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 진짜와 허상에 관하여
에밀리 부틀 지음, 이진 옮김 / 푸른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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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커피 체인에서 멍청한 광고를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언제까지 진행될지 모르는 불매운동으로 매출도 꽤 줄어든 것 같고, 보다 심각하게는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워낙에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중은 더욱 의심을 하고 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건이 잠잠해지지 않자, 마침내 일주일도 더 지나서 회장이 공개석상에 나와 사과문을 읽었다.(대체로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번에는 사과문의 내용도 지적을 당한다. 미안하기는 한데, 이 문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도 있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이 그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과연 이 진정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일까? 이 책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진정성이라는 무엇일까? 오늘날 이 단어는 각자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라”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라면 앞서 언급한 회장도 나름의 진실성/진정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온 것이다. 최소한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평소가 갖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으니까.


서문에서 저자는 한 작가의 글을 인용하면서, “진정성 이전에는 성실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남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애초에 진정성이란 그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은 이 진정성이라는 것이 다양한 영역에서 얼마나 오염되고, 제멋대로 생각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셀럽 문화의 중심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그놈의 “킴 카다시안”!)과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기이한 반응들을 읽다 보면 이 진정성이 얼마나 많은 정의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진정성”이란, 결국 그냥 그가 우리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그 ‘우리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 한 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던 다양한 “제품들”(책에는 힙스터들의 아이템이 언급된다)은 시간이 지나면 또 그저 촌스러운 무엇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변덕스러움은 또 다른 증거이고.


물론 이렇게 보면 ‘진정성’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실제로 책에는 그런 뉘앙스가 좀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건 앞서 언급했듯, 진정성을 그저 나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모호하게 정의하는 현대적 견해에 따른 것이지, 진정성을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와 행동으로 보는 좀 더 오래된 전통적 견해로 보면 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진정성을 정의하는 일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좀처럼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책에는 꽤 흥미로운 예시들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문화적 도용”, “성 정체성” 같은 것들. 애초에 이민 2, 3세대라면 그들이 주장하는 문화적 유산과의 유대는 이미 빈약해진 상황인데도 누군가 자신들이 전유하는 문화적 양식을 조금 따라한다고 도용 운운하며 비난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것.


진정성이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손을 잡을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어야지, 서로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켜 대립과 싸움만 일으키는 데 사용된다면,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은 그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핑계가 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진정성 논의를 의미 없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언제나 도를 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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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 다원주의 사회와 시민교양
오스 기니스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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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대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고 거의 전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대규모 난투극이다. 어쩌면 이미 제3차세계대전은 시작되었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세 번째 대전쟁은 앞서의 두 전쟁과 양상이 다르다. 이전의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연합끼리 맞부딪혔다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은 국가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실 국가 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이들이 맹렬하게 대립하는 일은 역사상 수없이 되풀이 되어 온 일이긴 하다. 일부의 투쟁은 종종 내전이라고 불리며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무력을 사용한 대립은 일종의 대화이기도 했다. 대화가 끝나면 어쨌든 상황은 수습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쟁은 도무지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전 시대의 큰 진영들 사이의 대립은 조금 누그러진 듯하지만, 이제는 수도 없이 세분화된 수많은 정체성들이 각각의 참호를 파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리한 참호전을 벌이고 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증오의 깊이도 함께 깊이 패인 상황이다. 정치적 견해와 인종과 성별을 비롯한 수많은 차이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소명”으로 유명한 저자 오스 기니스는 40여 년 간 살아온 미국 사회를 갈라지게 한 다양한 요소들을 바라보며 수많은 갈등 당사자들이 함께 모여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유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책의 논지의 중심에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설정이 놓여있다.


중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지만, 저자는 미국의 헌법 정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특히나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해서 프랑스와 영국의 해결책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혁명으로 교회의 문에 못을 박아 매장하려 했고, 영국은 국가교회의 형태로 종교를 남겨두었으나 매우 제한된 형태의 의식으로만 유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두 나라에서 교회는 정치에 종속되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도리어 종교의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


문제는 오늘날 이런 미국 헌법의 정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는 양편의 공격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 편에서는 세속주의에 기반해 국가와 교회를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고(내지는 아예 종교의 영역을 지워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다시 한 번 교회와 국가(권력)의 일체화를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오늘날 문화전쟁을 통해 서로를 맹렬하게 비난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분열시키는 중이다.


저자는 양측의 주장의 연원과 현실을 충분히 살핀 후, 현재 양 진영에서 주장하고 있는 ‘신성한 공적 광장(국가와 종교의 밀착)’과 ‘벌거벗은 공적 광장(국가와 종교의 극단적 분리)’은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양심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결된 종교의 자유(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시민교양에 기초한 공적 광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양면 전쟁은 가장 어려운 전쟁 유형 중 하나다. 어지간한 강대국도 양면에서 강한 적과 마주하는 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데 제대로 된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힘든 전장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야 할 때가 있다. C. S. 루이스도 그의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딜레마다. 한 쪽을 상대하는 것도 벅찬 데, 이 쪽에 대응하다 보면 저쪽 편이냐는 공격을 받기 일쑤라 치열한 진영논리 속에서 고립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런 입장이 언제나 두루뭉술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꼭 혼란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극단적인 주장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끄는 법이니까. 그러나 극단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낳는다. 트럼프로 노골화된 미국의 문화전쟁이 민간인을 향한 총질도 마다하지 않는 무장 사병집단(ICE)으로 확장되는 모습은, 지난 친위쿠데타 사건을 겪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 다 단순히 똘아이 같은 대통령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광장을,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대화하는 자리가 아니라,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자기주장만 되뇌는 집회장으로만 인식하는 강력한 집단적(이 쪽이나, 저 쪽이나) 사고가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결국 돈과 권력이 있다.


확실한 건 우리의 광장에 필요한 건 거대한 돌덩이로 총 든 형상을 세우는 게 아니라, 대화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지방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는 이 즈음,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코 낙관할 수 없을 것 같다. 온라인에 가득한 혐오는, 이제 누구도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나와 다른 진영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광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의 배후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상황을 분석하고 풀어낸다. 훌륭한 솜씨다. 몇 번은 다시 읽으며 책 속의 논리를 깊히 익히고 싶은 책. 상반기 읽은 책 중에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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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독학 이세돌 바둑 첫걸음 가장 쉬운 독학 이세돌 바둑
이세돌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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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AI 열풍이 한창 시작되었을 무렵 알파고라는 이름의 바둑 인공지능과 상대한 인간 기사로 (이전에도 유명했지만) 더욱 유명해진 이세돌 전(前) 프로기사가 쓴, 바둑책이다. 뜬금없이 바둑책을 손에 든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가끔 수학책이나 물리학책을 손에 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우연히 바둑에 관한 책이 눈에 띄었다.


사실 나는 온갖 잡기에 능한 게 없는데, 바둑은 전혀, 장기와 체스는 겨우 기물을 움직이는 법을 아는 정도고, 몸을 사용하는 것들, 예를 들면 많이들 하는 당구라든지, 볼링이라든지 하는 것도 즐기지도 않고, 당연히 잘 하지도 못한다. 가끔씩 바둑채널에 대국을 하는 걸 켜 놓긴 하지만, 뭘 알아서가 아니고 그냥 그 조용한 분위기, 가끔 나오는 차분한 해설 같은 걸 화이트 노이즈로 삼아서 다른 일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 나이에 바둑을 배워봐야겠다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바둑이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물에 들어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만, 백과사전을 읽으며 수영을 어떻게 하는지, 경영의 국제 규칙과 규격 같은 건 습득했던 것처럼). 또, 온갖 전략과 전술이 난무하는 게임 자체가 내 취향이기도 했고.





이 책은 이세돌이 말 그대로 바둑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규칙들과 전술을 설명해 주는 내용이다. 딱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 기본적인 용어들에 관한 설명도 있고, 집이란 게 뭔지, 상대의 돌을 잡는 방식, 어떻게 내 돌을 살릴 것인가 등등. 각각의 설명마다 컬러로 된 기보가 함께 등장해서 이해를 돕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책에 이 부분이 빠지면 곤란하다. 곳곳에 독자에게 생각해 볼 질문을 던져서 방금 배운 것을 실제로 써 먹어 보게도 하고.


물론 이 한 권의 책을 봤다고 해서 바둑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긴 힘들다. 책에서 예시된 건 대국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모양이고, 그게 전체 대국에서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는 한참 더 공부가 필요할 게다. 그래도 뭐든 제대로 즐기려면 먼저 어느 정도 알아야 하니까.


퍽 재미있어 보이긴 하는데, 이걸 좀 더 이해하고, 그 깊은 맛을 즐기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이 안 된다. 정확히는 내가 그 정도의 시간을 지금 투입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읽는 동안 잠시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책이다. 중간 중간 이세돌 개인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고, 책 말미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한국 바둑 계보도 재미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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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교회가 온다 - 교육운동가 송인수의 평신도교회 17년 이야기
송인수 지음 / 잉클링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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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말하는 ‘평신도교회’란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회중교회/조합교회처럼 교회에 목회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회 구성원들이 자체적으로 예배(당연히 설교도 포함된다)와 교회운영을 하는 형태는 이미 많이 있어 왔다. 다만 이런 형태의 교회가 제법 큰 교세를 이룬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태라 생소하게 느낄 수 있다.


물론 약간의 차이도 있어 보이는데,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평신도교회’는 여기에 가정교회의 모델까지 융합시키는 이미지를 그리는 듯하다. 한두 가정, 많아야 예닐곱 가정 정도의 작은 모임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기성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저자가 이런 새로운 모델의 교회를 시작한 건, 역시나 어떤 불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에는 이 부분이 굳이 자세하게 언급되지는 않는데, 문맥 상 교회 재정 사용의 방향성이라든지, 조직 운영의 한계, 그리고 목회자의 자질 문제도 어느 정도 있지 않았나 짐작된다.


책에서 저자는 평신도교회 모델이 이른바 ‘초대교회의 정신’을 좀 더 잘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기독교 초기 역사의 몇몇 장면들을 언급하기도 하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강조도 보인다.





다만 저자의 이런 주장들은 명백한 한계가 보인다. 우선 목회자가 없다고 해서, 저자가 불만을 느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받은 훈련과 교육은 간단히 대체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또, 평신도들 가운데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 시절 우연히 그리스도의 교회 계통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내가 신학생이라는 걸 모르고서 초대를 한 것 같은데, 가보니 한 대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몇몇 대학생들이 모여 예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예배의 진행은 선배로 보이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남학생이 이끌고 있었다. 흥미가 생겨서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게 조금 날카로웠던지 그 학생은 약간 흥분한 듯 했고, 그대로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때 내가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이랬다. 신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분이 설교를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분이 신학적을 일탈하게 되면 누가,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가. 모든 걸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이단들도 다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가 그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말은 아니지만, 처음엔 좋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어떻게 길을 잃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이런 식의 환원주의 비슷한 논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교회의 역사가 마치 처음 1세기 정도 제대로 진행되다가 수백 년(또는 천 년 이상) 길을 잘못 들었고, 이제야 (본인에 이르러서) 다시 제 길을 찾은 것처럼, 지나치게 단순화된 역사 모델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같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뭔가 교회에 본질적인 문제가 일어났던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고.


이런 몰역사적 관점은 하나님께서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을 너무 쉽게 무시하는 오류다. 교회의 조직은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고민하고 도출해 낸 결과물의 집합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형식은 현실에 맞춰서 끊임없이 개선되고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역사적인 적층물 위에 서는 것이지, 우리가 당장 사도행전의 시대에서 이어지는 게 아니다.





조금 비판적인 리뷰가 되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그리고 실천하는 교회 모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반드시 어느 한 가지 표준 모델을 따라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예배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이미 ‘개신교’로 분류되는 많은 교회들 사이에도, 나라별, 지역별로 예배의 모습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당장 우리의 엄숙한 장로교회의 장로님들은 미국 흑인 침례교회의 경쾌한 예배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평신도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답은 당연히 아니고, 어쩌면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보이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 일종의 직무유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라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할 의무도 있는 법이다.


시종일관 정중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 저자의 인격이 짐작된다. 책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일종의 설명/변호적 내용이라 방어적 논리가 좀 보이긴 하지만, 후반에는 실제로 저자의 예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스크립트가 실려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양한 고민을 하면서 읽고, 토론해 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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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서 듣는 음악
하태우 지음 / 워크룸프레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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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특이했다. 휠체어에서 듣는 음악이라. 이 책은 작가가 감상한 여러 음악 앨범들 중에 좋아했던 것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음악 에세이다. 그런데 작가가 세 살 때부터 근육병 진단을 받은 장애인이라는 점이 조금은 다른 점이랄까. 하지만 뭐 음악을 감상하는 데 신체의 장애가 (청각 장애가 아니라면) 뭐 그리 특별히 다를까.


물론 오랜 시간 장애를 안고 살아온다는 건, 자연히 사람의 사고와 심성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일 것이다.(당연히 그 영향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똑같지는 않을 것이고) 그리고 이런 부분이 특정한 음악을 감상하는 데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걸까?





책에 언급된 노래들은 대부분 밴드의 곡들이다. 헤비메탈도 있고, 락도 있었던 것 같고. 물론 조금은 잔잔한 장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관심이 있는 장르는 아니다(덕분에 소개된 앨범 대부분은 모르는 곡들이었다). 일단 귀를 시끄럽게 만드는 노래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니까.


대신 노래를 들을 때는 가사에 자주 집중하는데, 또 이 점은 작가와 어느 정도 비슷하기도 하다. 책에 실린 몇몇 노래들에는 관심이 좀 생겨서 유튜브로 찾아보기도 했다.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들어봐야지.


책은 각 앨범마다 대부분 두 페이지가 할당되어 있는데, 왼쪽 페이지에는 그 앨범의 표지가, 오른쪽에는 그에 대한 작가의 설명과 감상이 담겨 있다. 한참을 페이지를 넘기다가, 요새는 앨범 이미지를 다들 이렇게 유화 느낌으로 만드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앞서도 말했던, 유튜브로 찾아본 앨범 사진을 보고 깨달았다. 아, 이거 다들 사진으로 된 원화를 유화 느낌으로 바꾼 거구나. 여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





모든 글은 결국 그것을 쓴 사람의 일부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제목부터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이 책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일부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에 관한 생각도 아울러 묻어난다. 그런 부분들은 조금은 무거운 느낌이다.


억지로 밝은 척은 아니다. 그냥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남긴 지극히 개인적인 에세이에 가깝다. 나처럼 좋아하는 곡이 거의 없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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