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 위에서 쓴 편지 - 신앙의 선배가 후배에게 전하는 기독교적 삶에 관한 지혜와 통찰의 메시지
D. A. 카슨.존 D. 우드브리지 지음, 노진준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도 그 이후의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책 역시 그 중 하나인데, 두 명의 저자들은 서문에서 이 책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물론 편지라는 형식으로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전달하는 시초는 신약성경의 서신서를 비롯한 초기 교부들의 저작들에서도 발견되지만, 이쪽은 처음부터 특정한 목적을 갖고 가공의 편지를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연속된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좀 더 개인적이고 내밀한 내용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어떤 사안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굳이 서론, 본론, 결론을 완벽하게 맞출 필요 없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만 쑥 들어갈 수 있다는 (저자 입장에서의) 유익도 있으니, 이 장르적 특성을 잘만 사용한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책은 팀 저니맨이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친구인 우드슨 교수에게 받은 편지를 모았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는 아니고 발신자와 수신자 모두 가공의 인물인데, 편지를 보낸 우드슨은 카슨과 우드브리지라는 두 저자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저니맨은 프린스턴에서 공부를 하고 금융계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점차 기독교에 흥미를 갖게 되고, 나중에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트리니티와 예일에서 마치고 한 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내용상 십수 년에 걸친 팀의 이 믿음의 여정에서 우드슨은 그에게 필요한 조언을 정성스럽게 편지로 쓴다.


책 초반은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기독교가 갖는 독특성과 그 내부의 미묘한 문제들에 관한 내용이고, 후반은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에 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목회적 조언들이 주로 담겨 있다.


사실 두 파트 모두 읽을 만한 내용으로 잔뜩 채워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내용이 더 깊이 와 닿는다(전공을 속일 수 없는 것인지). 저자의 입장은 대체로 안정적인 보수적 관점을 취한다. 특히 에큐메니컬 운동이라든지 자유주의적 신학연구에 대한 경계 같은 부분에서 이런 면이 잘 드러나는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전통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신 얄팍한 면이 있는 현대 신학의 여러 사조들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는 식이라 읽어볼 만한다.





교회에서 전임사역자로 일하고자 하는 신학생들이나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일단 그 즈음에는 뭘 어떤 걸 읽어야 하고, 문제를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큰 프레임이 필요한 법인데, 이 책이 그 부분에 대단히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루이스의 글에 비해 유머러스한 부분이 좀 부족한 게 아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똥 싸면서 읽는 기독교 이야기 (보급판) - 취업과 결혼, 진로… 그보다 더 현실적인 물음 똥기 시리즈
차성진 지음, 이단비 그림 / 아바서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파격적(?)이다. “똥 싸면서 읽는 이야기”라니... 여기에 붙는 게 기독교(1권), 예수님(2권), 우리들(3권)이다. 흔히 생각하는 기독교 책하면 떠오르는 거룩한 오라가 여기에는 붙어 있지 않다. 아마도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이름이리라. 고상한 체, 거룩한 체, 엄숙한 체 하느라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무슨 관광지의 유적을 방문하는 것처럼 거슬리고 어색해져버린 교회의 이야기를 기름기를 쏙 빼고 담백하게 말해 보겠다는.


세 권의 책이지만 각 권에 담긴 글자 수 자체가 적다. 대신 감각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삽화가 매 페이지마다 담겨 있어서 읽는 데 즐거움을 더해준다(대신 이 한 권, 한 권을 읽은 책으로 계산하기는 뭐해서 그냥 세 권을 합쳐 한 권 읽은 것으로 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적은 수의 글자로도 저자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훌륭히 잘 해 냈다.




1권에서 저자는 우리가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에 관해 말한다. 그 중심에는 죄가 가져온 비참함과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결말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아다니지만 모두 이 종착역을 벗어날 수 없다. 온갖 철학자들이 이 두려운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지만, 정말로 그런 식으로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음을, 그리고 이 문제의 유일한 해법이 기독교임을 보여준다.


2권은 그 해답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그분은 십자가라는 엄청난 사건을 기꺼이 감당하시면서, 죄가 우리에게 가져온 비참한 결말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셨다. 그분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종착지를 바꾸어 내셨다.


3권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 즉 교회에 관한 이야기다. 교회는 여전히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세상으로부터의 피난처이자, 그런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 사랑은 단지 동료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핍박하는 저 세상까지도 포함한다.




요약해 적어놓고 보면 무슨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관건은 이 이야기를 짧은 문장으로 풀어나가는 저자의 터치, 그리고 앞서도 말했던 내용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주면서도 동시에 핵심에 집중하게 만드는 일러스트다. 둘 다 훌륭하다.


저자는 신학적인 논리 전개만이 아니라, 대체로 일상언어를 사용해 기독교 신앙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이해할 법한 용어와 논리로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사실 책의 내용도, 구성도 기독교에 대해 좀 안다는 사람보다는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좀 아는 사람이 읽어도 좋다)


교회와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한 표지 중 하나는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대충 이해하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감도 안 잡히는 그런 단어들이 많아지는 건 분명 교회의 위기 요인이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목사시험에 번역시험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성경의 용어를 일상의 말로, 시장의 대화로 옮겨낼 수 있어야한다는 말.


어렵지 않은 말로,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식으로 기교의 중요한 메시지를 훌륭하게 설명해 낸 책이다. 작은 볼륨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다. 가능하다면 기독교의 다른 교리들은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은 동성애를 반대하실까? 질문 시리즈
샘 올베리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전 세대들이 ‘동성애’라고 불렸던 심리적 상태를 요새는 다양한 영문 이니셜로 표시하는 것이 유행이다. LGBT에 요새는 Q까지 더하고, 심지어 여기에 몇 개의 알파벳을 더 붙이거나 앞으로 누군가 주장할 다양한 성적 지향에 열려 있다는 의미의 +를 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자신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성적소수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 종류는 이쪽이 훨씬 더 다양한 것 같다.


사실 이들이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외부인들이 뭐라고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제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중요한 기준이나 원칙들마저 자신들의 주장에 맞춰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속적) 학계의 지지를 받아 이들의 주장은 어느 샌가 “보편성”, 혹은 “인권”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서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와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런 도전이 더욱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성경의 곳곳에는 동성애를 명백히 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약자와 소수자로, 핍박받는 이들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잘못을 주장하는 것이 마치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만 여겨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앞서 말한 보편적 인권 문제로 이 상황을 정의하는 점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주제에 관해 적어도 당사자성을 갖고 한 마디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는 동성애적 지향을(책에서는 “동성간 끌림" same-sex attraction, SSA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갖고 있는 성공회 사제이다.


저자의 접근은 모든 사람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개하고 천국을 받으라.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이건 이성애자들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요청이다. 오늘날 많은 성소수자들은 마치 자신들의 성적 지향이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비슷한 착각은 페미니스트들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성적 지향은 우선 그를 구성하는 여러 종류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고, 나아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할 핵심이 아니다.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은 성경 속 동성애 정죄를 다양한 논리로 약화시키거나 해체하려고까지 시도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온갖 종류의 (아마 성경 시대에는 없었을=성경의 저자들은 생각하지 않았을) 다양한 논리적 기교가 필요하다. 이에 반해 저자는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진술을 좀 더 문법적이고 문화적이며, 분명한 방식으로 읽어낸다. 성경은 분명 그런 행위를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건 단지 부가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하나님 백성)의 삶의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경고다.


이 두 가지 기초 아래 저자는 빙빙 돌리지 않고 분명하게 이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밝힌다. SSA가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것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충동은 우리를 죄로 이끈다(그런 충동이 생기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SSA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건 기독교에서 성과 관련되어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이 두 가지 상태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는 결혼 관계 속에서 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절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부분에 관해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 설명의 과정이 억압이나 강요의 성격이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SSA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모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의를 진전시키는 것과는 상관없다. 우리는 그들 또한 우리처럼 온갖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당연히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문제를 가지고 대화할 자리는 언젠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이고, 단순히 그건 잘못 됐다고 외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보통 그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법은 거의 없다),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그들의 동료이자 친구로서 성경적 조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이런 조언은 개인적 관계로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SSA를 지닌 이들을 만날 때 취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좋다고 본다. 다만 이 문제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넘어 한 사회의 제도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는 이런 수동적인 포지션으로 충분할까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책이 아주 콤팩트 하다. 때문에 아주 깊은 논의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 담아야 할 내용은 충분히 담아낸 것 같다. 어차피 학문적 접근이 목적이 아닌 이상은 이 정도 내용이면 충분히 교회 안에서 대화와 공부에 사용해 볼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학과 과학의 화해 - 급진적 종교 개혁파의 관점에서 본
낸시 머피 지음, 김기현.반성수 옮김 / 죠이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학과 과학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충돌, 혹은 최소한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사골 우려먹듯 꺼내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갈릴레이의 재판인데, 잘 각색된 대중판에 의하면 이 재판은 이성적 사고보다 맹목적 믿음만을 강조하던 권위적이고 전제적인 교회 당국에 의해 오직 진리가 무엇인지를 합리적 사고와 관찰로 추구하던 한 과학자가 입틀막 당한 사건이다. 그러나 마침내 시대는 변했고, 이제 억압받던 과학자들이 마음껏 종교를 무시할 수 있는 날이 왔다는 것이 이 동화의 결말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이의 재판에 관한 대중적 각색에는 그 재판이 당대의 과학적 패러다임 사이의 충돌이라는 점이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그냥 망원경으로 하늘을 쳐다보면 뚝 떨어지는 이론이 아니었고, 두 이론 모두 관측된 데이터를 해석하는 데 충분히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 논쟁은 하나의 과학 이론과 다른 이론 사이의 충돌이었고, 당시 교회는 그런 종류의 과학을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했다.(당장 천문학자들 중에 성직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이런 식의 대립적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싸움은 이전과는 좀 다른 양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이번에는 교회 내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도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성경에 대한 문자적인 이해만을 고수하는 이들은 최근의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면서 성경을 과학책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엔 정말로 과학과 신학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물론 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이 책은 이 두 분야의 갈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간다.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후에 신학도 공부한 저자는 이 주제에 관해 의미 있는 말을 할 위치에 있어 보인다. 현대 저자는 종교개혁 급진파라고도 불리는, 재세례파 전통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 몸을 담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신학과 과학의 형식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른바 “과학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한다. 신학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가설을 세우고 연역적 추론을 사용해 이론을 정립해 나간다. 둘 모두 데이터가 필요하고, 이 경우 신학의 데이터는 성경과 그 해석사, 그리고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삶이 주된 데이터다. 과학 역시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 진리’를 도출하는 단순과정이 아니라는 점 또한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오늘날의 과학이론은 증명이 아니라 확증을 추구한다.


그럼 과학과 신학은 어떤 형태로 서로 관계를 맺을까? 이 부분 또한 인상적인데, 저자는 과학의 제 분야들의 계층 모델을 제시하면서, 하나의 계층에 속한 과학은 그 상위 계층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이 계층 모델의 가장 기저에 있는 물리학은 그 상위의 화학적 설명으로 해석되는 면이 있고, 다시 화학은 생물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저자는 여기에서 최상위에 신학의 자리를 마련한다. 우주론과 사회과학적 연구를 설명하는 데 신학적 이해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모델에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뿐 아니라, 심리학과 사회학, 윤리학 같은 사회과학 영역까지 통합되어 있는 점이 독특하다. 서로 다른 학문 분야 사이의 통섭적 연구가 각광을 받고 있는 현재 딱 맞는 설명인 것 같기도 하고. 저자는 자신의 이런 모델이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우주의 미세조정이나 영혼, 진화론 등의 주제를 가지고 입증하고자 시도한다.




사실 서로 다른 분야를 통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양측의 장점만을 취하는 게 쉬울 것 같지만, 결국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친 결과물일 수도 있다. 이번 경우 저자의 입장은 전반적으로 과학의 설명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라는 느낌이다.(당연히 이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과학과 신학이 하나의 계층적 모델을 이루고 있다는 저자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같은 대상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서의 설명이라고 보면 그리 무리한 입장은 아니다.


과학의 일원론적 견해와의 유사성(조화)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재세례파의 영육일원론을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하는 것도 어느 정도나 설득력을 가질까 하는 의문은 든다. 물질 말고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과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은 외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그 함의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대화, 그리고 조화를 위한 노력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다. 신학과 과학의 통합적 이해 역시 분명 의미가 있어 보이고.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열애
진 에드워즈 지음, 최요한 옮김 / 죠이선교회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인 진 에드워드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교내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년 선배가 “세 왕 이야기”라는 책을 빌려주었다.(그 선배 잘 지내시나) 사울과 다윗, 그리고 압살롬이라는 세 인물의 관계를 특별히 내면에 집중해서 풀어내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바로 그 진 에드워드가 쓴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서로 독립적인 사람들로부터 두 번이나 추천을 받았던 책이라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구름책방과 협업관계인 죠이북스에서 나온 책이었다.





책은 제목처럼,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을 묘사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의 전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묘사를 신학적 서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작가는 문학적 상상력을 말 그대로 폭발시킨다.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내는 상상력이 꽤나 파격적이다. 흔히 신학적 용어 안에서 “안전하게” 묘사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마치 남녀 사이에서 주고받을 법한 짙은 밀어 같은 느낌이다. 마치 중세의 유명한 신비주의자였던 아빌라의 테레사가 했을 법한 고백 같은 느낌이랄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상력이 “신학적 구토반사”를 일으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검사를 위해 내시경 기구가 식도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그대로 느껴야 했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반사작용이라는 게 그런 거다. 특히나 나처럼 신학에 절여져(?) 있는 사람들은.


하지만 이걸 문학으로 본다면, 그리고 그 문학 속에서 발견되는 신학적 설명이 우리가 익히 배워온 그것과 조금 다르지만 또 아주 멀지는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금은 진정(?)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 전체에 걸친 강렬한 사랑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가서에서 볼 수 있는 노골적인 성애적 묘사를 넘어서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성경 속 묘사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식으로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한계를 깨뜨려주는 작업이 종종 있지 않다면, 우리의 상상 속 하나님은 점점 쪼그라들 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