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시계공 2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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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 1권은 미래사회과 첨단과학에 대한 많은 설명과 출연자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면이 많아 조금 지루한 감이 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수사검사와 살인사건의 연속, 기술개발과 로봇격투기 대회, 기술지상주의와 자연생태주의의 갈등, 주인공 및 출연 남녀의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2048년 그동안의 로봇기술 개발로 로봇 전용의 방송채널이 송출을 시작하고 인간격투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발달한 로봇들의 격투장면을 전세계에 생방송한다. 과학은 기계를 인간의 몸에 연결하여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인간이 죽더라도 뇌 속 전두엽의 세포는 인간이 죽기 전 마지막 몇 분을 일정기간 기억한다는 과학에 힘입어 비밀리에 '스티머스' 수사팀이 발족한다. 하지만, 그런 수사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갑자기 뇌가 몽땅 사라지는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자연생태주의자들은 도시 경계 밖으로 ?겨나 생활한다. 그들은 도시사람들이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거역하고 인간의 삶에 로봇을 개입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로봇 전용채널과 로봇 격투기 대회 역시 격렬하게 반대하며 폭력을 통해서라도 저지하겠다고 일부 과격한 세력이 경고한다.
 
차세대 로봇연구센터에 연구원들은 격투기 대회에 내보낼 격투로봇 '글라슈트'를 개발,제작한다. 글라슈트는 연습게임에서 지난 대회 상위 랭커에게 무참하게 패한다.
 
< 2권 > 2권은 1권보다는 빠른 전개와 반전이 기다린다.
 
주된 시간 흐름을 주도하는 '로봇 배틀원 2049'는 마치 2010년 인간들의 이종격투기 경기인 'K1'처럼 보인다. 주인공 로봇 '글라슈트'가 4강전과 결승전에서 보여주는 격투장면은 권투선수 홍수환의 '4전5기'와 같다. 글라슈트가 로봇 제작자이자 프로그래머인 연구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힘과 기술을 보여준 이유가 인간의 뇌와 로봇을 연결했기 때문이라는 암시는 SF 소설에 약간 스릴러를 가미한 느낌이다.
 
연쇄 살인범에 대한 의문, 남앨리스와 서사를 중심으로 보여지는 인간의 액션, 글라슈트를 정점으로 하는 충격적인 클라이막스, 최볼테르와 조윤상원장의 죽음에 얽인 미스테리, 인터넷 추억 사이트에서 일어난 살인의 추억, 자연생태주의의 진실한 사랑...
 
SF이자 추리소설의 이야기가 흐름을 이어가기 때문에 뇌과학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부족해 보인다. 어떤 독자는 '과학적인 서술이 많은 것이 흠'이라고 하지만, 내가 읽어본 바로는 소설의 중심을 주도하는 것은 과학보다는 인문적인 구성이다.
 
로봇이 인간생활의 중심에 들어왔을 때 인간의 존재와 로봇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에 정밀한 기계부품(사이버네틱스, 인간생체기술)을 달았을 때 그 부품을 인간 신체의 일부로 인정할 것인가... 기계부품이 인간 신체의 몇 프로까지 잠식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할까... 인공심장을 대체한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는다면, 뇌의 일부를 기계로 교체해도 인간으로 인정할 것인가... 인간은 기계부품을 통해서라도 수명을 10년이고 50년이고 연장해야 하는가...
 
과학이 점점 발달하고 첨단기술이 인간의 삶에 파고들수록 우주와 인간,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책의 제목 <눈먼 시계공>은 진화생물학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40년 후 인간의 진화모습이 아니라 과학발달에 따른 사이보그의 모습을 주로 다룬다는 점에서 아쉽다...
 

[ 2010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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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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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편력'을 통해 한 사람의 영혼을 읽는다는 것도 별다른 경험일 것이다. 보통 인간의 성장 과정 중에서 소위 '청소년기'가 그 사람의 세계관의 틀이 현성되는데 있어 상당 부분 기여한다고 보았을 때, 청소년기의 독서와 인생 경험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보통의 삶'에서 벗어난 인생의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재일동포 2세(또는 3세)라는 것만 가지고도 '특별'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에 더하여 그의 형 두 명이 모두 1971년 재일동포로서 한국에 유학을 왔다가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전체 재일동포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평범한 '재일동포'일 수도 있고 두 형이 한국에서 옥고를 치른 '양심수'의 동생일 수도 있다.(한국 내에서는 그의 둘째 형인 서준식씨가 인권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관계'와 더불어 그 역시 문학가이기도 하다. 청소년 시절부터 수 많은 시와 소설, 수필과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던 과정이 있었기에 그는 일본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고 현재는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 책으로 '에세이스트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생각해 보아도 일반인들 중에서 소년과 학생 시절 저자만큼 많은 독서량(독서의 질을 고려하지 않더라도)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가 흔치 않다.
그의 현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 그 과정의 결과로서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즉, 이 책은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이 사회적 정체성과 문학적 감수성을 형성해온 과정을 소년 시절 읽은 책들에 대한 사색 및 비평과 함께 기록한 글이다.
밖에서 친구들과 뛰노는 일보다 책읽기를 좋아했다는 서경식은 어린시절 책을 읽기 위해 꾀병을 부리고 학교를 빠질 정도의 독서광이었다. 고작 초등학교 3~4학년인 열 살 나이에 “아내의 죽음이라는 구슬픈 사건”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나가는 '데라다 도라히코'의 에세이를 읽고 불가사의한 매력을 느꼈던 이 조숙한 소년은 독서를 통해 유년기 성장의 자양분을 얻는다.
데라다 도라히코에서 '프란츠 파농'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10년에 걸친 독서 편력 기간은, 그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기간과 정확히 중첩된다. 그렇듯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에게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은 성장의 기간 내내 존재를 짓누르는 무거운 틀이었다. 그것은 때로 남과 조금 다르다는 막연한 불행감으로, 소외감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때로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서경식 고유의 성찰적인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그의 독특한 정체성에서 비롯한다. 그의 글쓰기에서 우리는 일상의 균열, 곧 한국사회와 일본사회의 허위를 응시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따뜻한 감성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서준식씨의 책과 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내가 서준식의 동생 서경식씨의 책을 읽게 된 동기는 후배가 이 책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선물로 받았을 때 '서경식'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단지 책이 '독서를 통한 영혼 성장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읽었다.
물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의 성장배경과 환경, 가족사, 재일동포 소년의 삶과 갈등, 독서에 대한 비평 등에 줄곧 이끌려 책을 끝까지 읽을 때까지 책의 내용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 서경식은 누구인가? ------------------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부터 도쿄오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등이 있으며,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쎄이스트클럽상을, 2002년에 [시대에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시상하는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
 
 
책은 성장기의 생각과 고민을 대변하는 작품 12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들은 저자에게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색을 갖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통찰하는 법도 가르치고 인생과 자연을 느끼고 배우고 돌아보도록 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주요 작품은 데라다 도라히코의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엘리자베스 루이스의 『양쯔 강 소년』,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위대한 왕』,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 요시카와 에이지의『삼국지』, 다자이 오사무의 「추억」, ‘현대시인전집’ ,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허남기의 『조선의 겨울이야기』, 김소운의 『조선시집』,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등이다.
 
저자가 특별히 책의 목차에 내놓은 것들 중에서 초등학교 이후 내가 읽은 것이라고는 [삼국지]와 루쉰의 [고향] 정도다. 저자가 재일동포로서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읽었던 일본 내 문학작품의 수준에 해당하는 한국 문인들의 작품도 일부 읽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읽었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던 책 중에서 지금 기억나는 것은 그리스/로마 신화, 안델센 동화집, [죄와 벌]과 같은 세계문학전집 몇 권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어린 시절 저자와 달리 '운동'이나 '놀기'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책에 그렇게 많은 흥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 데라다 도라히코의 『데라다 도라히코 작품집』: 저자는 이 책을 '내 독서 인생 최초의 책다운 책'이라고 소개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아이가 도토리를 주우며 즐거워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가 아내의 운명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장면을 통해 저자는 어린 나이임에도 문장의 유려한 흐름과 좋은 어조가 전해주는 율동감의 매력을 처음 경험했다고 말한다.
- 엘리자베스 루이스의『양쯔 강 소년』, 니콜라이 바이코프의『위대한 왕』 에리히 케스트너의『하늘을 나는 교실』:『양쯔 강 소년』은 저자가 어린 시절 밥상머리에 앉아 늘 책을 읽던 습관을 벗어나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저자는『위대한 왕』에 푹 빠져 지내기도 했는데 그것은 바이코프가 묘사한 동물 대 동물, 인간 대 동물의 무자비하고도 타협 없는 투쟁 속에 '아이들의 허구를 넘어서는 리얼리티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교실』은 저자에게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문맹이었기에 그것을 잘 아는 저자는 학창시절 급식비를 내지 못하여 선생이 어머니를 불러오라고 했는데 그는 어머니가 문맹이라고 말을 못하고 '집안 형편이 어렵다'라고 울면서 답한 적이 있었고 장사를 하는 아버지의 직업 특성 때문에 자신의 집안의 사정이 들쑥날쑥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저자가 『위대한 왕』에서 가장 마음이 끌렸던 글은 '제2서문' 이었다. 케스트너는 서문에서 시종일관 재미있는 이야기만 만들면서 아이들을 기만하고 재미로 아이들 정신을 흘리려 애쓰는 아동서 작가들에게 분개했다고 한다. 저자는 말미에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p.85)
- 요시카와 에이지의『삼국지』: 저자는 자신의 둘째 형 서준식의 『삼국지』에 대한 암기와 이해, 놀이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둘째 형은 어린 저자에게 '천하삼분지계'나 '읍참마속' 같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소설 속의 명장면을 이야기하며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동네 꼬마 녀석들과 전쟁놀이를 할라치면 삼국지의 배역을 나누면서 놀았다고 한다.
저자가『삼국지』에서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은 조조의 장남 조비가 동생 조식을 제거하려 할 때 조비가 읊은 '칠보시'였다. '콩을 삶으려 콩깍지를 태우니, / 가마솥 안 콩은 소리없이 눈물 흘리네 / 본디 한 뿌리에서 자라났건만 / 무슨 이유로 이리도 다급하게 서로 볶아대는고'... (p.100)
- 다자이 오사무의「추억」: 저자는 그 전까지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다가 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성(姓)만은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4.19 운동이, 일본에서는 '북조선귀국운동'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저자는「추억」속의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작품은 '위태로울 정도로 예민해져가는 소년기의 자의식과 불균형한 자기애의 양상'을 능숙하게 그려내고 있었다.(p.121)
- ‘현대시인전집’ : 이 시집은 저자가 '시'와 '시집'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계기가 되었고 저자가 시를 지어 노트에 남기는 것을 시도하도록 유도하기 했다. 시집 속의 여러 일본 시인들의 시를 접하면서 저자는 조금씩 스스로가 어른으로, 남자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 토마스 만의『마의 산』: 이 책은 저자가 중학생 시절 난생 처음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던 시기에 상대 이성에게 호기를 부리면서 읽었다고 자랑했다가 정작 책을 읽기 시작한 후 '끝내 읽지 못한 책'이 되었다.(저자는 이 책을 발간할 때까지도 결국 이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사춘기 콤플렉스의 상징이요 끝까지 등정할 수 없었던, 영원한 미답의 봉우리같은 존재'라고 부른다.(p.163)
- 루쉰의『고향』: 저자는 이미 중학생 시절에 루쉰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루쉰은 저자가 오랫동안 기대고 의지했던 작가였다. 아마도 그것은 루쉰의 소설과 루쉰의 글들이 동아시아라는 비슷한 지역에서 가까운 '동시대'의 아픔과 희망, 지식인의 선함과 올바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아Q정전]과 『고향』에서 희망을 읽었다.
- 허남기의『조선의 겨울이야기』, 김소운의『조선시집』: 저자는 지금도 한글을 제대로 쓰지도 읽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는 스스로 '모국어상실자'라고 자조한다. 두 권의 조선 시집은 저자가 중학생 시절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읽었다. 한글과 한국어는 저자에게 있어 '한국인(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싶지만 그 상징이자 중심인 말과 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한다.
- 프란츠 파농의『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저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파농의 '저작집'을 읽었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작은 형으로부터 '조선을 위해서는 건축가나 토목기사가 되라'라고 지적당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실제 파농이 그 작품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달랐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p.226)
 
 
책을 읽고난 다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나의 "재일동포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그로 인한 죄스러움이었다. 그동안 다큐멘터리나 위안부 사건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있었음에도 내 머리 속에서는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그동안 재일동포라는 단어는 내게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그리고 '조선인 차별'과 '지문날인'을 떠올리게 하였다. 나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찾아서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 피해자들이자 재일동포였던 서승씨와 서준식씨에 대해서도, 그들이 발간한 책도 찾이 않았다.
굳이 민족적, 동포적 관심과 애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그동안 서유럽 민중에 대한 관심, 근대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관심,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희생당한 아체인들에 대한 관심, 전세계 곳곳에서 '매춘산업'에 희생당한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니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비슷하게 인간적인 삶과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재일동포에 대한 관심도 일어났어야 했다.
다행하게도 더 늦지 않은 시기에 이 책을 통해 재일동포들의 삶과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이 책을 선물해 준 후배가 새삼 다시 고마워졌다.
 
이 책은 저자의 성장의 중요한 대목, 인상적인 장면마다 그 시절에 읽은 책의 기억이 오버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 서경식의 영혼의 성장기이다. 자기 앞에 놓인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어가면서 책읽기의 의미를 깨쳐가는 과정, 유년기의 고통과 슬픔, 생에 대한 불안한 매혹의 순간들이 아름다운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을 읽게 되으면서 나 역시 나에게 있어 독서의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통해 자신의 유년기 성장사를 되돌아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한참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책'과 '독서'에 대해 여러가지 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아이들과 책 읽기'의 중요성이다. 아니 가정 내에서, 가족 관계에서 '책읽는 문화'라고 할 수도 있다.
저자가 재일동포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그 어려운 일본 사회 내에서 도쿄 지역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것도, 그 까다로운 일본 문학계의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 중의 하나가 성장기에 늘 가까이 했던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독서는 우리 아이들, 청소년들의 영혼이 성장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아이들의 독서가 '영혼의 성장'이 아닌 '성적을 위한 도구'로 자리잡게 되면 아이들은 책을 멀리할 수 밖에 없고 '편법'이나 '요행'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진실로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부모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들이 가정의 경제사정이나 문화와 상관없이 '책'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대하게 대했다는 것과 위의 형 둘이 먼저 책과 가까이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항상 아이와 함께 책을 읽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부모들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주입하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은 인터넷이나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는 여러가지 정보를 통해 아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도만 역할을 해도 될 것이다. 아이들은 책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찾아 나가고 배우고 깨닫고 느끼게 된다. 절대 '돈'으로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역으로 '돈'은 아이들에게 '독약'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 내에서 일상적으로 책을 가까이 하는 문화를 갖추기만 하면 된다. 엄마와 아빠가 늘 책과 가까이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아이들은 저절로 책과 친해질 수 있다. 아이들의 책을 함께 읽으면서 아이들과 책 속의 세계를 공유하기도 한다. 물론, 부모라 해서 책과 멀어져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한국사회의 독서 통계를 보면 부모 세대의 독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부모들이 항상 책을 가까이하고 늘 공부하고 탐구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부모 자신들에게도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들이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TV 앞에 앉아 드라마나 연예프로그램을 보면서 넋이 나가 있으면 아이들 역시 그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부모들이여... 지금이라도 집에서 TV를 꺼버리고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기를....
 
[ 2011년 8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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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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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루쉰과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분들과 글에서 접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법정스님과 리영희선생께서도 루쉰의 작품에 대한 일독을 권한 바 있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 조선 독립혁명가의 위대한 삶]에서 주인공 김산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에 읽은 서경식씨의 [소년의 눈물]에서도 그가 젊었던 시절에 접한 작품 중에서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등장한다. 
루쉰과 그의 작품에 대해 그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그는 봉건체제와 군벌, 악질지주 등을 비판 규탄했고, 당시 지식인의 무능을 꾸짖었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이 깨우치기를 고대했던 사상가였다. 좌익 성향의 작가그룹에 속해있었기에  냉전체제를 버팀목으로 하는 한국의 위정자들과 보수학자들이 그를 배척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루쉰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지인들 중에서 '성실한 탐구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 하다. 과 선배 한 명이 있고 비슷한 연배의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가 있을 정도다.(몇 개의 독서모임 참가자들은 제외하고...ㅋ) 모두가 '밥벌이'와 인스턴트 메시지, 대중매체, 인터넷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편이다. 
가끔 언론 기사에 발표되는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의 결과치는 실제로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20세기 초 혼란한 중국 근대사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루쉰에게 주목하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인터넷 서점의 북카트 속에 루쉰의 작품을 담았음에도 두서 없는 '다독'의 욕심에 밀려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가 8월 초에 문득 더 늦기 전에 나의 독서 분야에서 '고전'의 비중을 높여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지성씨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고전 목차에서 두 권([발해고]와 [새벽에 홀로 깨어])을 고르고 루쉰의 소설집 한 편인 이 책을 구하였고 지난 주에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굳이 고전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루쉰의 생애와 비슷한 시기, 즉 우리 민족의 근대사 과정 중에 작품을 발표했던 이들을 찾아 그들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루쉰은 누구인가? ---------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일찍이 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한 그는 1902년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는 망해 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문학으로 중국의 국민성을 개조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의대를 중퇴, 도쿄로 가 잡지 창간, 외국소설 번역 등의 일을 하다가 1909년 귀국했다.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아Q정전], [고향] 등의 소설과 산문시집 [들풀], 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그리고 시평을 비롯한 숱한 잡문(雜文)을 발표했다.
또한 러시아의 예로센코, 네덜란드의 반 에덴 등 수많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웨이밍사(未名社), 위쓰사(語絲社) 등의 문학단체를 조직, 문학운동과 문학청년 지도에도 앞장섰다. 1926년 3 18참사 이후 반정부 지식인에게 내린 국민당의 수배령을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한 그는 샤먼(廈門), 광저우(廣州)를 거쳐 1927년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잡문을 통한 논쟁과 강연 활동,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와 판화운동 전개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의 현실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
 
 
루쉰은 장편의 작품은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중편소설 1개, 단편소설 32개와 짧은 글, 강연, 논술, 편지글은 많았다. 역자는 루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광인일기>와 <아Q정전> 등 10편을 엄선하여 번역서로 묶었다. 
작품의 배경은 작품 모두 비슷하다. 공간적 배경은 루쉰의 고향인 '소흥' 일대이고 시간적 배경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이며 1935년에 발표된 작품도 있지만 그런 작품도 역시 신해혁명의 영향아래 놓여있다고 역자는 평한다.
 
<광인일기 (1918.5)> 주인공이 피해망상증을 앓기 시작하는 시기에 시작하여 점점 증상이 심각해지면서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까지 주인공의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망상에 빠진다. 겉으로는 점점 광기가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반면에 망상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심각한 진실을 담고 있다. 봉건 유교사회가 '식인(食人)'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자신의 누이 동생의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아직 봉건적인 것에 물들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을 구하자고 절규한다. "아이들을 구하라.!!" 작품 속에서는 '사람의 신체를 잡아먹는' 것을 말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사람의 의식을 잠식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식인 사회'는 현대에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역자는 작품의 구도를 봉건적 풍속과 계몽자(광인)의 대립으로 분석한다.
 
<쿵이지 (1919.4)> 작품은 구시대의 몰락한 지식인인 '쿵이지(孔乙己)'의 비참한 운명을 묘사한다. 그러나 역자는 이 작품을 단순히 봉건 과거제도의 죄악을 폭로한 작품으로 뿐 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쿵이지에 대한 사람들의 학대 행위를 통해 '민중의 왜곡된 공격성', 즉 '민중적 자해'를 고발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약 (1919.5)> 작품은 반청 혁명 봉기에 실패하여 처형당하는 신지식인과 미신에 현혹되어 아들의 폐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자의 피에 적신 만두(인혈만두)를 사서 아들에게 먹이는 민중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역자는 이 작품 역시 '민중적 자해'와 '우매함'으로 해석한다. 봉건사회의 억압과 착취에 고통받는 민중이 봉건사회의 모순을 타파하려는 혁명가를 박해하는 데 앞장선다는 이 모순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작품 후반에 혁명가의 무덤과 폐병으로 죽은 아들의 무덤에서 두 사람의 어머니들이 서로 마주치게 함으로써 두 주체가 서로 동일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혁명가의 무덤 위를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을 통해 혁명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희망을 표한다. 

<고향 (1921)> 이 작품은 이십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고향에서의 상실감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고향에서 어린시절 친구 룬투와 재회하지만 룬투는 봉건사회의 잔혹한 계급적 압박 때문에 의식이 마비된 민중으로 변해버렸다.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어린 시절의 신비감과 일체감은 환멸로 바뀌었지만, 조카와 룬투의 아들이 마시 친구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꿈꾼다. 이 작품에서 유명한 문장이 들어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아Q정전 (1922.2)> 루쉰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모순적이고 복잡하고 열악한 민중의 한 사람인 '아Q'의 삶과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는 승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속성을 지닌 하류층 막노동자이다.(물론, 그에게도 어쩌다 한 번씩은 인간적 절실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신승리법'이라는 처세술로 살아가던 그는 그마저도 자신이 경멸하던 왕털보와 가짜 양놈에게 당하면서 파탄난다. 혁명의 소문과 함게 강한 자들이 겁을 먹는 목격하고서 그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자들에게 반감을 느끼지만 그는 혁명을 금지당하고 대신 강도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 마지막 순간에 희미한 각성이 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자는 아Q의 비극적 삶을 결정짓는 요소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지배계급 인물들의 가해이고 둘째는 민중적 자해이며, 셋째는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특히 첫 번째 요소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작품이 최초였다.

<복을 비는 제사 (1924.2)>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샹린댁을 만나고 나서 다음 날 샹린댁이 자살하고 사람들에게 샹린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줄거리다. 선량하고 성실하던 그녀가 어떻게 불행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를 그린 작품이며, 기존의 '민중적 자해'라는 주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역자는 이 작품이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인간적 덕성을 지닌 샹린댁이라는 인물의 부각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력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반성이다.

<술집에서 (1924.2)> 이 작품 역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옛 친구 뤼웨이푸를 만나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줄거리다. 여기서 친구와 주인공은 젊은 시절 추구하던 진보와 변혁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좌절의 늪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대해 동시대 중국 문학인들이 '패배주의'로 규정하면서 루쉰을 비판하였다고 하나 역자는 이 작품이 루쉰의 패배주의라기 보다 우울하지만 정직한 자기 성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누 (1924)> 보수적인 지식인이 주인공으로 유교적 덕목을 고수하며 신문화를 거부하면서도 아들에게는 영어를 배우게 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그는 거지에게서 '비누'를 사는데, 이는 의식의 차원에서는 거지 소녀의 효행에 감동하는 것이지만 무의식에서는 소녀에게서 성적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학계에서는 보수적 지식인의 위선적인 모습을 풍자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역자는 이를 달리 보면 인간적 진실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내린다. '의식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홍수를 다스리다 (1935)> 이 작품과 다음 작품은 루쉰이 타계하기 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우(禹)임금의 치수(治水)신화를 제재로 취했다. '우의 치수'는 여기서 낡은 가치에 대한 새로운 가치, 관념적이고 허위적인 구정치가에 대한 실천적이고 진실한 신정치가의 승리로 해석된다.

<관문 밖으로 (1935)> 노자(老子)의 출관(出關) 전설을 제재로 취했다. 노자가 공자의 위협을 피하여 세상 밖으로 은둔하는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면서 공자와 함곡관의 관리들을 풍자한다. 역자는 이 작품을 공자에 대한 풍자가 루쉰의 적대자에 대한 풍자로 해석하기 보다 루쉰 자신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해석한다. 즉, '사막으로 가는 신발'과 '조정으로 오르는 신발' 사이의 자신의 갈등이 형상화된 것으로 본 것이다.

 
역자는 루쉰의 작품이 중국 내에서 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로 루쉰이 단지 중국적인 인물이기라기 보다는 동아시아적 인물이라서 그렇다는 주장을 펼친다. 루쉰이 다루는 작품 속 주제가 중국의 특수성 뿐 아니라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시기를 조금씩 달리하고 나중에 좀 더 앞섰던 일본이 서구 열강과 다투면서 중국과 조선을 침탈했다는 점만 빼고는 봉건 유교사회, 농업사회, 왕조시대, 지주계급, 무지몽매한 민중, 빈약한 지식인과 시민계급, 민중혁명의 실패, 서구 열강의 침탈 등의 모습은 3국 모두에서 비슷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역자의 해석에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겠다.
 
10편의  작품을 읽고 역자의 해석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루쉰의 작품이 20세기 현대사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루쉰이 비판하고 깨우치고자 했던 지식인의 허위의식, 무력감, 민중의 우매함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광인일기>에서 나타나는 '식인사회'는 근대의 사회 현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특히, 21세기 지금의 사회에서도 한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의식을 좀먹는' 사회 분위기와 대중매체, 파편화된 사회, 극도의 이기주의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늘 현재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인지하지 못하면서 '무상급식을 위하여 8.24 투표에의 참여'를 허위의식을 심어주는 관제 언론과 보수단체의 홍보에 설득당하는 서울시민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투표 결과 투표율이 얼마나 될 지, 개표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우려스럽다. 
광인이 마지막으로 절규한 "아이들을 지켜라!!"는 지금도 여전한 구호인 것 같다...
<쿵이지>, <약>, <아Q정전>, <복을 비는 제사>, <술집에서>는 공통적으로  '민중적 자해'의 모습이 들어있다. 각 작품 속에 표현되는 민중들의 모습이 21세기 현대 민중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지...
<술집에서>에서 나타나는 진보와 변혁에 대한 비관주의, 패배주의의 모습(술집의 분위기와 술집에서 두 친구가 나누는 이야기)은 1980~1990년대를 살아온 이 땅의 486세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이 되는 장면이다. 나 역시 많은 술자리와 모임에서, 동시대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자주 부딪히는 장면이다.
 
1940년 모택동은 루쉰을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주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위대한 문학가 일 뿐 아니라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규정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중국 내부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와 서구에서까지 그의 작품이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해석되면서 지금은 모택동의 시각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어 있다고 한다.
나 스스로가 루쉰을 이해하고 루쉰의 작품 속에 담겨있는 철학과 사상, 문학적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선집 이외의 루쉰의 다른 작품과 글을 추가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또한 <광인일기>와 <아Q정전>도 몇 번이고 더 읽어야 하고...
그럼에도 한 번 읽은 루쉰의 작품은 인상적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울림이 크니까...
 
[ 2011년 8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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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번 공부모임에서 차기 세미나 교재 선택을 위해 논의하다가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선생의 [열하일기]로 결정했다. 여러 가지 [열하일기] 중에서 보리출판사에서 출간한 3권짜리로... 보리출판사 발간본은 북한문예출판사가 펴낸 <겨레고전문학선집> 시리지 중 하나로 북한 고전전문가인 리상호선생이 완역한 것이었다.
완역본이기 때문에 3권을 합하면 모두 1,500쪽을 넘었다. 인터넷에서 책 소개를 찾아보았더니 보리출판사의 완역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박지원선생의 [열하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고미숙씨가 번역한 책도 출판되어 있었다. 특히 고미숙씨가 편집,번역한 이 책은 초보자가 쉽게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 들어있다고 소개되어 있어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연암 박지원선생과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잠깐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열하일기]를 접하지 못하다가 지난 2008년 소설가 김탁환씨의 '백탑파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탁환씨의 '백탑파 시리즈'는 [방각본 살인사건] 상/하권과 [열녀문의 비밀] 상/하권, 그리고 [열하광인] 상/하권을 말한다. 세 가지 소설 모두 김탁환씨가 고전과 자료들을 고증하고 연구하면서 써낸 '팩션소설'이었다. 조선 정조시대 박지원을 비롯한 이덕무, 박제가, 홍대용, 백동수 등 실존인물과 함께 가공인물인 의금부 도사 이명방을 주인공으로 하여 당대의 사회상황과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여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무식했던 것이 [열하광인]을 읽기 시작할 때까지 '열하광인'의 '열하'가 [열하일기]를 말하는 지 알지 못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굳이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인류가 호포사피엔스로 진화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록과 문화가 존재했고 인류는 자신의 가장 진화된 특성, 즉 과거의 기록과 문화를 통해 미래를 열어나간다는 측면에서 '역사'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거의 기록과 문화 중에서 '고전', 즉 인간사회의 보편성과 창조성을 보여주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영향을 끼친 학문이나 이론을 알기 위함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고전'으로 받아들인 만한 것이다. 한국 고전으로는 이미 유득공의 [발해고]를 읽은 바 있다.
 
연암 박지원선생은 1780년 청(靑)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조선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음력 5월에 길을 떠나 6월 24일에 국경을 넘었고 북경(연경)과 열하를 거쳐 다시 북경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오는 장장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하룻밤에도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너는 사투와 2,300리에 이르는 여섯 달간의 대장정, 그리고 귀국 후 연암골에 틀어박혀 7년 동안의 각고 끝에 26권 10책에 이르는 [열하일기]가 완성되었다. [열하일기] 속의 기록은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행기와 별도의 수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자인 고미숙씨 등은 [열하일기]에서 여정 뿐 아니라 유머와 우정, 그리고 유목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열하일기]는 역사상 세계 그 어느 여행기보다도 더 가치가 있고 뛰어난 여행기라고 주장한 것이다.
 
연암이 생각컨대 소(小)중화주의에 찌든 조선의 사대부들에겐 당시 청나라 문명의 풍요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화 문명을 보는 연암의 유일한 잣대는 중국 사람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 그래서 그의 눈에 가장 눈부시게 다가온 것은 화려한 궁성이나 호화찬란한 기념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을 끌어가는 벽돌과 수레, 가마 등이다. 조선의 현실이 그만큼 열악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문물을 소개하며 현실을 바로 보자는 연암의 주장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뒤엎으려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명나라가 망한 지 100년이 넘은 시점에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연암이 옛 성터에서 눈물짓는 장면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은유와 역설, 그리고 종종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형식의 [열하일기]는 성리학과 중화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 한 당대 지식인들이 겪은 사상적 고투의 기록인 것이다. 

 



 
이 책은 사행단 구성과 여정도,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열하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사행이나 비장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란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고전에 익숙지 않은 모든 이들을 위한 편집의 일환으로 다른 판본과는 차별화된 배치를 하고 있다.



 
 



 



 
 
[ 2011년 8월 10일 ]



 
------ *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누구인가?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문인이다. 호 연암(燕巖). 정조 4년(1780),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가게 된 종형 박명원과 동행하여 북경 등지를 돌아다니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청인들의 실생활을 보고 돌아와 쓴 기행문이 [열하일기]이다. 홍대용·박제가 등이 소속되어 있던 북학파의 거두로서 우리나라 실학 연구에 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유려한 문장과 진보적인 사상으로 한문소설인 [양반전], [허생전], [호질],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등 여러 작품을 썼으며, 저서에는 [연암집],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이 있다. ---------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국경 출발부터 '산해관'까지의 여정이다.
< 도강록 > 도강록 서 / 6월 24일 / 6월 25일 / 6월 26일 / 6월 27일 / 6월 28일 / 6월 29일 / 7월 1일 / 7월 2일 / 7월 3일 / 7월 4일 / 7월 5일 / 7월 6일 / 7월 7일 / 7월 8일 / 7월 9일 / 요동 옛 성에 올라 / 요동의 백탑 / 관제묘 풍경 / 소묘 / 광우사 이야기 - 6월 24일 : 비장과 역관, 하인들의 옷차림을 설명한다. 수역 홍명복에게 "자네가 길을 아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6월 26일 : 마두 득룡이 금석산을 가리키며 명나라 말기 형주사람 강세작에 대해 이야기한다.- 6월 27일 : 중국 봉황산의 전경, 사행단의 관례, 책문에서 청나라 관리들에게 예단 전달, 책문 내 시장의 전경을 기록했다.- 6월 28일 : 중국의 벽돌과 기와의 제작, 이용의 장점과 조선의 건축과 기와의 단점을 비교한다. 중국 변경 인근의 주택구조를 설명하고 한사군, 발해, 평양, 패수의 지리적인 혼란스러움을 지적한다. 중국 성과 성문, 누각을 설명한다.- 7월 1일 : 만주족 여인의 옷과 머리차림을 설명한다.- 7월 2이 : 중국의 벽돌가마와 조선의 기와가마를 비교,설명한다.- 7월 3일 : 중국의 결혼 행렬과 풍습을 설명하고 만주족 훈장과 필담을 나눈다.- 7월 5일 : 중국식 벽돌식 방고래/구들의 건축과 그 장점을 설명하고 조선의 그것과 비교한다.- 7월 7일 : 관제묘의 구조와 장식을 설명한다.- 7월 8일 : 요양의 백탑을 이야기하고 아이의 울음에 대해 설명한다. 요양의 드넓은 벌판을 마주하면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외치다.

< 성경잡지 > 7월 10일 / 7월 11일 / 예속재에서 만난 친구들 / 가상루에서의 아름다운 만남 / 7월 12일 / 7월 13일 / 7월 14일 / 성경의 사찰들 / 요동의 산과 강
- 7월 10일 : 작은 마을의 객점에 들어가 그 구조를 살피고 주인 부부와 필담을 나누다. 심양 가기 전의 불탑을 기록하고 심양에 도착하여 심양성의 내부를 살피다.
- 7월 11일 : 예속재에서 이귀몽, 배관, 비치, 전사가, 오복과 필담을 나누다.
- 7월 12일 : 여행 중 상가집에 우연히 들러 문상하게 되고 이도정에 도착하여 술가게에서 붓글씨를 뽐내다.
< 일신수필 > 일신수필 서 / 7월 15일 / 7월 16일 / 7월 17일 / 7월 18일 / 7월 19일 / 7월 20일 / 7월 21일 / 7월 22일 / 7월 23일 / 망부석이 된 맹강녀 / 장대에 오르내리기가 벼슬살이 같구나 / 산해관에 올라 고금의 역사를 생각한다.
- 7월 15이 : 일류/이류/삼류 선비론을 논하고 중국 수레구조를 설명하고 수레제도의 장점을 논하다. "사방이 수 천리나 되는 나라(조선)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까닭은 한마디로 말해 나라 안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역시 양반들 잘못이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p.244) 연희무대, 저자, 점방, 교량을 설명하다.- 7월 16일 : 북경 8경 중의 하나인 '계문연수'를 말하다.- 7월 17일 : 호행통관 쌍림의 인물됨에 대해 말하다. - 7월 18일 : 송행전투와 오삼계, 이자성의 난을 거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가가 세워지는 과정을 논하다.- 7월 19일 : 영원성과 초가패루를 감상하다. - 7월 20일 : 청돈대의 해돋이를 감상하다. - 7월 22일 : 중국의 털모자와 조선의 은의 상거래 관계를 논하다.출판사는 고문(古文)의 고루함을 비웃었던 연암의 글이니 만큼, [열하일기]가 읽히지 않는 것은 죄악으로까지 규정한다. 이 책[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는 그러한 연암의 애초 의도와 문장론을 살리는 데 집중한 책이다. 풍부한 그림과 자료, 상세한 해설, 배경지식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이 연암의 문장을 타고 막힘없이 흐를 수 있도록 편집의 과정에서 최대한의 친절을 발휘했다.
원래 [열하일기]는 여정을 따라 가는 편년체 방식으로 쓰인 7편의 글들과, 여정과는 별도로 쓰인 기사체 글들이 공존하는 책이다. 기존의 배치대로라면 읽는 이들이 연암의 여정과 의식의 흐름을 밀도 있게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역자들은 각 여정 편들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사건들에 대해 적은 기사체 글들을 그 뒤에 두어 시간의 흐름을 따름으로써 이해와 감정의 효율을 최대치로 올리려는 시도를 했다.
[열하일기]는 200년을 훌쩍 넘긴 고전이다. 나도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 완역본 3권 중 두 번째 권을 읽고 있지만, 보통의 독자들이 읽기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역자들은 편집 과정에서 연암과 이국 친구들과의 길고 긴 밤샘 필담 부분은 희곡 형식으로 처리했다. “형식적 구속 때문에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다” 하여 시(詩)를 멀리했던 연암의 글답게, 형식의 구속 없이 자유롭게 희곡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연암이 나누었던 필담의 희곡버전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박진감 넘치고 리드미컬하게 풀어내고 있다. 또한, ‘유머리스트’로서 연암을 파악하고 있는 역자들은 이 책에서 마치 연암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생생한 말투를 씀으로써, 연암이 보여준 기행(紀行) 속의 기행(奇行)과 그의 경쾌함을 거침없는 번역으로 표현하고 있다.


----- * 역자 고미숙, 김풍기, 길진숙은 누구인가? -------
<고미숙>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에서 광부의 딸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에서 독문과를 졸업하긴 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학원은 국문과로 ‘전향’해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내 일상의 대부분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이루어진다. ‘공부와 밥과 우정, 그리고 자전거’, 이것이 요즘 내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다. 지난 10년간 내 공부의 원천에 『열하일기』가 있었다면, 지금 나를 매혹시키는 건 루쉰과 『동의보감』이다. 『열하일기』가 그랬듯, 루쉰과 『동의보감』과의 마주침 또한 내 인생의 큰 변곡선이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에 휩싸여 있다. 그 동안 쓴 책으로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있다. 내가 쓴 거라기보다 연구실이 내게 준 선물들이다.
<김풍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시작한 고등학교 교사생활은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 못했다. 내 정신을 맑게 해주는 것이라곤 오직 책과 더불어 노니는 것뿐. 그러던 중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하면서 오만과 허영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들뢰즈를 만나고 니체를 다시 만나고 스피노자와 원효를 만났다. 예전에 읽었던 책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혔고, 평범한 이야기도 경이롭게 들렸다. 그제야 비로소 고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포착하려는 순간, 내 삶이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옛시와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시마』 등을 지었고, 『누추한 내방』, 『옥루몽』 등을 옮겼다.
<길진숙> 고등학교 때 고전문학을 향한 무모한 애정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갔고,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학력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점차 협소해지고, 사유는 날로 빈곤해져 갔다. 감동을 상실한 공부로 고민하던 차에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만났다. 이곳에서 나는 공부라는 드넓은 세계와 만났다. 여러 사람들과 『열하일기』를 함께 읽고 강독하면서 박지원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관심은 동아시아 고전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지금은 18세기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 명청시대의 철학과 사상을 공부하고 있다. 양명학과 노자, 장자, 불교의 세계에 매료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전기 시가예술론의 형성과 전개』가 있다. -------- 


 
역자 고미숙은 조선 왕조 5백년에 더하여 한반도 5천년 역사를 통틀어 꼽는 단 하나의 텍스트로 [열하일기]를 들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오천 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기 때문일까? [열하일기]를 읽어보면 연암은 자신의 지위에도, 머무는 곳에도 정착하지 않았던 진정한 ‘노마드’(유목민) 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고자 했던 삶과 그 삶에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꾸려가는 삶의 선택이나, 젊음의 특권인 용기를 상실한 21세기 한국인에게는 없는 그 믿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고리타분한 우리에게 230년 전 연암의 삶과, 여행과, 기록은 긴 시간을 초월하는 ‘색다른’ 고전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도 요동치면서 그 생명력을 자랑하는 [열하일기]를 새삼스럽게 지금 다시 불러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 발산하는 다른 고전과의 ‘차이’ 때문인 것이다.

여행기를 읽다가 연암의 포복절도할 행각들에 잠시,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박지원’과 ‘이용후생’이 동급으로 암기되었단 사실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수레와 수차, 도르레와 벽돌, 기와, 가마, 복식과 말 기르기 등에 대해 풀어 놓은 ‘실용적’ 입장에서의 관찰과 성찰을 읽고 있노라면, 비로소 그가 북학파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게 된다.
함께 길을 가다가 몰래 빠져 나와 남의 집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기록해 놓은 그의 호기심과 열정은, 이 책을 여타의 여행기들과는 차별되는 독보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한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산물인 이 책에서 우리는 ‘18세기 그때 그시절 박물관’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구들과 중국식 구들인 ‘캉’(?)이 어떻게 다른지 시시콜콜하게 적어 놓고, 깨진 기와조각을 마당에 박아서 진창을 예방하는 데 쓰임을 발견하여 그 감탄을 적어 놓은 이 책은 연암의 ‘지식저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열하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연암이 발로 뛰며 채워 놓은 지식저장소를 가만히 앉아서 훔쳐보는 조금은 뻔뻔한 일이 된다. 말똥과 수레를 찬양한 연암, 저잣거리에서 이야기를 채집하는 연암, 점방 벽에 적힌 재미난 얘기를 밤새 베껴 썼기에 이 책이 "세계최고의 여행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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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나름 인기가 많아서(밀리언셀러) 2004년 KBS TV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로 각색되어 방영된 바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무기력하고 사악한 조정의 그늘 아래 백성들의 곤궁과 무관의 ’비운’을 담당히 그려낸다.
이순신의 ’칼’은 신하로서, 자식으로서, 아비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칼’ 하나로 모든 것을,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악한 조정을 비롯한 보이지 않는 ’적’에 둘려쌓인 무장의 혼란과 덧없음을 노래한다.
그 ’칼’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전쟁터’에서 분명한 ’적’에게 죽는 것...
이순신의 ’칼’의 운명은 개인에게도, 부하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희망일 수 없다.
잠시동안 죽음과 곤궁을 피해갈 수는 있어도...
 
난중일기와 여러 기록을 기초로 소설로 다시 태어난 이순신 장군...
그는 어떤 사람이었고 그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초등학교에서부터 주입받은 ’충무공’, ’호국’, ’백의종군’, 23연승, 불패신화, 해군영웅, 세계적인 한산대첩(4대 해전), 리더쉽....
과련 이순신은 지하에서 이러한 찬사와 영웅화를 원하고 있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을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영국의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르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인정받는 ’한산대첩’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영국이 그 해전을 통해 세계강국(침략국이기도 하지만...)으로 거듭났을 때,
조선은 ’한산대첩’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이순신을 대역죄인으로 체포,구금하고 고문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깨닫고 반성하는 이야기와 분위기는 없다.
 
인간은 스스로 온갖 긍정과 부정, 과거와 미래, 나와 남 등 모순 속에서 성장해 나가는 존재일 터,
그는 무엇을 긍정하고 부정했으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그리워했나...
무엇이 그가 그런 용기와 지혜를 낳도록 했으며, 무엇이 그를 고독하도록 만들었을까...
 
이순신의 존재가 21세기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성격은 무엇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한 것들...
 
16세기말 조선왕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맞서 한반도 남서해안을 지켜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 나는 그 분을 통해 일제시대 국내외에서 일제에 앞서 목숨을 바친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시대가 와전히 바뀐 21세기 한국에서 누가 누구를 지키고 보살피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천안함 사건이나 전시작전권 반환에 대한 논의를 지켜보면,
    한국의 군대는 그다지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32세에 무관에 급제한 후, 함경도 국경과 남해안 수군을 거치면서 변방을 돌았다.
이순신의 조부와 부친은 문관이었으나, 이순신은 무관의 길을 걸었다.
조부가 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부친도 낙향하면서 이순신은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했다.
-> 20세기에 이어 21세기까지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주류,비주류에 대해 다시 생각나게 한다.
    사실 한국사회에 주류나 비주류에 대한 정의는 의미가 없다.
    20세기를 지나치면서 일부 세력들이 ’한국의 주류’로 자청하기 시작했을 뿐...
    박정희정권 18년, 전두환노태우김영삼정권 17년을 거치면서 계속 권력과 금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어느새 주류가 되었다.
    마치 백 년, 천 년 전부터 기득권이 있었던 것처럼...
    마치 대한민국을 자신들이 건국한 것처럼...
    하지만, 이순신이 말해주듯이, 역사가 말해주듯이 한반도는 이름없는, 저 아래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끌어왔고
    피땀을 흘리면서 지켜왔다.
 
조선왕조 200년 만인 1592년 일본의 집권세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은 7대 세조 재임시절까지 군대와 무기,화약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당시 중국,일본을 능가할 실력이었으나,
예종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은 ’유교’와 ’문신’을 제외한 농업, 공업, 상업, 군사 부분을 등한시했다.
1616년 청나라가 세워졌으니 왜란 당시에는 명의 운명도 다했을 터인데 조선은 명을 하늘처럼 받들었다.
명의 역사는 고작 280년, 청나라도 300년...
-> 20~21세기 한국과 비교해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 듯...
    한국에서 현재 가장 출세와 성공에 가까운 분야라고 음으로, 양으로 장려하는 분야는???  당연히 ’문관’...
    판검사, 변호사, 전문직, 경영자, 금융, 공무원, 정치, 언론,......
    단순히 ’문관’이나 인정받는 직업 뿐이 아니다. 그들의 출신마저 이공대, 기술쪽이 아닌 대부분 ’문과’ 출신이다.
    대통령, 정치인, 장차관, 공기업대표, 경영자, 금융 등 그들의 전공이 무엇일까?
    과학을 모르는 대통령,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문제해결방식을 모르는 정치인과 장차관... 그 결말은??
-> 21세기 한국의 ’명나라’는 미국?? 미국의 역사는 230년...
    21세기 한국의 ’유교’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반공, 반북, 그리고...... ’돈’과 ’출세’...
    언제까지 ’명’과 ’유교’에 목숨을 걸 것인가?????   
 
왜적의 침략을 준비하고 대비하고 훈련하고 판옥선을 만드는 이순신에게 선조가 전하는 말들은 정말 ’교태’롭다.
-> 대통령의 연두교시, 청와대의 대변인 발표, 정당의 보도자료, 언론들의 그 많은 사설과 주장들...
    그 감미롭고 화려하고 소박하고 겸허하고 희망찬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이순신은 왜란 내내 밤마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 숙면을 취하기 어려웠다.
많은 선비들, 의병장들의 끝이 조정에 의한 죽음이기에 그는 편안한 죽음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그는 ’칼’ 밖에 사용할 수 없으므로 ’칼’ 위에서 ’칼’을 휘드르며 생을 보내다가 ’칼’과 함께 죽기를 원했다.
그의 ’칼’은 끝이 있고도 없는, 희망이 없는 ’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칼’로 인해 자유스러울 수 있었고 영혼의 자유를 위해 ’칼’처럼 살다가 스러져갔다.
-> 이순신장군의 ’칼’과 이순신장군의 ’전쟁’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한 ’칼’이었고 ’전쟁’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도 자신만의 ’칼’이 있어야 스스로에게,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이순신’이라는 이름...
이제 우리는 그 이름에서
[ ’충무공’, ’호국’, ’백의종군’, 23연승, 불패신화, 해군영웅, 세계적인 한산대첩(4대 해전), 리더쉽 ]을 찾으려 애쓰지 말자.
그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인간의 존재를, 인간의 고뇌와 고달픔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덧없음과 분노와 애정을,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인간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 2010년 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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