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중독 - 혈당을 낮추고 비만, 노화, 만성 질환에서 해방되는 3주 혁명
대릴 지오프리 지음, 이문영 옮김 / 부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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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나이다 보니 건강에 관한 책도 슬슬 손에 들게 된다. 산뜻한 하늘색 표지에 하얀 설탕이 한 움큼 배치되어 있고, 그 위에 하얀색으로 “설탕 중독”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한 때 엄청난 부를 쌓아주었던 무역품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반대로 온갖 종류의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흉으로 꼽히는 설탕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설탕 자체보다는 설탕이 일으키는 문제를 지목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른바 “탈 설탕”의 생활리듬을 회복할 수 있을 지에 관해 조언하는 건강 정보를 담은 책이다. 설탕이 여기저기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고, 저자는 어떻게든 설탕 섭취를 줄이는 것이 우리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우선은 직접 설탕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더라도 사실상 설탕과 마찬가지인 다양한 당류를 제대로 분별해서 섭취를 피하고, 우리 몸에 유익한 식품으로 서서히 식탁을 교체해 나가라는 내용이다. 중요한 건 우리 몸이 당이 아니라 지방을 연소해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한다.


책 후반에는 여기에 간헐적 단식 또한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건 단지 체중 감량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몸이 저장되었던 지방을 연소하는 몸으로 전환시키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





이런 책을 보면 일단 당분간은 또 정신을 좀 차릴 것 같긴 하다. 진작부터 설탕이나 과당이 들어간 건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요새 유행인 제로 음료 같은 것들은 자주 사먹긴 했는데, 책에선 이것까지 멀리하라니 뭐..


물론 문제는 과연 책에서 권장하고 있는 식으로 매일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이지 않을까. 온종일 집에만 있는 사람이라도 일일이 영양을 계산하고 종류별로 다양한 식사를 준비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또 책에는 식사를 하는 시간에 주기적으로 변화까지 줘보라고 말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지키기 불가능한 조언.


그리고 여기에 예시로 제시되는 식사의 형태가 완전히 서양식이라는 점도 어려움이지 않을까 싶다. 샐러드와 견과류, 적당한 지방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우리 식탁에서는 자주 보이는 것들이 아니기도 하고, 식재료들 역시 마찬가지로 여느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또 다른 의문은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들이 정말로 의학적으로 다 정확한 것일까 하는 부분이다. 물론 저자를 완전히 불신하는 건 아닌데, 비슷한 종류의 조언들 사이에 종종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혈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책에서 권장하는 과일로 수박을 꼽기도 하는데, 다른 곳에선 경계하는 과일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뭐 여기 나오는 걸 완전히 그대로 따라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섭취하고 있는 과도한 당류를 줄이고,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하는 노력만 하더라도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 아주 무시할 내용은 아니다. 그래, 설탕으로부터 좀 더 멀어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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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열애
진 에드워즈 지음, 최요한 옮김 / 죠이선교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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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진 에드워드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교내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년 선배가 “세 왕 이야기”라는 책을 빌려주었다.(그 선배 잘 지내시나) 사울과 다윗, 그리고 압살롬이라는 세 인물의 관계를 특별히 내면에 집중해서 풀어내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바로 그 진 에드워드가 쓴 또 하나의 유명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서로 독립적인 사람들로부터 두 번이나 추천을 받았던 책이라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구름책방과 협업관계인 죠이북스에서 나온 책이었다.





책은 제목처럼,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을 묘사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의 전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묘사를 신학적 서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작가는 문학적 상상력을 말 그대로 폭발시킨다.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내는 상상력이 꽤나 파격적이다. 흔히 신학적 용어 안에서 “안전하게” 묘사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마치 남녀 사이에서 주고받을 법한 짙은 밀어 같은 느낌이다. 마치 중세의 유명한 신비주의자였던 아빌라의 테레사가 했을 법한 고백 같은 느낌이랄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상상력이 “신학적 구토반사”를 일으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검사를 위해 내시경 기구가 식도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는 걸 그대로 느껴야 했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닌지라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반사작용이라는 게 그런 거다. 특히나 나처럼 신학에 절여져(?) 있는 사람들은.


하지만 이걸 문학으로 본다면, 그리고 그 문학 속에서 발견되는 신학적 설명이 우리가 익히 배워온 그것과 조금 다르지만 또 아주 멀지는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금은 진정(?)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 전체에 걸친 강렬한 사랑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아가서에서 볼 수 있는 노골적인 성애적 묘사를 넘어서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면 성경 속 묘사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식으로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한계를 깨뜨려주는 작업이 종종 있지 않다면, 우리의 상상 속 하나님은 점점 쪼그라들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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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원에서 미래의 전쟁까지, 한 권으로 읽는 전쟁의 세계사
제러미 블랙 지음, 유나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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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퍽 거창하다. 그리고 읽다보면 제목만이 아니라 정말로 제목에 쓰인 내용을 담으려고 책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은 연대순을 따라 인류가 경험한 주요 전쟁들, 혹은 재구성된 전쟁의 상황들을 열거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전의, 자연(혹은 짐승들)과의 투쟁까지도 언뜻 언급이 된다. 말 그대로 인류가 싸워온 역사를 그대로 다루고자 한 것.


당연히 이 방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그것도 보통의 벽돌책과는 다른 정도의 양에 담아내는 건 쉽지 않다. 때문에 서른아홉 개의 작은 장들에 간단히 소개하는 식으로 책은 구성된다.





이렇게 요약적으로 훑어보는 의미는 어떤 게 있을까? 언뜻 드는 생각은 이런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까지 엮어야 했을까였다. 당장 위키백과 검색만 하더라도 이 정도의 간략한 요약보다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을 찾을 수 있는 시대니 말이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구성 자체가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일 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이런 식의 서술에서는 서양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서양의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의 아시아 정도를 서술하는데 그치는데, 이 책에서는 중국과 인도에서 활짝 폈던 영광스러운 문명의 이야기들도 등장하고,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도 소개된다. 하지만 역시 그 분량에 있어서는 서양 쪽이 월등히 많은 건 어쩔 수 없는데, 이건 아메리카 쪽의 역사까지 서양으로 구분할 경우 더 강화된다.


또 하나, 통상 이런 책들은 역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하면서도 그 중에 어떤 주제를 잡아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책의 경우 그런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무기의 역사라든지, 전투 방식의 역사, 혹은 전투의 목적 같은 부분에 집중할 만도 했는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책을 읽는 내내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좀 더 깊은 내용을 원한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책은 아닐 듯하다. 하지만 교양 수준으로, 전쟁사라는 부분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데는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일단은 서술에서 특별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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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생을 믿는다 -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마지막 저서
위르겐 몰트만 지음, 이신건 옮김 / 신앙과지성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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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신학자 몰트만의 마지막 책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먼저 들어왔던 책. 지난 201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노령의 신학자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물론 그가 이전에 부활이라든지, 영생 같은 주제들에 대해 사유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평생을 함께 해 온 배우자의 죽음이란 조금은 다르게 와 닿지 않았을까.


때문에 책 초반의 논지는 죽음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안에 죽은 이들이 두 번째 존재해 있다면 남은 이들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본인 자신을 향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은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이 유지되는 기간을 늘리는 것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동성으로 가득한 강렬한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이미 시작되었다. 그분은 정말로 죽음을 멸하셨다! 이제 그분을 믿는 이들 또한 그분이 시작한 부활의 행렬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저자는 이 부활의 시작 시점에 관한 독특한 의견을 제시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부활한다는 것. 정확한 문장은 "우리는 우리의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부활한다"이다. 이는 통상 죽음 이후 일정한 기간이 흐른 후 혼 세상의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부활한다는 기독교 내 인식과 차이가 있다. 몰트만은 어떤 유예기간이 없이 죽음과 동시에 부활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물론 이런 주장이 몰트만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이런 식으로 인식할 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저자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누가복음 20장 38절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영원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죽지 않았다.





논문이라기보다는 신학 에세이적 성격이 강한 글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며 다양한 성경구절로부터 지지를 구한다. 물론 이 주제와 관련해서 저자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의 부활과 영생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도 또한 읽을 수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인정한 사형수에게 "오늘" 네가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런 부활신앙은 단지 우리의 미래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었고, 또 온 우주적 완성을 기다리는 일이긴 하지만, 또한 미래로부터 오늘 우리에게로 침투해 들어오는 무엇이다. 내가 좋아하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미 우리의 오늘 또한 주님에게 속해 있다는 말이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끝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는 이사야와 바울을 아름답게 조화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빛의 자녀들"이며, 따라서 우리가 완전히 빛 속에 서 있을 때까지 창조 세계에서 어둠을 마침내 몰아내는 빛의 도래를 희망 속에서 증언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 어둠 속에서 부활과 영생의 빛을 증언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어쩌면 오늘날의 교회가 보이는 윤리적 실패는 이런 영생에 대한 믿음 없음의 결과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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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말 2 - 6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6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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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삶을 재구성한 역사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여섯 번째 시리즈인 ‘시월의 말’ 두 번째 이야기다. 이번 편에서 마침내 카이사르의 암살이 벌어진다. 폼페이우스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독재관이 되어 로마의 일인자로 활동하던 카이사르는 점차 피곤함을 표현하는 장면을 자주 보인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최고 권력자의 삶이란 의외로 피로를 요하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는 카이사르의 공식적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을 꽤 공을 들여 묘사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그야말로 깜짝 등장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콜린 매컬로는 그가 일찌감치 카이사르 옆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물론 아직은 그저 수습군관 정도였지만), 카이사르가 그를 총애했다고 설명한다. 확실히 좀 더 주목을 받게 하려는 장치.


여기에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에 관한 악평도 계속 이어진다. 그는 자신이 진 엄청난 빚을 해결하기 위해 독자적인 카이사르 암살을 시도하러 관저의 담을 넘으려 하기도 했고(그가 죽으면 자신이 상속자가 될 거라고 착각),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등의 암살 일당들과도 사전에 분명한 교감이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냥 말 그대로 멍청하고 감각도 없는 인물로 그려질 뿐.


암살과 관련해서 카이사르가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 “브루투스 너 마저”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 표현은 훗날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한 표현이고, 고대에 관련 자료는 따로 없었다고 한다. 대신 작가는 그의 죽음을 아주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식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꽤나 리얼하게 신체의 이곳저곳(특히 얼굴, 눈 부위)이 흉기에 찔려 손상되는 장면도 보이니 조심.





그리고 역시 3.15 사건(카이사르 암살)을 이야기하자면 암살의 주모자들의 동기가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연구자들의 대략적인 합의는, 그들 사이에 무슨 대단한 공화정에 관한 이상 추구와 합의가 있었다기보다는 개인적인 욕망이 얼기설기 엮여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식이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대부분은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의 의사에 의해 집정관을 비롯한 고위 정무관들이 정해지는 상황을 불쾌해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카이사르의 눈 밖에 난 인물들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명예로운 관직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을 우려해 일을 저질렀다는 식이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상속받은 돈으로 막대한 빚을 해결하려는 꿍꿍이가 있었다.


역시나 가장 주목해 볼 만한 인물은 마르쿠스 브루투스인데, 흔히 몽상가 정도로 그래도 나름 공화정에 대한 대의에 집중했던 몇 안 되는 인물로 묘사되던 그를, 작가는 탐욕스럽고 줏대 없는 인물로 평가절하해 버린다. 사실 이 빌드업을 위해 몇 권을 할애해 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읽다 보면 퍽 한숨이 나오는 인물. 앞서 반쯤 미치광이처럼 묘사된 카토의 딸과 결혼까지 하면서 이번에는 자기 부인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뭐 하나 제대로 준비한 것 없이, 카이사르를 죽이면 단번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던 음모자들이 초래한 위기는 곧 또 다른 충돌과 혼란으로 로마를 몰아넣는다. 물론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부당한 권력구조를 유지시켜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타당하지만, 카이사르의 정치가 제1계급의 최고위층 이외의 다른 계층에게는 퍽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소위 “해방자들”의 살인은 역사상 수없이 등장했던 기득권층의 반동적 만행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넘어서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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