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90년대 초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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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흥건한 피와 처참한 패배주의로 시작된다. 하지만 민중들과 새로운 세대는 한국전쟁 후 한 세대에 걸친 선배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가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일구어낸다.
비록 1987년 양 김씨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로 인해 외세의존적인 군사독재 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1990년 또다시 김영삼 등의 배신으로 보수대연합에 국가권력을 찬탈당하지만, 민중들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서서히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 박세길은 1941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한민족 말살책동, 이에 굴복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절과 친일행위를 딛고 중국과 만주, 국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여 8.15 해방에서부터 굴곡되고 ??겨진 한민족의 삶을 다루었다. 북한의 역사 또한 공개된 자료와 정보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다루었다.

박세길의 한국현대사 서술 관점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던 한민족 전체의 관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관점, 지배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의 입장이 아닌 민중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사 교과서나 언론, 주류 지식인들이 감추거나 외면했던 남북한 전체의 모습,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의 음모와 움직임, 민중들의 역동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에서 1960년까지의 한국현대사 1단계와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현대사 2단계의 공통된 특징은 '냉전대결'과 '소련봉쇄'라는 세계최강 제국주의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한민족과 남한 민중이 철저하게 희생된 것이었고, 그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 3단계까지 이어졌다.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학살을 통한 전두환 일당의 등장과 전국민적인 6월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반란 세력의 단죄 없이 1987년 헌법이 개정되고 '광주 5적'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 '3당 합당'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일파 후예들과 군사독재 잔당과 결탁하여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동기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주, 민주, 통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원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들은 분단체제 극복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으로 단결하고 연대하지 않고는 외세와 친일-친미 군사독재 후예들의 간교한 분열책동과 무력탄압, 언론조작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최소한의 기본권과 생존권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주요 고비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공작과 여론조작, 파쇼탄압과 야권분열, 기득권 유지를 획책해 온 미국과 냉전수구세력들의 지배전략은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에서 민중들과 민주진보진영에 가장 큰 숙제로 제기된다.

1961년 미국의 지지와 지원 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1978~1979년 YH무역 노동자 등 민중들의 투쟁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 철폐투쟁의 힘이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이 김재규 등의 저격으로 무너졌다.
박정희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붕괴에 대해 다수의 민중들은 환호했지만, 미국과 친일-친미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야당과 민주세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박정희 체제에서 성장한 일단의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또다시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일당은 그동안 성장한 민중들의 힘을 탄압하여 말살하려 하고, 민주세력의 분열을 공작,조장하면서 언론과 행정체제를 장악하였고, 6개월 뒤 2차 5.17 군사쿠테타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무능한 보수여당인 김대중-김영삼 세력과 '5.15 서울역 회군'으로 상징되는 비겁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전두환 일당은 5.17 군사쿠테타 이후 유일하게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의 대학생과 민중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광주민중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광주민중들의 결사항전 소식은 남한 전역에 소리소문 없이 번져나갔고, 학생들과 민중들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폭압통치를 뚫고 7년 만인 1987년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국가반란 세력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한계와 재벌체제를 혁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당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였고 직선제로 정권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세와 군사독재 일당의 청산이라는 민중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분열책동에 말려든 김대중-김영삼 보수정치세력과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여 광범위한 관권,금권 부정선거를 자행한 노태우 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민족민주운동(진보) 진영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민중운동 진영은 분열의 아픔을 딛고 자주적인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결성하여 새로운 대체세력으로 거듭났고, 김대중 중심의 정치세력보다 세력 규모가 약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은 더 강했던 김영삼은 민중운동 진영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노태우 군사독재 잔당들의 꼬임에 넘어가 김종필 유신잔당과 함께 '3당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은 보수대연합을 토대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를 더한 김영삼 일당에게 1992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80년대 남한의 경제사정은 외세의존적, 수출의존적, 매판재벌 중심으로 운영된 박정희의 부실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으로 전후 30여 년동안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성과마저 외세와 매판재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전두환 일당의 무능함과 수동적 경제정책, 외국자본의 수탈구조, 저임금-저곡가의 민중수탈 경제구조의 원인이면서도 더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었고, 산업 전분야와 사회 각분야의 민중들이 수탈당하는 정도를 줄여가면서 소득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이후 민중들의 조직과 민주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성장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민주개혁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여 정치,경제개혁과 남북화해, 평화통일로 한 걸음 더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과 2012년 연속 외세 의존과 친일파-군사독재-매판재벌 잔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냉전수구세력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1990년대 이후 20년간 한국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중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http://blog.daum.net/hy2oxy/86917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 1, 2, 3권 전체에 대한 주요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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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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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 3권 중 제2권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친일 군사쿠테타범 박정희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현대사가 1945년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첫번째 커다란 획을 그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기간은 예속과 굴종, 부정과 부패, 압제와 착취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잡는 두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커다란 획을 가르는 과정은 미국에 의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종속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파 출신의 범죄자들의 압제와 착취, 그리고 미국과 친일파 권력집단에게 기생하는 매판자본가들의 육성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몇 가지 특징과 교훈을 재발견하였다.

특징은 첫째, 한국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미국)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었고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패권전략을 위해 끊임없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시도했다는 점. 둘째, 한국의 경제 역시 미국과 일본, 특히 1970년대로 갈수록 일본에 의해 구조적으로 철저하게 종속되었다는 점. 셋째, 한국의 자본은 그 속성상 매판자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넷째, 그 과정에서 친일/친미파 집단의 대리인이자 권력중심인 이승만과 박정희 일당은 미국의 사전 승인, 동의 하에 집권하거나 집권을 연장하였다는 점. 다섯째, 집권세력은 단 한번도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은 적이 없으며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정치자금과 뇌물이 구조화되었다는 점. 여섯째, 한국 내 정치경제 상황은 미국의 세계 정치경제군사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일곱째, 친일 군사 독재의 압제권력의 무기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에 의한 뇌물이라는 점. 여덟째, 한국의 민중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함없이 저항하며 스스로 국가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다는 점이다.

교훈은 특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째,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속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적, 민중적 수탈이 지속된다는 것. 둘째, 특히 군 작전지휘권 환수와 미군 일변도의 무기, 군사전략,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주국방은 요원하며 항상 미군의 군사패권전략에 좌우되어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 셋째, 기술자립과 금융독립성을 유지해야만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내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 넷째, 정치 군사 경제 언론 학계에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청산해야만이 자주국방도 자립경제도 가능하다는 것. 다섯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근본이라는 것. 여섯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끝장내기 위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노력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 일곱째, 민중들의 불굴의 의지와 본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과정을 구조적으로 규정했던 기본 요소는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이 남한에 끼친 최악의 결과 중 한 가지는 저자의 주장처럼 '저항세력의 괴멸과 권력에 대한 굴종'이었다. 
"미국과 이승만, 친일파는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에 존재하는 일체의 항일독립세력과 저항운동의 씨앗을 말려 버리고자 했다. 그 결과 이땅의 항일세력과 민중운동은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미국은 휴전과 동시에 남한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개조시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시켰다."(p.13)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한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남한에 대한 외세의 지배가 고정화된 가장 중요한 징표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일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이 땅에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1953년 10월 한미 양국간에 체결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가장 중요한 조항인 제4조에 따라 미국은 우리 민중의 의사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의 아무런 협의 없이도 자유자재로 자신의 병력을 이 땅에 주둔, 배치시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p.14)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이승만 일당에 의해 원조경제와 잉여농산물, 부실한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승만 일당은 미국의 원조와 잉여농산물, 권력기구 등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을 무수히 수령하여 악용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이 남한 땅에 쏟아부은 원조액은 31억 달러를 넘었지만 사실 이 액수는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파괴한 남한 재산의 총액을 간신히 넘어서는 것이었다.[한국경제의관점, 이내영] 물론 이러한 원조조차 대부분이 국방비에 충당되었다."(p.22)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한 이승만 일당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통일성, 반민중성 어느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물리력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집권연장을 꾀했던 이승만은 불과 2년 뒤인 1954년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한 후 폭력을 동원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요했다. 이윽고 1955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통해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 후에 진보당과 조봉암씨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5.10 단독선거에서부터 1952년, 1954년, 1956년, 1960년까지 모두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은 커녕 정당성도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보역량과 민중역량이 궤멸되어 산발적인 저항과 반발 수준에 머무르던 민중들은 단 7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주인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벌어졌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 짓밟으려 했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민중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4.19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4.19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살인마이자 범죄자 이승만은 미국의 품으로 도망갔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친일파 군부, 정치인, 관료, 매판재벌은 아무도 처벌, 청산되지 않았으며(폭력경찰 일부만 처벌), 각종 악법과 제도도 그대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존 친일파들이 잔존하는 가운데 의원내각제와 장면 내각이 출벌하였다. 장면 내각은 혁명도, 개혁도 어느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승만 정권과 똑같이 부정부패했고 미국은 경제기술원조협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직접 좌우하기 시작했다.
4.19 혁명 이후 압제와 탄압이 약해진 틈을 뚫고 민중들과 시민들은 스스로 각성되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친미와 반공을 사슬을 끊고 민족통일의 열망을 끌어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핵과 유엔, 그리고 달러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미국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뚜렷한 쇠퇴의 기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소련의 경제,군사력이 강력해졌고, 동아시아(중국, 한반도)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순식간에 중동 아랍과 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권처럼 미국의 원조정책이 흔들리면서 붕괴되거나 궁지에 몰리는 친미 독재정권이 속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고딘 디엠,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 등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이라크처럼 반제국주의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미국은 이들 나라에 깊숙히 개입하여 허약한 정권은 갈아치우고 반미 정권은 허물어뜨리는 방법을 통해 보다 강력한 친미 정권을 세우는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해당 나라 민중의 자주적 독립과 사회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무참하게 짓밟혀졌다. 이같은 조치는 대부분 반동적인 군부를 매수하여 쿠테타를 종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61년 박정희 친일파 정치군부의 5.16 군사쿠테타는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과 미국의 군사패권전략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등장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이 미국이 주도 하에 하나의 군사적 목표를 위해 동시에 추진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군대를 남한에 진출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반혁명적인 역할의 강화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의 의의가 있었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중국 포위 및 공격을 위해 저렴한 비용과 자국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박정희 일당은 민족적, 국익적 관심은 전혀 없이 굴욕적, 망국적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폭력적으로 강행했고, 그에 따른 군인 월급과 군수물자산업 그리고 일본 원조와 차관에서 개인적인 뇌물과 정치자금 조성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넣은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방대한 억압기구를 통해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억압하거나 매수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기반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박 정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함으로써 1967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3선 개헌을 강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비상계엄 발동과 주한미군의 사전 허락 하의 군대투입을 남발하면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원조 감소는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한국의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본격화된 이러한 위기는 장면 시대를 거쳐 박 정권에 이르러서도 수습되지 않은 채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모로 보나 1960년대 초까지 한반도의 남북에서 전개되었던 상황은 명백히 남쪽이 열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날로 악화되는 위기를 수습하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경제개발'이라는 무기를 치켜 들었다. 물론 미국은 남한에서의 경제개발을 추구하면서 단순히 위기를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 수탈이라는 더욱 큰 이익을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결국 1960년대 경제개발은 남한의 경제가 원조로부터 탈피하여 자립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에 의한 본격적인 수탈의 길을 여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경제개발은 한국군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남한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기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차관과 금융지원에 의한 '매판자본'의 육성과 불평등무역과 직접투자에 의한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때에 밀려들어 온 일본 자본은 미국과는 또 다르게 한국경제의 요소요소를 장악해 들어가면서 궁극적으로 이 나라 민중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서 실패를 맛본 미국은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함과 동시에 도덕적 위신마저 실추되는 결정타를 얻어맞게 되었고,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9년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고 군사원조도 중단했다. 물론 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 추가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발맞추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시작으로 학생,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위한 저항이 촉발되었다. 그 영향으로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민주역량이 높아졌다. 광범위한 폭력 부정선거로 인해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국은 중국 전복을 포기하고 소련 봉쇄로 전환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반소진영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대결상태를 일시적인나마 은폐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박정희 일당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남북대화에 나서도록 사주했다. 이름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된 것이었다.
남북의 민중이 흥분과 열광으로 공동성명을 맞이한 것은 한편으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동성명 문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부정하고 미국과의 사전 협의 후 곧바로 유신체제라는 더 광폭한 독재로 치달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등 박정희 일당의 반공 소동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 패배하고 철수한 1975년 4월에 한층 노골적인 모습을 취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남한을 전면적으로 핵기지하고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 수 있는 한국군 지사병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며 여기에 덧붙여 일본군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미국은 한국군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미군의 휘하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일치감치 시도하였다. 1971년 7월 주한 미 제1군단과 한국군 일부를 포함한 한미합동 제1군단이 창설되었다. 지휘권은 당연히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1970년대 한국일지, 청사 편집부] 부분적으로 시도되던 주한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이후 전면화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쟁정책에 편승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자랑했던 남한 경제는 몇 걸음 못가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와 실업자 증대로부터 벗어나고자 1971년 10월 한미섬유협정의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섬유수출을 제한하였다. 그 결과 남한은 협정 체결 이후 5년간에 걸쳐 약 8억4천만 달러의 수출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종전을 향해 치닫던 베트남전쟁 역시 전쟁물자 공급에 크게 의존하던 남한의 수출시장에 먹구름을 드리우는데 일조했다. 또한 1971년 한 해 동안 200개 이상의 차관기업이 일제히 파산하는 등 차관에 의존한 경제는 밑바탕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와 함께 급격한 유가인상 역시 원유의 전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다주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 정권은 1972년 8월 이른바 '8.3 조치'라고 불려지는 긴급명령을 기습적으로 발표하였는데, 파산 직전에 놓여진 차관기업들은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이들 기업에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재산을 강탈당해야만 했고,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은 고스란히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박 정권은 외국인투자와 차관도입에 의존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하지만 모든 공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기계, 부품, 소재 등은 제쳐놓고 값싼 숙련노동에 의존하는 최종 조립단계에만 치중한 것이다. 그 결과 부품, 소재 등은 계속해서 일본 등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고 따라서 전체 수입액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애초부터 경제성과 무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설비판매를 노린 외국자본의 박 정권에 대한 뇌물공세, 박 정권의 정치자금 획득을 겨냥한 차관도입 욕망, 그리고 기업을 담보로 금융특혜를 기대하는 국내 매판자본의 요구 등이 뒤엉키면서 중화학공업화는 시장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과잉, 중복투자가 행해졌다.

1970년대 내내 유신독재는 어느모로 보나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1973년 8월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벌이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 귀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의 투쟁이 다시 일어났지만 박정희 일당은 민청학련 사건 날조로 맞섰다. 이에 대해 다시 거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박 정권은 동아일보사 탄압,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 피고인 8명 사형, 4대 전시입법을 제정하여 탄압에 나섰다.
19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열사의 저항을 계기로 민주진영 전체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몹시 다급해진 박 정권은 5월 13일 기어코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켰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가장 처절한 투쟁은 1977년 9월에 있었던 청계 노동자들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청계 노동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투쟁은 그동안 긴급조치 9호에 억눌려 침체되었던 각계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1978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보다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이 해에도 투쟁의 도화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즉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평 농민투쟁으로 학생들의 유신철폐투쟁 또한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 해직기자, 해직교수들까지 저항에 나섰다.
1979년에 들어서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농민들의 감자 피해보상 투쟁과 오원춘씨 납치 사건 규탄,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투쟁으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급기야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학생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졌고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지가했다. 박정희 일당은 부산과 마산에서의 강력한 저항을 비상계엄과 군대 동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민중들은 개의치 않고 연이어 거대한 저항으로 맞섰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유신정권의 괴수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10.26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여전히 흑막에 가려져 있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했음을 암시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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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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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지나서도, 한국전쟁 종료 후 65년이 지나서도, 1987년 6월 항쟁 후 26년이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외형적인 민주적 절차와 경제규모는 OECD 10위권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내실과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권의 안하무인을 목격하면서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까지 다룬 한국현대사 1편은 2013년 한국사회의 뿌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기존의 편견과 상식과 제도권 정보에 의존했던 기억과는 달리 해방 후 5년간 한반도에서는 아주 잠깐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5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탄압과 파괴가 이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기초자료와 언론기사, 증언과 인터뷰 등을 취합하여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친일파 출신의 국사편찬위원회, 제국주의자 미국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한민족과 민중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건과 사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했다.

저자의 결론은 한민족과 민중 스스로의 일제로부터 해방과 통일된 자주독립, 평등평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군화발과 친일파들의 부역 아래 아래 한민족과 민중의 염원은 처절하게 꺽여나갔던 것이다. 한민족과 민중은 해방 후 5년 동안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친미파 앞잡이들과 끝없는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덮은 후 저자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과 사대주의,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오래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고,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 1편을 읽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된다. 좀 더 자세한 정리내용은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조하면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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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체제 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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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백낙청 저 <2013년 체제 만들기>를 읽고 / 2012. 01., 191쪽, 창비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힌국사회에서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의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안정적인 일자리와 주거를 확보하지 못한 국민들과 주권자로서 자신들의 각종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 즉 90% 이상의 한국인에게는 더더욱 중요하다. 현행 한국의 사회체제는 정치가 많은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와 자살률, 그리고 행복도 최하위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법과 제도와 행정이었고, 그 법과 제도와 행정을 주도한 것은 선출직 공무원들이다. 그들을 선출하는 제도가 총선과 대선, 그리고 지방선거인 것이다.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시스템과 문화도, 부정부패에 면죄부를 주는 사법체계도, 국민들의 일자리와 생존권을 좌우하는 경제와 행정도,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농민들의 터전을 붕괴시키고 중소상공인과 영세자영업자를 낭떠러지에 내모는 것도 정치가 직,간접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한국의 정치와 행정이 ‘불량국가’ 수준인 것은 정치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그 정치가 불량하게 만드는 구조적 역사적 원인은 한국현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친일과 분단이다. 일제의 식민지 무력 감정을 환영하고, 그런 일제에게 부역하여 호의호식을 한 자들이 해방 후 분단을 주도했고, 분단이 한국전쟁의 참화를 가져왔으며, 전쟁이 다시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군사독재의 명분이 되었다.

친일파들과 군사독재 부역자들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한 이후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지 70년이 흘렀다. 그들이 기득권을 장악한 무기가 바로 분단과 반공이었다.
백낙청은 그래서 ‘분단체제’를 강조한다. 그 분단체제는 1948년 분단체제가 아니라 '한국전쟁을 거친 분단체제’다. 그것을 그는 ‘53년 체제’라 규정한다. ‘53년 체제’는 분단과 독재가 핵심구조이다. 두 개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53년 체제’는 친일과 외세의존, 전시체제와 반공을 주요 이념으로 한다. 경제질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섞여 있다. 
또한 남과 북, 즉 한반도는 주변 열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반도의 분단 과정이 강대국의 냉전구도에 강제된 측면이 강할뿐만 아니라 분단의 유지와 고착화도 외세의 입김에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민과 해방과 분단의 과정, 그리고 전쟁과 분단고착화의 과정에 주변 열강이 모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53년 체제’는 외부적인 변수이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갈등구조와 맞물려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남과 북이 주변 열강을 무시하고 임의로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추진하기 어렵다. 주변국들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그 자체로 또다른 강대국이 탄생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CIA는 오바마의 재선 후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 5위의 강대국이 탄생할 것으로 전망하는 보고서를 오바마에게 제출했을 정도다.)

‘53년 체제’는 남과 북에 ‘결손국가’를 만들어 버렸다. ‘결손국가’라 함은 자기완결적인 사회체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독립국가’이면서도 실상은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인 국가 형태’로 남아 있다. 이는 1972년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이고,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 명문화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분단체제’는 남과 북 내부에 분단체제로 인한 기득권이 발생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각각 분단이 고착화되기를 바라는 집단과 분단을 극복하려는 집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남북 대다수의 주권자들은 분단 보다 통일을 바란다.
남과 북은 ‘결손국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방이 통일을 대상이자 주체이기 때문에 상대방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주로 정권과 기득권자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분단기득권’이 생겨났고 부분적으로 체제 내에 자리잡은 것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는 분단기득권자들이 중심이 된 정권이었다. 그래서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주장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그 개념을 인정하든 아니든)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곧잘 ‘87년 체제’를 말한다. ‘87년 체제’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1961년 군사쿠테타 이후 기본적인 자유와 절차마저 유린되었던 25년 간의 ‘유신독재체제’가 사라졌다는 게 핵심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지자체장을 주권자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다는 의미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전체주의, 군사주의의 제도를 청산하고 절차와 선거와 협의를 강조하였고, 많은 분야에서 자유권을 신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민주정부, 즉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이 탄생되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04 공동선언은 ‘87년 체제’의 불안정한 구조인 분단체제를 흔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진보정치의 흥망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백낙청은 ‘87년 체제’가 ‘53년 체제’를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53년 체제’의 두 기둥, 즉 분단과 독재에서 독재 하나 만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87년 체제’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도입되었지만, 내용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미루어졌다. 더 중요한 것은 ‘87년 체제’가 ‘53년 체제’를 근본적인 면에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분단체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분단기득권자들이 분단과 반복 공세를 통해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책은 2012년 총선과 대선, 양 선거를 앞둔 국내정세에 대한 분석과 김정은체제로 이동하는 북한의 변화와 대북정책에 대한 진단, 그리고 87년체제를 넘어 희망의 2013년체제를 향한 백낙청의 제언과 해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나도 ‘2013년 체제’라는 개념을 전혀 들어보지 못할 정도로(2012 희망 원탁회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백낙청의 문제의식과 제안은 한국사회에 널리 퍼지지 못했다.
결국 백낙청이 말한 ‘2013년 체제’는 ‘87년 체제’를 뛰어 넘어 ‘53년 체제’까지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주창하는 ‘2013년 체제'의 주요 요소 중에는 복지사회, 공정·공평사회론, 그리고 생태전환론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2013년체제'의 주요한 골자는 무엇보다 6·15선언으로 상징되는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진전,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이다. 이 내용을 그는 ‘포용정책 2.0’이라고 이름지었다. ‘포용정책 2.0’ 정책은 2013년체제에서 주요한 열쇳말로 제시된다. 이 대목은 87년체제와 가장 대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87년체제의 극복과 2013년체제의 수립이 2012년 양대 선거의 승리로 정권교체나 원내 다수의석 확보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선거승리는 필수적인 요소지만 정권교체 이후의 새로운 체제를 미리 논의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역사의 시간표는 다시 지루한 뒷걸음질을 기록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보진영과 야권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실패한 이유는 어쩌면 ‘2013년 체제’ 만들기가 아니라 단순히 ‘야권의 승리’, 특정 정치세력의 ‘승리’ 또는 ‘전진'만을 욕심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나니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이 단순히 ‘야권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체제적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기 보다는 기존에 어렴풋이 들었던 여러 생각들이 이 책을 통해서 가닥을 잡아간다는 느낌이다.
물론 백낙청 교수는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에서 자신이 ‘2013년 체제’론을 설파하고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등 박근혜 정권의 모습이 ‘2013년 체제’는 커녕 ‘87년 체제’마저 후퇴시키는 퇴행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이들이 ‘적공’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작금의 정치상황이 ‘87년 체제’를 지키는 것도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53년 체제’라는 관점과 ‘53년 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나타난 박근혜-새누리당 체제를 ‘87년 체제’만을 지키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더 후퇴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든다.

내가 ‘2013년 체제’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것은 백낙청의 2015년 신간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이었다. 그후 ‘2013년 체제’와 ‘53년 체제’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는 이 책 <2013년 체제 만들기>뿐 아니라 <어디가 중도고 어째서 변혁인가>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까지 읽어야 했다.

[ 인상 깊은 문장 ]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원(願)을 크게 세우는 일이라고 믿기에 눈앞의 현실보다 한 발짝 먼 이야기부터 하려는 것이다. 2012년의 선택이 비록 중요하지만, 그해의 양대 선거에 논의가 너무 집중됨으로써 우리가 목표하는 선거 이후의 삶에 관한 사고를 제약하고 때이른 정치공학적 논의에 몰입해서는 곤란하겠기 때문이다." ―제1장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물론 2013년체제가 성립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조건은 2012년 양대 선거의 승리이다.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에서는 대폭적인 지각변동이 감지되는 움직임들이 여럿 있다. 야권통합후보의 서울시장 당선, ‘안철수 현상’, 젊은 세대의 정치 복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전열 정비, 박근혜 대세론의 붕괴와 ‘조기등판’ 등이 그것이다. 특히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인 박근혜 위원장은 본의 아니게 너무 일찍 선거판에 투입되는 바람에 4월 총선 결과에 따라 정치적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 속에서도 2013년체제가 다가오고 있음이 점차 실감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시민후보’ 박원순이 야권통합후보로 당선된 사실과 이를 전후한 ‘안철수 현상’, 그리고 그 바람에 오랫동안 부동의 여론 지지율 1위를 자랑하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대세론이 무너지고 드디어 그녀가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예정에 없던 ‘조기등판’을 하게 된 사정 등이 모두 그런 실감을 더해준다." ―제4장 「다시 2013년체제를 생각한다」

"복지국가론의 기본 취지가 당장에 복지를 전면화하는 것보다 국가모델을 ‘복지국가형’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라면, 더욱이나 여타 국가적·사회적 목표와 결합된 복지모델을 설계해야 한다. 예컨대 기존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생태친화적으로 전환하는 ‘친환경 복지국가’ 모델이어야 하며, 동시에 ‘성평등 지향적 복지국가’ 모델이 되어야 한다. 또한 복지국가이되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협동조합, 시민단체, 그리고 복지수혜자 개개인의 능동적 참여가 극대화되는 ‘민주적 복지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2013년 이후 진전될 남북관계와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관한 ‘범한반도적 설계’가 긴요하다.” ―제1장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2013년체제와 평화전략을 함께 얘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평화체제로의 진행 여부가 2013년체제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 중에서 유독 남북관계나 평화문제만 중요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87년체제가 53년체제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탓에 민주화를 위한 그 긍정적인 동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교착·혼란·퇴행상태를 겪게 된만큼, 결국 53년체제를 혁파하여 분단체제를 좀더 획기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8장 「2013년체제와 포용정책 2.0」

"크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상식과 교양 및 인간적 염치의 회복이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것이 정권교체나 정치권 주도의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님은 명백하다. 몇몇 인사들의 무교양과 몰상식 그리고 부도덕에서만 문제가 비롯되었다기보다 국민들 다수의 생명경시 습성과 정의감 부족, 그리고 비뚤어진 욕망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이틀에 바로잡힐 일이 아니며,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바꿔나가는 노력을 각자의 삶에서 꾸준히 진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분위기가 일신될 때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노력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터이기에, 아무래도 2013년(또는 2012년)의 결정적인 전환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러한 전환을 위해 필요한 뼈저린 반성을 할 기회가 지난 3년여 동안 유독 많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명박시대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1장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 2015년 11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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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사람들 -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김진향 외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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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김진향 교수 외 공저 <개성공단 사람들>을 읽고 / 2015. 06., 279쪽, 내일을여는책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남북의 젊은이들이 총을 마주 겨눈 휴전선(군사분계선).
그 휴전선 판문점에서 불과 2.5km만 북한의 영토로 들어가면 ‘개성공단(개성공업지구)’ 100만 평의 입구가 나타난다.
100만 평 중에서 1단계 5만여 평에서 2004년부터 남한의 중소기업 124개가 5만 3천 명의 북측 노동자들과 함께 각종 상품을 만들고 있다.
2013년, 약 6개월 동안 공단 가동이 중단된 것을 제외하고는 12년째 남과 북의 경제협력으로 경쟁력 높은 제품이 국내외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참여정부 시절 대북정책을 담당하였고, 이후 개성공단에 장기 체류하면서 관리위원회에서 관리와 실무적인 업무를 처리하였다.

한국인들이 개성공단에 대해 아는 정보는 많지 않다. 보통 정주영 현대 회장의 협력과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간 합의에 따라 시작된 남북 합작 공단이라는 정도다.
언론과 정부여당의 일방적인 소식만을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개성공단이 ‘북한에 퍼주기’이고 개성공단에서 번 돈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자금원’으로 쓰이며,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측 사람들의 신변히 위험하다는 이야기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오랫동안 직접 일했던 저자를 비롯해 남측 기업인, 노동자들은 정반대로 증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개성공단이야말로 ‘날마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관리자, 법인장, 기업 대표, 노동자 등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15명이 개성공단과 개성공단에서 함께 일하던 북측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기록이다.

그들은 왜 언론과 정부여당의 말이 틀리다고 할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5만 3천 명의 북측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은 2015년 현재 월 130달러다. 한국돈으로 14~15만원인 셈이다. 남측 제조업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여의 10~20분의 1이고, 중국이나 베트남 인건비와 비교해도 1/5 ~ 1/10에 불과하다. 그리고 북측의 노동자들은 언어가 같고,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이 높고, 노동의욕이 높고 손재주가 좋다. 더군다나 개성공단의 물류비용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 해외공단과 비교할 수도 없이 저렴하다. 매출액은 연간 15~30억 달러 정도라 한다.(“남측 기업 124개의 노동자와 가족, 그리고 협력업체 가족까지 따지면 약 20만 명 이상의 남측 사람들이 개성공단 덕분에 먹고 살고 있죠.” 102쪽)
이 모든 것들이 개성공단의 경쟁력이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국내 중소기업들은 국내에서 기업을 운영할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개성공단에 들어간 것이다. 개성공단 기업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개성공단 기업이 손해를 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개성공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다. 

북측의 노동자들이 매달 받는 130달러 중 중 30% 정도가 제세공과금 명목으로 북측의 정부로부터 공제된다. 연간 1억 달러 규모다. 30% 정도면 보통 국가로서는 그렇게 부당하지 않은 공제금액이다. 북한이 보육과 교육, 주거와 의료 등 대부분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 돈으로 북측의 노동자들은 자신과 식구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소비생활을 하는데 충분하다.("2000년 처음 개성공단을 합의할 시, 남측에서 협상안으로 마련한 북측 노동자의 월급은 200달러였는데, 25%인 50달러로 확정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그가 말한 이유는 개성공단에 초기에 들어온 기업이 돈을 벌어야 다른 공단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측 노동자들은 남측 관계자나 관리자들에게 자신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측 기업을 돕고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강하다”(57쪽)

이런 구조에서 개성공단은 북측에 ‘퍼주기’가 아니라 남측이 ‘퍼가기’를 하는 곳이다. 북측에 대비하여 남측이 15배에서 30배를 벌어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개성공단에서 북측 정부가 핵무기 개발로 가져갈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개성공단의 기존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축소되고 중단되면 될수록 남축과 기업들의 손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들은 왜 개성공단에서 ‘날마다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할까? 

개성공단에서 일해본 관리자들이나 노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측과 북측이 서로 많이 ‘다르다’고 말하면서 또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남북이 분단체제로 제각기 살아온 지 무려 70년이 넘었다. 따라서 같은 ‘한글’이라고 해도 ‘말’의 의미와 사용법이 많이 다르다. 자본주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온 사람과 사회주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온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이도 상당하다. 남측 사람들은 북측사람들의 ‘집단주의 생활’이 이해가 되지 않고, 북측 사람들은 ‘돈만 밝히는’ 남측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북측 사람들은 남측 사람들의 개인적인 책임과 개인적인 성과에 익숙하지 못하고, 남측 사람들은 북측 사람들의 ‘집단적 책임’과 ‘집단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측에서는 개인과 가족이 우선이고, 나의 이익과 성공이 먼저이고, 사람들간의 관계는 거래와 ‘기브앤테이크’이지만, 북측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나의 가족보다 국가 전체의 '사회주의 대가족’이 우선이며, 사람들간의 관계는 ‘신뢰’와 ‘협동’이 기본이다. 남측에서는 북측의 유일수령체제와 세습정권을 용납할 수 없지만, 북측에서는 남측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와 수령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자신들에 대한 모독이고 욕설인 것이다.
그래서 개성공단에서는 ‘존중’과 ‘배려’가 가장 중요하다. 남북 당국간 관계가 긴장되면, 남북 관계자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군사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금기’가 된다.(평소에도 일대일 관계 이외에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지만 남과 북이 한민족이고 같은 핏줄로 같은 역사를 공유했다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부정할 수가 없다.
북측 사람들의 관혼상제 풍습과 제사,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똑같다. 그들도 ‘개XX’라는 욕을 하고, 심지어 ‘빨갱이 같은 짓’이라는 비난도 있다. 무언가를 선물하면 꼭 다른 것을 선물한다. 선물은 거래의 대가가 아니라 마음의 표시이자 감사의 표시다.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운동경기도 좋아한다. 민족적 감정도 닮았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측도)북측도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런 면에서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측 관리자나 노동자들은 “컴맹이나 문맹처럼 우리나라 사람의 99.9%가 북한에 대해 거의 모르는 ‘북맹’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북한 사람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하게 된다.
물론 북측 사람들도 남측 사회나 남측 사람들에 대해 상당 부분 잘 모르고 오해하고 있다. 북측 정부의 정보 밖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남측 사람들이 미군에게 일상적으로 감시당한다고 생각하고, 굶어죽는 사람과 노숙자가 길거리에 넘친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개성공단이 확대되고, 개성공단 같은 남북 경제협력 공간이 확대되면 남과 북의 보통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서로의 삶과 문화에 대해, 같음과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고 대화하고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 같이 개성공단에서 ‘날마다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김진향은 개성공단의 진실이자 개성공단의 진정한 의미를 1) 남북간 상생과 경제협력-평화정착 모델이고, 2) 북측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학습장이 되며, 3) 남북간 긴장 해소와 평화 진작을 이룰 수 있고, 4) 남북간 평화의 확실한 안전 장치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왜 개성공단이 ‘기적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할까?

2000년 남북의 정상들이 ‘6.15 공동선언’에 합의하면서 시작된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은, 경제협력 분야에서 남북이 개성공단에서 함께 경제적인 이익을 거두고 남북간 공통점을 찾아가자는 ‘개성공단 조성’과 ‘금강산 관광’ 등에 대한 합의로 결실을 맺었다. 
남북한 합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북측은 2002년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경제양식의 기본 틀을 벗어난 제도를 결정했고, 남측은 2007년 ‘개성공업지구지원에관한법’을 제정하여 헌법과 각종 법률에서 예외를 둔 사항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2007년 남북 정상들의 ’10.4 공동선업’으로 개성공단 확장 등 경제협력의 확대와 정치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각종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7년 말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남북의 합의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2008년 금강산을 관광하던 관광객이 사망하면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 관광이 중단되었고,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는 ‘5.24 조치’를 취했다. 5.24 조치는 기존의 남북간 합의를 전면적으로 무효화시키고, 남북의 민간 교류 및 협력을 금지하였다.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이 중단되어도 무방하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선 이후 개성공단을 여러 차례 중단될 위험에 처했다. 2008년 이후 남측의 합의 불이행, 2009년 금강산과 개성 관광 중단, 2010년 5.24조치,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2013년 2월 북측의 핵실험과 한미 군사훈련, 그리고 대북 삐라 발송 등 남북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2008년 이후 남측이 기존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것을 항의하던 북측은 2013년 4월 드디어 개성공단을 중단시켰다.
7월부터 시작된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남북간 협상이 진행된 후, 6개월 만인 그해 9월에 개성공단이 다시 가동되었다.
(개성공단 약사는 첨부한 사진 참조)

북측의 군부 강경파와 남측의 분단옹호 세력은 분단체제가 지속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부정부패가 감추어지길 원한다. 따라서 분단체가 유지되어야 하고, 분단을 허물고 통일을 앞당기는 개성공단이 무산되고 없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와 박근헤 정부는 보수언론과 결탁하여 연이어 개성공단에 대한 기존 합의를 무시하고, 개성공단에 대한 허위 정보를 국민들에게 유포한다. 지난 8월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포격 사건처럼 이명박-박근혜 정부 내내 남북간에는 군사적 긴장과 정치외교적 갈등이 지속되고 있고, 북-미 갈등도 커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개성공단이 살아남고 유지되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성공단을 부정하고, 남북화해와 협력을 싫어하는 정부여당이 8년찌 집권하는 동안에도 개성공단이 유지되고 이어가는 것은 남북 주권자들과 한민족의 염원과 노력이 계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와 취재기자, 그리고 인터뷰에 응한 남측 관리자와 노동자들의 증언 하나하나가 진심이자 진실일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총체적 무지'에 빠져 있다."(25쪽)

"남과 북은 많이 다르다. 그 '다름'을 우리는 '틀림'으로 일반화시킨다. 분단체제가 강요한 획일적 사고와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다른 선악적 구분의 폐해다."
"남측의 '자유'의 개념과 북측의 '자유'의 개념은 다르다. '노동'과 경제, '고용'의 개념도 다르다. 북측에는 '임금'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고 다만 '생활비'라는 개념이 있을 뿐이다."(26쪽)

"결국 북한과 관련된 거의 모든 지수나 지표들은 추정에 추정을 더한 매우 많이 가공되어진 것들이다. 다시 말해 거의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총체적 무지가 적대적 대북정책과 만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북한은 더 이상 평화와 통일의 일 주체도 공존공영할 상대도 대화의 온전한 파트너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결국 전통적인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서 북한은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근거한 '악'일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찌질이', '완벽한 루저'일 뿐이다."(27쪽)

"평화와 안보는 국민생존권이 걸려 있는 절대국익의 영역이기에 이 문제를 둘러싼 사실관계들은 어느 영역보다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려야한다."(29쪽)

"평화가 통일이고 평화가 대박이다. 그런데 그 평화란 게 너무나 간단하다. 엄청난 국가적 비용도 필요 없고 특별한 국가적 노력과 국민들의 각고의 인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상호존중'의 정신 하나면 된다. 남과 북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하는 자세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30쪽)

"개성공단은 어느 날부터인가 ‘북한 퍼주기’의 대명사처럼 취급되더니, 이제는 아예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개성공단에 입주한 124개의 우리 기업은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때도, 장장 6개월이나 공단이 폐쇄되었을 때도 결코 개성공단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성공단에서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업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출판사 책 소개)

날마다 작은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 개성공단의 남북의 사람들.

인간 세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적이고 없애야할 대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전쟁과 학살을 가져온다고 한국현대사는 말해 준다. 현 정부여당의 기본적인 태도이고, 그에 맞선다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일부 야권의 태도이다. 그런 태도로는 상대방과 대화할 수도, 공존할 수도 없고,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을 것니다. 남북이 적대적인 이유도, 여야가 적대적인 이유도, 야권이 늘상 분열하여 갈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성공단이 한민족과 한반도가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아는 '북한'에 대한 모든 정보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돌이켜보면 거의 99% 정부와 보수언론임을 알게 된다. 일부는 미국 언론이고. 그런 정보에 근거하여 자신의 머리 속에 형성된 북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합리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래에 진보하고 발전하기는 고사하고 상식적인 수준도 못된다.
북한(사람)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싶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에 이르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 2015년 10월 30일 ]

*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 김진향씨의 동영상 강연은 https://youtu.be/S1W21ITINus 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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