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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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저, 김은령 역 < 침묵의 봄 Silent Spring >을 읽고 / 2011. 02, 398쪽, 에코리브르


1950년대의 미국은 20세기 말, 21세기 초 한국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이 때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소련과 동서 냉전을 시작한 시기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메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의 일방적 마녀사냥이 정치, 사회, 문화 등 전 분야를 휩쓸고 지나갔다. 과학과 기술, 개발과 발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숭배'가 정점에 달했다.
그런 미국의 사회문화는 생명체와 인간에게 끔직한 피해를 안겨주고 있었다. 도시는 커녕 농촌에서도 새와 곤충이 사라지고, 인간과 가축과 농산물은 병들어 갔다. 강물과 샘물도, 논과 밭도, 숲과 나무도 병들고 죽어 갔다. 그리고 그 원인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재앙'이었다. 화학물질이라는 저자의 경고는 미국 지배층과 주류 언론, 학자들에게 무시와 냉대를 받았고, '불순분자'와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으며 "기업의 생산활동을 막는' 행위라고 비난받았다.


그럼에도 저자 레이첼 카슨은 이 책을 통해 당시 미국인들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어떤 방법으로 미국인들과 그들의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지 경고했다. 인간이 자연을, 생명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저지르는 '위험한 장난'이 어떻게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행하게도 저자가 과학자였기 때문에 그리고 저자가 문학적인 소질이 어느 정도 있었기에 이 책은 많은 시민들과 언론들에게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
인류는 아직 거대한 우주를 알지 못했듯이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극미한 세계 역시 알지 못한다. 아니 영원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에 대해 과학자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찬바람을 쏘이면 감기에 걸린다."는 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찬바람만이 감기의 원인은 아니다. 감기를 없애겠다고 찬바람을 영원히 없애겠다고 나서는 행위를, 그 이후의 상황을 인간이 상상할 수 있을까?


물론 카슨은 인류의 끔찍한 행위 중 '화학물질'에 국한하여 다루고 있다. 당시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핵과 방사능에 대한 위험성과 공포는 당시 미국 내에서 이미 논쟁이 되었다.) 이 책은 미국인들의 화학물질과 화학약품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촉발시켜 환경관련 법규가 도입되고 정부부처가 신설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독성 화학물질은 미국 내에서도 유통이 금지되었을 뿐 수출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미국산 DDT 등이 언제까지 사용되었을까?
그가 지목하는 독성 화학물질은 수십 가지다. 염화탄화수소류계, 유기인산계, 비소, 비산나트륨, 비산칼륨, 벤젠, 우레탄, DDT, DDD, 파라티온, 클로로데인, 디엘드린, 린데인, 엔드린, 헵타클로드, 아미노트라이아졸, 말라티온, 다이나트로페놀, 펜타클로로페놀, 파라다이클로로벤젠,  2,4-D,  메톡시클로르, 페노티아진, 알드린, 머스터드 가스, 카르바민산염, 벤젠헥사클로라이드 BHC, 톡사인 등 열거하기도 힘들다.
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된 유해 제품으로는 유해 상품 : 살충제, 제초제, 진드기 제거제, 곰팡이 제거제, 살균제, 방향제, 합성세제, 표백제 등을 말한다.
한국은 아직도 이런 물질을 생산, 이용하고 제품을 판매하며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해당기업은 기업비밀이라고 공개하지 않는다.


이 책은 가장 먼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꼭 읽어야 한다. 기성 세계를 지배하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지구의 벗이자 생명체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이 땅에서 살아야 하고 기성세대의 잘못을 감당해야 하는 세대이다.
그 다음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환경부나 보건복지 업무 관련 공무원들이 아니라 언론인, 사법부, 경찰과 검찰 공무원이다. 이 지구와 생명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순환하는 지 알고서 아는 척도 해야 하고, 무언가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다른 행정부, 입법부, 지자체 공무원과 산하기관, 공기업 직원들이다.
교육, 과학, 농식품, 환경, 해양수산 관련 업무를 하는 공직자들에게 읽어야 한다고 추천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그들은 당연히 알아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이 없었다면, 저자가 주장한 바가 없었다면 관련 업무도 부처도 일자리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부처는 승진과 업무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정부의 사업방식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점이 있다. 바로 세금으로 계획하여 진행하는 정부 및 공공기관, 공기업의 사업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사업'을 비판하거나 반대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사업의 진행상황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감시, 감독, 평가할 수 있는 적정 비율의 예산을 함께 편성, 집행토록 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꾼 인물, 세상을 변화시킨 책" 저자와 이 책에 대해 붙여진 최고의 찬사다. 하지만 저자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카슨이 지목한 독성 화학물질은 이름과 화학식이 바뀐 채 2012년 노동부에서 지정된 프로탈레이트, 프탈레이트, 수산화나트륨 등 186종의 발암물질(사진)로 등장한 상태다. 한 달에도 한두번 씩 그 발암물질이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뉴스는 말해주고(사진, 구글 뉴스)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윤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인 경제제도이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건강과 "함께살기(공동체)"를 중요시하는 시민의식이 절실하다. 집단 이기주의와 부도덕에서 벗어나 협력하고 연대하는 사회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 2013년 2월 23일 ]


-----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


세금이 투입되어 진행하는 정부 및 공공기관, 공기업의 사업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사업'을 비판하거나 반대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사업의 진행상황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감시, 감독, 평가할 수 있도록 적정 비율(본 예산의 5% 정도)의 비용을 사업예산에 함께 편성, 집행토록 하는 것입니다.


카슨이 이 책을 썼던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은 현재의 한국보다 선의의 자원봉사자가 많고 정치성을 띄지 않는 학자,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연방정부와 주 정부가 실시하는 살충제, 제초제 등의 살포작업에 대해 조사, 연구, 분석비용이 거의 배정되지 않아 화학물질 사용에 대한 피해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야생 미생물과 동식물 뿐 아니라 가축, 인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멸종과 살육과 피해를 입은 후에야 (그것도 카슨이 이 책을 발간하여 여론이 들끓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DDT 등 화학물질 살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죠.


한국의 경우에도 4대강 사업이나 강정해군기지, 핵발전소 건립과 운영, 각종 SOC 사업 뿐 아니라 비정규직법이나 정리해고법, 의약품의 유해판정을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늘 논란이 많았음에도 객관적이고 대중적인 조사, 분석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논리나 진영논리로 왜곡되기도 하지만 공공사업에 대한 감시, 감독, 조사, 평가 주체가 감사원이나 국회로 제한된 것도 큰 구조적 한계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업들이 특정 집단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정당과 여론이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 작동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곤 합니다.


그럼에도 특정 정치세력이나 경제주체가 해당 사업의 결정을 주도했는지 상관없이 세금이 투입되거나 납세자에게 경제적, 문화적, 신체(건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했던 상대방측에서 사업기간 동안 사업이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자격과 예산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야당이 반대했던 4대강 사업이나 과거 새누리당이 반대했던 무상급식 사업의 경우, 시업이 결정된 이후 상대방이 추천한 시민단체, 학자, 전문가가 과반수가 넘는 감시 및 조사단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업기간 중 그리고 사업 종료 후 정부(공공기관)측 사업평가와 비정부기관측 사업평가를 교차해서 제츨하여 공청회, 언론 등을 통해 비교. 검토하여 사업 자체가 일방적으로 진행되거나 거짓과 꼼수와 낭비가 없이 가급적 엄정하게 평가되도록 하는 것이죠.
물론 제 생각만큼 그렇게 분명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초기에는 비정부기구마저 정치적 입김에 따라 큰 편차나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국회와 행정부의 권력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매년 340조원이 넘는 예산을 임의로 펑펑쓰고 국회가 제대로 평가하지도 않는(못하는) 현재 시스템을 보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결정하고 감시하는 주체가 늘어날수록 몰래 세금을 축낼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 테니까요.
'참여하는 시민'... 납세자가 내는 세금의 적절한 집행 여부를 행정부와 입법부 대리인을에게만 맡겨서는 점점 악화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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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밀레니엄 북스 25
생 텍쥐페리 지음, 안응렬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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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생땍쥐베리(Antoine De Saint-Exupery) 저, 안응렬 역 < 인간의 대지 >를 읽고 / 2004. 04., 367쪽, 신원문화사


<어린 왕자>와 함께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1939년에 출판된 이 작품은 생택쥐베리가 1926년 라테코에르 사의 새내기 정기 항공로 조종사로 막 입사한 시점부터 기술된다. 이 책은 항공로 개척기의 조종사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생택쥐베리가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땅과 하늘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적은 일종의 수필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는 항공로, 동료들, 비행기, 비행기와 지구, 오아시스, 사막에서, 사막 한복판에서, 인간들이라는 제목으로 총 8개의 단락이 있다. 그는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기적에 대해 그리고 당시 근무 환경, 자연으로부터의 통찰을 몹시 서정적이면서도 아이와 같은 눈빛으로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2차 대전과 나치즘의 득세 등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황을 겪으면서 그는 인간적인 연대감이야말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고, 상호적인 책임감이야말로 유일한 윤리라고 확신했다고 전해진다.

작품의 주축을 이루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안데스 산맥에서 조난당하였다가 불굴의 의지로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고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생텍쥐페리의 동료 비행사 기요메. 그리고 리비아 사막에서 조난당했다가 기요메처럼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생텍쥐페리 본인의 경험담이다.
기요메는 한겨울에 안데스산맥을 횡단 비행하다가 추락하여 실종하게 된다. 50시간 이상이 지난 상태였고 겨울의 안데스산맥에서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며 모두들 기요메는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이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기요메는 살아 돌아왔던 것이었다. 기요메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스스로 평온해지기로 결정하고 눈밭에 드러누웠다. 그 순간 기요메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은 자신(기요메)이 없는 상황에서 남겨질 아내 생각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보험증서가 있으니 가난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안도하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실종되면 법률상 공식적인 사망이 4년 후로 연기된다는 점(당시의 제도가 그랬다는...)이었다. 그는 전방 50미터에 솟아있는 바위까지만 걸어가기로 (사람들이 발견하기 쉬운 위치에서, 죽기로) 마음먹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는 살아 돌아왔다.
기요메의 일화를 통해 생택쥐페리는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 있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범위 내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맹세컨대 내가 한 일은 어떤 짐승도 할 수 없었을 일이라네”라는 기요메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인간이기에 엄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 조종사들의 일화 등을 통해 인간이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끝까지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땍쥐베리 역시 동료와 함께 리비아 사막에 추락하여 실종된 후 사막의 신기루와 싸우면서 5일 동안 비슷한 과정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책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둔 자살'과 관련하여...

생땍쥐베리는 이처럼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 직업상의 사명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 등에 대해 명상하며 전쟁의 무의미함과 상호 연대를 이야기한다. 우편 비행 업무를 수행하던 중 사막에 추락했다가 살아남았던 작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배경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갈증으로 죽어가는 인간의 심리 묘사가 치밀하고도 생생하다. 특히 '바람과 모래와 별'에 대한 묘사는 아름답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단순한 보고서나 작업 일지가 아닌 한 편의 장엄한 상징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 비행기의 각종 기계장치, 사물, 풍경 등이 갖는 초월적인 의미가 간결한 은유 안에서 강렬하고 풍성하게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양된 인식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찬양이자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축전이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이라는 악몽을 직접 겪었으면서도 인류의 죄와 악마적인 측면에 좌절하기 보다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애, 희망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작가가 작품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는 얼핏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같은 단락을 여러번 읽어야 했고, 책의 앞 쪽을 다시 되돌아봐야 했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글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단락이 제법 많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내 독해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작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보다 비판적으로 또는 평가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번역자와 출판사가 한글에 맞게 번역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참고로... 사랑에 관한 유명한 문장,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인상적인 문장을 하나 더 소개하면, "물,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다. 너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 가슴 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너와 더불어 우리 안에는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다시 돌아온다. 네 은혜로 우리 안에는 말라붙었던 마음의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

[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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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리멘 지음, 류해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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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레이첼 니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 저, 류해욱 역 < 할아버지의 기도 My Grandfather's Blessings >를 읽고 / 2005. 12., 328쪽, 문예출판사


<내가 사랑한 책들>(법정스님, 2010, 문학의숲)에는 지난 2010년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애정어린 마음으로 읽으신 책 50권이 소개되어 있다. 법정스님은 비록 불교 수행자였지만 <내가 사랑한 책들> 안에 소개되어 있는 50권의 책 중에서 불교 또는 불교 수행자에 관한 책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 등 3~4권에 불과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기독교 수행자 또는 신자들의 저서가 제법 많다. 법정스님이 소개한 책을 따라 읽다보면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어 인류와 세상, 철학과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수도자로서의 법정스님의 마음과 뜻을 느끼게 된다. 이 책도 그 중의 한 권이다.

37년 동안 의사로 일해온 레이첼 박사는 사람들이 고도의 기술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선함을 잊고 기술이나 전문직에서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람이나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은 전문기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기쁨과 실패, 그리고 상실의 체험, 심지어는 병도 봉사하고 섬기는 데에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이첼 박사는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데 이러한 상황들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레이첼 박사의 생각과 태도는 의사, 변호사 등 현대 사회의 전문직 종사자들의 비뚤어진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전문성'의 진정한 의미와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종교를 '인민의 아편' 정도로 생각하는 집안(그렇지만 저자의 부모는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로 사회정의와 봉사에 최선의 가치를 두었다)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축복의 말을 들려주고 감싸안아주었던 외할아버지는 삭막한 아파트에 사는 어린 레이첼에게 흙을 가득 답은 종이컵을 건네주며 매일 물을 주라고 당부한다. 할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물을 주지만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던 레이첼에게 어느 날 솟아오른 작은 싹은 큰 충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도 생명은 숨어 있는 법이란다.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란다"라며 레이첼 박사가 평생에 걸쳐 기억하는 첫 번째 가르침을 주셨다.
그녀는 "나는 성장해가면서 조금씩 외할아버지와 멀어졌다. 외할아버지는 마치 과학이라는 거대한 바다 안에 둥둥 떠다니는 신비의 작은 섬과 같았다. 성공을 향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다른 것들과 함께 외할아버지 역시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밀어 넣었다"고 말하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말씀이 서로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스스로가 중증의 지병을 앓으면서 암 환자들을 돌보는 레이첼 박사는 세상을 치유하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누군가가 우리를 축복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善)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두려움과 무기력함, 불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지식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로서 봉사하고 섬길 수 있으며 때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봉사하고 섬기기도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섬기면서 축복을 보낼 때 세상과 우리 주변과 우리 안의 빛은 더욱 밝아진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 통의 전화, 가벼운 포옹,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것, 따스한 미소나 눈인사 등이 활기를 찾아주기도 하며 떨어진 귀걸이를 찾아주거나 장갑을 집어주는 작은 행동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되찾아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레이첼 박사는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추억과 죽음을 앞두었거나 죽음 같은 절망을 체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삶의 노래를 기록한 이 책을 통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며, 따뜻한 삶, 자유로운 삶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자선'과 '봉사'에 대해 독자들이 다시금 생각토록 해준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헤맨다. 그러기 위해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번다. 각종 보험을 들고 집에는 도난 방지 시스템을 설치하며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자동차에도 다양한 안전 장치를 매단다. 그러나 결코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서로 분리시키고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레이첼 박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은 서로의 선(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부탁을 해서 마음 내키지는 않지만 선을 베풀며 증인을 세워 칭찬받기를 기다린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낼 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타종교나 비신도에 대한 '배타주의'나 '복음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에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기독교 목회자들과 열성 신도들의 '탐욕'과 '변절'에 크게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같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기에 아직은 희망이 보인다.
하지만 저자에게 아쉬운 점들도 많다. 저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기본으로 하여 질병의 고통에 처한 개인들의 진정한 치유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질병이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는 사회적, 구조적 인식은 부족해 보인다. 현대 보건의학과 심리사회학, 진화생물학 등의 최신 연구결과를 참조한다면, 현대적 질병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사회적 질병'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걸려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유에 힘쓰지만, 그와 더불어 그런 질병의 사회적, 구조적 원인을 찾아 질병의 조건과 가능성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 2013년 01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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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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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 F. 슈마허(Ernst Rriedrich Schmacher) 저, 김진욱 역 <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utiful :인간 중심의 경제학 >를 읽고 / 1999. 12., 338쪽, 범우사


1973년에 출간된 이 책은 발간 이후 현재까지 수 많은 다른 책과 보고서, 논문에 인용되고 있다. 책의 제목인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제 보통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녹색연합'이라는 한국의 환경단체가는 자신들이 발간하는 잡지의 제목을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고까지 정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세계인의 관심을 꾸준히 받고 있을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궁금하여 읽고 싶었지만 법정스님의 추천도서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리스트 순서에 따라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다.

"빠르게, 높게, 멀리".... 이 구호는 올림픽 구호만이 아니다. 인류는 언젠가부터 빠르게, 높게, 멀리, 그리고 크게 만드는 것이 '발전'이고 '진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경향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기원전 2,500년 이집트인들의 피라미드가 그랬고, 그리스인의 파르테논 신전이 그랬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본격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가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자본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신격화했다. 사회주의 주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인류의 행복과 발전의 첩경이라는 신앙에 빠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초음속 제트기와 바벨탑과 같은 마천루, 은하계를 벗어나는 우준선을 만들었고 거대한 도시, 거대한 항공모함, 거대한 운동장 등 물리적인 '거대함' 뿐 아니라 거대한 교통체계, 통신체계, 물류체계, 생산체계, 에너지체계 등 시스템에 적용되면서 거대한 관료조직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무한한 생산은 무한한 소비를 불러 온다.

슈마허는 근대의 사상, 과학, 기술에 의해 형성된 세계는 세 가지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첫째, 인간의 본성은 비인간적인 기술과 조직 속에서 질시하고 쇠약해져 가고 있다. 둘째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생활환경이 파괴도이어 절반쯤 붕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셋째로, 인간 경제에 없어서는 안되는, 재생이 불가능한 자원, 특히 화석원료 자원의 고갈이 눈 앞에 보이고 있따. 슈마허는 이런 현상의 근원이 되는 것은 "물질 지상주의와 거대 기술 신앙, 그리고 탐욕과 질투심에 다름 아닌 풍요의 추구"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가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오류 중 하나를 "인류에게 '생산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생산'에서 인간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을 무가치한 것으로 다루었고 중세 이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변했기(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생각)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는 아담 스미스나 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학자들은 생각하는 '자본'의 대부분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이러한 생산의 문제는 재생가능하지 않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거대한 생산에 따른 자연의 허용 한도,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이고 결국 인류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인류의 파국의 위기에 대해 저자는 '영속성'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생산 방법과 소비 생활에 의한 새로운 생활 양식을 만들어야 함을 역설한다.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사회 구조와 인간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는 과학적 내지 기술적인 '해결'은, 그것이 아무리 능란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쓸모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도출하는 과제가 바로 "값이 싸서 거의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고, 작은 규모로 응용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방법이나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중간기술"이다.

저자는 또한 '규모'의 문제를 중요하게 제기한다. 그는 "거대주의와 기계화의 경제학은 19세기의 환경이나 사고의 '유물'로서, 오늘의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전혀 새로운 사고의 체계가 필요해지고 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고 체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자연히 뒤따라 온다."고 말하면서 "대량 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을 제시한다.
저자에게 '대중에 의한 생산'은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기도 하다. 대규모 산업사회는 대규모 조직을 만들어내고 대규모 조직은 관료주의와 비능률, 생산성 저하 등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영국의 석탄공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기존의 대규모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 저자는 책 속에서 불교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너지 위기를 다루면서 원자력의 이용이 인류에게 저주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원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쟁점인 '사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소유' 등 '소유권'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을 가하면서 새로운 소유의 형태를 제시한다.

1970년대 전반과 후반의 두 차례 석유위기는 한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준 바 있다. 이 위기를 10여 년 전에 예견해 경고했던 인물이 슈마허였고 그러한 경고의 사상적 바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공업문명을 그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슈마허가 제기한 산업사회의 문제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가 한쪽에서는 더욱 거대해지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더욱 파편화되고 있다.
유한한 자원을 무작정 써버리는 일, 인간의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일, 대규모 조직을 무조건 선호하는 일 등이 비판의 대상이다. '성장' 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달려온 우리의 경제 개발도 그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중간기술'과 '새로운 조직'의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제가 보여 주고 있듯, 그의 주장은 경제 체계에 속박되어 버린 인간을 다시 주인공의 위치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며, 그것만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부터 구해내는 방법인 것이다.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이반 일리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반 일리히 역시 1970년대에 산업생산사회와 제도화, 그리고 거대 전문관료체계의 폐해를 지적했다. 일리히는 경제 뿐 아니라 교육, 의료, 운송, 노동 등 전반적인 산업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성장을 멈춰라!"라고 선언했다. 슈마허가 '중간기술'과 '인간 중심의 경제'를 제창했다면, 일리히는 '자율적 공생사회'를 제창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슈마허의 명제는 일리히의 대안과 연결된다. 나는 일리히의 방향에 좀 더 공감이 된다.

[ 2012년 1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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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 저, 이석태 역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 자유로운 영혼 헬렌 니어링, 그 감동의 기록 Loving and Leaving thr Good Life >를 읽고 / 1997. 10., 248쪽, 보리

 

이 책도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 소개해주신 것이다. 법정스님은 그 책에 사회 일반의 통념과 관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하여 많은 책을 소개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울의 <월든>,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라다크 마을 <오래된 미래>, 호주의 원주민 <무탄트 메시지>, <나무를 심은 사람>, 인도의 사티쉬 쿠마르 <끝없는 여정>, 일본의 쓰지 신이치 <슬로 라이프>, <핀드혼 농장 이야기>, 야마오 산세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 아베 피에르의 <단순한 기쁨>,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등. 

그들은 특별하거나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독실한 종교인도 아니고 뛰어난 철학자도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도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부와 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회를 누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 과로, 지저분한 환경에 짓눌려 삽니다. 부자는 기회의 천국에서 살고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의 지옥에 빠져있으며, 부자의 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지옥을 딛고 있습니다."(스코트 니어링) : 20대였던 1905년 어느 공개 강좌에서....

"속된 삶 -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하고 유명해진다. 양심을 지키는 삶 - 소명에 따라 행동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정의롭게 된다. 성공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유명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반면, 정의로움은 영원한 진리의 반석이 된다"<저마다의 것> : 스코트 니어링의 1908년 쪽지 메모 중에서...

 

헬렌과 스코트는 서로 존경하는 동반자로 만나 55년 동안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20세기 초 미국의 주류 문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존중하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점점 문명을 거부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다가 준비해 온 죽음을 맞아들이는 모습이 귀한 깨달음을 준다. 헬렌은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남녀간의 동반자'가 어떤 것인지를 스코트와 자신이 함께한 삶에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이 불분명한 현대의 물질문명의 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삶이 하나의 올바른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울이나 사티쉬 쿠마르 등에 관해 쓰여진 책을 읽다보면, 많은 경우 자연스러운 삶,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은 독신이거나 홀로 섰을 때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이 남녀의 조화로운 삶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음을, 또는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통해 조화로운 삶이 가능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동반자 관계는 나이를 초월했다.(솔직히 말하면 나이 차이가 컸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삶'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삶의 지침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삶의 중심에는 깊은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창조와 개혁에 대해 언제나 조심스럽고 망설이며,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개혁자, 이미 알려진 길을 벗어나 가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일 수 밖에 없고 끊임없는 반대와 비난, 질시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창조적 사고와 행위에 따르는 희열에 대해 그거 치러야하는 대가의 일부이다"(스코트 니어링)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나으며,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다"(스코트 니어링)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난 헬렌은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의 꿈을 안고 열여섯 살에 유럽으로 건너간다. 그 곳의 신지학회에서 만난 크리슈나무르티와 헬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데, 유럽과 인도, 호주를 오가면서 6년 동안 이어진 그 사랑은 크리슈나의 동생이 죽은 뒤 서서히 빛을 잃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세계의 교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헬렌은 스물네 살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삶의 길을 바꾸게 된다.

헬렌보다 스물한 살이 위였던 스코트 니어링은 부유한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그 문화의 야만성에 줄기차게 도전하다 대학 강단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났다. 사회에서 고립된 스코트는 헬렌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가난한 뉴욕 생활을 청산한 뒤 바로 버몬트 숲에 터를 잡고 사탕단풍 농장을 일군다. 헬렌과 스코트가 그렇게 반 세기 동안 서로의 빈 곳을 채우며 함께 한 '땅에 뿌리박은 삶'은 수많은 이들에게 참으로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스코트가 100세 생일을 맞던 날 이웃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서 왔는데 그 깃발 하나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스코트 니어링이 백 년 동안 살아서 세상은 더 좋은 곳이 되었다."


"당신이 일을 시작할 때 다음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곧 사람은 경제적인 상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 문제는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느냐이다"(스코트 니어링 1911) 

"나는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가 되겠다. 나는 사교춤과 야회복을 포기하며 이것들로 대표되는 생활을 멀리하겠다. 나는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애쓰는 강연자 노릇을 포기하겠다. 나는 사회복지, 공동의 가치, 공동 선을 높이는 일에 헌신하겠다"(스코트 니어링 1917)

"(제1,2차 세계대전에 대해)전쟁이란, 문명 국가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르는 파괴와 대량 학살이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벌이는 힘겨루기다. 생명과 사회의 부를 끔찍하게 손상시키며,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방안 가운데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스코트 니어링)


헬렌은 이 책을 87세에 썼다. 헬렌 자신보다는 스코트 니어링의 삶과 반 세기에 걸친 두 사람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탁월한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자이며, 교육자이자 생태주의자인 스코트는 스스로 말한 것을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실천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이 책 속에서 헬렌은 스코트와 함께 보낸 충만한 삶과 100세 생일을 앞두고 스스로 음식을 끊음으로서 평화롭고도 위엄을 간직한 채 맞이한 스코트의 죽음을 통해 사랑과 삶, 죽음이 하나임을 보여 준다. 헬렌은 조화로운 삶, 참으로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온몸으로 보여 준 두 사람의 사랑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삶은 어떤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 그 이상이 관례에서 멀어질수록, 더 비싼 대가를 치른다. ... 당신의 이상이 정신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며, 정직하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면, 그 이상을 이루기위해 의식주마저 희생할 수 있다"(스코트 니어링) : 빈부격차와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하여 대학에서 축출당한 후(1922년)에...


이 책을 통해서 배운 것은 "아는 것만으로 끝나는, 실천이 없는 삶은 무기력하고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법정스님 소개글)는 것이다. 헬렌과 스코트는 자신들이 살 집을 직접 돌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농사를 지어서 먹을 것을 마련했고, 많은 물건이 없어도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한낮에 쏟아지는 햇빛만으로도 그들의 영혼은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되 거기 휩쓸리지 않았다. 스코트가 100세, 헬렌이 92세까지 장수(ㅋ)를 누린 것은 아마도 그들의 '아름다운 삶'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적극성, 밝은 쪽으로 생각하기, 깨끗한 양심, 바깥일과 깊은 호흡, 금연, 커피와 술과 마약을 멀리함, 간소한 식사, 채식주의, 설탕과 소금을 멀리함, 저칼로리와 저지방, 되도록 가공하지 않은 음식물,..."


아쉬운 것은 내가 스코트 니어링의 삶을 잘 모르기 때문에, 스코트의 입장에서 헬렌과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책을 읽은 후에도 헬렌의 이야기가 100%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렌이 자신의 삶이나 철학보다 스코트의 그것을 위주로 책의 내용을 채우는 관계로 헬렌의 개별적인 삶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다음에 시간을 내서 스코트 니어링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 다시 한 번 읽어보리라...


[ 2012년 11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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