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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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백낙청 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읽고 / 2009.08., 403쪽, 창비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중요 주제로 삼은 백낙청 교수의 네 번째 책이다. 백 교수는 1994년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을 시작으로 한반도 분단체제를 주제로 연구 결과물을 발표하였다. 두 번째는 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이고, 세 번째는 2006년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다. 국내 정치학자나 사회과학자 중에서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해 이렇게 수십 년 간 꾸준히 연구하면서 결과물을 발표한 전문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또한 그는 615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로서 활동하는 등 '분단체제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 온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 교수는 전작인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선언하고 한반도의 통일 방식은 흡수통일 방식인 독일식이나, 전쟁 방식인 베트남식, 그리고 상층 일부 정치집단만의 합의 방식인 예멘식도 아닌 제3의 방식일 수밖에 없고, 제3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이 1972년 7.4 공동성명에서부터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로 이어진 한반도식 통일 논의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반도식 통일은 남북이 화해와 교류, 협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 양측 정부 당국뿐 아니라 시민사회세력이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가운데 - ‘시민참여형 통일 - 시나브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다.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 출간된지 3년 후에 발간되었다. 2007년 6.15 공동선언을 기반으로 하여 남북의 정상이 10.4 남북공동선언을 재차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의 한반도 상황은 여러 가지로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2008년 극우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 이후 촛불시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북의 2차 핵실험 등 파국으로 내닫는 혼미한 정국 속에서 대한민국은 경제, 민주주의, 남북관계에 걸쳐 심각한 위기상황을 겪고 있었다.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긴장과 갈등은 커졌고, 그 여파로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도 불안정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주도해야 할 남측에서 6.15 공동선언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오히려 남북 대결을 추구하며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에 앞장서고 있었다.
저자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악화된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로 인해 자신이 견지해 온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한반도식 통일’에 대해 시민사회 여러 곳에서 터져나오는 우려 섞인 절망적인 분위기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 및 시민운동가들과 가까웠던 저자는 서문 ‘시민참여 통일과정은 안녕한가’에서 먼저 시민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국내 시민단체들이 "남한 사회의 특정 개혁과제에 몰두해온 것은 시민운동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시민운동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유달리 시야가 좁아진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면 개혁과제에 골몰하는 ‘시민적’ 관심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통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한반도적 시각의 부재는 시민운동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민중진영’에서도 "지나치게 반북적이거나 상당수 진보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의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을 공유하는 정파가 엄존하며, 한반도적 시각을 강조하지만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심지어 북측 당국의 해법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다른 한 정파와 묘한 짝을 이루고 있다”(19쪽)고 평가한다. 그리고 시민운동에서 한반도적 시각이 부재한 이유는 “민중적 의제, 민중적 정서에 대한 시민운동가들의 거리두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시민운동은 도덕적 순수성이 생명이긴 하지만 활동가들이 손에 때묻히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자기 운동만 하려는 일종의 결벽증을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6월 항쟁 이후로도 여전히 협소할 수밖에 없었던 활동공간에 알게모르게 순응해온 결과요 87년 체제의 수혜집단으로서의 타성이랄 수 있다”(20쪽)고 지적한다.

저자의 지적과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최소한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의 헤택을 누리지 못하면서 OECD 국가 중 최악의 사회적 현실에 직면해 있는데,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중산층과 고학력, 기술자 계층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도, 생존도, 평화도 위협받는 한국사회의 현실이 분단체제라는 엄존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에 치열하지 못한 채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환경운동, 마을운동, 생태운동 등에만 집중하는 시민단체는 오히려 중산층 이하 민중들에게 위화감과 적대감만을 양산시키고 있음을 느낀다. 
‘회원 없는 시민단체’, ‘회비만 걷어 활동가만 활동하는’시민단체’, ‘정치에 입성하기 위한 시민단체’라는 지적과 비난에서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수의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게 나타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시민단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2008~2009년의 제3차 북핵위기의 특성을 ‘남한발’이라고 규정짓는다. 2009년 상황은 북미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바마 정부의 선제적 대북강경노선 탓이라기 보다 다분히 남한 정부가 남북갈등을 선도한 데에 따른 위기로 분석한다. “이명박 정부가 6.15 선언을 존중하고 10.4 합의사항 이행에 성의를 보였다면 애당초 제3차 핵위기 자체가 없었으려니와, 최근 위기의 진행을 보더라도 한국 정부의 태도가 사태악화에 얼마나 큰 작용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27쪽)
이런 저자의 분석과 평가는 북핵 위기를 무조건 북측 정권의 책임이라고 단정지으면서 미 행정부나 극우보수 세력의 반북 공세에 편승하려는 국내 시민사회 진영 일부와 진보진영 일부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행보와 대비된다.
6.15, 10.4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긴장 사태가 악화된 것에 대해 저자는 “분단체제의 속성상 적어도 ‘제1단계 통일’로써 그 극복의 길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남북화해를 역전시킬 수 있는 동력과 매커니즘이 내재하기 때문”(35쪽)이라 평가한다. 그의 ‘분단체제론’인 87년 체제가 53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결상태의 재연이 분단체제의 재고착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안정회복을 꿈꾸는 인사들이 남북간에 적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은 세상의 변화를 무시한 일방적인 꿈일 뿐이다.”(35쪽)고 주장한다. 그가 전제하고 있는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큰 구조와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잠시 언급한 ‘변혁적 중도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장한다. 그가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창하는 이유는 “‘중도’가 아니고서는 광범위한 연대가 불가능한데다가, 무원칙한 ‘중도 마케팅’이 아닌 줏대 있는 중도세력이 되려면 한반도 차원의 변혁과 국내의 개혁작업을 결합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혁’의 핵심은 1980~90년대식 혁명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변혁’에 가깝다.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굳이 안 쓰고 그 개념을 명시적으로 공유하지 않더라도 분단체제의 변혁에 실제로 기여하는 쪽으로 기운을 모을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55쪽)
그렇다고 저자가 ‘변혁적 중도주의’가 쉽게 구현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변혁이 중도세력의 동원과 개혁적 성과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한국사회의 다수가 이런 변혁적인 개혁운동에 합류할지는 따져볼 문제로 남는다.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상당한 수준의 중도 공부와 변혁 공부가 필요할 텐데, 아직도 한국사회, 특히 지식인사회는 참 중도의 연마에 무관심하고 분단체제 극복으로서의 변혁에 대한 인식이 태부족한 경우가 많”(56쪽)기 때문이다. 
그는 2008년의 촛불군중과 2009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을 애도한 대중이야말로 지식인들보다 변혁적 중도주의에 오히려 가까이 다가섰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당시 대중들이 “이명박 정부의 퇴행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할 뿐 아니라, 급진 자주파나 급진 평등파의 주장도 가볍게 일축하는 형국”이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백낙청, 대전환의 길을 묻다>(2015 창비)에서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알게 된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과 ‘한반도식 통일론’은 많은 면에서 크게 공감이 된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지구상 유례가 없었다. 일제 식민지 -> 외세에 의한 분단과 친일파 집권 -> 내전/국제전 -> 분단체제 재구축 -> 사대주의 군사독재체제로 이어지다가 1987년 6월 항쟁과 1990년대 초 동서냉전 붕괴를 통해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세계사적 관점 그리고 한반도적 관점은 국내의 진보민주세력에 중요한 시각이다.
다만, 분단체제 극복과 ‘한반도식 통일’을 ‘변혁’으로 규정 짓고, 이념적 스페트럼이 모호한 ‘중도주의’를 규정짓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변혁과 중도라는 개념이 모두 이전에 사용되는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민주권, 그리고 최소한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백낙청 교수의 사상과 실천이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인상 깊은 문장-

“분단체제가 괴물이란 말을 더러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분단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괴물 하나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성찰하면서, 바깥의 괴물을 이겨내는 일과 내 마음속 괴물의 퇴치를 어떻게 동시에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41쪽)

“핵무기 반대는 대원칙이며 당연히 북핵에 대해서도 끝까지 폐기를 주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반대는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을 동시에 겨냥하는 철저함을 보여야 합니다.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시민사회든 정부당국이든 북의 핵보유를 방지하거나 철회시킬 실력이 없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142쪽)

“근본적으로 북조선은,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베트남이나 중국과 같은 수준의 독자성을 지닌 사회단위라기보다는 한반도 분단체제 속에 포섭되어 있는 매우 특수한 사회 즉 분단사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혁,개방 선계를 그대로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저는 유일한 해결책은 남북연합이라 봅니다. 전혀 다른 두 체제를 무리하게 통일하지 않으면서도 지금처럼 남북이 연합조차 안한 채 분립하는 게 아니라, 북이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최소한의 안정성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필요한 개혁을 하고 개방을 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202쪽)

“분단체제 극복을 역설하며 이 목표를 위해 훌륭하게 헌신해온 통일세력이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도 분단을 의식하기는 하되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반도의 분단이 원래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단체제가 성립한 데에는 한반도 내부세력의 작용도 있었고 전쟁보다는 분단이 낫다는 주민들의 실감도 가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현실에서 이들을 보는 특권층이 남과 북 양쪽에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분단체제의 이런 범한반도적 성격을 무시하고 남녘의 극우세력과 주한미군만 사라지면 자주통일이 된다고 믿는 것은, 북쪽의 정권만 무너뜨리면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공상적이다.”(270쪽)

“진보의 이름을 걸고 전통적 통일운동세력의 진보성을 부인하는 지식인, 활동가, 정치인 가운데도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중 일부는 ‘반북좌파’라 일컬음직한데,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마저 오롯이 북한 정권에게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수구세력의 북한 때리기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분단체제는 한반도의 남과 북 외에 세계체제의 주요 행위자들까지 관련된 복잡한 체제이니만큼 그 특정한 국면에 대한 책임규명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기 마련이다.”(271쪽)

“반북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의 존재를 되도록 무시하면서 남한만의 발전을 꿈꾸는 세칭 진보세력이 의외로 많다. 특히 지식인, 학자들의 세계가 그렇다. 이는 한국의 지식계가 이 땅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박은 공부보다 분단이 없는 외국의 현실에 연유한 이론의 학습과 전파에 치중한 탓이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남북의 점진적 재통합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국가 또는 평등사회의 수립이라든가 남한의 독자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건설 같은 주장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내던지는 사례를 자주 만난다. 이는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이라 부른다.”(272쪽)

[ 2015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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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백낙청 지음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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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백낙청 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을 읽고 / 2006. 05., 284쪽, 창비


‘한민족의 염원’이자 한반도 남북에서 발생하는 주요 문제들의 구조적인 해결방향은 ‘평화적 통일’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독일식도 아니고 베트남식도 아닌 ‘한반도식’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반도식 통일’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것이 저자인 백낙청 교수의 지론이자 전략이자 사상이다. 이 책은 통일담론과 관련한 그의 사회평론집이다.

백낙청은 1980년대 말부터 줄기차게 분단체제론을 전개해 왔고,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제목으로 분단체제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남쪽에서 그것을 받쳐주던 군사독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1999년 이후 저자가 <창비> 등에 발표한 글 중에서 주제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려서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참여정부 중반기의 남북 분단 상황을 점검하고, 이후 남북 관계를 조망하는 글들을 다수 실었다.
그는 이 책에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6.15시대’를 가져왔고 ‘흔들리고 있던’ 분단체제가 드디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백낙청은 이 책을 통해 한반도식 통일이 이미 현재진행형 상황에 들어섰음을 주장한다. 
통일을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국민들이 더 나은 체제에서 살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인식 하에서, 국가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분단체제 극복을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는 저자는 이른바 '6.15 시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전쟁 같은 불가피한 파국을 전제로 하는 일회성 사건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어느 순간 '도둑같이' 찾아올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을 6.15 시대의 목표로 제시하는 등 보다 확장된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NL(민족해방파, 자주파), PD(민중민주파, 평등파), BD(부르조아민주주의, 온건개혁세력)의 3자결합을 제안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나타난 최장집 교수의 시각을 분단시대에 대한 고려가 간과되었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 외에 다국적 민족공동체이자 네트워크로서의 한인공동체 건설에 대한 주장,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체할 '생명지속적 발전'의 제안 등을 담았다.

이 책에서 크게 공감한 대목은 남한-분단체제-세계체제로 이어지는 구조적 연관성과 ‘한반도식 통일’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런 한반도식 통일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분석 결과, 마지막으로 6.15 남북공동선언문 제2항의 중요성이다. 
여기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태생적으로 반민주적이며 비자주적인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남북 어느 한쪽에서도 온전한 민주주으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분단시대에 대한 모든 인식을 낡은 민족주의라고 배제한 채, 대한민국을 ‘하나의 자족적인 국가’로 설정하여 북유럽 또는 서유럽의 선진 민주사회의 척도로 재단할 때, 분단시대와 그에 앞선 식민지시대의 억눌리고 찌든 삶을 딛고 이룩해온 한국 민주주의의 눈물겨운 성취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분단체제의 고착기를 특징지은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이 명쾌하지 못하여 3당합당, DJP연합, 노무현정권의 ‘변형’ 등을 수반하며 구질구질하게 진행되어온 현실은 분단체제의 속성상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 굳이 변형주의라는 외국 문자를 갖대댈 필요도 없다.”(65쪽)

먼저,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서의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분단체제의 하위 구조로서의 남북의 체제’라는 백낙청의 체계 구성은 한반도의 역사적인 과정과 현재 실제로 구성되어 있는 역학구조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관점을 확대시킨다.
남북의 정치체제와 한반도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하위체계라 함은,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양쪽에서 ‘결손국가’ - 이 개념은 ‘정상국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외세에 의해 분단이 강제된 상태에서 독립과 통일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가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평화와 복지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측면을 강조한 개념이다 -가 탄생되고 유지된 이유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간 경쟁과 제국주의(패권주의)와 제3세계 식민지의 저항이라는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대결구도 속에서 외세에 의해 분단이 강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열강과의 협의와 협조, 관계 개선 없이 남북 간의 노력과 합의만으로 분단체제의 해소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분단체제의 해소 없이 남북 각 정치경제체제가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그리고 대다수 민중의 행복한 삶과 자유, 평등, 평화가 이룩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한반도식 통일’이라 함은, 한반도 분단의 주체와 형성 그리고 고착화 과정으로 인하여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독일이나 베트남, 예멘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다른 체제로 흡수되는 독일식 통일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라는 전제와 그에 따라 분단에 이르는 과정에서 독일 민중의 명시적,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서독과 동독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 과정과는 크게 다르고 고착화 과정 또한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적합한 방식이 되기 어렵다. 내전을 통해 일방 체제로의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의 통일 방안 역시 한국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는 한민족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며, 양쪽 정부의 상층부끼리의 담합에 의한 통일 후 합의가 불괴되어 다시금 몇 년간의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룩한 예멘의 통일 방식도 절대 다수의 민중의 동의와 참여 과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식 통일의 사례라 할 수 없다.
백낙청이 주장하는 ‘한반도식 통일’은 '6.15시대’와 같은 남북 화해와 교류, 경제협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수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통일 과정을 의미한다. 전쟁을 통하지 않는 통일, 일방의 이념이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 통일, 최종 목표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 남북의 정부와 정치권뿐 아니라 다수 민중과 한민족 전체가 통일 과정에 주체로 참여하는 통일을 의미한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전인미답의 길이 바로 ‘한반도식 통일’이 될 것이다.
또한 ‘한반도식 통일’은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또 하나의 강국이 탄생할 경우, 설혹 통일 한반도가 자본주의 사회라 한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을까라는 점도 충분히 고려한 통일이 될 것이다.

셋째, 통일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은,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남한의 군사독재 체제의 극복이 분단체제를 ‘흔들게’ 만들었고 6.15 공동선언을 통해 분단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곧 통일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즉 "분단이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각기 사는 곳에서 그날그날 수행하는 크고작은 싸움이 모두 분단체제 극복운동의 내용을 이룬다. 통일작업과 직결된 교류확대라든가 민주적 권리의 확보, 대외적 자주성의 신장 등만이 아니라, 생활현장에서의 성차별이나 인권침해, 환경파괴 등을 제거하고 자기 자신부터 그러한 습성에서 벗어나는 갖가지 실천이 곧바로 ‘과정으로서의 통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일회적 사건으로 이룩되는 분단극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그리고 우리들 하나하나의 마음속에 온갖 형태로 뿌리내린 분단체제의 극복’이기 때문이다.(84쪽)

마지막으로, 백낙청은 6.15 공동선언의 '남다른 의미’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합의하고 서명한 문건”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선언문 제2항이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에 대해 백낙청은 내용이 두루물싱할뿐더러, 남북 각자가 이제까지 배격해온 상대방 제안에 끌려갔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의 애매모호한 표현이야말로 6.15공동선언을 빛내는 대화와 타협의 정신, 실현가능한 방안을 찾아내는 실천적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그는 제2항의 합의정신을 “통일을 하기는 하되 너무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과 어떤 형태의 통일인지를 미리 못박지 말고 지금 가능한 통일작업부터 진행한다”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신뢰구축 작업을 명기한 공동선언 제4항이 비로소 힘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북의 신뢰구축은 통일을 하지 말자고 해도 불가능하고 ?┥爭貂? 통일하자고 외쳐대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통일에 대한 개념’을 바꾸자고 제창한다. "단일형 국민국가로서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남북간의 통합작업이 일차적인 완성에 이르렀음을 쌍방이 확인할 때 ‘1단계 통일’이 이룩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통일이며 언제 통일할거냐를 두고 다툴 것 없이 남북간의 교류와 실질적 통합을 다각적으로 진행해나가다가 어느날 문득, ‘어 통일이 꽤 됐네, 우니라 만나서 통일됐다고 선포해버리세’하고 합의하면 그게 우리식 통일이라는 겁니다.”(21쪽)

이 책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은 백낙청 교수의 2015년 신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2015 창비)를 읽고서 통일담론과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담론의 궤적을 알기 위해 읽은 것이다.
거의 10년 전 저서임에도 남북의 민중 모두의 아픔과 고통을 껴안고 통일담론과 한국사회 변혁담론을 이끌어 가는 백낙청 교수의 열정과 의지가 대단하다. 그리고 고맙다. 평론집 중 통일담론과 관련된 대부분의 내용에 공감도 되었고 배운 점도 많았다. 
다만, 제3부 ’14.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에서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서 박정희를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결과만 좋다면 과정이 어떻게 하더라도 괜찮다’는 관점이 지난 100년 간 한국사를 망쳐왔기 때문이고, 인간의 본성에도 한국 민중의 성과와 고통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기고 싶은 문장]

“선진국이라면 PD와 NL만의 ‘변증법적 결합’을 꿈꾸어봄직하지만, 분단국가에서 분단시대에 대한 인식, 그런 의미에서 ‘NL적 시각’이 빠진 상태로는 탁상공론에 가까운 사민주의 이외의 ‘결합’을 생각하기 힘들다. 다른 한편 PD를 배제한 NL과 BD만의 결합은 민족주의 과잉의 통일 이외의 어떠한 변혁전망도 제거된 반민중적 노선이 되기 십상이며, 그렇다고 NL과 PD의 ‘재결합’ 또한 당위론에 불과함은 민주노동당 및 민주노총 내 양 정파의 ‘내분에 시달리는 동거’가 잘 보여준다. 내분의 ‘재봉합’이야 물론 가능하겠지만, 국민의 신뢰를 얻고 한국 민주주의의 발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면 개혁정권 및 온개혁세력과의 좀더 확실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책적으로도 연합하면서도 자신을 차별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내분’이 ‘건강한 의견차이’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해줄 공감대가 바로 분단체제극복이 현시기 최대의 변혁과제인 동시에 남한사회의 구체적 개혁작업이기도 하다는 인식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장치가 곧 분단체제이고 남북 각기 상대적인 독자성을 갖는 사회이긴 하지만 분단체제의 매개작용을 통해 세계체제의 규정력을 받영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는다면, 자주통일론과 세계적 시각을 지닌 계급운동은 한국사회의 구체적 개혁과정에 촛점을 둔 시민운동 및 개혁정당(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68쪽)

“북핵문제 자체에 관해서는 위라가 정부 차원이건 시민사회에서건 할 수 있는 일이 엄연히 한정되어 있다. 핵무기를 배발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북이며, 이러한 북을 공격해서 파멸시킬 수도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그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미국이기 때문이다. 두 당사자 모두에게 한국의 입장은 절대적인 변수가 못 된다.
그 점에서 ‘민족공조’든 ‘한미동맹’이든 모두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이 대등한 맹방이 아님은 너무나 뻔한 사실인에다 오늘날 미국과 대등한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마당에, ‘한미동맹’을 절대시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맹종을 서약하는 행위 밖에 안 된다. 다른 한편 북측의 핵개발 문제를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북의 안전을 담보해줄 능력도 없는 마당에 ‘민족공조’를 절대시하는 일 또한 허황되고 무책임한 처사가 되기 쉽다.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단호하고 지혜롭게 해나가야 한다.”(238쪽)

[ 2015년 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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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개럿 하딘(Garrett Hardin) 저 <공유지의 비극 The Tragedy of the Commons > 1968년, 사이언스지

필자가 ‘공유지의 비극’을 접한 것은 경제학과 관련해서였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개념은 '지하자원, 초원, 공기, 호수에 있는 고기와 같이 공동체의 모두가 사용해야 할 자원은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 두면 이를 당세대에서 남용하여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다’는 정도의 내용으로 통한다.
따라서 이는 시장실패의 요인이 되며 이러한 자원에 대해서는 '국가의 관여'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해당사자가 모여 일정한 합의를 통해 이용권을 제한하는 제도를 형성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 UCSB 생물학과 교수인 개럿 하딘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논문(http://www.sciencemag.org/content/162/3859/1243.full)의 제목이다. 실제로는 과학 잡지에 실릴 정도의 논문이라기 보다 짧은 에세이라고 한다. 한글 번역본도 본문이 11쪽 정도 밖에 안 될 정도로 짧다.

그렇지만 이 짧은 에세이가 불러온 파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공유지의 비극〉은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고 명쾌한 비유였으며, 여러 학문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훌륭한 예시였기 때문에 생태학과 경제학, 사회학 등 온갖 학문의 논문에서 수시로 인용되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The tragedy of the commons(Hardin) 은 무려 24,541회나 다른 논문에 인용되었다고 한다(2014년 10월 기준). 논문이 아닌 곳에서 언급된 것까지 합치면 진짜 어마어마한 인용수를 자랑할 것이다.

하딘의 이론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공유지를 이용해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있는 유럽 어느 장원과 관련된 한 예제이다. 이 예제는 1833년 경제학에 대해 글을 쓰던 윌리엄 포스터 로이드의 팜플릿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딘의 예제에서 목동들의 관심사는 과밀방목으로 인해 공유지가 손상될지라도 소를 공유지에 집어넣는 것이다. 
100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는 제한된 공유지에서, 100 마리 이상의 양을 기르면 결국 목초지는 과도하게 풀이 뜯겨 재생산이 되지 못하고 점차로 황폐해져 간다는 것이다. 축산업자들은 너도 나도 공유지를 이용할 것이고, 자신의 부담이 들지 않는 공짜이기 때문에, 공유지에 양을 계속 풀어 놓기만 하지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풀이 없어진 초지에는 양을 기를 수 없어 축산업자들 전체가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개인들의 이익 추구에 의해 전체의 이익이 파괴되어 공멸을 자초한다는 개념이다.

〈공유지의 비극〉 이전에 배경이 된 책으로 꼽히는 작품이 있는데, 역시 생태학자인 레이철 카슨이 1962년 발간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다. <침묵의 봄>은 '사람들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DDT를 남용하고 있고, 이 결과로 본래 의도했던 잡초나 병충해의 제거 수준을 넘어서 모든 곤충과 나아가 조류와 동물들까지 모두 사라지고 생태계가 파괴되어서 봄이 와도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황을 우화로 묘사'하고 이것이 우려만이 아니란 것을 실측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의 환경운동과 환경윤리학의 시초가 된 책으로,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 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하딘의 경우는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환경파괴'라는 구조를 '개인들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경쟁적 환경파괴'로 변경시키는 것으로써, 개인의 문제에서 '개인간의 경쟁'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부각시킨 것이다.

하딘이 ‘공유지의 비극’을 기고한 후 전세계의 많은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 그리고 시민들과 정치가들이 널리 알렸던 것은 인류의 숲과 공기와 물과 바다의 남용에 대해 어느 정도 견제를 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구상 곳곳에서 숲과 밀림은 파괴되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고 있고, 각종 생물체는 멸종하고, 화석연료와 핵연료 등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는 파괴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인류 전체의 아니 지구상 생명체 모두의 ‘공유자원’임에도 말이다.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공유지의 비극’이 음으로 양으로 지속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근본적 문제점, 다양한 갈등과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동안 지구촌의 리더를 자임했던 국가들과 정치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국가 권력의 크기와 경제적 부의 크기와 자본주의 체제를 운용한 역사에 비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려는 마음가짐은 인류의 후세대와 다른 생명체, 그리고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유한한 생명체로서 인간의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다. 각각의 개인에게도 필요하겠지만, 지구 곳곳에서 이윤 만능, 성장 만능, 개발 만능의 정치경제 체제, 사회문화 체제를 변혁시켜야 가능할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중 서른 아홉 번째이다.
<공유지의 비극>의 한글번역본 전체는 http://blog.daum.net/hy2oxy/8692910 를 참고.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나머지가 궁금하신 분은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1816296 를 참고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 2015년 9월 18일 ]


개렷하딘, 공유지의비극, 시장, 국가,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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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의 길 - 10.4 정상선언 주역들이 말한다
김만복.백종천.이재정 지음 / 늘품(늘품플러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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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참여정부 후기 외교안보통일 관계자인 김만복, 백종천, 이재정의 < 한반도 평화의 길 : 10.4 선언 주역들이 말한다>를 읽고 / 2013. 03., 449쪽, 늘품플러스

이종석의 <칼날 위의 평화>와 김종대의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로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을 돌아본 후, 이어서 참여정부와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을 비교해볼 수 있는 책을 찾아보았고, <한반도 평화의 길>을 골랐다.

저자인 김만복, 백종천, 이재정은 참여정부에서 각각 국정원장, 안보실장, 통일부 장관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남북 정상선언을 이끌어낸 실무주역들이다.
김만복은 유신독재 시대에 공채로 국정원에 들어간 후 외교관을 지냈고, 백종천도 유신독재 시대에 육사를 나와 육사에서 교육을 담당한 바 있다. 이재정은 성직자, 교육자, 정치인이라는 여러 분야에 종사한 후 현재 경기도 교육감이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가 막 집권했던 2013년 초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하면서 대북정책에 대해 집권 세력에게 조언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의 길>을 출간했다. 특히 어자들은 이 책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과 10.4 남북정상선언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최초의 책으로 회담 전체의 실체를 밝혔다고 자평한다.
이 책의 공저자인 3인이 모두 정상회담의 전후과정은 물론 정상회담장에 배석했던 책임자로서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2013년은 한반도에 정전협정이 발효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평화체제와 평화협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남북관계의 이정표를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원칙을 만들었다면, ‘10·4 남북정상선언’은 그 원칙을 이행할 수 있는 실행도구다. 그리고 그 성과는 차기 정부가 남북 간 합의사항을 얼마만큼 지키느냐의 문제로 넘어갔다. 과연 남과 북은 ‘한반도 평화’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평화의 결실을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반도 평화의 길: 10·4 정상선언 주역들이 말한다]가 바로 그 결실의 출발점이다.”(서문)

저자들은 이 책에서 먼저 1953년부터 현재까지 역대정권에서의 남부관계를 개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평가한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역점을 두어야 할 남북관계 발전방향과 과제를 제안한다. 3명의 공저자가 분야별로 나누어 집필하였다. 
제1부는 남북관계의 지향 목표와 남북관계 역사 개관(김만복), 제2부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과 집행결과 평가(백종천), 마지막 제3부는 향후 과제(이재정)로 구성되어 있다.

‘남북관계의 지향 목표’에서 김만복은 “남북관계의 궁극적 목표가 평화적 통일”이라고 규정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거의 대다수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분단된 지 이제 70년이 다 되어 가며, 냉전이 종식되고 독일이 통일된 지도 벌써 20년이 흘렀다’면서 그러나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의 고도로 남아 있다”고 진단한다. “21세기 탈냉전, 탈이념, 글로벌 시대에 유독 한반도에서만 냉전적, 이념적, 군사적 대결이라는 시대착오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당면 목표를 "‘평화적 통일’이라는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와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남북이 화해,협력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 ‘남북경제공동체’를 구축하며 이를 토대로 ‘사실상이 통일 단계’인 ‘민족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평화적인 통일’ 기반을 조성해 나가는 데 두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김만복이 남북관계에서 평화적 통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고 ' 평화체제와 평화협정’이 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인지 그 이유를 세세하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간단하게 ‘시대착오적인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아마 자세한 이유와 설명을 덧붙이기에는 이 책의 발간 목적에서 약간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통일외교안보 분야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저자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유’ 또는 ‘필요성’을 설명하는 내용을 어느 정도 할애해야 했을 것이다. ‘당위’와 ‘상황’으로는 남북관계와 같은 거대하고 민감한 주제를 받아들이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개선과 평화적 통일은 시대적 상황과 민족적 당위라는 거시 담론을 뛰어넘어 당장 한반도 남북의 주권자인 국민(인민)들이 분단체제와 남북대결로 인해 삶의 질이 낮아지고 미래에도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의 역사 개관’에서 김만복은 1953년 이후 남북관계를 7단계로 평가했다. 1단계는 1953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의 ‘적대적 대결기’, 2단계는 1970년대 초부터 1973년 8월까지의 ‘대화 모색기’, 3단계는 1973년 9월부터 1970년대 말까지의 ‘냉각기’, 4단계는 1980년 2월부터 1992년 9월까지의 ‘대화 추진기’, 5단계는 1992년 10월부터 1998년 2월까지의 ‘정체기’, 6단계는 1998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화해,협력기’, 마지막 7단계는 2008년 3월 이후 현재까지 ‘경색기’다. 냉전 구도와 외세의 입김을 극복하고 박정희 정권의 7.4 남북공동성명에서부터 10.4 공동선언까지 그동안 남북 사이에 공감하고 합의했던 각종 의제들을 추진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를 달라졌을 것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출간일은 2013년 3월인데, 박근혜 정부 등장이후부터 2015년 8월인 현재까지도 ‘경색기’는 이어지는 것 같다. 물론 그 사이에 남북관계는 경색 중에도 작년 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단이 참여하고, 올해 광복70주년 민간단체 주도의 남북공동행사 추진을 위한 대화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과 집행 결과에 대한 백종천의 평가는 예상대로다. 이미 이명박 임기 중 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국내외 전문가들과 학자, 정치권과 언론에게 ‘실패’이자 ‘후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백종천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시한 ‘비핵,개방,3000’이라는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부터가 허구적이었으며, 이는 남북관계와 관련한 통치철학이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그 출발점은 이명박 정부의 ‘북한붕괴론’에 기초한 대북한 인식의 오류였고,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임기 중에 수립한 대북정책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는 집권 초기에 취한 청와대 내 통일외교안보 조직의 해체에 따른 ‘컨트롤 타워’의 부재도 큰 기여를 했음을 지적한다. 정치적 동기에서는 소위 ‘ABR(노무현 정부의 정책 부정)’에서 비롯되었다.
한 마디로,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장기적, 근본적 목표를 향해 전진하기는 커녕 당면 목표마저 후퇴시키며 민족과 역사에 대역죄를 저지른 셈이다.

1004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공저자들의 평가는 무척 높다. 615 공동선언에 기반했기 때문에 1004 공동선언에서 많은 세부적인 내용들을 합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노무현 정부의 임기 말인 2007년 10월에 남북정상회담을 실시했다는 것이 여러 가지 단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2007년 12월 대선에 영향을 끼치려는 정치행위”로 해석하는 보수진영의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남한의 정치사회 성격상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실시된 남북공동선언은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대북정책과 정상회담 추진에 대해 국회와 언론, 시민사회진영과 사전에 교감하여 조율한 것도 아니었고, 대선에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승리한(승리를 예상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을, 그것도 남북관계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정책사안의 실행여부는 추진 과정과 방식에 따라 여당의 승리 여부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노무현 정부와 이 책의 공저자들이 너무 순진하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이재정은 제3부 ‘향후 과제’에서 박근혜 정부 초기의 대북정책 추진환경을 분석한 후, 대북정책 추진방향 - 3대 목표, 6대 기조, 5대 추진 원칙 - 과 분야별 우선추진 과제를 제시한다. 평화정착, 공동번영, 민족공동체 형성 분야 등 3가지 분야별로 총 19개 우선 추진과제다. 추진과제가 다채롭고 기발하다. 615, 1004 공동선언을 토대로 한다면 당장이라도 실현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별도로 대처 방향을 제시한다. 먼저 그는 북핵문제가 “국제문제이자 남북문제”라는 점을 환기시킨 후, “이명박 정부가 북핵문제를 남북문제로 보고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북한의 핵무장을 방관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대원칙 아래에서 “북-미협상과 6자회담 등 국제적 해결의 틀과 남북대화라는 ‘투 트랙’ 전술을 유연하게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방향을 제시한다.

이재정이 박근혜 정부에게 제안한 남북관계 정책방향과 과제는 대부분 남북관계의 궁극적 목표와 당면 과제를 잘 짚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를 지나며 평가하자면 이명박 정부보다 심각할 정도로 통치철학도 없고,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정책과 전략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실효성은 없을 것 같다.
다만, 이재정이 제안한 정책방향이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외교적 목표나 목적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백종천이 제2부의 중간에서 지적했듯이 2010년부터 미국 행정부의 북핵 대처방향이 ‘비핵화’에서 ‘핵확산 금지’로 선회하고 있다는 정황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북한의 목표와 태도 역시 ‘핵확산 금지 합의를 통한 체제보장과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나 미국의 전략, 목표가 그렇다면 남북관계의 지향점이 큰 방향에서 재점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남북관계에서 해결할 지점은 ‘북핵’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에 분단체제의 극복과 평화적 통일을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산더미처럼 많다. 1953년부터 2007년까지 남북이 합의한 사안들에 북핵 문제도 없었다. 남한은 이미 지구상에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과 수교를 맺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핵무기는 오히려 제3차 세계대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방패막이가 되었다. 따라서 분단체제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조성되는 군사적, 정치적 긴장을 해소하고 남북이 대화를 통해 화해,협력을 본격화하고 남-북-미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상호 공존에 나선다면 북한의 핵무기는 당분간 문제될 것이 없다. 어차피 지구상의 핵무기는 한꺼번에 단계적으로 위협을 제거해야 할 것이므로..

이재정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리고 “교류협력의 가치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 더 나아가 “경제협력이 평화를 이룩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하는가”라는 점을 알게 되기를 바랬다.

[ 2015년 8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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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 - 반성과 성찰의 기록
신석진 외 지음 / 생각비행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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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진보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고 보수가 `개인 내지 패거리 이익에 대한 집착`이라 할 때, 200년대와 달리 최근 몇 년간의 진보는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면서 거대양당의 무능과 부패를 견제하지 못했다. 한국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진보에게 필요한 반성과 성찰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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