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그려진 이야기 - 그리스인들의 별자리 신화
데이비드 W. 마셜 지음, 이종인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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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늘을 바라보며 별들에 주목해 본 게 언제일까. 연중 미세먼지와 대기오염으로 가득한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어지간히 밝은 별이 아니면 잘 보이지도 않긴 하지만, 오래 전 군 생활을 하던 강원도 화천에서 우연히 바라봤던 하늘은, 말 그대로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수천 년 전 시인들도 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이야기들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만들어냈던 다양한 신화적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정리라고 해서 학술적인 느낌은 아니고, 그냥 이야기책처럼 48개 고전전적인 별자리 이름에 얽힌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을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분류해 놓은 것이다.(이야기 속 연대 순을 따른 건 아니다)


책 곳곳에 적지 않은 수의 삽화들과 별자리만을 따로 떼어서 그려놓은 부분 등 친절하게 관련 내용을 익힐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별자리라는 별들을 늘어놓아도, 이게 왜 사자인지, 이게 왜 쌍둥이인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 놓으면 조금은 다르게 볼 여지가 생긴달까.


내용상 자연스럽게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 주된 설명의 레퍼런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참 읽다 보면 이게 별자리 책인지 그리스 신화 책인지 살짝 헷갈릴 정도. 내용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름 잘 짜인 별자리 이야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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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10주년 확대개정판
쉐인 클레어본 지음,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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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일명 바이블 벨트 지역에서 태어난 작가는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학에 지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상한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신앙이 아니라 더 낮은 자리에서 빛나는 신앙을 배운다.


대학 시절 가난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운 작가의 삶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선교회에서 몇 달 간 머물며 사역에 참여한 경험이었다. 캘커타에서의 사역은 몇 개월 후 끝났지만, 이 경험은 이후 귀국해서 “심플웨이”라는 공동체 사역을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심플웨이는 성경의 명령에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닌 그들과 “한 패”가 되기로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증오와 상대의 부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용어로 자신들이 하는 일을 표현하기로 노력하는 애쓴다. 이 책은 그런 심플웨이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일지다.





쉽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을 넘겨갈수록 보통을 넘어서는 묵직함이 전해져 오는 책이다. 십수 년 전 읽었던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이라는 책을 떠올리게도 하고. 실제로 이 책에도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보통은 “급진적”이라는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용어로 번역되는 단어지만, 사실 “래디컬”은 “근원적”이라는 의미(식물의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일각에서 자주 주장되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래디컬한 사람들이 되자는 말과 같다. 2천 년 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안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면서, 가끔 행해지는 안전한 기부 정도로 만족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급진적이라고 하기에 앞서,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의미에서의 급진적인 도전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는, 무엇보다 외치고 있는 그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기에 더욱 힘이 실린다. 신학자들의 서재에서 나오는 깊은 통찰과는 조금 결이 다른, 날것이지만 역동적인 통찰이 읽는 내내 가슴을 뛰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설교하셨던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설교에 갈채를 보내고 그 설교를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에 누가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작가와 그 동료들의 이런 급진적인 실천과 순종이 (역사적으로 많은 급진적 운동이 그러했듯) 영적 엘리트주의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본인들이 아니라도, 그 주변에 있는 이들에 의해 숭배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삶만이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순종적 삶의 길이라는 식으로 강요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그런 종류의 전체주의는 수많은 새들이 깃든 큰 나무라는, 기독교가 가진 오래된 비전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가 급진적 순종을 누그러뜨리는 완충재가 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다른 여러 분야에서 그러하듯, 우리에게는 절묘한 균형과 임기응변적 적응능력이 필요하다. C. S. 루이스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조언하듯, 신앙의 삶이란 즉흥댄스와 비슷한 면이 있는 법이니까.


기독교 신앙이 지루하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반론이 담긴 책. 우리의 신앙은 원래 이런 역동성이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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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시점으로 보는 영화감상법 - 매불쇼 영화 콤비 두 남자의 진검승부
전찬일.라이너 지음 / oldstairs(올드스테어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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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의 주력 콘텐츠는 책 리뷰지만, 은근 영화 리뷰 수도 꽤 많다. 이 리뷰를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책 리뷰가 1,400개 정도인데, 영화 리뷰는 또 980개 정도가 된다. 한창 일 자리를 구하지 못했을 때에는 한 해에만 100편이 조금 넘는 수의 영화를 봤으니, 영화 역시 책읽기와 마찬가지로 내 중요한 취미 중 하나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엔 본 영화 수가 급격히 줄었으니... 한 해에 열 편이나 간신히 보고 있으려나. 나름 새해 계획 중 하나는 영화를 좀 더 자주 보며 즐기자는 것이었는데, 두 달이 벌써 지난 지금 보면 썩 좋은 스타트는 아닌 것 같다.


도서관에 간 김에 집어 온 이 책은, 순수하게 취미를 위해 골라 본 가벼운 책이었다. 유튜브를 통해서 얼굴을 알리고 있는 두 명의 영화 평론가가 영화와 평론에 관해 자유롭게 대화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는 두 사람의 나이 차가 20년을 훌쩍 넘는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서로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에서는 확실히 대립하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서로를 존중하고 있다는 게 확 와 닿는다는 점.





두 사람은 모두 영화 평론가란, 영화를 좀 더 꼼꼼하고 자세하게 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어떤 것을 좋아해서 자주 접하고, 자세히 즐기다 보면 자연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갖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심미안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종종 평론가들과 일반 대중 사이의 견해가 뚜렷하게 갈리는 지점이 있긴 한데, 그건 평론가가 더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더 자세히 보기 때문이다. 대중은 평론가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자신의 입장과 감상을 가지면 되는 것 뿐.


또, 평론가들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기준을 갖고 같은 수준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의견이 극렬하게 대립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신파”라는 주제가 그 중 하나인데, 작품의 전반적인 수준을 여러 층위에서 보면서 그 중 하나에서라도 볼 만한 것이 있으면 인정해 주는 전찬일 평론가는 신파도 비슷한 견지에서 너그럽게 보는 반면, 라이너는 이 부분에 대해 조금은 노이로제적 반감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전찬일 평론가의 입장이 좀 더 와 닿는데, 나 역시 영화를 만든 이들의 고생을 생각해서 딱 중간보다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시작한다.


책에는 영화를 볼 때 주목해 볼 만한 다양한 요소들에 관해 자세하게 나누는 부분이 등장한다. 가장 많이 보이는 연기만이 아니라, 음악과 음향(은근 음향 쪽은 신경을 많이 안 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어떤 말이나 소리가 아니라 영상에 담기는 그 자체로서의 예술적 요소를 가리키는 미장센까지. 이런 부분들을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좋아하는 영화를 좀 더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라고 여기면 좋을 듯. 물론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그냥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관점도 가능하다.





어떤 걸 좋아하다보면 자연히 거기에 속한 다양한 작품, 혹은 제품들에 관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물론 그런 평가를 내리면서 자신과 같은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식이 되면 곤란해지겠지만, 여기 나온 것 같은 종류의 대화라면 얼마든지 즐겁게 끼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싸우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전찬일 평론가 쪽에서 대체로 너그럽게 받아주는 느낌이라 여유가 있는 대화가 된 느낌이다.


영화 전문가까지는 아니고,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아마추어들이 좀 더 자세하게 영화를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올해는 확실히 영화를 좀 더 봐야겠다. 꼭 최신영화가 아니더라도 묵혀두었던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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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0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B급 감성이라 그런지 영화 평론가가들이 좋아하지 않는 B급 영화가 더 재미있더군요^^

노란가방 2025-03-02 16:59   좋아요 0 | URL
그것도 평론가들마다 다 다른 것 같더라고요. 카스피님도 이 책 한 번 읽어보시면 좋아하실 수도..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브라이언 채플 지음, 안정임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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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이름을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아마도 신학대학원 시절 설교학 강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와 함께 설교학의 대가 중 하나로 배웠던 것 같다. 사실 그 시절에는 배워야 할 것이 워낙에 많았기에 하나하나에 집중해 가며 읽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물론 내 관심을 끄는 책들은 도서관에서 잔뜩 읽긴 했지만...)


사실 설교학은 실천신학 분야 가운데서도 가장 실천적인 학문이다. 설교는 모든 목회자들의 어깨에 지어진 고달프면서도 영광스러운 짐이니까. 특히나 한국교회의 특성상 담임목사의 경우 매주 적지 않은 수의 설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설교문을 탁월한 수준으로 준비하고 설교하는 건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워진다.


때문에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는지는 목회자로 훈련받을 때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게 어디 고작 한 학기의 과정으로 충분히 갖춰질 리가 없으니, 결국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도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의 영상이나 글을 보며 따라하는 식으로 스타일을 만들어 가곤 한다. 그러나 좋은 설교문은 유튜브 영상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 설교의 스타일을 배울 수는 있어도, 내용을 배우기에 동영상은 사실 쉬운 매체가 아니다.


결국 쉴 새 없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틀이라고 해서 모든 본문을 같은 형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건 본문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포인트에 집중할 것인가, 그리고 그 내용을 어떤 식으로 회중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이 없다면, 그때그때 설교자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본문을 읽고 적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채플은 이른바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틀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은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그 틀을 따라 하는 열두 편의 설교문을 실제로 실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것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물론 단순히 설교문을 옮겨 놓기만 한 것은 아니고, 각 문단들이 전체 원고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왜 그런 내용이 그 자리에 위치하는지 등을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고, 이론적인 부분 역시 간략하게나마 각주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건, 내가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틀로 성경 전체를 바라보고 풀어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실제로 유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런 식의 접근이 모든 본문을 설명해 내지 못하거나, 종종 견강부회 식의 적용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건, 결코 모든 본문에서(이를 테면 구약의 어떤 임의의 본문에서도) 바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방식의 해석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책에 실린 일부 설교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등장하거나 그분의 교훈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과 역사의 중심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죄성(여기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드러난다)과 이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 은혜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리고 새로운 거룩한 삶(이건 그리스도와 연합을 할 때 가능하다)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분명한 ‘틀’ 안에서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이 매번 비슷한 느낌의 설교만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설교가 각각 다양한 방식과 유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려보다 훨씬 흥미롭고, 또,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순서가 좀 뒤집어 진 것 같긴 하지만, 이 책의 이론서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책이 아닌가 싶다. 설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꼭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성경에 대한 건전하면서 안정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독자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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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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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3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다. 다행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국회의 빠른 대처로 금세 무산되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사법 절차의 진행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동시에 폭동까지도 조장하면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또, 심지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당은 자신들도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내란을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대통령 탄핵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패악질을 부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이 책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쥐고 흔드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그런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사실 어느 집단이든 극단적인 무리는 더 눈에 띄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과대 대표되기 마련이니까.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가끔 남미나 아시아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적인 원칙을 깨드린 예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실 민주주의가 시행되던 초기에는 참고할 만한 예도 부족했고, 그래서 정권교체라는 것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굉장히 겁을 냈던 것 같다. 정권을 이대로 넘겨주면 자기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당한 선거의 결과마저 부정하고자 하는 내적 요인이 되었다.


이런 두려움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르는 체 하고 있지만 내심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예컨대 20세기 초 프랑스의 보수정당이었던 “공화연맹당”은 점차 극우 단체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공식적인 정당의 구성원과 폭력적인 활동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나중에는 청년애국당이라는 극우 폭력집단을 당의 “돌격대”로 지칭하더니, 1934년 2월 6일 발생한 폭동을 일으킨 범죄자들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이건 남 일 같지가 않다.






책의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애초에 미합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었고,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덕분에 민주적인 절차나 제도보다는 합중국에서 이탈하려는 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제도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렸고, 저자들은 그것들을 가리켜 “미국은 언제나 반(反)다수결주의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책의 제목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反)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소수의 종신 대법관 제도(의회의 다수가 통과시킨 법안을 소수의 지명직 판사들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가 있고, 비슷한 제도를 가진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강력한 권한을 지닌 상원의 존재(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 모두에서 다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구수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각 주별로 2명씩 배당된 상원의원 제도,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입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 작은 주에 특혜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더 적은 득표를 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선거인단 제도, 상하원 모두의 2/3가 찬성하고 전체 주의 3/4가 비준해야 가능한 어려운 헌법 개정 요건 등이 포함된다.


책 후반에는 이런 미국의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이 등장하지만, 문제는 이런 개혁도 헌법 개정사항들인지라, 앞서 말한 개헌의 높은 문턱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는 동안 미국에서는 힐러리 보다 적은 수의 표를 얻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리고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도) 명백히 후퇴했다. 책 말미에 저자들은 “미국인들은 지난 7년 동안 탈진 상태에 빠졌다”고 적으며 한숨을 돌리지만, 이제 또 다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깡패 짓을 시작한 지금, 저자들은 뭐라고 할까.



제목이 확 땡겨서 폈지만, 어떤 민주주의 일반의 후퇴와 해법을 제시해 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미국의 정치 상황에 국한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살짝 실망스럽다. 그래도 역사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곤 하는지라, 책 초반에 실려 있던 다양한 반 민주주의적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그리고 슬프게도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망해 보는데 도움이 되려나(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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