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크, 카오스, 그리스도교 - 종교와 과학에 관한 질문들 비아 시선들
존 폴킹혼 지음, 우종학 옮김 / 비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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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존 폴킹혼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와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맥그래스가 옥스퍼드에서 분자생물학과 신학을 공부해 과학과 신학의 조화를 시도했다면폴킹혼은 케임브릿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후 신학을 공부해 성공회 사제로 몇 달 전 생을 마친 인물이다역히 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립을 완화시키고 대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이 책도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쓰였다저자는 과학은 사실을종교는 의견을 다룬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오해임을 밝히면서둘 모두 사실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다만 두 학문은 서로 묻는 내용이 다를 뿐이다과학은 어떻게를 묻고신학은 를 묻는다과학은 신학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수단이 없고신학은 과학의 대답을 검증할 도구가 없다.


폴킹혼은 우주가 수학적으로 이해가능하다는즉 우주의 합리성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우주가 오늘날의 형태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정교하게 조율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물론 이 점이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걸 가정한다면 그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단순히 화학물질의 조합이 아니다(이런 저급한 환원주의는 그걸 주장하는 사람 자신도 설득하지 못한다). 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되지만부분의 합을 넘어선다인간은 훨씬 더 깊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저자는 창조주의 의지와 본성에 관한 종교의 설명이 그런 다양한 인간 경험들의 이면을 통합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의 후반에는 기도와 기적종말에 관한 합리적(과학자로서의)인 관점을 조심스럽게 제시한다물리적 세계의 열려 있음을 통해 기도의 효과를 설명하거나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자연법칙과 기적의 이론적 조화 가능성을 검토하는 등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으니 읽어볼 만하다.

 


작지만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제대로 집중해 쓰인 책이라 집중력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다종종 C. S. 루이스의 글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특히 기적을 다루는 부분이라든지 기도에 관한 설명우주적 차원에서 신의 존재를 검토하는 방식 등은 루이스의 몇몇 책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저자의 우주 이해는 보수적인 신학과는 차이가 있다. 140억년의 진화과정을 인정하는 일보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믿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더 쉽게 느껴지기도 하니까하지만 그 때문에 대화를 포기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일이 아닐까 싶다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을 가지고충분히 합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는 일일 테니까.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들도 몇 권 나와 있지만이쪽이 훨씬 짧고 간결하다물론 맥그래스의 책은 또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으니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모두 찾아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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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크릿 -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선교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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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학 교과서로 쓰인 이 책을 손에 든 것은순전히 저자의 이름 때문이었다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읽어본 이래로그는 나에게 C. S. 루이스와 더불어 내용의 질은 보장된 저자 목록에 올라 있다물론 레슬리 뉴비긴의 글은 루이스의 그것과 달리 유머도 풍자도 거의 없고내용도 기발함이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오랜 전통을 새롭게 읽어 내거나 잘 정리해 내면서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쪽인지라 조금은 더 딱딱하게 느껴질 순 있지만아무튼 꼭꼭 씹어 먹으면 도움이 되는 저자다.

 


책은 중요한 질문을 품고 시작한다. “우리는 무슨 권위로 선교를 하려고 하는가”, “다른 성실한 종교인들도 온전한 진리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저자는 이 질문에 관해 매우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 일(선교)를 하는 것이다저자는 반복해서 선교에 있어서의 이 궁극적인 신념을 강조한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는 소위 WCC식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강하게 비판한다그들은 그동안 잘 지켜온 범세계적인 선교 소명에 대한 헌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이제 그들에게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호간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만 매몰되어 있다흥미로운 건 레슬리 뉴비긴 자신이 한 때 WCC에서 중요한 지위를 맡아 사역을 했었다는 점이다저자는 자신이 힘써 일했던 기관의 변질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저자는 선교를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소개한다이를 위해 무려 세 장을 할애해서이 일이 어떻게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연결되는지를 설명한다이를 통해 선교의 계획과 실행의 모든 과정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선교라고 할 수 있을 텐데앞서 말한 일부 교회들은 선교를 단순히 문화적 교류나 사회적 개선운동으로 전락시켜버렸다.


물론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저자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 뒤에 그 뜻을 이루려는 가시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않는다면그 기도는 헛될 것이라고 말한다선교사역은 복음선포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으로부터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

 


책의 후반부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결국 선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의 우월성을 전하는 것이다이 과정이 자칫 폭력적이거나 압제적이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이다앞서의 WCC는 이 부분에서 부담을 느낀 나머지 예수를 전하는 일 자체로부터 물러선 감이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그들(타종교인)을 공동의 삶을 나누는 자의 입장에서 대하되동일한 말씀에 힘입어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또한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 선한 면모들을 진심으로 기뻐하며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에는 무엇이든지 비그리스도인 이웃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얼마 전 읽었던 미로슬라프 볼프의 책에서는 비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는 시도를 했었다개인적으로는 이런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종교는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오히려 이 책에 실린 레슬리 뉴비긴의 대안이 좀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들을 정중하게그리고 존중을 담아 대할 줄 알아야 한다.

 


선교에 관해 알아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을 잘 담아낸 책이다선교에 관심이 있다면이 주제를 정리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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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크리스천
데이브 톰린슨 지음, 이태훈 옮김 / 포이에마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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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내용의 책인데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저자의 이력이다수년 동안 가정교회의 리더였고한 때는 술집에서 모임을 갖는 대안교회의 목회자였으며현재는 성공회 사제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그 중에서도 역시 눈에 들어오는 건 에서 다양한 종류의 회중과 만났다는 부분인데그가 전형적인 목회자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회중은 전형적인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져만 있는 것 같다(물론 꼭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동성애자들(꽤 자주 등장하는 사례다), 약에 빠져있고사회의 정규적인 코스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다문득 우리가 이들의 모습을 보고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면그건 정확히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평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벽을 낮추고사람들이 그들의 영혼 속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예수님을 소개한다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렇게 조금은 다른 교회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아름다운 스토리다여기까지는.

 


교조주의에 빠진 기성 교회들에 대한 비판(솔직히 말하면 요새는 그나마 교리에 대한 관심조차 적어진 게 사실일 것이다), 자기들만 생각한다는 지적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척 등 책에서 비판하는 요소들에 공감한다이런 것들은 애초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역동성과 생명력을 희미해지게 만드는 요소다이런 것들에 대한 의심은 문제가 아니라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깨고 저자가 새롭게 세워가려고 하는 게 교회가 맞는지는 살짝 의문이다저자가 이 책에서 설파하고 있는 복음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자신에 감정에 충실해지는 것이성보다는 직감에 따라 종교를 찾는 것(이건 저자의 표현이다)이다.

 

물론 저자는 몇 번에 걸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고백한다이 고백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의 신앙이 어떤지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일는 아니니까다만 그가 이 책을 통해 제시했던 기독교에 관한 그림이 과연 충분한가 하는 의문은 별개의 문제다책 전체에 걸쳐서 그가 제안하는 종교는 C. S. 루이스가 말했던 물 탄 기독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위안을 주는 멘토 그 이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그는 아무 것도 하라고 명령하거나기준을 제시하거나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그저 자신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인물이다개인적으로는 그 자리에 요즘 유행하는 대중적인 심리상담가가 있어도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예수의 정체나 그의 사역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그에게서 역사성이라는 맥락을 제거해버리고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움만 남기려는 시도는 기독교가 아닌’ 무엇을 만드는 건 아닐까복음서 속 예수의 모습은 때로 분노하고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하고저주와 징계를 다짐하고 예언하기도 한다그분은 실제 존재했던 분이기에, 2천 년 후 어떤 사람들이 불편한 부분을 제거하고 남긴 모양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을 유지하려다 보니 회개에 관한 이해는 크게 달라져 버린다저자는 회개의 본래 의미가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고 말하면서자신에 대한 좀 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회개라고 말한다이 정도의 단어 의미의 오용이 이루어지면우리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게 된다저주라는 말은실은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고미움이라는 말은 특정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에 만족한다는 의미고 하는 식으로.


그리고 논리적 귀결로 자연스럽게 구원에 관한 내용은 책 자체에서 다뤄지지 않는다심지어 이 책이 크리스천을 다루고 있음에도 말이다구원이 갖는 심리적 차원에서의 효과는 넌지시 비취긴 하지만단지 그게 전부일까?

 


그간 하나님이 배제했다고 여기던 이들이 실은 교회가 배제한 것임을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저자의 수고는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기성교회는 어느 순간 너무 높은 벽을 세워두고 있었다개인적으로는 펍이든호프집이든맥도널드 한 구석이든교회가 모일 수 있는 자리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애초에 벽이 세워지기 시작했던 맥락을 잊어버린다면우리는 그렇게 벽이 사라진 자리에 온갖 종류의 잡초들이 자라는 것을 곧 목격하게 될 것이다벽을 낮추는 건그 벽으로 보호하고자 했던 내용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때 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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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 (재정가 특별판)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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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직한 책이다제목인 알라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가볍지 않게 다가올 텐데부제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는 이 의심과 불안을 좀 더 강화시킬지도 모르겠다책을 좀 더 읽어 나가다보면더 이상 피할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정말로 저자인 미로슬라프는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일 가능성을매우 진지하게그리고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가 왜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를 알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구원이 아니라, ‘화해’, 또는 평화이다그러니까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복된 상태를 누릴 것인가가 아니라오랫동안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온 두 종교가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애초의 목적이 이런 것이었다면굳이 이 책의 작업그러니까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임을 역설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두 종교의 신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에는 무엇보다 이웃사랑이 중요한 덕목으로 명령되고 있으니 말이다문제는 신앙인들이 그들의 경전을 충분히 존중하지도따르지도 않는다는 점이지두 신앙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적대하는가가 아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보자그러면 저자는 어떤 식으로 이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임을 설득하려 할까유일신 종교라고는 하지만삼위일체라는 개념은 두 종교의 신관에서 결정적인 차이로 보인다실제로 이슬람교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우상숭배로 평가되기까지 하니까.


     저자는 몇 가지로 이를 완화시키려 하는데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기독교인들 역시 무슬림들이 비판하는 식의 삼위일체 이해를 문제로 여긴다는 부분이다무슬림들이 삼위일체를 불편해 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이 세 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정통적인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지, ‘세 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삼위일체란 한 분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식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그림일 뿐이다.


     물론 이 주장을 무슬림들이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포인트에서 상당한 정도의 의견일치를 이룰 수도 있을지 모른다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좀 더 단순한 해결책(기독교의 설명은 틀렸고자신들은 옳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양측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비슷하다는 부분도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신은 오직 한 분이시고창조주이시며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재이다그분은 선하고자비로우시며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이렇게 비슷한 존재는 서로 같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이 문제는 단순한 유비의 차원은 아니고제시된 신의 속성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오직 한 분인 신을 믿는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신을 믿는 게 아닌가같은 논리가 만들어지지 않고오히려 만드신 분을 믿을 때도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저자의 결론보다 좀 더 쉬운 해설이 존재한다양측이 같은 신을 섬기지만 한 쪽이 왜곡된 형태로 섬기고 있다는 결론이다사실 이건 마르틴 루터를 비롯해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해법이기도 한데그 방향을 바꿔도 마찬가지로 통할 수 있다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결국 서로 간의 반복은 좀 더 심해질 뿐이건 평화라는 애초의 저자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

 


     때문에 저자는 이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을 은근하게 제시한다같은 신을 양측 모두 어느 정도 왜곡된(혹은 제한된형태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사실 이 부분은 직접 표현된 건 아니지만신에 대해 우리가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불가해성혹은 신앙의 신비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암시적으로 제안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 이해가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없으니까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한 분 하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 볼 필요가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다만 신앙이라는 게 그렇게 논의를 위한 중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실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무시한 채몇몇 신학자들의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한계.


     결국 저자의 논의는 사랑의 요구라는 윤리적 차원과 공공선에 대한 호소로 넘어가는데사실 평화를 위한 논의라면 이런 차원도 나쁘지는 않다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신을 섬긴다면서 상대를 파괴하려고 하는 일에 나서는 건 무엇보다 자기 신앙을 부인하는 일이 아니겠는가다만 책의 결론부로서는 조금 약한 느낌도 들고.

 


     저자가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을 좀 더 말해보자저자는 삼위일체 문제를 신의 불가해성신비라는 측면으로 어느 정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문제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는 그런 식의 조화 가능성 자체를 무산시키는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그들은 삼위의 이위인 성자예수를 단순한 선지자들 중 한 명(물론 꽤 존경심을 담아서)으로 설명한다애초에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건데이 문제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정교하게 분리해 사고하는 고대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까?


     또물론 의도적으로 저자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지만과연 신앙을 다루면서 이 부분을 빼놓을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를 빼버린다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양 종교의 신자들 대부분이 저자가 제안하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려 들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본다그러나 이건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지그 목적 자체는 충분히 공감하고응원하고 싶다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료로서 우애를 쌓을 수도협력할 수도 있다다만 우리 사이에 높이 쌓인 혐오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데는 문자보다는 영의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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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10-04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평화에 집중해서 이 주제를 연구했다는 게 볼프스럽네요.
이 주제는 저도 관심이 있는 주제인데, 늘 구원의 문제에서 사고가 딱 막힙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은 있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반대의 주장은 종교간 대화를 어렵게 하고요.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간 통합을 이루랴는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딜레마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볼프가 삼위일체의 불가해성에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약화시킨 것 같아 불만입니다.. 루이스의 말처럼 삼위일체야말로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의 교리일텐데 말이에요. 볼프가 화해와 평화을 강조하다 중요한 부분들을 애써 간과하려 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서로 다른 종교의 신학적/종교적 화해는 어쩌면 이뤄질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저 겸손과 존중을 가지고 다른 종교를 대하는 유일한 방법 같기도 합니다

노란가방 2021-10-04 22:56   좋아요 0 | URL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전투‘에서 언뜻 보여주었던 것처럼,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타슈를 섬기던 사람이라도) 한 곳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다려 볼 일입니다. 볼프의 (암시적인) 생각처럼 그곳에 진실한 기독교인과 진실한 무슬림들이 함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요. 공공선을 위한 협력, 이웃에 대한 호의와 사랑, 민주주의 안에서의 다양성 존중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Redman 2021-10-04 2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또 배우게 됩니다.
 
생각 많은 판다 - 교회 때문에 아파하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단상
최대위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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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웹툰이라는 장르도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 같다이 책 역시 그런 웹툰을 책으로 엮는 건데그 주요 플랫폼 중 하나인 애끌툰이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기독교 웹툰은 기독교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좋은 영역이니 관심이 있는 분이 적극적인 후원을 하면 좋을 듯하다.


     돌아보니 에끌툰 출신의 단행본(이 플랫폼에 올라온 웹툰을 책으로 엮은 것)을 벌써 몇 권 본적이 있다. “의인을 찾아서”, “창조론 연대기”, “비혼주의자 마리아가 있었고이번 책 생각 많은 판다가 네 번째 인듯하다모두 어느 정도 읽으며 생각할 만한 꺼리를 던져주는 책들이었다.


     ‘기독교 웹툰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웹툰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꼭 그렇지만은 않다오히려 위에 언급한 책들은 기독교회가 안고 있는 고질병들문제점을 드러내고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이 주였으니까만화라는 특성상 이야기를 깊고 자세히 풀어놓기 어렵고때로 과장스러운 부분도 있지만그 안에 담긴 지적들은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들이다.

 


     이 책은 판다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주인공 캐릭터와 그 친구들이 교회와 관련해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짧은 에피소드로 풀어내는 책이다비단 이야기 속 주인공들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도 교회에 가기가 싫은혹은 불편한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요즘에는 가나안 교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이들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상처들을 입고 나와 있는’, 하지만 신앙을 버리지는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까이 책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지목되는 건교회에 속한 이들의 무신경한 말들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한 무감각한 반응들이다쉽게 말해 교회에 가면 편안하게 대화할 사람도 없고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각종 범죄에 관한 뉴스들사회적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그리고 지나친 원리주의로 인한 답정너’ 식의 경직된 태도 등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모두 곱씹어 볼만한 지적들이다. “언젠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상처받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책 속 대사가 인상적이다.

 


     다만 언제나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는 명제는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교회에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고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고그들이 원하는 심리적 안정을 제공해주기만 하면 될까책 속 또 한 이야기 가운데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건 목사가 아니라 어릿광대가 아니냐는 힐문이 실려 있기도 하다사람들이 위로를 원해서 교회에서 그런 메시지를 주라는 말을 하고 있지 않았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라고 촉구하는 목소리에 따라서실제로 일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어느 누군가는 이런저런 상처를 또 입기 마련이다자신이 익숙하고괜찮다고 생각하던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드러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니까사실 요새 많은 교회들에서 권징의 기능이 사라진 지 오래다잘못을 잘못이라고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처리하는 일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보다 훨씬 사소한 일로도 상처받았다며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다.(개인적으로는 이 상처받았다는 말이 참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생각한다직분자 선거에서 떨어져 안수집사가 되지 못했다고장로가 되지 못했다고 일가족이 교회를 옮기는 이야기는 이제 드물지도 않다요새는 그냥 기분 나쁘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

 


     요컨대 문제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만 다루려고 하면한도끝도 없다는 말이다하루는 이쪽하루는 저쪽에 서야할 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런 우려가 있다고 해도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일의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이 책을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듣기는 적게 듣고말은 많이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이건 야고보의 조언(약 1:19)과 정 반대되는 모습인데오늘 교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여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여러 사람이 같이 보고그 이후 함께 이야기 해 보면 좋을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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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9-24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책이 있었군요. 유명한가 본데 이렇게 시야가 좁아서야...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렇죠. 상처가 아니라 기분 나쁘다는 거죠. 이래저래 교회 다니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ㅠ

노란가방 2021-09-24 19:25   좋아요 0 | URL
많이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ㅎ
근데 한 번 읽어볼 만 한 것 같네요. 작가의 지적이 아프면서도 수긍되는 면이 많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