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영성 - 공간, 공동체, 실천, 환대
필립 셸드레이크 지음, 김경은 옮김 / IVP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론 세계라는 스케일로 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 살고 있지만산업화된 국가의 경우 적지 않은 비율로 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당장 우리나라만 하더라도서울과 그 주변의 경기도인천을 합쳐서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고그 중 대부분은 도시 거주민이다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군대에 있었던 36개월을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도시에서만 살아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도시생활이지만편리함이라는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흔히 도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삭막하고정이 없고개인주의가 심하고다른 사람의 삶에 별 관심이 없으며상업적이고 하는 것들이다요컨대 도시는 물질적이다.


현대의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들은 물질성(혹은 경제성이나 효율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계획되어 있다사람들은 오직 소비할 때만 모이고원하는 것을 구입한 후에는 흩어져서 각자의 둥지에 들어가 개인적인 삶을 이어간다각 구획으로 나뉜 도시의 구조는사람들의 삶을(그리고 삶에 대한 감각을분열시켰다아마 이게 도시에 관한 전형적인 이미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이미지에 조금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정말로 도시가 그런 곳일까처음부터 도시는 그런 곳이었을까저자는 서양을 배경으로특별히 기독교 전통 속에서 도시에 관한 좀 더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태도가 일찍부터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수도원 전통이라는 조금은 의아한 예를 끄집어 든다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시를 완전히 분리시키고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그들만의 공간인 수도원을 만드는 전통과 세속 도시에로의 참여라는 주제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걸까저자는 언뜻 이런 전통들이 신앙과 세상의 완전한 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세속 사회에 대한 강력한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 부분에 썩 크게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물론 기독교의 사회 참여그리고 도시라는 상징적인 공간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서 결코 소외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한다하지만 고대와 중세 수도원 전통을 도시로의 참여와 연결 짓거나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도성)”를 반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그 좋은 해석일까그저 현대의 관점을 지나치게 고대에 이입시키는 시대착오적 이론은 아닐까도 싶고.


물론 앞선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도시나 세상에 관해 그런 약간은 분리적인 생각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실제로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있었다거나오늘 우리도 그런 고립주의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강조되어 왔던 것처럼 사실 성경 속 다양한 이야기들은 세상에로의 적극적인 차며를 독려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다만 그걸 너무 억지로 작업하지는 말자는 것.



책의 2부는 약간 어렵다주로 철학이 물씬 묻어나오는 신학적 고찰들인데장소공간공동체 같은 주제들에 대한 검토다이런 검토를 마친 뒤 결국 저자가 하려는 말은 공동선에 대한 강조기독교인들 또한 이를 위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지극히 당연한 결론이고 따로 부정할 만한 게 없는 이야기.


다만 이런 당위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맥락에서 좀 더 설명해 주기를 바랐는데책은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살짝 아쉬운 부분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는 하려는데 이 책은 지나치게 어렵다그게 어디 소수의 엘리트 학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동하는 기독교 - 어떻게 공적 신앙을 실천할 것인가
미로슬라브 볼프 & 라이언 매커널리린츠 지음, 김명희 옮김 / IVP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가 청량감을 주는 파란 색으로 제작된 이 책은거의 같은 디자인에 컬러만 빨간 색으로 되어 있는 앞선 책 광장에 선 기독교와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다사실 원제부터가 앞선 책이 "A Public Faith"이고이 책은 “Public Faith in Action"으로 후속편이라는 느낌을 물씬 준다.


앞선 광장에 선 기독교가 공적 신앙의 의의와 정당성그리고 필요성 등에 관한 이론적 검토였다면이 책은 공적 신앙이 실제로 다양한 영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를 제안하는 내용이다. 2부는 좀 더 구체적인 삶의 정황을, 3부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성품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는 차이가 약간 있고.


물론 여기에 제안되고 있는 내용도 어느 정도는 원리적인 차원이긴 하지만그것이 제시되는 맥락이 워낙에 실제적인 상황이기에 각각의 사안에서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지 충분히 구체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다확실히 이 책보다 이론적인 성격이 더 강했던 전작에 비해 읽는 데도 훨씬 수월하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확실히 위축된 것 같다물론 이런 상황이 단지 지난 2년 동안 새롭게 나타난 건 아니고그보다 앞서 최소 십 수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었지만 확실히 사회 전방위적으로 이렇게 적대적인 반응을 마주한 건 최근의 일이다어떤 이들은 언론 탓정권 탓을 하지만그게 그렇게 중요한 요인이었을까?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는 와중에도기독교인들은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고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들을 죽이려 달려드는 로마의 군대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고묵묵히 자신들이 운명을 받아들였다오죽하면 일부 총독은 이들을 잡아 죽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할 황제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만이 아니라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느냐다우리 안에 담긴 것을 보여주는 건우리의 손과 발이 행하는 일이니까하지만 이 일이 쉽지만은 않다악을 피하고 선을 따르라는 단편적인 조언으로는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복잡한 사안들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어렵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저자들의 결론이 절대적인 해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사실 일부 내용들의 경우 약간 애매한 느낌도 준다예컨대 평화주의에 관한 저자의 의견은러시아의 침략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와 닿을까물론 여기에 제안된 논의는 저자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개략적이고좀 더 깊은 논의로 들어가는 마중물에 해당할 것이다.


주의할 점은 단지’ 이런 논의에만 머물면 안 된다는 점이다우리에겐 좀 더 많은 힘이 있고그 힘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근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문애란 지음 / 복있는사람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 담겨 있는 두 개의 키워드가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출근’(직업)과 그리스도인이 그것저자는 일과 신앙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자신의 삶과 엮어서 차분히 풀어낸다일견 이론서라고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그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는 광고계에서 제법 유명한 인물이라고 한다제일기획에 입사해 해외 광고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정부에서 훈장까지 받을 정도라니까그렇게 나름 성공가도를 걷고 있었지만그녀의 마음 속에는 허전함이 있었다다행이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신앙 안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컴패션이라는 NGO에서 10여년 동안 무보수로 전임근무를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면서 저자의 관점은 크게 달라진 것 같다일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해 사고하던 이전과 달리 그 둘을 한 자리에서 감당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물론 이런 일은 기독교와 관련된 전임사역을 할 때 쉽게 경험할 수 있지만저자는 그게 꼭 그런 자리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책에는 저자가 발견한 깨달음과 함께어떻게 하면 우리의 일터가 신앙의 자리가 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조언들도 담고 있다몇몇 조언들은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지기도 하지만대체로 건전한 내용들이다딱딱한 이론서 보다는어쩔 때는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꼭꼭 눌러 쓴 편지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그만큼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쉽다고 해서 내용이 빈약하다는 뜻은 아니다사실 이보다 길게 같은 내용을 좀 더 각 잡고 쓴 책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그런 책엔 더 많은 성경구절과 참고문헌들그리고 긴 설명구가 더해질 테고하지만 그런 책은 확실히 읽기도 힘들어지니까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한 시도를 처음 한다면 이 책도 괜찮은 선택일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학 교육의 역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김태형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 대형 교단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4년제 정규 학사 학위(전공은 따지지 않는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2(감리교의 경우), 혹은 3년제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야 한다졸업 후에는 교단에서 주관하는 소정의 시험에 합격할 것이 요구된다이후 몇 년 간의 일종의 수습 기간을 거친 후 목사라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교육부 인가를 받은 상태로 진행된다물론 규모가 작은 교단 같은 경우에는 이런 정규교육과정이 아닌 좀 더 간략화 된 과정을 통해서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전국에 수많은 소규모 ‘(교육부비인가 신학교가 존재하기도 하고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도 정규 대학원 과정 이외에 (아마도 등록금 수입을 위해서)비인가 목사교육 과정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심지어 몇몇 소규모 교단에서는 ‘(방송)통신과정을 통해서도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학교육 과정은 언제부터 존재했던 걸까교회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책을 많이 써내고 있는 후스토 곤잘레스가이 익숙하지만 제대로 해 본적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낸다.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매우 오랫동안 정규적인 신학교육 과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무려 15세기 동안 그랬다초기 기독교 시기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신학교육기관이 당연히 없었다그 시절에는 새롭게 교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비 세례자 교육만이 있었다그런 교육과정은 종종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상황이 바뀐 건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기독교화를 시작했을 때부터였다갑자기 엄청난 사람들이 이들이 교회로 몰려들면서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충분한 교사와 시간이 부족해져버렸다몇 년씩 걸리던 세례교육과정은 점점 짧아져서 몇 주로 단축되었고일단 세례를 받고 서서히 기독교인의 자격과 지식을 갖출 것을 기대했다.


야만족들이라고 불렸던 게르만족이 서유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상황은 조금 더 변했다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직자들만 남게 되면서그들은 게르만족 왕궁에서 관료로 활동했고한편으로 수도원 등을 중심으로 학문(신학과 철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전통이 나타나기도 했다이전 시대 모든 이들에게 권장되던 신학교육이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변했다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대학이라는 기관으로 발전한다.


종교개혁의 파도가 몰려들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를 맞이하는데비로소 신학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이전 시대 제대로 된 신학교육 없이 예배와 목회직을 맡았던 이들이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동시에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 진영에서 서로에 대한 신학적 공격과 방어를 위한 지식인을 양성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는 것.





긴 역사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내는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하나하나 탐색하면서 읽어볼 만한 내용이 잔뜩 있다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책의 마지막 두 장에 있는 것 같다저자는 역사적인 검토를 마친 후오늘날 신학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간략하게 분석한다고작 두 장에 걸친 고찰이지만신학교 현직에 있는 사람답게 그 안에 담긴 문제를 날카롭게 끄집어낸다.


오늘날 신학교의 교육은 단지 기능적인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신학 교육이 한 사람의 신앙과 그가 앞으로 사역자로 해 내야 할 직무능력을 신장시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무엇보다 신학교 교육이 교회 현장과 유리되면서 이런 경향은 가속되고 있고단지 목사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양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식의 정규 신학교육이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혔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실제로 미국 유슈의 신학교들은 아시안계 유학생들이 없다면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처해있기도 하다이런 상황은 이미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신학교 지원자수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난지 오래다.


이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그래봤다 전체 기독교 역사의 1/6 정도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쉽지 않은 일이고안타깝지만 잘 될지 확신하기도 쉽지 않고교단과 교계의 기득권층으로 꽉 들어찬 신학교는 마지막 순간 어쩔 수 없어 등 떠밀릴 때까지 버틸 것처럼 보이니까.


기독교 신학교육의 어제와 오늘을 훌륭하게 정리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위일체와 교회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에 대한 가톨릭·동방 정교회·개신교적 이해를 찾아서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황은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만에 머리 아픈 책을 읽었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어냈다’. 물론 볼프의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하지만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에 비해서도 이번 책은 월등히 난해했다도대체 한 문장을 몇 번씩이나 읽어갔는지 모르겠다하도 이해가 되지 않아 번역자가 누군지 일부러 찾아봤다알라딘 기준으로 다른 책을 번역한 이력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이번이 처음이었을까결국 중반 이후부터는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기 보다는 전반적인 맥락을 잡고 넘어가는 데 치중했다.


사실 이런 번역상(애초의 문장이 난해했을 수도 있다)의 악조건을 넘어가면 책의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다책의 1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두 명(교황직을 맡기도 했던 라칭거 추기경과 지지울라스 총대주교)의 교회론을 검토하고, 2부에서는 그 두 전통적 교회의 입장과 함께 자유교회라는 개신교 중에서도 좀 더 덜 조직적인 입장을 함께 제시하면서 볼프 자신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볼프 자신은 이 세 개의 입장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대신경우에 따라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그의 교회론의 핵심은 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마태복음 18장 20절에 기초하는데, “두세 사람이 내(예수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구절이다이를 기초로 볼프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약속은 믿음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회중에게 약속되었으며이 회중을 통해서 개인에게 그 약속의 효력이 전달된다고 주장한다이 점에서 그는 신앙에 있어서 개인주의에 치우친 자유교회의 주장과는 거리를 둔다.


사실 전통적인 교회론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이 점에서 의견을 일치를 이룬다하나님은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삼위로 영원한 내적 교제를 이루시는 분이고이런 그분의 존재 방식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교회의 존재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요 17:21)


하지만 그 실제적인 존재 방식에서 이 두 오래된 신앙 전통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로마가톨릭교회는 삼위의 통일성에 집중하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적 한몸됨을 강조한다면동방정교회는 삼위의 삼중성을 강조하면서 각 교회의 독립적인 연대 정도의 구조를 지지한다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자유교회와 유사성을 지닌다.


그런데 또 성직자라는 직임에 관해서 두 교회 전통은 꽤나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데둘 모두 그리스도인 개인이 교회에 속하는 과정에서 성직자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본다주교야말로 교회를 역사적 전통과 이어주는 고리라는 것이다그리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이런 견해는 점차 군주적 구조로 변해갈 위험이 있었다(마치 교황제도가 그랬듯이).


볼프는 참된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닌 교회는군주제적 구조를 띨 수 없다고 주장한다삼위 하나님이 교통하듯이교회의 구조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뮐렌이라는 신학자의 의견을 인용하면서 심지어 교황제도 집단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교회는 상호의존적이며서로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사정없이 비판받는 시대다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교회의 이미지는 낡고고루하고촌스럽다. “아직도 교회에 다니느냐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그리스도인들조차도 교회의 존재 이유를쉽게 말하면 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도 한다교회론의 위기다.


볼프의 이 책은 (난해한 문장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신자는 자기 혼자서 믿음으로 나아온 것이 아니다교회는 그에게 신앙의 내용을 전달해주었고그 길로 이끌었다하나님이 주신 신앙은 그로 하여금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속에 자리 잡게 만든다그는 교회적으로 규정된 존재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교회지만그 실제 존재 방식에서 잘못될 여지는 언제나 있다대표적인 것이 군주제로 대표되는 교회의 위계조직의 경직화다애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교황이든주교든총회장이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면그들 중 한 명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우월한 신앙적 계층을 형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실제 운영에 있어서 조직이 만들어지고명령관계가 형성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각 지역에 존재하는 개별교회만 해도 의사결정과 사역을 위한 구조가 존재한다오랜 역사와 전통을 통해 형성된 그런 모습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하지만 이런 구조들이 교회의 법으로 만들어지고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무엇이 되는 순간 타락은 시작된다그건 영원한 교통 중에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리는일신교적 모습이니까.


오늘의 교회는 반론과 이의제기에 얼마나 열려있을까질문이 꺼려지고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무례하거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 양 억누르는 게 교회의 모습이라면그건 볼프의 말처럼 그가 무슨 고백을 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내 판단이 아니라 교회의 판단정확히는 공동체의 판단좀 더 정확히는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할 텐데그런 사람들을정확히는 그런 리더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아직 교회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만약 교회가 그 본질에 따라 삼위 하나님처럼 서로 진정한 교제를 이루고그렇게 살아내기 위해 애쓴다면 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