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서평]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 과거와 미래>
마이클 해링턴 저, 김경락 역, 1989, 579쪽, 메디치미디어

이 책은 미국에서‘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사회 운동가, 작가, 교수였던 마이클 해링턴이 암으로 투병 중이던 기간에 쓴 마지막 노작이다.

저자는 한국인들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30대의 나이에 미국 진보운동에서 최고로 명석한 지식인이자 뛰어난 조직 운동가로 자리매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소수자의 고독을 오랫동안 겪기도 했다. 보수주의자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기존의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이단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마이클 해링턴은 제1장에서 보수주의자와 기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3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그간의 사회주의 운동은 여러 오류를 드러냈고,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도 많이 식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움직여 온 힘은 앞으로도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주요한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이다. 사회주의는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논리적 대응이다."

둘째, 자유와 정의가 사회 경제적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 17세기 전후의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 경제적 변화가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만들어 낸 것처럼,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셋째, 사회 경제 구조가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못한다면, 지금 누리는 정도의 자유와 정의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런 가설 아래 헤링턴은 20세기의 사회주의가 왜 비틀거렸는지 원인을 찾아간다. 그는 사회주의가 비틀거린 이유를 마르크스부터 시작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모호한 정의(특히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한 모호한 정의), 단일한 노동 계급의 부재, 소련의 일당 독재 등’“가짜 사회주의’의 난립, 사회주의로의 이행 모델 부재,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자본의 국제화 등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제2장에서 해링턴은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유형의 사회주의와 운동들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먼저 푸리에와 생시몽 그리고 오언주의로 대표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소개한다. 유토피아주의는 실패했다.

두번째는 ‘마르크스주의 속의 유토피아주의’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정의할 때에는 유토피아주의자 같은 면모를 지녔지만 목적을 달성할 정치적 수단에 있어서는 유토피아주의자와 다른 길”을 선택하는 ‘모순’을 저질렀다고 평가한다. 그는 “오늘날 유토피아주의적인 목표는 어느 곳에서든지 민주적이고 의회적인 수단에 의해서 달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 카우츠키의 독일형 사회주의 운동을 소개하며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에게 남아 있던 유토피아주의뿐만 아니라 투쟁 과정에서 강조된 인간의 창조성까지도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3장에서는 레닌의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를 시작으로 하여 중국, 쿠바 등 제3세계로 확산된 사회주의 체제는 ‘가짜 사회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들은 ‘권위주의적 집산주의’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주의 개념에 대한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해링턴은 민주주의의 근본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의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으며, 공화정의 전통과 철학이 함께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주의는 시민사회의 주체적 성장보다는 국가주의와 기득권 정치에만 기대는 문제를 낳게 된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는 4장에서 스웨덴의 노사가 서로의 실존 권력을 인정하고 타협해간 경험을 지적한다. 그는 사회민주적 대타협이 대번영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런 체제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독자들도 알고 있다시피 ‘대번영’은 아주 짧았다. 복지국가는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저자는 포드주의 등이 복지국가를 가져왔지만 복지국가와 경제의 세계화 속에 스스로 위기를 가져올 요인들을 잉태한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1980년대 들어서면서 자본의 반격이 시작되고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치기 시작했다.


 

해링턴은 5장에서 경제의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이 오늘날 단일한 계급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관심사도 경제 영역을 넘어서 성, 인권, 환경, 문화 등으로 확대되었다.

“새로운 기술과 작업의 조직은 훈련된 계층을 만들어 내고 있고, 공장과 사무실에서 이뤄지는 주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 진정한 참여라는 사회주의적 가능성이 열려 있다.”(326쪽)


 

6장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는 경제의 사회화에 대응하여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UN과 다른 국제기구를 설립하자는 등 1970년대 브란트의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심화시키자는 것이다.

“이 작업에는 중요한 두 개의 원리가 있다. 먼저, 부와 자원을 북에 서 남으로 이전하는 것이 북과 남 모두에게 부와 자원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런 이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제 정치적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원리다. 그래서 브레턴우즈 체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세계 경제를 통합하는 제도가 필요하다.”(401쪽)


 

해링턴은 7장에서 생산구조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화가 사회적 소유권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회 축적 구조도 바꿀 수 있다.

“앞으로의 사회화는 민주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421쪽)

“새로운 사회주의의 근본적 구상은 모든 경제적 결정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426쪽)


 

8장에서 저자는 오히려 21세기에는 구성원들 간에 타협을 통해서 점진적인 개선을 해나가는 유토피아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가능성을 스웨덴에서 찾는다.

“기업에 기반한 성장이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사회 민주주의적 가정은 폐기되어야 한다. 목표는 사회 정의와 민주적 참여를 바탕으로 한 질적인 경제 성장이다.”(439쪽)

 

마지막 9장에서 해링턴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방향을 ‘비전을 가진 점진주의’로 정의한다. 그는 지난 백 년간의 투쟁을 통해 급진적으로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점진적으로는 변화시켜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펼쳐질 사회주의자들의 운동 또한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그가 ‘점진주의’를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계급이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노동 계급의 주도로 각 계급계층의 동맹을 구성하고 “공동의 목적을 내세워 복잡 다양한 힘을 결합해야” 한다. 또한 동맹은 “경제 사회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문화에서도 낡은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도덕적, 지적 개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이 ‘점진주의’의 근거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마르크스를 포함해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훠씬 더 오래 걸리고 근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528쪽)

“(교훈을 얻는다면)사회주의는 자유와 연대,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체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을 가진 점진주의를 향한 노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느린 종말의 시대’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577쪽)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를 읽고 필자가 해링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내린 결론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더러 현실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가 지배한 지구는 빈부격차와 생태계 파괴, 전쟁 등 점점 지옥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주의 개념이 경제적일 뿐 아니라 비경제적인 내용을 포함해야 하며, 자유와 정의 그리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문화와, 심리 분야 등 사회 전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소련 및 제3세계의 사회주의 체제가 ‘가짜 사회주의’라는 규정과 “왜 여전히 사회주의가 희망인가?”라는 이유에 대한 해링턴의 분석과 추론 과정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저자가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잘못 분석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잘못 찾았기 때문에 6장 이후 그가 제시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 역시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해링턴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첫번째 원인으로 마르크스의 ‘사회화’가 정치경제적인 특면에서 모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가 경제관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루소가 주장한 ‘일반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단일한 형태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마르크스의 주장을 반박한다. “사회는 대의 정부일 수도 있고 노동자 평의회의 연대 형태, 즉 코뮌일 수도 있으며, 그런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상은 59쪽)

하지만 해링턴은 “사회가 경제관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마르크스가 도출해낸 이후 21세기 정치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 대다수가 인정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저자 자신도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압도적으로 지배해버린 20세기 지구촌 현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회는 그 어떤 것일 수 있다”라는 ‘불가지론’ 비슷한 주장을 해버린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가 특정한 경제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을 이야기했지, 특정한 경제관계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거나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외면한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지배하는 대다수 국가는 ‘대의 정부’ 형태이고,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지배하는 대다수 국가는 ‘당 주도의 자치국가’ 형태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소련은 소련공산당 주도의 소비에트(꼬뮌) 연방공화국이었고, 중국 역시 중국공산당 주도의 자치국가이다.

또한 저자가 마르크스의 ‘사회화’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하는 중에 왜 ‘사회’의 형태에 문제를 삼았는지 어리둥절하다. 그는 ‘팽창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사회화’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마 해링턴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마르크스의 ‘사회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해링턴은 마르크스주의 ‘사회화’ 즉,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의 대안으로 7장에서 ‘사회화’를 “일상 경제에서 내려지는 각종 결정 과정을 민주화하는 것”(422쪽)이라고 정의한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근본적 구상은 모든 경제적 결정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426쪽)고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소유권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제기한 ‘사회화’를 ‘정치적 의사결정권’이라는 정치적 관계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해링턴이 사회주의가 실패한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 것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자신들의 감정과 신화, 기대를 제거하지 못해서 근본적인 오류를 끌고 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수일 수밖에 없고, 그런 다수가 하나로 뭉쳐지고 균일한데다 한가지 목적으로 결합한 것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었다”(61쪽)는 점을 문제제기 한다. 20세기 자본주의의 실상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행동하는 단일화되고 혁명적인 노동 계급은 이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전반부 사회주의 운동이 실패하게 된 핵심 원인이다.”(64쪽)

하지만 해링턴은 마르크스가 규정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에 대해 교조적으로 또는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 계급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방식이 지배한 20세기 초까지 프롤레타리아트는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의 존재나 규모, 혁명성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자 계급이 ‘대중’ 수준의 인식이나 각오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혁명적 계급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정당의 의식화와 지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제대로된 노동자 정당(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끌게 될 경우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저자가 경험했거나 전해들은 유럽 대다수 국가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볼셰비키당 수준의 지도력과 조직성, 대중장악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이다.


 

해링턴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 중 가장 복잡한 세 번째로 제시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적 ‘공간’은 도대체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봉건주의 내에서 발전했듯이 사회주의도 자본주의 내에서 발전”할 수 있고, “부르주아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갑작스러운 봉기야말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 것은 ‘분명한 자가당착’”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노동자는 권력을 쥘 수 있지만 복잡한 경제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이상 65쪽)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 대중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 단번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한다는 이론과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서로 충돌했다.”(66쪽)

저자는 거의 대다수 좌우파 경제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부르주아 혁명’을 영국 등 일부 국가의 사례만을 인용해 부정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아주 특이하고 고집스럽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봉기’와 ‘노동자들의 경영 능력 부정’ 그리고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에 대한 대중의 거부’와 같이 학문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는 자신만의 ‘주장’이나 ‘주관적 판단’을 이론적 근거로 삼는 무리수를 둔다. ‘봉기’와 ‘전쟁’ 등 무력에 의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전한 경우가 없기 때문에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가짜 사회주의 시대’라고 폄하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1918년부터 몇 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이 러시아 반동세력의 반혁명을 지원한 사실과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 등지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속속 들어서자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무력으로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한 사실에 대해 해링턴은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만약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해링턴이 ‘갑작스러운 봉기’와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라는 개념을 새로이 고안한 이유는 9장 ‘비전을 가진 점진주의’라는 자신의 주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링턴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네 번째 이유로, 사회주의 운동이 세계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국가의 세계화를 과소평가”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은 자연스럽게 세계화될 수 있다고 과대평가”한 것이 “마르크스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개별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세기 동안 세계화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73-74쪽)

하지만 마르크스가 과소평가한 것은 ‘국가의 세계화’가 아니라 ‘자본의 세계화’였으며,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연스럽게’ 세계화될 수 있다고 밝히지 않았다.(그리고 해링턴 본인이 밝혔듯이 ‘기업의 세계화’는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과 운동가들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화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자본주의자들과 시장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개혁가도, 정치가도, 경제학자도 해결하지 못한채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링턴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대응으로 참고한 사람이 이미 실패한 사민주의 정치가인 빌리 브란트와 오토 바우어이다. 저자는 6장에서 브란트와 바우어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순수한 도덕적인 연대와 더불어 자기 이익 확대라는 가치에 기반”을 둔 ‘국제 정치경제 기구’를 설립하자고 제안한다.(401쪽) 자본가들이 정치와 사회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관료나 정치인이 ‘순수한 도덕적인 연대’라는 가치에 따라 국제협력에 나선다는 발상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를 지탱하고 있고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정당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는 것을 잊었나?


 

해링턴은 기존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사회주의’, ‘사회화’의 개념을 새로 제시한다. 여러 가지 개념이 제시되는데,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재해석하거나 독자적인 해석을 내린다.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이다. 사회주의는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논리적 대응이다."(49쪽)

“새로운 사회주의의 근본적 구상은 모든 경제적 결정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426쪽)

“사람들이 경제적 압박에 종속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의 계획과 욕망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유 시간을 늘리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목표이다.“(453쪽)

“자유롭고 공동체주의적인 직접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사회주의의 두 번째 비전”(476쪽)

“사회화는 경제 문제를 넘어서 모든 사회 부문으로 확장되는 사안이다. 사회화는 문화적이고 심리적이며 개인들의 자아실현이란 의미까지 포괄한다.”(554쪽)


 

그런데 해링턴이 제시하는 ‘사회주의’ 개념과 ‘사회화’ 개념은, 과거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고 다분히 추상적이다.

그가 제시한 ‘자유’와 ‘정의’라는 개념은 다분히 낭만주의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섞여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자유’는 근대적 자유이면서 사회경제적 관계가 배제된 ‘정치적’ ‘개인적’ 자유에 그칠 수 있으며, ‘정의’라는 개념 또한 사회경제적, 계급계층적 입장에 따라 상대적인 의미에 그칠 수 있다. 또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현대 사회가 다양한 계급계층으로 분화되었고 이에 따라 앞으로의 사회주의가 경제적인 요소뿐 아니라 문화,심리적인 다양한 요소까지 감안해야 한다면서도 “노동자 대표가 경제적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회화’로 재규정하는 부분에서는 차라리 저자가 ‘사회화’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사회주의의 핵심 이념을 위해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회화’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 등 사회경제적 관계를 뛰어넘어 ‘자아실현’으로까지 확장한 것도 사회주의의 ‘목표’ 내지 ‘목적’과 ‘사회화’라는 ‘수단’을 혼동한 결과일 것이다.

여러 장에 걸쳐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개념도 등장하는데,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거의 사용되지 않듯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와 경제처럼 영역이 다른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주권’과 같은 개념으로 ‘인민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고 결정의 주체’라는 뜻이다. 대규모 주권자로 구성된 국가에서 엄밀한 의미의 민주주의, 특히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 국가는 없다. 다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다당제와 삼권분립 체제도 있고 직접정치체제도 있으며, 꼬뮌연합 자치체제도 있고 일당독재와 자치가 결합된 체제 등이 존재할 것이다. 
 

[2017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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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 유엔군 사령부
이시우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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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유엔군사령부는 거대한 사기 <유엔군사령부, UNC>

이시우 저, 2013년, 841쪽, 들녘


 

이시우 작가는 2006년 가을 버시바우(Alexander Ver- shbow) 주한 미국 대사와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는 그 자리에서 질문 하나를 던졌다.

“197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사 해체 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사 해체를 약속하고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유엔사 해체는 유엔안보리 결의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 38선 북쪽 지역에 대한 점령 주체가 유엔사라는 주장은 접지 않고 있다. 둘 다 유엔총회 결의인데, 왜 하나는 유효하고 다른 하나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가?"

당시 버시바우는 “나중에 알아보고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대사관 직원을 통해 차일피일 미루었고 결국 오늘 현재까지 답변은 없다. 대신 2007년 4월 검찰은 이시우 작가를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시켰다.


 

1948년부터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별개의 국가와 정부가 존재한다. 남쪽의 국가인 대한민국에는 1950년 한국전쟁 때부터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1953년 정전협정 당사자는 외국군(유엔군)이었다. 그 외국군은 주한미군으로 불리기도 하고 유엔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대한민국의 군대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다. 현재 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그 작전권을 ‘빠른 시일 내에’ 회수하겠다고 주권자들에게 약속했다.

그런데 이시우 작가는 유엔군의 존재와 역할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군작전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어느 개인이나 단체도 휴전선(군사분계선)을 넘어가려면 유엔군사령부(사령관)의 허가가 필요하다.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올라갔던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유엔군사령관의 허가를 받은 후 군사분계선을 지날 수 있었다.

남북교류를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든 정부관료, 정치인, 기업인, 개인 단체들도 개성공단, 경의선, 동해선 남북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는 공사과정에서도 빠짐없이 유엔군사령관의 허가가 필요하다.

-관련기사 : 남북 직항로와 유엔군사령부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3

59년 ‘금단의 선’ 넘은 한걸음, 평화의 이정표로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240112.html


 

또한 만의 하나, 북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붕괴하거나 전쟁, 기타 이유로 북쪽을 일부가 권력 내지 통제의 공백상태가 발생할 경우, 대한민국의 정부나 군대가 아닌 유엔군사령부가 그 지역을 관할하게 된다. 남북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거나 북-미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여 한국군이 자동 개입되면 한국군의 작전권까지 유엔군(미군)이 지휘하기 때문에 비상계엄이 내려지고 계엄사령관이 임명되더라도 그 사령관은 마찬가지로 유엔사령부(주한미군연합사령부)의 지휘통제를 받아야 한다.


 

“1954년 11월 17일, 38선 이북과 비무장지대 사이에 위치한 소위 수복지역에 대해 유엔사령관은 한국 정부로 행정권을 이양했다. 이양 직전인 8월 유엔사령관이 이 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엔사령관은 이 지역이 유엔사의 군사점령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1962년 비무장지대 내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에 대한 행정권 이양 문서에서도 역시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은 유엔사령관의 군사점령지역임을 확인했다. 정전협정문에 중복 등장하는 군사분계선 이남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군사통제(military control)란 곧 점령을 의미함이 확인된 것이다. 유엔사가 현행 헌법상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제약한다는 혐의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주국방이나 주권과 통치 차원에서라도 정부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있다.”(14쪽)


 

그 이유는 유엔(군)사령부와 정전협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이 존재한다는 이유는 아직 한반도가 전시(전쟁)상태라는 것이며, 전쟁상태에서는 유엔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점령군’으로서 기능한다. 유엔군(미군)은 한국정부의 동의 없이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즉,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는 한반도 북쪽에 대한 통제권 또는 관할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정전협정이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고 유엔군(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이 반환되어야 가능하다.


 

“1950년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의한 참전 결정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이 유엔사의 논리다. 현재 한반도는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로 여전히 1950년 이래의 전시체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 듯하다. 때문에 이라크전처럼 골치 아프게 유엔안보리 결의를 끌어내기 위한 외교전을 펼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국 대통령이 전쟁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기회는 이미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2013년 현재까지도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사령관이 행사한다. 형식적으로는 군통수권자인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합의하여 한미연합사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는 1978년 유엔사 해체에 대비하여 창설된 한 미연합사 창설 공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공문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직을 겸임함으로써만 그 효력이 발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아직 작전통제권 환수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단정하긴 어렵지만 한미연합사를 해체하는 대신 유엔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국은 지휘구조를 변환해갈 것이다. 이미 그러한 절차는 오래전부터 가동되어왔다. 몇 년 동안 유엔사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것과 관계없이 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유엔사의 권한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국 유엔사 존재만으로도 유엔안보리 결의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15쪽)


 

그렇지만 이시우 작가의 <유엔군사령부 UNC>는 정전협정의 문제까지도 넘어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군사령부’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다. 2006년 가을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에게 질의했던 것에 대해 저자 자신이 대신 대답한 셈이다.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의 정치선전이라는 틀에 갇혀 있던 ‘유엔군사령부의 불법성’을 학문적으로 조망한 책으로 유엔군사령부에 대한 최초의 통합학문적 연구서이다. 어이없게도 국내 군사학, 정치외교학, 행정학, 법학 어느 분야에서도 ‘유엔’과 ‘유엔군사령부’에 대해 제대로 연구한 논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과 주권자들의 생존과 재산을 좌우하는, 국가와 정부와 군대의 존립근거에 대한 것임에도 거의 대부분 연구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유엔군사령부에 국한되지 않고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유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전통적 접근법인 발발 책임을 묻는 집요한 연구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당시 국내문제인 내전적 충돌이 국제문제인 전쟁으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집중하였다.

총 2부로 구성되어진 이 책은 1부에서 ‘유엔체계’를 분석한다.


 

“국가에 비해 국가간체계는 여전히 역동적인 변화 과정에 있다. 그러나 이제 국가나 개 인도 국가간체계에서 완전히 무관하거나 고립될 수는 없다. 국가간체계는 국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도 오히려 요구된다. 국가간체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대립관계와 균열과 분극이야말로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체계가 발전하는 데서 핵심 요인이다. 1부는 현 국가간체계에 내재한 적대모순과 균열이 생성·발전되고 구조화된 과정을 추적한다. 그럼으로써 근대 국가간체계의 하위 체계를 이루는 유엔체계가 미국패권체계에 의해 어떻게 자기제약, 자기배제 되는지를 밝힌다”(30쪽)


 

2부에선 유엔군사령부 창설과정을 분석한다.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기까지 한 달간을 시간적 범위로 보여주며 한국전쟁 중 창설된 유엔군사령부의 합법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미군사령부는 유엔의 군대인것처럼 행세하며 ‘통합군사령부’ 대신 ‘유엔사령부’란 작명을 통해 현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2부에서의 연구는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기까지 정확히 한 달간을 시간적 범위로 한다. 이 시간은 유엔체계 전체의 시간과 비교해볼 때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역사적 시간이기도 했다. 하나의 체계가 생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역사란 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체계의 발생·발전과정이다. 새로 탄생한 체계란 새로운 의미의 틀이기도 하고, 새로운 실존의 틀이기도 하다. 또한 체계는 내용의 구조란 점에서 형식이다. 따라서 하나의 역사적 체계는 역사적 형식인 것이다.”(30쪽)


 

이시우 작가는 한국인 대다수가 들어 왔던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가 유엔에서(유엔총회 결의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든) 창설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정부와 미군은 의해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미국 산하의 ‘통합군사령부(Unified Command un the US)’라는 명칭을 교묘하게 바꾼 후 지금까지 부당하고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엔체계에 내재된 적대모순과 그 발현으로서의 균열은 봉합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하면서 유엔체계 내에 봉합되어 있던 적대와 균열이 폭발했다. 그 뒤로 이 순간은 지금까지 유엔체계의 외상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와 균열은 꿈틀댄다. 봉합할 순 있으나 치유될 순 없는 상처인 것이다.

한국전쟁 중에 창설되는 유엔군사령부는 합법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역사는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된 적이 없음을 보여준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보리를 통과한 것은 ‘미국의 통합군사령부’ 창설 권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미군사령부는 유엔의 군대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속임수다. 유엔안보리에서는 유엔군사령부의 창설을 권고한 적도 없고 유엔사령부는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유엔의 조직도 아니다. 그런데도 통합군사령부는 유엔군사령부라는 작명을 통해 이러한 현실의 균열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으며, 많은 논쟁이 제출되었고 갈등과 충돌이 빚어졌지만 이 또한 봉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통합군사령부 대신 사용된 유엔사령부란 이름 하나가 이런 거대한 환각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다.”(31쪽)


 

이시우 작가는 이 이외에 유엔군사령부가 사용하는 유엔깃발이 유엔에서 공식 결의된 적이 없다는 것과 유엔군사령부라는 이름으로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등 한국인 대다수가 모르는 채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유엔군/미군 체계의 부당한 모습을 <유엔군사령부 UNC> 곳곳에서 고발하고 있다.

기타 한국전쟁 당시 남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정리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50년 유엔체계와 미국의 패권' http://blog.daum.net/hy2oxy/8693790

'이승만의 군작전권 양도 과정에 관한 새로운 증언과 기록' http://blog.daum.net/hy2oxy/8693624

'정전협정은 문재인 정부를 한방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 http://blog.daum.net/hy2oxy/8693648

'유엔체계의 구성과 속성' http://blog.daum.net/hy2oxy/8693789

'한국전쟁 당시 유엔안보리 결의의 문제점' http://blog.daum.net/hy2oxy/8693651

'모택동과 김일성에 대한 소련, 스탈린의 배신(?)' http://blog.daum.net/hy2oxy/8693655

현재 유엔군은 '유엔의 군대'가 아니라 '미군 주도의 통합군' http://blog.daum.net/hy2oxy/8693788


 

[2017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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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종말
자크 사피르 지음, 유승경 옮김 / 올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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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위기의 자본주의와 포스트-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전망


이 책은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연구자로 일하는 선배에게 선물받은 책(번역자가 그 선배)이다. 공부모임에서 폴 크레이그 로버츠의 <제1세계 중산층의 몰락>을 교재로 세미나하면서 제라르 뒤메닐 공저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 추천받았다.


자크 사피르는 이 책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이 글로벌리즘이라는 ‘신경제’를 받들고 있는 동안, 신경제의 동력인 ‘규제철폐’와 ‘역외이전’이 제1세계에는 중산층의 몰락을, 제3세계에는 환경파괴와 빈부격차를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나아가 그는 지금의 미국 경제를 회복시키고 유럽이 나아가야 할 길은 지금의 실패한 경제학을 버리고 새로운 경제학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길을 제안하고 있다.


“세계화는 결코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사피르는, 오늘날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세계 경제의 신조처럼 자리 잡은 자유무역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며, 오래 전부터 열강은 시장을 열기 위해 항상 무력을 사용했고, 자신에게 유리한 교역조건을 위해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킨다.

19세기 후반 한반도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지적한 셈이고,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렇지 않아도 불평등하게 체결된 한미FTA(자유무역협정)를 다시금 개정해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2017년 현재 시점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저자는 2008년 이후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 신흥 경제국의 금융버블, 아시아 국가들의 사회적·환경적 위기 그리고 유럽의 재정위기 등 최근 드러난 일련의 세계적 위기의 뿌리에는 동일한 현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바로 불과 25년 전에 나타나서 지구촌의 대부분을 장악해버린 ‘세계화’가 작금의 총체적인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세계화’로 불리는 현상을 ‘자유무역의 확대’와 ‘자본이동 자유화’ 두 갈래의 흐름이 빚어낸 결과라고 규정한다. 특히 세계 경제가 자본 자유화로 인해 크게 변화했는데, 내적으로는 임금 하락과 고용 불안, 사회보장의 후퇴, 환경 파괴와 같은 현상이, 외적으로는 위기에 대한 취약성이 강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분석했다.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국가들의 경제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결국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하나의 위기이며, 이러한 세계화에 대한 물신숭배는 이득을 보는 자들이 만들어낸 헛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연자원의 무분별한 개발을 초래하여 15억 명이 넘는 지구촌 사람들이 환경 재난 속에서 나날이 피폐해져 가고 있으며, 사회적 유대마저 파괴되는 나라가 속출하면서 수많은 민중들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현란한 불빛 아래 광적인 개인주의의 충격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선진국으로 하여금 노동비용이 저렴하면서도 최신 기술의 활용이 가능한 개발도상국의 생산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개도국 노동자의 건강 악화, 환경 파괴와 같이 당장 금액으로 추산할 수 없는 보건환경 부문의 역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GDP 수치의 증가와는 반대로 개도국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고 말았다고 분석한다. 1960~80년대 미국과 일본의 사양산업을 받아들인 한국의 노동자들의 건강이 훼손되고 전국에서 환경파괴가 일어났고 20세기 후반부터 중국에서 비슷한 퇴행이 벌어지는 현상의 공통점은 결국 ‘세계화’인 것이다.

그렇다고 개발도상국의 민중만 고통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선진국에서도 자본 이동을 통해 해당 국가 노동자의 임금 하락과 사회보장의 후퇴가 야기되었고, 뉴욕에서 발생한 “월가를 점령하라”와 프랑스 파리 외곽의 실직 청년들의 소요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다수 국민의 삶 또한 피폐해져만 갔다고 지적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대외무역에 의존하는 경제모델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무한정 수입을 할 수 있는 나라도 없으며, 모든 나라가 무역 흑자를 누릴 수도 없다. 상업 그 자체는 스스로 부를 창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정치경제학의 진실을 저자는 구체적인 통계 수치들과 함께 다시금 상기시킨다. ‘세계화’의 가장 큰 핵심은 ‘무역의 세계화’와 ‘금융의 세계화’다.

“‘무역과 금융의 세계화’가 진행되어 온 각각의 단계에서 폭력과 전쟁의 씨앗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바로 경제와 사회의 전면적 퇴행이다. 이 퇴행은 부유한 나라들을 먼저 강타했다. 그렇다고 신흥 개발도상국들을 관대하게 다룬 것도 아니다.”(17쪽)


사피르가 제시하는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의 이유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무역의 세계화와 금융의 세계화)와 달러본위제도, 유로존 체제의 내적 결함이 맞물린 결과이다. 신자유주의 경제논리 아래 추진된 자본 자유화는 총이윤 중에서 금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으며, 이와 함께 경제의 부채의존도를 급격히 상승시키고, 제조업이 감소하는 탈산업화를 진행시키면서 고용의 불안정, 소득불균형, 사회복지의 후퇴라는 오늘날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의 세계화가 초래한 위기는 무역의 세계화에 의해 야기된 위기를 가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는 저자는 오늘날의 세계금융의 위기의 모태로 국제통화체제를 지목한다. 197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가 해체되면서 국제통화질서는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고, 이런 가운데 시작된 금융의 세계화는 통제할 수 없는 금융체제와 맞물려 실물 경제의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현재를 ‘세계화라 불리는 세계경제의 통합 물결이 역류하는 시점’이라고 보았다. 전능하다고 여겨져 왔던 시장이 후퇴하고, 무능하다고 질타 받아 온 국가가 다시금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래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세계금융위기는 물론이고, 한국과 말레이시아 등이 겪어야 했던 1997년의 금융위기 또한 미국과 IMF가 만든 통화의 무질서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저자는 건전성 규제는 전혀 해법이 되지 못하며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책을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유로 단일통화의 한계에 직면한 유로존 금융체제 위기가 다시금 미국 금융시스템과 세계경제 전반에 걸친 위협의 증폭 요인으로 다시금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결국 달러 헤게모니는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며, 해결책은 현재의 IMF·WTO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금융통화시스템(지역통화체제와 공동통화제도)의 출현으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사피르의 전망이다.


“탈세계화를 질서정연하게 추진하기 위 해서는 분명히 관련 국가들이 협력기구를 만들어 공동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탈세계화가 반드시 질서 정연한 방식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무기력에 빠져 있거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을 때, 자국의 상황을 먼저 고려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나라가 일련의 주도권을 쥐고 상대국을 궁지로 몰아 애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거나 복종을 요구할 수도 있다. 국제적 차원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매우 상투적이고 아주 맥빠진 주장을 핑계로 내세우며, 자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금융의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이 책의 1부에서 다뤘던 '무역의 세계화’ 경우보다는 한 국가가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한 국가가 주도권을 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190쪽)


그리고 전세계적인 국가부채와 가계부채에 대한 사피르의 해결책은 고성장이다.

“고성장을 회복하는 것만이 대량실업을 해결할 수 있다. 고성장을 이루려면 공정한 무역을 위한 보호주의적 수단과 통화의 자주권이 필요하다. 통화의 자주권은 자본 이동을 엄격히 통제할 때만 가능하다. 글로벌 자본 이동 중 해외직접투자(FDI)는 5%도 되지 않는다. 이 정도 자본을 유치하려 자본시장을 완전히 열 필요는 없다.”(198쪽)


오늘날 세계 경제는 근래에 경험하지 못한 크나큰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사라져버렸다. 지금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금융과 무역의 탈세계화를 위한 실천’이라고 분석하는 저자는 지금의 세계화를 이끌어 오며 간신히 수면 위에 떠 있는 난파선의 선원들에게 의존하지 말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용기와 상상력, 나아가 격렬한 투쟁까지도 발휘할 것을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사피르는 한국도 외환통제체제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본다. 한국 정치권은 요즘 외환거래세인 토빈세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피르의 말대로 환율과 자본 이동에 대한 통제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미국과 직접 부딪칠 것이다.

결국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주한미군의 보호 아래에 안주하여 미국식 경제시스템에 편입한 채 뻔히 예상되는 길고 고통스러운 퇴행으로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독일이나 중국처럼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여 자립적이고 경쟁력 있는 경제체제를 추진하면서 세계경제의 주요 거점들과 공정한 교류에 나설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한국에게는 미국식 세계경제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북한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아도 남북 각 정부는 긴장을 완화하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눈 앞에 두고 있는 바,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남북의 경제협력을 통해 해외시장과 거래하되 크게 휘둘리지 않는 경제시스템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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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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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100주년을 계기로 필자가 참여하는 공부모임에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교재로 채택했다. 그리하여 거의 30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20세기 말 지구촌을 지배한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자마자 자본주의 체제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다. 1997년 IMF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2008년부터 시작된 미국발 경제위기, 21세기 들어 심화된 유럽발 경제위기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가 전세계 국가와 시민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경고하는 중이다.

따라서 20세기 초, 200년 가까이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실험했던 러시아 10월 혁명을 다시금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존 리드는 잡지 <The Masses>의 기자로 활동하던 미국의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1913년 뉴저지 주 패터슨에서 일어난 섬유 노동자 파업을 보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뒤부터 혁명적 정치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특파원으로 유럽에 체류하다가 러시아혁명을 목격하여 쓴 르포르타주 문학 작품으로 이 책 <세계를 뒤흔든 10일간>을 발표하였다. 그는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을 때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다.

미국 사회당 당원이었던 존 리드는 1919년 전당대회 때 당에서 쫓겨나, 사회당 좌파가 공산주의 노동당을 창당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레닌의 벗’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내가 직접 본 격렬한 역사의 한 단편이다. 이 책에서 나는 10월 혁명의 과정, 즉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러시아의 국가 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로 넘긴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는 데 만족하려 했다.”

"볼셰비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도로,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었음을 또 볼셰비키의 등장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현상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가들이 기록을 뒤져서 파리코뮌의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밝혀내려 하는 것처럼,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정신이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지도자들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저자 서문 중에서..)

 

1장 ‘10월 혁명의 배경’과 2장 ‘다가오는 폭풍’에는 1917년 10월 혁명의 배경과 원인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제정은 무너졌다. 2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군기는 혁명 전보다 오히려 더 소진해 있었던 상태였으며 1917년 9월 1일에 이르면 독일군의 공습을 받아 리가(오늘날 라트비아의 수도)가 함락되었고, 독일군이 국경까지 다다를 위기에 처해 있었던 상태였다. 아기에게 먹일 우유와 빵조차 모자라서 사람들의 불만도 극에 달해 있었다.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 정부의 실권은 사회혁명당의 두마 의원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부의장이었던 케렌스키가 쥐고 있었다. 전쟁에 지쳐 평화를 바라는 병사에 반해 육군 장관을 겸임하였던 케렌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지속을 주장했다. 6월, 그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에 갈리시아 공격을 시작한다. 초반 승리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사기 하락으로 전선은 붕괴되고 7월에는 반대로 독일군 - 오스트리아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급기야 8월에는 독일군의 리가 공세로 리가를 빼앗겼다.

이 공격 실패를 계기로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불만과 노동자들의 배고픔과 어려움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7월 3일에서 7월 7일(율리우스력)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세비키가 이끄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거리로 나와 임시 정부에 대한 봉기를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앞바다 해군 기지 섬 크론에서 수병 20,000명 정도가 무장을 하고 페트로그라드로 행진하여 소비에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요구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도 같이 봉기하여 사태는 커졌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시가전이 일어났지만 임시 정부는 군대를 지휘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이 봉기 이후 임시 정부는 볼세비키가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볼세비키 지도자는 체포를 피해 몸을 피했고, 일시적으로 볼세비키의 세력은 후퇴했다

 

2월 혁명 이후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가 병립하는 이중 권력 상태가 탄생하여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노동자들은 다양한 정치 세력 속에서도 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증명하고 러시아 사회의 변혁을 약속한 볼세비키에게 지지를 보냈다. “전쟁 대신 평화를!!!”

임시 정부군 총사령관 코르닐로프 장군은 혼란스런 러시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에 속한 케렌스키와 대립하였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총사령관에 임명했지만, 그 직후에 코르닐로프를 스스로 군사 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9월,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에 직면한 케렌스키는 임시정부 군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볼세비키의 적위대 등 무장 세력에 구원을 요청하며, 무기까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볼세비키의 설득을 받은 군인과 러시아군 병사들이 코르닐로프를 배신함으로써 유혈사태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실패하고 코르닐로프과 그 지지자 7,000여명이 체포됐다.

 

3장 ‘혁명 전야’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12장 ‘농민대회’까지는 10월 혁명의 전과정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7녀ㄴ 10월 10일,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투표를 실시하여 10대 2로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10월 12일(율리우스력)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페트로그라드의 방위를 목적으로 멘세비키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무장봉기를 위한 기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볼세비키는 찬성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연설하고 노골적으로 무장봉기의 방침을 인정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승인하기 위해 10월 25일(율리우스력) 개회 예정인 제2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 맞춰 봉기하자고 주장했다. 멘세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고, 위원회의 구성 멤버는 볼세비키 48명, 에스에르 좌파(사회혁명당 좌파)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이 되었다.

그 이후 군부의 각 부대가 차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대한지지를 표명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소비에트의 지시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에스토니아 인의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좌익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10월 24일,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던 임시정부는 부대를 동원하여 볼세비키의 신문 <라보치 프치>, <소르다트>의 인쇄소를 점거했지만, 군사혁명위원회는 이것을 계기로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적위대는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병 소비에트 기관이며,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수비군을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로 옮겨졌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각료가 남아 있는 ‘겨울 궁전’에 대한 점령은 25일 오후 9시 45분 방호 순양함 〈아브로라〉 공포사격을 신호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오후세엔코 이끄는 부대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군과 사관학교 생도, 여군이 방어를 맡고 있었지만, 거의 저항없이, 26일 새벽 오전 2시경에 점령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회의를 계속했던 각료들은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마지막으로 ‘겨울 궁전’을 탈출하여 외국으로 망명했다.

 

존 리드의 10월 혁명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러시아 수도이자 봉기의 중심지인 ‘붉은 페트로그라드’를 무대로 “볼셰비키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러시아의 국가권력을 장악해 소비에트로 넘긴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제2의 혁명 격전지 모스크바에도 갔다. “작고 힘없는 기관차가 나무를 태워, 크고 기다란 열차를 끌고 갔다. 열차는 여러차례 정차하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지붕 위의 병사들은 발로 박자를 맞추며 농민들의 구슬픈 가락을 따라 불렀다.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만원인 복도에서는 격렬한 정치토론이 밤새 이어졌다. …열차 안의 공기는 연기와 악취로 숨이 막혔다. 창문이 깨져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밤 사이에 질식해버렸을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여행을 기록한 장면이다.

 

당시 미국 기자였던 저자는 혁명군 장병들뿐만 아니라 정부군, 자본가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역사의 주역들을 만날 수 있었고, 군중의 일원으로 어디든 함께 섞여 혁명 현장을 누볐다. 이를 토대로 한 생생한 묘사들 덕분에 나중에 쏟아진, 박제화한 기존 자료들이나 서구측의 기록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20세기 인류 최대의 실험 가운데 하나였던 러시아 혁명 현장의 기념비적인 기록이다. 특히 이 책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검열 때문에 대폭 생략된 부분을 완전 복원함으로써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줄 것이다.

 

이 책에는 레닌, 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참호의 병사들, 공장 노동자들, 비참한 처지의 농민들까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10월 혁명의 핵심 지도부로 알려져 있는 인물 중,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트로츠키다. 레닌은 간헐적으로만 언급되고 있으며, 스탈린은 딱 한 번 등장한다. 그만큼 존 리드의 기록은 노동자, 병사, 농민 등 러시아 혁명의 주역인 인민 개개인과 계급의 말과 행동, 고뇌와 갈등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러시아의 노동자와 병사들, 농민들이 국가적, 사회적, 역동적인 위기의 순간, 구체적인 과정과 매 순간에 자신들의 본능과 의지에 따라 억압 체제를 타파하고 역사를 전진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 즉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귀족과 기득권층의 위기가 곧 노동자, 농민, 빈민 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임을 역사적 사실로 말해주고 있다.  

몸뚱아리 밖에 가진 것이 없던 ‘인민’, ‘민중’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열정을 유감 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전쟁과 착취와 억압 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러시아 인민들의 의지와 단결된 행동 그리고 볼셰비키의 정치적 지도력이 함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한국사회는 부정부패와 무능 무책임으로 촉발된 거대한 ‘광장의 촛불’로 청와대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촛불의 역동성을 ‘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새정부와 노동자 등 진보진영에게 달려 있다. 한국도 100년 전 러시아처럼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20세기 현대사에서 진짜 ‘혁명’으로 평가받는 러시아 10월 혁명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에서 일어난 1917년 10월 혁명의 배경과 동력은 ‘헬조선’으로 불리는 2017년 한국사회의 처지와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에 더욱 비교하는 게 의미가 크다. 10월 혁명의 성과와 한계는  2017년 한국사회가 가고자 하는 미래의 ‘혁명적 변화’를 가늠해보고 방향을 잡고 노력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상 깊은 문장-

 

“나는 이 병사들처럼 사태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연설을 경청했다. 병사들은 고민하며 눈썹을 찌푸렸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과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사의 얼굴을 한 위대한 거인들처럼 보였다.

넓디넓은 러시아 각지에서 수많은 노동자, 병사, 수병 들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마침내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결의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바로 그것이 러시아 혁명이었다.”(9쪽)

 

“외국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무지’를 자주 강조한다.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서구인들 같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 조직의 측면에서 잘 훈련돼 있었다. 1917년에 러시아 소비자 협동조합 회원은 1천2백만 명이 넘었다. 또,  소비에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자들의 조직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만큼 사회주의 이론과 적용에 능숙한 사람들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11쪽)

 

“그들(노동자들)은 우리(미국)의 정치 제도가 러시아의 정치 제도보다 낫다는 데 모두 동의했지만, 한 독재자를 자본가 계급이라는 또 다른 독재자로 바꾸는 (미국식) 정치 제도를 위해 조바심내지는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모스크바, 리가, 오데사에서 수백 명씩 사살되거나 처형되고, 감옥에 수천 명씩 투옥되고 사막이나 북극으로 유배된 것은, 미국 노동자들이 금광이나 크리플 크리크에서 누리는 법적 권리, 그 애매모호한 권리 정도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다.”(11쪽)

 

“소비에트 정부에 적대감을 나타내는 많은 작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최종 국면이 볼셰비즘의 야만적 공격에 맞선 ‘고결한’ 사람들의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유산 계급이 대중적 혁명 조직들이 성장하자, 조직들을 파괴하고 혁명을 중단하려 한 것이다. 유산 계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12쪽)

 

“마을, 지방 전선, 그리고 러시아의 모든 병영에서 이와 같은 투쟁이 반복됐음을 상상해 보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수많은 크릴렌코가 각 연대의 동향을 살피고, 전국으로 급파돼 토론하고 위협하고 애원하는 모 습을 상상해 보라 모든 노동조합 지부들과 공장들과 농촌에서, 심지어 러시아를 떠난 군함 속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상상해 보라 넓 디넓은 러시아 각지에서 수많은 노동자·농민·병사·수병 들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과 마침내 만장일 치에 가까운 지지로 결의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바로 그것01 러시아 혁명이었다. ......"(190쪽)

 

“(융커 장갑차 안의) 사망자 중에는 영국인 장교도 포함돼 있었다 ...... 나중에 신문들은 또 다른 프랑스인 장교도 융커의 장갑차 속에서 붙잡 혀 페트로-파벨로 이송됐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대사관은 이 사실을 즉각 부인했지만, 한 시의원은 자신이 프랑스인 장교의 석방을 도왔다고 나에게 말해 줬다. …… 연합국 대사관들의 공식 태도가 어떻든 간에, 프랑스와 영국의 장교들은 구제위원회의 집행위원회 회의에 개별적으로 참석해서 조언할 만큼 이 내전에 깊이 관여했다. 융커와 적위대 사이의 소규모 충돌은 페트로그라드의 전 지역에서 쉴새 없이 벌어졌다. 장갑차들끼리 맞붙기도 했다. 단발, 일제 사격, 기관총 의 날카로운 총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편, 상점들의 철문은 잠겨 있었지만 장사는 계속했다. 심지어 극장도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가운데 상영이 계속되었다.”(225쪽)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유산 계급이나 다른 정당 지도자들과 타협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낡은 정부기구와 화해함으로써 된 것도 아니었다. 소수 분파의 조직적 폭력을 통해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러시아 대중이 봉기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볼셰비키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기층 민중의 거대하고도 단순한 욕구를 그들이 현실화해 줬다는 점이다. 즉, 볼셰비키는 민중과 함께 구체제를 파괴해 나갔고, 민중과 협력하면서 폐허와 연기 속에서 새로운 체제의 기초를 함께 세워 나갔던 것이다."(324쪽)

 

[ 2017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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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의 법정 증언 PEACE by PEACE
이재봉 지음 / 들녘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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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한다.”

이 문장은 대한민국 법원의 증언대에 서는 모든 사람이 판사 앞에서 맹세해야 하는 ‘증인 선서’다. 저자 이재봉 교수는 재판의 증언자로 나서게 되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증인 선서’의 보호 아래 ‘양심에 따라 숨김고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증언한다.

‘증인 선서’가 이재봉 교수를 ‘보호’해주는 이유는, 이 교수가 증언자로 나서는 소송 사건이 대부분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10여차례 국가보안법 관련 재판에서 전문가증언을 해왔다. 주로 통일운동을 하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걸려든 사람들의 재판이었다. 이재봉교수는 통일과 북에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한 증언을 그치지 않아 왔다. 그 이유는 “국가보안법을 악용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검찰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증언이 조선, 중아, 동아일보나 종편 등 극우언론에서 왜곡되어 보도되는 것을 보고, 이 교수는 그의 법정증언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재봉의 법정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이 교수는 법정에서 ‘증인 선서’를 바탕으로 북한의 국가자격, 김일성 주석, 주체사상, 북핵과 미사일 개발,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연방제 통일방안, 정전협정, 주한미군, 반미운동 등 한국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사안까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증언한다.

또 한국현대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공산주의 성향의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며, 공산주의가 항일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분단과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운동은 일제치하에서부터 시작됐고, 평양보다 서울에서 훨씬 활발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한반도역사에 준 영향이 적지 않지만, 반공주의에 갇힌 역사교육으로는 배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어느 이념에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평가와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 사안을 다루는 태도는 ‘한미동맹’의 상대방인 미국을 대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친미반공의 사회구조안에서 말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했다는 아주 기본적이고 엄연한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남사회 내에서 ‘종북’으로 받아들여져 국가보안법의 처벌받을 수 있는 반미운동에 대한 기원과 성질을 짚어본다.

반미운동은 1945년 미군이 한반도에 착륙하자마자 자생적으로 시작됐다. 일본 식민통치구조의 연장에 불과한 미군정으로 인해 반미감정이 생겨났던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반미감정은 1980년 광주학살과 전두환 독재정권의 배후에 있었던 미국의 행보로 인해 폭발하고,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됐다. 민주화운동이 반미운동으로 발전하며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통일을 실현하자는 반외세 민족자주운동이 전개됐고, 미국은 통일의 걸림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교수는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남한으로의 핵무기 배치와 핵공격 위협이 북한의 핵무기개발을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이라 지적한다. 북한은 핵을 가진 주변국들과 주한미군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재래식 무기와 인력을 축소하여 돈을 아끼기 위해, 미국과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핵개발에 매진해왔다.

저자는 ‘북핵문제’를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발상의 전환’으로 풀어나가지 않는 이상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두단계에 걸친 핵문제해결방안을 제안한다. 최근 급속히 악화해 가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회복하려면, 1단계로 북의 핵 동결 선언과 북미 평화협정 등을 먼저 추진하고 그 이후 북핵 완전 폐기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추진하자는 현실적인 2단계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자본주의 세력에 의해 '빨갱이'로 묘사되고 있는 사상인 공산주의가 사실 이념적으로는 이상형에 가까울 만큼 바람직하며 이를 추진하기 위한 중간 단계인 사회주의 체제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아 1990년대 소련 붕괴를 시작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반해 자본주의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오히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해왔기 때문에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는 이른바 '시장민주주의'나 ‘국가 개입’ 등을 통해 부단히 변화해 왔지만, 사회주의는 사상의 변화는 곧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변화를 거부한 탓에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생각을 북한에도 적용하고 있다. 사상으로서의 '주체사상'은 사람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철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상이지만, 이것이 김일성주의의 '수령론'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이나, 이 과정에서 등장한 '선군정치'의 배경이나 의미를 지적한다.

그리고 최근 이른바 군사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북한의 '병진노선'까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적시한다. 이렇게 저자의 책을 읽다 보면 북한이 발겨 벗겨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른바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체를 보게 된다.

남한의 이른바 공안 정국 상황에서도 북한이 제안한 '연방제' 통일 방안을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안"이라고 강도 높게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학자적 양심마저도 읽힌다.

그리고 북한의 이러한 연방제 제안이 변화해온 과정을 일일이 추적하며, 최근에는 이른바 남한에 흡수될까 하는 우려마저 보이고 있는 '수세적 연방제안'으로 바뀌었다고 통찰하고 있다.

이 교수는 남북 간에 충돌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이른바 '북방한계선'이 등장한 배경을 설명하며, 남북 모두가 실질적인 피해자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이 북방한계선을 평화지대로 만들고자 북한과 협의한 내용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남북한의 갈등을 불려오고 있는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이 교수는 자신을 이른바 '친북주의자'라고 단호히 말한다. 통일을 위해서 어떻게 북한과 친하지 않고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의 아주 상식적인 논리이다. 하지만 저자는 왜 이러한 상식이 한국에서는 이른바 '종북'으로 매도되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친일파의 등장에서 최근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학자의 양심으로 갈파하고 있다.

<이재봉의 법정 증언>은 저자의 말대로, 특히 보수 언론의 왜곡으로 북한을 두둔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책이라는 왜곡된 편견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이처럼 매우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기준으로 남북문제와 한반도 문제에 관해 쓴 드문 책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북한과 관련하여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는” 학자나 언론인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이종석, 정창현, 김진향, 박노자 등 정말이지 열 손가락을 넘기기 어렵다. 일부 극우선동가들이 이 교수를 ‘쳐 죽여야 할 빨갱이’라고 매도하곤 하지만, 오히려 ‘존경스러운 노교수’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과 종북몰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기간 동안 제대로 청산하거나 제어하지 못하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야권과 진보진영을 공격하고 분열시키는 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히고 생계를 박탈당하고 사회정치적으로 매장당했다. 분단을 정권유지 및 강화에 악용해온 ‘분단 기득권 세력’이 한국사회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라도 국가보안법으로 박해받는 양심수들을 위해 ‘증언’하는 이 교수의 양심과 노력에 감사드린다.


[2017년 5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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