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 22년간의 도보여행, 17년간의 침묵여행
존 프란시스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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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개인이 작은 결심으로 시작해 오랜 기간 꾸준하게 노력하여 사람들과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 이야기가 있다. 존 프란시스(John Francis). 아버지는 파나마 태생의 전기회사 보선공이었고, 어머니는 필라델피아 출신이었다. 어머니의 혈통에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노예가 섞여 있다. 그는 194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시력도 동년배들보다 1년 정도 늦었던 아이였다. 그는 조부모, 삼촌과 사촌 형제들과 함께 따스한 애정을 받으며 한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그는 세 번째로 대학을 그만둔 직후인 1969년 캘리포니아 주 인네버스로 이사했고, 1971년 인네버스에서 소방 부서에 근무하는 중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를 목격했다.

 

존 프라이스는 기름유출 사고 직후 원유에 뒤엉킨 새와 바다생물을 살리기 위해 애써보고, 해변을 뒤덮은 기름을 문질러 닦는 자원봉사자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더 깊이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구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그는 더 이상 자동차를 타지 않기로 하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자동차를 버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모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동차 뿐 아니라 동력으로 움직이는 모든 운송수단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그의 결심에 놀라고 의아해했으며 때로는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보생활은 시작에 불과했다. 몇 달 후 존 프란시스는 침묵을 맹세하고 17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침묵하면 제가 거짓말을 한 하게 되지요") 17년간의 침묵을 통해 사람들이 망각한 자연의 리듬을 발견하고, 말 한 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 1972년 4월부터 걷기 시작하였고,1983년 1월 1일부터 1990년 1월 아틀랜틱 시티의 대서양 해변까지 8년 동안 미국 전역을 걸어서 횡단했다. 그는 결국 22년 동안 걸어다녔다.

 

"걷기와 침묵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걷기와 침묵은 속도를 늦추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준다. 내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침묵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침묵은 단순히 내가 입을 다물 때 생기는 말의 부재가 아니다. 침묵은 총체적이면서 독립적인 현상으로, 외적인 요소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나는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p.83)

 

저자는 침묵 여행과 만남을 통해 말 한 마디 없이 이해와 공감을 전하는 법을 배웠다. 태평양 북서부를 거쳐 시에라 산맥과 로키 산맥을 횡단했으며, 태평양 연안에서 대서양 연안으로 미국 땅을 도보로 가로질렀다. 대나무 숲으로부터 듣는 법을 배우고, 야생지대에서 자연을 배웠다. 사막을 건너며 옐로스톤 평원을 거치면서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위대함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침묵 속에서 여행하면서도 남오리건 주립대학에서 과학 학사과정을 그리고 몬태나 대학에서 환경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결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토지자원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친구들과 함께 도보 순례를 통해 환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환경보호와 세계평화를 촉구하는 비영리 교육기구인 '플래닛워크(Planet Walk)'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하여 활동을 병행했다. 그의 걷기와 침묵에 대한 소문을 점점 미국 전역에 퍼져 UNEP(UN 환경계획 Environment Programme)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고, 미국 연방정부 해안경비대와 함께 유조선을 규제하는 규정(OPA 90)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94년부터 1999까지 그는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브라질, 볼리피아, 아르헨티나, 남극까지 지구와 환경을 위한 여정을 확대하였다.

 

"이동하는 데 석유를 소비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석유 유출사고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 더 많은 양의 석유를 더 싸고 더 빠르게 공급받으려 하니까 그 과정에서 일부가 유출되는 게 아닌가?"(p.436)

 

책 속에는 존 프란시스가 여행 중에 직접 그린 그림이 곳곳에 실려 있고,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인 충고도 곁들여져 있다. 그가 여행 중 겪은 긍정적인 경험과 위기의 순간들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독자들은 그가 만난 아름다운 세상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체험할 뿐 아니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착실히 삶의 지혜를 터득한 ‘순례하는 철학자’의 통찰과 지혜를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존 프란시스가 걸어간 수많은 길 위를 따라가면서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새만금 등 환경문제를 적당히 바라본 나를 되돌아 본다. 나 역시 태안과 새만금으로부터, 환경과 생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존 프란시스 만큼 치열하지도 못하다. 2010년 가을부터 가급적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한 달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을 자동차를 운전한다. 그리고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담배도 끊지 못했고 여전히 샴푸도 사용한다. 재활용도 잘 못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엉망이다. 다시 한 번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천지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한 50권 중에서 27번째이며, 도보여행과 침묵여행을 통해 우리 대부분이 망각해 버린 자연의 리듬을 재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2012년 10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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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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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 1년) 2월, 다산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으로 가는 귀양길에 올랐다. 자신의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은 신앙을 지키려다 매질을 감당하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고,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신지도로 귀양을 떠나면서 헤어졌다.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正祖 1782~1800)가 세상을 떠나자,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천주교를 탄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개혁 추진 세력인 시파(時派)를 종교를 빌미로 몰아내려 한 벽파(僻派)의 정치 공작이었다. 한 때 천주교에 입교한 적이 있고,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벼슬살이를 했던 다산 역시 이 음모의 표적이 되었다. 왕의 신임을 받으며 이름을 빛내던 시절은 가고, 집안은 풍지박살 난 채 쓰라린 유배의 길을 떠난 것이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초당을 짓고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유배를 떠날 때, 첫아들 학연(學淵)이 열여덟 살,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열다섯 살이었으니, 아비로서 자식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걱정되는 마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다산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두 아들 뿐안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던 둘째 형, 그리고 제자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이 책은 그렇게 보낸 다산의 편지글을 엮은 모음집이다.
 
다산은 편지에서 두 아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고 있다. 직접 곁에 두고 가르칠 수 없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편지글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밤낮으로 애태우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너희들 뼈가 점점 굳어지고 기운이 거칠어져 한두해 더 지나버리면 완전히 내 뜻을 저버리고 보잘것없는 생활로 빠져버리고 말 것만 같은 초조감 때문이다. 작년에는 그런 걱정에 병까지 얻었다."
그는 친구를 사귀는 법, 책을 읽고 쓰는 법, 밭을 가꾸고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을 세세하게 적고, 효를 다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라고 아들들에게 말한다. "폐족(廢族)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그는 모든 일이 '효(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혼자 계신 어머니를 잘 살펴 드리고 큰아버지를 아버지 모시듯 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어떻게 효를 실행할 것인지를 편지 속에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너희 형제는 새벽이나 늦은 밤에 방이 찬가 따뜻한가 항상 점검하고, 요 밑에 손을 넣어 보고 차면 항상 따뜻하게 직접 불을 때 드리되 이런 일은 종들을 시키지 않도록 해라. 그 수고로움도 잠깐 연기 쏘이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네 어머니는 무엇보다 더 기분이 좋을 것인데, 이런 일을 왜 즐거이 하지 않느냐?" 복종으로서가 아닌 나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에 대한 효(孝)는 이 시대에도 분명 사회문화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산의 편지글이 불효자인 나를 초라하게 한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강조한 것은 독서였다. 그는 정월에 독서 계획을 세운 후 그대로 실천하는 열성적인 독서가였다. 집안이 몰락하면서 아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책을 읽고 학문을 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라며 부지런히 독서하라고 권한다. 학문으로 영달을 꾀하겠다는 사리사욕이 없을 때, 비로소 글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문에 뜻을 두어야 하며, 독서를 할 때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글을 즐겨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식들이 자신의 글을 깊이 이해하고 책을 엮어 자신이 무고하고 훌륭한 지식인이었음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기를 바랐다. 다산은 200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도 독서를 왜 하는지, 어떤 마음자세로 해야 하는지 다시금 깨우쳐준다.
그는 스스로가 검소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았고, 아들들에게 재물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오래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 버림받는 일'이라며 두 아들에게 채소를 가꾸어 보라고 권했다.
 
다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과 학유가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엄격하게 격려했다. 편지를 읽다보면 선비답게 참다운 길을 가도록 준엄하게 꾸짖는 다산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특히 권세가들에게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라고 권유하는 아들에게 다산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절조를 잃어버려서야 되겠느냐"며 매섭게 질책한다. 불의와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1세기에 학문을 한다는 우리사회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에게 천둥처럼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편지 속에는 겉으로는 엄하게 채찍질하지만 그 속에는 자상하고 애끊는 부정(父情)이 넘친다. 어두운 유배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고달픔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직 아들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어 더욱 감동적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가족간 윤리, 친인척과의 인간관계, 양계, 양잠하는 법, 심지어 친구를 사귀고 술을 마시는 법도까지 세세하게 일러주는 편지들을 보면 과연 오늘날에도 이같은 부자(父子)관계가 존재하는지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또한 유배지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듣고 슬피 울부짖는 글과 “이달 들어서는 공사간에 슬픔이 크고 밤낮으로 가신 이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으니 이 어인 신세인가. 더 말하지 말기로 하자”와 같은 절제된 문장에서는 다산처럼 큰 선비도 어쩌지 못할 극한의 슬픔이 묻어난다.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님 정약전과도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우애를 나누었다. 스스로 평생지기라 일컬었던 둘째형님에게 보낸 편지들은 서로 불우한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적 깊이에 탄복하며 인생을 토로한 수준 높은 서간문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신보다 더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를 잡아먹는 법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편지글에서는 둘째형님에 대한 지극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가난한 제자들의 생계까지 염려해주는 자상한 스승의 마음씨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 편지글들은 다산이 실학자로서 얼마나 튼튼한 현실주의적 사고와 실학사상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과거제도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과거공부에 힘을 기울이라고 주장하거나 애써 힘든 길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고 당부하는 현실적인 가르침 등이 그러하다. 지금처럼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지고 교권(敎勸)이 흔들리는 때, 이 글들은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한다.

 

이 책을 소개해주신 법정스님은 이렇게 소감문을 남기셨다. "살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자신의 인생을 꽃피울 수 있다. 그러나 살 줄 모르면 아무리 좋은 여건 아래서라도 죽을 쑤고 마는 것이 인생의 과정. 그(정약용)는 18년 유배생할에서 260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재능과 출세를 시기하여 무고한 죄를 씌워 유배를 보낸 그때의 지배 계층은 오늘날 그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귀양살이에도 꿋꿋하게 살았던 다산은 오늘까지 숨을 쉬면서 후손들 앞에 당당히 서 있다. 참과 거짓은 이렇듯 세월이 금을 긋는다."라고... 

 
이 책은 역사책 속에서만 알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산이 유배라는 천신만고의 괴로움 속에서 가족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너무도 진솔한 한 인간의 내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에 그 어떤 책보다 큰 지혜, 깊은 감동을 선사해준다. 다산 정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이야말로 그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한다. 앞으로 다산의 사상과 학문세계, 개혁정책에 대해 더 공부해봐야 하겠다.
 
[ 2012년 7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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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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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거나 긍정적인 기억이 없다. 초중고에 다니면서 배운 아주 상식적인 수준으로 종교의 역할이나 기원 등에 대해 알 뿐이다. 개인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기억은 크리스마스 때 과자를 준다고 찬구가 꼬드겨서 한 두번 교회를 갔던 기억과 고교시절 KSCM(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라는 무슨 비공개 모임에 한 두번 가고 수련회까지 참석한 후 재미 없어서 그만둔 기억이 있다. 대학에 올라와서는 1학년 겨울방학 때 개신교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세미나 모임에 몇 차례 참석했을 뿐이다. 고모와 누나가 독실한 개신교인이고 성품이 착해서 교회 다니면서 봉사활동하는 모습에 "그렇게라도 사회활동하면 좋은거지"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불교의 경우에는 사찰을 몇 번 구경갔을 뿐 별로 접촉할 기회가 없었고 카톨릭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종교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기억과 느낌이 존재한다. 개신교의 경우 국내의 상당수 교회나 목회자들이 '몸집 불리기'에 매진하는 모습, 지하철과 광장 등에서 만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광신도, 대학시절 학교 광장에서 미친듯이 울고 기도하던 CCC 회원들, 언론에 간간히 터자는 목회자들의 비리와 부패와 범죄행위가 나에게 '종교의 부정적인 상징'이 되었다. 대신 빈민들이나 농민들, 노동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다가가고 그들을 위해 처벌과 고통을 감내하는 개신교 목회자들의 모습은 개신교에 대한 긍정성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 느낌은 불교와 카톨릭, 천도교 등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다만, 천주교의 경우 비리나 부정이 많이 기사화되지 않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차사 은폐조작'을 폭로하는 등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위해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늙어서 만약 종교를 가진다면 카톨릭이 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몇 년 전까지 종교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교란 이데올로기의 일종이고 인류 문화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고 '인류의 많은 문화유산 중 하나'로 치부하고 살았다. 종교 이외에도 내가 궁금하고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은 것은 무진장했으며 주변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종교를 가진 이들 조차도 '종교를 가지는 것을 회의'하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몇 년 전부터 종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언젠가 성경, 불경, 코란 등 주요 종교서적을 한 번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몇몇 종교인들의 삶과 저서를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종교의 가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후 읽게된 스님의 저서를 통해 불교 뿐 아니라 종교 전반에 대해 갚게 다사 생각하개 되었다. 그 뒤 법정스님이 추천해주신 책들 중 <끝없는 여정>, <비노바 베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그리스인 조르바>, <승려와 철학자>,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등을 연이어 읽으면서 종교에 대해 점점 더 알고 깨닫는 바가 늘어난다.(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궁극적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법정스님이 불교에 대해 흐릿하게나마 '눈을 뜨게' 해주었다면 아베 피에르 신부의 이 책은 나에게 기독교(개신교와 카톨릭)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피에르 신부는 성경이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믿음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깨트려 주었다. 나는 지금껏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내세에서 천당'에 가기 위해, '그분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는 그런 믿음을 비판한다. 
그는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며, 그것이 그분의 본질을 이룬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우리가 또는 그들 스스로 비신자로 부르는 사람들 간에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한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라뜰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그는 성경 귀절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자문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에르 신부는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사랑하는 사람 하나하나의 존재 속에, 풀뿌리와 작은 벌레 속에도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피에르 신부는 올바른 선교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통상 국내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은 가도와 찬송, 무슨무슨 성경공부모임, 노숙자들에개 점심 제공, 정기적으로 사회적 약자 도우미 활동 및 성금 모금, 가정이나 개인을 ?아다니며 선교활동하는 것을 자신들의 주된 신앙생활로 삼고 있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는 '엠마우스 공동체 운동'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단순히 '먹고 입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주었고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단지 '인종적인 이유로 학살당하는' 유대인의 탈출을 도와 나치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 피에르 신부는 솔직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얘기함과 동시에, '더불어 사는 기쁨', '나눔의 철학', '실천하는 사랑' 등, 이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핵심적인 메시지들을 그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기쁨'은 결코 멀리 있거나 거창한 것이 아님을, 목이 마를 때 물 한모금 속에서도 무한한 기쁨을 맛보게 되듯이, 이웃과 더불어 베풀고 나누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타인이 바로 내 삶의 '기쁨'이라는 단순한 진리와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출판사의 책 소개가 재미있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선정한다. 그리고 이 설문조사에서 8년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1위에 오른 인물이 있다. 올해로 아흔 살을 맞는 노사제 피에르 신부. 연예인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기경이나 교황도 아닌 그냥 보통의 성직자에 불과한 그에게 사람들은 왜 그토록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걸까? 바로 이 책에 그 답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현재 전세계 44개국 350여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빈민구호 공동체 '엠마우스(Emmaus)'의 창시자인 피에르 신부의 자전적 기록이자, '노사제가 우리들에게 털어놓는 고백성사'이다."

 

한국 내 기독교 목회자들과 신도들, 특히 개신교 목회자와 신학자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피에르 신부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국 내 개신교 목회자의 90% 이상이 '종교적 광신자'이고 종교를 신앙이나 영성이나 사랑이 아닌 권력과 부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 인상 깊은 문장 :

- 오늘날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회교 등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광신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동한 데서, 종교에 대한 개인적 추구가 정치적 권위에 대한 욕망으로 전환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절대자에 대한 개인적 탐구는 성스러움으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 정치적 탐욕으로 변질되어버란 절대자는 온갖 형태의 광신을 향해 열린 문과 같다.(p.133)

- 예수께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외의 그 무엇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애쓰다 보니 나는 일평생 사랑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p.180)
 
[ 2012년 7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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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한알 속의 우주 -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개정판
장일순 지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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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일순 선생은 한국전쟁 이후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고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테타 이후에는 사회운동가로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꾸준하게 반독재 사회운동을 하던 그는 1977년 "종래의 방향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1983년 도시 농촌 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했다. '한살림'은 한국 내 협동조합운동의 첫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김지하 시인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장선생은 1955년 원주시 봉산동에 직접 토담집을 만든 이후 죽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이 책은 선생이 돌아가신(1994년 영면) 후 주변사람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문집을 내기로 하여 발간된 것이다. 장선생은 평소에 명징하고 삶의 지혜를 담은 이야기를 주변인들에게 많이 했지만,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이 스스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박정희 군사통치 시절에 '글'을 남기면 주변 사람에게 피해가 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렇지만 이현주씨가 서문에 밝혔듯이 사색을 많이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좋은 말과 교훈과 모범을 보여준 과거 성인들(공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의 삶을 본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집은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장선생이 몇 잡지에 실은 글과 한살림공동체의 각종 모임에서의 강연록, 농민회나 대학교 특강록 등과 대담록으로 엮어져 있다. 쉽고 평이한 말과 글로 채워져 있는 강연이나 기고문 속에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인간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햇빛과 물과 공기와 음식물(풀과 쌀)이다. 풀 한 포기가 싹이 터서 자라고 쌀 한 톨이 자라 벼가 되고 곡식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햇빛과 공기와 흙이다. 즉 지구상의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 조건은 지구와 해와 달이고 곧 우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일순 선생은 우주와 인간과 지구상의 생명체는 한 몸이라고 말한다.

나락 한 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그 속에는 무수한 생명의 싹이 들어있고 그 싹들은 우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축소된 우주'인 셈이다. 인류의 현대과학이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로써 이론적으로 '추측'하는 원자와 미립자의 존재양식은 우주의 존재양식과 다름이 없다.

장선생은 이 단순한 원리와 연결하여 인간의 삶과 행동, 종교, 공동체, 협동조합운동, 생명운동을 이야기한다. 인간중심, 인간지배 그리고 이분법과 경쟁으로 이루어진 서구사상이 지구와 자연을 파괴, 고갈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 자신들의 삶과 사회까지도 파멸시켜 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기독교 하느님과 불타 석가모니는 보이지 않는 곳이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 세상만물 속에, 사람들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그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동학사상과 천도교에서 서구의 기독교 사상과 동양의 유,불,선 사상을 아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장선생은 말이나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실천과 삶으로서 한살림 공동체를 시작하고 운영했던 경험을 설명한다. 그에게 한살림운동은 생명사상이자 공생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다.

 

장선생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지금 살아가는 내 모습에 대해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나꼼수 김어준의 말처럼 "정치가 내 생활의 스트레스"라고 생각되어 내가 평소보다 조금 더 한국정치에 관심을 가져온지 1년이 되어간다. '관심'이라 하기에는 좀 우습기는 하다. 과거와 달리 신문방송 정치란을 좀 더 관심있게 읽어보고 생각해보고, 정치분야와 관련한 책도 읽어보고, SNS에 사회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내 생각을 밝히고, 정당 가입하여 가끔 활동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자원봉사한 정도다.
작년부터 계속 느껴왔던 것이지만, 지난 4월 총선과 5월부터 시작된 통합진보당 사태를 전후한 소위 진보적 시민이나 진보적 정치세력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삶과 유리된 정치, 개개인의 구체적인 생활에서 동떨어진 진보운동, 담론이나 이론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지식인, 공동체 의식과 협력 정신이 사라진 대중정서 등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나 스스로도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구체적인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하고 하루하루 사람들과 나누고 소통하고 바람직한 생활을 해나가지 않은 채 진보의 가치를 내세우고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든다.

 

[ 2012년 6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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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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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거의 10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친구 두 명과 만나 저녁을 먹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는 일상을 돌아보면 친구들, 지인들을 충분히 연락하고 만날 수 있었음에도 나의 하루하루가 무엇이 그렇게 절실하고 중요했는지 허탈한 느낌이 들어 일부러 친구를 찾아보았고 어렵지 않게 연락처를 구했다. 친구 하나는 중견 걸설회사에서 현장 소장으로 근무하는 직장인이고 또 한 친구는 의류산업을 창업한지 4년 정도 되어 한창 열심히 사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적성을 찾아 꾸준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반갑고 고마웠다.
다른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사들이 더러 있다. 치과나 신경외과 같은 전문분야든, 개업이나 월급쟁이냐의 의료인의 처지에 관계없이 의사로 살아가는 친구들은 적지않은 돈을 벌고 있는 대신 개인의 삶에서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산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가족의 생활비 때문에 일반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사무직,생산직,서비스직, 또는 소상공인보다는 소득 면에서 안정적이겠지만...

'의사'라는 고귀하고 명예로운 역할이 말 그대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직업으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다. 아니 황금만능과 약육강식이 판치는 우리 시대에는 그런 '고귀한 존재'라는 표현이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현재 의사로서 자신의 삶에 고민하는 이들과 장차 의사가 되고자 하거나 '가치 있는 삶'을 고민하는 아이들, 학생들을 위해 노먼 베쑨의 전기는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아이들과 학생들이 아니라 우리 세대들도 꼭 한번은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그 이유는 노먼 베쑨의 인생역정이 우리 세대에게도 큰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닥터 노먼 베쑨의 20대와 30대는 아주 자유분망하고 한 편으로는 방탕한 생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36세에 당시(1926년) 불치병이라고 알려진 결핵에 걸려 삶을 포기하고 요양원에 입원하게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던 어느 날 그는 결핵을 치유할 수술방법(인공기흉술)을 스스로에게 시술하여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극적으로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고 44세에 결핵의 외과적 처치에 큰 업적을 남김과 동시에 보건의료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먼 베쑨은 46세에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1936년 당시 스페인은 만주적인 선거로 집권한 공화국 정부를 군부 파시스트 프랑코 일당이 독일의 히틀러과 이탈리아의 무솔로니를 등에 업고 쿠테타를 일으켜 내전이 격화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히틀러와 무솔로니의 군사파시즘 야욕이 유럽 전역을 공포와 암흑으로 덮고 있음에도 서구국가들, 미국과 캐나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스페인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이동식 혈액은행'을 설립, 운영하여 전시 의료분야를 개척하고 수 많은 중상자를 살려냈다. 그는 스페인 내전 상황에서 2년간 활동하면서 전시 의료체계를 수립한 후 스페인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서 일제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우는 중국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였다. 그리고 18개월 후 중국 땅에서 수술 중 손가락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체 게바라와 살바도르 아예데와 같이 세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위인들 중 의학분야 출신, 또는 의사 출신이 여러 명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노먼 베쑨은 외과의사이면서도 발명가이고 의료정책가이면서도 휴머니스트이고 교사이면서도 혁명가였다.
그는 결핵의 수술적 치료법 개발 등으로 의학발전에 기여한 탁월한 흉부외과 의사이자 캐나다의 공중보건제도 확립에 앞장섰던 보건의료 운동가이며, 스페인의 반파쇼 투쟁,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과 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종군의사로서 몸바쳐 싸웠던 혁명가이기도 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했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는 충분히 찬사 받을만 하다. 이 책은 비단 그의 전기뿐 아니라, 그가 생전에 남긴 회고담, 일기, 편지 등을 적절히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좇아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인간으로써의 노먼베쑨의 사실적인 모습을 접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은 전과 달리 매우 복잡다단해졌다. 이제 국가의 문제는 그 국가 속의, 또는 그 국가 주변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으며 세계적인 문제성을 지니게 되었다. 심지어 한 사람의 질병에서부터 한 민족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그물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개척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인 대의에 참여하여 그것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닥터 노먼 베쑨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온 몸으로 실천한 인물인 것이다.

그는 특히 3개국에서 생활하고 투쟁했다. 첫째는 그이 조국 캐나다였으며, 둘째는 만국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암흑의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군집한 스페이었고, 셋째는 일본 군사 파시스트들이 득실거리는 중국 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기는 달랐다. 베쑨은 그가 가장 잘 아는 무기, 즉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무기로 투쟁에 참여했다. 뛰어난 흉부외과 의사였던 그는 의술을 단지 사람들의 질병만을 돌보는 것이 아닌, 몸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을 통합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걸하는 것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켰다. 그는 몸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이 함께 고쳐질 때에야 바로소 제대로 된 인술을 펼칠 수 있다고 믿었다.
베쑨은 전장의 와중에도 학생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최초로 혈액은행을 운영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부상별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대들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시오."라는 그의 가르침은 세계의 민중들에게 짐 지운 투쟁에 의사들 또한 일부로서 참여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내가 우리 세대들이 이 책을 꼭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베쑨의 삶이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의 의사로서의 능력, 보건의료인으로서의 자질, 반파시스트로서의 열정, 목숨을 건 혁명가로서의 그의 삶은 본받을 만 하다. 그의 삶과 열정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위대했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고 제시할 만한 그런 위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베쑨의 삶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그가 자유분망하고 부유한 의사로서의 삶에서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 나이가 44였다는 것이다. 즉 이미 청춘도 지나고 열정도 사라지고 가족들을 위한 밥벌이에서 벗어나지 멋한 '한물간 세대'라고 자조하고 있는 우리 세대의 40대라는 나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누군가를 위해, 개인과 가족만을 위한 삶을 넘어서,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아니면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갈 날이 아직도 창창하다는 것이다.

- 책 속의 문장 :

다시는 결코 메스를 들면서 그 어떤 생명체일지라도 단순한 기계적인 유기체로 취급하지 않으리라. 사람이란 꿈을 가진 존재다. 이제부터 나의 칼은 육체와 동시에 그 꿈을 구하리라.(베쑨의 '일기' 中)

나는 살인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그 모순을 묵과하기를 거부하오. 나는 우리가 소극적인 탓에 또는 태만한 탓에 탐욕스런 인간들이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소... 
스페인이나 중국이나 모두 다 같은 투쟁의 일부인 것이오. 내가 중국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곳이 가장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오. 또한 나의 능력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오. -베쑨의 편지 中(p.341-342)


[ 2012년 5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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