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 대화가 필요해 - 오랜 지구 창조론인가 진화적 창조론인가
휴 로스 외 지음, 케네스 키슬리 외 엮음, 김광남 옮김 / IVP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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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진술 중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이건 온 세상의 시작만이 아니라그 세상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원인과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성경의 가장 첫 머리에 언급되는 진술이기도 하면서가장 마지막 책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반복되는 진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세상의 기원에 관한 좀 더 자연주의적인 설명이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바로 진화다세상이 존재하게 된 과정에는 어떤 신적 개입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만 필요했다는 주장이다당연히 이 이론이 나왔던 초기부터 기독교인들은 대대적인 반발을 해왔고일부에서는 진화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과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정말 그게 사실일까창조와 진화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한 쌍일까좀 더 크게는 신앙과 과학은 함께 갈 수 없는 원수일까이 책은 바로 이 두 개의 질문에 관해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진 두 개의 단체의 주장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기획된 결과물이다. ‘진화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바이오로고스라는 단체와과학의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기독교 교리를 변증하고 비기독교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믿어야 할 이유가 이 토의에 참여한 단체들이다.



바이오로고스와 믿어야 할 이유는 모두 최소 45억 년 이상의 지구의 오랜 나이와그보다 더 오래된 우주에 관한 과학적 연구결과를 받아들인다이 점에서 이 두 단체는 소위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이들과는 다르다이쪽은 일명 젊은 지구론을 추종하면서지구의 오래된 나이를 말해주는 여러 과학적 증거들을 무시한다때문에 이 두 단체의 토론에는 현대 과학의 결과물들이 다양하게 인용되고꽤 많은 부분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두 단체는 분명 차이가 있는데좀 더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 바이오로고스는 과학적 발견들을 종합한 진화라는 결과물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으로 설명하는 데 반해, “믿어야 할 이유는 그 과학적 발견들을 하나님의 설계와 직접적인 창조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두 단체는 이 책에서 각자의 기조와 성경관에서부터 생물학물리학지질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오는 질문들그리고 호미니드의 정체와 인류의 공통 조상 문제인간의 독특성 등의 주제에 관해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 제시한다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 두 단체의 이야기를 교대로 읽다보면 자연히 관련된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은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게 된다.


이 책이 가지는 특별한 장점 중 하나는이 두 단체의 토론을 진행하는 사회자로서 미국 남침례교신학교의 교수들(미국의 주요 교단 중 꽤 보수적인 쪽에 속한다)이 참여했다는 점이다이들은 앞서의 두 단체의 긴 발표를 효과적으로 요약하면서긴 답변을 하는 과정에서 자칫 주제에서 벗어나거나 반박되지 않는 일방적 주장을 짚어준다또 각 단체의 답변을 듣고 미진한 부분에 추가적 질문을 더해주기도 한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기독교에서 창조라는 교리가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정작 그 안에 담긴 논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사고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특히 창조론=젊은 지구 창조론이라는 공식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어야 할 이유의 오랜 지구 창조론’ 혹은 진화적 창조론이라는 입장은 신선한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자신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합리적 확신과 함께상대 입장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존중을 잊지 않는 모습이라든지다양한 영역에서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모습 등은 반드시 좀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확실히 각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서(실제 대화에도 두 단체에 속한 여러 학자들이 참여했다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이 매우 잘 짜여있고질문의 수준은 물론 답변도 매우 알차서 읽는 보람이 있다.


우리의 신앙에 과학이라는 좋은 도구를 사용해 든든한 기초를 닦고자 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개인적으로는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좀 더 확실하게 점검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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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반 사우마의 서방견문록 - 쿠빌라이 칸의 특사, 중국인 최초로 유럽을 여행하다
모리스 로사비 지음, 권용철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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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와 13세기는 십자군의 시대였다. 1095년 시작된 첫 십자군의 발걸음은 13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이어졌다서아시아에서 수립된 강력한 이슬람 왕조들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 대한 위기감과 반발심그리고 종교적 열정으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유럽과 서아시아의 정치경제적 지형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13세기 말엽이 되면더 이상 성지’, 즉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의 이슬람 세력의 우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그리고 이 때문에 문제에 부딪힌 두 세력이 있었는데한 쪽은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명분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서쪽의 기독교 국가들이었고다른 한 쪽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동쪽의 몽골계 국가인 일 칸국이었다.


일찍이 칭기즈칸의 손자였던 훌라구는 당시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아바스 왕조를 정벌하고 그곳에 일 칸국을 세웠다하지만 13세기 후반이 되면 더 이상 서쪽으로의 확장이 실패하고 있었는데그 주요 원인이 이집트를 기반으로 했던 이슬람 왕조인 맘루크 왕조 때문이었다일 칸국의 군주들은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 손을 잡고 동서에서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고이 외교적 협상을 위해 특별한 인물을 특사로 파견한다바로 이 책의 제목인 랍반 사우마였다.



사우마는 일찌감치 칭기즈칸의 몽골족과 연합한 웅구트족 출신이었다웅그트족은 일찌감치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선교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고사우마는 그런 유력한 웅그트족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자녀가 세속적인 성공의 길을 걷기를 바랐던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사우마는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했고결국 수도사가 된다.


얼마 후 마르코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웅그트족 소년이 사우마의 수도생활에 합류하는데마르코스는 자신의 선배이자 스승인 사우마에게 서쪽에 있는 성지를 방문하자는 의사를 피력한다결국 그렇게 두 사람은 기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동방교회의 중심지인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몽골족이 지배하고 있는 일 칸국에 도착한 그들은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당시 메소포타미아의 동방교회는 몽골족 지배자들에게 배려를 받고 있었는데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과 그 인근이 온통 무슬림들이었기 때문이다일종의 견제세력으로 기독교인들과의 제휴를 선택했던 것.


이곳에 머무는 동안당시 동방교회의 총대주교가 세상을 떠났고사우마와 함께 온 마르코스가 새로운 총대주교 야발라하로 즉위한다그리고 일 칸국 통치자의 요청에 따라 사우마는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의 연합을 위한 사절로 파견이 된다로마에 도착해 추기경들과 만남을 갖고(마침 교황이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왕을 만나 맘루크 왕조에 대한 협공 제안을 하고돌아가는 길에 새로 선출된 교황과의 면담도 진행한다.



사우마의 여행기는 단순히 동서 세계(아시아와 유럽사이의 만남이라는 의의만 있는 건 아니다비슷한 사건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볼 수 있으니까물론 사우마의 이야기는 그 방향이 반대라는 점에서 독특한 면이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유럽의 기독교 세계와 아시아의 몽골세력이 연합에 관한 논의를 시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물론 결국에는 그 연합이 성공하지 못했지만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협력도 가능한 법이다물론 국제 정세에서는 자국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법이라서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긴 하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사우마의 유럽 방문은 의의가 있는데우선은 431년 열렸던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로 분열되었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과 정교회가 아직 완전히 분리되기 전이었다)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다뿐만 아니라서방의 교회와는 달리 독자적인 발전을 해 온 동방교회가 서방교회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는 면도 기억해 둘 만한 부분이다.


동방의 몽골계 유목민족 출신의 인물이 동방교회의 총대주교가 되고또 특사의 자격으로 교황과 서유럽의 왕들을 만나고일정 가운데 직접 성찬을 주관하면서 예배의 교류까지 이루었다는 점은 교회 차원에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가톨릭의 경우 지난 2013년에야 비유럽계 출신의 교황이 나올 정도로 유럽 중심의 권력구조를 유지해 왔었으니까.


특히 사우마와 교황의 만남에서 교회의 일치혹은 대화와 연합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시종일관 자신의 신학적교회 내 권위를 강조하며 상대를 가르치고 무릎 꿇리려고만 했던 당시 교황의 태도는 어지간히 권력에 취해있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좀 다른 모습일까.


사우마가 남긴 기록을 따라가면서 그의 여정을 정리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저자의 코멘트가 있었지만내용을 이해하는 도움말 정도였고원래 남아 있던 글의 흐름을 해칠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좋은 참고문헌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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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한 예술 - 크리스천 아티스트의 사명
필립 그레이엄 라이큰 지음, 곽수광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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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랜 시간 예술과 함께 해왔다초기부터 다양한 상징적인 그림들예를 들면 물고기라든지십자가 같은 간단한 기호는 기독교 자체를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되었다물론 이 시절에는 기독교가 박해의 표적이 되고 있었기에 드러내놓고 작품을 만들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곧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상황은 바뀐다곧 성경 속 다양한 장면들을 회화로그리고 조각 등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중세에 이르러서는 아주 화려하고 정교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동로마에서 잠시 성상파괴운동’ 같은 것이 있었지만전반적인 분위기는 달랐다그 양과 질에 있어서 중세는 기독교 예술의 최전성기였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성의 빛을 자신들의 작품에 담아내는 이들로 여겨졌다수많은 건축물들에는 예술품들이 반드시 장식되어 있었고때로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감을 주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예술의 이런 지위는 퍽 달라졌다개혁자들은 예술 작품들에 대한 지나친 고양이 우상화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고아직 제대로 된 신학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 예술에 대한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그러나 그건 예술의 문제라기보다는 평신도들에게(때로는 성직자들에게도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던 교회의 책임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필립 그레이엄 라이큰 역시 바로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지적한다예술의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우상화될 수 있는지 말이다그러나 그는 이런 위험 때문에 교회가 예술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적을 회복시키고 그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예술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하나님은 세상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드시고그것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이끄신다예술은 어떤 도구적 기능만 가지는 게 아니라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행위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은 성막 제작과 이 작업을 총괄했던 브살렐과 오흘리압이라는 인물인데그들이 성막을 만드는 과정은 하나님이 이 작업에 얼마나 큰 기대와 관심을 보이고 계시는지그리고 그들이 하는 작업 자체가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만나는 자리를아무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공간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기독교적 예술이라고 해서반드시 성경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던가복음 전도를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저자는 여기에는 선함과 진리’,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어떤 것이 이 기준을 만족시킨다면그건 그 자체로(심지어 추상예술이라고 해도충분히 기독교적이다.



작고 얇은 책이다당연히 많은 주석이나 전문적인 논의까지 덧붙여 있는 책들과는 달리핵심적인 내용만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다하지만 이 주제와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기에는 괜찮은 책너무 전문적이어서 나 같은 초심자들은 읽기 어려운 것들보다는 오히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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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역사 : 신약부터 새 창조까지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이여진 옮김 / 비아토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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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보면 차이가 나는 어휘들이 몇 가지 있는데 ‘주일’도 그 중 하나다. 대개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주님의 날’, 즉 기독교인들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날이라는 의미다.


어떤 이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는 것이 무슨 중요한 신앙의 표지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이 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특별한 이미지가 생긴 걸까.



이 책은 기독교 내에서 일요일의 지위가 어떻게 달라져왔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이라는 개념과 주일이라는 개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안식일을 예배행위의 날로 삼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뜻대로 쉴 수 없었던 상황에 있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 후 다음 날 이른 새벽, 아직 일이 시작하기 전 모여서 예배하는 게 좀 더 편했다.


상황이 변한 건 콘스탄티누스가 일요일을 쉬는 날로 선언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제 예배가 이루어지던 일요일의 시간을 훨씬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복잡한 예전(禮典)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 일요일이 ‘쉬는 날’이 되면서 개념상 ‘안식일’과 연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라고 한다. 흥미로운 전개다.


중세 교회에서 주일을 ‘새로운 안식일’로 전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각종 교회력을 폐지하면서 그 반대급부로 주일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느 쪽이든 ‘주일’의 중요성이 높아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는 말.


영국의 청교도들은 아예 ‘주일’을 ‘안식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이유도 하나 있었는데, 당시 로망스어에 속하는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토요일을 ‘사바트(안식일)’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이름으로 부르곤 했었는데, 영어의 경우 이와 상관없는 ‘사투르누스의 날(새터데이)’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기에, 일요일을 좀 서 쉽게 안식일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는 것.


강력한 청교도주의에 의해 ‘주일’은 좀 더 엄숙하게 비켜야 하는 날로 여겨졌다. 물론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관례는 그 이전부터였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안식일에 관한 이런 청교도적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는 그 영향을 받은 미국 교회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세속화가 사회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일요일 또한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그 날을 엄숙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한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일각에서는 예배의 전례에 대한 회복이 폭 넓게 이루어지고도 있다. 저자는 비록 여전히 세속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지만,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그 날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교회사와 관련해서 읽기에 편안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을 잘 담아내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책은 일단 기본적으로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된다. 이번 책에서도 주제인 일요일의 역사를 딱 간결하게 담아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 같은 “엄숙한 안식일적 주일”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것이었다.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다양한 미신에 빠지게 된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개 역사를 다룬 책이라는 게 뭐든 다 담으려고 욕심을 내서 두꺼워지면서 내용도 한없이 퍼지고, 심지어 서술도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아는 척 좀 덜 해도 되니까, 딱 필요한 내용만 알려주면 될텐데 그게 잘 안 되나 보다. 그래서일까, 이런 책들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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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기독교 - 공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명윤 옮김 / IVP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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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공적 신앙’(원서의 원제도 “A Public Faith”다)에 관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게 2014년이고, 원서가 나온 건 2011년이니 벌써 10년이 된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공적 신앙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실천 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적 신앙을 위한 제대로 된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치거나 하는 일은, 일선 교회에 차원에서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 나설 때, 자신의 신앙을 마치 외투를 벗어 벽에 걸어두듯 잠시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애쓴다. 공개적인 영역에서 어떤 사람의 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피해야 할 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100분 토론”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하면서 그 근거를 윤회사상이나 구속 신앙에서 찾는다면 어떤 댓글이 달릴까?


사실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위 무속종교보다 더 열악한 상황인데, 후자의 경우는 예능이나 종편의 유사 시사프로그램에서 종종 하나의 코너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니 말이다.



저자인 볼프는 기독교 신앙이 지극히 내세적이고, 개인구원이나 ‘복 받는 삶’ 따위에 집중하는 ‘신비주의적 종교’가 되어가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예언자적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언자적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인데, 오늘날의 신앙은 일종의 기능장애에 빠져 애초의 이런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유럽의 경우 “30년 전쟁” 이후 종교가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처절하게 인식했고, 곧 이어지는 르네상스는 종교가 아닌 인간의 가능성에서 소망을 찾고자 하는 시도였다. 20세기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이 많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지난 2001년 벌어진 9.11 테러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종교가 사람들의 공적인 삶을 해칠까? 볼프는 적어도 기독교만큼은(이건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저자가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종교적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그 신앙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에 더욱 충실해지는 데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표층적이면서 열광적인 신앙은 자칫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심층적이면서 헌신된 실천은 평화를 낳고 유지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궁극적인 번영에 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목표와 의미, 그리고 어떻게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기독교 신앙은 보여준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에서는 공적 신앙의 필요성,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목표를 실천할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 다원주의 아래, 다양한 사상과 신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저자는 적응이나 도피/고립과 같은 태도는 적절하지 않으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혜를 나누고, 사랑과 용서를 기조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기꺼이 다른 이들을 환대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 구체적인 지침, 혹은 예시라고 할 만한 것들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특히나 이 책이 공적인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실천의 영역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이론적 차원으로만 제안되는 점은 상당히 아쉽다.



사실 이 책의 공헌은 공적인 영역에서 신앙의 자리가 치워지거나 봉쇄되는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점에서라면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고. 가장 중요한 지적은 역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실천은 부가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신앙적 본질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믿을까에만 집중 한 채,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운전면허증은 도로에 나가 차를 운전하기 위해 취득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면허장 내 연습 주행코스만 반복해서 오고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터.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꼭 그렇게 보인다고 하면 조금 지나친 말이려나.


한 번 읽어 볼만한 책. 다만 조금 더 쉽게, 잘 풀어놓은 책이 계속 나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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