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2]

 

 

 

 

 

 

 

 

 

 

 

 

   청년 레빈은 여전히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고 있다. 1부에 보면 레빈이 키티를 만나기위해 스케이트장에 가는 장면이 있다.

   네시에 레빈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동물원 입구에서 세낸 썰매를 세우고 스케이트장으로 가는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입구에서 쉬체르바쓰키네의 사륜 여행마차를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틀림없이 그녀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환희와 두려움으로 그녀가 거기 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그녀는 한 부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스케이트장 건너편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복장이나 자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이러한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내는 것이 쐐기풀 속에서 장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손쉬웠다.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온갖 것을 환하게 밝히는 미소와 같았다. (1 62-63)

   흔히 내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으로부터 같은 아우라가 퍼져나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130년도 전에 톨스토이는 우리가 이야기하듯 그런 빛이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키티의 사촌오빠가 레빈을 알아보고 러시아 제일의 스케이터!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대목을 통해 레빈은 스케이트를 매우 잘 타는 것으로 나온다.

   역시나 오늘은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자면,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문득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 즈음 기숙학교에서 쫒겨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여자 친구 샐리를 만나기전 뉴욕 맨하탄을 배회하면서 스케이트장에 이르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낼 길은 없지만, <샐린저 평전>(케니스 슬라웬스키 지음)을 보면 꽤 젊은 나이에 단편 소설로 데뷔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1941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한 이후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군 복무 중(1943년 즈음으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책을 열심히 읽어댔다(104)라고 적힌 대목이 보인다. 샐린저는 실제로 맨하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실제로도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나도 어렸을 때 똑같은 장소에서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혼자 생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무의식 중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레빈이 스케이트장에서 키티를 만나는 장면이 <호밀밭의 파수꾼>과 연결되었을 뿐이다.

  

   딸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지어주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관습은 배척당하고 비난받았다. 딸에게 완전한 자유를 줘야 한다는 영국의 관습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러시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중매쟁이를 고용한다는 러시아식 관습은 뭔가 상스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남들처럼 부인 자신도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시집을 가야 하고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는 아무도 몰랐다. 부인이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인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생각해봐요, 이제는 그 낡은 관십을 버려야 할 때예요. 결혼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지 부모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둬야 해요. 딸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으로서는 딸이 사내들을 가까이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결혼할 의사가 없는 사내나 혹은 남편감이 되지 못하는 사내를 연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95-6)

   결혼 적령기가 된 키티의 어머니인 부인의 입장에서 톨스토이가 써내려나간 이 대목을 보면 작가가 인식하는 당시 결혼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표현에 의하면 프랑스의 결혼은 과거 우리처럼 부모가 정해준 결혼이 대세였을 듯하고, 영국은 자유연애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반면 러시아의 결혼문화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배우자를 선택하기도하는(물론 자유연애와 부모의 주선에의한 결혼도 혼재해있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아울러 러시아의 문화는 특히나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교계 모임에서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쓰기도하고, 하인이 있는 자리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나 껄끄러운 이야기를 할 때 프랑스어를 쓰는 장면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의 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로 꼽은 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특정 한 사람이 주요 인물이 아니고 바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과 운명을 대립시키고 있다. 한 쪽은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을 하게되는 브론스키 백작(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이 있고, 그 대척점에 키티(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와 레빈(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이 있다. 따라서 이 두 커플이 조우하고 고백을 하는 시점이 비슷하게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레빈이 키티에게 처음 고백하고 청혼을 했을 때 처음에는 키티에게 거절당하게 되는데, 반면 브론스키와 안나는 기차역에서 서로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두 커플의 시작은 이후 이들이 맞게되는 운명과 반대로 레빈은 청혼을 거절당하는 쓰라림으로 시작하며, 브론스키는 무난하고 좋은 분위기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브론스키와 안나가 처음 만나는 곳이 기차역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처음 만난 날 기차역에서 한 남자가 열차에 치여 죽는 사건을 맞게 되는데, 안나가 불길한 징조예요.라고 하는 말은 아무 의미없이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기차역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불행을 잉태하는 장소로서 톨스토이가 사용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말년에 집을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영면한 곳도 어느 기차역이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기차역은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을 기억하라는 톨스토이 말년의 잠언집을 읽다보면 인생이 갖는 은유적 의미(지나가는 곳으로서의 인생)또한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에게는 기차역과 부합하는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여기서 잠깐 안나 카레니나와 사랑에 빠지는 인물인 브론스키 백작에대해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브론스키는 좋은 집안 배경 출신이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성장하는데, 초반에는 마마보이처럼 보이는 착한 아들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나온다. 브론스키는 유부녀인 안나 카레니나와 첫 눈에 반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열정적인 사랑을향해 나아가지만 사교계의 냉담한 시선과 사회의 관습에 고통을 받는다. 좋은 집안에 학식은 있지만 20세 연상인 남자(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카레닌)와 결혼 후 무덤덤한 결혼생활을 하던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 새로운 삶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촛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런 사건을 내 주변에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나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기는 쉬운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내게도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타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퍼부으며 복수와 응징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합리적 대안을 선택할 수 있을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 당시( 130여년 전)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의 분문율에 톨스토이는 소설에서 질문을 던지고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안나는 단순히 자신의 쾌락을 쫒는 여자일까? 그리고 어쩌면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쾌락을 구하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하는 의문을 던져볼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갖고있는 도덕적인 기준이야말로 모호하고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정답이란 없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문제는 생각해볼 일이다.  

 

"인생의 온갖 변화와 매력과 아름다움은 모두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는 거니까."
(91면)

"All the variety, all the charm, all the beauty of life are made up of light and shade." (펭귄 북스,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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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느릿 느릿 읽기 [1]

 

 

 

 

 

 

 

 

 

 

   앞으로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 적고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그 때 그 때 나에게 든 생각들을 옮겨 놓는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일기가 될 것 같다. 이 독서 일기는 박형규 교수가 번역한 문학 동네의 <안나 카레니나> 3부작에 기반하여 읽어 나갈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한 참 지난 내가 아마도 제작년 부터 문학 책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이름만 들어왔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게 되었다. 책의 뒤 편에 나온 유명 소설가들의 <안나 카레니나>에대한 짦막한 서평만이 아니더라도 가깝게는 <책은 도끼다>를 쓴 박웅현 선생이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을거에요.라고 한 언급이 이 책에 대해 더욱 흥미를 갖도록 했다. 번역본으로 해설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소설 지면으로 15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나는 어떻게 읽어 나갈 것인가가 처음 이 책 세 권을 앞에 두고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래도 태어나서 한 번은 남들이 고전이라고 하는 책을 읽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사명감에 읽기 시작한 것이 작년 12월 초 였는데, 느릿 느릿(그려나 꽤 부지런히) 읽어나간 지 2달 남짓만에 다 읽어내어 후련하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천천히 읽으며 딴 생각으로 멈추기도 하고 메모도 해 둔 부분을 서재에 기록해두고 싶다. 그렇게 해서 나만의 <안나 카레니나> 다시 읽기 프로젝트를 생각해낸 것이고, 이렇게 하면 또 한 번 인상깊었던 부분들, 삼천포로 빠졌던 기억들을 다시금 그러 모을 수 있을 것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전을 통해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소설은 성서에 나온 이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책의 뒷 표지에 언급된 것처럼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안나 카레니나>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연애소설의 하나라고 표현했는데, 이 성서의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문구이다. 지금 다시 책을 펼치고 눈에 들어온 이 문구를 다시 생각해보면 비극적인 소설의 결말과 관계된, 그리고 이 소설을 관통하는 삶과 신앙의 문제와 관련한 문구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당연히 작가가 아무런 의도 없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이 문구로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볼만한 꺼리가 생겼다.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소설의 첫 부분은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영역으로서 모든 소설가를 비롯한 작가들이 공을 들여야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1 11) 또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와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으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우리글로 표현한 이 문장은 나름 괜찮은 번역이라 생각했다. 특히 가족이라는 다소 좁게 느껴지는 표현보다 가정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복잡한 현대의 삶을 좀더 유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울러 고만고만나름나름의 리듬감과 대칭적인 구조는 역자가 상당히 고민했다고 느껴지는 점이다. 나는 러시아어를 모르니 영역으로 번역(Richard Pevear & Larissa Volokhonsky 번역한 펭귄 북스 참조)한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이 문장의 원래 의미가 어떻든 나는 이 문장이 참으로 많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도 느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누가 더 행복한가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행복해보이는 사람 누구든지 각자 나름의 고민을 안고 이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데에서 나만의 소심한 위로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과 빚이 청산된 내 집을 갖고있고, 행복한 가족이 있다면 그야말로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마저도 어김없이 말못할 아픔이나 고통, 고민거리는 늘 존재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견지한 인생의 참모습이다. 곧 고민의 개별적인 대상은 다르더라도 고민 자체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일게다. 그러므로 잘나가는 내 동창들의 모습에 배아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1 11), 오블론스키 집안은 모든 것이 어수선하게 들떠 있었다. 어수선함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말한 펭귄 북스에서 confusion이라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는데, 나중에 더욱 자세히 나타나겠지만, 톨스토이가 이 <안나 카레니나>를 쓸 당시에 고민하던 신앙과 이에 무관한 듯 살아가는 러시아 민중의 현실적인 삶과의 괴리감 내지는 혼란스러움을 더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형규 교수의 해설에도 잠깐 언급되지만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 중이던 당시에 톨스토이는 민중의 삶과 인생의 의의, 그리고 선의 의미에대한 입장이 확고히 정리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처럼 소설가로서의 인생에서 비교적 초기(<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이후에 쓴 대작이다.)에 집필한 소설이기에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소설 전반의 전개 방식이나 주인공의 혼돈스러운 의식의 전개에서 곳곳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안나 카레니나>의 첫 부분은 행복한 가정보다는 불행한 가정에대한 암시를 전달하며 소설의 주인공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 아르카디이치 오블론스키가 프랑스인 가정교사와 바람이 나서 험악해진 분위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잠깐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조금 소개하자면,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에서 34세로 나오는 스테판(애칭은 스티바)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 지역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나온다. 스테판의 부인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애칭은 돌리, 여기서 알렉산드로브나middle name으로 보인다.)는 쉬체르바쓰키 공작 집안의 세 째 딸 중 큰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다리야 쉬체르바쓰카야 (애칭은 다쉐니카)이다. 둘 째딸은 나탈리 알렉산드로브나이며 나중에 외교관과 결혼하여 외국생활을 주로 하며 소설 전반에 큰 역할을 하지 않으며, 결혼 후 리보바 부인으로 불린다. 그리고 막내 딸 카테리나 쉬체르바쓰카야(애칭-키티, 레빈과 결혼 후 카테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레비나 부인으로 불린다.)는 위에서 외도 사건으로 곤혹을 치르는 스테판의 처제인 셈이다. 소설의 시작 당시에는 18세의 앳된 숙녀로 등장하며, 가장 중요한 등장 인물인 레빈과 결혼하는 아가씨이다. 레빈은 원래의 이름이 콘스탄틴 드리트리치 레빈으로서 키티와 결혼하게 되는데, 키티의 큰 언니 돌리의 남편인 스테판과 오랜 친구이다(스테판은 레빈을 코스티야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레빈은 대학시절 자연과학을 공부한 과학도로서 시골에서 살며 농사를 지으며 독서와 농업에 관한 저술작업도 하는 젊은이 이지만 사회적으로 아무런 경력이나 지위를 얻는데 무관심하다. 소설의 시작에서 32세의 청년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소설에는 복잡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느릿 느릿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단 러시아 이름들이 수도 없이 나오는 이 장편 소설에서 인물들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앞으로 조금씩 소개를 하며 기회가 되면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레빈은 키티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으며 청혼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던 레빈은 모스크바의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갖고있던 쉬체르바쓰키 공작 집안의 막내 딸 키티에게 다가가려고 하지만 번번이 자신감을 잃고 머뭇거리는 대목이 나온다.(1 53)

   상대방 부모의 눈으로 볼 때 자기는 아름다운 키티에게 도저히 어울리지 않으며 한참 처지는 배필이라는 것과, 키티 또한 그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에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서른두 살인 그와 동년배인 누구는 벌써 대령이나 시종무관이 되었는가 하면 누구는 교수, 누구는 은행장이나 철도청장이나 혹은 오블론스키처럼 관청장이 되어 있는데 그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경력과 지위를 갖지 않은 사내였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남의 눈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암소들을 치고 도요새를 쏘며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지주, 말하자면 무능하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소심하고 전도도 없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이 대목은 키티에게 청혼을 주저하는 레빈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단행본이 출간된 해가 1878년이므로 무려 130년도 전에 레빈이라는 청년이 고만하던 것들을 나 자신도 고민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묘한 안도감(?)마저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공자의 말을 제자들이 정리한 <논어>에 등장하는 불혹이라는 나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타인의 시선을 젊을 때처럼 의식은 하되 이전보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소설의 첫 문장처럼 고민의 내용은 각자가 다르겠지만 누구나가 다 고만고만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듯이 이런 보편성을 깨닫게되면 레빈의 고민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겠지만, 역시 레빈은 32세의 청년이었다. 32세라는 나이는 잘 나가는 동료와 친구가 한다리 건너 누구든 있을 법한 세상 살이에서 여전히 자신의 결핍이 더 크게 느껴지는 나이일 것이다. 그리고 특히나 타인에 대한 동질감이 안정감을 주고 큰 역할을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공감이 많이 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레빈은 자연과학을 전공한사람 답게 당시에 상당히 논쟁적이었을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소설을 통해 레빈의 사유가 전개하는 양상과 주석을 통해 톨스토이는 인생의 문제나 마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유물론적인 사고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극히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보였을 진화론에 대해서도 레빈을 통해 잠깐 잠깐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동물로서의 인류의 기원(1 56)에대한 언급은 나 스스로 대학시절 생태학 개론 수업을 들은 후 갖게된 인간관이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도 물론 생각해보겠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인 레빈이 자연과학을 전공했다는 설정 또한 톨스토이의 치밀한 의도가 엿보이는 것 같다. 이 소설이 물론 몇 젊은이의 연애사건을 다루기는 했지만, 1800년대 중 후반 사회 변혁이 태동하던 러시아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할 것 같다. 따라서 연애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 삶의 현실, 그리고 농노제해방 등의 사회상이 폭넓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도 내가 감탄하게 되는 점이다. 특히 톨스토이는 신앙과 무신앙의 문제, 삶의 의미를 찾는 문제(삶과 죽음), 공적 신앙과 개인적 쾌락의 추구의 문제 등을 고민하는 대목을 등장 인물을 통해 표면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또 다른 작가의 일기장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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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벤야민, 세기의 가문> 발터 벤야민과 20세기 독일의 초상

우베-카르텐 헤예 지음 / 박현용 옮김 / 책세상

- 내가 갖고 있는 벤야민에 대한 이미지는 물론 책을 통한 접한 아우라가 될 것 같다. 독일에서 자란 유대인이자 평생 직장에 다녀본 적이 없는 진정한 자유인이면서, 독일보다 프랑스의 파리를 너무나 사랑한 지식인으로 각인되어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두꺼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엿볼 수 있듯 여러 학문 분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벤야민의 사유는 무엇보다도 도시의 면밀한 산책자로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문학비평가 류신이 소설가 구보씨와 발터 벤야민을 끊임없이 불러내고 발터 벤야민을 현재의 서울이란 배경에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의 사유방식이 당대의 사람들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사상이 현재 우리의 삶에 잇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고학력 자발적 실업자의 모범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 고미숙 선생이 <생각수업>에서 백수가 우리의 미래다.라고 외친 것의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 아닌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고미숙 선생의 이 발언은 냉소적인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자는, 혹은 우리는 그래야하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호소일지도 모르겠다.

   나치가 봉쇄해버린 국경 앞에서 자살해버린 이 벤야민이란 지식인, 파리의 거리를 끊임없이 산책하며 파리라는 도시를 사랑하고 관찰하며 사유했던 자유인 발터 벤야민을 키워냈던 가문은 과연 어떠했을까.궁금하다. 벤야민의 삶과 그의 가문을 추적해보면서 아울러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상을 좀더 이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2.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 한길그레이트북스 141  

에르빈 파노프스키 지음 / 김율 옮김 / 한길사  

- 개인적으로 에르빈 파노프스키하면 떠오르는 책은 인문주의 예술가 알프레히트 뒤러에 관한 책 <뒤러>이다. 이 책도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뒤러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이반 일리치의 저작 뿐 아니라 이광주 교수의 저작 등 미술과 관련한 여러 주제에 자주 등장하는 판화가이다. 특히 해골이 있는 죽음의 기사멜랑콜리아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판화가 수많은 미술관련 저작에 등장하는 단골 판화이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의 꽃이라 부르는 미술사학 분야의 교수를 지낸 파노프스키가 중세를 배경으로 한 고딕 건축과 스콜라철학을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3. <스페이스 크로니클> 우주 탐험, 그 여정과 미래  

닐 디그래스 타이슨 지음 / 에이비스 랭 엮음 / 박병철 옮김 / 부키

원제 Space Chronicles: Facing the Ultimate Frontier (2012) 

- 이 책의 저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천체 물리학자로서 백인 과학자가 주목을 많이 받아온 과학계에서 우뚝 서있는 흑인 과학자로서, 그리고 과거 칼 세이건이 자신의 저작을 바탕으로 한 과학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그동안의 연구 업적을 추가하여 다시 제작한 2014년 작 <코스모스>의 해설자로 잘 알려져있다. 무엇보다도 코메디언에 버금가는 그의 풍부한 표정과 유머는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과학 특히 천체 물리 분야, 우주에 관한 여행에 사람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학자인 것 같다. 대중에게 우주에 관해 더욱 알리고 다가가고 싶은 그의 노력으로 이 책은 나왔을 것이다. 이 책은 <코스모스>와는 조금 다르게 우주 탐험에 관한 전반을 보다 집중적으로 소개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4.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한나 아렌트 지음 /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나에게 한나 아렌트하면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저작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악의 평범성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현대인들에게 회자되는 데에는 분명 아렌트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도 그의 책 <도덕적 불감증>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치 하의 아이히만은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이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책임감있고 명민한 공무원으로서 보여준 아이히만의 행보는 이미 100년도 전에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보여주는 관료제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른다. 아렌트의 이 책은 정치 이론가로서 아렌트가 생전에 했던 인터뷰 몇 개를 묶은 것으로, 글로 쓴 그녀의 책보다 좀더 느슨할 수 있겠지만 아렌트의 핵심적인 사상을 바로 앞에서 듣는 기회가 될 것 같다.

 

 

 

 

 

 

 

 

 

 

 

 

 

5. <마네의 회화>

마리본 세종 엮음 / 미셸 푸코 외 8명 지음 / 오트르망.심세광.전혜리 옮김 / 그린비

- 이 책은 9명의 미학과 철학 분야의 학자들이 마네의 그림 13점을 주제로 마네의 시각에서 이 그림들을 논한다고 한다. 미학-철학자들이 잘 알려진 마네의 그림을 분석한다면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푸코가 마네에 관한 강연 기록을 시작으로 8명의 철학자들이 푸코의 시각에서 마네의 그림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를 살펴본다면 마네의 그림에대한 이해 뿐 아니라 푸코의 일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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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권정생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9-10)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이오덕 선생님

다녀가신 후, 별고 없으셨는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었지만, 역시 만나 뵙고 난 다음, 더욱 그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우리 것을 가지신 분이라 한층 미더워집니다.

어저께는 안동 김성영 씨를 만나, 선생님 얘기를 입이 마르도록 나누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무엇이나 아껴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행복이란, 외모로 판단되는 값싼 것이 아닐 겝니다.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마음이 제게 많이 통하고 있다고 당돌하나마 말해 봅니다. 착하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죠.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고 싶은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가슴으로 자꾸만 모아들이이는 아픔이란, 선생님은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체험하지 않고, 겪어 보지 않고는 절대 모르는 설움을 무엇 때문에 외면하면서 설익은 재롱만으로 문학을 한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안동에 오시는 기회가 있으시거든 종종 들러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는 며칠 더 기다려 주세요. 그동안 사정으로 아직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추위에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뵈올 때까지 안녕히!

1973 1 30

권정생 드림

: 1973 1, 권정생 선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나서 이오덕 선생이 직접 권정생 선생을 방문합니다. 당시 혼자 살던 권정생 선생은 서른일곱, 이오덕 선생은 마흔 아홉. 띠동갑(12년차) 두 남자는 이렇게 만난 이후, 권정생 선생이 보낸 편지 입니다. 이 두 분은 이후 30년 가까운 우정을 지속하게 됩니다. 한 평생 이런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특히 12살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이오덕 선생은 편지에서도 언제나 권정생 선생을 존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출판하도록 여러 모로 배려를 하는 이오덕 선생의 인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두 분이 나눴을 문학에 대한 얘기도 조금 엿볼 수 있는데, 자신의 체험을 통한 솔직한 문학, 솔직한 글쓰기에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글이 표피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면 개인의 체험이 녹아나야한다는 것.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자신을 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어느 순간 부터 어렵다고 느낄 때, 내가 이전에 끄적거린 글들을 다시 보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오네요. 이럴 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소탈한 마음이 보이는 이러한 글들이 적힌 책을 가만히 넘겨보게 됩니다. 30년 가까운 남자들의 우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흔적들을 보면서 다시금 길을 잃지 않으리라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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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도덕적 불감증>

(Moral Blindness: The Loss of Sensitivity in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레오니다스 돈스키스(Leonidas Donskis)/최호영 옮김

 

 

 

 

이 책의 폭넓은 주제에대해 잘 소화했는지 의구심이 든다.  주제넘게 서평이라고 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내 나름의 수준에서 받은 감상을 적어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요즘 너무나 많이 인용되고 있어 관심이 가는 사회학자이다. 액체 근대, 유동 근대라는 용어로 고체의 특성처럼 고정화되어있지 않고,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안정성이 지배적인 현대 사회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는 학자로 잘 알려져있다. 그는 동유럽(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이며 마르크스 주의의 이론가로 한 때 활동했다고 하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폴란드 공산당의 반유대 운동으로 인하여 (그것도 세계 곳곳에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1968년이라니!) 교수직을 잃고 국적마저 박탈당한 체 고국을 떠나야했다고 한다. 일종의 현대적인 정치적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그의 삶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평생 자신의 정체성과 마주하고 이방인으로서 사회와 세계의 불합리를 몸으로 부대끼며 직시해온 서경식 교수의 목소리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인상일까. 아울러 이 책은 돈스키스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들은 과거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언급하다가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있는 지금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동유럽 출신의 두 학자가 이나 정치 뿐만 아니라 대학의 의미와 인식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정치 경제적 질서에서 영향을 받는 인간 조건의 변화 등 폭넓은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게 대담하고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체계적인 구조를 갖고 기획된 논리적 서술의 경우보다 내용의 집중도가 다소 낮아보이기도 하다. 반면 이들이 자유롭게 언급하는 주제에 대한 배경적인 이해가 좀 더 있어야 이해될만한 사항들이 곳곳에 보였다.   

   책의 곳곳에서는 개인주의, 원자화, 유대의 파편화와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아울러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의 새로운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는가하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바로 원자화, 개인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원자화되는 프레카리아트) 인간은 인간다운 존재로서 인정 받지 못하고, 물건과 같이 대상화되어 결국은 상품처럼 소비의 대상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점점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감을 경고하고 있다. 마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오히려 비인간적 상항에 무뎌져가는 것처럼. 나는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했던 빅터 프랭클 박사의 기록들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그리고 있는 새롭게 변화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프랭클 박사의 시대에는 보다 공포와 악의 대상이 우리의 눈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지만, 현대 사회에는 그 공포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의 모습이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가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페이스 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은 우리의 도덕적 불감증무엇보다 신속하고 강렬하게 이해하고 느낄 것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자초했거나,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도덕적 불감증(26)이라고 이야기한다. 얼마전 충격 속에서 보게되었던 빗자루로 교사의 권위를 농락하던 학생들에 대한 영상이 적나라하게 우리 시대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책의 두 학자가 이야기하는 폭넓은 화제거리는 바로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는데, 이는 인간의 조건이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의 존엄이 실추되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지 우려스러웠다. 빗자루 영상을 보며 받은 충격은 이 영상을 보며 이 사태는 진보 교육감이 초래한 교권 추락이라는 취지의 공격적인 발언을 하던 앵커의 모습을 보며 나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도덕적 불감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이 책을 빠르게 읽지는 못했다. 우선적으로 나의 지식과 배경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몸을 담고 살아가며 앞으로 평생 살아가야하는 우리 사회를 너무나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덮고 다시 생각해보고 놀라고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미 100년도 전에 비인간적인 관료의 행태를 지적하고 과료제를 비판했던 톨스토이의 <부활>이 왜 고전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기도 한다. 더운 여름에 수감자를 이송중인 교도관과 관료들을 이야기하며 규정과 의무만 알고 이를 따르는 비인간적 행태들을 개탄했을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상의 악임을 간파한 듯하다. 평범한 악으로서 비인간화된 관료의 모습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그리고 안타까운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조우하게된다.

   한병철 교수가 <심리정치>에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하고, 개인들의 욕망이 분출되는 디지철 고해소인 페이스북은 이 노교수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DIY복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듯이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악은 피해자들이 인지도 못한 체 자발적으로 자신을 폭로하고 스스로를 소비의 주체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손수 만드는 악마이기에 DIY라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생활의 죽음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세대가 될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들은 사생활이라는 것, 프라이버시라는 것에대해 분명히 우리 세대와는 다른 인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리정치>에서도 나타나듯 연결망에 한 시도 쉬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나의 모든 클릭이나 터치는 기록되어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있다. 이 데이터 베이스는 집단의 성향을 파악하거나 나만의 맞춤 소비를 위해 언제나 가공되고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보 제공 서약에 동의하고 개성이라는 착각 속에 데어터 베이스화된 보이지 않는 틀 속에 우리를 최적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비관적인가? 하지만 비관적이라는 것은 내 삶을 진실로 마주대하고 직시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내가 비관적이라는 사실을 긍정한다.

   아울러 내가 새롭게 깨닫게된 점은 돈스키스가 유럽에서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언급한 대목에서였다. 정치경제적으로 무능함이 드러나게되면 처벌을 받게 되는 사회. 곧 우리에게는 실패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내가 상당히 공감하게 된 대목이었다. 최근에 일흔이 다되도록 아직도 현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느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뻘 되는 분이었는데, 이분과 나눈 이야기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내가 읽은 책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분은 우리 때는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일을 손수시도해보고 실패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어. 지금처럼 해보지도 않고 실패도 않하지는 않았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지금 젊은 세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용인하지 않게 된 사회에 대한 개탄이었다. 요즘 직장에서는 성과주의 도입으로 인해 극히 소수만 실제로 연봉을 많이 받지만 나머지는 도태되고 있다. 작은 실수만 하여도 모든 것은 성과에 기록되어 반영되기에, 젊은 세대는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전이나 어려운 문제에 도전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사회경제구조 속에서 누가 젊은 세대들을 패기없는 젊은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과연 실패를 두려워하는 젊은 이들을 안락함 속에서 자란 게으른 세대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다시 언급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뀌뚫는 듯한 지적들이 많이 나오는데, 내가 공감을 많이 하게 되는 부분이 대학을 주제로한 대목이었다. 인문학이 붐을 이루고 있다는 우리 사회에서 정말로 인문학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면 왜 대학에서 인문학을 대표하는 문철 관련 학과가 폐지되거나 통합되는 것일까? 오히려 한국 사회의 대학은 인문학을 홀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 경영학과 학생의 정원을 1000명으로 늘리는 시대가 되었다. 학생들마져 대학이라는 경쟁 시장에서 소비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현실이 도래했다. 대학에서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글쓰기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력서를 잘쓰기위한 이른바 꿀팁을 알려주는 강좌가 인기라고 한다. 그나마 인기가 없는 것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작문 수업은 이미 수 십년간 존재하고 있는데 글쓰기 강좌가 개개 학생의 생존 기술에 요긴하다는 인식이 매우 낯설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대학의 문제에관하여 논하는 바우만도 우리가 맞고 있는 대학의 위기는 교수가 손수 가져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만큼 교수들이 대학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존재인 반면, 이들은 이미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너무나 잘 학습하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바우만은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려와 비슷한 지적을 동유럽, 중유럽 대학이 처한 상황에서도 언급한다. 곧 중유럽, 동유럽 대학이 마가렛 대처(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만의 이론을 영국에 도입했다고 알려진)시기에 대학과 교육을 상품화 시킨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흉내내고 있다는 점을 역시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러한 상황은 안타깝지만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는 확신이 든다.  

   자유시장 경쟁의 구조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담론이 불평등이라 할 수 있겠다. 장하성 교수의 <왜 분노해야하는가>에서 책 전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불평등은 구조적인 문제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저축하는 부분보다 대기업의 저축이 많다는 것, 그리고 대기업들이 설비 및 사람을 위한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임금의 불평등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이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 양상을 신자유경제시대의 불안정한 무산계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헨리 포드, 록펠러의 시대만 하더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상호 의존적이어야만 하는 타협적 생활 양식이 존재하여 자본이 감당할 수 있는 불평등의 한계가 존재했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요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급속한 중산계급의 붕괴로 프레카리아트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이 프레카리아트는 99%라고 표현하듯, 모든 경제적 계급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해고된 이들 뿐만 아니라 몇 년 후 명예 퇴직이 예상되는 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좋은 직장을 얻으려 열을 올리는 대학생들 마져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복지 비용 만으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은 바우만 교수나 장하성 교수나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무관심은 비난이나 증오보다도 더욱 심각한 증상이다.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파편화된 개개인은 점점 무감각해져간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있던 이들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져가는 모습이 마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증상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보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나는 소위 X세대에 속하지만 이 책에서 바우만은 80년대 중엽부터 90년대 중엽 사이에 태어난 Y세대에 대해 언급한다.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상사에게 더 반항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더 불안정한 세대로서 Y세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데, Y세대가 겪는 현재의 문제들이 과연 그 이후의 세대들에서 완화될 수 있을 것인가 묻는다면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마도 이들이 액체 근대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인터넷에 유동적으로 연결되어있는 최초의 세대이기에 예를 들지 않았을까. 불안정한 사회, 불안 속에 살게되는 세대들이 이른바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시대에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이 책은 우리의 감수성이 변화됨을 가차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길 바라지 않지만 '무감각'해진 인류가 맞게될 우리 미래의 모습같다. 아울러 이 책은 단순히 저자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드러내는 담론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책이라는 점에서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덮은 후

   우선 이 책은 역자 후기가 없다! 나는 모든 번역서에 역자 후기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는 이 책의 번역 작업에 애착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역자는 원전의 저자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겸손의 의도로 역자 후기를 생략했던 것일까? 또는 역자는 번역된 텍스트로만 말한다라는 자신감의 표현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역자 후기가 없는 책은 구입하지 않는다. 내 주관적인 인상으로는 번역작업을 완성하는 1%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에 그렇다.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지만 번역가로도 많은 문학을 번역했던 김화영 교수처럼 멋지고 유려한 글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번역기계가 아닌 사람이 한 작업의 흔적으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가장 깊이 읽고,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으며, 이 책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독자로서 궁금하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번역자의 후기가 없다는 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번역은 반역이다, 번역은 새로운 글쓰기다라는 잘 알려진 표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번역이라는 것은 지난한 과정이며 번역자는 분명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한편 우리말 문장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데, 번역의 어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역된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마저 든다. 번역된 문장들만 보아도 영어 문장의 구조가 연상되는 듯하다. 아울러 1962년 생인 돈스키스가 37년의 나이차이가 있는 바우만(1925년 생)을 부를 때 자네라고 옮기는 것은 다소 생경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바우만의 문장은 호흡이 길고 많은 생각들이 직관적으로 침입해있는 것도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은 번역자가 독자를 위해 의미상 문장을 분리하여 문장의 호흡을 조절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램을 적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이다." (51면)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다." (52면)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두어라."
- 루벵 카톨릭 대학 역사학 교수 미셸 뒤물랭의 말 (59면)

: 마치 우리의 국정 교과서 파동 문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 같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부분이다.

"유혹의 면역력을 키우는 한 가지 중요한 수단"
-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역사적 기억` (61면)

: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의도된 왜곡으로 인해 우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68면)

: 우리는 기억해두어야하고 기억해내려고 노력해야한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한다.

"악은 오히려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69면)

"소셜 웹사이트들은 ... 모든 독재자와 그들의 첩보기관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돈과도 같은 정말로 뜻밖의 선물이며..." (105면)

"도끼는 나무를 찍는데 사용될 수도, 머리를 자르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선택은 도끼의 몫이 아니라 도끼를 손에 쥔 사람들의 몫이다." (108면)

"오늘날 유럽에서 우리는 경제적 무능에 대한 법적 책임이라는 개념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정치 경제적 무능도 처벌을 면할 수 없다." (128면)

"가장 심각한 것은 중유럽과 동유럽이 마가렛 대처 시대에 시작된 대학과 교육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는 영국식 대학 경영 방식을 열심히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불균형과 비대칭을 제거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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