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 한 오라기의 혁명 - 자연농법 철학
후쿠오카 마사노부 지음, 최성현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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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결국 한미FTA가 발효되었다. 그리고 현 이명박 정권은 3월에 중국과의 FTA도 의욕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칠레 FTA나 한-EU FTA 체결 이후 간혹 중소기업 수출이 늘었다거나 칠레의 와인수입이 늘었다는 정부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FTA의 본질은 자본과 금융의 세계적인 거래를 자유화하는 것이고 그것도 거래 상대방 국가와의 '국력' 차이에 의해 불공평하게 체결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미 FTA가 얼마나 불공정, 불공평한지 새삼스럽게 애기할 필요도 없다. FTA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일반 시민들은 정부의 홍보논리에 세뇌되어 그냥 넘어갈 뿐이다. 어쩔 것인가... 한국에서 혜택받는 측은 수출하는 재벌기업이고 외국인 투자자일 뿐이다. 노동자, 농민, 서민, 중산층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을 뿐...

중국산 농산물이 이미 한국인의 식당과 상점을 잠식해있는 상태다. 여기에서 더 빗장을 풀어버리면 그마나 어렵게 생존해 있는 농촌과 농업, 농민은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먹거리'마저 외국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소위 '선진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개념있는' 국가가 자국의 '먹거리' 산업과 산업 종사자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데 비해 역대 한국정부는 무심하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정치인, 관료들의 의식 상태가 무척이나 의심스럽다.
 
농업 경쟁력, 농민의 생산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미래의 후손들에게 불안감과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큰 정부의 정책들...  그럼에도 엇그제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FTA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고 재벌과 기득권의 이익에 충실한 정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54.3%의 낮은 투표율이었지만, 정책이나 공약은 후보 선택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현 정부의 정책, 여당의 정책, FTA 등에 의해 가장 피해가 크게 발생하는 계층은 농촌과 중산층, 서민일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정책이나 공약과 상관없이 농민, 중산층, 서민이 가장 많은 강원도, 충북, 경북, 경남은 여당을 선택했다. 선택의 대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몇 년간 참혹할 것이다. 다만, 그 유권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해서 선택한다는 현실이 암울할 뿐이다. 그래서 유권자를 탓하지 못한다. 잘못된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 언론 종사자들이 나쁜 놈들인 것이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효과적으로 진실과 정책을 유권자에게 알리지 못한 야권과 '깨어있는 시민'들이 부족하고 모자랐을 뿐인걸...
 
 
이 책은 '자연농법'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씨의 2004년 저작이다. 단순히 어떤 특이한 농법에 관한 숱하게 많은 주장이나 학설들 중의 또 하나가 아니다. 이 책은 자연농, 자연식, 자연인이라는 철학을 역설하고 있는 사상서라 할 수 있다. 자연농법은 자연의 의지와 하나가 되어 이 삼자를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꿈꾸는 혁명이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사랑한 책, 그분이 추천한 책 목록 21번째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흔히 '현대의 노자'라고도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평생을 외곬으로 무심(無心)과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농학자로서 요코하마세관 식물검사과에서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후쿠오카는, 어느 날 인간의 지식, 과학문명이 모두 허상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위의 일체는 무용하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농사법을 통해 검증코자 했다. 그리고 쌀·보리농사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는 땅갈기, 퇴비, 제초제와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훌륭한 수확을 내어 실증함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 보였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보잘것없는 지식(지혜)에 기대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후쿠오카는 '방임'과 '자연'을 구별한다. 가령 한번 가지치기를 한 나무는 다음해에도 계속해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말라 죽어버린다. 이것은 방임이다. 이미 나무(자연)에 교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지혜로 뭔가 잘못된 일을 해놓고서, 그 결과로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열심히 고치는 것, 이것이 현대의 과학농법인 것이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과학농법은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궁리해낸 기술도 부분적·한시적일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도리어 더 많은 문제를 배태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자기파괴적 행위의 결과가 극한에 치닫고 있으므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책이 쓰여진 지 한세대가 지난 지금, 인류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길'을 방기한 데 대한 우리의 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자연농법은 진실로 엄격한 농법이다. 농부는 자연의 힘을 완전하게 믿고, 그 흐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서로 다른 조건(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서로서로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어제 저곳에서 최상의 조건이었던 것이 오늘 여기서는 최악의 조건일 수 있다.
따라서 농부의 일이란 자연을 섬기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그러나 충실하게 섬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후쿠오카 마사노부는 농업은 신(神)의 시종으로서 신에 봉사하는 역이기 때문에 성스러운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본질을 망각한 사람들이 근대농업이라든가 기업농업이라면서 신의 측근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고 이익을 앞세우는 현실을 슬퍼한다. 농부의 기쁨은 다만 오늘 하루의 일에 전념해서 씨를 뿌리고, 자연의 활동에 따라서 작물을 애호하면서 작물과 함께 생활해가는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음미하는 것이 농부의 생활방식이고, 그것이 진정한 농부의 모습이다.
실은 이것은 보편적 인간 삶에 대한 지침이다. 자연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신의 뜻, 자연의 의지에 따라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복종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완성, 자연인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자연은 인간의 지혜로 온전히 밝힐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에게 있어 자연농법은 영원한 미완성의 길, 구도(求道)의 길이다.
 
내가 직접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저자의 '자연농법'에 대해 거의 판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가 책에 기록한 것처럼 '자연농법'의 성과를 거두었다면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역시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농사를 짓는가?"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처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무한 성장을 위해, 무한 소유를 위하게 되면 그것이 농업이든, 제조업이든, 금융업이든, 무역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비슷한 경제구조와 비슷한 사회문화구조, 그리고 자연과 환경의 파괴, 인간성과 공동체의 파괴를 야기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 2012년 4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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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 알래스카와 참사람들에 대한 기억
이레이그루크 지음, 김훈 옮김 / 문학의숲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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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스무 번째 추천도서..

 

한 달 전쯤 주말 저녁에 혼자 <빅 미라클(Big Miracle)>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알래스카 얼음 구덩이에 고립되어 갖힌 회색고래를 환경단체와 원주민, 정부, 소련까지 함께 노력하여 구출했던 1984년 실화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였다(켄 콰피스 감독, 드류 배리모어 주연). 영화 속에서는 당시 알래스카 상황을 묘사해 놓았으니 21세기인 지금과 많이 다르겠지만, 혹한의 겨울이라는 이미지는 동일하게 남아있다는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개 썰매를 모는 개들이 컹컹 짖고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로 휴대용 발전기가 멈춰버리는 장면을 그 영화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책 제목인 '내일'은 날짜변경선을 말한다. 날짜변경선에서 동쪽으로 불과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래스카 코체부. 이 책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이누피아트 원주민의 이야기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자연을 경외하며 함께 힘을 모아 살아가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이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철된 현대인에게 진정한 삶의 숨결로 다가온다. 지난 1960~70년대 미국 정부의 극심한 통제가 만연한 현실 속에서 원주민들의 토지권을 보장 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저자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일대기가 아닌 원주민 고유의 삶과 문화를 지켜내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간직한 이누피아트, 그들 모두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알래스카에는 '일만 번의 여름과 겨울'이 왔다가 갔다고 한다. 즉 알래스카에 사람이 발을 디딘 지 1만년 정도 된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매년 가을까지 또 한 번의 겨울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연어를 말려 훈제하고, 물범기름을 정제하고, 사냥한 북미순록고기들을 말리고, 풍성한 베리 열매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이누피아트 족(백인들이 흔히 에스키모라고도 부르는 이누이트가 극북지역에 사는 모든 이를 총칭하는 말인 반면, ‘참된 사람들’을 뜻하는 이누피아트는 알래스카 북부의 이누이트 사람들을 뜻한다)이 사는 알래스카 북부의 겨울은 아홉 달이나 계속된다. 그리고 한겨울이면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밤만 계속된다. 기운 없는 싸늘한 태양은 지평선 위로 고개도 제대로 내밀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고 만다. 겨울철에는 거센 바람이 자주 불어 밖에 나갈 엄두도 낼 수 없는 날이 많다. 이누피아트 족은 그런 날을 ‘이트랄리크’라 부르는데, 그건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혹독한 추위’를 뜻한다.
알래스카 땅이 공식적으로 알래스카 주가 된 것은 불과 오십 년 전의 일. 그러나 누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든 상관없이 그 땅은 늘 얼음으로 뒤덮인 광대한 자연 속에 뭇 생명을 품어왔다.

저자 '이레이그루크'는 북부 알래스카, 날짜 변경선에서 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코체부에' 해안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신흥 도시인 '놈'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외가 쪽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가 전통적인 이누피아트 족의 방식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원주민 조상들이 수천 년간 영위해온 반유목민적인 생활로, 추위와 끊임없는 노동이 수반된 삶이었지만 이레이그루크와 가족들은 자연이 제공해주는 풍성한 산물을 누리며 살아간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알래스카의 겨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레이그루크는 자연이 지닌 힘들을 경외해야 함을, 낭비가 큰 적임을 배운다. 더불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일임을, 오로지 더불어 일함으로써만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곳에서 나날의 삶은 모험이었고 우리 모두는 아니그니크, 곧 삶의 숨결을 즐겼다. 많은 이들이 간간이 죽을 고비를 겪기는 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큰 기대감을 갖고서 하루를 맞았다. 오늘 날씨는 어떨까? 몇 마리의 뇌조를 집 안에 들여놓을 수 있을까? 운 좋게 몇 마리를 쉽고도 빠르게 잡을 수 있을까? 여우가 덫에 걸렸을까? 농어 그물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누가 개들을 데리고 가서 가문비나무 단을 실어 오는 일을 맡을까? 양식과 생필품을 들여놓기 위해 마을에 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알래스카 원주민 소년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에 모처럼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지금까지 알래스카와 그곳 원주민들에 대한 책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그조차도 하나같이 외지인들, 곧 개척자들이 썼다. 또는 여행의 관점에서 쓴 책뿐이어서 이누피아트의 어린 소년 이레이그루크가 툰드라에서 생활한 일들의 직접적 기록은 우리에게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각과 감동을 전해준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곳에는 삼백 명 가량의 주민이 살았으며, 대부분은 이누피아트였다. 소수의 ‘날로우르미트’도 섞여 살았는데, 그들은 백인들을 그렇게 불렀다. 물범을 뜻하는 날로우크의 상앗빛 피부를 연상시키는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선교사, 교사, 정부 관리, 장사꾼들이었다.
알래스카는 빙하로 뒤덮인 광막한 자연환경으로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곳에 펼쳐진 원초의 청정한 강들과 호수, 삼림, 빙하,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광활한 대지에 매료된다. 그 땅덩어리의 넓이는 3억 6천5백만 에이커(약 150만 제곱킬로미터)로 텍사스 주 넓이의 두 배가 넘는다. 어떤 이들은 그곳의 엄청난 자원, 곧 믿을 수 없으리만치 풍부한 아연, 금, 목재, 야생동물, 어류, 석유 같은 것들에 끌린다. 하지만 이레이그루크에게 알래스카는 본질이자 본향이요, 삶의 이유이자 목적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나는 사향뒤쥐와 늑대 가죽들로 만든 모피 파카 대신에 고어텍스가, 물범가죽 장화 대신에 스노부츠가, 우리가 물고기를 낚기 위해 1.5미터 두께의 얼음장을 뚫을 때 사용했던 재래식 투우크 대신에 휘발유 동력 드릴이 등장하기 전 시대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스노머신이 등장하기 전, 에스키모개들이 썰매를 끌고 싶어 안달이 나서 허공을 향해 길게 울부짖곤 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보트 외부에 장착하는 외장 엔진이 등장하기 전에 카약과 우미아크(가죽배)가 수면 위를 고요히 미끄러져 가곤 하던 시대에, 양초와 콜맨랜턴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빛을 제공해주던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사람들이 겨울철이면 매서운 추위와 강풍을 막아주는 60센티미터 두께의 뗏장과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뗏집에서, 여름철이면 우리를 나른한 잠의 유혹으로 끌어들이는 단조로운 파도 소리와 아비(물새의 일종)나 갈매기 울음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텐트 속에서 지내곤 했을 때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전화기가 등장하기 전이라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서야 비로소 자기네의 삶과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절에, 텔레비전이란 게 생겨나 사람들이 가족들의 연대기와 전설들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걸 방해하기 전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태어날 즈음 알래스카 문화는 이미, 그들이 ‘바깥세상’이라 불렀던 곳에서 알래스카의 매력과 흡인력에 이끌린 사람들이 몰고 온 파괴적인 영향력을 목격하고 있었다.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전염병도 따라 들어왔고 그 때문에 원주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외지인들이 대규모로 펼친 고래 사냥은 고래들 덕에 먹고살았던 원주민들을 어려운 처지로 내몰았다.
알래스카에 이주해 온 외지인들은 땅과 자원을 장악하면서 또 다른 부담도 함께 들여왔다. 그것은 바로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정부의 과중한 통제였다. 외지 사람들의 지배와 더불어 그들의 강제적 요구도 따라 들어온 것이다 저자와 식구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사유재산에 대한 아주 색다른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사회를 자본주의와 개인적 이익 추구, 개인의 선택에 기반을 둔 사회에 맞춰 나가야만 했다.
알래스카가 주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기독교 선교사들과 미국 정부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을 올바른 ‘미국인’들로 변화시키기 위해 합심해서 노력했다. 열다섯 살 때 저자는 타의에 의해 에스키모의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미국 본토에 있는 기숙학교로 가야 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속한 민족과 역사를 뺀 나머지 것들을 공부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저자가 열다섯 살이 되어 더 많은 교육을 받도록 테네시로 보내졌을 때 그는 거기서 과거 수천 년 동안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차지해왔고 사실상 소유해왔던 땅이 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움직임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연어처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와 원주민 종족들의 대표가 합심하여 몇 년 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71년, 미국 정부는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과 17만 8천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알래스카 원주민들에게 제공해주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미국 본토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런 놀라운 결정이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어느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과 권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현실화한 이는 바로 이 책을 쓴 이레이그루크였다. 이 책은 그 생생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하지만 미국 본토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비하면 알래스카 원주민은 괜찮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본토의 인디언들은 17~18세기에 걸쳐 90% 이상이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침략자들로부터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도 겹쳐졌다. 알래스카는 19세기 중 미국 본토의 백인들이 잔출하여 상업등을 영위하다가 1867년 미국에 합병되었다. 1890년부터는 원주민 언어를 학교와 공용어에서 금지시켰다. 기간이 오래 경과되었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100년도 넘는 백인들의 침략과 식민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생활을 면면히 이어오다가 결국 1971년에 미국정부로부터 자율권과 토지,배상금을 획득하였다. 물론 원주민 언어와 역사도 지역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은 비록 민족국가로서 독립(분단)은 달성했지만 단일 언어를 제외한 전통과 문화, 생활양식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아예 송두리채 뼛속까지 미국식, 서구식으로 사고와 행동과 생활을 바꾸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협동보다 경쟁이, 정신보다 물질이, 소통보다 단절이, 나눔보다 독점이, 놀이보다 향락이 우선시되고 있다. 반대로 지금 돌이켜보면 100년 전 선조들의 의식과 문화, 생활양식 중에서 소중하고 긍정적인 것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그 결과 현재 한국에서 연대의식과 공동체는 거의 파괴되었고 인간과 문화의 가치보다 돈과 자존심만 남아 황폐해져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가치와 문화만으로 우리사회의 행복과 인간됨과 공동체를 복구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꿈과 희망을? 아니면 좌절과 절망을?

[2012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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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와 철학자
장 프랑수아 르벨 & 마티유 리카르 지음, 이용철 옮김 / 이끌리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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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태동한 이래 아시아나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보다 뒤쳐져있던 유럽과 서구사회의 문명은 15~16세기부터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500여년 만에 지구촌 전체를 뒤덮었다. 특히 서구사회는 과학기술 문명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앞세워 물질적인 번영을 구가했다. 물론, 그들은 지금도 서구인들 무의식 속에 뿌리깊게 남아있는 인종적, 문화적 편견을 토대로 하여 근현대 시대에 지구촌 전역에서 수 많은 타민족과 타인종을 지배,점령하면서 살육과 약탈, 타문명에 대한 침탈을 자행했고 그들의 문명이 심어놓은 물질만능, 인간중심주의는 지구촌의 다른 생태계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저지른 만행이 없었다면 서구사회가 지금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을지 회의적일 정도다. 21세기 들어서 서구사회의 만행은 사라졌을까?

서구사회가 언젠가부터 누리던 물질적 번영의 이면에는 그 반대급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인들은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지만 역으로 정신적, 문화적 번영은 오히려 더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한 때 서구인들의 정신적, 문화적 만족과 행복을 받쳐주던 그리스,로마 신화나 기독교 문화와 정신은 서구사회에서 근대문물이 발달하면서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정신적, 철학적 바탕이 제거된 서구사회의 물질문명, 과학기술문명은 자신들에게 편안함과 행복감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서구사회의 문명과 문화에서 무엇이 문제일까?

간혹 그와 같은 서구사회의 정신적, 철학적 빈곤에 대한 새로운 방향과 희망을 동양철학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은 서구 과학문명을 공부하고 세포 유전학 분야의 과학자로 일하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히말라야 정착해 위대한 스승들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티베트 승려가 된 아들 '마티유 리카르'와 현대 프랑스 유명 철학자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한림원 정회원인 아버지 '장-프랑수아 르벨'이 히말라야 산중에서 만나 열흘간 펼치는 대화를 담은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서양 철학자인 아버지와 전도유망한 분자 생물학자였다가 티베트 불교의 승려가 된 아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인간의 갈 길을 모색하며 철학의 역할이 박탈당한 이 시대에 서양인이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왜 불교일까? 왜 서양에서 대단한 호기심을 유발하는가? 수많은 추종자가 따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답을 통해 여러가지 생각할 점을 제시한다.(이 책은 처음 발간 후 프랑스에서 6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16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수백만의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26세 되던 해 모든 것을 버리고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아들과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언론인인 아버지는 20년 만에 네팔의 히말라야 산중에서 만나게 되고 둘은 인류의 정신적 삶에 대해 열흘간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 책의 첫 주제는 ‘왜 출가했느냐’라 할 수 있다. 최고 수준의 과학문명을 공부한 학생으로서 지난 30년간 이룩된 인류 사상 가장 놀랄 만한 지적이고 과학적인 모험에 동참하지 않고 왜 히말라야로 갔느냐…
아들의 출가에 대한 아버지의 비판적 질문을 통해 불가지론자인 아버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에 끝없이 회의를 품는다. 아들은 풍부한 비유로 이를 설명한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동서양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불교와 삶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어진다. 이들의 대화는 현대 인문학의 세계, 인류 지성사를 책 한 권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불교는 과학인가? 철학인가? 종교인가? 지식인가? 지혜인가? "종교인들은 불교가 무신론적 철학이고 마음의 과학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철학자들은 불교를 철학에 끼워주지 않고 종교에 결부시키면서 거부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어디에도 시민권이 없다."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인 존재의 본성, 무지, 고통의 원인, 자율적이고 실체로서의 자아와 현상들의 비존재성, 인과법칙 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초자연성에 의해 윤색될 수 없습니다."

아들 마티유 리카르는 “생물학과 물리학이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형성에 관련하여 놀랄 만한 지식을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들로 행복과 고통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규명할 수 있습니까?”라는 반문을 철학자인 아버지에게 던지며, 특히 출가 전 위대한 철학자나 예술가, 시인을 만나고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사귀었지만, ‘저것이 내가 진정으로 열망하는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비록 자신의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위치에 올랐지만 ‘가장 소박한’ 인간적인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를테면 위대한 시인이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으며, 이에 반해 그가 대학 시절 히말라야 여행에서 만난 티베트의 승려는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가르침과 현실에서의 삶이 일치하고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가져오는 불교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새로운 삶의 방편으로 손색이 없었으며, 20년 훨씬 넘게 승려생활을 한 아들은 아버지와의 대담에서도 ‘이 선택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서로 너무나 대조적인 가치관으로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히말라야의 정경을 바라보며,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해 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지만 최근 서양 사회에서 불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고도 짜임새 있는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생각을 허물없이 교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다. 카투만두를 굽어보는 깊은 산 속의 외딴 산장에서 두 사람은 역사상 전 인류에게 부과되었던 여러 의문들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인류 지성사에 대한 탐구로, 동양과 서양의 정신사를, 삶과 사상, 정치와 휴머니티, 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게,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지혜와 인류의 참된 미래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인간 삶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담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부자간의 대화가 더욱 가치 있는 점은 이들 부자가 최고 수준의 서양 과학문명을 공부한 학자로서, 단순히 철학적, 종교적 문제만을 다루는데 그치지 않고 안락사나 인종 갈등과 유전자 복제 등과 같은 현대적 쟁점들에 대한 지식인의 진지한 고민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특히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두루 경험한 나이 든 아버지가 피력하는 유한성의 철학과 순수한 종교적 이상을 간직한 아들의 불교 철학은 서로 수렴하기도 하고 분산하기도 하면서 더 나은 세계와 인간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굳이 부자간의 대화 전체를 내가 평가한다면, 아들의 '판정승'이라고 생각한다. 장-프랑수아 르벨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기술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서구의 철학과 문명이 일으킨 19~20세기의 학살과 만행, 살육과 전쟁, 환경파괴와 양극화는 지구인들의 고통을 배가시키고 있음에도 르벨은 이 문제를 애써 외면한다. 20세기 말까지 현대과학의 성과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과학이 사물과 인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 과학문명의 특징인 전문화와 이분법의 한계가 점점 더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과학 측정의 시도가 측정결과에 영향을 미치게"되는 양자역학이 대표적이다. 즉 과학의 주체인 인간(측정자)의 간섭을 배제한 과학의 결과물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 승려인 마티유 리카르의 'KO'도 아니다. 수 년, 수 십년간 산중 사찰애서 명상과 수련을 통해서만 불교의 지혜에 가까워질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상황은 대다수의 일반사람들이 불교의 진리와 지혜에 다가가기 불가능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 대다수 사람들이 쉽게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철학이나 과학처럼 많은 부분을 다듬과 일반화시켜야 하는 큰 숙제가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을 통해 티벳 불교가 한국의 불교보다 훨씬 더 부처의 진리와 지혜에 접근하고 있고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불교는 존재감 자체가 과거보다 더 즐어들었다. 그것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부처의 지혜를 실천하는 한국의 불교계가 진리나 지혜 자체보다 기독교처럼 물질과 명예와 정치에 민감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특히 조계종) 티벳 불교와 달리 한국 불교는 '마음의 과학'이 아니라 '일신교' 같은 종교로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불교가 종교든, 철학이든 그 수행자들이 어떤 모습과 결과를 보여주느냐가 한국 불교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법정스님의 열 아홉번째 추천도서였다.
 
[ 2012년 3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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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부제 :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지난 2010년 3월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애서 소개한 도서목록 중 열 여덟번 째다. 이 책은 생각보다 한국에 꽤 알려졌다. 2007년에 처음 번역 발간되었음에도 벌써 35쇄나 발간된 것이다. 저자의 유명세도 한 몫 했겠지만, 한겨레 등 여러 신문에서도 소개되었고 인터넷에도 알려져있다. 세계적인 기아문제, 특히 어린이 기아에 대해서는 거의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인터파크 도서 사이트에만 해도 무려 256개의 리뷰(서평)이 실려있다. 

 

이 그림들은 TV나 잡지, 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것이다. 빈곤국이나 내전이 벌어진 국가, 지역에서 기아나 기아난민은 빈번한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간 집단에게 빈곤이 닥?을 때 가장 약자에게 먼저 닥치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도 동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발전과 진보가 유사이래 가장 최고조라는 21에게도 기아 문제가 지구에 남아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가장 먼저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의아하다. 그리고 과연 이 지구 상에 그렇게 인간이 먹을 식량이 없는지, 또 그렇게 '인권'과 '안도주의'를 외치는 미국과 유럽이 이 문제를 방치하는지 궁금해진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당연 탁월하다.

이 책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기아의 실태와 그 배후의 원인들을 작신의 아들과 나눈 대화 형식으로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전쟁과 기배계층의 탐욕,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NGO의 구호 조치가 무색해지는 현실, 구호조직의 활동과 딜레마, 부자들의 쓰레기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는 배불리 먹고 사람은 굶는 현실, 사막화와 삼림파괴의 영향,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영향, 그리고 특히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과두지배와 투기자금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21세기 기아'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이 얼마나 정치, 경제 질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세계 인구의 7분의 1이나 되는 기아인구, 더군다나 그 숫자가 21세기 들어서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충격적이고 심각한 현실을 고발한다. 대부분 기아 지역의 외형적인 문제는 전쟁, 내전, 정치적 혼란, 종교분쟁, 지배계층의 탐욕, 기후변화 등이다. 하지만, 기아문제의 역사적, 구조적 원인을 분석해 보면, 그 뿌리는 항상 서구로 귀착된다. 아프리카, 남미, 동나아시아의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지난 18~20세기에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침탈과 수탈을 일삼은데서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위해 평화롭게 자족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사회경제 구조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기후변화를 초래했고 21세기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의 화신인 다국적기업, 금융체계와 투기금융들은 세계 곡물시장을 조작하고 서구 국가들은 자국 농산물에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곡물가격 왜곡에 동참한다.
이처럼 거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조금씩 더 관심을 갖는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정부관료도, 정치인도, 자본가도, 기업도, 투기자금도 아닌 일반시민들이기 때문이다.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추진하지 못하는 정치적인 구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럼 무슨 일을 해야 하냐고 묻는 아이에게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라고 대답한다.(p.153)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그가 교수이고 유엔기구의 고위인사라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런 활동과정에서 그 스스로 알게 되고, 보게 된 것들을 국제적 기아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서 다시 한 번 분류하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기아 관련 저술 중에서 이 책은 가장 고급의 정보를 담고 있고, 몇 가지 점에서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한 책이다. 아들과의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현재 기아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이득을 보고 있고, 그런 이득들이 어떻게 재생산되며 더욱더 많은 어린이들을 굶주림으로 내몰고 있는가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우리나라에는 저자가 이 짧은 책에서 말했던 몇 가지 사례와 그것을 둘러싼 구조에 대해서 국제구호단체 활동가와 시민단체 관계자 이외에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정치적 논란의 여지가 될 북한의 기아문제가 아니더라도 칠레에서 벌어진 일과 네슬레의 관계, 부르키나파소에서 드러난 젊은 혁명가들의 애환, 그리고 국제식량기구의 정책 방향이 결정되는 과정과 같은 얘기들은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사실 장 지글러 만큼 고급정보를 접하면서도 현장에서 상황을 이해한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학자이며 지식인이며 또한 전문가인 사람들은 다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 한가운데나 중남미의 현장에서 상황을 목격하고 분석하고 이것을 전체적인 흐름에서 다시 정리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기아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거의 초보적 수준이다. 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다는 정도의 사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하게 저자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먼저 기아의 심각성을 먼저 알아보자.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2005년 기아로 인한 희생자 수를 집계했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한 사람이 3분에 1명꼴이며,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198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지금 인구의 2배인 12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먹여 살린다는 의미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 2,400~2,700칼로리 정도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세계질서는 어떠한 사정에서 등장한 것일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것은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사회구조에 있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수단이 없다.

소는 배를 채우고, 사람은 굶는다? 전세계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4분의 1이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거나 영양과잉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거꾸로 다른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굶어죽고 있다.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이 연간 50만 톤에 달한다.

조작되는 세계 곡물시장 가격과 버려지는 식량이 문제다. 세계시장에 비축된 식량의 가격이 종종 인위적으로 부풀려진다. 세계의 주요 농산물이 거래되고 있는 시카고 곡물거래소는 몇몇 금융자본가들, 앙드레 S.A.(스위스), 켄티넨털 그레인(미국), 카길 인터내셔널(미국), 루이 드레퓌스(프랑스)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부유한 나라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하거나, 법률이나 그 밖의 조치를 통해 농산물의 생산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남반구에서는 식량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농산물 가격을 높이기 위해 이것이 유럽 등 선진국의 농업담당 집행위원회가 하는 일이란다.

기아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 학교도 변화해야 한다. 정규 수업시간에 전쟁보다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기아에 대해 가르치는 학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기아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어떤 수단으로 극복할 수 있을지 토론하는 수업 같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뜬구름 잡는 식의 정서적인 대응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부적이고 정확한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얼마전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한비야 씨가 네티즌들에게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량생산을 늘여 굶주림을 없애야 한다고 답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아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서구 각국과 다국적 기업은 기아를 부추기는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을 이용한다. 2000년 기준으로 아프리카 인구는 세계 인구의 15%에도 못 미치지만 기아 인구의 25퍼센트 이상이 아프리카에 집중되어있다. 1970년에서 1999년 사이에 아프리카에서만 43차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들 전쟁은 심각한 기아를 초래했다. 전쟁의 이유는 복잡하지만 인종간의 갈등, 다이아몬드나 금, 석유와 같은 토착자본을 독점하고픈 욕망 등, 때로는 국제적인 금융 그룹이나 국제기업 등의 외부세력이 개입해서 은밀히 그 지역의 전쟁지도자에게 무기를 대주거나, 용병을 공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주기도 한다. 이들 전쟁의 희생양은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이다.

북한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1995년에서 2000년 사이에 200만 명이상이 굶어죽었다. 1990년도에 비해 곡물의 수확은 늘었지만, 취약한 토지소유 구조, 비료와 농기구의 부족, 만성적인 에너지 위기로 인해 곡물생산량이 최저 생계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06년 북한의 식량 부족분이 80만 톤 이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수확량이 인구의 최저 생계선을 15퍼센트쯤 밑돌고 있는 것이다. 2004년 유니세프와 FAO는 북한 아동의 영양 실태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15세 미만 아동의 37퍼센트가 심각한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수유모의 30퍼센트가 영양실조로 빈혈증세를 보여, 아이들에게 젖을 줄 수 없는 형편이다.

세계적인 식품회사인 스위스의 네슬레와 아옌데의 비극은 다국적 기업이 빈곤국이나 제3세계 국가를 어떻게 수탈하는지 보여준다. 1970년 칠레의 인민전선은 101가지 행동강령을 발표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칠레가 처한 높은 유아사망률과 어린이 영양실조라는 문제를 놓고 본다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공약을 내건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 문제에 가장 곤란함을 느꼈던 것이 스위스의 다국적기업인 네슬레였다. 커피와 우유를 주품목으로 하는 네슬레에게 칠레 정부가 분유를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칠레에서의 성공사례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로 번져갈 경우에는 더욱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가 내건 이 공약이 벽에 부딪힌 것은 칠레의 농장을 장악한 네슬레가 1971년 협력거부 방침을 결정하면서부터이다. 아옌데 정부는 네슬레에게 우유 구매를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는 거부당했다. 이때부터 아옌데는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서 고립되고, 결국 CIA와 결탁한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습격하여 암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따른 아마존의 파괴와 사막화로 인해 기아가 심화되고 있다. 1991년 통계에 따르면 36억 헥타르의 땅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 육지의 4분의 1, 경작이 가능한 건조지대의 약 70퍼센트나 된다. 사막화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서, 매년 약 600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2는 원래 사막을 포함한 건조지대라서, 경작이 가능한 건조지대의 73퍼센트 정도가 사막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럼 아시아는 어떨까? 역시 경작이 가능한 건조지역의 71퍼센트, 약 14억 헥타르에 걸쳐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지중해 남쪽의 건조지대는 이미 그 3분의 2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약 10억의 인구가 가까운 장래에 사막화의 위협에 직면할 거라고 예측된다.
사막화와 농지의 황폐화를 방지하기 위해 ‘사막화방지 협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들은 사막화방지 협약에 따라 파견하는 농업, 수리, 식물, 기후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사막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고, 사막화로 인해 수백만의 농민들이 목초지나 경작지를 잃고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그들을 도울 능력이 없음을 절감한 유엔은 그들을 ‘환경난민’이라 부르게 되었어. 그런데 문제는 정치난민과 달라서, 그들은 국제사회가 정한 ‘난민조약’(1951년)에 규정된 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먹는 것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최우선 과제는 먹을 것을 섭취하는 일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피조물은 죽는다. 식물은 물이 없으면 시들고, 먹이가 없는 동물은 기진해서 쓰러진다. 식량을 구하지 못한 인간은 기력을 잃고 사경을 헤매게 된다.
모든 생명체의 두 번째 과제는 번식하는 일이다. 번식하기 위해 식물은 성숙 단계를 거쳐야 하고, 동물은 번식 가능한 나이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그리고 너무 빨리 병들거나 죽지 않고 번식 가능한 나이에 들기 위해서는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
한쪽에는 특권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세계가, 다른 쪽에는 빈궁한 세계가 존재한다. 태곳적 식량 분배는 남자들의 힘에 좌우되었다. 임신한 여자와 아이는 절대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해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영양 섭취는 점점 더 사회적, 정치적, 재정적 힘의 문제가 되었다.

냉전체제의 몰락과 또 한 가지 패러다임 변화는 바로 글로벌화한 자본주의 내부에서 한 가지 자본, 즉 금융자본이 산업, 무역, 서비스 등의 자본들을 제치고 주된 자본으로 부상한 것이다. 금융자본의 이윤극대화 법칙은 오늘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금융자본이 왜 이렇게 우세한 것일까? 거대하고 효율적인 컴퓨터 체계의 발명은 아주 복잡하고 세계적인 ‘경제제국’의 동시적 관리를 가능케 해주었다. 몇 조개의 정보를 빛의 속도(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중단 없이 순환시키는 통일적인 사이버스페이스가 탄생한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 이런 패러다임 변화-사회적 양극구도의 몰락과 숨 막히는 기술혁신-는 금융자본의 거의 완전한 글로벌화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99년에 유통된 금융자본은 이 해에 전세계적으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보다 63배나 더 많았다는 것이다.
1919년에 막스 베버는 “부란 일하는 사람들이 산출한 가치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늘날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부, 즉 경제력은 다혈질적인 투기꾼들이 벌이는 카지노 게임의 산물이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비참한 세계, 너무도 골이 깊은 불평등한 세계. 오늘날의 세계의 주된 갈등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만성적인 실업난(유럽연합의 실업률은 12.5퍼센트)과 빈곤, 사회의 계층화, 영양실조가 지금은 북반구도 위협하고 있다. 그 주범은 바로 민족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과두지배, 투기자금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 225명의 대재산가의 총자산은 1조 달러가 넘는다. 이것은 전세계 가난한 자들의 47퍼센트(25억 명)의 연간수입과 맞먹는 수치이다. 빌 게이츠의 자산은 가난한 미국인 1억 600만 명의 총자산과 맞먹는다. 오늘날 개인들은 국가보다 더 부유하다. 세계 15대 부호들의 총자산은 남아프리카를 제외한 사하라 이남의 모든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선다.
이런 숫자의 배후에는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가 존재한다. 불평등이라는 부당한 역동성이 현재의 세계질서를 결정하고 있다.

글로벌화한 금융자본의 과두지배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라는 것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규범도 가라, 규제도 가라, 국민국가도 가라, 장애만 될 뿐이다. 선거도 가라, 일치도 가라, 정권교체도 가라, 민족주체성도 가라. 자유! 자본을 위한 자유, 서비스를 위한 자유, 특허를 위한 자유만 남아라. 그것은 관료제나 모든 종류의 제한에 반대하는 것이다. 오직 ‘완전하게 리버럴한 시장’을 추구하는 시장원리주의(신자유주의)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아에 의한 생명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저자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 우선적인 과제는 인도적인 구호조처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FAO는 당면한 긴급구호를 위해 비상식량을 비축하고 있다. 이 식량을 배급하고 관리하는 것은 WFP 담당이다. 그러나 담당자들은 도움을 줄 나라의 사회구조가 어떤지 거의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도움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부실하고 부패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으로 기득권 세력을 강화하고, 부당한 사회구조를 고착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함과 수백 년간에 걸친 약탈에 방치해두게 되는 것이다. 원조식량뿐만 아니라 국제단체가 제공하는 대부분의 개발지원금도 마찬가지다.
둘째, 원조보다는 개혁이 먼저.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그들에게 농사 짓을 수 있도록 사회적인 구조개혁이 이루어져야한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수출국에 속한다. 그런데도 대도시와 시골에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굶주리고 있다. 지주의 1퍼센트가 경작지의 43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2000년의 경우, 1억 5,300만 헥타르의 땅이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고, 500만의 농민들이 땅이 없이 가족과 함께 이 거대한 나라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샛째, 인프라 정비. 제3세계 나라들의 인프라를 정비하기 위해 시급한 지원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자본, 도로, 적당한 종자, 비축식량, 농경 전문지식 등 모든 것이 부족하다. 아프리카 남쪽에는 엄청난 땅들이 놀고 있다. 그 땅들은 투자가 없이는 경작되지 못할 것이다. FAO의 통계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정상적으로 경작되는 땅은 7억 헥타르 정도인데, 작은 투자로도 경작 면적을 두 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저자가 생각하듯이 세계 경제의 모든 메커니즘은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대 전제는 바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국제적 구조가 마련되어야 하고 규범과 협약이 마련되어야 한다.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 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기되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점은 희노애락을 공감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 2012년 2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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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자연과 공동체 삶을 실천한 윤구병의 소박하지만 빛나는 지혜
윤구병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여러가지 책을 읽다보니 출신과 학력에 상관 없이, 아니 보통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그것들을 가차없이 버리고 농촌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무엇이 그 분들을 자연으로, 농촌으로 향하게 했을까?
가난과 행복에 대해 교과서와 언론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법정스님이 소개해주신 사람들만 해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피에르 라비 [농부 철학자], 쓰지 신이치 [슬로 라이프], 피터 캐디 [핀드혼 농장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가끔 생각한다. 가난하기 보다 여유롭게, 불행하기보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나 역시 '가난하고 싶지 않지만, 행복하고 싶은' 많은 보통 사람들 중의 하나다. 이런 마음은 거의 99.9%의 보통 사람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2011년 12월... 대한민국은 춥고 외롭고 답답하다. 먹고 살기 바빠 서로를 다독거리기는 커녕, 제 갈길 가기도 바쁜 형편이다. 대를 이어 평생 '희망'이란 두 글자에 기대감을 높이던 99%의 사람들에게 21세기 한국사회에는  ‘한숨’만이 있을 뿐이다. ‘돈’과 '자존심'만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삶의 허망함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냥 이대로 현실에 적응하며 지쳐가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삶의 전환점을 찾아야 한다. 늘 언젠가 언젠가는 하면서 지나온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나는 지금이 그 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방향 중의 하나가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슬플 때 생각을 다잡고, 기쁠 때 마음을 가다듬고, 승승장구할 때 성찰케 하고, 어려울 때 용기를 북돋는 시대의 어른들이 쓴 산문. 동시대 사람들과 몸과 마음으로 호흡하면서, 그 생각과 글이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면서 매번 펼칠 때마다 그 깊이가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 절실하다. 우리의 내면에 ‘등불’처럼 가슴 속에 오롯하게 넣어둘 생각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누가 어떻게 담고 있을까?

저자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는 예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은 생각과 마음으로 자신을 가꾸고 실천하는 체험, 경험, 지식을 다음 세대에게 남길 수 있는 책이다. 그는 1995년에 정년이 보장되는 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2008년에는 모든 공직(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사단법인 공동육아연구회, 법인인 될 민족의학연구소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의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공공의 목적에 쓰이도록 사회에 환원했고, 함께 생활하던 변산공동체에 초가삼간을 지어 지내며 자연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40여 년 간 이어온 삶을 뒤로한 채,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자신이 설립했던 보리출판사가 경영난이 심하여 잠시 경영을 맡고 있다.
“죄다 놓아 버리자, 손에 쥔 것도 머릿속에 든 것도 다 놓아버리고 바람처럼 떠돌거나, 돈 없는 세상에 ‘짱박혀’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가 핫바지 방귀 새듯이 그렇게 가자.”

이 책은 저자의 삶, 특히 그의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변산공동체와 그 이후의 10여 년에 대한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그의 삶, 말, 행동은 그 자체가 철학이고 교훈이다. 삶에서 철학하는 사람이다. 즉 그에게 철학은 실천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 생명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한결 같은 실천적 삶으로 일깨워 왔다. 경제적으로 잘 살기에 몰입한 이후, 그 폐해가 드러난 이 시대에 결국은 우리 모두의 생존의 문제가 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여러 생명체가 더불어, 함께 살아야 나도 우리도 사는 것이다.”
그가 10여 년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는다. 그는 본질을, 삶의 본질을, 생명의 본질을, 생명의 원리를 궁구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로서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고, 가르쳤으며, 또한 스스로의 삶에 적용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중에도 자신의 주장(사상)을 가리고 아꼈고 키웠고 나눴다. 그의 철학은 실천이었고, 세상을 껴안았고, 그것을 세상과 나누고 베푸는 철학이었다. 
그의 공동체 생활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핍진했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마음이 지시한 방향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1980년대 이후, 1996년 변산의 농촌에 내려가 공동체를 꾸린 뒤 오늘까지, 그의 생각에는 일관된 것이 있었다. 바로 공존이요, 상생이며, 유기적 생명관이다. 그것은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시장경제로 세계화를 통한 부의 축적을 향해 치달리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현대 도시의 삶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모멘텀에 관한 것이다. 굳이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보통사람들의 삶과 생활을, 그들의 불행을 뒤집을 수 있는 '혁명'이 될 수 있다.
물질 중심의 가치관, 경쟁 중심의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개인과 국가간 빈부 격차의 확대, 갈등은 심화되고 우리의 삶의 질은 점차 피폐되었다. 도시 사회는 소유욕과 탐욕, 병적인 욕망으로 인간을 내몰았다.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의 삶에 적용했으며,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중에도 자신의 주장(사상)을 가리고 아끼고 키우고 나눴다. 그의 철학은 세상의 본질을 읽는 철학이다. 생명을 껴안는 철학이다. 나누고 베푸는 철학이다. 
그는 그것을 고단한 삶 가운데서, ‘좀 더 가난하게, 좀 더 힘들게, 좀 더 불편하게’ 살면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원형적 삶, 나눔의 삶이다. 세상의 여러 성인들, 부처와 유마힐, 성 프란체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고단한 삶으로 나아가 ‘인류의 생명창고’인 농촌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생명의 시간 속에서 자연과 사람과 더불어 땀 흘리며 공존과 상생의 기본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되살려내야 합니다. 땅을 되살려내야 합니다. 땅을 되살려내야 하고, 우리의 인간성을 되살려내야 하고, 그러면서 공동체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공동의 울타리가 되어 먹을 때 같이 먹고 굶을 때 같이 굶자는 원리로 소유욕과 탐욕을 근절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저자처럼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여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또 다른 생각...
'가난'과 '행복'... 어떤 삶이 '가난한' 삶이고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일까?...
 
국어사전에서 '가난'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고 쪼들림. 또는 그런 상태"로 정의한다. '빈곤'도 비슷한 개념.. 개인이나 가정의 살림을 차려서 사는 일이 넉넉하지 못하다라는 의미인데, 결국 사전적인 개념은 '의,식,주'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옷이 넉넉해야, 얼마나 풍족하게 먹어야, 얼마나 좋은 집에 살아야 가난하지 않을 것일까?
 
현대사회에 들어서면 '살림'이라는 개념 속에 의,식,주 이외에도 문화생활과 사회적 교류(미디어,통신), 교육 등 여러가지 추가적인 요소가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는데,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 미디어, 통신, 교육이 이루어져야 '가난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물질적으로 부족하면, 즉 가난하면 반드시 '불행'할까? 그리고 과연 '가난'은 물질적인 '가난'만 있을까?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가난'은 없을까? 우리가 '가난'하다고 느끼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 과연 물질적인 이유 때문인가? 아니 물질적으로 풍족하다고 반드시 행복할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언제일까 생각해본다.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바다. 지금의 40대가 10대이던 시절, 즉 1970년대에 한국의 물질적인 수준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반드시 '불행'했었나? 그것은 아니다.
행복이 삶의 과정이고 목적이라면, 나는 가난이 행복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대신 나의 살림살이와 타인의 살림살이,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나의 '행복감'이 영향을 받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언젠가는 혼자서 무인도에서 사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P.S) 올해 4월 모 언론사에서 저자를 인터뷰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이 책을 출판한 것이 3년 전... 올해 저자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보았다.
 
---------------  <인터뷰> '농부 철학자' 윤구병 보리출판 대표  ----------------- 2011년 4월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나무 한 그루 베어낼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자'는 게 출판사를 시작할 때부터 직원들과 약속했던 것입니다. 수익성이 없어 다른 출판사가 내기 힘든 책들이 있는데, 그 빈 고리를 메우자고, 우리 책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도록 하자고 했죠."
그림책과 아동책을 중심으로 상당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한 ㈜도서출판 보리의 윤구병(68) 대표는 최근 서교동 '기분좋은가게'에서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20년간 그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며 "핵심은 언제나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철학으로 만든 보리의 책들은 아동출판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으며 출판사를 지탱하고 여러 공익사업을 벌이는 데 힘이 돼 주고 있다.

"7년 반에 걸쳐 개발한 '보리 국어사전'은 초등 국어사전 중 판매 1위를 달리며 출판계에서 주는 큰 상을 네 개나 싹쓸이했지요.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입말로 담은 유일한 국어사전입니다. '올챙이 그림책' 시리즈는 1천만 명의 어린이가 읽고 자란 것으로 집계되지요."
특히 윤구병 대표가 80년대 말에 직접 기획하고 쓴 '올챙이 그림책'은 20여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최근 60권 전집 개정판으로 도서출판 휴머니스트에서 출간됐다.
 
1994년 윤 대표가 기획해 출간한 '달팽이 과학동화' 시리즈 역시 10만 명의 어린이에게 읽혔으며 지난해 '달팽이 과학동화 플러스'로 개정, 출간됐다.

이에 더해 윤 대표는 최근 이 책들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일에도 착수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컴퓨터나 여러 시각 매체를 접하는데, 어떻게든 건강한 문화를 접할 길을 열어주지 않고 구박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기획하게 됐습니다. 취학 전 아이부터 어른까지 광범위하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에요. 돈이 굉장히 많이 드는 작업이지만 잘 보급하면 장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생각으로 윤 대표는 '달팽이 과학동화' 중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하면서도 과학적인 인식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을 골라 3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불과 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잠꾸러기 불도깨비', 공동체적인 삶의 필요성을 강조한 '울타리를 없애야 해', 환경의 소중함을 전하는 '이런 공장은 싫어'가 10~15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으로 나왔다. 특히 '잠꾸러기 불도깨비'는 3D로 제작됐다.

출판사는 이 애니메이션들을 극장에서 일반 상영하기 위해 '영화제작사 및 배급사'로 공식 등록까지 했다. 파주에 있는 '씨너스 이채'에서 시험 상영을 한 뒤 학교나 공공도서관에서도 상영할 수 있도록 보급할 계획이다.

또 '올챙이 그림책' 전집에서도 6개를 골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오는 8월께 출시를 목표로 준비 중이다.

윤 대표는 1988년 출판사의 모태인 '부리기획실'을 꾸리고 1991년 출판사로 등록해 20년간 출판사 일에 관여하지만, 사실 직접 대표를 맡은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출판환경이 바뀌면서 대형서점 중심, 온라인 중심이 되다 보니 보리 책이 점점 안 팔리더군요. 할인율이 낮다 보니 서점에 가도 눈에 안 띄고….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대표직을 맡게 됐고 현재 중장기적으로 잘 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출판사 대표직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제 공식적인 직책에서 은퇴할 나이가 됐다는 것이다. 단, 그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내년 3월이면 출판사 대표를 그만두고 변산에서 지내면서 농사짓고 '살림대학'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려고 합니다. 그전에 할 일이 '동네 책방'을 살리는 일이에요. 지금 질 좋은 책을 구할 수 있는 동네서점이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대형서점은 서민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온라인 서점은 신간 중심이지요. 어린이문화운동단체들과 함께 동네 책방을 살리는 방안을 연구 중입니다. 연구 성과가 나타나면 건강한 어린이 문화와 결합한 조그만 책방을 열 생각이에요. 물론 어린이뿐만 아니라 부모도 양질의 책을 볼 수 있도록 꾸밀 거예요. 시범적으로 한두 개를 먼저 내고 선의의 체인점으로 늘려갈 겁니다."
출판사 일 외에도 윤 대표가 손을 댄 일은 한둘이 아니다. 사실 그의 이름은 출판사 대표보다는 '농부 철학자' '교수 출신 농사꾼' 등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1994년까지 충북대 철학과 정교수로 지내다 정년이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농사를 짓고자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 생태주의 공동체 '변산공동체'를 꾸렸다.

"15년을 교수직을 했고 국립대 정교수로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됐죠. 철밥통 중의 철밥통이었는데 이상하게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삶에 절실한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활력을 느끼는데, 학생들은 졸업장 따는 데만 매몰돼 있고 질문을 하지 않더군요. 질문 없는 대답을 혼자 떠드는 게 계속되니까 불행해지더라고요. 그때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나 나름으로 행복하게 살 길을 찾자고 해서 95년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날마다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는 현재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에서 출판사 일을 돌보고 나머지는 변산공동체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

변산공동체는 윤 대표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현재 70여명으로 이뤄져 있다. 공동 명의의 땅에 농사를 지어 그 생산물로 자급자족하고 농산물 판매로 인한 수익금은 필요한 만큼 나눠쓰는 생활을 한다. 농사는 철저히 유기농 방식으로만 짓는다. 대안학교로 소규모의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운영하며 현재 산살림ㆍ들살림ㆍ바다살림을 연구할 수 있는 2년제 '살림대학' 설립도 준비 중이다.

윤 대표는 또 보리출판사와 연계해 '재단법인 민족의학연구원'을 설립했다.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우리 땅의 전통의학을 집대성하는 기관이다. 1천여 종이 넘는 토종 약초의 성분을 분석하고 효능까지 집대성하는 사업으로, 모든 약초에 세밀화를 곁들여 한 권당 800~900쪽으로 발간하는 장기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사장은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맡았다.

이밖에 보리출판사의 수익금 일부로 재활용 가게인 '기분좋은가게'와 유기농 식당 '문턱 없는 밥집' 등 공익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보리출판사가 서교동에 공익사업을 위해 마련한 건물 '태복빌딩' 1층에 있는 '문턱 없는 밥집'은 점심 시간에는 도시 빈민들을 위해 1천 원 이상 있는 만큼만 돈을 내도록 한다.

"누군가 저에게 손대는 일마다 다 성공했다고 신기해하더군요. 저는 그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을 뿐입니다."
mina@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04/24 09:03 송고  
 
[ 2011월 1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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