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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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애란 저 <비행운>을 읽고 / 2012. 07., 350쪽, 문학과지성사

8개의 단편 소설을 묶어 고독한 현대인의 짓눌리는 삶을 보여주는 작품 <비행운>은 "날아가는 꿈을 飛行雲"꾸던 주인공들이 "행운이 없는 非幸運" 삶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동경하고('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기의 비행운(飛行雲)을 보면서 어디론가 훨훨 떠나고 싶고('하루의 축'), 실제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도 하지만('호텔 니약 따') 결국 더 나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주인공들의 삶은 21헤기 한국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호텔 니약 따'), 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불안정하고 불만족한 수준이다('큐티클'과 '서른'). 중년 하층민의 고단한 처지를 다룬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나 '하루의 축'에서는 그 곤궁함과 처절함이 더하다.
사정이 딱하고 처지가 어렵다보니 이야기 속의 인간관계는 특별한 악의나 고의가 없더라도 더욱 나빠지기 일쑤다. '호텔 니약 따'에서 두 친구 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너의 여름은 어떠니'나 '서른'에서는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에게서 어이없이 배신당한다. 나아가 '서른'의 경우는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했던 여주인공이 자기 제자를 배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속 골리앗'은 이야기 전개가 악화일로를 거듭하는 구조이고, '벌레'에서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을지마저 회의하도록 결말로 이어진다.

우리는 방송 뉴스와 신문을 통해 '청년실업'이나 '저임금 알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청소 노동자)', '독거청년'과 '다단계 폐해' 등에 대해 중성적 또는 인간의 삶이 사라진 사회적 용어에 대해 이런저런 통계나 정책에 대해 듣는다. 이 작품은 결국 그런 중성적인 단어, 삶이 탈각된 계층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애환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는 셈이다. 그들의 희망과 좌절, 욕망과 절망에 대해...
자신의 주변에 작품 속 캐릭터와 비슷한 친구나 선후배가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이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은 한국사회에 부지기수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주인공들이 고독, 고립, 막막함, 좌절, 공포에 처하게 됨을 보여준다. 그들이 그러한 처지에 몰리게 되는 데에 누군가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개입되거나 주인공 자신이 어떤 분명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욕망과 희망을 가지고 상식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결정과 판단의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주인공들이 겪는 좌절과 절망, 막막함과 공포는 독자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든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간접 경험조차도 쉽지 않은...

정부와 여론조사 결과는 작품 속 주인공들, 즉 1~2인 가구가 전국 가구수의 50%에 달한다는 것을, 저임금 노동자와 실업자를 합하면 1천 만명이 넘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비행운>은 1~2인 가구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져 있는 '버려진' '잊혀진'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 관련 기사 ] - "4가구 중 한곳이 `1인가구'…10년새 1.9배 급증" 2011년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12/12/11/0301000000AKR20121211091300002.HTML)
- "국민 6명 중 1명 빈곤층 연 1000만원도 못 번다" 2012년 12월 (http://m.hankooki.com/t_view.php?WM=hk&FILE_NO=aDIwMTIxMjIxMjExNTE1MjE1MDAuaHRt&ref=www.google.co.kr)
- "비정규직 노동자 831만명, 최저임금 미만 임금근로자 204만명" 2011년 5월 (http://www.saesayon.org/agenda/bogoserView.do?paper=20110615175143094&pcd=EA01)

최근에 읽은 <종이배를 접는 시간>이 희망과 행운을 안고 시작했다가 자본가와 경영자에게 무차함하게 짓밟히는 노동자들의 삶의 실체를 한진중공업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행운>은 희망도 없이, 행운도 기대할 수 없는 '배제된 사람들'의 끝없는 좌절에 대한 '감추어진' 이야기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보다 더욱 열악한 처지다. 언론이나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정당의 손길도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질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시민단체, 종교닺체, 정당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편 소설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화가 나고 답답한 그 무엇이 가슴에 맺혔다. 왜 작가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지 않고 행운을 선사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지금 이 땅의 현실이기 현실이기 때문일까? 
작가는 작품 속에서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그 안에서 인간 군상들의 이전투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주인공들에게 '피해자'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도 않았고 독자들이 측은해하기를 원하지도 면죄부를 위한 알리바이도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감'을 위해서일까? 책의 말미에 작품을 '해설"한 우찬제의 글 "본래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지만, 함께 아파하기를 통해서라면 새로운 날개를 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김애란(작가)은 생각한 것 같다"(p.347)에 일부 공감이 되었지만 독자로서 나는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소설을 읽다가 나이 '서른 즈음에' 이런 작품을 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문득 궁금하다.

[ 2013년 6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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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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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이시우 작 < 비무장 지대에서의 사색 >을 읽고 / 2007. 06., 104쪽, 인간사랑


사진작가 이시우는 최진섭 작가의 <법정 콘서트 무죄>(2012. 10 창해)를 읽으면서 알게되었다. 사진 작품집이니 '읽었다'가 아니라 '감상했다'라고 말하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법정 콘서트 무죄>에서 알게된 이 작가는 예술가이자 사상가이고 평화운동가이자 유엔사령부 등 한국전쟁 전문가였고, 법률가보다 국가보안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제를 정하면 그 주제를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하기 전에는 사진 촬영을 나가지 않는 예술가였고, 주제에 대한 미학적 철학적 역사적 인식이 없이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예술가였다. 오랜 공부와 연구를 통해 필요한 내용이 얻어진 후에 비로소 촬영 준비를 시작한다는 작가. 사진 촬영을 위해 수 없이 많은 날을 촬영 현장을 답사하면서 오래도록 물끄러미 돌 하나,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기곤 하는 작가였다.

그렇게 묘사되고 느껴지는 작가의 사진 작품은 돈을 주고 사서 보는 게 예의리라 생각했다. 100쪽 남짓 되는 사진 작품책을 읽는 데 며칠이 걸렸다. "왜 이걸 찍었을까?" "왜 이런 설명을 달았을까?" 작가의 사진 작품과 시 구절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읽고 이해해보려 가슴으로 받아보려 애썼다. 물론 나로서는 쉽지 않았다. 자주 펼쳐보고 문득 생각나면 펼쳐보면 언젠가 깨달음이 있겠지 생각하며 책꽂이에 일단 꽂아 두었다.

사진 작품에 대한 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송주성이라는 분이 쓴 글을 옮겨 본다. 나의 어줍잖은 서평보다 송주성씨의 설명이 사진 작품을 제대로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질서는 우리에게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실을 매순간 가르쳐 준다. 봄 한 철 살다 가야 하는 풀벌레 한 마리가들판 가득 몰려오는 여름을 막을 수 없듯이 저 당 속 깊은 곳에서 쿵쿵 울리며 다가오는 통일의 역사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 소리를 누가 듣는가? 뻘밭 아래 깊은 땅 속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는 진흙소의 걸음걸이를 누가 듣는가? 연안 박지원 선생은 '농맹(籠盲)'됨을 경계하라고 했다. 천하에 천둥번개가 쳐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고 온 산하 단풍이 휘황찬란해도 소경은 그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들녘에 가득 몰려오는 여름을 아는 농부처럼 통일의 역사를 위해 씨부리는 자는 통일이 걸어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시우의 사진은 그 소리를 듣고 있고, 그 소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는 분단현실을 지시하는 사물의 코앞에다가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것은 역으로 우리로 하여금 분단현실의 증거들과 상처들에 대하여 눈을 들이밀고 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마치 지뢰 표지판에다 얼굴을 들이대고 바라보듯 앵들의 중심에 지뢰 표지판이 커다랗게 들어선다. 그리고 지로 표지판 너머에는 티없이 맑은 조국의 하늘이 시원의 어느 때마냥 끝없이 펼쳐진다.

 

바로 이것이다. 이시우 사진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사진에는 단 두 가지 대상이 대비되어 있는 것이다. 지뢰 표지판, 철조망, 포격으로 뼈대만 남은 노동당사, 총탄이 뚫고 지나간 벽들이 화면의 정중앙부에 '정밀묘사'되어서 우리의 눈길을 사정없이 붙들어 맨다. 그리고 그 사진들에는 어김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과 하늘이 드리워져 우리의 시선을 다시 아득한 어디로 끌고가 버린다. 이 집중과 확산, 화면 가득 확대되고 정밀묘사된 녹슨 철조망과 지뢰 표지판..., 그리고 원시의 그날처럼 아득히 펼쳐지는 아득한 조국의 산하. 너무 삭막하여 가슴이 스산해지고 조금만 오래 들여다 보고 있으면 결딜 수 없는 답답함이 짓눌러 숨을 가쁘게 하는 분단현실, 그 낱낱의 모습들, 그리고 이에 완강히 맞서서 버티고 선 조국 산하의 시리도록 아득하게 아프도록 아름답게 서 있는 모습.

 

그러면 이 사진은 북녘 하늘과 산을 '촬영'한 것인가? 이 사진은 우리가 그 사진 앞에 설 때 완성된다. 왜냐하면 이 사진 앞에 우리가 설 때, 우리는 하나의 관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북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사진은 북녘 하늘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성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찍은 것이다. 그러면 그가 들판을 넘어 그 아득한 하늘을 향해 가는 것은 언제일까? 그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한다."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성은 핵무기를 가득 실은 B-52 폭격기에 대한 뉴스기사를 심드렁하게 보고 듣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대화와 평화가 아니라 대결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미의 긴장, 그리고 동북아시아. 오랜 갈등과 반목과 정치적 악용이 만들어 낸 민족의 불행. 비무장 지대의 녹슨 철마와 지뢰, 들꽃과 철새들은 이런 위기를 알고 있을까요... 겉으로는 평화롭기만 한 비무장 지대, 그 평화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는 언제쯤 다가올런지...

[ 2013년 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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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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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하엘 엔데(Michael Andreas Helmuth Ende) 저, 한미희 역 < 모모 MOMO >를 읽고 / 1999. 02., 368쪽, 비룡소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가 1973년 집필한 흥미진진한 동화로 한국에서도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소설이다.
 
독일 어느 마을 원형극장 유적지에 말라깽이 소녀 모모가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외롭거나 우울할 때, 혹은 삶에 지쳐 피곤할 때, 그녀에게 달려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 모모에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곤 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모모 앞에 아주 강력한 적들이 등장한다. 바로 시간도둑들이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설교하러 다니는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도사들이다.
 
잠시 모모가 마을을 비운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시간도둑들에게 설득되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성공(?)했다. 유명한 인물이 되고 바쁘게 돈을 벌고 있으며 또는 고립되어 노예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모모를 찾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모모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간관념을 주입시키면서 시간도둑들이 그들에게서 모모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마저 훔쳐간 것이다. 시간을 합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향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소비되는 시간 관념이 그들 마음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작품이 우리 가슴 한 부분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우리는 자신이야말로 시간도둑에게서 시간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며 사랑하는가에 따라 시간의길이와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듯이...
 
이렇게 작가는 도둑맞은 시간, 혹은 강탈당한 시간을 성찰해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실 시간의 비밀을 알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시인들에게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실을 채집하는 시간과 사냥한 것을 가족이나 부족과 나누며 향유하는 시간이 있다. 전자가 ‘노동하는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축제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원시적이고 고단한 삶을 영위했지만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행복이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 인생 전체 시간에서 사랑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완전히 노동하는 시간을 제거할 수는 없다. 어떻게 배가 고픈 사람이 어떻게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행복에 대한 원시인의 ‘오래된 미래’에서 우리는 진보의 잣대 한 가지를 얻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 사회는 과거보다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 선진사회는 과거 사회보다 더 진보한 사회인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서 사회 성원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더 많이 허용하는 좋은 사회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를 떠올려보자. 남루해 보이는 이 시절에도 사람들은 노동하는 시간만큼 사랑하는 시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시간, 즉 농번기만큼이나 노동에서 면제되는 사랑하는 시간이 넘치도록 충만했다. 바로 농한기이다. 겨울 동안 아이들이나 친구들과 토끼 사냥이나 꿩 사냥을 떠나는 농부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려보라.
물론 우리 시대 시간도둑들은 당시 농경시대의 낮은 GDP를 내걸며 그때가 불행한 사회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농경시대 경제난을 상징하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그래서 지금 자본주의 사회가 더 진보한 사회라고 설레발을 칠 것이다. 항상 시간도둑들은 이런 식이다. 인간의 행복이 질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의 행복은 자본의 양에 의존한다는 궤변을 펼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금 그렇게 GDP가 높은데도 우리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그리고 덤으로 알아두자.
과거 농경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보릿고개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정부나 지주의 창고에서 곡식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쨌든 최소한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정의로운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도둑들로 가득하다. 안정적 직장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가들,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맞벌이를 강요하는 자본가들, 농한기에 비해 너무나 작은 휴가 기간을 생색이라도 내듯이 허락하는 자본가들, 살인적인 경쟁 교육으로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고 있는 교육 당국자들,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분배를 더 늘리겠다는 미사여구만을 읊조리는 정치가들. 자본주의 체제가 과거보다 진보적이라고 역설하는 지식인들.
거짓말도 반복되면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시간도둑들의 거짓말은 반복되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이 처한 불행에 눈을 감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시간도둑들의 말에 순진하게 속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삶은 원시인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우리는 노동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소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까지 밭을 갈다가, 소는 축사에 들어오면 잠에 곯아떨어진다. 옆에 있는 소와 하루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몸을 비빌 시간도 없다. 소의 일과와 우리의 그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일주일 내내 노동하다가 주말이 되면 쉬기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술을 만끽하는 사랑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GDP가 그만큼 올랐으면, 사회체제는 주5일 근무가 아니라 주4일, 혹은 주3일로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함께 살자'.

불행히도 시간도둑들의 집요한 설교 탓인지 우리는 사랑하는 시간의 증가야말로 사회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가수 김만준도 [모모]를 부르며 절규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는 이 책에서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날이 흐를수록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 2012년 12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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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정치다 - 이헌재의 경제특강
이헌재 지음 / 로도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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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헌재는 전형적인 한국의 엘리트 관료 출신이다. 60년대 '명문고'로서 고교 입시전쟁을 불러온 경기고 출신이자 한국 학벌주의의 본산인 서울대 출신이며, 그 중 가장 엘리트독점이 심한 법대 출신이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원에서 경제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거친 전형적인 미국파 관료라 할 수 있다. 60년대 말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엘리트 관료로 발을 내딛었으며 엘리트 공직생활을 거쳤다. 재무부 재정금융 심의관, 국민의정부에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재정경제부 장관을 거쳐 참여정부에서는 2005년 3월까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실물경제에서 경험도 했다. 80~90년대에 대우그룹에서 대표이사를, 한국신용평가에서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경제분야 종사자들로부터 '모피아의 대부'로 불린다. '모피아'란 재무부와 재정경제부 출신 인사를 지칭하는 말로 재무부 (MOF, Ministry of Finance : 현 기획재정부)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이다. 재무부 출신의 인사들이 정계, 금융계 등으로 진출해 산하 기관들을 장악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면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MOF와 마피아의 발음이 비슷하여 마피아에 빗대어 부르는 모피아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70년대 경제정책을 실무적으로 수행했고, 경제관료로서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IMF 구제금융 조건을 앞장 서서 이행했을 것이고, 참여정부에서 동북아 금융허브와 금융자유화, 부동산 거품의 급증, 공기업 민영화, 재벌우대정책, 비정규직 양산, 부자 감세에 기여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한국에 도입하여 이식한 실무책임 관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최근에 발간한 책을 읽는 이유는 안철수 후보 때문이다. 지난 9월 안철수 후보가 이헌재씨를 경제멘토로 대선 캠프에 합류시킨다는 기사를 접한 직후였다. 안철수 후보가 지난 7월 출간한 <안철수의 생각>을 읽어 보면, 안 후보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와 재벌중심 경제구조, 금융자유화와 비정규직 양산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안 후보가 저자를 영입한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자에게 무슨 '양심의 변화'나 '철학의 대혁명'이 있었던 것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 책은 9월에 발간된 것이지만, 주요 내용은 2011년 하반기에 저자가 특강한 내용을 중심이다. 책을 덮으면서 내 궁금증이 참 허망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칠순에 가까운 이헌재씨의 철학이나 생각이 바뀔리가 없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아마도 안철수 후보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지지가 나에게 그런 생각을 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책의 머리말에 "공직에 있는 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남지만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이 말은 군사정부 10년과 민주정부 10년 동안 엘리트 관료로서 자신이 정부에서 담당했던 경제정책이 좋은 결실을 맺었고, 그런 정책으로 인한 수 십년 간의 중산층,서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 저자는 엉뚱하게도 '과거 시스템'의 종말을 말한다. 현재의 한국사회가 '정부 주도의 경제 정책, 일사불란한 실행, 토론 없는 문화'와 '노인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사회의 중심세력이어야 할 40~50대는 60,70대에 눌려 기회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낡은 세력은 곳곳에서 변화와 발전의 질곡이 되고 있다"라고 진단합니다. 그는 이런 주장을 직접 자신을 겨냥해서 책의 본문에서 다시 꺼낸다. "새 인재들이 새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펼칠 수 있도록 과거의 주역들은 길을 내줘야 한다. 어쩌면 이번을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퇴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변화의 물결에 쓸려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쓸려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는 익사하기 딱 좋은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p.131) 이런 의견은 이 책에서 몇 개 안되는 '인정할 만한 주장'이었다.
이렇게 말했던 그가 몇 주만에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 안철수 후보가 영입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자신이 책에 밝힌 생각을 잊어버린채 찾아갔는지, 안철수 캠프에 들어가기 위해 급하게 이 책을 발간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책을 읽고서 이헌재씨가 "참 두서없는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녔고 정부에서 20년 넘게 경제관료를 엮임한 사람임에도 제대로 된 철학도, 이론도, 정책도, 계획도, 비전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저기서 짜집기한 듯한 단어와 개념과 사례만 나열하고 있다.
공정한 시스템을 말하지만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비판은 책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말에서부터 '창조경제' '창의기업' '열린사회'를 제시하지만 제대로 된 내용은 발견할 수 없다. 책 속에서 서로 논리적 연관성도 없는 공정한 시장질서, 도전 정신, 혁신경제, 창의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안철수 후보의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베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관료의 사례를 접하면 과거 임창렬 부총리의 경우 처럼 한국의 '엘리트 관료'가 얼마나 허약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객관식 사지선다형 문제에 강한 엘리트,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료와의 경쟁에서 앞서는 엘리트, 창조성보다 출제자의 의도에 따른 정답을 먼저 찾는 엘리트, 자신이 뛰어나다는 착각, 권한의 남용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엘리트, 오만과 무능...
 
그리고 그에게는 특이하게도 80~90년대가 '잃어버린 시간'인 것 같다. '60년대식 경제체제'를 말하면서 바로 건너뛰어 2012년을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87년 체제'도 없다. 87년 이후 군사체제의 청산과 문민정부의 등장, 경제권력과 언론권력의 부상, 개방체제, 금융자유화 등에 대한 진단이나 평가없이 한국이 60년대 체제를 최근까지 지속해 온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서 제대로된 현재 사회경제체제에 대한 평가와 대안이 나올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는 자신이 담당한 업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과거에 잘하든 잘못하든 간에 정부운영과 정책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담당했던 구체적인 정책사안을 통해 밝여햐 하는데 몇 개 정도 언급되지만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마치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다.
자신이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다시 꺼내어 평가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제시하는 사례는 60~70년대 국내사례와 이명박 정부정책, 그리고 해외사례 일 뿐이다. 이명박 경제체제가 문민정부와 민주정부 15년 동안의 과정에서 이어지고 자리잡힌 체제라는 것을 모르는지, 무시하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이헌재씨의 '경제특강'은 독자들이 읽고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말짱 황'이다. 그에게서는 따뜻한 가슴도, 뜨거운 열정도, 냉철한 이성도, 현명한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모피아의 대부로서 금융기관과 경제부처, 대기업과 연구소에 잔뜩 포진되어 있는 '이헌재 사단'의 상징으로서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을 통해 얻은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모피아의 대부'마저 겉으로나마 시장만능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20년 가까이 자본주의 변방 한국에서 마지막 위력을 떨치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비로서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왜 이런 사람을 안철수 원장이 경제정책의 멘토로 삼고 중용했는지 더 궁금해졌다...ㅠㅠ 그는 자신의 말대로 벌써 '퇴장'했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안철수 후보가 정책과 공약을 발표할 것이다. 부디 이 책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났으면 좋겠다.

[ 2012년 10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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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 입시문화의 정치 경제학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96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내가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것은 2011년에 출간한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이 책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려 15년이나 지났음에도 학생들의 교육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진보교육감이 들어서고 혁신학교가 운영되고 많은 이들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에도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학생들을 무조건 학교나 학원에 붙잡아 놓으면 학생들이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쯤이면 나름 자신의 지혜와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것이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이든, 가정교육이나 매스컴, 다른 학습에 따른 것이든...
약간의 우연과 편차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학생들을 아침 일찍, 또는 밤 늦게까지 붙잡아 놓고 공부하기를 강요한다고 하여 대부분의 경우 성적이 향상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인간의 활동도 그러하듯이 공부는, 학습은 스스로가 해야한다고 느껴야, 호기심과 재미와 흥미를 느껴야 시작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다. 또 운동과 놀이와 여가와 휴식과 함께 적절하게 시간이 분배되어야 학습에도 집중할 수 있다.
따라서 학생들을 오랫동안 책상에 붙잡아 놓는 것으로는 그들의 공부를 강제할 수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강제함으로써 학생들의 반발과 저항감만을 키울 뿐이다. 부모나 교사들과의 소통만 어려워질 뿐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사회의 가정과 사회 현실을 돌아보면 학생들을 붙잡아두는 것 이외에 딱히 대안도 없다는 것이 더 비극이다. 저자가 책에서 "만약 야간학습을 없앤다면 가정과 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나에게 묻는 듯이 말할 때 머리 속이 꽉 막혔다. 3시, 4시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 가정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공부만 강조하던 부모가 학생들과 어떤 것을 '교육적으로' 할 수 있을까? 가정이 어렵다면 학교나 사회는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학생들이 방과 후에 자신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지원해줄 공간과 교재와 프로그램이 있는가? 학생들이 알아서 축구하는 것 말고, 당구치는 것 말고, PC방 가는 것 말고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당장에는 방법이 없다. 직장에서 빨라야 7시에 퇴근하는 부모의 경우, 또는 밤 늦게 퇴근하는 부모의 경우 가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학교도 사회도 정부도 대책이 없다. 아주 극히 일부의 학생만이 YMCA나 시민단체, 소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것 뿐이다.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생들을 정규 시간 이외의 추가 시간에 학교에 붙잡아 놓는 것에 반대한다. 차라리 학생들이 초저녁에 거리에서, 술집에서, 당구장에서, PC방에서 떼지어 몰려다니는 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교육청이나 정부가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학교와 교육청, 정부, 가업, 시민단체에서 준비를 하여 단계적으로 학생들의 시간과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학생들을 우리에 가두어 놓는 소나 닭처럼 대하면 그 학생들의 미래도, 우리사회의 미래도 암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생들, 청소년들의 문제를 교육제도나 학력,학벌주의 관점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몸담고 있는 현실 속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전인교육이나 바람직한 교육제도의 측면이 아니라 학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감당하고 있는 모순적인 삶의 현장을 바라본다. 어른들이,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에게 어떤 문화적 영향을 제공하고 있는지, 학생들이 가치관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줄 것이다.

저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진단하는 것은 입시제도와 그에 따른 학교,학생문화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병적인 입시제도에 '사채시장의 공모자들처럼 너무나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어 개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정당성의 위기를 수시로 겪어 온 국가 권력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패한 교육 공무원은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에 바빠서, 청렴하고 충실한 관리와 교사들은 불합리한 규칙이나마 열심히 지키면서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느라, 그리고 어머니들과 일선 교사글은 각자 자신 나름의 사랑법으로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느라고 입시 브로커들과 팀이 되어 잘 짜여진 드라마 한 편을 완성해 냈다"(p.05)

저자는 장기간 부실했던 제도교육의 폐해가 대학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발견하며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제와 급격한 산업화와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주의에서 교육문제의 뿌리를 찾는다.

"이제 교육의 위기는 대학의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기계적인 학습에 길든, 초등학생보다 낮은 감성 지수를 가진 '모범생' 출신 학생들을 만나면서, 또한 '학습'에 대해 체질화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자칭 '날라리' 출신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는 더욱 교육에 대해 절망한다. 요즘 나는 우리가 주요 수술을 할 시기를 놓쳐 버렸다는 악몽에 시달린다. ...
장기화된 우민화 교육 속에 대학 자체도 종이 호랑이로 존재해 왔음을 본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어디에서 급진적 실험과 미래를 만들어 갈 상상력과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준비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입시 위주 교육을 해결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중략)
요약하면, 이제까지의 교육은 일본 제국주의가 잡아 놓은 틀을 그대로 이어 온 극히 보수주의적인 교육으로서 자생력을 기를 기회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져 왔다. 해방전에는 식민지 통제를 위해, 해방 이후에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양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교육이 수단화되어 왔던 것이다. 곧 교육의 초점은 산업화를 추진하는 국가 주도적 경제정책에 순응하고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탈정치화한 대중을 만드는 데 맞추어졌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학교가 어떻게 하면 국가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까?'만을 물어 왔지 '학교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성숙에 공헌할 수 있을까?'를 애써 묻지 않았던 것이며, 이 결과 학교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관료 조직의 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해 버렸다.
학교는 인간을 길러 내는 선발의 기능만 하는 공장이며, 여기서 독창성과 협력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수한 기계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생력을 기르지 못한 교육계와 획일적 관리제도로서의 교육 제도는 교육 주체자들의 자생력을 억업해 왔고, 문화적인 자원을 더욱 크게 늘려 가야 하는 후기 산업사회 시대로 들어서면서 그 위기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위기 사황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생긴 패배주의 역시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p.84)

저자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기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배와 경쟁, 소유와 통제, 그리고 집단주의적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의 기본 구성원리를 바꾸어 낼 수 있어야 한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학생들도 삶을 소중하게 일구기 시작할 것이다."
저자는 실험교육 현장을 통해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교육과 문화 현실을 분석한다. 그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자기학습을 바탕으로 한 개방교육'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어제(9월 18일) 일간신문 한겨레에서 현재 경찰에 신고되어 있는 가출 청소년이 2만명이며, 실제로는 약 20만명의 청소년이 가출하여 우리사회의 음지에 존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2252.html).
저자는 학업을 중퇴한 학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청소년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 가정, 소비공간, 대중매체 등 여러 영역 간의 괴리와 분열, 또는 결탁을 지적한다. 어찌보면 "입시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이 영역들 사이의 '괴리'가 청소년들을 정신 분열증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교 중퇴자를 외형적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 뿐 아니라 교실 내에서 학습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까지를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현재 교육,문화현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중퇴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사회의 문제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그리고 학업 중퇴자들의 문제를 더 이상 '불우 청소년'을 구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 관리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학교가 21세기를 살아갈 학생들을 위한 장소로서 '턱없이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와 가정과 일반사회가 드러내 보이는 상호 모순적인 구성원리 석에서 이중생활을 하면서 전반적으로 '불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학교 붕괴'의 또 다른 설명이 된다.

저자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이중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사회 전체의 근본적, 구조적인 수술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가출 청소년과 학습을 포기한 학생을 위한 '문화 공간과 프로그램의 제공'이다. 그리고 대안 교육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제 교육 문제의 핵심은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를 기르는것이 아니라 자포자기 하지 않고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아이를 길러내는데 있다. 탈근대적 흐트러짐 속에서 자기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니라 청소년 문화와 그들의 '주체형성'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십대에 형성된 주체는 한 인간이 긴 인생을 통해 만들어갈 삶의 폭을 결정한다. 그리고 개개 구성원 들의 삶의 폭은 곧 그 사회의 미래를 가늠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것인가? 우리의 탐색은 그래서 학교를 훨씬 벗어난다. 세대 문제, 상징 자본 ,일상의 정치 , 입시 문화의 정치 경제학, 이런 새로운 단어들을 불러들인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p.45)

물론 저자가 제도교육의 입시제도를 그대로 두자고 인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입시제도의 조속한 개혁을 주장한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쉽사리 바꾸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이중생활과 저급한 문화로의 편입을 마냥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의 성 문화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소개한다.
 
"지금 청소년들 사이에 만연한 성과 사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전쟁상황을 방불케 하는 긴장된 입시 준비 상태와 그 동안 근대화 과정에서 급속하게 붕괴되어 온 인간 관계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타산적인 상업주의는 그 붕괴 상태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돈을 벌어들인다.
그나마 사회를 지탱해 오던 가정이 최근 급속하게 붕괴되면서 대안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점점 더 자극적인 감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번지고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폭주족, 깊은 몰입의 관계를 꿈꾸며 끊임없이 이성 관계의 절정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들,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아이들, 부모와 어른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에게 비밀스런 공간과 행위를 제공하는 성은 매우 유혹적인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청소년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주워들었고, 쉽게 음란물을 접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알고 있는 성지식이 파편화된 지식이며, 성기 중심의 성일지라도 많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알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은 더욱 성교육이 어렵다.
청소년들 중에는 호기심에서 이성을 만나 여러 가지 탐험을 해보고, 그러한 직접 체험을 통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기 보다 다양한 인간 관계를 배워가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성은 더 이상 출산이나 결혼과 관련된 행위가 아니라 의사 소통의 한 방법이며 인간 관계를 배워 가는 방식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 세대의 관계 맺기가 건강한 형태로 나아가게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p.232)
 
[ 2012년 9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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