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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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기억도 가물가물한 20년 전의 사람이 편지를 보냈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 편지가 일상을 흔들며 치유의 길로 인도했다면…….

그 길 위에 가려진 추억의 편린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면…….

 

 

 

한 통의 편지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45년간 다니던 양조회사를 퇴직한 65세 헤럴드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바꿔 버린 것이다.

 

퀴니 헤네시가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서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양조 회사에 다닐 때 경리과에 있던 퀴니가 마지막 생의 작별인사를 하러 보낸 편지였다.

 

 

해럴드는 20년 전에 알던,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착했던 추억의 동료에게 마지막 위로의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생각에 잠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옛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우체통을 놓치게 되고 그래서 그는 자꾸만 걷게 된다.

집에서 있을 때는 생각나지도 않던 일들이 한 걸음씩 떼어 놓을 때마다 놀랍게도 살아 돌아오는 기억들…….

 

 

버거를 먹으러 들른 주유소에서 자신의 고모가 암에 걸렸다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약보다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병을 고친다는 소녀의 말을 듣고 그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희망도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늘 구부정한 자세로 살았고 살면서 포기해 버린 것들, 하지 못하고 놓친 것들이 너무 많다고 깨달은 순간 요양원으로 전화를 걸게 된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삶,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존재였던 해럴드의 삶에 꼭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달라지지 않으면, 미치지 않으면 희망도 없는 게 인생인가 보다.

 

 

 

해럴드 프라이가 가는 길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구해 줄 거니까. 나는 계속 걸을 테니, 퀴니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전해 주겠어요? (본문에서)

 

 

 

45년 동안 영업 사원으로 똑같은 일만 성실히 하다가 정년퇴직한 헤럴드 프라이. 오래 전 퀴니가 해럴드의 잘못을 뒤집어 쓴 채 회사를 그만둔 것에 대해 여태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이제 미안하고 고맙다는 못 다한 말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길을 걸으며 퀴니에게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서.

해럴드는 자신의 걸음이 퀴니를 구할 거라고 믿으며 800km를 걸어 퀴니에게 가기로 한 것이다.

노인의 걸음으로 순례길을 걸을 수 있을까. 800km를.

시간이 흐르면서 해럴드의 걸음에 박자도 생기고 자신감이 붙는다.

 

 

 

자신이 이런 것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걷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차에서 내려 발을 이용하면 땅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이 보이게 되는지도 몰랐다. (본문에서)

 

 

 

그는 원래 차 있는 데까지만 걷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잊고 살아온 과거들이 걸을 때마다 길모퉁이마다 되살아 나온다. 하나씩 꺼내 맞춰보는 잃어버린 퍼즐조각들.....

 

 

어린 시절의 내성적인 모습, 술주정뱅이 아버지, 어느 날 뉴질랜드로 떠나버린 어머니, 머리좋고 잘 생긴 아들의 죽음, 아내와의 만남에서 지금의 냉랭한 집안분위기, 퀴니의 친절까지 ...

 

외면하고 살았던 자신을 만나고, 자신과 대화하며,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퍼즐조각을 맞추어 가다가 같이 걸을 사람들을 만나고 .....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가 남부 킹스브리지에서 북부 버픽어폰트위드까지 간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응원해주기도 하고 동참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 과거가 있지요. 이랬으면 어떨까 하고, 또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하는 게 있단 말이죠. 행운을 빌겠어요. 그 여자를 찾기를 바라요. (본문에서)

 

 

돌아서지 않았던, 멈추지 않았던 해럴드의 걸음이 퀴니에게도 마음을 전하게 되고, 아내와도 화해하게 된다.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걸었던 남부 킹스브릿지에서 북부 버윅어폰트위드까지 1000km은 그대로 걷기 여행이 되고 순례여행이 되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걸으면서 깨우치는 삶이 아닐까.

걷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지도 모른다.

화해와 치유를 위한 제일 빠른 방법인지도 모른다.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은 홀가분해지고 상쾌해지는 치유의 걷기여행이다.

 

 

 

87일간의 걷기 여행은 87년의 삶을 되돌아보는 회고록 같다.

자신의 깊은 속내를 끄집어내놓는 참회록 같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해럴드의 순례도 치유와 평안, 용서와 화해가 있는 길 걷기다.

그래서 해럴드 프라이의 걷기는 놀랍고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걷기가 주는 치유의 힘을 잘 보여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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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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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함 속에 감춰진 비밀의 맛! [달고 차가운]

 

제목이 주는 감각적인 표현이 책을 읽는 내내 신경 쓰인다. 달고 차가운 것이 무엇일까. 마치 숙제를 해야 하는 아이처럼 감각적인 표현만 나오면 긴장하며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런 숙제를 내는 소설은 정말 처음이다.

 

먹는 음식 중에 달고 차가운 것은 무엇일까.

인간관계에서 달고 차가운 것이라면 무엇일까.

 

달고 차가운 것이라면 냉동실 속에 있는 아이스크림, 초콜릿, 요플레 등이 떠오른다.

달고 차가운 기억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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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본문에서)

 

첫 서두가 강렬하다. 유쾌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무엇도 알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적어도 돌아온 뒤에 많은 것이 변해 버린 걸 실감하게 되리란 사실만은 알았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장 나쁜 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삶, 아닐까. (본문에서)

 

십대시절을 꿈꾸는 시절이라고 하지만 많은 아이들이 자신이 꾸는 꿈보다 엄마나 가족의 꿈과 집안의 자존심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강지용.

영어 학원을 2개 운영 중이고 임대 하던 오피스 빌딩을 고시원으로 바꾸느라 바쁜 엄마,

고시패스로 고위직 공무원인 아빠, 의대생 형, 미국 비즈니스 스쿨을 다니는 누나를 둔 잘사는 집안의 아들이다. 가족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로 인해 명문대 진학이 어렵게 되자,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재수를 결심한다. 대통령 자식이라도 대학이 삼류면 평생 삼류 꼬리표 달고 산다는 엄마의 논리에 동조를 하지 않지만 엄마를 이길 재간이 없거니와 아버지는 아예 난공불락의 성역이기에 순종하는 척 할 뿐이다.

 

강지용이 민신혜를 처음 만난 건 재수학원에서였다.

재수학원의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남자들이 까맣게 있는 가운데 빼빼마른 여자아이가 아이스 바를 먹는 모습에 끌려든다. 흰 얼굴의 여자아이가 긴 원기둥모양의 아이스 바를 돌려가며 먹는 모습에 야동을 떠올린다.

 

지용은 담배를 피우는 것, 수업에 충실하지 않는 것 등으로 엄마를 속인다. 그는 엄마를 처음 속일 때는 불안했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짜릿함 마저 느낀다.

 

지용에게 신혜와의 첫 키스는 부드럽고 차가운 것이었다.

지용이 재수를 하게 된 배경과 엄마와의 갈등을 이야기하며 벗어나고 싶다고 하자, 그건 그저 지옥의 입구일 뿐이라며 신혜는 자신의 지옥을 이야기한다. 엄마의 기대가 무섭다는 지용과 그런 기대가 부럽다는 신혜는 딱 맞는 퍼즐 조각을 찾은 아이들 같다.

 

그게 네 지옥이라는 거니? (본문에서)

 

신혜는 여행 가이드였던 새아버지는 2년 전에 죽었고 지금은 호프집을 하는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데려온 어린 동생과 함께 산다. 가난이 뭔지, 지옥이라는 게 뭔지 넌 모른다며 자신이 맛 본 인생의 차가운 맛을 이야기 한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 것처럼 어린 동생을 이용할 지도 몰라 지켜주고 싶다는 신혜의 말에 지용은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신혜의 잦은 중얼거림을 듣고 결국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얼굴에 겹쳐지는 낯익은 얼굴이 있다.

 

오늘 아침 내가 꿈에서 본 건 죽은 여자가, 아니 내가 죽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 아침 마주하던 얼굴이었다.

부드러운 것이, 오늘 아침에는 평온했다. (본문에서)

 

엄마의 등쌀에 밀려 미국 유학을 준비하러 지용은 미국으로 간다. 그 여자를 죽였으니 신혜는 이제 지옥에 있지 않을 거라며 안도하며 미국에 가지만 신혜와 연락이 되지 않자, 지용은 신혜를 찾아 다시 한국으로 날아온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은 신혜의 말이 가짜라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거짓인 걸까.

초등학생 어린 동생도 없고 신혜의 대학기록도 다 가짜이고 지금은 엄마의 사망보험금을 가지고 새 아버지와 홍콩의 침사추이에서 민박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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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의 달콤한 키스에 남자 아이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신혜의 손은 부드럽지만 늘 서늘한 느낌이었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신혜의 키스도 달콤하지만 늘 차가웠는데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믿음이 지나치면 그것도 지옥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 어렸을까.

 

부드러운 것을 찾다가 살인자의 길로 들어선 지용의 모습이 달콤한 선악과의 유혹에 빠져 고통의 맛을 알게 된 아담의 모습과 닮았다.

아름다운 빛깔과 매혹적인 향기에 취해 장미꽃 속에 가시가 있는 줄 모르고 덥석 쥐는 아이 같다.

달디단 단 아이스크림을 너무 많이 먹어 배앓이를 하는 아이 같다.

 

달콤한 것의 뒤에 오는 고통의 맛은 날카로운 얼음송곳처럼 심장을 찌를 정도로 치명적이다.

달고 차가운 건 어쩌면 인생 자체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양면성, 인생의 야누스적인 면 일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달콤한 맛 뒤의 씁쓸한 맛이 있음을 항상 조심하며 단 것만 덥석 물지 않기를,

가족의 꿈, 미래, 자존심 보다는 아이의 꿈과 미래가 먼저이길,

어머니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손길이 되는 세상이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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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섬옥수
이나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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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섬옥수(纖獄囚)

 

 

 

 

처음에 얼핏 봤을 땐, 책의 제목이 곱고 가느다란 여자의 손을 말하는 섬섬옥수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섬, 섬옥수다. 점 하나의 효과에 전혀 다른 뜻이 되어 버림을, 한자어의 사용으로 의미가 확연히 달라짐을 보면서 작가의 우리말을 비트는 솜씨에 놀랐다.

섬에 갇힌 죄수들. <섬, 섬옥수>

 

굳이 섬이 아니어도 우리는 스스로의 감옥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인 같을 때가 있다. 더구나 외딴 섬에 산다는 것은 공간적인 폐쇄성과 특수성으로 더욱 갇힌 느낌이 든다.

 

태생지인 섬에서 나고 자라 바다에 순응하며 모진 삶을 이어온 원주민들, 스스로를 유폐시키려고 찾아들었거나, 생존을 위해 먹고살려고 모여든 외지인들이 섬이라는 특수성과 폐쇄성 때문에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힌 채 서로 부대끼며 갈등, 대립, 오해를 겪다 결국 사랑으로 구원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쓰고 싶었다. (작가의 말에서)

 

 

7편의 연작이라지만 내용들이 잘 맞물려 있어서 연작임을 눈치 채지 못하고 읽었다. 자애의 눈으로 바라 본 섬사람들의 생태를 그린거구나 싶었다. 그건 아마도 처음과 나중에 나오는 인물이 자애라는 한 인물이어서 그런 것 같다.

 

방학을 맞아 잠시 민박하러 왔던 자애는 섬에 있는 절의 요사채에 머물게 된다.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연결고리가 점점 느슨해지는 느낌이다. 서로 관심이 없는 부부가 되어가는 것이 새삼 서럽다. 10년을 대학 강사로 있었지만 정교수 자리는 요원하고, 지도교수는 재임용 다섯 번으로 10년을 채운 그녀에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이라며 은근히 나가 달라는 눈치를 준다. 게다가 교수들 간의 알력 다툼과 종 부리듯, 도제를 대하듯 하는 은사의 권위가 이제는 몸서리쳐진다. 학기 중에 선생과 친하게 지내면서 적당히 리포터로 좋은 학점을 기대하는 학생들, 성적이 나쁘게 나오면 선생의 강의도 낮은 점수라며 협박성 문자를 보내는 학생들을 보며 가르치는 것에 대한 회의를 품는다. 사제지간이 있기라도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맹렬한 비난조의 메일을 받는 것도 정말 지쳤다. 그래서 방학을 맞아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찾아든 땅끝섬.

 

개발되기 전에 토착 섬주민들 만의 공간이었을 때의 땅끝섬은 정을 나누던 행복한 섬이었다. 그러나 섬과 섬 주변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외부에 알려지자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이익이 된다 싶으니까 외지인들이 정착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전에 없던 문제들이 생겨나고 나중에는 파도처럼, 폭풍처럼 섬을 휩쓸어 버린다.

자치회장 재범이, 물질하는 막순할머니와 현 씨 할머니, 현씨 할머니의 막내딸의 죽음 등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골프카와 짜짱면의 등장은 이권에 눈먼 섬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후에 다가 올 재앙의 전조이기도 하다. 기득권을 누리려는 섬토착 주민들과 자신의 권리를 가지려는 새로운 사람들의 갈등과 다툼은 뺄 것도 없이 그대로 우리의 모습이다. 뭍에서 족보 있는 명견들을 경쟁적으로 들여오는 마을 남자들의 과시욕. 마을에서 주인의 위상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개들의 모습까지……. 정말 이럴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게끔 묘사를 해 놓았다.

 

사제지간, 가르친다는 것의 회의에 힘이 빠지고 맥이 풀리기를 거듭하다보니 이제는 지쳤나 보다. 결국엔 학교에 사표를 던진 자애는 남편과 함께 다시 땅끝섬으로 찾아오면서 관계를 회복한다. 역마살이 낀 공처사는 긴 방황을 끝내고 주지스님이 되어 있고 마을의 골프 카도, 개들도 사라지고 말끔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아마도 자연을 훼손하지 말자는 로망, 인간의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으리라.

 

외지고 작은 땅끝 섬이 배경이라서 소설 속에는 물질, 낚시, 횟집,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세밀화처럼 그려진다. 서울 태생이라는 작가가 걸쭉한 제주 방언을 풀어 놓기도 하고 낚시할 때의 손맛을 그려내는 모습, 섬에 사는 개들의 권력다툼, 섬의 태생적인 폐쇄성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섬이 유토피아일수도 있고 감옥일 수도 있음을 시사 하는 소설이다. 있는 그대로의 섬을 보존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일상도 본래의 모습에 만족하며 욕심이 없는 삶을 살자는 메시지 같다. 개발이나 발전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님을, 자연 그대로의 수수함이 더욱 행복임을 생각나게 한다.

 

섬의 개발로 일어나는 과정들이 그대로 우리의 일상이기에 현실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 선명하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 훈훈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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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너대니얼 호손 지음, 박계연 옮김 / 책만드는집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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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은 주홍글자

 

 

아마도 여고 시절에 읽었을 것이다. 그때는 주홍글씨라는 제목이었다. 주홍글자 A가 간음한 여인에게 주어지는 잔인하고 끔찍한 형벌, 불공평한 형벌이었다고 어렴풋이 기억된다. 남자들의 권위와 위선에 희생되는 여자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던 것도 같고, 글자가 주는 상징성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도 있다.

 

주홍글자 A는 낙인이다. 간음한 여인에게 주어지는 형벌이다. 경멸과 비난의 눈초리를 받아 가슴이 멍들어도 뗄 수 없고, 동정조차 허락하지 않는 죄악의 표식이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상징이다.

이야기는 17세기 중엽의 어둡고 칙칙한 뉴잉글랜드의 보스톤을 배경으로 초기 청교도 시대를 그리고 있다.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양면성인 구원과 잔학성을 잘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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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법률이 거의 일체를 이루었던 고지식한 청교도 시절에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실상에 대한 고발은 종교가 벌인 죄에 대한 심판이 지나치게 편협적이고 이기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적인 형벌인 광장 처형대 앞에서 목사나 재판관이 내리는 벌은 동정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마녀사냥 식이었고, 구원과 회개는 눈곱만큼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의 판결은 모두에게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힘이 있었기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목사 딤스데일과 짧은 사랑을 나눈 아름답고 열정적인 부인 헤스터 프린은 처형대에서 세 시간 정도 세우고 평생 가슴에 치욕의 상징물을 달도록 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과 죄를 범한 남자를 말하라는 추궁에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버틴다. 안고 있는 아이의 아버지를 인간들에게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한다.

 

그녀에겐 이미 늙고 기형적인 어깨를 한 책벌레인 남편이 있었다. 아내가 먼저 대서양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2년 동안 떨어져 산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딤스데일 목사는 그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타고난 말주변과 종교적인 열정으로 이미 성직자로서의 높은 지위를 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스터 프린과의 사랑으로 그는 남몰래 괴로워한다. 죗값을 오롯이 혼자서 짊어지고 가겠다는 헤스터 프린을 보며 더욱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고백할 용기가 없는 그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용서를 빌게 된다.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헤스터 프린에게 로저 칠링워스라는 의사가 와서 치료를 해주고 간다. 남편인 자신을 앞으로 모른척하고 절대 비밀로 하라는 당부도 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다른 이름을 갖고 돌아온 것이다. 늙어가는 불구의 지식인과 젊고 정열적인 여자의 결혼엔 애당초 애정이 없었다.

 

-저도 당신에게 큰 죄를 지었어요.

-처음에 죄를 범한 것은 나요.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젊은 당신과 시들어가는 나와의 부자연스런 관계를 원했으니 말이오. (본문에서)

 

책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 연금술로 금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그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능력자가 되어, 약초로 환자를 치유할 수 있는 의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남편인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말고 비밀을 지키라고 한다. 죄인의 남편이 되어 손가락질을 받기 싫었던 것일까.

 

금고 형기를 마친 프린은 죄의 화신이라는 주홍글자를 단 채 외진 곳에서 삯바느질로 생활해 나간다. 그녀는 뉴잉글랜드가 자신이 죄를 지은 장소이기에 이곳에서 속죄해야 자신의 영혼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고통을 견뎌야 속죄된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솜씨 좋은 바느질 실력 덕분에 경제적인 약간의 여유는 누리지만 사람들과의 접촉, 인간적인 대우는 기대할 수가 없는 생활이다. 은밀하고 노골적인 경계 밖의 인간이라는 시선이 고독과 씁쓸함을 안겨줄만한대도 그녀는 죗값이라며 달게 받고 살아간다. 목사의 십자가까지 지겠다며 온갖 모욕을 참아내는 것이 순교자의 삶 같기도 하다.

 

로저 칠링워스는 목사인 딤스데일의 주치의로 등장하면서 인정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그를 치료하고 위로해 주지만 그가 범죄의 상대방임을 알고부터는 그를 서서히 고통 속으로 몰아간다.

 

7년의 세월이 지난 뒤 고통으로 허덕이던 딤스데일은 처형대에서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고백하고 가슴을 열어 보여준다, 주홍글자 A가 새겨진 끔찍한 가슴을,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가슴에 선명하게 수놓은 주홍글자를 새긴 옷을 입고 시민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죗값으로 여겼던 시절. 선량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는 명목 때문에 수치와 공포를 견뎌내고 서 있어야 하는 처형대에서의 형벌. 만인 앞에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분명 공포다. 프랑스의 단두대 처형, 북한의 자아비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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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정도가 어디까지 일까.

물론 죗값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온갖 모욕적인 비난과 멸시보다 회개의 기회를 줬더라면, 바늘처럼 독화살처럼 마구 찔러대기 전에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이 떠오르는 책이다.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을까. 물론 죗값은 달게 받아야겠지만 처벌은 공평해야 하는 법 아닐까.

태어나면서 악마의 자식이라는 죄인의 자식이라는 낙인은 또 다른 주홍글자다. 죗값을 받고 있는 사람과 그것을 심판한 사람 중에 누가 더 사악할까.

 

젊은 목사 아서 딤스데일과 아름다운 부인 헤스터 프린의 짧은 사랑, 그리고 그녀의 늙은 남편 인 로저 칠링워스의 끈질긴 복수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 낸 소설이다. 종교가 지닌 이중성인 구원과 위선에 대한 묘사, 통찰력 있는 인물의 세밀한 심리묘사,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는 치밀한 구성, 정교한 시대적 종교적 상징들이 가득한 소설이다.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인간이기에, 아무리 시대적 억압과 굴레가 불공평하더라도, 종교적인 잣대가 어느 개인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더라도 반항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 개인 앞에 선 정치와 종교의 힘은 거대한 골리앗 이상이니까. 지나친 처벌과 그렇게 해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누가 어루만져 줄 수 있을까. 구원과 용서는 어느 정도에서 이뤄져야 할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고전의 힘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이 있음을 이번에도 절절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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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번지 파란 무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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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전설 [404번지 파란 무덤]

 

 

제목이 으스스하다. 파란 무덤....

파란 옷을 입고 있는 도깨비 공윤후.

어디에도 없는 공, 있지만 없는 날인 윤, 얼마나 이어질 지 알 수 없는 시간인 후라는 이름 뜻을 가진 그는 아픈 이들에게 위로가 될 행운의 마술을 보여주는 도깨비다.

 

처음에 만난 여자는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여자다. 가난한 여자는 생애 처음 자신을 위해 파란 장미를 사서 예전에 일했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간다. 얼굴에 종양이 퍼지면서 녹아내리듯 처진 살들이 입과 눈을 짓눌러서 스카프로도, 마스크로도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학을 졸업한 여동생과 둘이 살면서 동생에게 대학등록금을 보태주고 용돈도 보내주지만 동생은 언니에게 계속해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보내는 동정과 호기심과 혐오스런 눈빛과 멸시를 깨달으면서 세상에 발붙일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여자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는 찰나 허리를 잡는 남자의 손길을 느낀다. 갸름하고 잘 빠진 검은 눈동자의 푸른 빛 코트의 남자와 대화를 하면서 얼굴에 있던 종양의 아픔과 슬픔이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눈썹을 치켜 뜰 수 있는 체험을 하며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나랑 같이 갈래? (본문에서)

 

마술 같은 남자의 파란 무늬 가득한 두 손이 무슨 마술을 부린 걸까.

 

 

미용실을 하는 서른아홉 먹은 노총각 병구는 같은 건물에서 미술학원을 하는 민혜를 짝사랑한다. 엄마의 마지막 유언은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건네 준 금반지를 무덤에 함께 묻었던 병구. 키도 작고 심심한 얼굴이라는 자격지심에 병구는 데이트 신청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알게 된 마술사 공윤후의 이야기에 그의 주소를 알게 되고. 주소지인 공동묘지를 찾아가서 그를 만나게 된다. 드디어 공윤후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민혜는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병구와 가까워지는데...

공윤후의 마술이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너 좋을 대로 해.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어서 인간인 거야. 혼자가 무서우면 둘을, 둘이 무서우면 혼자를 택하는 거야. 하나는 불행, 둘은 다행이라지만, 어느 쪽이든 거기엔 반드시 대가가 따르지. (본문에서)

 

혹부리 영감의 혹을 떼어 간 도깨비처럼 아픈 이들의 고통을 떼 가는 공윤후의 모습이 조금은 오싹하면서도 따스함이 느껴진다. 색다른 도깨비 판타지다. 정체불명의 로맨티스트, 100년을 살아온 도깨비 이야기다.

 전설 같은 도깨비 이야기에 홀리던 어린 시절처럼 이런 도깨비라면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색다른 도깨비 공윤후. 오래된 회화나무 아래에 가면 만날 수 있으려나. 파란 코트 입은 날렵하게 생긴 남자를 유심히 봐야 겠다.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삼국유사, 대한제국의 문헌들도 나오는 조금은 특이한 이야기구조다. 어색하지만 빨려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자음과 모음 공식 리뷰단 2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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