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오염된 신앙의 언어
권연경 외 지음 / 야다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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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교회의 극우정치세력화를 비판하는 책 분야의 대표주자(?)라고 할 만한 야다북스에서 또 다른 책이 한 권 나왔다. 전에 관계자분을 만나서 잠깐 대화를 하기도 했는데,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게 되는 출판사랄까.


이번 책은 ‘단어’에 집중한다. 총 여섯 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각 신앙과 윤리, 예언과 선동, 정교분리, 자유와 평등, 국민저항권, 극우 기독교와 근본주의 같은 단어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교계를 아울러 분석한다.


대체로 어느 정도 내용이 예측이 되는 장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들어온 두 개의 주제가 있다. 최종원 교수가 정교분리의 역사적 맥락을 정리하는 3장과 김동춘 교수가 극우 기독교의 신학적 배경을 분석하는 6장이이다.





최종원 교수는 미국 헌법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정교분리’가 실은 국교의 부인에 가까웠으며, 이는 종교의 자유를 보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 조항은 국가에 종교에 개입하지 말고, 나아가 종교(단체)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해야만 한다는 책임을 지운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심지어 극우 기독교의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동일한 기준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한국 교회가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주장이지만, 이제까지 야다북스에서 나온 책들의 논조와는 살짝 다른 결처럼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이 부분은 최근 읽었던 오스 기니스의 책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에서 좀 더 깊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책의 결론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진실이 언제나 우리의 구미에 완전히 맞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당파성에 매몰된 극단적인 무리로 분류될 수밖에.





6장에서도 꽤 흥미로운 분석이 등장한다. 우리는 보통 극우 기독교가 대체로 신학적인 근본주의자들인 것처럼 인식해 왔다. 보수적 신학이 보수적 정치관을 낳고, 그들은 쉽게 극우로 넘어간다는 간단한 그림이다. 하지만 김동춘 교수는 이런 그림이 얼마나 단순하고 왜곡된 그림인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우선 이미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유주의화는 상당부분 진행되었으며, 개인의 자융적인 선택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대신 교리적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극우 기독교가 확산이 근본주의적 신앙의 증거와 매칭되지 않고 있다는 것. 저자는 근본주의적 신학보다는, 기득권 세력과 결탁해 정치권력 획득을 추구하고 있는 ‘세속주의 기독교’가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본다. 흥미로운 분석이다.


저자는 이런 세속주의적 경향이 보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진보 자유주의에서도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주로 진보적 신학을 갖고 있는 비판자들은 모든 문제를 근본주의 신학과 묶어 폐기하면 될 것처럼 주장한다. 번짓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고, 당연히 그런 비판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챕터 후반부에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붙들고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거나, 최소한 기독교가 정치적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 부분은 앞서 3장에서 논의했던 종교의 자유 영역과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이 역시 앞서 언급했던 오스 기니스의 책에서 어느 정도 논의된다.





이번 책은 피상적인 비판을 넘어, 문제 안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느낌을 준다. 보통의 예상과 달리 실제는 경계선이 울퉁불퉁하고, 종종 여러 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어서 복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낙인찍기나 정체성 정치 같은 도구들이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갈등을 악화시키는 이유다. 소위 부수적인 피해들이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


사안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제나 가장 단순한 답을 붙잡기 마련이다. 내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문제이고, 그들의 입을 막고 제거(혹은 공론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신앙언어의 오남용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어떤 해결책이든 그리 효과가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은 확장된 듯한 이번 책의 일부 내용들이 조금 더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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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들이 로마를 바꾸어 갈 때 - 로마 세계의 그리스도교화에 관하여 비아 제안들 시리즈
피터 브라운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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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화된 4세기와 5세기 제국 내 기독교의 위치와 영향력에 관한 짧은 세 개의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하지만 저자가 이 분야의 걸출한 학자이다 보니, 그 간략한 글들에도 뛰어난 통찰들이 잔뜩 담겨 있다. 그리고 그 통찰은 이 시기 기독교에 관한 대중적 인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는 게 흥미롭다.



1부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갑작스러운 개종으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는 황제가 그렇게 기독교인이 되면서, 제국 역시 단번에(최소한 매우 빠른 시기에) 기독교화 되었다고 추정한다. 황제가 그렇게 되었다는데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기독교로 갈아타는 게 좋지 않겠는가.


저자는 4-5세기의 다양한 ‘보통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이런 통설이 실제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심을 던져준다. 4세기 브리타니아(잉글랜드)에 살던 한 사람이 자신의 돈을 도둑맞은 후, 한 여신과 관련된 우물에 가서 저주를 새긴 판을 세워두었다. 그 판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자신의 돈을 훔친 사람이 ‘이교도든 그리스도인이든” 저주를 받게 해 달라는 문구를 삽입한다. 그는 최소한 그 여신이 그리스도인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신앙이란 (신앙과 거리가 먼) 학자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손바닥 뒤집듯 같단히 바꿀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위에서 누군가 강요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심층까지 바뀌는 일은 쉽지 않다. 그건 하나의 세계관이고, 우주를 이해하는 틀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좀 더 많은 (그리고 일반적인) 자료들을 취합하면, 이 시기는 기독교적인 것들과 이교적인 것들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 





2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관용이다. 많은 수의 학자들과 작가들이 기독교는 배타적이었지만, 고대 다신교는 관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는 관용적이지 않았다.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은 개성을 발휘하기 보다는 공동체의 법과 관습을 준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시오노 나나미 같은 작가들이 주구장창 물고 빠는 로마의 관용은 실은 그저 ‘적당한 무관심에 입각한 통치’였을 뿐이다.(64)


후기 로마 제국 시기에도 이런 ‘적당한 무관심’이라는 통치 기조는 계속 이어졌다. 비록 여러 문헌들에 다른 종교와 신앙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어쩌면 그 빈도야 말로, 이런 탄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일 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기에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행정력이 떨어졌던 당시 제국의 통치는 지역민들, 특히 지역의 상류층들의 광범위한 협조가 필요했는데, 그건 강압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79) 대다수 지역에서 제국의 행정은 세금을 거두는 데 집중되어 있었지, 종교문제를 강요하는데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것.(82)


3장은 ‘성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서 말하는 ‘성자’는 가톨릭을 비롯한 몇몇 기독교 교파에서 말하는 ‘성인’과는 다른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지역의 유명한 그리스도인들, 대개는 수도사들이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경건한 농부가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 저자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지금 여기에 계시는 분으로 실감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다.(109)


이런 인물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여전히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일반인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음을 보여준다고 보는 게 맞다. 다만 그런 ‘성자들’의 신학적 견해는 전문가들(신학자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134)는 걸 보면, 이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요약하면 책의 내용은 이렇다. 4~5세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우위는 아직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들은 강압적으로 기독교를 믿도록 하지 않았고(아니, 그럴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저술가들과(주로 문헌 작성을 통해) 비공식적인 성자들(주로 일반인들과의 접촉과 감화를 통해)이 나서야만 했다. 그럼에도 곳곳에 여전히 이교적 영향력은 남아있었고, 전체적으로 보면 기독교와 이교가 중첩되어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이는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독단적이고, 배타적이어서 박해를 통해 강제로 이교도들을 개종시켰다는)이 (비록 그게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해도)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애초에 관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세계에는 희미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갖지 않았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태도이다.


또 한 편으로 기독교인들이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식은, 단순히 황제가 명령을 내리는 식이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물론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수많은 (이름이 알려지거나 그렇지 못한) 이들의 오랜 “설득”과 감화가 필요했다. 따지고 보면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분량도 많지 않으면서도 지적으로 흥미로운 자극을 주었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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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코인 THE COIN - 스테이블코인이 이끄는 화폐 대격변의 시대
성상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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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떡하니 The라는 단어를 넣은 건 자신감을 반영한 걸까? 부침은 있으나 코인 열풍이 가시지 않고 있다. 십 수 년 전 비트코인이라는 게 처음 등장했을 때, 이걸 어디에다 쓰나 싶었던 사람들 누구도 이제 그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현대 1비트코인의 가격은 9730만 원 정도다. 엄청나다.


물론 어떤 현물 자산이나 가치 표시가 된 화폐와도 연동되지 않은, 순수한 데이터일 뿐인 비트코인에 그렇게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게 정당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책 말미에 저자는 비트코인 채굴에 소요되는 에너지 등의 비용(8만~10만 달러)을 고려해 하한선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 비용으로 무슨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지워지진 않는다.





이 책의 전반부는 스테이블코인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은 둘 다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한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개념은 전혀 다르다. 비트코인이 채굴이라는 방식으로 복잡한 수식을 푸는 대가로 얻어진다면, 스테이블코인이란 발행액과 동일한(혹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가치의 담보를 잡고 발행되는 일종의 담보부증권과 비슷한 느낌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은 블록체인 기술 기반으로 운용된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은행 거래는 은행영업시간의 제한과 중앙집권적 시스템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해외 거래의 경우 며칠 씩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휴대폰만 있으면 누구나 거의 즉시 거래를 할 수 있다. 거래 속도의 비약적인 향상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더 빠르고 편리해진 송금 서비스 정도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담보에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운용사는 발행한 코인의 금액 이상의 담보물을 보유해야 한다. 이 때 당연히 안정적이면서 빠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담보로 잡아야 하는데, 담보로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이 미국 달러나 미국 국채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미국 정부가 왜 스테이블코인을 키우려고 하는지로 연결된다.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는 미국은 끊임없이 국채를 발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 국채를 사줄 사람(국가/기업 등)이 무한정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의 발행량이 늘어날수록 정확히 그 금액만큼의(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국채가 팔리게 되는 셈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재정운용에 숨통이 트이게 되는 셈이다.


그뿐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통화의 이동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명목 GDP도 높아진다. 이는 상대적으로 부채의 실질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빚이 녹아버리는 것이다. 여러 모로 미국 정부로서는 부채질을 할 만한 도구다.


물론 우려스러운 면도 있다. 전통적인 재정 운용에서는 중앙은행과 재무부 등의 공식적인 기관을 통해서 어느 정도 통화에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완전히 민간에 주도권이 있다. 경제제재 같은 것을 우회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도 하는 것 같은데, 블록체인이라는 기술 자체의 특성상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게 결국 어떤 쪽으로 흘러갈 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라는 것.





사실 책은 칼럼형식으로 짧게 쓰인 글들을 여러 개 모아놓은 형태라서 하나씩 읽어나가기에 부담이 없다. 다만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단점. 스테이블코인이 뭔지 전혀 몰랐던 차에 그 개념과 기능을 조금은 알게 해 주었으니 나름 유익한 독서였다. 그 자체가 일종의 투자/혹은 투기인 비트코인과 달리,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의 편의성 쪽에 방점이 찍힌다.


그런데 그저 새로운 결제 수단처럼 보이는 스테이블코인이 국가 단위의 재정운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니,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게 많다. 다만 책 후반으로 갈수록 애초의 주제에서 벗어나 경제 전반, 투자 같은 주제로 퍼져서 조금은 느슨해진다는 느낌도 준다. 뭐 그래도 교양으로 알아둘 만한 것이고, 스테이블코인에 관한 확장적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투자나 경제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교양삼아 한 번 읽어 볼만한 책. 중요한 개념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언젠간 도움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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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살아있는 설교
임도균 지음 / 아가페출판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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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본 가장 인상적인 내러티브 설교는 필리핀에서였다. 반 년 정도 머물렀던 기간 동안 몇 번 참석했던 현지 교회 예배였는데,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이브 예배 시간에, 나이도 지긋한 해당 교회 담임목사님이 겨울에나 입을 것 같은 숄을 걸치고 등장하면서 설교가 시작되었다.


“나는 동방에서 온 박사입니다”로 시작했던 그 설교는 (영어로 진행되었던 탓에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뒤로도 종종 생각나곤 한다. 휙휙하는 바람소리도 (입으로) 내고,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물씬 안겨주었다.(주보에 설교의 요지를 미리 실어주는 교회여서, 영어가 좀 안 들려도, 혹은 설교 스타일 때문에 내용이 잘 안 들어와도 따라갈 수 있게 해두었다)





이 책은 내러티브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책이다. 굳이 말하면 설교방법론, 실천신학 쪽이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하면 흔히 떠오르는 주제식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반해, 그게 그 것 같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어떤 본문을 가져와도 설교자의 스타일로 재가공되어 나오는, 레토르트식품 같은 느낌이 있다.


반면 내러티브 설교는 본문의 생생함을 전달하는 데 강점을 가지고 있다. 듣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주제식 설교가 조금 건조하고 딱딱한 강의 같다는 느낌을 준다면, 내러티브 설교는 청중의 흥미를 좀 더 자극한다. 사실 복음서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설교는 대개 이야기방식이기도 하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 중 하나다.


다만 내러티브 설교를 잘 못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남은 게 없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래서 내러티브 설교를 준비할 때 단순히 이야기 구연이 아니라, 철저한 설계와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의 후반부는 열 가지 단계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 과정을 연습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뭐든 차근차근 가르치려면 이런 식의 구분 동작이 필요하긴 한데,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 놓으면 살짝 부담스러운 감이 있긴 하다. 마치 수영의 구분동작을 하나씩 글로 적어놓은 느낌이랄까.(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내러티브 설교가 무엇인지, 그 필요성과 장점을 장황하게 쓰는 대신, 실제로 어떻게 하면 당장 준비해 볼 수 있는가에 집중하는 면이 좋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라면 차근차근 연습해 보면 분명 성과가 있을 것이다. 최소한 두 달 정도(대략 8회의 설교) 해 보면 감이 잡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내러티브 설교의 가장 어려운 점은, 실제로 그렇게 설교를 하는 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원고는 어찌어찌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제로 강단 위에서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뭔가 어색하고, 좀 간질거리고 그런 느낌이 들게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조금은 엄숙해 보이는 목사의 이미지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학창 시절 채플 시간에 내러티브 방식의 설교를 하셨던 설교학 교수님의 설교를 들을 때도 ‘이거다!’라는 느낌은 못 받았었다. 생각해 보면 초반에 언급했던 필리핀 목사님의 설교와 크게 다른 방식이 아니었는데도, 왠지 한국어로 그렇게 하는 건 어색하게 느껴진다. 물론 내러티브 설교라고 해서 하나같이 구연동화나 스킷 드라마처럼 하는 건 아니다. 설교의 진행 방식과 설명 방식의 문제인데, 그걸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또 회중과 교회의 분위기에 맞게) 잘 녹여내는 건 시행착오와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러티브 형식의 설교를 좋아한다. 가장 중요한 건 회중을 성경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고, 여기에 이 형식이 꽤나 좋은 효과를 가져오니 말이다. 물론 본문에 대한 성실한 연구와 평소 풍부한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쌓기, 그리고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훈련은 필수적이다.


책에 나오는 10가지 단계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게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고 귀찮을 수도 있지만,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 원리들을 자유롭게 녹여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한 번쯤 정독하며 연습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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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폴 챔벌레인 지음, 김희진 옮김 / 소망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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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통 변증론을 읽어본다. 기독교인, 무신론자, 진화론자, 인본주의자, 상대주의자라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날 기묘한 초청장을 받아 한 자리에 모인다.(이 콘셉트는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본 듯하다) 그런데 하필 모인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도덕과 윤리(정확히는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가)다.


몇 주간에 걸친 정기적인 만남 과정에서, 차근차근 각자의 주장들이 논파된다.(대화는 기독교인이자 아마도 논리학이나 윤리학 교수로 보이는 ‘테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도덕이 주관적일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지적되고, 그 도덕성은 단순한 합의나 사회적 계약, 또는 진화의 결과물로 세워질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테드는 도덕의 기초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한다. 당연히 감정적으로 반발하는 사람들 투성이였지만, 테드는 단순히 신앙을 가지라는 게 아닌, 이제까지 해 왔던 것과 같은 학문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으로서 유신론을 고려해 보라고 설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실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매우 건조(?)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윤리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눈을 떼지 못하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오히려 그런 ‘밀도’가 딱 내 취향에 맞았던 걸지도.


책을 읽는 내내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1부가 떠올랐다. 정확하게 동일한 작업을 70여 년 전 루이스는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BBC 라디오 방송으로 시도했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보면, 이 논의가 할 일 없는 이들의 시간 때우기 토론 정도가 아니라는 것, 죽음의 위협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어쩌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에 실려 있는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하다. 물론 책 속에 묘사되는 방식의 대화가 실제 생활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사실 여기 등장하는 다양한 관점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대개는 자신의 전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문제는 책에서처럼 “끝까지” 생각을 밀어붙이지 못하니 자신이 가진 생각의 한계도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변증의 효용에 대한 회의감이 드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변증이라는 건 오히려 일상 가운데서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대화를 통해서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알아둬야 한다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짝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함께 읽고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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