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낯선 생각을 권하는 가장 따뜻한 사진

강윤중 지음/서해문집 

 

-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란 무엇일까? 아마도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어떤 윤곽과 색채를 지닌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넓은 의미로 각자 사회 구성원의 내부에 사람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일종의 프레임이라 볼 수도 있겠다. 좀더 스스럼없이 표현한다면 일종의 편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편견없는 사람은 없다. 톨스토이는 편견의 근원이 거짓에 있다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유혹과 편견과 죄가 없다면 삶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나아가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한바 있다. 하지만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우리의 편견을 확인하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노력의 여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여기 오랜기간 신문기자생활을 했다는 저자가 우리의 편견을 일깨울만한 사진들을 모았다. 바쁜 일상가운데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존재들을 저자는 좀더 유심히 들여다보고 우리에게도 함께하기를 초대하는 듯하다. 카메라는 우리의 편견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도록 해주는 도구로서 우리의 편견을 확인할 수 있게해준다. 외부를 향한 렌즈는 결국 우리 각자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해주고 이를 우리 밖으로 꺼내도록 해주는 통로인 셈이다. 사진 속의 아름다운 대상도 좋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며 관심도서로 선택해보았다.

 

 

 

 

 

 

 

 

 

 

 

 

 

 

 

2.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안천 옮김/자음과모음

 

- 드디어 나오고야 말았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로 국내에 상당한 관심음 모았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의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책을 읽는 것의 혁명성을 신선한 문체로 전달했던 사사키 아타루의 묵직한 야심작 <야전과 영원>을 줄곧 기다렸다. 개인적으로 아직 푸코와 라캉도 익숙한 사상가는 아니지만 올 겨울 천천히 읽어나가고 싶은 책으로 선정해두었다. 문체의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라고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대해 평했던 장석주 시인의 언급처럼 이번에 나온 이 책에 대한 기대가 크다.    

 

 

 

 

 

 

 

 

 

 

 

 

 

 

 

3. <판타스틱 과학 책장> - 과학책을 읽고, 쓰고, 번역하는 고수들의

이한음, 조진호, 이정모, 이명현 지음/북바이북

 

- 이 책의 목차를 보니 네 개의 장으로 되어있고, 네 명의 저자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각각 한 개의 장을 맡아 과학책을 소개하고 있다. 목차만봐도 이건 읽어야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의 저자 모두 자연과학을 전공한 과학자들인데 이들은 외국의 과학서를 국내에 번역하여 소개하거나 강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과학을 알리는데 노력해온 저자들이다. 책 제목은 그리 마음에들지는 않으나 많은 이들에게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일것 같다. 과학분야 지망생에게는 모델이 되는 과학자들을 발견할 수 있고, 과학자들에게는 자신의 전공분야 이외의 분야에대해 관심을 넓힐 수 있는 안내서가 되기도하고 과학자로서의 글쓰기에대해 살펴볼 볼 수 있는 책이되겠다. 한편 일반인들은 관심을 가진 부분의 책을 찾아 이 분야에 입문을 하거나 다양한 과학분야의 책을 소개하고 있기에 현재 과학분야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를 조망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4. <그림자 노동 Shadow Work>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노승영 옮김/사월의책

 

- 카톨릭 신부이자 사상가, 역사가이기도 한 이반 일리치의 절판된 대표작 <그림자 노동>이 사월의 책에서 이반 일리치의 전집 기획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덕분(?)으로 독립적인 사유방식과 거침없는 질문을 하기로 유명한 이반 일리치의 대표저서를 볼 수 있게되어 반갑다. 과거에 자신의 저서에도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을 던지며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이반 일리치는 일종의 소책자 운동을 통하여 자신의 책에 있는 지식의 일방적인 흡수자가 되기보다는 질문과 토론하기를 바랬다. 독립적인 사유방식으로 진보와 보수, 종교계,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거센 비판을 받기도하고, 심지어 총격과 몽둥이 세례를 받기도 했던 이반 일리치는 살아남아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의 사상과 질문이 신자유주의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해가는 현대인에게 갖는 의미는 남다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남다른 것에서 나아가 우리는 한 번쯤 이반 일리치가 던지는 화두를 짚고 넘어가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점에서 이반 일리치의 선집이 다시 출간 계획에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나의 필독서 리스트에 들어가는 책이며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책이다.

 

 

 

 

 

 

 

 

 

 

 

 

 

 

 

5. <파열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이경일 옮김/까치

 

- 20세기 역사학의 거목이라고 불리는 에릭 홉스봄의 유작이라 한다. 20세기의 문화와 사회라는 부제가 붙어있듯이, 저자가 몸담고 살았던 20세기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역사가의 안목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홉스봄은 자서전 <미완의 시대>를 비롯하여 상당한 양의 역사서, 문화 및 자본주의 비판, 재즈와 같은 대중문화에대한 비평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역사학자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본격적으로 홉스봄의 저작을 접해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유작인 <파열의 시대>를 시작으로 홉스봄의 발자취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  

 

 

 

 

 

 

 

 

 

 

 

 

 

 

 

 

6. <대한민국은 왜?> - 1945~2015

김동춘 지음/사계절

 

- 식민지 역사로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구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조망한다. 특히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 이러한 사회구조를 갖추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라고 칭하는 지배적인 집단이 그들의 왕국을 만들어온 기원을 밝히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에 분노하여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아예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알아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은 한국인임에도 잘 모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왜?>는 이 피카소의 그림을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기 원하지 않는 지배권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게해줄 것이다.

   이러한 역사책이 다소 부담된다면 신천학살을 배경으로한 황석영 작가의 <손님>과 같은 작품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곧 신천학살이 공산주의 집단과 기독교에 기반한 반공 세력사이에 얽힌 복수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던 비극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되었듯이, 김동춘 교수의 <대한민국은 왜?>는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이 된 이들의 기원이 바로 기독교와 반공주의에 경도된 세력임을 깨닫게해준다.  

(이 책은 10월 말에 출간되긴 했지만 지난달 관심도서 선정을 하지 못한 관계로 한 권 포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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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 지음 (42)

고통과 실패에서 배우다

 

 

인간에게는 고통과 병이 필요하다.

인간은 고통을 이해하면서

육체가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과 실패가 없다면 기쁨, 행복, 성공을

무엇과 비교하겠는가.

 

인간은 작은 문제들로 균형을 잃는다.

반대로 커다란 문제는

인간을 영혼의 삶으로 인도한다.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톨스토이가 말년에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명상을 하며 써낸 모음집이라고 한다. 항생제가 없던 톨스토이의 시대에 그 자신도 폐렴과 장티푸스로 몇 달 간 사경을 헤맨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고통과 병이 필요하다’는 말은 가족 중에 누군가 큰 병을 겪고 떠나 보낸 사람이나 암과 같은 큰 병을 선고 받은 사람의 가족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온다. 내 친구, 친구의 부모님 중에 암으로 고통받고 우리를 떠난 사람이 있기에 톨스토이의 말에 수긍은 하지만 내 가슴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을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몇 달이라도 지내본 사람들은 무상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아프구나 하는 사실을 환기할 때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우리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이 사소한 것들에 우리 삶의 여정이 잠시 빗나가거나 흔들리기도한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알았음을 알게된다면, 사소한 문제들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로 영혼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할 것이다. 친구의 부모님이 큰 병을 진단 받은 날,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쿵’하는 충격을 받았다. 거대한 자연불변의 법칙 앞에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짐을 느낀다. 아울러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라고 썼던 나짐 히크메트의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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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송태욱 옮김, 샨티, 2003, 118-119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114)

월요일 아침

  월요일 아침, 새 책을 펼친다. 통근 전철 안이다. 새 책은 월요일 아침에 가장 잘 어울린다. 책 속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고 새로운 풍경이 있다. 지금까지 몰랐던 관계성의 세계가 있다. 그 한 권의 책은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도 읽고, 집에 돌아가 내 방 안에서도 읽고, 그렇게 해서 주말까지는 다 읽는다. 다시 말해 내 독서는 주 단위이다. 일주일에 한 권, 따라서 한 달에 네다섯 권 정도를 읽게 된다.

   특별히 일주일에 한 권 읽기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하루에 세 번 식사하는 것이 딱 정해진 일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시간이 돌고 돌아 아침에서 낮으로, 다시 어스름한 저녁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한 권의 책을 새로운 주가 시작될 때 읽기 시작하여 요일이 돌아 한 주가 끝나는 지점에 다 읽는 것이 내 생활에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읽는 양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표준적인 척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독가들의 독서량에서 보면 일주일에 한 권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터이다. 스기우라 민페이는 나이가 들고 병 등으로 체력이 쇠약해져서, 결국 한 달에 1만쪽, 즉 권수로 해서 평균 34-35권 내지 38-39을 단념하고 새로이 한 달에 열 권 이상이라는 할당량을 정했다. 이제 곧 일흔 살이 되어갈 무렵의 일이었다. 이것과 비교해 보아도 내 분량은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일주일에 몇 권, 한 달에 몇 권, 일 년에 몇 권 읽으면 표준이고 그 이상은 다독, 그 이하는 과독(寡讀)에 해당한다는 말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생활에 고유한 시간의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다. 생활의 시간 사이클에 의해 책을 읽는 방법은 저절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생활보다 먼저 독서가 있고 생활이 그 뒤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엔도 류키치는 생활의 어떤 일보다 독서를 우선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엔도 류키치는 자신의 저서인 <독서법>밤에서 아침으로 걸치자라고 쓰고 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자려고 할 때는 베개 위에 책을 놓고서 그 펼친 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 좋다. 전등을 끄고 책을 덮었다면 그 책에 대해 생각하자. 이내 졸음이 와 잠이 들고 말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곧바로 그 책을 다시 펼쳐 읽자. 그것이 밤에서 아침으로 걸치자의 의미이다.

 

 

 

 

나는 여기에 발췌한 부분에서 새 책은 월요일 아침에 가장 잘 어울린다.라는 대목이 너무나 맘에 들었다. 새 책을 들고 첫 장을 읽어 나갈 때의 설레임은 발걸음이 무거운 월요일의 출근길에 새로운 활력을 준다. 새 책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큰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는 박민규 작가의 유머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유머(진지하고 점잖아 보이는 글 속에 반전이 있는 유머)가 담긴 문장을 만나면 출근길이 더 즐겁다. 나 혼자 킥킥 거리며 가기도 한다. 어려운 책보다도 바로 이런 글들을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이 월요일 아침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가 아닐까.

   나는 작년에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지하철에서 책을 많이 보게 된 것 같다. 버스 안은 대개 불빛이 어둡고, 이리저리 많이 흔들리므로 버스 안에서 무언가를 읽으면 멀미가 난다. 하지만 지하철 안은 밝고, 적어도 나에게는 책을 읽을 때 멀미가 나지 않아 나에게 잠깐 짬을 내어 책을 읽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버스를 타는 것보다는 (적어도 혼자 다닐 때에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한다. 그리하여 지하철에서 주로 책읽기를 하여 작년에 80권정도의 책을 읽은 것 같다. 물론 간단한 그림책, 사진책을 제외해도 나름 진지한 주제의 책들을 50권은 넘게 읽은 셈이다. 작년에는 태어나서 처음 1년에 20권 넘게 읽은 셈이다! 야마무라 오사무도 장석주 시인도 지적하듯이 자투리시간을 잘만 활용해도 일년에 50권은 읽을 수 있다는 말은 내 경험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읽은 책의 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젊은 시절부터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해온 장석주 시인처럼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매일 2~3권의 책을 읽을 재간은 없다. 나에게 맞는 독서 스타일은 그저 꾸준하게 읽고, 의미를 곱씹어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이 될 것이다. 책에 메모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 주로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지와 주목할 부분을 간단히 메모하거나, 그 때 문든 떠오른 생각들을 잊지않기위해 메모한다. 그 외에는 주욱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혹은 책의 성격에따라 지하철에서 집중이 안되거나 이해가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경우에는 잠시 책을 덮고, 눈을 쉬거나 이해가 잘 안되었던 부분에대해 생각을 하곤한다.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하지 않은 경우, 지하철에서는 옆 사람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는 줄 알고 나를 처다보는 경우가 많아 민망하다. 그러면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어떤 광고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딴 생각을 하곤 한다.

   참고로 나는 일본 지식인들의 어떤 방법, 기술들을 얘기하는 부분은 좀더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읽는다. 이들은 각자 개인이 선택하여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여기에 오래동안 천착해왔기때문에 나에게 잘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이들이 권하는 어떤 방법(혹은 여기에 나오는 독서술마져도)이 나에게 적절하지 않은이상, 나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의 편견인지도 모르나, 일본 지식인들의 경우 나에게 적용할만한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좀더 비판적으로 이들의 조언을 살펴보되 나에게 맞는 방법을 따로 찾아보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읽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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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 - 「향연」,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국가」, 「파이드로스」에서 고전 필사다이어리-북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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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심코 스쳐듯 읽었던 고전을 필사함으로써 하나의 텍스트를 여러 번 읽게된다. 한 자 한 자 따박따박 따라가며 내 몸에 새기듯 종이에 적으며 읽으니 텍스트가 또 다시 낯설게 느껴진다. 내 손 끝과 내 눈의 무디어진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이는 다시 다른 깨달음과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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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

레프 톨스토이 지음

'손님' (23면)

 

 

우리가 가진 생각은 손님과 같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손님을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나쁜 생각을 몰아내고

좋은 생각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힘은 생각에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많은 악이 사라질 것이다.

 

감정은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난다.

하지만 생각은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이

모든 거의 핵심이다.

 

 

 

- 여기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생각의 힘감정이라는 것. 우선 우리의 힘이 생각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많은 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 말에서 한나 아렌트가 기록하고 평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떠올린다. 히틀러 밑에서 그의 명령을 충직하게 실행에 옮긴 아이히만은 결국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주범이 되었다. 아렌트는 평범한 악의 실체인 아이히만에게 생각하지않은 죄를 묻는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조건, 사물, 지식들은 가치 중립적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우리가 소망하는 인문적 교양이라는 것도 인간이라는 가치가 우선적으로 놓여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지능적이고 교활환 착취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우선하여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한편 감정이라는 것은 외부의 상황이나 자극에대하여 우리의 신체가 반응하는 것처럼 때에따라서는 나의 의지감정을 분리시켜 바라볼 줄 알아야할 것 같다. 곧 나의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감정, 예컨대 분노, 공포, 우울함의 감정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므로 나 스스로 이를 바라보고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육체의 자유가 아니더라도 독립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은 익숙한 대상에 대해, 기본의 권위에 의문을 던져보는 일이 자유로운 인간으로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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