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여정 - 녹색성자 사티시 쿠마르의
사티쉬 쿠마르 지음, 서계인 옮김 / 해토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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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년 7월 법정스님의 저서 < 내가 사랑하는 책들 >에 소개된 책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오래된 미래>, <무탄트 메시지>, <성장을 멈춰라>, <꾸뻬씨의 행복여행>, <나무를 심은 사람>에 이어 여덟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도에서 왜 그렇게 많은 출중한 위인들이 계속해서 배출되는지 일부 이해가 된다.
물질적 정신적 허기에 힘들어하는 삶, 21세기에 들어서도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카스트 제도, 깊은 시골과 밑바닥 인생들에게 뿌리박혀 있는 여러 종교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배출되는 간디, 크리슈나무르티, 비노나 베베, ...
 
저자 역시 지금은 세계적으로 녹색성자로,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생태적 영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걸어온 삶은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의 연속이기도 했다.
인도의 농가에서 태어나(그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한 점성가는 그의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 될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홉 살 때 친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모든 친지들과 접촉을 끊고,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한 채 9년간 자이나교 승려로서 인도를 걸어서 횡단했다. 

비폭력적 방법으로 사회적 영성을 추구하는 간디의 가르침을 듣고 열 여덟 살 나이에 자이나교 승려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교단을 나와 간디주의자가 된다.(그는 자이나교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세상과의 단절이 그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노바가 주도하는 토지헌납운동에 참여하여 ‘걷기’를 통한 명상과 사회개혁의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친구와 함께 ‘반핵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무려 2년의 기간동안 인도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워싱턴까지 걷는 평화 순례에 나선다.
그 후 영국에 정착한 그는 생태적 사고와 전통문화, 그리고 자연의 지혜를 탐색하는 격월간 잡지 [리서전스]를 편집하고 발행하면서, 명상하고 산책하는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간디식 평화와 공존의 이념을 전파해왔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작은학교’와 성인을 위한 ‘슈마허 대학’을 설립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안학교로 만들어 놓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비폭력과 생태적 영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비노바 바베를 비롯하여 인도 현지에서 만난 여러 구루들, 크리슈나무르티, 버트런드 러셀, 마르틴 루터 킹, E. F. 슈마허, 반다나 시바 등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세기의 지성들이다.
그는 이 걸출한 지성들과의 만남을 자양분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생태철학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는 삶의 과정에서 숱하게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고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9살 어린 나이에 대지의 품과 같은 어머니와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으며,
도망치다시피 자이나교에서 벗어났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평화순례를 마친 후에는 첫 번째 아내와 두 아이들와 이별했다.
영국에서도 함께 생태운동을 진행하던 동지들과 다투고 결별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삶을 끝없이 현실에, 대지에, 평화에 던지고 살았다.
그는 생각과 사물과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참다운 본래의 자아를 찾아 굳굳하게 걸어간 것이다.
 
굴하지 않는 의지와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정...
사티시 쿠마르에게 배울 점이다. 
 
* 책 속의 문장
- 우리의 여행은 최종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과 목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흐르는 강물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강과 강물의 흐름이 하나이듯이 나 자신과 나의 모든 움직임 또한 하나임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곧 여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즉 초탈의 세계를 향한 여행이었습니다. 동(動)과 정(靜)의 대립은 끝나고 나는 정적인 가운데 움직여 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랑자,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인생의 방랑자였던 것입니다.

-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하나가 됨을 느꼈습니다.
내 몸이 우주의 일부분이며, 땅 위를 걸으며 대지와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랑이야말로 내 삶의 본질이며, 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모든 사람과 자연 속에서 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방랑을 하는 꿈을 꾸면서 나를 가졌고, 나의 방랑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승려로서, 비노바와 함께 그리고 지금의 평화 순례까지, 나는 방랑을 통해 모든 지혜를 얻어왔습니다. (/ 평화의 순례)
 
[ 2011년 2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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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법정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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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여러 해 동안 법정스님을 따르면서 스님이 법문하시고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서 가려뽑아 발간한 것이다. 스님의 뜻으로 만든  모임인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이나 길상회 모임을 대상으로 법문하신 것, 명동성당 기념식에서 강연하신 내용, 도올 서원에서 말씀하신 내용, 그리고 사석에서 하신 말씀들을 모았다. 따라서 대략 1990년 중후반의 기록일 것이다. 저자는 스님의 말씀을 모두 녹화한 후, 녹음내용을 기록했다고 한다.
 
여기에 각 장의 서두에는 글을 엮은 저자의 경험과 감상이 때로는 일화로, 때로는 인상으로, 때로는 경구들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엮은이의 서정적인 필치에 덧붙여진 소박하고 정갈한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어렴풋이나마 스님의 맑고 투명한 세계를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런데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 어디에 갇혀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게 된다. 직장이라는 둘레에 또는 관계라는 둘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하루 편안한 잠자리와 남이 해준 밥을 먹고 매일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아니면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와의 유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이 없다"
나는 누구와 어떤 것을 나눌 수 있을까... 매달 시민단체에 몇 만원, 봉사단체에 몇 만원과 같이 물질을 일부 나누면서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족과 직장, 가끔 만나는 가까운 선후배와 동료 이외에 나에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있기나 한 걸까...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를 우주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맑은 가난, 곧 청빈이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내안이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소유물을 줄이는 것이 그 출발이라면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모아서 읽고 소감을 쓰고 있는 이 책들, 내가 가장 집착을 보이는 이 책들부터 줄여야할텐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가슴 뜨끔한 말씀이다. 펜도 하나면 되고 가방도 하나면 되고 안경도 하나면 되고 신발도 하나면 될 것이다. 몇 개씩 가지고 있어봐야 결국 필요한 상황에서는 하나 밖에 사용할 수 없다. 많이 줄이고 버리고 주었지만 더 줄여야 하겠지...
 
"세상이 달리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내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달라진다. 내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들으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생각나고 사티시 쿠마르도 생각나고 ’나무를 심은 사람’도 생각나고 박노해시인도 생각나다. 그들 모두 동일한 이야기를 했고 모두가 말에 앞서 실천을 한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이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나부터 달라지고자 노력할 것이다. 먼저 소유물들을 하나씩 버리고 과도한 음식과 수면을 줄여나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횟수도 점점 늘릴 것이다. 미워하기 보다 용서하고 나무라기 보다 이해하고 찾아오기 바라기보다 찾아갈 것이다. 말하기 보다 듣고 뛰기보다 걷고 분노하기 보다 공감할 것이다...
 
"나는 이 절이 부유해지거나 화려해지거나 번잡한 행사들을 벌여 나간다면 아무 미련없이 이 절을 떠날 것이다. 나는 이 절이 소박하고 가난한 절이 되기를 바란다."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주이자 회주이면서도 길상사 창건 후 첫 법회에서 법정스님은 평소와 같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 연휴 기간에 처음 길상사를 갔었다. 스님의 말씀과 달리 건물들이 제법 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수도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지난 달 구례 화엄사를 갔을 때 느꼈던 번잡함과 화려함과 욕심이 떠오르면서 길상사와 비교되었다.
 
"무한경쟁이라니... 사람이 어떻게 무한히, 끝없이 경쟁만 할 수 있는가. 그런 구호에 속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경쟁만 하고 살 수 있는가. 물론 삶의 요소에 경쟁도 있지만 경쟁하지 않고 사는 그런 경우도 있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니, 우리는 일류가 아니다. 나 자신도 일류가 아니다. 삼류 사류도 있고 아류로도 살고 있다. 다들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우리는 성적의 차이를 떠나서, 빈부의 차이를 떠나서 사이좋고 우정으로 지내왔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는 성적이나 실력, 빈부나 직급과 상관없이 지낼 수 있다. 다만, 정부와 기업이, 언론과 무식한 식자층들이 우리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끌려다니고 내몰리는 대기업의 선후배와 친구들, 공무원들과 교육자들, 사업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다섯 번째로 읽었다.
 
* 책 속의 문장
-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텅 비어 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p.42)

-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한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 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어디쯤에 왔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 (p.102)

- 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보살행, 자비행은 깨달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 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쌓은 행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몰랐던 것을 아는 것,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본래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면 그것이 시절인연을 만나 꽃피고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p.110)
 
[ 2011년 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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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사람들 법정 스님 전집 1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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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여섯 번째로 읽었다. 이 책은 1978년 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그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1972년 유신을 필두로 시작된 한 층 더 암울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한국 사람들 전체가 누구도 할 말을 할 수 없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숨막힌 때 써 내려간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기간 중에 법정스님은 세속을 떠나 송광사 불일암에 정착하셨다.
 
스님은 불교적 세계관에 뿌리내린 불교 본연의 가르침뿐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사물과 소재들에도 남다른 통찰력과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이 책에서 그 깊이와 단단함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스님이 이 책을 발간한 이유와 책의 제목을 <서 있는 사람들>로 정한 이유는 서문에 나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둘레에는 '서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차 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자격으로 차는 탔어도 자리가 없어 자신의 두 다리로 선 채 끝도 없이 실려가고 있다. 서 있는 사람들은 우리 이웃들이다. 오염된 근대화의 공기를 마시면서 갈수록 구겨져만 가는 이 시대의 풍속권 안에서 함께 앓고 있는 선량한 시민이다. 그들의 체질은 유달라, 이웃이 겪는 고통을 모른체 하지 않고 같이 신음하면서 앓는다. 앉은 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차마 앉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매에는 달무리 같은 우수가 깃들기도 한다."

즉, 이 책은 마땅히 자리잡고 있어야 할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황하고 절망하는 현대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책이다. 1970년대 개발, 독재시대에 집필된 이 책은 당시의 억압적 상황, 급격한 산업화가 가져오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관한 사색의 글이 특징이다. 비겁한 지식인의 허상, 불신사회, 물질만능주의, 부도덕한 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자연 친화적인 메시지를 담은 책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될 뿐 아니라 종교인이면서도 이념과 현실을 뛰어넘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은 스님의 구도자로서의 자세도 돋보인다.
 
[서울은 순대속(1977)]이라는 글에서 스님은  도로 체증, 택시 잡기의 어려움, 정류장마다 늘어선 긴 줄, 출퇴근 시간대의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서 서울이란 곳이 갈데 없는 순대 속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울 시민들이 순대 속처럼 되었다고 느낀다. 당시 박정희정부가 검토하던 '임시행정수도'를 만들겠다고 한 구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 때로부터 어언 35년이 지난 지금의 서울 모습도 비슷하다. 서울의 면적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서울은 순대속이고 사람들은 너무 많이 모여 산다. 많은 것은 귀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집단으로부터, 서로 간에 귀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무관심(1975)]에서 스님은 당시 버스 안에서의 안내양과 라디오 소음이 승객들을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운전기사에게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는 무관심을 지적한다. 승객들이 홀로 생각 잠길 수 있는 출퇴근 시간에 소음으로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면서 멍들고 머리가 비게 된다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버스 안의 냉난방은 강력해지고 안내양이 지르는 소리는 사라졌지만 라디오 소음은 여전하다. 대신 승객들은 너도 나도 MP3와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귀에 연결한다. 음악을 듣는 사람, TV를 보고듣는 사람,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무관심은 생각과 소통 대신 기술의 발달과 상품의 대중화로 개별적인 관심으로 바뀌었다.
 
[외화도 좋지만(1973)]에서 스님은 박정희정부의 외화벌이의 폐해를 지적한다. 당시에 일본 관광객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 숫자상의 관광수지가 큰 흑자를 보았음에도 그 관광객들 대부분이 '기생파티'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 잘 살아야 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아무 기준도 없이 양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잘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정부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면서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임을 내세우지만 버젖이 행해지는 기생파티를 알면서 모른체하는 세태를 질타한 것이다. 지금도 정부는 외국 자본을 유치하겠다고 국민의 혈세가 투입된 은행과 기업을 헐값에 매각하려 하고 있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지자체는 수백억을 경쟁적으로 낭비하고 있다.
 
[90도의 호소(1973)]에서 스님은 당시 국회의원 합동연설회에 나선 입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90도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보다는 비웃음을 보낸다. 그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이 글을 읽으면서 한나라당 이재오의원이 생각났다. TV에서 그 특유의 90도 인사를 보면서 그 사람이 MB정권의 실세 중 한사람으로서 집권 이후 지금까지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들의 뜻과 요구를 저버리고 강압적이고 무단으로 정치과 정책을 집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추하게 하는 것들(1973)]에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시대를 추하게 하는 것들이 만연함을 알 수 있다.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할 인간끼리 물고 뜯으며 싸우는 전쟁이, 분배의 불균형이,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인간의 유대를 끊어 놓는 것이, 정치권력의 횡포가 우리를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질만능의 풍조, 서로에 대한 불신 풍조,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이 또한 추하게 한다. 물질 만능의 폐해를 읽으면서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가,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을 읽으면서 리영희선생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이외에도 [제비꽃을 제비꽃답게]에서는 각자의 개성 있는 삶을, [그 눈매들]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눈을, [혼돈의 늪에서]에서는 사회 내의 대화와 소통을, [말없는 언약]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공동체의 윤리]에서는 인간 회복과 생명 존중에 대한 종교의 기능을, [무공덕]에서는 달마대사를 통한 종교인의 자세를, [선문답]에서는 구도에서의 자유의 길을 말씀하신다.
 
 이렇듯 우리는 한 글자 한 글자의 압축된 절제미와 상징적인 표현들을 따라 읽다보면,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읽어도 당시의 가르침과 메시지가 퇴색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숨겨진 억압이나 산업화가 가져오는 소외감, 정체성의 혼돈이 더욱 심화된 요즈음, 스님의 글은 조금도 바래지 않은 청정한 목소리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스님은 특유의 곧고 또렷한 음성으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우리 바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 풍경에 있음을 일갈하고 있다.   
  
[ 2011년 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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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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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 <서있는 사람들>에 이어 일곱 번째 법정스님의 저서를 읽었다. 이 책은 1976년 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법정스님은 이 책에서부터 한국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당신의 사상과 철학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스님의 기본적인 설법 내용은 [무소유]다. [무소유] 사상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 역시 빈손으로,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떠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살다 보니 이것 저것 자신의 몫이 생기게 되었고 필요에 의해 물건을 갖게 되었지만,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고 고통받게 된다. 무언가를 갖는 다는 것은 무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소유 관념이 때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하고 그래서 자신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스님의 [무소유]가 아예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 맡아두고 있다가 떠날 때 보관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깃들어 있어야 주변으로부터의 소유에 따른 맘 고생과 분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간디의 생각 및 행동과 일치한다. 간디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소유]의 경지는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흙과 평면 공간]에서 스님은 1970년에 본격적으로 서울에 들어서기 시작한 APT에 대해 크게 우려하신다. 일 때문에 APT에 한 달 남짓 생활하시면서 스님은 편안하게 사는 것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신다. 우선 주거와 편의시설이 좁은 공간에 몰려있으면서 사람이 보행의 반경을 잃어버렸고 차단된 시야 속에서 살게 되었으며, 이웃과도 단절되어 버렸다. 걷는 것이 단순히 몸 동작만이 아니라 탁 트인 시야에서 자연을 호흡하고 걷는 가운데 활발한 사고작용이 일어난다. 흙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의 뿌리에서 멀어진다. 결국 불편을 극복해 가면서 사는 데에 건강이 있고 생의 묘미가 있다는 상식을 일깨워주신다.
 
[인형과 인간]에서 스님은 ’행동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사람들이 배움과 지식이 쌓여가고 도처에 학자와 교수, 지식인들이 늘어나지만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행동이 없는 지식인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 가슴 뜨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작고하신 리영희선생님의 ’지식인상’이 생각난다...
 
[침묵의 의미]에서 스님은 1970년대 초반 ’침묵’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준다. ’침묵’의 진정한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꺼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과 폭정에 대해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언론계, 학계, 종교계 인사들에 대한 질타였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러한 지식인의 숫자는 오히려 숫자로는 2배 이상이 늘어나고 그 행위는 ’침묵’에서 넘어 ’동조’와 ’참여’로까지 파렴치하게 이어지는 것 같다.
 
[영혼의 모음]에서 스님은 생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대해 다소 길게 소감을 나타낸다. 여러번 읽으면서 스님은 늘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반추해보신다고 했다. (나도 다시 읽었지만 스님만큼 영혼을 일깨우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ㅠ.ㅠ;;)
 
스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나는 아직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듯 하다. 즉, 필요한 것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내가 지금 생각하는 '필요한'에 대한 생각도 관점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필요 이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주변에서 눈에 띄는 것만 보더라도 그동안 구해서 읽은 책만 해도 수 백권에 이르고 입지 않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도 제법 많다. 언제쯤 되면 스님의 [무소유]의 참 뜻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을지...
 
[ 2011년 2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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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비룡소 걸작선
생 텍쥐페리 지음, 박성창 옮김 / 비룡소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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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다가 이 책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들어있어 책꽂이에 있던 것을 꺼내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기억이 아주 어렸을 때와 대학 다닐 때로 기억하니 이번이 세 번째다. 책 표지에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이라 써있는 걸 보니 아마 딸아이가 읽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리라...
 
이 책은 1943년에 발표된 프랑스의 작가 생떽쥐베리의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비행기 조종사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작품을 썼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평가받은 책이고 전세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이들의 글이나 말 속에서 거론되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을 직접 읽었거나, 이 책의 이름에 대해서는 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책 <어린왕자>를 통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비행기 고장으로 끝없는 사막에 추락한 조종사가 사막 한 가운데에서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은 자신이 살던 작은 별에 장미꽃 한 송이를 남겨둔 채, 여러 별을 여행하다 지구에 오게 된 어린왕자였다. 어린왕자가 지구에 오기까지 거쳐온 별들은 위엄을 지키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임금님이 혼자 사는 별, 허영심이 가득한 모자 쓴 사람이 사는 별,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만 마시는 사람이 사는 별, ’난 바쁘다’를 계속 외치면서 부자가 되기 위해 별의 수를 세는 사업가가 사는 별, 해가 뜨고 질 때마다 가로등을 켜고 끄는 일을 하는 사람이 사는 별, 탐험가의 이야기만을 듣고 지리책을 쓰는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다. 어린왕자는 여섯 명의 어른들을 통해 휴식도, 사랃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무지와 헛된 욕망을 꼬집고 삶의 의미가 돈, 권력, 지식, 명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있는 사랑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어린왕자는 여우를 만나 "어떤 것을 잘 보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이라는 가르침을 받고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는 한 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안타깝고 신비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책은 어른을 위한 어린이 동화책이다. 작가 스스로가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어떤 어른에게 바쳤는데, 그 점에 대해 어린이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어린이들 보다 청소년, 대학생, 어른들이 더 읽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더 생활에 찌들고 관성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사랑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 책 속의 문장
-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야 해"
- "네가 언제나 오후 4시에 와 준다면, 나는 3시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할 거야"
 
[ 2011년 2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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