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남미 콜럼비아에서 있던 실화...
어느 날 콜럼비아에 도착한 미국인들은 콜럼비아 원주민들이 보잘 것 없는 도구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국인들은 생각했다.
’불쌍한 사람들 같으니... 우리가 이들을 구해주어야겠다...’
그들은 미국에서 큰 도끼를 가져와 원주민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미국인들은 원주민들이 더 빨리 나무를 짤라 생산성을 높이고 잉여물을 만들어 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이듬 해, 미국인들은 콜럼비아 원주민들이 도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기 위해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미국인들이 도착하자 느긋해 보이는 원주민들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다가왔다.
마을의 추장이 미국인들에게 한 말...
"우리는 당신들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이 도끼를 보내 준 다음부터 우리는 더 많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책은 지난 7월에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하는 책들>에 소개된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에 이어 두 번째 책이다. 법정스님은 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나 소감을 말씀하시지는 않았고 "누구나 읽어보면 깨우침을 얻는다"고만 소개하셨다.
 

열정적인 한 사람이 상품 농업에 저항하고, 대지가 자신의 존재 가치만큼 존중받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 온 이야기들로 채워진 이 책은, 환경 운동가 ’피에르 라비’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며, 그의 실천적 삶뿐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사상까지 폭넓게 들려준다.
그의 말을 옮겨 적음으로써 생생하게. 피에르 라비의 삶과 사상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는 그와 나누었던 일주일간의 대화에 대해 저자들이 “자연과 생명, 인간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그의 말은 대지의 노래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대지 가까이 머무는 것이 자신의 삶 가까이 머무는 것임을 저절로 깨닫게 한다.”고 한 데서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책 속에 피에르 라비의 삶과 각 챕터에 적합한 시를 골라 소개하여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각 챕터 사이에서 한 번씩 마음을 가라 앉히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여유를 두었다.
시인들은 앤 히긴슨 스파이서, 이반 라코비크 크로아터, 랄프 왈도 에머슨, 낸시 우드, 월트 휘트먼, 시몬스 목사, 룰프 에드버그, 다이앤 디 프리마, 로버트 프란시스, 토머스 머튼...
 
이 책의 주인공인 ’피에르 라비’는 1938년 알제리의 남부 오아시스에서 태어나 10대 시절에 알제리 식민제국인 프랑스의 교사부부에게 입양되어 프랑스로 건너간다.
 
(후에 그는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돌투성이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인간이 대대손손 정성을 쏟아 녹지를 일궈 낸 문명은 그곳 말고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전 생애는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혹독한 풍경 한가운데 조화로운 공동체를 창조한 농부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알제리의 독립전쟁 시기에 양부에게서 ?겨나 파리로 건너간 그는 회사에서 단순 기능공으로 생활하다가 ’자신이 이용할 수 없는 부를 생산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삶의 부조리함’을 발견하고 도시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진보’란 몇몇 사람들의 부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 부과하는 규율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빈곤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960년 자신과 뜻이 맞는 미셸을 만나 결혼한 후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 아르데슈로 내려가 그동안 자신이 느끼고 공부하고 생각하던 바를 시도한다.
 
하지만 도시화와 산업화의 방식은 이미 시골에까지 침투해 있었다. 아르데슈에서의 처음 3년 동안 피에르는 생산성 증대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 농사 방식의 해롭고 부정적인 결과를 경험했다. 화학 비료를 생산하는 회사는 농민들에게 농약을 사용하도록 권장했고, 농업 기술자들 역시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서라며 농민들에게 화학 비료를 이용한 농법을 계몽했다.
농부로서 그는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인류에 피해를 입히는 생산 제일주의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대지, 물, 식물, 동물 같은 지속적이며 재생할 수 있는 자원의 자율적인 운영 원칙으로써 ‘생명 농업’에 의지한다.
 
그들은 자연 친화적인 농법들을 연구하고 시험하며 자신들의 땅을 일구기 시작한다.
그것은 살충제나 비료, 전략적인 물 관리 같은 현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전통적인 방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토양 구조와 비옥한 잠재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기물과 부식토를 이용했다.
말하자면 거름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그것들로 돌투성이의 땅을 비옥하게 가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이 먹을 만큼만 일하고 거두었을 뿐, 자연을 바라보며 음악을 연주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렇게 하여 그는 생태계를 전복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한 가정을 부양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피에르의 전통적 농법은 단지 한 가정을 부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들처럼 농촌으로 살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피에르는 자신의 경험을 나눠 그들의 정착을 도왔으며, 그렇게 시작된 수업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자신이 성공시킨 농업 방법을 적용할 수 있었다. 사막에서 태어난 그가 다시 사막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피에르 라비의 수업은 이제 농부들을 교육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들의 농촌에 그들을 보내고, 사라져 가는 재래종 씨앗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확장되었다.
2001년부터 그는 과소비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안하기 위해 유럽 강연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그가 처음 정착했던 그곳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햇볕에 그을리며 밭을 일구는 일과 함께 진행된다.
 
서구 사람들이 그를  ‘생명 농업의 선구자’로, ’제3세계 국가들의 농업과 생태학을 연계한 농학자’로, ’아프리카 농업의 전문가’로, 그리고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는 환경 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서구에서 산업자본주의의 추악한 이면은 이미 19세기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서구에서 ’자본’이나 ’물질’이 아닌 ’생명’과 ’사람’을 인간생활의 중심에 내세우기 시작한 시기는 이처럼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태동하기 시작한 셈이다.
피에르 라비가 ’생명’을 부르짖기 시작한 이래로 이제 60년이 경과했다.
한국은 피에르 라비가 ’자본주의’의 맹점을 거부하고 ’생명’을 선언한 시점에 한국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고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자본주의가 이식되기 시작했다.
한국이 자본주의 체제 60년 만에 OECD 국가가 되고 ’G20’ 회의를 개최한 만큼 서구에서 산업자본주의 태생으로부터 120년 가까이 걸렸던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더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피에르 라비의 ’말’에는 언제나 철학과 가치와 희망이 들어있다.
- "나는 늘 기적에 대한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나에게 기적은 일상이다. 흙 속에 씨앗 한 알을 심으면 자라나 식물이나 나무가 된다. 밀할 한 알갱이에는 대지 전체에 양분이 될 모든 에너지가 들어 있다.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우리 모두는 그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루 수 있다. 모든 것이 기적이다. 우리는 바로 그 기적 안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영원은 지금 이 순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종교이다."
- "나무는 우리 행성에 난 털과 같습니다. 활짝 깨인 감각을 갖고 가까이서 관찰해 보면 나무들이 하늘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기 위한 행동입니다. 이 우주 안에서 지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외부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그 중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나무는 단지 섬유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생리학적인 요소들로도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무 안에는 마술과도 같은 일을 벌이는 살아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 "부패와 부패한 사람들이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구사회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패에 대해 아무비난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빚을 갚는다 하더라도 또 다시 빚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저개발국가들의 가난을 누가 만들어 냈는지, 두 말할 필요없이 그 주된 원인은 부정부패에 있습니다."
- "한 해 동안 행복해지고 싶으면 돼지를 잡고, 한 해 동안 행복해지고 싶으면 결혼을 하고, 전 생애를 거쳐 행복하고 싶으면 밭을 일구라.(중국 속담)"
- "무한한 성장과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무한한 발전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원인입니다. 이런 현상을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인간의 무엇을 발전시켜야 할까요? 바로 자국민들의 능력에 따라 경제를 구축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서양을 모델로 한 불가능한 꿈을 좇아 질주하는 대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적인 애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지구에 모든 사람을 먹일 충분한 양의 식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에는 조건이 따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60배를 더 먹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곧 낭비를 멈춘다는 조건입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음식만으로도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이런 낭비는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저지를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상황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세계화가 그것에 한 몫을 합니다. 세계화는 시스템의 통일과 약탈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 "사자는 양을 잡아먹고 배를 채우지만, 나중을 위해 따로 저장해 두지는 않는다."
 
* 이번 서평의 제목인 "우리는(넌) 우리(네)가 지금 하는 말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는 피에르 라비가 항상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말이라 한다...

내가 하는 말을 나 스스로 얼마나 지키며 살고 있을지...
아무래도 앞으로는 말을 조금 더 아껴야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 2010년 10월 13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
인터파크 북피니언에서 ‘친구’ 블로거가 이 책의 서평을 써 놓은 것을 읽자마자 묘하게 끌렸다.
인간의 호기심과 초상화라는 사실적이면서 예술적인 창조행위…
주인공 화가가 어떻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으로 묘사할 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떤 미스터리가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 등장할 지…
 
19세기말 미국 뉴욕에서 초상화의 대가로 인정받는 화가 피암보.
그에게 들어온 거액의 비밀스러운 제안.
절대 자신을 보지 말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샤르부크 부인.
언제나 신비한 병풍 뒤에 앉은 샤르부크 부인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피암보를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게 하고,
스케치 하나 그리지 못한 채 약속된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간다.
또한, 죽었다고 애기 들었던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 그를 위협하자 피암보는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약속 시한에 임박하여 환영에 휩싸인 채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지만…
 
작가는 후기에서 책에 언급된 장소와 인물, 여러 현상과 사건들이 실제 1893년에 존재했었고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물론, 작가 자신은 역사가가 아니라 소설가이므로 사실을 나열한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당시 뉴욕의 모습과 빅토리아 시대 회화의 모습, 19세기 아편 복용에 대한 현상, 타부현상등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서적을 참고하였고 했다.
 
이 책에 대한 미국 언론의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인간의 집착과 영감, 그리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살인사건까지 드라마틱한 스토리에서 독특한 감흥을 자아내는 소설!’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정한 캐릭터들이 나누는 섬세하고 소름끼치는 유머감각. 이 책은 두 말할 필요 없이 탁월한 스릴러 문학이다.’
‘1893년 뉴욕의 실제 모습을 담아낸 미스터리 소설인 동시에 판타지 소설이며, 공포 소설이자 당대의 예술적 풍미를 되살려 면밀하게 재구성한 역사소설’…
 
반 고흐의 편지를 소재로 신성림 엮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고흐 자신의 편지를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객관적인 일상에 대한 묘사가 조금 부족했지만, 이 책은 소설로서의 장점을 살려 화가의 일상과 심리묘사가 적절해 보였다.
소설로써 매끈한 은유적 표현과 단어 선택은 글 쓰기의 문학적 기법을 알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전차들마저 낮 동안 사람들이 뱉어낸 회한들로 침침해진 어둠 속을 헤엄치는 거대한 구렁이처럼 노곤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19세기 말 미국 화가들의 일상과 밥벌이, 작품 구상과 그리는 과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다.
또한, 피암보가 스승을 부정하면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 19세기 아마추어 과학자의 모습, 서구식 파티문화의 속성, 미술계의 분위기 등은 재미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소설책을 덮은 다음 난 석연치 않은 결말과 앞뒤가 모호한 스토리라는 느낌을받았다.
샤르부크 부인의 집사인 왓킨은 샤르부크 부인과 자신이 남편 행세를 했다고 했고 샤르부크 부인이 직접 죽인 ‘피눈물을 흘리면 죽는 여자’는 한 명이라고 했지만, 실제 그렇게 살해당한 나머지 사람들의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혹시 왓킨이…??)
그리고 샤르부크 부인이 왜 피암보를 죽이려고 시도했는지에 대한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미국 뉴욕의 사회문화 구조에 ‘무녀’라는 표현이 적절한 지 의문이 들었다.
역자의 번역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신도 때론 실수를 해요.’ (P.100)
‘대중은 교묘하고 깔끔한 모순을 좋아한다.’ (P.221)

[ 2010년 10월 20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보름 전인가... 친구와 점심을 먹다가 전날 화장실에서 잠시 읽으려고 이 책을 들고 갔다가 결국 꼴딱 밤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이 책을 보고싶다고 Facebook에 메시지를 남기자 대학선배가 즉시 선물해주어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작가의 ’작가정신’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여러 문학평론가와 언론에서는 이 작품을 극찬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많이 아쉽다.
내가 아쉬웠던 것은 이 작품이 한 권으로 끝나서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작가의 전작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에 대한 기억이 강렬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쉼이 큰 진짜 이유는 작가가 담고자 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처럼 한 권으로는 절대 끝날 수 없는, 장구하고도 깊숙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인간다움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하는 문학은 이제 그 물음과 응답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작가의 ’작가정신’과 ’시대정신’은 작가의 초기 작품인 [불놀이], [대장경]에서부터 대하작품인 [태백산맥]과 [한강]까지, 그리고 그 이후 작품인 [인간연습]과 [오, 하나님]까지 초지일관 이어진다.
이런 작가정신은 김지하씨와 같은 다른 문인, 작가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이자 정신이다.
한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 세계 어느 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조정래씨에 앞선 세계적인 문인들 역시 작가와 비슷한 정신을 간직하고 있었던 듯 하다.
톨스토이는 ’진정한 작가이길 워하거든 민중보다 반발만 앞서가라.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라고 했고
타고르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길이다’,
빅토르 위고는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한다’,
노신은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은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어리저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료,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약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라고 했다.
 
동시에 작가는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화두에 나섰음을 선언한다.
그는 정치의 민주주의 뿐 아니라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경제 민주주의 역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을 통하여 작가는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천민자본주의와 기업비리들을 고발한다.  

작가는 연재 시작 전 계간 [문학의문학](2009. 여름호)과 한 인터뷰 대담 자리에서 차기작에 대한 계획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학 작품은 모국어의 자식이다. 따라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시대, 그 사회의 모순과 비극을 써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모국어의 나라에 빚 갚음하는 작가로서의 책무이다. …… 자본주의의 천박성에 전 세계가 휘말리고 있다. 돈에 환장하는 인간들의 작태를 스케일 크게 집필할 계획이다. 각 분야 지배 계층들의 조직적 결탁과 그들의 위선, 그리고 그 횡포와 돈을 쫓는 각축에 대해 구상 중이다.”라고..
이 책은 그런 약속 끝에 세상에 나왔다.

작가도 책의 서문에 이야기했듯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도 ’우울’하였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마치 ’삼성그룹’과 ’현대그룹’이나 ’SK그룹’을 빗대어 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태봉그룹의 비밀조직의 핵심인 박재우를 일광그룹에서 그의 대학 후배인 강기준을 통해 영입한다.
그동안 태봉그룹은 치밀한 조직과 년간 1조원 가량의 비자금으로 언론계, 정계, 법원, 검찰, 국세청, 정부, 학계 등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탈세와 비자금 조성, 불공정 거래 등을 법과 언론의 화살을 피했다.
일광그룹의 남회장은 자신이 태봉그룹 수준이 아닌 통상적인 로비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자신이 검찰에 구속되어 구치소에 들어갔다 온 것으로 생각하여 태봉그룹을 넘어서는 대대적인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일광그룹이 박재우에 대한 스카우트를 성공시킨 후 박재우의 전략에 따라 국정원, 국세청, 검찰, 정부,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을 추가 스카우트하고 년간 1조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하여 뿌려댄 결과, 시민단체와 정의로운 교수들의 고발과 문제제기를 피해나가게 된다.
재벌가의 주요 등장인물로 일광그룹의 남회장, 비서실장이자 ’문화개척센터’ 총본부장 윤성훈, 기획총장 박재우, 실행총무 강기준, 김종석 실장, 검사 출신 신태하 팀장, 국세청 서기관 출신의 정민용 팀장 등이 등장한다.
이들의 생각과 태도, 전략과 방식, 말과 행동에서 썩어빠질대로 썩은 재벌가의 역사인식과 사회의식, 황금만능주의와 결과만을 중시하는 무한경쟁, 태연한 부도덕과 불법행위는 한편으로는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돈과 지위 앞에 신뢰나 의리를 휴지처럼 내팽켜치는 재벌가의 구성원들 모습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강기준이 다른 재벌그룹으로 이직하는 것으로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다행히 작가는 아무리 재벌과 정치권, 법조계와 언론계, 관계와 학계가 썩어있을 지라도 그 속에 남모르게 순리와 정의, 진실과 인간중심주의, 신뢰와 의리를 지켜나가고 불의와 싸우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의 자그마한 노력 하나 하나가 모여 사회의 썩은 웅덩이를 치우고 암과 같은 폐해를 도려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말...
"우리의 자본주의는 60년이 넘었고, 경제발전의 역사는 50년을 헤아린다.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정치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해 냈다’고 자랑한다. 세계 또한 ‘2차 대전 이후에 제3세계 중에서 정치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며, 그건 20세기 기적 중의 하나다’라고 평가한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것은 분명 우리 모두의 긍지이며, 맘껏 자랑해도 자만일 것 없는 우리들의 떳떳한 자존심이다."
 
* 새로 배운 한글
- 두물머리 : 두물머리[兩水里]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한자로는 ’兩水里’를 쓰는데, 이곳은 양수리에서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장소를 가리킨다.
- 가직하게 : 거리가 조금 가깝다.
- 땅띔 : 무거운 물건을 들어 땅에서 뜨게 하는 일.
- 보비위 :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줌.   

[ 2010년 10월 23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 황석영 기록 / 풀빛 / 198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공부모임 100회 특집 ’내 인생의 책’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이 책 역시 처음 출판 즉시 ’판매금지’되었고 나는 대학교 1학년 시절인 1985년 책이 발간된 해에 읽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책 형식이 아니라 자료집으로 읽었던 것 같다. 교정에서는 518 민중항쟁에 대한 사진전이 학생회관을 비롯한 교내 곳곳에서 진행되었고 수 많은 대자보가 학생회관 벽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미 각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의 실체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성격과 의미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대자보에는 1학년 학생들과 다른 학생들을 위해 광주학살의 책임자를 ’5적’, 즉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이희성(혹은 주한미군,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워컴을 지칭했음)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유엔사령관이자 주한미군사령과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고 20사단을 광주에 투입하는 것을 용인, 허가한 것 때문에 이미 선배들로부터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의 원흉이자 배후조종으로 규탄되고 있었다.
 
광주항쟁에 대한 자료는 학교 내에서 선배로부터 전달받았음에도 우리는 강의실이나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아닌 비공개 지역에서 읽어야 했다. 당시 교정에는 사복경찰과 안기부(지금의 국가정보원), 프락치가 상당수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료집을 도서관 1층 열람실에 숨어 읽었다. 광주학살에 대한 전후 배경과 공수부대 및 20사단의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20년 동안 살아오면서 내 머리 속에 굳어진 국가, 군대, 정부, 정의, 양심, 자유, 평등, 헌법, 법치주의 등 모든 개념이 무너졌다. 이미 3월부터 교정의 각종 대자보와 유인물로 인하여 어느정보 고정관념이 깨었고 역사, 철학, 사회, 근현대사, 민중 등에 대해 어렴풋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나에게 ’광주학살’은 명확하고 분명하게 진실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 부모 세대들이 죽을 때까지 일제와 625 전쟁에 대한 잔상과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광주항쟁’은 나에게, 우리 세대에게 씻을 수 없는 분명한 생각과 의식을 각인시켰다. 광주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살인마들이 이 땅에 버젓이 살아있고 권력을 누리는 한 나와 우리 세대들에게 대학도, 평온한 삶도, 공부도, 꿈도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가슴 속에 티끌만치라도 양심과 인간성이 살아있다면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현실과 체제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렇게 이 책은 내게 다가왔고 ’광주’는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고 그 이후의 모든 세계관과 생각과 행동의 준거틀로 자리잡게 되었다.
 
--------------------- * 황석영(黃晳暎)은 누구인가? --------------------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 단편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한일회담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를 따라 전국의 공사판을 떠돈다. 공사판과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등에서 일하며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 위해 입산,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해병대에 입대,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이때의 체험을 담은 단편소설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다시 문학으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1974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장길산]은 지금까지도 한국 민중의 정신사를 탁월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9년 방북 후 독일 미국 등지에서 체류했으며 1993년 귀국하여 방북사건으로 5년여를 복역하고 1998년 석방되었다. 이후 장편 [오래된 정원] [손님][심청, 연꽃의 길] [바리데기] 를 발표하며 불꽃 같은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의 그늘]로 만해문학상을, [오래된 정원]으로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손님]으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중국, 일본, 대만,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장길산] [오래된 정원] [객지][무기의 그늘][한씨연대기][삼포 가는 길]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객지][가객][삼포 가는 길][한씨연대기][무기의 그늘][장길산][오래된 정원][손님][모랫말 아이들][심청, 연꽃의 길][바리데기]등이 있다. ---------------------------

1부. [밀려드는 역사의 파도]
1. [역량의 성숙]과 2. [민중항쟁의 발단]에는 1979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사살한 이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치군인들이 군사쿠테타를 일으키는 사건에서부터 518 광주항쟁의 직접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1980년 들어 민주화와 민간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드높은 가운데 최규하 과도정부가 정치일정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에 따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집회와 시위의 현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전남 민주화운동권과 광주 학생운동 세력의 성격을 정리한다.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다다르던 5월 14일부터 15~17일 동안 서울 지역의 시위현황과 광주시만의 독특한 시위 모습을 정의한다.


2부. [피와 눈물의 5일간]
3. [산발적이고 수동적인 저항]에는 5월 17일, 18일 양일간 전두환 쿠테타 세력이 권력의 주도권을 쥔 이후 전국에 확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화려한 휴가’로 명명된 공수부대를 광주시 전역에 투입하여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4. [적극적 공세로의 전환]에는 5월 19일부터 공수부대는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고 광주시의 항쟁의 중심이 학생운동에서 민중봉기로 진화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어용언론과 제도언론은 광주시의 참상과 진실을 함구하고 왜곡했다. 광주의 시위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방어망을 구축하고 시민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형태를 보인다.
5. [전면적인 민중항쟁]에는 5월 20일부터 광주시 전체 민중의 전면적인 항쟁을 다룬다. 택시 부대가 등장하고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자동소총에 짱돌과 몽둥이로 대적했다.
6. [무장투쟁과 승리의 쟁취]에는 5월 21일 차량 시위가 이어지고 시위대의 지도부와 계엄군간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총기를 든 시민군의 등장이 나타난다. 시민군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차량을 징발하여 계엄군과의 전투에 동원했다. 오후부터는 광주시를 빠져나간 시위대가 전남의 소도시 지역으로 시위를 확대하면서 영광, 무안, 화순, 강진, 장흥 등지에서 소총을 들고 시내에 진입했다. 급기야 계엄군은 전남 도청에서 전술적으로 퇴각한다.



















3부. [광주여! 광주여! 광주여!]
7. [해방기간 1]에는 5월 22일 해방 첫 날의 모습을 기록했다. 대학생들과 지역 유력자들 중심으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고 도청 앞 광장에서는 민중들 중심으로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도청 지휘체계는 처음부터 총기 수거와 협상 여부에 따라 혼란과 분열을 거듭한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발동하여 전두환이 광주시를 무력진압하는 것을 동의한다.
8. [해방기간 2]에는 5월 23일의 광주를 기록했다. 광주시 외곽을 차단한 계엄군과 시민군을 전투를 계속한다. 광주시를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와 광주시 외곽으로 나갔다고 광주시로 들어오는 시위대는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다. 수습위원회는 협상과 투항의 갈림길에서 분열되고 숨은 지도부에 의해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된다.
9. [해방기간 3]에는 5월 24일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의 모습과 학생 수습대책위원회의 분열을 기록했다. 항쟁기간 동안 광주시는 범죄율과 사건사고가 대폭 줄어들었다.
10. [해방기간 4]에는 5월 25일 벌어진 계엄군 스파이에 의한 독침 사건을 고발한다. 재야 민주인사들의 모임과 청년지도부가 도청 상황실을 장악한다.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하여 본격적인 항쟁지도부가 탄생한다.
11. [해방기간 5]에는 5월 26일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의 모습과 항쟁지도부의 활동, 계엄군의 전략과 공작을 기록했다.
12. [항쟁이 확산]에는 5월 18일 이후 목포, 함평, 무안, 나주, 영산포, 영암, 강진, 장흥, 해남, 화순지역으로 어떻게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어떻게 시위와 항쟁이 진행되었는지 기록한다.










 
4부.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시작]
13. [항쟁의 완성]에는 5월 27일 마지막 투쟁을 준비하는 도청 상황실의 모습을 기록했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의 결연한 의지와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27일 새벽 최후의 항전을 기록했다.
14. [끝나지 않은 투쟁]에는 5월 27일 항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과 새로운 연대, 그 후의 사건들을 기록했다.
부록에는 부상자 명단과 구속자 명단을 담았다.



처음 이 책을 도서관에 숨어서 읽어을 때에는 장면 하나하나, 목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 했다. 방망이로 머리가 깨지는 장면, 대검으로 쑤시는 장면, 발가벗겨서 트럭에 집어던지는 장면, 안타까워 하는 얼굴과 분노하는 표정, 전옥주씨의 목소리... 5월 17일 장면부터 시작하여 5월 19~20일에 살해되는 대학생과 직장인, 여학생, 시민들의 모습은 결국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한참 눈물을 흘린 뒤 이를 악물고 마지막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언젠가 외국 기자가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학생회관에서 상영하여 본 적이 있었고 1989년에는 광주항쟁을 다룬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를 학생들이 함께 보기 위해 대학마다 대대적으로 경찰들과 싸웠다. 2007년 영화화된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 주연 김상경, 안성기, 이요원, 이준기)를 볼 때에도 아련한 기억이 여전했다.
 
이제는 내 나이 사십대 후반에 접어든 탓인지 26년 만에 읽으니 대학교 1학년 시절과 같은 감정이 복받치거나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광주항쟁에 대한 광주시민의 상징이던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절차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2011년 현재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를 맞이했는데...
 
이 땅에서 다시는 광주와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광주를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다시는 일제와 같은 군사적 제국주의에 이 땅이 짓밟히지 않기 위해 31운동과 반일투쟁, 독립투사를 기억하고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정치군인이나 잘못된 정치인을 만나면 국민을 살해할 수 있다는 교훈,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미국에게 주어진 서글픈 현실,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총을 들고 일어선 광주민중들의 고귀한 의지와 넋... 이 모든 것들은 대대손손 기억하고 되새기고 다짐해야만이 미래가 불안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희망에 가득할 것이다.
 
* 책의 집필 등에 대한 논란의 진상 : 주간지 [신동아]의 2010년 12월호 기사로 인해 올해 초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인터넷 언론사인 [광주인
http://gwangjuin.com]의 1월 3일 기사를 옮겨 놓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경위

2011년 01월 03일 (월) 17:02:26 전용호 문화활동가 475story@naver.com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집필과 출판 경위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의도(?)는 무엇?

1980년 5·18항쟁의 실상을 다룬 최초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출간과 관련하여 집필자인 황석영 작가에 관한 월간 <신동아> 2010년 12월호의 기사 등의 내용을 반박하며 실제 당시의 출판 경위를 밝힌다.

필자 전용호는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으로 5·18항쟁에 ‘투사회보’ 제작자로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현재는 5·18항쟁 국가유공자로 광주에서 살고 있다. 전용호는 1980년대 초반, 광주·전남기독청년회, ‘일과 놀이 문화운동기획실’, ‘민중문화연구회’등의 조직에서 상임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자료수집 등 활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책의 집필과 제작경위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



   
▲ 책 표지.
아래 글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황석영 작가의 집필 경위와 관련하여 2010년 월간<신동아> 12월호가 인용한 2009년 5월 19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다.

“황석영은 그동안 1980년 5월 광주항쟁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라는 책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이 책을 쓴 작가가 황석영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글은 광주시민 전체가 저자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당시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기자이자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소속인 이재의 기자가 쓰고 상황지도는 조양훈이 그렸다는 구체적 반박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그 책이 황석영 기록이라고 되어 있지만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황석영은 이에 대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왜 ‘황석영 기록’이란 이름을 넣어야 했는지, 그 책의 인세를 왜 자신이 가져갔는지, 왜 이 책의 지은이라고 약력에 버젓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는지.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황석영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위 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잘못되어 있다. 가장 잘못된 대목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을 왜 황석영이 마지막 작업을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인세를 황석영이 가져갔다고 허위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대목도 그렇다. 그리고 정리 작업을 맡았던 이재의도 당시에는 대학 제적생 신분이었으며 훨씬 나중인 1990년대 이후에 광주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위 기사는 내용도 조잡하지만 기사 작성의 의도도 매우 불순한 것으로 보인다. 정론지라고 불리는 오마이뉴스에서 왜 이런 기사를 내보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1980년 5월 현장에서 수없이 밤을 보낸 김아무개 시인은, --(중략)--- 1980년 5월 그날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갈 때 황석영은 광주에 없었다’라며 ‘그가 광주의 아들이라고?, --(중략)---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황석영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광주와 전남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과 1980년 오월 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쉬쉬하고 있었지만”

위와 같이 비난과 비방투의 기사는 매우 비겁하고 유치하면서도 졸렬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집필과 출판 경위를 밝힌다.

5·18항쟁이 발발한 후 참혹하고 처절했던 항쟁의 진상을 낱낱이 기록하여 온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항쟁의 현장인 광주에서 모든 참상을 몸으로 겪고 낱낱이 지켜보았던 광주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소위 ‘5·18항쟁백서’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 중 항쟁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실행하고자 했던 당시 광주지역 그룹은 크게 세 갈래였다. 그 그룹의 대표적인 운동가를 꼽아보자면 첫째는 1979년 광주에 설립된 현대문화연구소 정용화 소장(당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이다. 둘째는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한 조봉훈 이다. 셋째는 전남대학 출신 민주화 운동가인 이재의, 조양훈 이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민청학련’ 사건 출신 운동가 윤한봉이 지역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총의를 모아 1979년 설립한 연구소로 광주·전남권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연구소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후원자들을 조직하여 감옥에 갇힌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시국 강연회 등 계몽문화운동을 펼쳤다.


   
▲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2008년 10월 8일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초청으로 교육공학관에서 ’나의 근작에 대하여’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광주인
정보과 형사들은 현대문화연구소 전화를 도청하고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파악하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1979년 11월 윤한봉과 김희택의 뒤를 이어 정용화가 소장이 되었다. 5·18항쟁이 발발하자 정용화는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비교적 일찍(1980년 11월) 형집행정지(형면제?)로 출감했다. 5·18항쟁 이후 정용화는 광주권 재야인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유일한 소통 역할을 하고 있었다.

둘째는 조봉훈의 활동이다. 조봉훈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80년 8월 이후 출옥하였다. 조봉훈은 1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시나 소설을 읽고 공부하던 문학서클 ‘아들’의 회원들과 함께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고 5·18항쟁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는 유인물을 여러 차례 만들어 광주시내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1981년 6월 30일경 그 중의 한명이 잡히면서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그 때 서울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배되어 광주에서 도피하고 있던 소준섭(외국어대 78학번)도 조봉훈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당시 조봉훈 도 5·18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셋째는 이재의 등의 활동이다. 이재의는 5·18항쟁 이후인 1980년 9월 경 전남대학에서 유인물 배포와 관련하여 구속되어 형기를 마쳤다. 이재의는 ‘5·18항쟁백서’ 작업이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주장하며 개별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세 갈래로 진행되다가 1983년께부터 작업이 통합되었다. 광주 운동권에서 여러 팀이 5·18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그 작업이 통합될 필요가 제기되었다. 조봉훈의 구속도 통합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었다. 자료를 한 군데로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또한 전담할 사람에게 제공할 최소한의 활동비도 준비되어야했다. 1984년 11월 18일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창립준비위원장; 정용화)가 창립(의장; 정상용, 수석부의장; 정용화)되면서 5·18백서 간행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때 광주일고 출신으로 서울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 근무하던 임상택(당시 서울상대 중퇴)이 자신의 저서(알기쉬운 경제이야기?)를 출판하고 받은 인세 전액을 5·18백서작업 비용으로 정용화 부의장에게 넘겨줬다. 정용화는 자료취합과 정리 작업 실무를 이재의에게 맡기고 매월 일정액의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렇게 5·18백서 간행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5·18기념일에 5·18백서 간행을 목표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5·18자료 수집과 정리 및 집필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5년 초 5·18백서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출판 문제가 거론되었다. 누가 집필의 책임을 지고 어느 출판사에서 제작할 것인가였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치하로 집필자는 물론이고 출판사 대표도 모두 구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를 두고 서울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가들이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서울에서 회의 참석자는 정상용, 문국주, 나병식 등이고 광주에서는 정용화, 이재의, 전용호 등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광주출신 민주화운동가인 나병식이 운영하는 풀빛출판사에서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출판 책임은 당시 광주권 민주화운동 연대기구인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책임을 지고 대표 집필은 소설가 황석영 씨에게 의뢰하기로 하였다.

황석영 소설가가 집필 책임을 졌을 때 획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출판했을 때 대중적 파급 효과가 커지면 5·18항쟁의 진상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황석영 소설가가 유명 작가이기 때문에 수사당국에서 쉽게 연행하거나 구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셋째는 거친 문장의 초고를 명쾌하게 다듬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보다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는 기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황석영 씨가 그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출판사 대표인 나병식 씨의 의견이기도 했다. 출판 결정이 되기 전인 1985년 초에 서울에서 최종 회의가 있었고 이 자리에는 김근태(당시 민청련 의장, 전 국회의원), 신동수(민문연, 풀무원 창립위원), 정상용(도청항쟁지도부 외무부위원장, 전 국회의원), 채광석(민통련, 문학평론가, 작고) 나병식(풀빛 출판사 대표) 황석영(소설가) 등이 참가했다. 황석영은 이 자리에서 대표집필의 책임을 질 것을 기꺼이 수락했다.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책임 및 각계 배포 문제였는데 나병식과 황석영이 출판과 집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감당한다는 결정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조직 사건이 될 수도 있으니 출판사와 집필자 두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연루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차적 접촉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정용화에 의해 이재의 팀이 정리한 초고가 같은 해(1985년) 3월 초 전용호를 통해서 황석영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초고는 문장이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여기저기 중복되어 있어 나중에 완성된 원고 분량의 서 너 배 쯤 되었다.

황석영 작가는 약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그 원고를 다시 정리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서술하여 5·18항쟁을 체계적으로 담은 최초의 기록으로 완성해냈다. 원고는 풀빛출판사로 넘겨졌고, 제작과정에서 사찰당국에 의해 1만권이 통째로 압수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사건 때문에 나병식 사장은 수배가 되었고 수배 중에 몰래몰래 제작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은 디자인도 없는 하얀 백지의 표지로 시중에 배포되었다. 그 사건으로 나병식은 구속되고 재판까지 받았으며, 황석영은 도피 중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다. 당시의 공안 당국은 김지하 시인의 전례를 보아 대중적으로 알려진 황석영을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되면 광주의 진상이 더욱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출국을 권고했다.

황석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세계 작가대회’에 참가했다가 유럽, 미국, 일본 등지를 순방하며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광주항쟁 보고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해외 운동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결집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황석영은 애초부터 인세를 원하지도 않았고 풀빛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주는 인세는 정용화에게 전달되었으며 정용화는 그 돈으로 광주권 민주화운동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황석영은 어떠한 작업 팀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또한 당시의 상황 아래에서는 불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기록 과정에 대하여 우선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대담이나 인터뷰 등을 통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사람들이 동참했던 작업임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방북과 십여 년에 걸친 망명 투옥 등의 기간 동안 이러한 사실들은 잊혀졌던 것이다.

이제 삼십년이 지나서 이러한 비방과 헛소문이 나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한 광주의 불찰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작업은 당시 상황에서 개인의 공명심이나 명예를 위한 일이 아니었고 ‘진상’을 알리는 위험한 책임을 감당하는 일이었다.

황석영과 광주운동권

황석영 작가와 광주운동권은 어떤 관계이기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대표 집필을 맡게 된 것일까. 어떻게 작가가 자신이 정리한 자료도 아닌데 대표집필이라는 역할로 자신의 이름을 걸 수가 있는 것일까. 보통은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그것은 황석영을 유명한 소설가로 보는 일반적 통념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당시 1980년대, 더 정확히 말하면 1978년부터 1984년 경까지 황석영과 광주 민주화운동권과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에 살던 황석영 소설가는 한국일보 <장길산> 연재 중에 전라도 해남으로 이사와 김남주 시인과 더불어 농민학교 운동에 참여했다가 광주로 옮긴 것이 1978년이었다. 광주에 온 황석영은 그 때부터 광주의 민주화운동권, 그 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기획하고 참여하였다.

1978년 겨울에 광주 문화운동권을 창립하기 위해 진행했던 청년 학생들을 위한 ‘탈춤학습’으로 서울과 다른 지방 연희패와의 연결을 해냈으며, 1979년 진보적 연희운동을 표방한 마당극단 ‘광대’의 창립과 1979년 돼지파동을 극화한 마당극 ‘돼지풀이’공연에 그는 후원자이자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깊숙이 참여했다.

1980년 5월 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때 황석영이 광주에 없었던 것도 극단 광대가 공연할 소극장의 계약금과 무대세트 등 건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로 돈을 구하러 갔다가 5·18항쟁으로 길이 막혀 광주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림동 그의 집에는 계엄사 합조대가 예비검속을 하러 들이닥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서울의 그에게 연락해준 바 있다. 새로 임대한 소극장에서 연습 중이던 극단 광대 단원들은 5·18을 맞아 궐기대회 등을 주도하면서 항쟁에 깊이 참여하였고 항쟁이 끝난 후에 김태종, 박효선, 김선출, 김윤기 등 여러 명이 투옥되고 수배되었다.

1982년 황석영 작가 운암동 자택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하여 제작한 노래극 ‘넋풀이’는 그 중에 실린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지금도 민중애국가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 노래극은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집 등에서 몇 구절의 시를 골라 노래 가사용으로 고치고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대학가요제 수상자인 김종률이 작곡하고 광주 민주화운동가이면서 노래를 잘했던 김은경, 오정묵, 임영희, 임희숙 등이 노래를 불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테이프는 당시 기독청년협의회에 넘겨져 2천여개가 제작되어 전국 대학가에 배포되면서 국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 우리는 그 테이프를 시작으로 십여 종류의 노래와 방송 테이프를 지하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들 모두 우리들과 함께 황석영이 주도하였고 비용도 모두 자신이 제공했던 것이다. 그 이후 ‘님을 위한 행진곡’과 관련하여 저작권을 주장하거나 저작료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다.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사실상 그 후에 진행된 작업이다. 황석영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원고 마감에 쫓겨 원고 보따리를 서울까지 가지고 가서, 출판사 부근에서 여관생활을 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어떻든 1978년부터 1986년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은 작가이기 전에 광주의 민중문화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다. 광주에서 문화운동을 지도하고 직접 실천하고 온갖 경비를 모두 제공하였던 실질적인 광주 운동권, 특히 문화운동권의 ‘맏형’이었다. 1980년대 광주 시절 황석영의 활동은 같이 늙어가는 우리와 시민들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 2011년 6월 08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7년부터 시작된 공부모임이 지난 5월 말에 100회를 맞이했다. 참으로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공부모임의 역사를 이어나간 것이다. 나는 작년 11월부터 참석하여 초창기 참석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뜻 깊은 100회를 축하해주었다.
 
100회 기념으로 참석자들이 의견을 나누어 [내 인생의 책]을 발표하기로 했다. 나는 이 책 <아리랑>과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그리고 <민중과 지식인>을 선택했다. 세 권 모두 대학 1학년 시절에 읽은 것이다. 이 세 권 이외에도 내 인생에 커다란 깨달음과 소중한 지혜를 안겨다 준 책은 많았다. 굳이 꼽아 보자면, 소설 책으로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에세이로는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인문사회과학으로는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 자연과학으로는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경제학으로는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 등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 책은 위 세 권을 필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 권의 책은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앎이나 지혜를 배우지 못하고 대학에 갓 입학한 나를 이끌어 주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헤매고 있는 나에게 문자로서 방향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 세 권을 읽고 책 속의 지혜와 철학에 따라 그 이후의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자부하지는 못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느 누구와도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가끔씩 가슴으로 느끼고자 노력하고 세상을 알려고 노력하고 아는 만큼 실천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한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국가나 사회에, 주변에 크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세 권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청년의 고뇌와 투쟁을 통해 조선인 혁명가로 거듭난 김산(본명 장지락)의 삶을 벽안의 젊은 여성작가 님 웨일즈가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철저하게 호흡해 간 지식인의 생생한 전기이자 숨 가쁜 동아시아 역사의 기록이고 증언이며 역사가 명하는 바에 따라 불화살같이 살아간 한 조선인 독립혁명가의 피어린 발자취이다.
 
내가 읽었던 1985년 당시에 이 책은 ’금서’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대학생 및 일반인들을 진실과 진리로 안내할 수 있는 대부분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다. 당시에는 ’금서’ 뿐 아니라 ’금지곡’도 있었고 ’상영금지 영화’도 있었다. 그만큼 사상과 학문의 자유, 진리와 학습의 자유가 박탈되어 있었고 더불어 집회, 시위, 결사, 언론의 자유 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수 많은 ’금지사항’들이 군화발로 버젓이 강요되었다. 한국에 처음 이 책을 소개한 사람이 고 리영희 교수였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리영희 교수님의 발자취가 한국의 현대사에 깊숙이 남아있음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 김산은 누구인가? ---------------------------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평북 용천 출생. 일본, 만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누비며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24년 고려공산당 베이징지부를 설립하고 1925년 중국대혁명에 참가하였다.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님 웨일즈와 만나게 되었고 님 웨일즈는 이 만남의 성과를 담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를 출간했다. 1938년 중국공산당 사회부장 캉성(강생康生)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으나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하였다. ---------------------------------------
 

-------------- 님 웨일즈는 누구인가?----------------------------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우. 신문기자이자 시인이며 계보학자로 활동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써낸 에드가 스노우와 결혼하기도 했다. 님 웨일즈라는 필명으로 여러 권의 저서를 내었으며, 오랜 기간을 격변하는 아시아에서 보내면서 중국과 한국에 관한 많은 집필을 하였다. 마오쩌둥에 대한 저술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우를 만나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1930∼40년대 중국을 누비며 모택동의 대장정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번 오르기도 했다. 저서로는 ’Inside Red China’, ’The Chinese Labor Movement’, ’Red Dust’, ’Sketches and Autobiographies of the Old Guard’ 등이 있다. ------------------------------


 
책은 소설의 형식과 자서전의 형식으로 저술되어 있다.
[서장]에는 님 웨일즈가 처음 김산을 만나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면을 회상하는 것이다
1. [회상]에는 김산이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조선인으로서 자신이 다른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고개를 몇 고개나 넘었고 앞으로도 넘을 것임을 다짐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 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 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 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 것이다."(p.49)
2. [조국에서의 어린 시절]에는 김산이 평안북도 용천에서 9남매 중에서 셋 째로 태어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큰 형과 작은 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 [독립선언]에는 어린 김산의 눈으로 본 3.1운동의 구체적인 모습과 개인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4. [동경유학 시절]에는 3.1 운동 이후 일본 동경으로 넘어가 고학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룸펜인텔리겐차의 생활과 학생운동, 1923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5. [압록강을 건너서]에는 만주에서 조선 민족주의자의 군관학교에 가기위해 걸었던 700리의 도보여행, 만주 합니하의 조선 독립군 군관학교 생활을 이야기한다.
6. [상해, 망명자의 어머니]에는 1920년 상해에 도착한 이후 공부하면서 이동휘 장군, 안창호, 이광수를 만나 함께 활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산은 여기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세 명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가장 큰 영향은 금강산 승려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김충창, 두 번째는 안창호 선생, 세 번째는 해륙풍 소비에트 지도자 팽배이다.
7.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김산은 무정부주의자 그룹에 가입하여 활약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8. [걸출한 테러리스트 : 김약산과 오성륜]에서 김산은 조선인 테러리스트인 김약산(김원봉)과 오성륜과 사귀고 함께 지낸 과정을 이야기한다.
9. [결코 결혼하지 않으리라]에서 김산은 여성과 혁명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논리를 이야기한다. 김산은 이에 대하여 안창호와 톨스토이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말한다.
10. [톨스토이에서 마르크스로]에서 김산은 1921년 이후 자신이 북경에 도착한 후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기 시작했고 1923년 경에는 공산주의 운동만이 조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희망이라고 단정한다. 김산을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이었고 톨스토이의 글과 사상은 김산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1. [중국 대혁명에 참가하여]에는 1924년 손문의 지도 아래 중국혁명이 일어나 좌익으로 급선회한 해였다. 중국대혁명은 1925년 광동에서 일어났고 1927년까지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테러리스트 800명이 참가하였다.
12. [광동꼬뮨]에는 1927년 12월 10일 김산을 비롯한 20명의 조선인과 엽정 등 중국공산주의자들이 광동을 공격, 점령하여 소비에트 정부를 구성한다. 하지만, 광동꼬뮨은 준비부족과 전략전술의 실패로 인하여 3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김산은 꼬뮨의 시작부터 백색테러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13. [해륙풍에서의 삶과 죽음]에는 김산이 광동꼬뮨 실패 이후 혁명 잔존세력과 해륙풍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면서 중국 국민당 및 군벌과 싸우는 과정이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김산은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었고 건강히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14. [상해에서의 재회]에는 김산이 홍콩에서 상해로 건넌간 뒤 김충창, 오성륜과 재회하고 1929년 북경으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다.
15. [위험한 생각]에는 북경으로 돌아온 김산이 북경 공산당 비서가 된 이후 중국인 아가씨(유령)의 애정 공세에 쩔쩔매는 과정을 담고 있다.
16. [다시 만주로]에는 김산이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에 의해 만주로 파견되어 활동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7. [위대한 첫사랑]에는 1930년 김산이 만주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유령의 애정을 받아들여 공식적으로 사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차이점을 해소하지 못하고 포기한다.
18. [아리랑 고개를 넘다]에는 1930년 11월 북경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취조받고 석방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섯 차례의 물고문에도 변절하지 않은 김산은 마침내 석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간다.
19. [당내투쟁과 개인적 투쟁]에는 김산이 북경으로 돌아간 1931년 6월 이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의심받고 스파이로 재판을 받고 혐의가 풀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산은 그 이후 인민전선을 내용으로 하는 노선투쟁을 전개한다.
20. [살인... 자살.... 절망]에는 중국 국민당과 군벌에 의해 북경 공산당이 와해되는 가운데 김산이 결핵에 걸리고 좌절한 가운데 과거에 자신을 스파이로 고발한 한씨를 죽이려다고 포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한 후 천천히 의지와 기력을 회복한다. 이 때 김산은 괴테, 테니슨, 키츠, 잭 런던, 업톤 싱클레어, 발자크 등의 책을 섭렵한다.
21. [다시 대중운동으로]에는 1932년 이후 보정부의 제2사범학교에서의 강의와 조직화 등 대중운동으로 복귀한 이후 활동을 담고 있다. 1933년 이후 국민당과 군벌의 토벌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와해의 위기에 빠진다. 
22. [다시 일본에 잡히다] 김산은 1933년 4월 두 번째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조선으로 송환되어 가혹한 수사를 받았지만 김산은 다시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난다.
23. [두 여인] 석방 이후 김산은 함께 체포되었던 중국인 여인이 김산에게 애정공세를 퍼부은 끝에 둘은 결혼한다. 그 후에 김산은 다른 활동가 여인과 잠시 동안 3각 관계에 빠지기도 한다.
24. [항일전선] 1935년 상해에서 조선의 제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조선혁명의 지도자들이 모인다.  1935년 중국공산당 주도로 홍군과 중화소비에트가 국민당과 항일연합전선을 제창하자 조선 혁명가들 역시 중국민중과 협력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민족전선-저선민족해방동행과 조선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한다.
25. [해배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자만이...] 김산은 1936년 8월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서북에 있는 중화소비에트 지구에 파견될 대표로 선출되어 연안에 도착한다. 김산은 다시 결핵이 발병한 상태였다. 

 

김산은 책의 말미에 작가의 글을 빌려 자신의 세계관을 말한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인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되는 피억압자 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저하지 않는 사람, 일체의 새로운 세계를 최후의 전투에서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뿐이다. ...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 소수는 보호되어야 한다. 소수는 변혁의 최소 도구요, 다수의 자식이며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숨통을 막는 것은 단지 괴물을 키우는 것일 뿐이다. ... 주어진 다수의 투표는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 다수가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는 그와는 별개의 문제다. ...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변증법적인 것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선이라는 것을 배웠다. 오류는 인간 발전의 통합적인 일부분이며, 사회변화 과정의 통합적인 일부부인 것이다. ...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버렸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 수백 명에 이른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p.296)

작가는 한국 내 어느 역사가도, 후손도 밝히지 못한 조선 혁명가 중 한 사람을 발굴하여 전세계에 소개했다. 그럼에도 한국정부는 독립군이자 혁명가였던 김산을 예우하지 못하고 있따. 이런 외국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젖어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에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 많은 독립군과 혁명가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김구와 김규식 등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개적이고 공격적인 노선으로 삼지 않은 일부 임시정부 요인들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5,000년 간 이어온 조선의 역사가 단절된 것이다. 민족과 역사 앞에 그깟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서구와 미국,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이념을 초월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을 발굴하여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따라 배우지는 못하더라도...
 
작가는 김산을 ’참된 도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김산은 거짓과 허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거짓말 같은 것은 아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작가가 접한 김산은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였고 시대가ㅏ 낳은 하나의 순교자였다. 다행이 김산은 1980년대에 중국공산당으로부터 1960년에 받은 ’수정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스파이의 누명을 벗었다. 김산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강생에 의해 비밀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작가에게 있어 끔찍한 잔악행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당시 33세였던 김산은 일본의 억압 아래 있던 동시대 한국인들에게는 영명한 지도자요 사상가였으며,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소유한 순수한 인도주의자요 더 없이 존귀하고 고귀한 인물이었다. 김산의 삶과 역정은 작가를 통해 전 세계에 조선인(한국인)의 위대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김산이라는 역사적 존재는 처음 나에게 ’영웅’으로 다가왔다. 그는 바다 건너 핏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현실적이지 못한 외국의 영웅도 아니고 수 백년, 수 천년 전의 신화에 쌓인 ’을지문덕’도 아니었다. 고작 50년 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강점에서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봉건과 압제의 사슬에서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다 바친 선배였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은 일제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에는 여전히 외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고 외국군을 한국정부가 제어하지 못하고 외국의 경제에 국내경제가 종속되어 있는 현실, 군사정권이 헌법상의 국민의 권리를, 타고난 사람의 권리와 행복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현실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이 책과 김산의 생애를 받아들였다. 우리가 김산처럼 혁명활동을 펼쳐나가지 못할지라도 그 분의 의지와 노력, 그 분의 철학과 열정을 최대한 본받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그래도 하루하루 학생운동이 힘들었던 1980년대 중반에 열혈청년학생들이 추위와 배고픔, 억압과 울분, 최루탄과 경찰폭력에 대항하여 굳은 의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하는 산 교과서에 다름 없었다. 물론 교과서만큼 당시 학생들이 실천하고 성과를 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당시 김산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따르려는 노력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뒤늦게나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다. 우리만이라도 그 분을 기억하면서....
 
[ 2011년 6월 07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