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1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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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야기 영국사>와 <영국문화 바로알기>에 이어 영국을 여행하기 위해 읽은 세 번째 책이다.
출발하기 전에 런던과 인근지역에 대한 부분만 읽었고 런던에서 돌아온 다음에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미국 아이오와주 태생인 저자는 젊어서 유럽 배낭여행을 마치고 잠깐 들를 속셈으로 방문한 영국에 아예 정착하게 되었다 .
정착한 후에 버지니아 워터에서 현재의 아내를 만났고 만난 지 여섯 달 후에 결혼까지 했다.
영국인들과 함께 20년 동안이나 어울려 살았지만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가 20년간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영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며 고별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부인에게는 자유로운 쇼핑의 기회를 선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굳힌 저자는 마지막으로 영국을 돌아보기로 결정하고 프랑스 칼레로 간다.
다시 여행하기 20년 전 영국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도버해협을 건너기 위해서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도버를 출발해,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를 지나 스코틀랜드 최북단 존 오그로츠까지 영국 전체를 구석구석 꼼꼼하게 훑는다.
때로는 타인의 입장에서, 때로는 거주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영국은 저자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과 사건들로 얼룩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에게는 젊음이 함께했던 사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영국은 축구라면 밥 먹다가도 뛰쳐나가고,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데도 날씨가 좋다고 말하며, 길 찾는 이야기로만 반나절을 떠들 수 있는 특이한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영국인들은 언제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고 '뭔가 부족하거나 없어도 잘' 지낸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애정을 담아 가꿔온 집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그 영국 여행(1995년)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행 초기에 저자는 주로 자신이 몸담았던 장소들에 대한 추억거리를 풀어놓는다.
지금보다 더 낯설고 더 이해하기 힘든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겪은 황당한 사건들은 이제 가볍게 떠들 수 있는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 영국은 그때는 몰랐었던 낯선 풍경이 남아 있는 곳이자 영원한 탐구대상이다.
30마일을 가기 위해 120마일을 이동해야 하는 영국의 철도체계나 2175년이면 모두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영국의 귀족들, 사람과의 접촉을 꺼렸지만 200명은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무도회장을 가졌던 포틀랜드 공작, 말장난으로 가득한 영국인들의 작명 센스 등 저자의 시점으로 재탄생한 영국 이야기들은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거기다 그의 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발칙한' 유머는 덤이다.

지금까지 그의 여행기가 늘 그랬듯이 이 책에도 거침없는 입담뿐 아니라 그의 해박한 지식이 여실 없이 드러나 있다.(이런 입장은 출판사의 의견...)
특히 천혜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은 눈물겨울 정도다.
아마도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는 안정적이고 오랜 역사로 인해 나라 전체가 '어린이 그림책에 나올 법한' 전원풍경을 갖게 되었는데도 영국인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그 문화재라는 것도 영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별 것 아니다.
한국이나 동양 각 국의 문화재와 비교하면 누추할 수도 있는 것들...
어느 곳에나 넘쳐나는 오래된 가옥들, 들판의 울타리 담장들, 빨간 공중전화부스들이 그것이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닌 자신이 사랑했던 곳과 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떠난 그의 여행은 '좋든 나쁘든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는 마지막 고백으로 끝난다.
그의 고집스런 영국 사랑은 우리에게 신비로우면서도 낯선 영국과 영국인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준다.
또한 자신이 살아온 곳, 내가 사랑하는 곳에 숨겨진 나만 아는 이야기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말로 다 전할 수 없도록 좋은 곳', 영국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보통의 여행기가 그렇듯이 저자 역시 자신의 감정과 주관에 근거하여 영국의 이곳저곳에 대한 분위기와 풍경을 설명해준다.
특히나 저자는 20년간 삶으로 살았던 영국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면서 여행기를 써내려갔기 때문에 남다른 추억과 감정, 그리고 정보들을 책 속에 쏟아낸다. 
자신의 과거 추억과 기억이 여행기에 많이 담기면서 여행기는 다소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인 감정과 판단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다.
(저자의 다른 나라에 대한 여행기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영국에 대한 여행기만 그런 것인지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아이오와주 태생의 앵글로색슨의 후예라는 느낌이 강하다.
 
가볍게 여행기를 읽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지만, 저자의 인문사회적인 식견이 천박하게 느껴져 책을 읽는 중간중간에 다소 불편했다.
문학적인 소양과 표현력도 부족하고(기자출신이라 신문기사나 칼럼같은 느낌), 글 속에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자본가와 노동착취에 대해서 선입견과 편견이 가득하다.
저자가 영국에서 보낸 시간만큼 영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 애정의 뿌리나 알맹이는 없는 '앵글로색슨'이기 때문이라는 느낌만 남는다.
 
그래도 저자의 장점은 오랜기간 영국에 있었고 기자생활을 오래했기에 영국 곳곳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는 웬만한 영국 내 여행지는 대부분 담겨 있다.
특별한 생각이나 계획없이 영국 전체를 돌아보기 위해 저자의 책에 의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다...
 
 
* 책 속의 문장
- 오랫동안 나는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념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회조직을 두고 한 매우 유의미한 그 실험이 러시아인들이 아닌 영국인들의 손에 맡겨졌다면 훨씬 더 잘해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혹독한 사회주의 체제를 성공적으로 주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영국인들에게는 고스란히 제2의 천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처 부인이 증명해 보였듯이 독재정권도 용인하며 수술이나 생필품 배달이 몇 년이나 늦어져도 아무런 불평 없이 기다릴 사람들이다. 중얼중얼 권력에 대한 조롱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절대로 반항하는 법이 없는 재주도 갖고 있다. 부와 권력을 쥐었던 자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낄 줄도 안다. 이들은 스물다섯 살만 넘으면 동독 사람들처럼 옷을 입는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를 시행하기에 딱 맞는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란 뜻이다.(/ 5장 중에서)

- 버지니아 워터는 영국에서 가장 특이하고 별난 지역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미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똑같이 섞여 지내기 때문이다. 상점 주인들이나 지역 주민들이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 역시 존경스럽다. 그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 지냈다. 파자마를 입고 수세미 머리를 한 남자가 제과점 한쪽 구석에 서서 벽을 보고 큰소리로 열변을 토해내도, 눈동자를 굴리며 연신 미소를 짓는 사람이 술집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한 스프에 각설탕을 떨어뜨리고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정말 가슴 따뜻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6장 중에서)

-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영국인들의 태도에 당황하곤 했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엄청나게 불안한 국면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달라질 거야.' '더 나쁠 수도 있었는데 이만한 게 다행이지.' '대단한 건 아니지만 싸니까 기분 좋잖아.' '이정도면 정말 괜찮은 거지.' 하지만 나도 점차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갔다. 황량한 해변을 산책 나갔던 어느 날 축축해진 옷을 입고 추운 카페에 앉아 있다가 밀크티 한 잔과 케이크가 나오자 '오, 최고야!'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나 역시 똑같아지고 있음을. 내 삶이 풍족하고 부유해졌다.(/ 7장 중에서)

- 포틀랜드 공작 5세인 스코트 벤팅크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의 영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년의 벤팅크는 역사에 기리 남을 위대한 은둔자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사람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별 이상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 웅장한 집에서 아주 작은 공간을 마련해 머물면서 방문을 뚫어 메시지 상자를 달고 그 안에 쪽지로 글을 적어 하인에게 전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음식은 부엌에서 식당까지 조그만 철로를 만들고는 그 위로 운반했다.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공작은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면 하인은 가구라도 되는 것처럼 모른 척 하고 그곳을 지나갔다. 이것은 모두 사전에 미리 준비된 훈련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은 하인은 공작의 개인 스케이트장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스케이트를 타야 했다.(/ 16장 중에서)

- 솔테어는 1851년에서 1876년 사이에 타이터스 솔트 경이 세운 공업단지다. 그는 19세기가 배출해낸 산업주의를 지향하는 자본가로서 절대금주주의자이고 독선적인데다 하나님을 숭배했다. 한마디로 그는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가 지은 기숙사에서 살아야 했고 그가 다니는 교회에 예배를 드려야 했으며 그의 지시를 일언반구의 어김없이 따라야 했다. 마을에는 선술집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았고 지역의 공원에서도 고성방가, 흡연, 오락 등의 꼴사나운 행동을 철저히 금지했다. 사람들은 실든 좋든 간에 아주 맑은 정신을 유지한 채로 부지런하고 얌전하게 지내게 있었다.(/ 18장 중에서)

- 오래전부터 가지고 다니면서 한 번씩 꺼내보고 좋아하는 신문 스크랩이 하나 있다. [웨스턴 데일리]의 일기예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날씨 전망,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입니다. 하지만 비가 조금 내려 기온이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날씨를 완벽하게 표현한 의미심장한 문장이다. [웨스턴 데일리]에서는 이 기사를 매일 고대로 내보내도 틀리는 법이 거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 신문사라면 정말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24장 중에서)

- 애버딘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나는 천천히 새로 들어선 쇼핑센터 주위를 따라 상당히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모두들 특색 하나 없이 금방 잊힐 건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진짜 문제는 애버딘이라기보다는 현대 영국의 특성에 있었다. 영국의 도시는 한 벌의 트럼프카드 같다. 마구 뒤섞이다 끝없이 다시 나눠진다. 같은 카드인데 순서만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다른 나라에 있다가 애버딘에 처음으로 왔다면 매우 독특하고 생동감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날로 번영하며 깨끗한 도시라고. 서점과 극장, 대학 등 도시에서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으니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라고 확신한다. 다만 다른 곳과 너무나 닮아 있을 뿐이다. 영국에 있는 도시니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27장 중에서)

-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돌집 하나가 있다. 나의 조국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집이었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하지만 이 매혹적인 작은 나라에는 이곳 못지않은 장소가 너무도 많다. 갑자기, 순식간에, 영국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좋던 나쁘던 영국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오래된 교회도, 시골길도, 지나친 낙관주의자들도, '정말 죄송한데요'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내가 모르고 팔꿈치로 툭 쳤는데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도, 병우유도, 토스트에 들어간 콩도, 6월에 건초를 만드는 일도, 바닷가 부두도, 왕립지도원에서 만든 지도도, 밀크티와 핫케이크도, 여름 소나기도, 안개 자욱한 겨울날도 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사랑했다.(/ 30장 중에서) 
 [ 2011년 1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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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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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들에게 그의 시와 노래 ’노동의 새벽’은 뼛 속 깊은 울림이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전쟁같은 밤 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자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그 시인은 노동자의 새벽을 열기 위하여, 노동해방을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조직을 건설하여 그 거대한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거대권력 앞에 가로막혔고 거대권력의 철창에 갇혔다.
 
’시인이자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온몸을 던져 살아온 박노해.
그의 삶과 투쟁은 1980~90년대의 우리 땅의 모습 그 자체였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강권통치로 어둠이 가득했던 시절, 그는 우리들의 희망이자 노동해방과 민주화의 상징이었으며, 19990년대 분단 대치 중인 한국에서 절대 금기시되는 사회주의를 천명하며 자본주의와 강권통치에 맞섰다.
사회주의가 노동자,농민,서민을 해방시키는 길임을 믿고 혁명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던 그 때,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붕괴 현실을 목도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실패한 혁명가’로서 정직하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그 결과에 절망하면서 그동안의 과정과 시대의 변화에 맞는 내부로부터의 성찰과 자기쇄신을 통한 새로운 진보이념을 개척하기 위해 함구해왔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자유의 몸이 된 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다"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할 때가 있다 / 누구나 옳은 말을 할 수 있을 때는 / 지금, 삶이 말하게 할 때이다’ (’깨끗한 말’) 라며 그는 홀로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의 현장에서 글로벌 평화나눔을 펼쳐왔다.
동시에 "온몸을 던져 혁명의 깃발을 들고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는 처절한 자기고백과 함께 지구 시대의 인간해방을 향한 새로운 사상과 실천에 착수해왔다.
스스로 잊혀짐의 시간을 선택한 박노해.
그 긴 침묵의 시간이 잉태한 시대정신의 한자락이 이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의 이번 신작 시집은 12년만에 출간된 것이다.
이 시집은 그가 10여 년의 침묵정진 속에서 육필로 새겨온 5천여 편의 시 중에서 304편을 묶어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저주 받은 고전’ <노동의 새벽>(1984)으로 문단을 경악시키고, 민중의 노래가 되었다.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1997),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희망이다>(1997)와 <오늘은 다르게>(1999), <겨울이 꽃핀다>(1999)를 출간한 이후,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긴 침묵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
이 시를 통하여 그는 이념이 붕괴하고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가 전지구와 한반도를 점령하는 이 시기, 길 잃은 이들에게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새로운 주체 선언으로 또 한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그의 시는 그가 발바닥 사랑으로 걸어다닌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의 넓이만큼 넓고, 그의 정직한 절망과 상처와 슬픔과 기도만큼 깊으며, 참혹한 세계 분쟁현장과 험난한 토박이 마을의 울부짖음과 한숨만큼 울림은 크다.
가난하고 짓밟히는 약자와 죽어가는 생명을 끌어안고, 국경 없는안ㄷ 적들의 심장을 찌르는 시.
가진 자들에게는 서늘한 공포와 전율을, 약자들에게는 한없는 위안과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는 묵직한 감동과 뼈아픈 성찰을 안겨준다.
그의 시는 지구시대 유랑의 시이고, 순례의 시이고, 목숨 건 희망찾기의 시이다.
이 시집은 21세기로 다시 태어난 <노동의 새벽>이다.
 
시인은 가치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나에게 차분히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 분의 말처럼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깨닫고 정립하고 싶다.
그 분처럼 내 주변에서부터, 이웃에게, 부족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자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나에게 기대해본다.

내가 이 시집을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다.
모든 이들에게 직접 음미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 감명깊게 접한 시들
- ’ 넌 나처럼 살지 마라 ’(p.14)
- ’ 너의 눈빛이 변했다 ’(p.25)
- ’ 자기 삶의 연구자 ’(p.36)
- ’ 아이폰의 뒷면 ’(p.49)
- ’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p.52)
- ’ 사람의 깃발 ’(p.61)
- ’ 말의 힘 ’(p.83)
- ’ 안 팔어 ’(p.85)
- ’ 도시에 사는 사람 ’(p.121)
- ’ 혁명은 거기까지 ’(p.130)
- ’ 건너뛴 삶 ’(p.142)
- ’ 유산 ’(p.152)
- ’ 속울음 ’(p.184)
- ’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 ’(p.195)
- ’ 그리운 커닝 ’(p.197)
- ’ 다 아는 이야기 ’(p.222)
- ’ 거대한 착각 ’(p.248)
- ’ 삶이 말하게 하라 ’(p.253)
- ’ 어린 수경 ’(p.254)
- ’ 우리는 ’바보’와 사랑을 했네 ’(p.266)
- ’ 우리 밀 ’(p.298)
- ’ 촛불의 아이야 ’(p.300)
- ’ 보험 ’(p.311)
- ’ 두 가지만 주소서 ’(p.319)
- ’ 주의자와 위주자 ’(p.347)
- ’ 시간의 중력 법칙 ’(p.370)
- ’ 너의 날개는 ’(p.385)
- ’ 내가 쓰러질 때 ’(p.387)
- ’ 경운기를 보내며 ’(p.393)
- ’ 크게 울어라 ’ (p.395)
- ’ 사람이 희망인 나라 ’(p.397)
- ’ 나랑 함께 놀래? ’(p.400)
- ’ 젊은 피 ’(p.408)
- ’ 틀려야 맞춘다 ’(p.410)
- ’ 구명 뚫린 잎 ’(p.425)
- ’ 참 사람이 사는 법 ’(p.443)
- ’ 성숙이 성장이다 ’(p.449)
- ’ 명심할 것 ’(p.461)
- ’ 사과상자 ’(p.467)
- ’ 대한민국은 투쟁 중 ’(p.475)
- ’ 고모님의 치부책 ’(p.501)
- ’ 정점 ’(p.504)
- ’ 뉴타운 비가 ’(p.513)
- ’ 오래된 것들은 아름답다 ’(p.519)
- ’ 래디컬한가 ’(p.535)
- ’ 겨울 사랑 ’(p.545)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p.552)
 
이 책의 제목이자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히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흙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히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대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2011년 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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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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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어에 짐을 꾸리고
인천공항을 나서고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그리고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

그곳에선 낮의 뜨거운 태양, 밤하늘의 달마져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설레였다
속을 간질이고 빨라지는 심장 박동수....

여행
저마다 목적도 달랐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또 다른 나, 자아의 재발견이었고 삶의 목적을 바꿔 놓는거

이 책을 읽으면서 분명 그녀가 산티아고의 길을 밟은 이유는 나와는 또다른 방식이었지만 부러웠다.
저마다 여행을 통해 느끼는 바도 분명 다르겠지만 그녀가 자신과의 줄을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그 무언가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녀의 설레임, 두근거림, 슬픈 그렇지만 시원한 울음, 외로움, 상쾌한 웃음, 깨끗한 만남, 그 모든 게 잠시나마 내가 거쳐 왔던 여행의 순간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순수한 영혼들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과 자유

사실, 요즘 나에게 조차 적응 못했고, 낯설었던 내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었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거 같다
그리고 다시금 그 길을 떠나기 위해, 비상하기 위해 조금은 참아내야지...스스로를 다독거리게 되었다.
나만이 깨달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그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조금은 아껴두는 노력이 꼭 필요하니까

가본 적은 없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내 모습을 조금은 상상하고 싶어졌다
나라를 옮겨 다니며 여권에 비자를 받고 스템프를 채워나가는 뿌듯한 기쁨에 크레텐시알 도장까지 받는 또다른 즐거움이 생기는 기분 좋은 곳이니까
책을 읽는 내내 자작나무 밭을 지나 러시아를 횡단하며, 분명 고됬지만 간간히 만났던 눈물나게 푸르렀던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다시금 그 곳을, 그리고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선사해 준 산티아고 길을 나도 걷고 싶어졌다.


* 후기
- 이 책은 작년에 저자로부터 직접 선물받은 것이다...^^
  대학 동기들끼리 <내 인생이다> 출판 축하모임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 이 독후감은 나에게 이 책을 빌려간 회사 직원(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이 다른 책을 선물받기 위해 반은 강제로 작성한 것이다...ㅋㅋ
- 여행의 대한 많은 이들의 정의와 목적이 "또 다른 나, 자아의 재발견"이고 "삶의 목적을 바꿔 놓는 것"이라고들 한다. 나는 아직 그런 경지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듯하다. 나에게 여행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주변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자연과 새로운 환경에서 조용히 아무런 생각없이 지내는 것’이다.
- 아직 난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직원의 독후감으로라도, 책 속에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사진만 보고 있어도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길이다. 굳이 순례가 아니라도...


[ 2011년 1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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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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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 리영희선생과 처음 대면한 것은 그분의 책을 통해서였다.
대학 2학년 때인 1986년, 어느 선배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빌려주어 읽게 되었다.
나는 이미 대학 1학년 시절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태백산맥 1,2,3>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서 내가 20년간 듣고 배우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존 지식과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중국혁명과 베트남 공산화,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모습, 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한마디로 ’발상의 대전환’이었고 ’대오각성’ 그 자체였다.
그 뒤 <우상과 이성>을 또 읽게 되었고 그 당시 지독하게도 경멸해 마지 않던 기성세대, 교수, 지식인들을 대신하여 리영희선생은 나에게 ’본받고 싶은 어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공부나 토론보다 집회와 시위가 잦아지고 서점을 비롯하여 나의 주변에는 수 많은 사상과 책들로 넘쳐나기 시작했고 나의 머리는 한 쪽으로 너무 빨리 굳어져 갔다.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서 그 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선생의 이 말씀은 나에게도 뼈아프게 들린다.
나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참다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분의 삶의 역정을 되돌아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머리 속에서는 알고 있다.
남보다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는 만큼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안다.
 
리영희 선생은 고희를 맞이한 2000년 말 뇌출혈로 쓰러졌다.
뇌중추신경에 큰 손상을 입어 오른쪽 손과 다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이 곧 사회적 참여요 실천인 지식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리영희 선생 본인도 ’지적 활동과 글쓰는 일’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고백한다.
오른손의 마비로 저술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구술을 녹취해 원고지 2,700매 분량의 자서전을 만드는 일은 그의 초인적인 인내와 끈기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리영희 선생의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되살려내는 일은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이 맡았다.
기획과 원고 구성에 대한 협의가 끝나고, 대담을 완성한 후 녹취한 구술을 풀어내 다듬고 보완해 초벌 원고를 만드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
리영희의 전작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자료들을 연구해 대담을 준비한 임헌영 선생의 혼고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수십 번씩 자료와 육필 원고, 사진 등을 찾아내 확인하고, 수십 년 전의 붕우들에게 때마다 연락을 취해 인명 하나까지 거짓 없이 전달하려 한 노학자의 모습은 존경을 넘어 벅찬 감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힘겹게 준비된 초벌원고에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꼭 부여잡고 한자 한자 교정을 보아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그 자체로 한 편의 휴먼 드라마이다.
 
리영희선생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참다운 지식인’이라고 말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이다.
그는 오직 한국 현대사의 온갖 질곡 앞에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겼다.
그는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모든 글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이것, 온전한 진실을 써내려간다는 이 기본적이고도 충실한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히 이 책에는 해방 후 미군정기 남한사회의 혼탁상에서 625전쟁의 비극과 한국군의 실상, 419 혁명과 516 쿠테타, 1212 쿠테타와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최근 국내외 정세에까지 개인사의 기록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소중한 증언으로 기억될 내용들이 가득하다.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1999년 서해교전까지 그의 엄정하고 예리한 분석은 여전히 무딘 우리의 역사인식을 벼린다.
625전쟁 당시 미군의 장교복을 끝까지 입지 않고 작업복만으로 군복무를 마친 일화를 두고 한국군의 정체성을 논하는 부분(173쪽), 박정희의 검은 안경을 통해 분석한 박정희 인물론, 박정희와 노무현이 미국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하는 대목(280쪽) 등에서 자신의 경험을 날것으로 쉽게 일반화하지 않고 철저한 반성 속에서 녹여낸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을 따라 풀어 놓는 그의 체험과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다.
선생의 어린시절과 일제 하의 성장과정, 분단과 전쟁 당시의 상황과 고민을 들어보는 것도 새롭고...
 
1970~80년대가 지나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민주화를 거둔 1990년대 이후 리영희선생은 “내가 할 역할은 다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고통 앞에서 그가 보여준 정신의 크기는 왜 우리가 여전히 리영희를 읽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리영희선생과 임헌영씨의 대화이지만, 리영희 선생은 독자들에게 또 다른 대화를 제안한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그 시대를 인간적 고통과 분노, 상처투성이의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기성세대나, 앞 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맛보고 있는 지금의 행복한 세대의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직면했거나 처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보기를.
그럼으로써 이 자서전의 당사자와 대담자가 책 속에서 진행한 것과 같은 자기비판적 대화의 기회로 삼기를.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나와의 비판적 대화도 가질 수 있기를....”
 
이 책을, 그리고 50년 넘게 그 분이 남긴 저서들을 차분히 다시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분이 온몸으로 부딪혀서 깨우치고자 한 진실과 생각은 아직 이 사회에서 널리 퍼져있지 못하다.
우상은 여전히 다른 얼굴과 모습으로 전국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고 폭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다.
 
* 이 책은 지난 1월 11일 새해 첫 번째 공부모임의 부교재였다.(주교재는 <리영희평전>)

책 속의 문장
-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경찰총감과 총경 30명 중의 25명(75%), 경감 139명 중 104명(75%), 경위 969명 중 806명(83%)가 일제에 충성을 바쳤던 자들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15년이 지난 1960년에도 일제 경찰 전력자 총경의 비율이 70%, 경감이 40%, 경위가 15%였다. (p.81)
 
- 전쟁을 한 번 겪고 나면 모든 것이 무효로 돌아가고, 뒤틀리고, 깨어지고, 그리고 무(無)가 되어버리게 마련이에요. 전쟁의 전투현장에서 전개된 인간 비극보다 오히려 전선 뒤 인민대중의 생활과 그 사회의 구조적,기능적 틀이 겪는 파괴가 더욱 혹독하지요. 전쟁은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짓이에요. 전쟁은 무슨 이유나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어요. 통일을 가져온다 해도 나는 전쟁은 절대반대야.(p.170)
 
- 남한의 국가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은 권력 장악과 몰락은 물론이고 집권기간 중 거의 모든 결정이 미국이라는 ’빅 브라더’의 손바닥에서 놀아온 것이오. 남한의 역대 권력자가 아무리 자기 딴에는 손오공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날뛰어봐도 그 모든 그리고 낱낱의 행동은 미국 권력집단의 손바닥에서 노는 거예요. 그런 인식이 있으면 뒤에 숨어 농간을 부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집권자들의 실태가 보이기 시작하지요.(p.260)
 
- 요컨대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천황 숭배자이면서 민족의 배반자였고, 해방이 되자 그 당시 남한의 사상적 주류였던 남로당에 재빨리 편승했는가 하면, 여수/순천 사건으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사상과 충성을 맹세했던 남로당은 물론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고 있던 비밀당원의 명단까지 미국 군정에 팔아넘긴 자로서 철저한 기회주의자이고 변절자였지.(p.287)
 
- 박정희의 516 구테타에 앞서 1960년 케네디 대통령이 경제학 교수 월트 로스토를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회의 고문,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합니다. 로스토 교수의 소위 [독재개발이론]과 [경제성장의 5단계 : 반공산주의선언(1958)]이 케네디의 후진 동맹국가 운영정책의 기둥으로 채택된 거요. 이는 바로 후진/미개발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미국적 군부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우선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실현한 후, 그 바탕 위에서 후진 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개혁하면서 경제건설과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는 개발이론이지.(p.293) 
  
[ 2011년 1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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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지음 / 푸른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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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읽은 류시화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자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았던 시집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읽어본 후 류시인의 시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이 시집은 그가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을 중단한 후 8년 만에 외부에 드러낸 자신의 생각이며, 지난 13년 동안 썼던 시들이 망라된 것이라 한다. 그는 그 사이 전세계 주요 명상서적을 번역하면서 명상가로 거듭나고자 했다.
 
1989년 처음 이 시집이 문단에 발표되고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에게는 적지않은 호응을 받은 반면 문단에서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로 인해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외계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419 혁명 후 다시 뜨거운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몰아쳤을 때, 그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내부로 향했던 것이다.
 
[벌레의 별]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생각으로는 지식과 관념, 도그마와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사람들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감성이 퇴화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인간들도 죽은 사람들이며 노예들이었다. 그는 80년대의 또 다른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불가능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왜곡되고 차단된 상실의 시대...
 
시인 이문재는 그의 작품과 당시 문단이 바라보는 시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의 시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얼핏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가 세상과 격절된 상태로 20대 중후반을 지내왔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댈 수도 있지만, 저 들끓던 80년대에서 자기를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변화 못지 않은 견딤으로 본다... 일상언어들의 직조를 통해, 어렵지 않은 보통의 구문으로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그의 시의 주요한 미덕이다.
낯익음 속에 감춰져 있는 낯설음의 세계를 발견해내는 것이 시의 가장 큰 역할은 아닐까."
 
문단의 혹평 속에서도 이 시집은 1989년~1998년 동안 21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는 [시로 여는 세상] 2002년 여름호에서 대학생 53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년전에 발간된 시집이다. 시인은 그 사이에 여러 시집을 또 발표했다. 이 시집 이후 시인은 또 많이 변화되고 성숙되었을 것이다. 내 눈으로, 내 손으로 음미해보고 느껴볼 일이다.
 
이 시집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체와 미생물체가 함께 들어있다. 하늘에도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도 있고 달과 별도 있고 바람도 있고 새도 있다. 하늘만 있는 하늘은 우리에게 삭막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내부에는 나 뿐 만 아니라 내가 관계한 수 많은 인연과 사건과 관념과 생각이, 꿈과 추억이 함께 들어 있다. 그 인연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체화시키느냐에 따라 사람의 삶을 어둡게 하기도 하고 화나게 하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한다. 

사람의 안에서 사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이며,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신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스승, 신념, 애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나를 흔들고 내 꿈과 만나는 이는 누구일까...
 
[ 2011년 2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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