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
페테르 우스펜스키 지음, 공경희 옮김 / 연금술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5 10 21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캘리포니아에 나타날까?

영화 Back to the Future II」다시보기

 

 

 

 

 

 

(영화 <백투더퓨처2>에서 미래인 2015년에 해야할 '임무'를 마치고 다시 원래의 시간 1985년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팅해놓은 시간 정보)

 

 

 

 

이제 하루 남았다. 영화 백투더퓨처2에서 주인공 브라운 박사(Dr. Emmett Brown), 마티(Marty McFly) 내일 날짜인 2015 10 21 과거에서 미래로 여행을 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들은1985 1026일로부터 30 후인 2015년에 도착 시간을 정해놓고 시간여행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유는 장래의 마티의 아들, 다티 주니어가 절도건으로 감옥에 수감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위해서 시간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던 .  89년에 개봉된 영화는 실제로 제작한지 무려 30년이 되어간다.

     어렸을 때는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끊임없이 생겨나는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사건과 유치한 설정이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나처럼 시니컬해진 어른을 재미있게 해주기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닐테니 불평할 필요는 없겠다. 어릴 때의 내가 흥미롭게 영화를 보았듯 누군가가 손에 땀을 쥐며 재미있게 보면 일이다.

     무엇보다도 다시 영화를 보면서 미래사회의 모습들, 2015 10월의 미국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들이 흥미로웠다.  30년의 시간 여행을 하자마자 맞닥드리게 되는 것이 날아다니는 택시였다. 역비행(?)으로 마주오는 택시들과 충돌할 뻔한 위기를 넘기는 브라운 박사 일행(마티와 마티의 여자친구 제니퍼 모두 3명이다.) 미래의 힐밸리(Hill Valley) 무사히 도착한다. 2015년에는 날아다니는 택시 아니라 우리가 어렸을 타던 스케이트보드도 호버 보드(Hover Board)라고 부르며 공중에 다닌다. 어린 아이들은 손잡이를 달아 퀵보드처럼 타고다니는 도구가 되어있다. 한편 일종의 스마트 신발과 잠바도 눈길을 끈다. 누구나 신거나 잠바를 입어도, 발이나 체구에 맞게 사이즈가 조절되는 의류를 입고있다.

     마티를 괴롭히는 갱의 두목인 비프(Biff Tannen) 마티와 한바탕 소동을 벌이며 건물의 커다란 현관으로 돌진하여 파괴하였을 , 신문기자들 대신 드론 카메라가 사건을 바로 앞에서 취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무선 비행체인 드론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촬영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지는 상황을 고려하면 무려 30 전에 이런 세세한 점들을 고려했다는 점이 놀랍기도하고 매우 흥미롭다.  

     2015년의 장면에서 마티의 정체를 알아낸 늙은 비프 태넨은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잠시 차를 떠난 사이 이들의 타임머신 드로리안(DeLorean DMC-12) 타고 과거로 가서 다른 중대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다. 비프는 바로 1950-2000년동안의 모든 주요 스포츠, 경마 등의 결과가 기록된 연감을 가지고 1955년으로 가서 어린 자신을 만난 미래에서 가지고온 연감을 어린 자신에게 주고 왔던 것이다. 결과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1985년으로 돌아왔을 동네의 모습은 자신이 떠났을 때의 동네가 더이상 아니었다. 마티 자신이 살던 동네는 폭력이 남무하는 우범지대로 바뀌어있었던 것이다.  반면 비프는 연감을 가지고 각종 도박을 통해 돈을 따서 미국 1 부자가 된다. 카지노가 있는 거대한 빌딩과 경찰마저 소유한 거물이 되어있었다. 심지어 비프는 마티의 엄마와 결혼해있었으며 마티의 친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살해당했다.  미래의 시점에서 행한 하나의 실수로 인하여 자신의 과거가 많이 바뀌어버렸다는 설정은 다소 어색하다. 하지만 영화 슬라이딩 도어스처럼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고민하는 순간이 많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 내가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면 지금 옆에는 사람이 있었겠는가?” 같은, 답이 없는 수많은 고민들을 우리는 나이가들어가면서 누구나 번씩은 경험하지 않을까. 슬라이딩 도어스에서는 이것 아니면 저것하는 이분법적인 선택사항만 주어지는 것이 한계이긴 하다. 반면백투더퓨처2에서는 미래의 결과를 알고서 과거로 여행을 하여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소위 운명 바꾸려고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의 결과를 알고서 과거로 여행을 있다면 동일한 사건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과연 우리는 다른 선택을 있을까?

     이러한 조건을 기반으로 소설이 떠오른다. 러시아 작가 페테르 우스펜스키의 <이반 오소킨의 인생여행>이라는 소설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이반은 가난하고 소심하여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질 위기에서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고민끝에 이반은 마법사를 찾아가 자신의 과오를 수정할 있도록 과거로 보내달라고 한다.  물론 이반은 현재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다시 던져진다. 하지만 소설 전반을 통해 주인공 이반은 동일한 상황 때마다 동일한 선택을 하게되고 다시 마법사를 찾아가 과거를 바꿔보려고 하지만, 이반은 결국 자신의 성격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삶에서 동일한 기회가 여러 주어져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없다는 것이 소설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하고 상상하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상황에서 과연 다른 선택을 있을까? 물음에 스스로도 다르게 선택할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을테지만, 어느 순간 다르게 결정한 사항에대해 운명은 다르게 나타날 있지 않을까? 심지어는 생과 사는 어느 순간 다른 결정에의해 운명이 다르게 나타날 있지않은가.

      저자 우스펜스키가 심취한 동양적인 사상(불교의 윤회사상) 신비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나온 소설을 통해 당시 유럽에 불교 사상(윤회 사상) 매우 광범위하게 눈길을 끌었음을 짐작해본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나 니체, 바그너와 같은 음악가를 비롯하여 프랑스 등의 많은 지식인들도 불교 사상에 접할 기회가 많았던 모양이다(특히 18-20세기 ).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아더 코난 도일이 신비주의에 심취하여 수많은 돈을 신비주의 연구에 쏟아부었다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심령연구를 비롯한 신비주의 연구가 유행했던 사항을 엿볼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마티와 브라운 박사는 미래를 암울하게 결정지어버린 과거의 사건을 바꾸기위해 다시 1955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고, 여기에서 다시 조금 유치하지만 복잡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백투더퓨처2를 좀 재미없게 요약해보자면, 주인공 마티가 자신이 선택하여 결과한 과오를 수정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운명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다. 따라서 영화는 시간여행을 처음 소설에 도입했던 허버트 조지 웰즈의 <타임 머신>처럼 암울한 접근을 하고 있지는 않다.  <타임머신>에서는 주인공이 80만년 문명이 멸망한 막막하고 암울한 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류의 미래는 영화블레이드 러너처럼  암울하다.  반면백투더퓨처2에서는 가까운 과거와 미래를 오가기에 인류의 미래에대한 전망을 하기보다는 과거의 어떤 선택에 의해 결과가 크게 바뀌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 여행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 영화를 생각하면, 하나의 공통점은 있다. 시간을 거슬러간다는 설정 속에서도 생명의 유한성에대한 강한 의식은 언제나 어스르지 않는다. 다시말해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거역할 없는 삶의 유한성 하에서, 우리 삶의 순간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결정해나가야 하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는다. 우스펜스키의 소설처럼 인간의 운명은 대체로 정해져있고 바꾸기 힘들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우울할 것인가. 반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나갈 이따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 다소 씁쓸해지는 것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던가 기억을 더듬어본다.  사주명리학이 전하는 것처럼 어느 누구나 모든 소질과 장점을 골고루 가질 없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넘침을 알고 이의 균형을 잡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 그것이 점집에 찾아가는 일보다 중요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미로 시작하게된 영화 이야기인데, 끝은 재미없게 너무 진지해졌다.  

     마무리를 해보자면, 30 전에 개봉한백투더퓨처2보면서 영화 ‘2015년의 모습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이제는 유치해졌지만, 이를 통해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나의 부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으며 어떻게 연애를 하셨을까를 상상해보기도하였다.

     이제 브라운 박사와 마티가 캘리포니아에 나타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는 시가 들어있는책을 시작으로 시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를 느껴보려노력중이다. 시를 알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방황하고 있던 나에게 찾아온 책이 <시인의 >이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전영애 교수의 두툼한 책이었다. 독일의 유명한 문인들의 생가며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교수이자 시인인 전영애 교수의 여정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남들처럼 여유있게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학회 참석차 유럽을 방문하는 와중에 하루 이틀 짬을 내어 바쁜 걸음으로 시인의 집을 찾았다는 전영애 시인.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시를 공부 외에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시가 도대체 뭔데 산넘고 강을 건너 시인들의 집을 찾아갔던 것일까. 전영애 교수는 본인의 삶의 절실한 물음을 갖고 시인의 집을 찾노라 말한다. 물론 시인에게 개인적인 물음들을 공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시인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출가한 스님이 수행의 과정이고, 여정 중에 만난 여러 인연들은 시인의 도반일 것이다. 시인들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 기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 교감, 시인이 묻혀있는 묘지의 문이 닫혀있을 우연히 만난 동네 여인의 도움 등등 길위에서 전영애 교수가 만나는 인연들의 이야기만 해도 신기하고 흥미로왔다. 한마디에도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하고 미소로 연결되는 위의 인연들은 모두 전영애 교수의 도반이었던 것이다.

     책에 나오는 독일의 여러 시인과 대문호들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전영애 교수와 직접 함께 에피소드가 나오는 라이너 쿤체 시인의 이야기 것이다. 과거 구동독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쿤체 시인은 1968 프라하의 이후 반체제 작가로 지목되어 해직되었으며 보조자물쇠공으로 일하면서 시작에 전념해왔다고 한다. 체코 출신 독일인인 쿤체 시인의 부인 엘리자베트와의 사랑과 결혼이야기도 흥미롭고 또한 아름답다. 또한 전영애 교수가 쿤제 시인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전영애 교수의 초청으로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시낭독을 하기도 에피소드를 읽으면 시를 모르는 나도 흥미로웠다. 쿤체 시인이 시집 중에 전영애 교수가 번역한 <보리수의 > 나오는 한편이 재미있어 여기에 적어본다.

 

 

[동아시아 손님]

 

                                               그녀 배가 고픈가?

                                                   아뇨

                                                   그녀 배가 고픈가?

                                                   아뇨

                                                   그녀 배가 고픈가?

                                                   약간

 

 

                                                  

                                                   에다 대고 두드려야 한다.

                                                   번째에야

                                                   열린다

                                                   아주 작은 하나

 

    이 시는 전영애 교수가 쿤체 시인의 초대를 받고 쿤체 시인의 집을 방문했을 , 시인이 전영애 교수를 바라보는 따뜻하고 유머있는 시각을 보여주고있다. 동양적인 예의가 몸에 전영애 교수가 배고픈지 묻는 쿤체 시인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폐가 안되도록 사양하고있고, 이를 눈치챈 쿤체 시인은 세번 묻고 있다. 정제된 언어를 위해 갈고 닦은 그의 시들은 언제나 간결하면서도 거기엔 따뜻함이 흘러 넘치는 하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상상하는 쿤체 시인의 모습은 얼마 전에 읽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등장하는 독일인 바에르 교수와 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에서 바에르 교수가 즐겨부르던 노래는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수록한 시로 미뇽의 노래 알려져있다.

 

                    당신은  아시나요, 땅을.

                               레몬 나무에 꽃이 피고

                               무성한 사이로 금빛의 오렌지가 빛나는 .

                               푸른 천국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상록수 짙어지고 월계수 드롶이 자라는 땅을.

                               당신은 아시나요?

                               그곳으로! 그곳으로!

                               , 사랑하는 님이여,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작은 아씨들 >에서 마치 가의 둘째 딸인 조가 바에르 교수를 관찰하고 내린 바에르 교수의 인간성의 요체는 바로 바에르 교수가 타인들에게 품은 순수한 선의였다. 나이도 많고, 인물이 잘나거나 부자도 아닌 바에르 교수는 언제나 삶에대한 긍정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이 나누어줄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려는 사람이다. 같은 독일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상상하는 쿤체 시인의 모습 또한 이런 인격을 지닌 분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시인의 > 읽다가 라이너 쿤체의 시집 <보리수의 > 뒤적이다 흥미로운 시를 발견하기도하고, 그러다가 얼마전에 읽은 <작은 아씨들> 나오는 인물마저 떠올려버렸다. 이러니 나는 책을 절대 빨리 읽지는 못한다. 다만 글의 꼭지를 놓고 잡생각을 해대며, 상상을 해보고 나혼자 이러고 노는 것이다. 박민규 작가가 그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클럽>에서도 외쳤듯이, 지금은 공식적인 지명에서 사라졌지만 인생의 핵심은 삼천포에 있다는 . 나는 앞으로도 무언가를 계획해놓고 글을 쓰지는 못할 같다. 다만 순간 순간 떠오른 , 상상한 , 당시에 내가 읽었던 책들이 버무려져서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책읽기는 매번 이 모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은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국 남북전쟁(Civil war)이 한창일 19세기 후반의 어느 해, 크리스마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하고 있다. 북군에 속해있는 군대에 종군 목사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마치 가문의 여인들이 겪는 에피소드로 소설의 전반을 이루고나머지는 장성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딸들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이룬다.

   네 자매의 어머니, 마치 부인은 특정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어머니'의 역할로서만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내면화하고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적이고 분명한 본인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자매들에게 지혜로운 말을 하는 든든한 어머니이다. 인습에 저항하는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속한 사회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포용하고 화합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네 자매의 아버지 마치 목사는 전쟁 통에 가문이 몰락하여 가난한 집의 가장이 된다. 하지만 근면 성실하고 돈독한 신앙과 사람들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가족을 지켜나간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간다. 마치 목사는 부인과 네 자매의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실제로 루이자 올컷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소설에서의 비중은 크지 않고, 전쟁터에 보낸 설정으로 마치 가의 여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네 자매를 살펴보면, 맏이인 메그(마가렛 마치)가 있다.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따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있어 고민한다. 노래를 잘 불러서 매일 전통처럼 이어지는 가족의 합창 시간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언니이다.

   둘째 (조세핀 마치)는 네 자매 중 가장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 루이자 올컷의 분신처럼 보인다. 여성적인 예절과 관습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책읽기 글쓰기를 좋아한다. 겉으로는 남자 아이같은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자세히 보면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다. 또 모험을 좋아해서 돌아다니기,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글을 쓸 때면 의식처럼 항상 작업복을 입고, 소용돌이 속에 빠진 상태로 글을 쓴다.

   셋째 베스(엘리자베스 마치)는 수줍음이 심하여 모르는 이가 말을 거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음악을 사랑하여 피아노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매우 여성스럽고 말없이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타입이며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네 자매의 막내는 에이미(에이미 커티스 마치). 미술에 심취하여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풍부하다. 한편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캐릭터로 나온다.

   이들 다섯 명의 여인들 외에 중요한 남자 캐릭터가 한 명 더 있다. 이름은 로리(시어도어 로렌스)로서 마치 가의 옆집 부유한 인도 무역상의 손자로 등장하며,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소년으로 마치 가의 둘째인 조와 동갑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150년 전 즈음에 그것도 미국에서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소설에 나오는 많은 문제들과 대화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들과 많이 겹쳐있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가족, 사랑, 결혼, 죽음 등)을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날 웃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감동을 주는 장면도 있다. 남자 작가들이 쓰기 힘든 그런 일상의 소소한 디테일들이 녹아있었다.

   우선 내가 가장 낄낄거리며 웃었던 장면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 <데이비드 커퍼필드David Copperfield>에 나온다는 한 캐릭터 '거미지 부인'을 언급한 장면이었다. 거미지 부인은 디킨즈의 소설에서 과부로 등장하는데 미국으로 이민가는 길에 탔던 배의 요리사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곧바로 거미지 여인은 옆에 있던 양동이에 담긴 물을 그 요리사에게 부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결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조에게 로리는 거미지 부인이라고 놀려대는데, 나는 조의 덤벙대고 선머슴같은 캐릭터를 상상하며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장면들은 네 자매와 마치 부인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격려와 위로를 해주는 장면들이 나올 때였다. 상대방에대한 공감과 배려로 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굳건하게 가족을 지탱해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어머니 마치 부인의 충고와 인생의 조언들이 나오는데, 여전히 유효한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교육의 기회가 흔치 않았던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 소설은 여자로  태어나 마추치게 되는 인생의 제 문제들에대해 삶의 선배로서 충고하고 격려하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보면 불만스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여성들은 인습의 철폐를 주장하고 전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체제 내에서 화합하며, 당대의 가치를 내재화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한계는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인류의 역사를 고려해볼 때 지난 150년간의 변화는 가히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단지 현재의 급변한 여성의 지위와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의 관념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면 된다. 하지만 150년 전의 사회를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틀렸다라고 비판한다면 그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인식하고 그 시대의 관점에서 당대의 시대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부분, 감동적인 부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든 장면도 보인다. 셋째 딸인 베스의 죽음은 죽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연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베스의 모습에서 제대로 죽을 권리를 박탈당한 현대인들을 떠올려본다. 현대인들은 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평균 수명의 증가를 자축한다. 각종 발암물질, 중금속 및 유사 호르몬 물질, 자연파괴 등으로 인류의 삶의 질에 거대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전을 절대화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은 병원이 보유한 고가의 장비에 둘러싸인 채, 생명 연장이 강제되고 집이 아닌 병실에서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릴 때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죽음은 기피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베스의 의연한 죽음을 통해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또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죽어가는 베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아름다움을 깨닫는 장면을 보고 더욱 숙연해진다.

 

 베스는 종종 주위를 둘러보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라며 간탄하곤 했다. 가족들이 모두 햇살이 환한 베스의 방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베스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춰졌던 것이다. 쌍둥이들은 바닥에 누워 발을 차며 까르르 웃고, 엄마와 언니들은 가까이에서 바느질을 했으며, 아버지는 즐거운 목소리로 옛 성현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어주었다. 이런 책들은 수 세기 전에 쓰였지만 그 속에는 좋은 말과 위안을 주는 말이 가득했다. 이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베푸는 작은 예배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희망이 사랑으로 애끊는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믿음이 어려움을 감내하게 할 수 있다는 설교로 가족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가 감정을 다스리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는 앞으로 다가올 슬픈 시간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에서 얼마전에 읽었던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 상공에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 직전, 죽음의 문턱에서 가토 슈이치는 문득 도쿄의 일상을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면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고 있던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 장면들은 나에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인생의 가치관들은 아마도 루이자 올컷의 아버지와 교류했던 당대의 초월주의 작가들(소로우, 에머슨 등)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것같은 소박한 삶에의 긍정과 의지 역시 소설 전반을 통해 어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루이자 올컷이 이 초월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단서는 올컷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월든>에서도 소로우는 군데군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아니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은 당대의 중요한 교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로서 당연히 알아야하는 필수 교양처럼 말이다. 그 밖에 여러 작가들에 대한 저자의 독서량이 방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했는지, 디킨즈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여러 소설을 써내어 당대에 금서로 지정된 책들도 있었던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한 점은 루이자 올컷이 지녔을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준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역사의 결과물이며 당대의 시대, 존재했던 환경적 요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 가정의 네 자매와 어머니가 이어가는 이 장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 바로 이 여인들이 각자 강한 개성을 가지진 했어도, 결국 작가 루이자 올컷의 분열적인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내 주위의 여성들을 살펴봐도 네 명의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개성들을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작은 아씨들>은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딸들이 어머니가 되는 삶의 소소한 과정을 통해 다시금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었다. 더불어 글쓰기를 말할 때나, 소설 속 바에르 교수를 언급할 때나, 삶을 바라보는 진정성을 얘기한다. 아울러 이 소설은 현대에들어와 가족이라는 관념이 파괴되기전 마지막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상화된 가족의 모습은 우리가 가족 사진을 찍을 때처럼 우리가 그러하길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우리의 욕망마져도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전통적인 가족의 관념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은 작가 루이자 올컷의 삶에대한 경건함을 바탕으로 나온 소설이란 생각을 해본다.  

(1부-115면) 엄마의 말
"지금 존재하는 행복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 마저도 사라질지 모른다."

(2부-15면) (딸 메그의 결혼식 준비에대해 마치 부인이 하는 말)
"이런 모든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가정적인 일은 사랑이 담긴 손길을 거쳐야 더욱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2부-275면) (막내 에이미가 로리에게 하는 충고)
"평생 조 언니를 사랑하고 싶으면 그렇게해. 하지만 그 일로 자신을 망치지는 마.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다고 인생의 수많은 선물을 내던지는 건 나쁜 짓이니까. 자, 내 쓴소리는 여기까지야."

(1부-234면)
"그렇다고 노예처럼 일만 해서는 안 된단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면 하루가 충만할 거야. 시간을 잘 분배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고 말이야. 그렇게 지내면 젊은 날은 보람찰 것이고 늙어서도 후회가 별로 남지 않는단다. 가난하더라도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 처음으로 시집을 사보기도 하고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문학 밖에서 살아왔던지, ‘문학동네라는 출판사도 올해 처음 알게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 가까이 참으로 무식하게 살아온 같다. 그동안의 반성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뭏든 올해 나는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겐 변화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에서 말한대로, ‘책을 읽는 다는 ’, 그리고 문학 읽는다는 (물론 아타루는 문학을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 , 철을 아우르는 폭넓은 의미에서 사용했다.)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했듯이, 나에게는 혁명 시작이었다( 믿고싶다). 물론 이제 책을 열심히 읽자라고 마음먹은지 1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금방 그렇게 바뀔리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글못쓰기로 말하자면 해도해도 너무한 이공학도 아니었나.

 그동안 소설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필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되었는데, 문체를 나름 주목해가면서 읽어가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읽으면서 간결하고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는 문장이 어떤 것인가 조금은 알게되었다. 아울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읽으면서 김훈 작가의 문체가 나에게 주는 느낌과 헤밍웨이의 문제가 주는 느낌이 비슷한 부분이 일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하나의 문장이라도, 아주 간결한 주어-동사 형태의 건조한 문장이 이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문체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읽게 되니, 빨리 읽지는 못해도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끼면서 읽게되었다.  나아가 올해는 국내의 출중한 여러 젊은 작가를 처음 알게되었는데, 김연수, 김영하, 김애란, 박민규 등의 작가들이었다(사실 아직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최근에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 재미를 느끼게 되어 조금씩 읽고 있다.

  김훈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김영하 작가의 문체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래서 읽어보게 소설이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짦은장편소설이었지만, 당황스럽기도하고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흥미와 혼란을 함께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할까.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잔인한 살인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조금씩 오싹오싹한 느낌도 주는 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블 아이> 나오는 단편소설 같은 느낌도 주었다. 장면을 이끌어가는 1인칭의 화자는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처럼 의식의 흐름들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살인자의 입장에서 일관되고 치밀한 의식의 흐름들을 모아둔 기록의 형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되는 나약한 인간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이기도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며, ‘기억 통해 지식의 축적과 전수 그리고 사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라는 요소가 빠진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않고 기억해내기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자신의 병에 굴복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화자의 인식 체계가 뒷부분에가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계의 즈음 발견되는 여자의 부위는 이따금 나를 섬뜩하게 만들며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 특성을 소설 하나로 파악하기는 힘들겠지만, 문장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김훈 작가의 문체처럼 길고 짧은 문장의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했다. 속도감있게 읽혀지는 이유는 아마도 김영하 작가의 간결한 문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보여지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는 소설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과연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지에대한 막연함때문이 아닐까. 마치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같은 김영하 작가의 고민과 연구의 흔적을 느껴본다. 소설을 읽고 당황스러운 막연함과 혼란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를 김영하 작가가 본다면 성공이군!’하면서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나에겐 짧지만 모호하고 쉽지않은 소설이지만,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 그리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작중 화자의 상황과 성격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핍진성 강한 인상을 받았다.

(7면)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48면)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정종훈 그림

 

그리고

서경식의 <내 서재 속 고전>

백장미를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겹쳐읽기

소설책의 제목을 닮은 책의 원제는 백장미이다. ‘백장미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뮌헨 대학 학생들의 조직 이름이다. 책의 저자는 백장미소속의 학생이자 나치에 체포되어 처형된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에 숄이다. 서경식 교수의   < 서재 고전>에서 책에 대해 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치하에서 독일인이 저항했던 역사를 훨씬 훗날에나 알게되었을 것이다. 마침 얼마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 읽고 강한 인상이 아직 남아 있던 차에 책을 발견하게 되어 바로 읽어보게 되었다. 가토 슈이치는 나에게 방관자이기를 그만둘것 아무리 과거의 일이든,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든 알아야한다 교훈을 주었기에 더욱 진지하게 읽어나갈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 학생 교수가 백장미활동으로 처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히틀러에 대항해서 투쟁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삐라 6종을 42년에서 43년에 걸쳐 살포한 혐의다. 마지막 삐라를 뿌리던 , 학내 나치당원인 수위에게 발각되 체포되었고, 몇일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판결을 받은 바로 처형되었다. 나치는 유대인에게만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발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독일을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던 것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두려움으로 인해 행동으로 표출된 사례는 매우 드문 같다.

 

잉에 숄이 남긴 얇은 책을 통해 알게 놀라운 사실은 나치가 장애인과 다운 증후군 같은 증세가 있는 아동들을 집단 학살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들이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할 여지가있다고 나치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 관심이 덜했던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위대한 철학자와 사상가의 나라에서 자행되었다고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무엇이 나치를 이런 광기로 몰고 갔던 것일까? 어떤 이유로 75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해야 했던 걸까? 이러한 집단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기술하듯, 나치 동조자인 아이히만의 생각없음으로만 설명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보다는 이러한 결과를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추진하게했던 동인(動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잘못된 사상에의 믿음이 절대적인 정치권력의 힘과 결합하면 얼마나 파괴적일 있는지 역사는 보여주고있다.

서경식 교수는백장미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에서  나치의 역사를 거쳐 다시 현재 일본 사회를 조망한다. 일본 자민당의 헌법 개정 추진움직임으로 눈을 돌린다. 헌법 개정의  뼈대는 자위대를 국군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여 외국인의 인권을 명백히 부정하려는 내용이라고 경고한다. 일본의 파시즘화는 어디까지 진행될까?  이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안보나 외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것이고,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과 연관된 모든 일들에도 영향을 미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토 슈이치가 말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라그리고 알아야한다 명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절실한 물음이라 생각한다.

 

백장미활동으로 체포되어 처형된 독일인들을 기억해보려 한다. 괄호 뒤의 날짜는 이들이 처형된 날짜이다.

조피 (1921-1943.02.22): 당시 철학, 생물학과 학생

한스 (1918-1943.02.22): 당시 의대생

크리스토프 프로프스트(1919-1943.02.22): 당시 의대생

알렉산더 슈모렐(1917-1943.07.13): 당시 의대생

쿠르트 후버(1883-1943.07.13): 당시 신학및 철학과 교수

빌리 그라프(1918-1943.10.13): 당시 의대생

이들 외에 백여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이후 재판을 거쳐 사형되었을 것이라고 잉에 숄은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나는 현대 실존 철학의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나치에 동조하고 몸을 사렸던 하이데거보다는 학생들 및 교수를 포함한 백장미단 위대해보인다.

 

조피 숄이 처형을 앞두고 다른 수감자에게 한 말

"나는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의 행동이 몇 천 명의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깨우칠꺼야. 틀림없이 학생들 반란이 일어날 거야."

한스 숄이 교수대에서 마지막으로 외친 말

"자유는 살아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