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이야기 세트 - 전3권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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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된 지명이나 인명이 많다. 그리스의 신화와 전설도 21세기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문과 문화가 재해석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영화 <300>과 <알렉산더>, 그리고 <트로이>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서구인들과 서구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출발한 학문들은 고대 그리스를 잘 알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그리스의 실제 역사는 우리에게 낯설다. 우리나라에는 그리스 ‘신화’ 이외에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많지 않다. 서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 대해 알려면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리스 신화를 창조해낸 그리스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적절하다. 저자 앙드레 보나르는 역사의 눈으로 그리스를 바라본 전문가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그리스인의 모습과 생활상, 그 사상까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스는 신화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간 역사이고 문화인 것이다.

 

<그리스인 이야기 3부작>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논문이나 연구서가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복합한 고증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 우리가 딱딱하게 여기는 지배자나 왕 중심의 '통사'도 아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인문과 사건, 그리고 문화와 작품을 중심으로 그리스 역사를 풀어간다. 자연을 이겨내고 문명을 이루어가는 그리스인의 발자취를 찾고 설명해준다. 그래서 이 책에는 그리스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 즉 그리스 문명을 기획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책은 투튀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같은 통사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다른 재미가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 등 고대 그리스 문인들의 작품을 문명으로 나아가는 그리스 시인의 역작으로 평가하는 등 고대의 작품에 대한 저자의 안목이 탁월하게 느껴져 절로 감탄이 나올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스인 이야기 1>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까 통치 시기까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 문명의 탄생에서 민주주의의 완성 단계까지를 다룬다. 그리스 문명 탄생의 역사적 배경, 그리스 문명 초창기의 사건들, 그리스 민족의 전쟁사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녹아 있는 인본주의, <오뒷세이아>를 통해 본 그리스 민족의 바다 정복기, 그리스 최고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와 자유주의 시민의 탄생, 미지의 뮤즈 삽포와 사랑의 아름다움, 아테네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기원 그리고 상업의 발달과 솔론의 사회개혁, 노예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본 그리스 민주주의의 한계, 인간 중심의 철학인 그리스의 종교, 그리스 비극의 정점인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테네 민주주의의 완성자 페리클레스 등을 다룬다.
<그리스인 이야기 2는 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까지를 이야기한다. 과학의 시대, 철학의 시대, 문학의 시대였던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다룬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그리스 비극의 풍경, 그리스의 조각 예술,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를 통해 본 그리스 과학의 태동, 다시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지만 매우 중요한 그리스 시인인 핀다로스, 지리학자이자 여행가로서의 헤로도토스, 의학의 아버지 힙포크라테스와 그리스 의학, 아리스토파네스의 그리스 희극, 그리스 문명의 쇠락 혹은 방향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스인 이야기 3>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까지를 이야기한다. 즉 그리스 문명의 황혼기를 다룬다. 그리스 3대 비극의 마지막 주자 에우리피데스, 헤로도토스와 함께 그리스 역사의 쌍벽을 이루는 투퀴디데스, 소크라테스를 이어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플라톤, 세상 모든 것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과 그가 만든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그리스 문명의 양상들, 에라토스테네스와 아르키메데스 등 근대 학문에 영향을 끼친 과학자들, 끝으로 인간의 구원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고대 그리스의 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선입견 속에 깊이 새겨진 '신화'를 깨뜨릴 것을 요구한다. 다른 지역,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그리고 그리스인도 처음에는 "원시적인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 중의 그리스'라 할 수 있는 "고대의 아테나이에서도 미신 같은 것이 존재했고, 원시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엽기적인 풍속'도 그대로였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기원전 5세기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총사령관 "데미스토클레스는 승리를 위하여 디오뉘소스 신에게 아테나이 최고집정관의 친조카들을 제물로 바쳤다. 그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세 사람의 목을 졸라 죽였다". 오늘날 유물론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는 데모크리토스는 "월경 중인 여자 아이들은 수확을 앞둔 밭 주위를 하루에 세번 뛰어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월경 때 흘리는 피가 해충을 박멸하는 항생제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게 미개한 원시 종족 수준이었던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알고 자연에 대해 반격을 가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임을 말한다. 발칸반도에서 여러 번 남하한 그리스인들은 원래 유목민이었다. 그러다가 헬라스라는 땅에 나려와 자리를 잡고 척박한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들이 상업을 하게 된 것은 단순히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올리브나무애서 나온 기름과 포도에서 짜낸 포도주를 이웃 아시아 땅에서 만든 옷감과 교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이기 위해 밀과 보리를 흑해 북쪽에서 얻어오려면 바다르루건너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이었다가 농민이 되었기에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알지 못했다. 바닷가에 살던 원주민에게서 새롭게 배운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어에는 '바다'라는 단어가 없었고 원주민들이 썼던 단어 '탈랏사(thalassa)'를 베껴 쓸 수 밖에 없었다.
밭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사나운 배를 타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자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노동요의 리듬을 개발해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것이 시, 즉 서사실고 설명한다. 오래된 영웅들의 삶을 풍부하고도 절제된 리듬에 담아낸 것이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희망과 용기가 솟아났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와 서정시, 극시들은 언어로 빚어낸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그리스인들의 고통과 희망이 들어 있다.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꿈과 환상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무섭고 사나운 자연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의 창조주로서 '신'을 상정하게 되고, 그 신들에게 의지했다. 신들의 형상은 가장 이상적인 인물의 형상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수학을 만들고, 천문학을 개발했다. 물리학과 의학의 기본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리스 지역의 지리적 현황과 경제구조는 그리스가 자연스럽게 도시국가로 발전되도록 이끌었다. 도시는 문명의 힘으로 사회가 되고,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은 평등하게 문명을 향유할 권리를 가졌다. 그래서 불완전하게나마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고안한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문학작품, 특히 비극에 대한 저자의 소개와 분석이 뛰어나다. 이 시기의 그리스 문학작품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해 고민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비극 작품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3천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현대인들의 가슴에 무언가를 던져 준다. 아니 저자인 앙드레 보나르가 <안티고네>라는 작품 속에서 현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천재성과 예술성을 밝혀낸다. 나는 작품의 작가인 소포클레스보다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저자에게 더 큰 공감을 얻게 되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작품 <메데이아>는 자연과 신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던 인간이, 원칙과 제도, 그리고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간이 스스로의 정념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 '악마적 힘'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즉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복잡다단함이다. 또한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이 힘은, 우리 자신이 그 힘에 대항할 수 없고, 그 힘은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임을 말한다. 저자는 또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세계의 무질서, 무정부주의적인 감정, 의지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는 비극성을 읽어낸다. 그리고 <박카이>에서는 "전지전능함을 통해 발현되는 신의 위대함을 포착"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전체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한다. "신들은 아무리 진노했다고 해도 우리 인간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라고...

아테나이 법정에 제출된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소장에는 두 가지 죄목, 즉 '신을 믿지 않는 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가 적혀 있었다. 그는 신성이라는 확고한 실체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유일하게 말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죄의 유무에 대한 판결에서 유죄 281표, 무죄 220표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죄인에게 어떤 형벌을 내려야 할지를 두 번째 재판에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대신 "나에게 보상을 달라.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두 번째 재판은 거의 만장일치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관들에게 말했다.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 올 것입니다. 진실을 위해 종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만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 자들보다 훨씬 더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그는 그냥 사는 것보다 재대로 사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시민법정의 판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테나이 시민들이게, 후손들에게, 그리고 21세기의 우리에게까지도 원칙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부당하게 살아남지 말라고...
저자는 플라톤이 "역사를 배제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플라톤은 아주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세속의 도시,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타락한 민주주의 대신에 모든 영혼이 사후의 내세에서 만나게 되는 곳, 즉 천상의 도시, 천상의 왕국인 신성한 세계를 내세웠다. 그는 신과 밀접했던 그리스의 문화와 종교 대신에 신과 인간이 완벽하게 분리되는 내세와 유일신의 토대를 닦은 셈이었다. 플라톤이 그러한 종교의 기초를 닦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 문명의 쇠락이 단순한 쇠락이 아님을 주장한다. 아니 문명의 역사 자체가 탄생과 소멸, 그리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탄생이 이어짐을 말한다. "문명이나 신앙은 죽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시와 지혜의 세계를 창조하며, 늙어갈수록 희망과 확신을 가져야 할 새로운 이유를 스스로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명의 쇠퇴기는 동시에 새로운 발견의 시기이기도 하다. 문명은 변화를 거듭할 뿐 죽지 않는다. 문명의 삶이란 말하자면 항구적인 태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해석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그리스 도시국가의 멸망은 '현대식 '국가'라 할 수 있는 왕조를 탄생시키면서 다시 태어났고, 그리스 문학의 비극과 희극으로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회와 사상의 격변을 통해 플라톤에 의해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그들은 기질이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인간이면서, 인류의 두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위대한 아킬레우스는 통재로 불타고 있는 한 시대에서 마지막 빛을 발한다. 약탈과 전쟁으로 얼룩진 아카이아인들의 시대는 이제 아킬레우스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훗날 우리 속에서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헥토르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한다. 가족과 땅과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지 잘 싸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타협할 줄도 안다. 협정을 맺을 줄도 안다.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음 세대에서 더 넓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할 것이다.
<일리아드>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p.94)

- "오뒷세우스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다. 인간의 지혜는 실질적이고 창조적이다. 세상에 대한 의미 없는 지식을 쌓아놓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그런 지혜다. 신과 적들은 인간이 가는 길목마다 방해꾼을 심어놓고 인간을 끊임없이 불행의 나락으로 인도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지혜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 '재주꾼' 오뒷세우스가 이기는 이유다."(p.121)

- "혹시라도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한다면, 그 발명품이란 어린아이의 입안에 난 이와 같다. 반드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였다. 곧이어 그리스는 죽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p.235)

- "신을 끊임없이 의인화해서 그리스 종교가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서 보여주는 일이다. 인간이 다다라야 할 최후 지점이 올림포스의 산이다. 그 간격을 그리스 사람들은 끊임없이 좁혀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다시 말해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 신은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도시와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p.260)

-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등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이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투영이다. 그래서 진보적이다. 아픈 부분을 자극하고 혁명을 독려한다. 얼핏 보기에는 화해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공동체에 화해가 있고 발전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비극은 진보를 넘어 혁명적 자세에 가깝다."(p.279)

-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판관들과의 대화였다. 이 대화야말로 아테나이 민중들과 나누는 결정적인 대화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진의를 알리고자 시도했으며, 자신의 임무를 설명했다. ……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목숨을 몇 년 더 연장해주는 차원을 떠나 사회의 병폐 중에서도 최악의 병폐인 불의로부터 시민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다. 피고 소크라테스가 주도한 논쟁의 최종 목표는 아테나이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그 결정은 내가 아닌 당신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p.478~479)

- "에우리피데스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이처럼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신이란 곧 전지전능함이며, 전지전능함이 신을 정당화하는 요건이라면, 디오뉘소스는 분명 정당화될 수 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건 말이다. 소포클레스도 말했듯이, “신들이 무슨 짓을 하건 그건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신은 우리에게 죽음을 부여할 뿐 아니라, 우리를 우리와 더불어 이 세계를 춤추게 하고 노래하게 하는 본질적인 힘이다. 신은 사는 기쁨, 쾌락이며 동시에 고통이다. 신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눈부신 신비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는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이고 명쾌한 정의로 이루어진 세계를 버리고 광기의 신과 총체적인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는 동물적인 기쁨만이 중요시되는 박코스 행렬에 합류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p.86~87)

- "플라톤이 구상한 국가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국가, 그 어떤 힘도 예정되어 있는 확고한 질서를 흔들 수 없는 국가라고 하는 거짓 이미지를 선사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점이 플라톤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국가의 가장 이상한 면이다. 절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니. 그가 제안하는 국가에서는 진보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 국가는 영원히 완벽한 존재로 제시된다. ... 요컨대 플라톤은 역사를 배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 역사는 배제하려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인간을 만든다. ... 플라톤이 [국가]를 쓰면서 민주주의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세기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후, 민주주의를 향한 행보는 안정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코뮌과 더불어 보란 듯이 재개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789년 ... 1848년에도 ...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를 뒤흔든 열흘 ...”로 이어진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p.168~169)

- "젊은 왕은 또한 칼뤼아나(그리스식으로는 칼라노스라고 하며, 브라만을 뜻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고행자에게 커다란 애착을 보였다. 죽을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낀 그의 요청에 따라 알렉산드로스는 장작더미를 쌓게 했다. 이윽고 장작더미에 올라간 칼뤼아나는 놀란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마디 탄식도 업이 불꽃 속에서 타죽었다. 친구의 자발적인 죽음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 기독교의 제사장에서 견유 철학자로 변신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페레그리노스가 올륌피아에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이렇듯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지날 무렵에는 그리스식 지혜와 힌두식 지혜가 마주치고 있었다."(p.298)

- "칼리마코스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대인에게 이제는 고전이 된 과거의 위대한 시인들의 모방을 장려하지 않았다. ... 그는 구닥다리 시 장르는 죽은 지 오래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가 부활하는 일도, 비극 작품들이 다시 소생하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서사시가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헛되이 매달리고 있는 연작시의 상투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격언시에서 “나는 연작시를 증오한다. 누구나 지나가는 상투적인 그 길.... 나는 공동 우물의 물은 마시지 않을 것이다. 대중적인 것들은 나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토해냈다."(p.441)

- "크고 작은 혁명들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전복시킨다... 혁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으며, 때로는 이 흐름을 가속화한다. 새로운 계급, 새로운 민족, 계급 없는 민족들이 이 세계를 관통한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유산은 그들의 것이다.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몽테뉴는 에피쿠로스에게서 잊고 있던 조상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와 한 가족이 되었고, 그의 생각을 이어받았다... 헬베티우스는 ‘행복’에 대해서 장문의 시를 썼고, [쾌락 예찬]이라는 글도 남겼다.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지드 등도 그에게 동조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인간 해방자들 중의 한 명으로 예우한다.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는가? 인류는 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는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에피쿠로스가 다시 부상한다.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 하늘의 은하수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p.594~595)

 

[ 2012년 9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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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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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읽은 현대 소설... 사실 박범신 작가는 잘 모른다. 작가의 작품을 한 편도 읽은 기억이 없다. 5월 경에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 <은교>와 <건축학 개론> 등을 주말에 한꺼번에 봤다. 영화 <은교>는 SNS에서 외설 논란이 일던 때였다. 영화를 직접 관람하고 나니 SNS의 논란이 약간 무색해졌다. 영화를 보지 않고 논란에 가담하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은교>와 <건축학 개론>은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봐야지 하다가 시간을 놓쳤다.
그러다가 지역 시민단체 공부모임에서 세미나 교재를 고르던 중 누군가 <은교>를 추천했고, 나도 적극 동의하여 책으로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IPTV로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박범신 작가의 작품도 시간이 되면 꾸준히 읽어야겠다. 작품 속에 인상 깊은 표현들이 많았다.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숲은 하루가 다르게 쓸쓸해졌고, 쓸쓸한 숲이 나의 주인인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들어와 내 마음을 다 차지했다. 산기슭을 타고 내려온 어둠이 내 집의 허리를 뱀처럼 쓰윽 휘감고 나면, 세상엔 원근도 없고, 내 모든 지나간 삶도 쓰윽, 지워졌다."
 
영화 <은교>와 소설 <은교>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그동안 보통 소설 작품을 영화화할 때 줄거리나 주인공의 성격을 바꾸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대신 영화와 소설에서 느껴지는 주제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범신 작가는 이 작품을 <촐라체>, <고산자>와 더불어 '갈망(渴望) 3부작'으로 설명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감히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작가가 작품 속에 녹이려 애쓴 '갈망'은 소설 속에서는 어느 정도 느껴지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다지 느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영화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저물어 가는 석양과 같은 처지에서 느끼는 이적요 시인의 외로움,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걸친 채 하루하루 연명하는 서지우 작가, 정을 주고 받을 데 없이 청소년 시절을 방황하는 고교생 은교. '갈망'의 원인이 '외로움'일 수도 있겠지만...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 한다."
 
영화와 소설은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다르다. 소설에서는 세 명의 화자와 두 개의 시제가 등장한다. 세 명의 화자는 변호사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다. 두 개의 시제는 변호사의 현재 시점과 이적요 및 서지우의 과거 시제다.(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일 년이 되었다. Q변호사는 이적요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막상 노트를 읽고 나자 공개가 망설여진다. 노트에는 이적요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심장>의 작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었던 것. 또한 <심장>을 비롯한 서지우의 작품은 전부 이적요가 썼다는 엄청난 사실까지! (영화에서는 서지우가 질투와 우려로 인하여 소설 <은교>를 몰래 훔쳐 잡지에 발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적요기념관 설립이 한창인 지금, 그 노트가 공개된다면 문단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노트를 공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고, 놀랍게도 서지우 역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듣는다. 은교에게서 서지우의 기록이 담긴 디스켓을 받은 Q변호사는,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디스켓을 통해 그들에게서 벌어졌던 일들을 알게 된다.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다. 질투심이 꼭 정열의 증거는 아니다."

 

시인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신을 '할아부지'라고 부르며, 유리창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는 은교의 발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춘'을 실감한다. 고고하게 은둔하면서 문단을 좌지우지 하고자 했던 그는 '청춘'과 '사랑'이 없었던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고 가짜라는 격한 감정에 빠진다. 한편, 선의로 은교에게 작은 도움을 주다가 서지우는 은교를 바라보는 이적요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갔다. 정에 넘치던 사제지간이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서지우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이적요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갔다.
 
이 작품을 읽는 사람에 따라 통속적인 삼류 연애소설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10~20년 전이였다면, 내가 작가의 '갈망'이라는 설명을 무시하고 '사랑'이나 '질투'로 받아들였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갈망'이라는 작가의 주장에 많이 공감이 된다. 작품 속에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엉켜 있는 사랑이 실타래를 이루고 있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연애소설에 국한시킬 수 없는 까닭이 들어 있다. 남자란 무엇인가. 여자란 또 무엇인가. 젊음이란 무엇인가. 늙음이란 또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소설은 또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 질투란 무엇인가. 남자들에게 여자란 나이가 없는 것이듯, 여자에게 또한 남자란 나이가 없는 것이듯, 작가가 계속해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던져진 질문에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몸을 빌려 살아가고 살아내고 죽어가고 죽음으로 작가가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망'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주인공 이적요 시인의 '젊음과 늙음'에 대한 소회였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조금 더 직설적이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에 대해 얻어진 상이 아닌 것처럼,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에 대해 받는 벌이 아니다."

 

[ 2012년 9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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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스쿨 상
이석범 지음 / 살림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강준만 교수의 <서울대의 나라>를 읽는 중 책 속에 소개되어 알게된 소설책이다. 이 작품은 김경문 작 <대학 서열 깨기>등 다른 책에도 부분 인용되어 있다.


아내와 이혼한 후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운좋게 강남의 신생 사설학원에 강사로 들어간 주인공(정민수)와 학원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입시 위주의 파행적 교육 현장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비리를 충격적(?)으로 고발한 소설이다.
 
일곱 살짜리 아들 하나를 둔 34세의 정민수... 그는 2년 동안 단 한 편의 명시 [수녀의 거기]를 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무가치한 남편 가슴에 비수를 꽂자'는 '무남비' 운동의 행동대장인 똑똑하고 무서운 아내 류은영으로부터 버림 받아, 아들과 함께 서울에 버려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내가 던져 준 6백만원을 달랑 들고서 드디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주인공...
 
강남 대보동(대치동?)에 위치한 신설 사설학원의 원장 강붕구는 의욕적으로 학원 수강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강사를 새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정민수는 길가에서 정보지를 보고서 국어 및 논술강사로 대보학원에 찾아간다. 학원에서 뜻밖에 대보학원의 기획실 차장인 군대 동기 황재섭을 만나게 되고 운좋게 강사로 채용된다. 황재섭은 자신의 아버지가 학원사업을 하다 주변 동료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죽은 뒤 학원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군대시절 별명이 '황도끼'였다.
새로 강사를 채용하면서 대보학원에는 상담실장  문영달을 주축으로 하는 강사진으로 구성된 '문영달 사단'과 황재섭을 주축으로 하는 '황재섭 사단'이 학원 강의시간과 수강생을 두고 치열하게 암투를 벌인다. 강붕구 원장은 겨울방학을 맞아 '윈터 스쿨' 즉 고2 수강생을 3개월 동안 기숙학원에 받아 '대박'을 노린다. 그는 다른 학원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문광고를 1면에 내면서까지 의욕적으로 학원사업에 착수함과 동시에 학원 내 강사들의 무한경쟁을 노리고 또 다른 임석중 사단까지 끌어들인다. 각 사단은 고등학교 교감이나 선생들을 찾아다니면서 룸쌀롱 접대를 통해 수강생 공급을 청탁하고 선생들과 거래를 맺고 유명인사의 부인들과 경제력이 있는 학부모들에게 '서울대 학벌서열 구조'라는 협박과 회유를 통해 고액 사설과외(일명 '돼지')를 만들어낸다.
정민수는 '황재섭 사단'의 국어,논술강사로 활동하면서 고액과외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서울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다. 비록 단칸방에 어린 아들과 살고 있지만 아들이 혼자 유치원에 다니고 밥을 먹고 지내는 것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다짐한다. 그는 학원의 경리인 최보경과 함께 아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면서 그녀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담임을 맡은 교실의 삼수생 김단(서파공, 서울대 파괴 공작대의 행동대장)과 박교수의 학벌사회, 입시만능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발을 겪으면서 그 자신도 심리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학원 바깥에서는 수능시험 시즌이 다가오면서 연쇄 폭탄테러가 발생한다. 테러는 수능시험을 관리하는 국립교육평가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테러는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수능 일정에 따라 강동교육청, 세원외고, 수능 고사장 신구중학교, 연세대+고려대, 빌라 학원강사의 거주지에서 연이어 발생한다. 과연 누가 테러범일까?
 
'윈터 스쿨'의 수강료는 어마어마하다. 기본 180만원에 오피스텔 숙박료가 50만원씩 3개월이다. 그것만 해도 3개월에 18억원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돼지치기의 경우 국,영,수 돼지 40만원이 3개월이면 학부모들은 950만까지 부담해야 한다. 그럼에도 윈터스쿨은 수강생 1천명으로 시작된다.
 소설은 학원장과 강사들의 갈등, 학원 내 사단들의 암투, 강사들과 학부모들의 거래, 학원과 고등학교 선생들의 결탁, 주인공과 최보경의 연애, 주인공과 이혼한 아내의 갈등, 연쇄 폭탄테러, 윈터스쿨 기간 중의 수강생 변사체 발견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크라이막스를 향한다.
 
작가는 단순히 사설학원의 비리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이 인격도야나 아이들의 장래성,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전투논리 위에 입각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우리의 근본 이념, 근본 방향 자체를 바꾸는 데 있음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서파공'이나 테러범 '하니바머'의 등의 존재는 단순히 소설적 뼈대를 위한 장치들이 아니라,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의 깊이와 넓이를 증명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컴퓨터 통신에 서파공이라는 아이디로 쓴 글들의 제목을 보면 무엇을 문제제기 하는지 알 수 있다.

 
올해 내내 아이들과 학생들의 자살 소식이 잇다른다. 지금 어디에선가 우리의 아이들이 입시지옥에 짓눌려, 시험성적과 경쟁에 시달려, 왕따와 좌절에 못이겨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아이들, 미래의 아이들, 미래의 우리 사회를 위해 대학입시경쟁과 서울대 중심의 학벌서열구조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하거나 끌려다녀서는 안된다.

[ 2012년 6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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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0
손석춘 지음 / 들녘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남북통일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선배와 카페에 앉아 애기를 하던 중 함께 공감했던 대목 중의 하나가 북한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 인민들 삶의 곤궁함은 물론, 북의 정치체제가 조선시대를 방불케 하는 봉건적 절대왕조체제인 점, 정권 지배계층의 안정이 인민의 생존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처리된다는 점, 남북관계 악화로 실제 고통받는 쪽은 집권자측보다 인민들과 하위 조직구성원들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북한이 그동안 자의반, 타의반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정보가 차단되어 있고 미국과 남한의 경우 지배계층들이 정치적, 사적 목적을 위해 북한의 정보를 왜곡, 조작해왔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알기가 쉽지는 않다. 겉보기에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전후의 경제강국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 보면 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 빈민들이 과반수에 이르고 어린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1위에 이를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적 공동체가 크게 무너져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북한 역시 그동안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소식과 달리 실제 내용은 무척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 정권이라도 해서 완벽하게 내부 정보를 차단할 수는 없는 일이고 중국과는 경제,문화교류가 활발한 상태이며 그동안 남북간 경제교류도 진행되어 왔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에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지원이 계속되기 때문에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다. 기본적인 정보는 외부에 제공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특히 지난 20~30년 간 북한정권이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함에 따라 주민들의 사정이 더 열악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아주 빈약한 정보와 편합한 언론 기사, 미국이나 남한정권의 적대적인 공세, 중국이나 일본과의 또 다른 오묘한 정치외교적 관계 등으로 일반인들이 북한 내의 자세한 사정이나 과정을 어떤 흐름을 통해 자세하게 알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부터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터무니 없이 부족하고 편협한 상황인 것 같다.

북한 내에는 지배계층과 조선노동당이나 군대, 다수의 인민들만 존재할까? 오로지 북한정권에 맹복적으로 충성만 하는 이들과 탈북자만 있을까? 탈북자의 경우도 황장엽 같은 고위 간부, 김만철과 같은 인민들만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 전두환, 박정희, 박그네 같은 꼴통들이나 무조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려는 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라 그 사이에 무수한 스펙트럼을 지닌 수많은 생각과 태도를 지닌 이들이 있는 것처럼 북한에도 북한정권을 반대하고 남한 수구기득권 세력을 선호하거나 민주진보 세력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남북의 지배계층을 모두 반대하고 제3세계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북한정권을 반대하면서 장기적으로 북한을 '인민주권'의 국가로 변화시키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실화 같은 소설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부터 책장을 덮을 때까지 '실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 속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생각, 처지, 고민, 상황들에 깊게 몰입되었다. 그가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미군의 평양 폭격으로 처자식이 폭사될 때 허탈감과 분노에 몸을 떨어야 했다. 한국전쟁 후 북한정권의 안정을 위해 박헌영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는 주인공의 태도에 나도 그의 입장을 두둔하기도 했고 그가 변질되어가는 북한체제에 점차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절망할 때 공감할 수 있었다. 암울한 현대사로 인해 중년에 찾아온 '인연'을 맺지 못한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정에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일흔 여덟이라는 고령임에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최고책임자에게 인민의 삶과 대의를 알리고자 했던 주인공의 헌신에 고개가 숙여지고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38년, 식민지 조선에서 연희전문에 등록한 청년 이진선의 일기 형식을 띤 이 소설은 우리 현대사를 장식한 굵직한 인물들의 행적과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길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장중한 역사의 흐름 못지않게 이진선이라는 순수한 사회주의자의 삶을 조망하기도 한다.
이진선의 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순수한 민족애와 휴머니즘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 여전히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최첨단 통신기기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폭넓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사이의 벽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와 보수 단체의 갈등은 점점 깊은 골을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빈부의 격차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인문학의 몰락이 예견될 정도로 사상의 가치가 홀대받고 있는 형편이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p.17)라는 첫 문장은 개인의 삶과 사회주의의 사상적 가치를 우리 시대에 맞게 모색해보려는 작가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기의 작성자인 이진선을 통해 우리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들과 사건을 지척의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 불교계의 거목인 휴허 스님, 남로당의 거물인 김삼룡과 박헌영, 일본 유학시절에 만난 황장엽, 월북한 후로는 김일성과 그 주변 인물들과 어우러지면서 안타까움과 분노의 60년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진선, 개인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삶을 목격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여린과 아들 서돌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광경, 최진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
아름다운 집은 역사의 흐름과 개인의 삶을 거미줄처럼 잘 짜낸,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소설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순수한 꿈이 일그러져 가는 과정을 통해 불신과 분열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희망의 우리 현대사를 살펴보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피부로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역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진선의 일기를 통해 지원병 제도와 조선교육령이 1938년에 실시된 사실, 민족지를 자처하던 신문들이 지원병제도와 조선교육령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한 사실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냉혹한 비판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진선의 일기가 비판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분단된 조국과 그 분단을 고착화하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과 권력가들의 행태이다.
주인공은 남한의 현실뿐 아니라 북한 권력의 심장부에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그들이 순수한 민족애를 어떻게 좌절시켰는지, 지금의 분단 현실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냉철한 시선으로 되돌아본다. 그 과정 속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낯선 북한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전후 사상 재검토의 피바람, 남로당의 숙청,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과 소련 공산당과의 소원해지기도 하고 긴밀하기도 했던 정치적 상황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남녀 성비가 맞지 않으면서 과부와 적령기를 넘은 처녀들이 넘쳐나는 등의 사회적 문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4·19혁명이나 5·16쿠테타, 518 광주민중항쟁, 6·29 민주화 선언 등 굵직한 남한의 역사적 사건을 북한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대면할 수도 있다. 북한의 실상에서 사회주의 사상에서 점점 멀어져가며 몰락하는 봉건왕조의 모습을 주인공은 비정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참한 과거와 현실을 들추어내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 즉 ‘아름다운 집’을 세우자는 뜨거운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잃어버린 우리 현대사를 직시하고, 진실한 삶을 모색케 하는 성찰을 선사해 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 땅 어딘가에서 인민들의 삶과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을 제2, 제3의 이진선, 최진이씨에게 격려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 2012년 4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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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에서 시민으로 -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4
최장집 지음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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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를 총관리하고 시민들을 위해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총리실에서 몇 년 동안 수 천 수 만명의 민간인을 사찰했고 청와대는 이를 은폐하고 검찰은 이에 대한 수사를 축소했다. 측근비리, 성추행, 불법대출, 부정선거...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집권 여당과 청와대, 행정부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 초기부터 언론과 사법권력을 장악하여 자신들에게 우리한 정보만 시민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지 4년이 지나고나니 여기저기서 그동안 감추어왔던 추악한 치부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집권자와 집권여당은 설직하게 공개,사과하고 개선하기는 커녕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권력과 손잡은 언론은 물타기에 여념이 없다. 
정부는 2년 연속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는 넘어섰다고 선전하지만 주변사람들 어느 누구도 이를 실감하지 못한다. 심지어 SBS 방송 앵커도 그렇게 말한다. 정규직 노동자의 월급 대비 65%도 안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에 이르고 실업자가 넘쳐나고 빚지고 망하는 소상공인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5대 재벌기업은 이명박 정권들어 계열사가 50% 증가했고 집권여당이 4년 내내 부자감세에 재벌일감 몰우주기를 했으니 2만 달러의 대부분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쉽게 추축이 될 뿐이다.

나는 1987년부터 20여년간 정치경제적 민주주의 추진하고 확장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그 생각이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되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우리에게 깨닫게해 준 것은 형식적이기만 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 참여와 연대가 없이는 민주주의가 신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지난 25년간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왜 한국의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시청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 수 밖에 없는가? 왜 촛불을 들어도 그 때 뿐인가?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나에게 수긍할만 한 대답을 해주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감정적이거나 편협된 사고가 아니라 이성적인 생각하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에 대해, 운동에 대해서, 정당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기준을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지난 번에 읽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노무현 정권 집권 때 처음 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성공을 평가할 때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적 징후를 말했고, 지역주의·지역 갈등의 폐해를 개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의미와 효과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으며, 민주주의 위기에 “다시 운동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그는 한국 정치에 대해 독자들에게 한국 민주주의와 그 문제를 이해하는 일관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자주 운위되는 지배적인 견해와는 매우 상반된 주장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의 ‘민중’과 ‘민중운동(론)’, 나아가 ‘촛불 민주주의’가 운위되는 상황에서도 ‘사회적 시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기를 요청한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초점은 지난 개혁 정부들의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맞춰져 있으며, 이 문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기도 하다.
다만 저자가 소통과 갈등을 대립개념으로 비교하는 것은 조금 부정적이다. 저자는 책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해 ‘소통’을 강조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민주주의에서는 갈등이 보다 중요한 의미와 효과를 갖는다 말하며,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것만으로는 어떤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려운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갈등'은 한 사회 내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한다는 개념이고 '소통'은 이러한 갈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서로 대화하는 의미라고 할 때 '소통'은 '갈등'과 동전의 양면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여섯 가지다. 첫째 민주주의에서 갈등이 갖는 역할, 둘째 민주화 이후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변화, 셋째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수반하는 경제 문제를 사회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문제, 넷째 민주주의를 운동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이 갖는 한계, 다섯째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광주항쟁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17대 대선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를 통해 저자는 민주주의의 가치, 제도, 실천을 민주주의의 의미와 다이내믹스를 만들어 내는 주요 구성 요소로 상정하고, 이러한 측면 및 이들 간의 연관 관계를 통해 민주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민주주의를 이론이나 다른 나라의 경험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민주화 이후 20여 년의 한국 정치, 특히 노무현 정부의 경험과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갖는 의미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대면해야 할 문제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민중'과 '시민'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개념도 인상적이다. 민중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인 소외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중 개념은 갈등의 혁명적인 해결을 상정하면서 그 혁명의 잠재적인 주체로 설정된 개념이었다. 이와 달리 민주화 이후에 주목받기 시작한 시민 개념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민주적인 해결 주체로 상정된 개념이다. 민중이 정치적 갈등의 혁명화를 위해 설정된 개념이라면, 시민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시민화(문명화), 곧 민주적 해결을 위해 상정된 개념이다. 여기서 저자는 민중 담론의 내용에 주목하면서,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전을 이룬 데 비해 민중에게는 형식적인 인권이나 기본권만 강조되었을 뿐 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보장받을 권리로서의 사회적 시민권에 대한 이해는 지체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민주화의 추동력인 민중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시민으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보장을 요구하고, 그에 바탕을 두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 민주주의는 ‘주체 없는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적 시민권과 시민의 부재에 따른 결과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민중운동 담론은 그 자체 안에 ‘멀지 않은 장래에 빠르게 해체될 수밖에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민중운동 담론은 이념이나 가치 정향에 있어 역사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비전, 도덕주의, 낭만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성장주의 등을 그 내용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에서도 저자는 민중 대신 시민과 시민권의 개념을 제대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시민과 시민권의 핵심 원리는 ‘보편성의 원리’라고 했다. 시민권이라고 말하는 자유와 권리는 공동체의 성원인 개인들에게 보편적이며 평등하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시민의 출현은 민중운동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결과물이지만, 아직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영국 사회이론가 T. H. 마셜의 논의를 옮겨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18세기)와 정치적 권리(19세기), 사회경제적 권리(20세기)로 누적적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점이라면서, 이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밝혔다. 저자가 사회적 갈등 균열에 대응하는 정당체제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권의 진전을 위해서는 시민-유권자의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요구가 정당 정책 대안의 근본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신자유주의와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부의 양극화나 빈곤의 심화 현상 등이 단순히 신자유주의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정책 대안을 채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모든 잘못된 결과들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는 ‘반신자유주의’론이 환원주의적이며 민중주의적 민주주의관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하나의 현실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순한 찬성과 반대 내지 긍정 또는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놓은 현실의 시장구조, 생산체제, 노동시장, 산업·고용 구조의 부정적 효과를 ‘정치의 방법’으로 얼마나 완화·개선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부재 때문에 급격한 신자유주의로 나아갔으며,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는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니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것인가가 한국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강조했던 보편적 권리로서 사회적 시민권의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당체제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운동'과 '정당'을 구분하는 계기는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은 그동안 억압되거나 표출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집단적인 행위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고 이익과 열정,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면서 이를 구현코자 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표출된 이익과 요구가 운동이 끝난 뒤에도 일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일정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일상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제도다. 물론 그것은 없던 제도를 새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제도를 확대하고 개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이 제도화의 계기가 완료될 때까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일상적으로 운영하는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자가 정당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모든 정당, 특히 소외 계층이 참여하고 이를 동원하고 대표하는 대중 정당은 운동에 그 기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당이 제도화의 틀 안에서 사회의 모든 갈등, 이익, 이슈들을 표출하고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도 운동이 역할을 갖는 공간은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보다 필요한 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정당은 운동이 표출하고 제기하는 문제를 정치의 제도를 통해 다루고 해결하는 정치의 중심적인 메커니즘 내지 수단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아무리 사회 문제를 광범하게 제기하고 이를 정부/국가에 압박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의 제도적 틀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특정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정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운동의 경험이 많고 그 전통이 강하지만, 정당은 미약하고 그 전통 역시 약하다. 저자는 운동 자체가 갖는 효과를 부정하지 않으며, 운동과 정당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할 때 나타나는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된 정치 과정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점을 강조한다. 또 이를 위해서는 뚜렷한 가치 지향과 정책 목표를 갖되 그것을 실현 가능한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정당의 존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개혁파 내지 진보파가 싸워야 할 것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있지 모든 책임과 잘못을 외부화하면서 자신들이 남긴 ‘과거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망각하는 데 있지 않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진정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원하고 이루고 싶을 때, 그리고 그 과정이 일부 선각자나 활동가들로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정치와 정당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유권자들을 탓할게 아니라 정치와 정당활동을 하는 주체들이 스스로 그들을 참여시키지 못하는 현실을 반성하고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마치 스스로 심판자처럼 자임하면서 감 내놓아라 콩 내놓아라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개선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것들이라도 참여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각성되는 것이고 단련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결론이 운동이냐 아니면 정당이냐의 이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운동과 정당이 서로 배척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정당으로 수렴되고 정당이 운동의 지형을 넓히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발전 수준을 고려할 때 정당이 운동보다 미약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운동이 정당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의 성과와 결과물이 정당으로 수렴되어 제도화되지 않으면 운동도 정체되어 경직화되거나 약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2012년 3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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