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만세 - 분단시대의 지식인
남정현.박순경 외 지음, 최진섭 대담.정리 / 도서출판 말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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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최진섭 기자의 대담집 <통일 만세 : 분단시대의 참 지식인의 이야기>를 읽고 / 2014. 3, 도서출판 말

국정원, 국방부, 보훈처 등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행정부 기관이 19대 대통령 선거에 총동원되어 개입하고 극우언론과 어용방송이 분단체제를 악용하여 전방위적으로 국민을 이간질 시키고 종북이데올로기를 선동한 끝에 들어선 박근혜-새누리당 정권.
그들은 그렇게 부정하게 정권을 획득한 후 오히려 "통일은 대박"이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국정원장 남재준은 "2015년 통일을 위해 우리 죽자"고 선동하기에 이르렀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 온 대다수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비전 제시도 못하고 있다.

이런 정치세력들이 주류를 형성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청년들이 의무복무를 위해 입대했다가, 대학생들이 오리엔테이션을 받다가, 그리고 고교생들이 수학여행을 갔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세월호 참사는 하나의 선박이 아니라 대한민국호라는 국가가 침몰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천박함과 탐욕과 양심불량과 증오가 느껴지는 극우세력과 무능하고 무책임한 보수야당이 대한민국호를 침몰하도록 조장하고 방치하는 이 때에 진정으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쳐온 8명의 양심과 통일운동가의 삶을 읽었다.
70년 분단 시대의 가시밭길을 헤쳐 오면서 평생을 정의의 칼날 위에 서서 살아온 원로 지식인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이들이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생생한 양심의 목소리를...

‘신학자 박순경, 소설가 남정현, 비전향 장기수 기세문, 통일운동가 이천재, 청화 스님, 해직언론인 정동익, 시인 이기형, 강희남 목사’

청화 스님은 "80년대 이후 수많은 운동가들이 철새처럼 민중의 곁을 떠나갔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정식화된 목표, 정식화된 이념에다 운동을 맞추었기 때문이에요. 정식화된 이념에 주목하기보다 현실이 안고 있는 모순점, 민중을 억압하는 부조리, 인간성을 파괴하는 제도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라고 충고한다.
비전향 장기수인 기세문 선생은 "통일운동이 빠진 환경운동이나 생명운동, 분단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진보운동으로는 한국병을 치료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남정현 소설가는 젊은 후배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시대를 지키는 초소이니, 자기 능력에 맞게 우리 시대의 빛이 되어 달라"는 마음을 전한다.
통일 신학자 박순경 교수는 "이념과 체제보다 민족이 우선, 연방제 통일로 제3의 민족사회를 건설해야 함"을 역설한다.
해직언론인 정동익 선생은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고 일갈한다.
고 이기형 시인은 "50년간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교육은 대다수 진보인사조차도 반북의식을 갖게 만들"었는데, "반북의식을 지닌 사람은 이 시대의 지성도 양심도 아니다"라고 꾸짖는다.
고 강희남 목사은 "정권 앞에 패자가 될지언정 하느님 앞에 승자가 돼야 하며 정권 앞에 죄인이 되더라도 결코 역사 앞에 죄인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라고 밝혔다.

대담집 안에는 여덟 분 모두가 '분단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으로서 한 평생을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그리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분들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한 분 한 분의 인생역정과 마음가짐은 각각 일제와 분단시기를 이어온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산 역사이자 증인인 셈이다. 

"이분들은 필자(대담자)가 [말]지 기자로 일한 1989년 1월 31일부터 10년 동안 인터뷰를 했거나 취재 현장에서 만난 분들이다. 이기형 시인은 96세가 되던 2013년 6월, 강희남 목사님은 89세 되던 2009년 6월에 별세했다.
도서출판 말은 첫 번째 책의 주제를 ‘분단시대의 지식인’으로 정하고, 이분들을 일이십 년 만에 다시 만나서 인터뷰했다. 여전히 이분들의 목소리가 ‘말다운 말’이고, 여전히 분단된 우리 시대의 실상을 대변하는 목소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원로 지식인의 눈에 한국 사회는 [말]지와 인터뷰를 했던 20년 전이나 다를 바가 없는 분단시대이고, 외세문제가 중요한 때이다. 민족의 근본문제를 놓고 말한다면 이분들이 청춘이었던 50년, 60년 전과도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분들의 공통점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일편단심, 초지일관, 언행일치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이분들로 하여금 평생토록 한 길을 가게 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혼돈의 시대에 원로 지식인들의 삶을 통해 열정, 지조, 자유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기획했다.."

[인터뷰이 소개]

○ 청화 스님 : 1962년 출가.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채석장풍경 당선. 2004년 조계종 교육원장 저서 시집[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산문집 [향기를 따라가면 꽃을 만나고]

"- 칼날을 밟고 서는 사람 -
어디 있는가/ 칼날을 밟고 서는 사람/ 고목나무의 그늘 아래 모인/ 썩은 송장 냄새의 무리들,/ 그들의 굿판의 술이 달다고/ 귀 있는 이들 우르르 몰려가는데,/ 그곳을 등지고, 둑을 무너뜨린/ 저 홍수를 향해 두 눈 부릅뜨고/ 칼날을 밟고 서는 사람/ 그 어디 있는가." (p.18)

○ 남정현 소설가 : 1933년 충남 당진 출생. 1961년 [너는 뭐냐]로 동인문학상 수상. 1965년 단편 [분지] 발표 (반공법 위반 구속 기소). 저서 [허허선생 옷 벗을라]. [남정현 대표 소설선집]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야. 사실 <분지>의 주제였던 외세 문제와 <분지>를 유죄로 몰고 간 국보법(반공법)이 그때나 이때나 괴력을 발휘하기는 똑같아. 한마디로 분지는 아직도 똥의 나라, 분지라 할 수 있지. 국보법을 여러 법률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헌법 제1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 대한민국은 아직도 국보법공화국이야. 미국 측에서 보면 일종의 보검이기도 할 테지."(p.53)

○ 기세문 비전향장기수 :  1934년 광주 출생.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15년형을 받고 비전향으로 만기 출소. 전 광주빛고을건강원 원장. 저서 [자연의 힘으로 병이 낫는다], [꽃 안 핀 봄]

"통일운동이 빠진 환경운동이나 생명운동, 통일을 생각하지 않는 건강운동, 분단에 고민하지 않는 진보운동으로는 한국병을 치료할 수 없어요. 남북의 대동맥이 다시 이어지고, 남북 삼천리 온 나라 온 겨레의 혈액순환, 신진대사가 원활히 될 때, 비로소 분단 고착화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동맥경화증, 고혈압, 심장병, 만성 스트레스와 같은 고질병들도 치유할 수 있을 겁니다."(p.142)

○ 이천재 범민련 고문 : 1931년 경기도 안성 출생. 18세 때 국가보안법으로 소년원에 들어간 이후 7번 국보법으로 수감생활.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할아버지’로 이름을 날림. 저서 [고백], [희망]

"언제쯤 국보법에서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이 실제로는 신식민지 보호법이요. 그러니까 미국이 허락하지 않으면 폐지를 못할거요. 지금도 정권 비판한다고 잡아 가두지는 않아. 독재정권이라 한다고 처벌하지 않지만, 미군 철수하라고 하면 보안법으로 처벌해. 그러니까 신식민지 보호법인거요. 한반도의 근본 문제는 북미 관계가 주축이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의 적대 관계가 끝나고, 국가보안법도 죽게 되겠지. 그리 되면 해방 이후 역사에 대한 총체적 반성과 비판이 나오고, 각성한 종교인, 지식인, 문화인들이 새로운 사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될 거요. 국가보안법이 있으면 사람이 제대로 크질 못해. 너나 할 것 없이 정치적 불구자, 쭉정이, 반쪽이가 된다니까."(p.147)

"참된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을 중심에 놔야 한다는 거요. 한국에서 민족주의 애기하면 매력적인데 동학혁명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퍽 공허해졌어. 왜 그러냐 하면, 민족 말하는 사람들이 노동 농민의 이익을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에 대해서 비전이 분명하게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으니 공허할 수밖에.
노동자, 농민을 끌어안는 민족주의만이 참된 민족주의고, 노동계급에 의해서만이 민족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고, 그럴 때만이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있는 거요."(p.153)

"변혁운동의 고양기에는 좌편향을 경계하고, 반대로 침체기에는 우편향을 경계하라는 경구가 있소. 잘 나가던 한총련이 단지 정권의 탄압 때문에 고립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해.
대중의 요구, 대중의 의식수준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주관적 인식이나 판단만으로 대중을 재단하려는 독선, 대중이 따라오든 말든 제 기분 제 감정에 도취하는 주관주의적 독선을 조심해야 해. 나는 주변 동지들에게 거듭거듭 반복해서 말해요. 기회주의적 우편향은 이해와 정세가 달라지면 스스로 노선을 수정을 할 수 있지만, 관념적 좌편향은 고질병이라고."(p.154)

"20세기에 함께 운동하던 젊은 운동가들이 21세기 들어 대부분 현장을 떠났어요. 통일운동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잡아가서 실형 선고하고, 감옥 보내니까, 탄압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아무래도 위축이 되었을 거요. 그건 일제 시절부터 이어 온 운동가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대중의 요구가 있다면 할 소리 하면서 조직 확대해나가고, 법정에서 투쟁해야 자기발전의 합법성이 나오는 것이지, 미리 움츠리면 될 일이 뭐가 있겠소. 국가보안법의 탄압이 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투쟁으로 넘어서는 게 운동의 합법칙성에 맞는 거요."(p.157)

"남측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 하자는 것도 아니고, 민족 대단합을 꾀하자는 건데, 이건 좌편향도 아니고 우편향도 아닌 거야. 북과 화합하는 통일운동 하자는 것을 운동수위가 높다, 과격하다고 핑계 대면서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편향 아니겠소. 결국은 탄압이 두려운 것이지. 까닭 없이 탄압을 자초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탄압을 받지 않는 운동만 하자면 그게 분단운동일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통일운동, 자주단결의 운동일 수 있겠소?"(p.158)

"혁명이란 말이오.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 낮은 단계, 높은 단계, 이러면서 세상의 혁명을 계단식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낮은 수준의 인간 존엄을 높은 수준의 인간 존엄으로, 더욱 높은 수준의 인간 존엄으로 올리는 것이라고 이해해요. 이게 집단적 의지, 투쟁으로 더 높은 존엄을 이뤄내는 것이지, 이게 혁명이야. 내가 생각하는 혁명의 궁극적 모델이란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이지. 그 존엄을 개인주의, 이기주의에서 추구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야.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를 훌훌 털어버려야 해. 자본주의에 살면 살수록 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물들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라고 봐요. 문제는 이 '큰 나'라 할 때, 인간의 존엄이란 거 있잖소. 서로 행복하자는 애기는 서로의 존엄을 높이자는 애기인데, 이건 집단이 아니고서는 안 된단 말이오."(p.171)

○ 박순경 신학자 : 1923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66~88년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 2009년 늦봄통일상 수상. 한국진보연대 고문(현) 저서 [한국 민족과 여성신학의 과제], [민족통일과 기독교]

"통일신학의 뿌리는 항일민족운동과 민족 분단의 역사에서 찾아야 해. 해방 직후 나는 나의 존재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는 만나야 한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이다!'라는 외침이었어. 1946년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했을 때 몽양 여운형 선생이 저도하던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고 했다가 '빨갱이 마귀가 거룩한 하나님 동산에 들어왔다'는 비판을 받고 ?i겨날 처지에 놓이기도 했어. 윤성범 교수와 몇몇 학생의 변호로 축출되는 일은 모면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한국 교회의 반공이라는 벽에 부딪혔어. 그 뒤로 '한국 교회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하는 물음을 끌어안고 신학을 해온 것이지."(p.179)

"교회는 동과 서, 동의 사회주의 공산 권력과 자본주의 서방 권력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칼 바르트)
"교회는 남과의 유착관계와 반공주의로부터 해방되어서 남과 북 사이에사 참된 민족화해를 위해 사역해야 한다."(박순경)

○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 1943년 전주 출생. 동아일보 해직기자. 1986년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초대 회장. 1988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월간 말 발행인. 2006년 동아투위 위원장

"[문] 광범위한 역사왜곡에 대하여...
[답]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봐. 친일파 후예들이 재집권할 수 있도록 길을 닦으려는 것이지. ... 쿠테타 세력을 기념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어? 히틀러를 찬양하는 격이지. 저들은 이명박 집권 내내 친일파를 건국세력으로 부활시키려고 공공연하게 움직였고, 심지어는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이 개입해 일어난 무장폭동이라고 날조하려고 했던 세력이야. 앞으로도 말도 안 되는 역사 왜곡을 자행할 게 뻔해. 겨학사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그 대표적인 사례지. 이런 걸 막는 것 자체가 민주화운동이고 통일운동이야."(p.251)

"[문] 원로그룹은 자민통 노선이 여전히 대세인가요?
[답]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과제가 어디로 간 게 아닌데 진보매체나 단체들이 민족, 통일 분제를 다루는 시선이 예전과 같지 않아. 민주의힘 회의에 나가보면, PD 계열은 민족 문제나 미국 문제는 별 관심 없더라고.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는 경우도 많아. 노동 문제 풀려고 해도, IMF에서 보듯이 미국문제가 주요한 문제인데 말이야. PD와 NL 문제는 쓰지마. 골치 아파. 요즘 세대는 계급의식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아서 민족의 큰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운동권이 양분되다 보니까, 큰 힘으로 투쟁하지 못하고 있어. 고질적인 병폐야."(p.252)

○ 이기형 시인 : 1917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 1947년 몽양 암살 이후 33년간 칩거 생활. 1982년 시집 [망향]으로 문단에 등단. 2013년 6월 12일 별세. 시집 [지리산], [산하단심] 외 다수.

"우리 사회처럼 옹졸하고 비뚤어진 사회에서는 옹고집만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워. 자기중심을 잃지 않되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해. 설령 이념이나 정견이 달라도 적으로 규정하지 말고 용서하고 관용할 줄 알아야 해. 일제 강점기에는 감옥 안에서 민족주즈이자와 공산주의자가 한 이불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는데 지금은 노선이 조금만 달라도 등을 돌리는 게 문제야."

"(젊은이들이 믿고 따를 만한 민족의 지도자가 보이자 않는 이유는..) 이게 모두 다 분단 때문이댜. 국가보안법 아래서는 지조 있는 인물이 나오기가 쉽지 않아. 그리고 반공교육 때문에 사상과 능력을 겸비한 지도자가 크기 어려워. 50년간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은 대다서 진보인사조차도 반북의식을 갖게 만들었어. 나는 반북의식을 지닌 사람은 이 시대의 지성도 양심도 아니라고 봐. 하루빨리 반공교육이 아닌 홍익인간 교육을 실현해야 해."

○ 강희남 목사 : 1920년 전북 김제 출생. 1986년 전북대 강연 사건으로 투옥 중 40일간 단식투쟁. 2009년 6월 6일 별세. 저서 [력사 속의 실존], [민중주의], [우리 민족 정리된 상고사]

"(김대중 정권에서 감옥에 간 이유는..)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치세력이 교체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검찰, 안기부, 기무사 등 공안세력은 바뀐게 하나도 없어. 그나마 정권이라도 바뀌었으니까 보석으로라도 풀려났지. 김영삼 정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야."(p.294)

"목사는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개라고 생각해. 도적이 침입해 오면 짖는 것이 개가 할 일이겠고, 국민주권을 침탈한 도적 무리를 보고 짖는 것은 목회자의 의무라 하겠지."

"(범민련이 그토록 사력을 다해 지키려 하는 것이 무엇일까?) 너무나 상식적인 것들이야. 남북이 이미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의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을 고수하려는 것이고, 연방제 통일방안과 양키군대의 철수와 같은 강령을 지키려 하는 것이야."(p.298)

"양키가 주둔하고 있는 한 대한민국은 떳떳한 주권국가가 아니야. 판문점에서 회담을 할 때도 태극기는 없어. 성조기가 있을 뿐이지. 그래서 북한은 남한이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하는 것이야. 남한-아메리카(한미) 방위협정을 놓고 봐도 우리에겐 영토도 없고 영공도 없어. 여전히 군사적 신식민지 상태라 할 수 있어. 일제 36년이나 지금의 남한 사회나 본질에선 다를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p.299)

"성서를 졸업하지 않으면 참기독교인이 될 수 없지. 2천 년 전의 성서 속에서 참예수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성서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찰나에 성서를 놓아 버려야 참기독교인이 될 수 있어."(p.302)

[ 2014년 9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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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죽이기
강준만 / 개마고원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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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천 [서평] 강준만 저 <전라도 죽이기>(1995.11, 376쪽, 개마고원)

이 책은 1995년 중순 출판계 뿐 아니라 정치권에게까지 큰 화제가 되었던 강준만 교수의 역작입니다. <김대중 죽이기>와 더불어 강 교수의 책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지역주의, 지역감정,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와 논란이 있었고, 많은 국민들이 박정희-전두환-김영삼 독재정권의 고의적인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실체를 알게되었습니다.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죠.

서평을 쓰기 전에 먼저 지적할 게 있습니다.
이 책은 이미 서점가에서 절판된 책입니다. 중고책도 별로 나오지 않아 책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전국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찾기도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급적 비싸더라도 책을 직접 구입하는 편입니다. 책 값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음식값이나 술값, 휘발류값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고, 출판계의 어려움도 이미 아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새책이 없으면 중고책을 찾고, 중고서점에도 없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습니다. <제국의 슬픔>이 대표적이었죠.

1990년대 후반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책이면, 당연히 전국의 도서관에 충분히 비치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도서관에서 찾기가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음모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 상식과 이성, 양심과 합리성이 실종된 대한민국입니다.

이 책은 제가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해온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의 뿌리와 근본적인 문제점, 해결방안을 이번에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반도 남단에 '지역차별' '지역감정' 그리고 '지역패권주의'를 창조(?)한 것은 박정희 일당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밀리자 본격적으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불법부정선거로 당선된 이후 그리고 1972년 유신쿠테타를 일으킨 이후 본격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강행하여 남한의 주권자들을 동서로 갈라놓았습니다.

"1971년 이전에는 적어도 지역감정이 정치적 이념을 능가할 만큼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1971년 이후 16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정치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지역감정이 전국적으로 득세할 수 있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역감정의 격화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시기에 지역패권주의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고, 지역감정의 격화는 지역패권주의의 당연한 결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지역패권주의가 등장하여 자기 목적을 위해 지역갈등을 유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역패권주의자들의 교언과 요설에 현혹되어 이를 과거의 지역감정의 연장선상에사 이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음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처럼 지역 감정 자체는 정치적 행위와는 직접적 관게가 없고, 다만 개인적으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인데, 여기에 지역패권주의자가 자기 목적을 위해 지역감정을 지역패권주의의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지역갈등을 극대화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이슈가 지역감정에 함몰되어 결국 지역패권주의 정권의 계속 집권이 가능하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지역감정도 지역패권주의의 중요한 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p.46)

우리는 보통 지역차별이나 지역패권주의을 정치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술수' 정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전에 벌어진 일이 당연시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를 무시하게 되죠.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에 대한 일화를 통해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가 어떻게 작동하여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야말로 오늘날 가장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그 지긋지긋한 지역갈등을 낳게 된 근본 원인 중의 하나다. 경부고속도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일의 선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가 지역불균형 발전의 악순환을 낳게 했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의 재판이라 할 경부고속전철이 추진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노태우 정권 당시 야당이 고속전철 건설을 반대하자 노태우는 '고속도로 놓을 때 반대했죠. 어떻게 됐나 봅시다. 고속전철 놓는 걸 반대하면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태우는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이 고속도로를 반대한 이유를 전혀 몰랐다. 당시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었다.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은 좋다. 그러나 순서가 잘못됐다. 먼저 국도를 전부 포장해 물동량이 전국에 걸쳐 자유롭게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고도 지나치게 몰린 구역이 있을 때 거기서부터 고속도로를 놓자'고 주장했다.
'국도 포장율이 40%가 안 되는 상태에서 서울과 부산 간에 고속도로를 놓으니 모든 물동량이 경부축에만 몰리고 지역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리고 부산, 울산 등 영남지역도 공해와 교통난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았냐?'는 야당의 주장에 대해 노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고속전철을 논의하던 노태우 김영상 정권 당시 호남선, 전라선은 철도 복선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남선 복선화는 2004년 경부고속철도와 동시에 완공했고, 전라선은 2010년에 순천까지 복선화되었다.)
대신 '고속전철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먼저 뚫고, 경부고속도로를 하나 더 만들라'고 충고했다. 경제는 총량이 아무리 늘어나도 배분이 잘못되고 지역불균형, 교통, 공해문제 등 부작용이 유발되면 건전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경부고속도로나 경부고속전철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필시 경제적 입지조건을 들고 나올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가 미국과 일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적 입지조건이 호남, 충청, 경기보다는 영남이 유리하니 전체 국익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지역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돈으로 따질 가치도 없단 말인가?
도로와 철도에 있어서의 차별은 일단 그것이 저질러지면 나중에 차별이 자연스럽게 '시장기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아주 악질적인 차별이다. 고속전철에 있어서도 상식 이하의 호남차별이 지금까지 대담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이유도 교통체계에 의한 차별이 갖는 매력을 영남패권주의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48~49)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과 같은 방식으로 지역차별적인 경제정책을 차별적으로 집행해 놓은 경우가 태반입니다. 울산, 구미, 창원 공업단지와 항만 등이 대표적이죠.
그렇게 저질러 놓고 나중에는 기존에 저질러 놓은 시설과 구조를 이유로 '경쟁력' 운운하면서 더 많은 세금을 쏟아붓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이후에는 세금을 쏟아붓지 않아도 경제논리, 시장논리로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이 작동하는 것이죠.

책장을 넘길수록 지역주의 정치의 근원, 정치적 의도,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등이 단순히 지역주의 정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계급계층적 배제와 차별에도 뿌리깊게 작동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발간된 1995년 이후 거의 20여년이 지난 현재는 지역차별이나 지역패권주의가 줄어들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997년 말 IMF 사태와 2008년 국제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지역차별 구도는 '경부축 : 비경부축'과 '영남 : 호남'에 더하여 '수도권 : 비수도권'이라는 구도까지 확대되었고, 특히 후자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지역은 '경부축 : 비경부축'과 '영남 : 호남'에 더하여 '수도권 : 비수도권'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지역차별 또는 지역패권주의는 다양하게 작동합니다. 정치 행정 법조 언론 학계 기업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인맥을 구성하는 세력들의 움직임에서 가장 큽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들어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지역패권주의가 인맥을 통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장 최근의 주요 직책과 출신지역을 통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김기춘(거제) 청와대 비서실장, 정의화(창원) 국회의장, 양승태(부산) 대법원장, 조희대(경북경주) 대법관, 김진태(경남사천) 검찰총장, 박한철(부산) 헌법재판소소장, 박 만(경북구미) 방송통신위원장, 황찬현(경남마산) 감사원장, 유영익(경남진주) 국사편찬위원장, 강신명(경남합천) 서울지방경찰청장, 최동해(대구) 경기지방경찰청장, 김규석(경북)댓글담당 현국정원3차장, 이정회(대구)새 댓글수사팀장, 조영곤(경북영천)서울지검장 악어눈물검사, 김석기(경북경주) 전서울지방경찰청장-용산참사지휘-공항공사사장, 김용판(대구) 전서울지방경찰청장-국정원수사 은폐엄폐조작 무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민주정부'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 정치를 해소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다했습니다만, 그런 노력은 사회구성원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였고, 이명박 정권 들어서부터 오히려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 기사 : "국세청 고위공무원 41.2%가 대구경북 출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7992)
"고위공직자 영남비중 36%…지역편중"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6/03/0505000000AKR20130603073000001.HTML

강준만 교수가 '전라도 죽이기' 즉 지역차별과 지역패권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제시하는 방향도 적절하고 공감이 됩니다. 즉 전라도에 대한 차별은 '호남인'만의 차별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지역차별, 소수자에 대한 차별, 약자에 대한 차별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강준만 교수에 대한 존경이 조금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그의 태도 중 하나가 바로 '차별에 대한 저항'이고 '불의한 정치에 대한 질타'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머리말 제목을 "때로 정치는 양심을 강간한다."로 달았습니다.
원래 정치(政治)라는 단어는 인간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사회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목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대상 중 '권력'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을 때 정치는 양심을 강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는 양심 뿐 아니라 사실, 진실, 정의, 자유, 평등 등 인류사회가 만들어낸 소중한 가치들을 '강간'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입니다.

"충청도와 강원도는 분명 '차별'을 받아온 지역이다. 앞으로 호남인들을 차별받는다고 말을 할 때엔 반드시 충청도와 강원도 사람들을 끌어안고 들어가라. 어디 충청도와 강원도뿐이랴. 제주도, 경기도, 경상도, 아니 서울까지 포함해 모든 지역의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라. 그 점을 명심하지 않고선 호남인들의 차별을 척결하기 위한 투쟁은 그 투쟁에 동참할 수 있는 막강한 동지들을 오히려 적으로 만드는 지금과 같은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호남인만 사람이 아니다."(p.213)


[ 인상깊은 문장 ]

"나의 적은 오로지 차별일 뿐이다. 나는 모든 차별에 저항한다. 지역차별에, 학력차별에, 신세차별에, 남녀차별에, 빈부차별에 저항한다.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차별은 꼭 척결되어야 한다." (p.08)

"고문보다 더 무서운 건 부드러운 세뇌다. 우리 국민은 60년 넘게 각종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밥상머리 교육에서부터 텔레비전 교육에 이르기까지..." (p.33)

"한국대학에 패거리는 있어도 지식인은 없다. 그걸 정확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식인의 위선과 기만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지식인이라고 부를 만한 특별한 사람은 없으며, 지식이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지식인일 뿐이다" (p.140)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투쟁은 모든 차별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인권의 문제라는 말이다. 예컨대 여성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그 투쟁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지역차별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p.143)

"선생님이 전라도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라도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전라도 사람을 증오하는 선생님의 '죄'를 보기 때문이며, 선생님의 떳떳지 못한 양심이 그것을 견딜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p.180)

"한 아이가 돌을 던지면 다른 아이들도 돌을 던진다. 돌을 던져 놓고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인지 돌 맞은 대상은 돌을 맞을 만하다는 자기기만을 일삼는다. 그것이 바로 남들을 따라 '지역차별'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공통된 심보다." (p.255)

"호남차별 심리에 물들어 있는 보통사람들이 호남의 몰표를 비웃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심리를 이해는 한다 해도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지역감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지식인이 호남 몰표를 호남인의 바람직하지 못한 대응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결코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 87년 선거시 광주학살 주범과 무관하지 않은 노태우 후보에게 표를 많이 주지 못한 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92년 선거시 광주학살 주범들과 합당해 후보로 나선 김영삼에게 표를 많이 주지 못한 게 호남사람들의 잘못인가?"(p.258)

"순도 100%의 도덕성을 강조하겠다면, 인권유린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군사정권 치하에서 무난히 살았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일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자학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독재자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우리 정치판에 대해 좀 더 깊은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p.373)

[ 2014년 8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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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권력 - 견제받지 않는 사법 관료, 사유화된 검찰 권력
최재천 지음 / 유리창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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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최재천 저 <위험한 권력 : 견제받지 않는 사법 관료, 사유화된 검찰 권력>을 읽고. 2011. 11., 310쪽, 유리창


이 책은 '권력기구 개혁' 관련 세미나를 위해 사법개혁 책을 인터넷에서 구하다 발견한 것이다. 예전에 권력기구 개혁과 관련하여 김희수, 서보학 등 공저 <검찰공화국, 대한민국>(2011 삼인)과 문재인과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2011 오월의봄)를 읽었다.

최채천은 내가 2011년에 그의 저서 <한미FTA 청문회>(2009 향연)를 읽으면서 인상 깊게 남은 법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검찰공화국, 대한민국>은 이승만 정권부터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오욕으로 점철된 검찰의 역사를 밝히고, 21세기 들어 본연의 책무를 넘어 국민 여론의 심판관으로 행세하며 임기도 없는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미 궤도를 이탈한 검찰 권력을 통제할 방안을 이야기한다. 법무부의 탈검찰화, 법무부장관의 수사지휘권 폐지, 대검 중수부 폐지, 검찰권 분권화, 검찰에 대한 시민 감시와 사법적 통제, 감찰권 강화 등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검찰 권력이 더는 폭주하지 않도록 제어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검찰을 생각한다>는 문재인, 김인회 두 저자의 국회의원 출마 선포용 책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재인 씨의 검찰개혁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어 읽은 것이다. 저자들은 검찰개혁을 정부의 첫 개혁과제로 할 것을 제안한다. 검찰개혁의 주요한 과제로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 권한의 분산과 견제, 감시 시스템 마련을 제안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의 신설, 검경수사권 조정, 법무부의 탈검찰화, 검찰의 과거사 정리, 검찰행정에 대한 시민의 직접 참여, 검찰의 인권 친화적 개혁 등이다. 아쉬운 것은 저자들이 참여정부의 검찰개혁이 성과적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부분과 개혁실패에 대한 책임을 정권 주체가 아니라 검찰과 열린우리당 등 외부에게 전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권력기구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위 두 개의 책은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검찰 관련 문제만 다룬 것들이라 사법부를 포함한 사법권력과 기타 국가권력기구 관련한 책을 찾게 된 것이다.

최재천 의원은 사법부와 사법체계 그리고 사법권력에 대해 많은 정보와 적절한 관점을 제공해주었다. "왜 법률가들이 헌법 해석을 독점하는가?"라는 그의 문제제기는 사법부에 대한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선 심판과도 연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788 참조)


최재천의 문제의식과 개혁방향은 헌법의 취지와 민주공화국의 개념에서 상식적으로 출발한다. 인민주권 원리의 민주공화국에서 입법부, 행정부와 달리 사법부는 인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것과 인민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라는 점에서 사법부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시작되는 것이다. 헌법 중 사법부에 대한 조항은 민주공화국의 취지에 부족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대법원이 정의와 인권의 보루가 되지 못하고 권력과 기득권에 물들면서 권력과 기득권의 편을 들고 있으며, 갑자기 '관습헌법'을 도입하는 등 헌법에 대한 해석을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법률가 몇몇이 독점하는 것이 바로 헌법의 위기요, 민주정치의 위기요, 공화정치의 위기라는 것이다.

그는 사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임을 스스로 자각한다면, 주권자인 인민들로부터 신뢰받고 통제받을 수 있도록 자신들이 인민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며, 적어도 인민들에 의해 선출된 권력인 입법부와 행정부에 의해, 특히 입법부와 시민단체에 의해 견제받을 수 있는 장치를 고민해야 함을 지적한다.


검찰에 대한 그의 평가와 처방은 <검찰공화국>이나 <검찰을 생각한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글렇지만 그는 제도적인 개혁만이 아니라 문화적, 철학적 토대를 지적하고 검찰과 정치권의 '사법을 통한 정치'와 '정치의 사법화'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또한 정치적 목적으로 헌법상 표현의 권리를 침해하고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국가보안법을 악용하는 검찰의 행태를 통해 '사유화한 검찰 권력'의 비굴한 모습을 비판한다.


사실 이 책은 사법권력만 다룬 것은 아니다. 최재천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에 자신의 블로그와 언론에 기고한 글을 묶은 것(이것도 출마용? ^^)이기에 사법권력에 대한 내용 이외에도 정치, 외고, 군사,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대한 그의 관점과 주장이 담겨 있다. 다른 분야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그가 단순히 헌법학자나 변호사가 아니라 

특히 '작전지휘 통제권이 없는 한국군(세부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798 참조)'에서 그는 나무랄데 없는 군사외교적인 식견을 보여주었고, '로스쿨이 몰고 오는 법학의 위기' 등 몇 개의 글에서 로스쿨의 현실과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윤리적’ 책임 대 ‘법적’ 책임에 대한 그의 고민이 느껴지는 글도 있고, 6부 '그들만의 교육리그'에서는 한국 제도교육 전체의 문제점을 깊이있게 다루었다.


국내의 현실 정치인 중에서(법조인 출신이든 아니든) 최재천 만큼의 헌법과 법치주의, 인권과 민주공화국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직접 실천하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뽑기도 힘든 것 같다. 그만큼 최재천은 법조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괜찮은 인재라 할 수 있다.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 나아가 헌법재판소장까지 횔동하면서 한국 사법부에 개혁을 일으키고 정착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무능하면서도 종파적, 보수적인 민주당 안에서 소외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현재 민주당 전략홍보본부장 직책을 맡고 있지만..) 민주당은 공정하고 민주적인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주권자들과 접촉 기회를 넓히고 자신의 지역구와 지지자들과 함께 '인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하여 정당의 특정세력에게 희생되지 않고 스스로 '주권자와 함께 주권자의 대리인'으로 살아남기를 바란다. 나도 그를 응원할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우리 사회야말로 사법에 대한 헌법적 통제, 민주적 통제가 강력히 요구된다. 좋은 헌법이 있으면 뭐 하나. 헌법을 민주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불행하게도 일부 법률가들의 ‘개인적’ 양심에 의지해야 한다면, 그리하여 지극히 반 헌법적으로 해석되고 그 해석이 우리 사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헌법의 위기요, 민주정치의 위기요, 공화정치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결국 권력에 대한 견제의 문제요, 국민주권의 실천 문제다. 사법부의 권력도, 헌법재판소의 권력도 당연히 헌법의 범위에서, 국민주권의 범위에서 견제되어야 하고 헌법적 책임의 원칙은 정밀하게 작동되어야 한다. 독립성을 독점성으로 오해하는 이들, 독립성을 책임 회피의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 또한 헌법적 책임과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서 결코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그래서 헌법적 책임, 사회적 책임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 2014년 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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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 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
J K 깁슨-그레엄 지음, 엄은희.이현재 옮김 / 알트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서평] J.K 깁슨 - 그레엄(J.K Gibson Graham) 저, 엄은희/이현재 역 <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 : 여성주의 정치경제 비판 >을 읽고 / 2013. 11., 427, 알트

저자들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자본주의를 경제의 자연스러운 지배적 형태로, 혹은 사회적 공간과 동격으로 공존하는 완전무결한 경제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사고방식이 사람들의 변혁(혁명) 열망을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 규명(p.09)"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런 사고방식의 언저리에 머무르는 한 비자본주의적인 발전 프로젝트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늘 자본주의의 작은 틈새나 미래에 위치한 불가능한 것으로, 아니면 그저 미숙한 예측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염려했다. 달리 말하면, 그런 프로젝트들은 하찮은 주변으로 밀려나 '차일피일의 정치'에서나 목청을 드높이게 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 상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담론과 이론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지구촌 지배'를 더 공고화시켰다고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맑스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자본주의를 비판해 오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 비판의 담론이 자본주의 옹호의 담론 만큼이나 자본주의를 막강하게 묘사하고 그 힘을 강화시키는 전제와 논리들을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깁슨-그래엄에 따르면, "비판담론이 체제옹호 담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통일된 힘으로 묘사하는 한, 우리는 이 담론 안에 갇힌 채,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해 치를 떨며 분노를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지배를 극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해결방향은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담론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열정 속에서 분노를 해소시키는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즉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형식의 공존과 다양한 계급과정들로 분석한다.

자본주의 비판 담론이 자본주의 체제 옹호에 기여했다는 깁슨-그래엄의 문제의식은 신선하면서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근본주의, 제국주의 또는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담론은 자칫하면 우리가 풀어가야 할 상대 또는 숙제를 너무나 거대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깁슨-그래엄이 새로운 담론을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여성주의적' 관점이었다. 
기존까지 정치경제학자들이 다루는 경제는 시장과 화폐교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공적' 경제활동 즉 남성 중심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중심으로 규정되었고 이런 점에서 여성적 혹은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되는 가정경제는 담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깁슨-그래엄은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가정경제를 또 하나의 경제형식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가정경제 뿐만 아니라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로 확장시킨다.

이와 같이 깁슨-그래엄은 기존의 자본중심적 경제담론을 자본주의적 방식과 비자본주의적 방식의 경제형식이 공존하는 사회경제 체제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나서 자본주의 마저 하나의 통일된 형태가 아니라 여러가지 경제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기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경제담론의 '총체성'과 '단수성'과 '통일성'을 해체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라,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결국 깁슨-그래엄의 경제담론 속에서 자본주의는 다양한 경제형식 중의 하나로만 존재하게 된다. 또한 깁슨-그래엄의 비자본주의 역시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라,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게 된다.

두 번째 분석틀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계급 모델, 즉 부르주아지 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다. 
앞에서 깁슨-그래엄이 위에서 사회경제체제를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형식의 절합으로 설명하였기에 계급분석 역시 다양한 게급적 특성들이 그 생산-분배 과정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계급성은 복합적인 과정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계급과정이 단면이라는 것이다.

역자의 후기에 의하면, 깁슨-그래엄의 이론은 구성주의적 분석논리와 계급과정의 모호성 등 여러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제기는 정치경제학자들에게 많은 문제의식과 시사점을 던져줄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반화의 오류'나 '구체성의 부족' 그리고 '상상력의 부재'에 대해 돌아보게 할 것 같다.

이 책을 온존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전후까지 이어진 서구 학계의 맑스주의 논의와 여성주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어느 정도는 전제되어야 할 거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대문자 자본주의'와 같은 자주 접하지 않았던 개념과 어휘 그리고 알튀세르나 라캉 등에 대한 사전 학습이 전제되지 않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어떤 추상적 자기유사성에 의해 통합될 때, 하나의 개념 지대가 모순으로부터 해방된다."라는 식으로 번역한 문장이 다수 등장하는데(80년대 이진경 씨류의 문장 이후 처음인듯..ㅋ), 번역이 후지다고 주장하기에는 나의 관련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을 통해 1990년대 이후 계속되는 서구 좌파학계(또는 영미권 좌파학계)의 혼란과 치열함이 느껴진다. 그와 달리 국내의 맑스주의 또는 좌파 학자들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정치권, 학계와 대학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문제인 '학문주체성'의 부재이기도 하지만, 그런 흐름이 사대주의가 무척이나 강한 국내 학계(소위 좌파학계 포함)가 언젠가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라고 느껴지고 국내 좌파 중 일부가 생태, 환경, 여성, 협동조합, 자립공동체 등 분산해 가는 이유 중 하나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 2014년 2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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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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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E.샤츠슈나이더(Elmer Eric Schattschneider) 저, 현재호/박수형 역 < 절반의 인민주권 The Semisovergreign People >를 읽고 / 2008. 11., 243쪽, 후마니타스

미국 정치학계의 거장인 슈나이더는 최장집, 박상훈 등 한국 정치학계와 정치전문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마 정치학 전공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온 전공자들이나 정치를 배우러 미국에 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자주 접했던 인물이자 이론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슈나이더의 대표적인 정치 관련, 특히 정당에 대한 저서라 할 수 있다. 그는 '갈등이론'의 창시자이자 전문가다. 그는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등 많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갈등이론'이란, 갈등이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의 토대이며, 정당 간 경쟁이 갈등의 사회화를 통해 정치참여의 범위를 확장시킬 때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자기 권리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정치이론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고전적 해석과 다르다. 그는 '인민주권' 즉,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정의가 원래부터 환상일 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적용 불가능하다고 규정한다.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 사회와 달리 근대 이후 인류사회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에 한꺼번에 정치에 참여할 수도 없으며, 너무나 복잡하고 정치적 현안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든 정치현안을 쫒아갈 수 없고, 노예제에 뒷받침 되어 있던 그리스 사회의 시민과 달리 근대 이후의 시민은 먹고 살아가기도 빠듯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현대의 정치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인용한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협력의 한 형식이다."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현대 정치체제에 지도자가 필요하며, 직접 민주주의 대신 대의제 민주주의를, 참여보다는 선택을 더 많이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절반의 인민 주권"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 같다.
다시 말해 현대 국민국가의 민주주의는 "지도자들과 조직들이 공공정책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경쟁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일종의 경쟁적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나는 갈등이론에 대한 의견 이전에 샤츠슈나이더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와 현실 분석에서부터 동의하기 어려웠다.
먼저 현실 분석과 관련해서 보면, 현대 사회가 인구가 많은 것은 완벽한 인민주권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운 조건일 뿐이지 그 자체가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국가로서 중앙집권 시스템이나 인구의 규모가 문제가 된다면 지방분권과 의사결정 및 집행을 작게 나누면 되기 때문이고, 대의제가 문제가 아니라 대의제에 선출되는 대리인부터 인민주권이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즉 우선 중요한 것은 인민주권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국민국가라는 규모가 중요한 것이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국민국가로서의 크기가 중요한 당사자는 평범한 인민들이 아니라 사회규모를 키워 정치경제적 사적 이익을 확보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이나 관료일 뿐이다.
현안이 많고 복잡하다는 현실 역시 인민주권의 원리를 부정해야 하는 이유는 안될 것이다. 소위 전문가나 정치가라 하더라도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많고 복잡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그런 사실에 대해 저자도 책 속에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민주주의를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보통의 인민을 '무지'하다고 단정짓는 엘리트주의와 '진문가'들이 무언가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편견이 작용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의 시민은 먹고 살기 빠듯하다는 현실 분석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과 생산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본가의 착취, 수탈, 독점 체제라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암묵적으로 전제, 긍정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대안의 사회경제 체제가 아니더라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 또는 복지국가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보통의 인민들이 8시간 노동으로 충분한 소득을 올리고 여가를 즐길 수 있고 그 여가를 활용하여 얼마든지 정치적 현안에 대해 학습하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논리가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샤츠슈나이더는 위와 같은 현실 인식과 전제를 토대로 삼기 때문에 '인민주권'이라는 고전적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절반의 인민주권'을 제시한 것이다. '절반의 인민주권'도 표현만 인민주권일 뿐, '무지한 사람들의 동의에 의한 똑똑한 전문가의 통치'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것이고, 사실상 인민주권 즉 인민에 의한 통치를 포기하는 셈이다.

인민주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샤츠슈나이더는 갈등과 경쟁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정치를 해석하려 했고,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이 서로 비슷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서 '갈등이론'은 사회경제 체제나 구조를 분석하려 하지 않고 인류사회에 보편적으로 또는 특수하게 존재하는 여러가지 갈등을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에 필요한 요소로 도입하게 된다. 어떤 인간 사회든, 인간집단이 존재하는 한 사적 갈등이 존재하는 것이고 사적 갈등에 대한 이해관계자가 늘어나 사회적 갈등으로 커지면 그 때 정치와 국가가 개입한다는 것이 갈등이론의 기본 맥락이다. 여기서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국가권력을 다투는 기구 내지 조직으로 정당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의 과정과 결과는 모두 이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이론을 체계화하고자 한다. 여기서 갈등을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은 갈등의 범위, 갈등의 가시성, 갈등의 강도, 갈등의 방향이다. 그리고 정당의 정치 전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갈등의 차원이다. 갈등의 대체 혹은 치환, 즉 갈등을 불러들여 기존 갈등을 대체하는 것이 정치 전략의 핵심 중의 핵심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에서 리더쉽과 지도자 문제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저자는 미국 정치에서 투표 불참자(미국의 투표 불참자는 청년, 빈민, 소수인종에 집중되어 있음)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정당들이 대안을 정의하고 갈등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점차 나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1970년대 미국 정치, 정당의 한계는 21세기 들어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토대를 생략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구조와 관계 없는 보통의 갈등을 정치와 정당의 핵심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현실적으로 분석해도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경제적 구조일 수밖에 없다. 사회경제적 구조와 토대를 먼저 분석하게 되면 계급계층적 모순과 대립구조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대립구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상관 없이 생산(수단)의 문제, 분배(유통)의 문제, 소비의 문제, 공익의 문제 등에서 나타나게 된다. 생산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문제와 과잉생산이나 과소생산이 문제가 될 것이고, 분배의 문제에서는 초과이윤에 대한 분배나 노동가치에 대한 평가 문제가 될 것이고, 공익의 문제에서는 공공재산이나 국가정책의 방향과 제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관계 없이 어느 인간사회에서나 나타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본권 문제, 인민주권의 절차 문제, 인권이나 자유의 문제, 복지의 문제, 계층의 문제 또한 갈등의 주요한 요소일 것이다.
즉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거한 계급계층적 모순과 대립구조야말로 저자가 주장하는 '갈등'의 원초적인 모습인 것이다. 미국의 광범위한 투표 불참자의 존재는 대안의 정의나 갈등의 조직화가 아닌 해당 계급계층의 대표성 문제가 더 본질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민주권의 문제는 각각의 사회경제적 모순 내지 갈등 구조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자의 대표를 어떻게 선출할 것이냐, 이해관계에 대한 의사표시와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의사결정 방식과 집행방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로 나타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샤츠슈나이더는 현실적으로 이익집단 또는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차별(경제적, 권력적, 시간적, 문화적)이라는 문제는 무시한 채, 현존 체제를 그대로 두고 그 체제에서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근본적, 구조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보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갈등을 사회화시키고 대안을 정의하는 방식에서 정치와 민주주의를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모든 분석과 논리의 전개는 "자유로운 정치체제"와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이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각 계급과 계층의 입장에서 정치체제도 언론도 전혀 자유롭지 않고 일부 군수자본가나 금융자본, 독점자본, 문화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저자의 논리와 대안은 공허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당원이나 의원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각계각층의 이해관계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꾼이나 정치지망생들이 차지한다. 양국의 주권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주부, 노인층, 빈민층 등이 직업이었거나 그들의 대중조직에서 대표로 선출되어 의회(국회)에 진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자 역사이자 구조이다. 
그런 현실과 더불어 자본가, 기득권층의 합법, 비합법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공개, 비공개, 합법, 비합법 정치자금을 동원하여 의회(국회)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언론 또한 기득권층으로서 서로 야합하거나 자본가와 기득권층의 광고수주로 인해 편파적인 의사표시와 정보전달을 할 가능성이 높고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한 조건에서 사회경제 구조와 계급계층의 인적 구성에 맞는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회(국회)나 정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안의 정의나 갈등의 조직화, 사회화라기 보다 먼저 정당 및 정치인의 계급계층별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급선무라 할 수 있다. 보통의 인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위해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런 면에서 기본적인 소득과 사회보장은 인민주권을 위한 민주주의 구현에서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미국 정치사회적 현실과 비슷하거나 미국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은 친일파와 극우보수세력에게 독과점되어 있는 정치체제와 언론이 심각하게 편파적으로 작동하는 한국에 적용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최장집, 박상훈 등 국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치학자나 관련 전문가들이 워낙 '미국통(?)'들이고 미국 정치학에 치중되어 있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저자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정치상황과 정당의 부침에서 이익집단과 정당의 대응, 연방정부의 거대화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 등에 대한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설명하고 있어 그런 부분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 2014년 2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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