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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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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My Age of Anxiety: Fear, Hope, Dread, and the Search for Peace of Mind)

스콧 스토셀(Scott Stossel)/홍한별 옮김

 

 

     오늘 신문을 보니 방송인 A, 불안장애로 방송활동을 중단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기사는 방송인 A씨가 불안장애를 오래 앓아왔고 최근 심해져 방송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에 전념할 것이라고 전했다. 자신의 성공이 지속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으며, 불안장애 약을 먹고 있다는 얘기까지 공개했다. 불안장애로 자신의 직업과 삶의 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정도라면 분명 큰 문제다. 방송을 통해서 보던 A씨의 이미지(유머있고 넉살도 좋으며 자신감 넘치고 여유있는)와는 너무도 다른 개인적 고민이 있었다는 점에 상당히 놀랐다. 물론 방송을 통해서는 연예인들의 편집된 모습을 보여주기에 실제 모습, 성격과는 다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기사였다. 마침 내가 스콧 스토셀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읽고 있었기에 이 기사는 더욱 하루종일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불안장애를 오래 겪었다고하는 방송인 A씨도 이 책의 저자 스콧 스토셀만큼이나 극심하게 고통을 받은 경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톨스토이가 언급했듯이 각자의 불행한 이유는 개별적이기에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불안장애를 3살 때부터 가지고 살아온 저자 스콧 스토셀은 불안에 대한 모든 것을 이 책에서 고려한다.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및 에픽테토스의 오랜 문헌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문헌을 뒤지고, 최신의 학술 논문까지 끊임없이 찾아 읽으며, 자신의 일부인 불안을 탐구한다. 아울러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긴 하지만 불안을 주제로 하는 학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자신을 오래동안 치료했던 의사들을 다시 찾아가 최근의 연구 경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이 책이 더욱 인상적인 이유는 불안과 함께 30여 년을 살아온 저자의 내밀한 고백때문이다. 저자는 실존적 불안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본다.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불안이라는 실체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이 불안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려 하며 이는 저자의 기나긴 여정이자 르포르타주라고 말한다. 자신의 문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를 끌어않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진정한 운명애(amor fati)를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 저자는 과도한 불안장애의 증상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지적이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애틀란틱>이라는 잡지의 에디터이자, <뉴요커>,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에 여러 편의 글도 기고한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고, 특히 좋은 집안 출신에,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보이는 저자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심각한 불안장애로 고생을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이 책을 쓰고있다고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우선 놀라움이었고, 그 다음은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시하며 자신의 경험을 얘기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이들이 실제로는 이런 불안 장애로  고통을 받고있음을 반증하는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인간적 감정과 정서적 문제들은 문화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억눌려 왔기에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개인의 에피소드(오물이 묻은 수건을 하반신 앞뒤로 가리고 계단을 오르다가 존 F. 케네디 2세와 마주친 일 등)를 공개하거나 외증조부의 정신과 기록을 공개하는 등 공개적으로 밝히기 힘든 일들을 책에 쓴 것이 매우 놀라웠다. 한편 불안에대한 생각이 구토공포증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불안을 증폭시키는 사례를 보면서 인간의 정신과 몸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유기체로서의 존재가 자기통제를 상실한 순간의 고통에 대해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다. 

     우선 책은 자신이 평생 함께하고 있는 이 불안의 연원을 추적해나가며 시작한다. 자신의 불안에 우디 앨런 유전자라고 하는 유전적 요인이 있음을 주장하는 하버드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로부터 자신의 집안 사람의 불안 내력을 따져나간다. 우선 저자의 부계는 독일계 유대인의 피가 흐른다.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로 화병을 떠올리듯, 나는 독일인의 특징적인 불안 심리를 지칭하는 말로 져먼 앙스트(German Angst)를 생각했다. 이는 독일, 오스트리아 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불안정서를 폭넓게 지칭하는데, 나의 독일 친구 몇몇을 떠올려보면, 어떤 특징적인 면을 민족성과 결부시키는 일은 언제나 만족스러운 설명을 이끌어내기는 힘들었다. 인간은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인 까닭이다. 물론 독일 친구 중 일부는 대중 앞에서 발표를 하기 전 사무실 안을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때로는 강박적으로 보일정도로 걱정하는 듯한 친구가 있긴 있었다. 이 친구는 매우 지적인 친구였으나 이런 과도한 불안의 모습을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독일 친구는 과도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도 자기나름대로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여 시도하고 이를 극복해 나갔다. 마치 짝사랑하던 여인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을 쓰고 이를 극복해버렸던 젊은 시절의 괴테처럼, 이 괴테의 후예는 자신의 의지를 견지하고,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해갔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민감한 유전적 요인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의 모계를 살펴보면 어머니는 정통 와스프(WASP)의 후예다. 저자의 외증조부는 명망있는 하버드 대학 교수였으며, F. 케네디의 대선 캠페인을 함께하기도 하며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외증조부는 말년에 4차례의 전기충격치료를 받은 기록을 포함하여 끊임없는 불안증세와 자기 비하 등으로 하버드대학의 학생처장 및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정신병원에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적이 있다. 저자의 어머니도 역시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공황 발작과 광장공포증, 구토공포증에 시달렸다고 하며,  자녀에게는 애정표현을 의도적으로 자제하면서도 과잉보호 경향을 보여주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곧 부계와 모계 모두로부터 평균보다 예민한 유전자를 물려받은셈이다.

      첫 장에서 저자는 지적 탐색을 위한 워밍업을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불안에 대한 근원을 탐색하는데, 8년간의 대부분을 투자하여 지난 3000년 동안 쓰여진 불안에 대한 글 수십만장을 읽으며 보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학술적으로 수많은 사례와 이론을 검토해가며 수천년의 시간성과 전 지구적인 공간성을 넘어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이 불안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심리 치료, 인지행동 치료등의 노력 뿐 아니라 다양한 약물 치료의 경력도 공개하고 있다. 정신약리학의 역사를 더듬어가며 약의 발견과 발달사를 보여준다. 저자는 약에 의존하게 되는 것, 중독되는 것은 피해야할 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30여년 넘게 병행한 다양한 치료법보다 (일시적이나마) 약물치료에 더 큰 효과가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약물은 수많은 이들에게 즉각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기에 사람들은 약물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모습도 살펴볼 수 있었다. 심지어 2차대전 당시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하는 데 쓰였던 로켓 연로 히드라진으로부터 결핵치료제 및 정신과 약으로 쓰인 아이러니룰 얘기하는데, 나에게있어 이 사례는 약물 개발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곧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관점은 즉각적인 효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약물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할 것 같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증상이 재발하고 약물에 의존하게되는 중독의 위험성 또한 언제나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신과 약을 개발하는 방식에서도 나의 불편함은 점점 더 두드러지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거의 모든 정신과 약, 신경안정제등은 실제 수많은 환자들에게 투여되어 그 결과를 관찰한 후 판단되었다. 문제는 예상되는 효과 이외의 부작용에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절차상 여러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또 다른 문제점은 미디어를 통한 약의 과신 문제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신경안정제가 폭발적으로 판매된 것도 미디어에서 영화배우, 쇼 호스트 등의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유명 영화배우가 TV에 나와 특정 상표명의 신경안정제를 언급하며 칭찬하면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유전적인 연구의 도움으로 이런 불안증세를 가진 인구는 대략 전체 인구의 3분의 1정도로 일정한 비율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약의 구매력은 엄청나게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약물과 관련하여 저자는 책을 쓰고 있는 현재 까지도 약물에 의존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정신약리학은 오늘날의 신경과학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다. 예컨대 신경과학의 관점은 단순화하면 신경전달물질의 양을 약을 통하여 조절함으로써 불안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하는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약물에서 관심을 돌려 또 다른 자신의 불안 장애인 분리불안을 탐색한다. 특히 분리불안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기일 때 이미 이 분리불안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분리분안과 관련한 연구들로 저자는 유전적인 연구와 환경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연구들을 다양하게 제시해주는데, 이러한 선천이냐 후천이냐의 논의는 오랜 생물학계의 논쟁인 환원주의적 관점(예를 들어 분자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나 자크 모노 등의 관점)과 전일적 관점(예를 들어 르네 뒤보의 관점)의 대립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저자는 각각의 입장들을 모두 균형있게 보여주고 있으며, 각각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연구팀의 실험결과들을 모두 균형있게 제시해주고 있다. 환원주의적 관점은 불안이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것, 곧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인구중 일정 비율로 나타나는 점을 주장한다. 1960년대 유전자 조작 없이도 두드러지게 불안해하는 쥐들을 계속 교배하여 민감한 쥐들을 만들어낸 모즐리 쥐 실험처럼 이 불안도 유전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전일적 관점은 데카르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인간이 몸과 정신이 구분가능한 이원론적 존재가 아니며 몸과 정신은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몸이 마음을 만들며 마음이 몸에 스며든다라는 표현처럼 이 둘은 구분할 수 없다. 그 증거로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손자 대까지도 생리적으로 측정가능한 불안정도가 높게 나온다는 연구를 제시한다. 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들에게 소말리아 내전 희생자에 관한 영화를 보여주면 다른 대조군들보다 훨씬 강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유전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환경적인 면의 중요성을 부각시켜주는 예이다.

     저자는 최근의 불안 연구 경향에 따라 유전적 요인에 조금 더 무게를 싣고 바라보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와 재능은 함께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다시말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불안은 저자를 힘들게하고 수치심을 안겨주지지만, 오랜 불안장애 속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이룬 찰스 다윈이나 프로이트처럼 어떤 힘의 원천이자 은총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유전적인 영향력에 경도된 환원주의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자기 효능감(Self-Efficacy)를 강화해야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리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처음에 언급했던 방송인 A씨에대해 생각해본다. 그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들에대해 이 책을 읽은 일은,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홀로 경험하게 되었을법한 그런 증상들을 떠올리고 이해를 좀더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울러 정상의 위치에서 엄습해오는 그런 불안감을 대면해왔을 이 방송인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불안장애의 실체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A씨의 성공적인 치료와 재기를 바라며 이에 응원을 보낸다.

 

 

책에 대하여: 이 책은 특히 각주의 분량이 많은 편이었는데, 각주에 사용된 글자의 크기가 작아서 읽어나가는데 꽤 고통스러웠다. 다음에는 각주의 글자를 좀더 크게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책의 만듬새에관해서 달리 불만스러운 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책에 사용된 종이는 가볍고 책장의 넘김은 부드러우며 종이의 밀도는 적당하여 페이지수가 많아도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울러 종이의 바탕색 또한 온전한 흰색이 아니라 약한 베이지색이기에 눈에 부담을 주지않고 즐겁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들을 세심하게 고려한 출판사의 책들에 호감이 가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번역자의 번역 작업이 상당히 매끄럽게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읽는 동안 학술적인 전문용어등이 많이 나오는 책임에도 크게 거슬리는 부분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책에 드러나는 것처럼 다양한 영역에 걸친 주제의 번역을 하느라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다. 다음에는 번역자의 <새벽의 인문학>을 읽어볼 계획이다. 앞으로 계속 번역자의 좋은 작업을 기대해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람들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해 갖는 생각때문에 불안해한다." (28면)
- 스토아철학자 에픽테토스

"요즘같은 시대에는 이런 두려움이 더욱 커진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 기술변화로 인한 노동시장 변동, 성역할과 관계의 혼란과 변화등이 노동자들에 압박을 가하여 지속적인 불확정성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당연히 걱정을 하게 된다. 이 일에 더 잘 맞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리를 뺏기게 될까? 일자리를 잃고 중산층에서 밀려나게 될까? 이런 만성적 불확정성이 뇌를 변화시켜 더 불안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있다." (164면)

"불안이 두려움에서 비롯되었고 두려움이 종의 생존을 연장하기위해 설계된 진화적 충동이라면 불안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불안은 영원한 인간의 조건이다."
"불안의 형태는 바뀌었으나 불안의 경험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401면)

"트라우마나 학대의 경험은 몸 안에 축적되고 신체 조직에 깃든다."
(413면)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구분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인간의 불안을 환원론적으로 보는 관점에 반한 입장의 설명.

"내 불안은 낫지 않는 상처처럼 가끔은 나의 삶을 막아서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힘의 원천이자 은총이기도 하다." (422면)

저자의 불안장애를 치료하던 W박사의 충고
"당신한테는 장애가 있지요. 불안장애요. 그래도 잘버텨가고 있고, 아주 잘 살고 있다고 봐요. (...) 당신이 그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자신을 좀더 높게 평가하세요." (4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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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전쟁
반다나 시바 지음, 이상훈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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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 뉴스에서 심각한 가뭄으로 30여년 만에 수몰되었던 마을과 바닥이 드러난 모습을 기억이 난다. 수자원 관리 담당자는 현재 남아있는 물로 내년(2016) 봄까지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11월이 되자 여전히 계속되는 가뭄에 정부, 내년 6 전까진 가뭄해소 어렵다!’ 타이틀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정부에선 내년 봄까지 가뭄해소가 어려울 같다고 발표하더니 이제는 초여름이 되는 6 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라고 슬쩍 늘여서 말하고 있었다. 가뭄이 심각한 모양이다. 우리는 집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것만 보게되는 상황이기에 물부족이 얼마나 심각한 사항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 내린 가을 단비로 가뭄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세계적인 환경주의 사상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인도를 비롯한 세계의 환경문제, 그리고 세계화에 맞서 저항해온 반다나 시바 여사의 책을 들게 되었다. 반다나 시바가 저술한 책은 대개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세계화의 질서 속에 놓인 우리의 자연환경 자원의 약탈 문제를 독자에게 고발한다. <물전쟁> 역시 전통적으로 공유하던 물이 어떻게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상품으로 변해버렸는지를  얘기한다. 책의 제목에는 물전쟁이란 제목과 함께 영문P 시작하는 개의 단어가 보인다. 민영화(Privatization), 오염(Pollution), 영리(Profit) 단어가 부제로 붙어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전쟁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3개의 단어로 요약되어 있었다. 반다나 시바 여사의 원래 전공은 물리학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물장구치며 놀던 히말라야 지방의 개천이 사라진 것에 충격을 받고 환경문제를 비롯한 생태학에 눈을 돌려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물은 저자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분리될 수는 없는 존재이면서도 오염이 되거나 훼손이 되어야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곤한다.

     역사적으로 물은 성스러운 , 생명을 잉태하게 해주는 존재, 어머니,  치유와 정화의 이미지 등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책의 앞에도 생명의 이라는 고대 인도의 문헌 <리그 베다> 나오는 시로 시작한다. 신성성과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 신화와 상상력이 결부된 질료서의 물이 언젠가부터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민간에게 병에든 생수를 판매하도록 허가가 났다고 한다. 역시 생수를 판다는 사실에 생소했고, 당시 어른들은 봉이 김선달처럼 물을 판다고 황당해하기도하고 혀를 차기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에는 수도물을 먹었고, 수도꼭이제 정수필터를 달아서 먹기도 했지만, 이제 우리는 상품이된 물을 구입하여 이것에만 의지해서 먹고있는 것이다. 반다나 시바의 다른 저작들처럼 책은 세계화 진행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물과 연관된 가혹한 운명에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물과 관련하여 세계화의 전형적인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차관을 받은 개발도상국은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든다. 과정에서 지역적으로 물을 관리하던 분권화된 물통제 구조는 정부주도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전환된다. 차관을 제공하던 경제 기구들은 협정 조항에 외국 기업이 나라에 진입하여 사업을 있도록하는 조항을 집어넣는다. 따라서 차관을 받고, 댐과 같은 국책사업을 벌인 국가에서는 이런 공공의 자원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한이 민영화되어 외국의 기업에게 넘어가게 된다. 다시말해 엄청난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해놓은 댐과 여기에 있는 수자원은 외국 기업의 통제하에 전적으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민영화 과정을 통해 수자원에 대한 소유권 외국의 기업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들은 마음대로 나라의 자원을 이용할 있게 된다. 이들은 물을 제조하여 판매하기 위해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관정을 뚫고, 동력을 이용하여 지하수가 채워지는 것보다도 많은 물이 끌어올려 최대한의 생산성을 확보한다. 수자원에대해 염두해야하는 중요한 사항은 자연이 주는 물의 양에는 제한이 있다는 , 그리고 물은 대체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물은 전통적으로 공유재로서 지역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공동관리가 되어왔다. 하지만 외국의 기업에서 이런 사정을 인도적으로 고려해주지는 않는다. 아울러 댐을 만들면 수천에서 수만명의 수몰민이 발생하여 강제이주를 강요받게된다. 민영화를 주도한 기업의 탐욕으로인해 수많은 이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야한다. 세계적으로 댐건설로 인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했던 수몰민이 ( 책이 저술되었던 2000년대 초를 기준으로) 4000-800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정치적, 종교적 문제 혹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물에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떠나야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아스포라 생겨나는 것이다. 앞으로 자유무역 여파로 고향을 떠나야하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는 꾸준히 증가할 같다. 반다나 시바가 책을 저술할 당시에는 아직 중국의 삼협댐 완공되지 않았을 터인데, 중국의 삼협댐이 완공되면 하나만으로도 1000만명의 수몰민이 고향을 떠나야한다는 대목에 말을 잊었다.

     반다나 시바는 댐건설로 인하여 해당지역의 집단적인 수리권이 지역 공동체 지방 의회 내지는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로 이전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전통적인 지역의 수리권이 물을 사용할 있는 권리에서 물을 소유할 있는 소유권 되기 때문이다. 물을 사용할 있는 권리가 중앙권력에 귀속되면 과거에 융통성을 가지고 지역특색(기후나 이용가능한 물의 ) 맞는 작물을 기르거나 개별적인 관개사업을 하기가 어려워지게되, 결국 민주주의 치명적인 위협이 수가 있다.

     물이 상품화 되고 수리사업이 민영화되면 수몰민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댐건설로 인한 유량의 변화로 하나의 강에 여러 지역, 혹은 여러 나라가 걸쳐있는 경우, 이는 새로운 정치적 분쟁의 씨앗이 된다. 한편 녹생혁명이라는 구호아래 물소비는 많아도 생산량이 높은 작물을 지역의 특색을 고려하지도 않고 단일 재배하게 된다. 결국 이는 물이 풍부했던 지역도 물이 부족한 지역으로 만들어버리게 되고, 토지의 표토 유실이 심해져 토지의 황폐화를 초래하며, 농장과 주변 지역의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킨다. 그렇다면 어업관련해서는 어떤가? 예를 들어 세계은행, 국제무역기구등의 차관으로 인도에서 성행한 새우양식 경우, 주변 지하수에서 새우양식에 필요한 물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주변 지역의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지하수의 염분화를 촉진시키는 사례를 있다. 결과 물이 풍부하던 마을에서 물을 구하기 힘들어 마을을 떠나거나, 주정부가 급수차를 동원하여 제한적으로 물을 공급받고, 심지어는 여성들이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를 물항아리를 이고 물을 구하러 시간씩 걸어 다니게 되었다. 염분화된 지하수는 주변 농장의 토지의 염분화를 촉진한다. 토지가 황폐화되어 작물의 수확에도 커다란 차질을 빚는다. 지역과 공동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집약적 사업이 세계의 자원을 수탈하고, 환경오염을 가중시키며, 지역민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이 상품화되면서 가난한 이들은 무료로 얻을 있었던 물을 이제는 사먹어야하는데, 돈이 없으면 갈증을 해소할 권리마져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것이 세계화의 구호속에 자유무역을 추진하고, 외국의 민간기업에게 국가의 핵심적인 사업의 권한을 넘겨주어 발생하는 전형적인 결과가 것이다. 이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프랑스 미국의 거대 기업이 민영화과정을 통해 물사업에 뛰어든 결과, 일자리가 줄고, 수질 악화로 인한 피해자가 오히려 늘었으며, 물값은 예외없이 올랐다. 물값을 통제하는 것은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 외국의 회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캐나다 온타리오의 지역에서 세균에 오염된 물을 공급하여 대장균 감염으로 소비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을 , 물공급을 담당하던 회사 측에서는 수질시험 결과를 지적소유권이 적용되는 기밀사항이라는 구실로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자유무역협정의 조항에 의해 캐나다의 정부는 회사에게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자료를 공개하라고 명령할 없다. 만약 이를 강제할 경우, 회사는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회사의 예상 영업 이익에 반하여 압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이제 우리 나라 정부도 충분히 겪을 있는 일이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이미 체결했고, ‘현재로선 문제는 없어보인다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정부관리가 있는 , 언젠가 미국의 대기업들로부터 우리 정부는 끊임없는 소송을 제기당하거나, 아니면 민영화의 결과 감당해야할 비용들을 국민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강요하게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같다. 최소한 인도, 멕시코, 남미 등의 여러 나라를 비롯한 사례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예외적으로 문제없이 지혜롭게 지낼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과거의 전통적인 제조 산업 아니라 대기업이 운영하는 현대적인 집단공장식 농업 형태 또한 오염을 심각하게 유발하며, 물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방식임을 반다나 시바는 다른 책에서도 누누이 언급했다.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면 우리 나라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역할을 하는 나라이기에 <물전쟁>에서 반다나 시바가 언급한 반도체 산업에서의 과도한 물사용에 관한 언급은 쉽게 지나칠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리콘 웨이퍼 제조와 회로 패터닝에 수많은 맹독성 화학물질 아니라 엄청난 양의 중화된 물을 사용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하겠다.

     반다나 시바는 세계화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속에서 수리 사업과 물의 사용권을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해나가야한다고 역설한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면 계획된 수리 사업에 숨겨져 있거나 파악하지 않았던 비용들을 고려할 있고 이를 사업에 반영할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인도에서 수세기 동안 토착 기술자와 지역 공동체에 의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형성된 물관리시스템 조직과 거미줄처럼 연결된 물저장소에대한 이야기가가 인상깊었다. 이는 심지어 인도에 건너온 영국식민주의 시대의 관개기술자들도 인도의 물관리시스템과 조직적인 저장소를 보고 광범위하고 완벽하게 배치된 상태에서 새로운 저장탱크를 찾기는 무척 어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탄하였다. 나아가  팔라르라는 커다란 그릇을 이용하여 빗물을 받아 모아 마을에서 공동으로 물을 확보하려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고, 아울러 하리잔이라는 카스트의 가장 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관개관리인의 역할을 맡겨 수리시스템의 중립성을 유지해온 사례에서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인도인의 전통적 수리관리 시스템은 지혜롭게 분권화된 양식으로 경제적 강자로부터 수리시설을 지키는 민주주의가 이미 오래전에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앞부분 에서도 언급했지만 물은 전통적으로 성스러움의 대상이었고, 생명과 치유 정화의 힘을 갖는 근원이었다. 하지만 물이 상품화가 되어 생수병에 넣어지면서 물은 자체로서의 신화적 상상력을 상실하였다. 물은 자연과 인간을 신화와 이야기로서 연결해주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물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물은 단순히 H2O 되어버렸다. 물리적으로 오물을 씻어줄 있으나, 우리의 영혼을 정화해줄 수는 없게 것이다. 카톨릭 신부이자 사상가였던 이반 일리치는 물의 상품화를 통해 물에 일어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도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소위 음용수라는 이름의 , 아이들에게 냉장고 생수병 물을 마셔라,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그건 마시지 말고라고 말하는 물을 받아서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현실이다. 바로 그게 오늘날 질료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나는 세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아니다. 그저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얼마나 끔직한지 한번 보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나면 순간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것이다.”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274면에서 발췌]

     반다나 시바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이 거대 기업들의 그늘 밑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어떻게 지키고 살아야할지 몸소 저항함으로써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고 참여함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있다. 물을 비롯한 우리의 자원, 우리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성의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이 중요함을 다시금 강조한다. ‘성스러운 물항아리 쿰브를 지켜라라고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우리는 각자의 책임이 있음을 호소한다. 반다나 시바의 <물전쟁> 읽으며 인도인의 물에대한 지혜를 새롭게 배우게 되었고, 내가 매일 마시는 생수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을 무엇이 것인가? 아마도 이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것이다. 끝으로 십년 마하트마 간디가 의미심장한 말을 되새겨본다. “지구가 가진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20세기의 전쟁이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21세기의 전쟁은 물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될 것이다."
- 세계은행 부총재 이스마일 세라겔딘의 말(1995년)

"댐이나 핵폭탄이나 모두 대량 살상 무기다. 모두 정부가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둘 다 20세기의 상징으로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지성이 생존의 본능을 포기한 시점을 나타내는 기념물이다." (122면)
- 세계적인 소설가 아룬하티 로이의 말

"16년 동안 우리는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주민들은 관개, 물, 생산량의 증가 등 아무 것도 얻지 못했으며 생활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117면)
- 1986년 간디 수상의 보고서

"댐은 권력을 의미한다. 물을 소유하게 되면 권력을 소유하는 셈이다."
- 터키 경찰 간부의 말

"댐 개발로 인한 편익을 얻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고, 때로는 불필요한 돈이 자주 사회비용 또는 환경비용의 형태로 지불되었다. 이런 비용은 대개 수몰민, 하류의 공동체, 납세자 그리고 자연환경이 부담하게 된다."
- 세계댐위원회의 보고서

"지구가 가진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 마하트마 간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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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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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배송받기 얼마 전 나는 공교롭게도 페이스북을 포함한 소셜 미디어/네트워킹 서비스 몇 군데를 영구 폐쇄했다. 나의 페이스북 친구는 30명 수준이었고, 대부분이 가족과 친척 그리고 현실에서 아는 친구였다. 막상 영구 폐쇄 신청을 하고 최종 버튼을 누르려니 약간의 미련이 남는다. 폐쇄 신청을 한 후 느꼈던 안도의 한숨도 떠오른다. 내가 올린 몇 안되는 사진들과 조카의 사진들을 페이스북을 통해서는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실제로 조카를 더 자주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싸이월드에 열중하던 세대이고, 2004년 페이스북이 등장했을 때 페이스북은 나에게 새로운 면보다 오히려 싸이월드에 익숙했기에 불편하기만 했던 서비스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페이스북이 그렇게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페이스북 서비스를 시작하던 즈음에는 싸이월드 페인이 무수히 퍼져있던 상황이었기때문이다. 페이스북을 폐쇄한 후 거의 3주가 지난 지금 내가 평소에 친구와 친척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던지, 아무도 페이스북에 내 존재가 사라짐을 의문스러워하지 않는다. 이럴땐 다소 섭섭하다. 하지만 반성하기도 한다. 나의 페이스북 친구(이하 페친)를 챙기지 않았던 것은 나였으니 지나친 욕심일 수도 있겠다.

   지금 나는 나스스로에게 묻는다. 소셜 네트워크가 그리고 스마트 폰이 나의 삶을 더 의미있게 해주었을까?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4가지 소셜 미디어/네트워크 서비스를 폐쇄해버린 나는 이 무형의 존재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아무도 가상 공간에서 나의 상태(status)를 보고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듯이.

   페이스북은 2004년 하버드 학생들을 연결하기 위한 네트워크 서비스로 탄생하였는데, 2001년 이후 등장한 애플의 모바일 기기의 영향으로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페이스북은 이제 많이 사용하는 10개국 이용자 수만 고려해도 53400만명을 넘었고, 8(2015) 기준 페이스북 하루 이용자는 10억 명이 넘는다고한다. 임상심리학자인 수재나 플로레스는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이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그리고 우리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페이스북으로 검색해보면 대부분이 책들은 페이스북에서의 비즈니스, 마케팅 활용에 관한 책이 줄줄이 검색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가상 공간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논한 책은 손에 꼽는다. 저자는 다년간의 자료수집과 폭넓은 연령대의 사용자들과 인터뷰를 한 후 이를 정리하여 우리 삶에서 페이스북이 갖는 위치와 의미를 되짚어보았다.

   페이스북은 한병철 교수가 <심리정치>에서 선언했듯이 현대문명의 디지털 시나고그(유대교 예배당)이자 디지털 파놉티콘(1791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이 되었다. 우리의 무한히 허락된 자유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 공개한다. 우리 자신의 고민이나 감정을 쏟아내는 디지털 고해소가 되었다. 현실의 고해소는 비밀을 지키는 신부가 듣는 제한되고 폐쇄적인 고해소라면, 페이스북은 전세계에 나의 고민을 털어놓는 가상공간의 고해소인 것이다. 나아가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를 통해 우리는 한 순간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자진해서 우리 스스로 개인 정보와 현재의 기분과 감정을 드러내며 우리 자신을 편집하고 판단한다.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의 감시자이다 착취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나 손에 들고 있는 모바일기기를 통해 연결상태로 존재하는 우리는 페친이 올린 사진이나 글 혹은 나의 타임라인에 보이는 이야기 및 소식에 좋아요를 눌러댄다. 한병철 교수는 좋아요디지털 아멘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스마트폰은 스스로를 감시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버렸다. <페이스북 심리학>에서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다고 배우자를 타박하는 남편, 직장동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또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고, 내가 모르는 남자의 사진이나 글에 좋아요를 누른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는 남자의 이야기도 보인다. 디지털 아멘은 무수히 많은 질투와 섭섭함을 유발하고 가상의 공간만이 아닌 현실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가 올리는 정보는 나의 극히 일부의 모습 나아가 편집된 자아의 모습만을 올릴 뿐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셀카 사진은 올리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사진이 아니라면 사진 편집기를 통해 뽀샤시한 사진을 올린다. 특히 나의 페친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사진을 태그하면 짜증이 몰려온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의 사진과 프로필을 훑어보고 나를 판단한다. 디지털 카사노바들은 여성들을 꼬시기 아주 쉽다고 말한다. 그럴듯한 사진과 프로필을 가지고 접근하면 상대방의 얼굴과 분위기를 보지 않고도 나의 좋은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리는 나의 정보들은 내가 아니다. 나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점을 항상 염두해두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20대의 젊은 친구들과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미혼인 젊은 친구들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당연히 이성과의 교제이다. 소개팅을 하기 전 상대방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 기본적인 정보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페이스북에 접속하여 상대방의 사진을 찾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름이 흔하지 않은 경우면 다행이나, 흔한 이름이면 낭패다. 외모가 준수해 보이는 맞을 것 같은 상대방을 확인하기위해 사진 이외의 소속관계 정보를 들여다보는데 전해들었던 정보와 다르다. ! 아쉽다. 이들은 새로운 기대를 갖고 다른 사진을 또 찾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제대로 찾은 것 같으면 다른 사진들과 타임라인을 들여다본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이 친구들이 모여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며 아쉬움과 탄성을 연발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슬쩍 곁눈질을 하며 나도 궁금해한다. 이처럼 극히 제한적인 한 사람의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기 쉽다. 책을 일년에 두 권 그러니까 상반기에 한 권, 하반기에 한 권 읽는 사람도 페이스북에서는 나의 취는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거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가상 공간에서의 정보는 어떤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따라서 상대방의 편집된 자아임을 다시 환기하게 되었다.

   한병철 교수는 페이스북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중독문제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반면 <페이스북 심리학>에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페이스북에서의 중독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사람들은 왜 페이스북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탈퇴해버리지 않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우리도 이유는 안다. 내가 들인 모든 노력과 시간,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탈퇴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말한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에 중독되어 있기때문.이라고.

   페이스북에서 중독과 관련한 가장 보편적인 문제는 당연히 인간관계이다. 결혼한 부부이든, 미혼 커플이든, 학교에서의 교우 관계이든,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이든 타임라인은 각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가상 공간에서의 인간관계는 중독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인자이다. 페이스북에서의 친구맺기 친구끊기는 원래의 기능과 달리 정치적이며 감정의 전달 도구가 될 수 있다. 이 행위들 또한 좋아요를 누르는 일처럼 질투를 유발하기도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심지어는 결혼한 부부를 이혼에 이르게하는 단초가 되기도한다. 저자는 페이스북의 극단적인 애정 행위 네 가지를 질투, 스토킹, 강박, 복수의 유형으로 정리해놓았다. 타임라인을 조금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자신의 기분 상태를 자진해서 올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결별한 커플의 경우, 이 타임라인은 복수의 공간이 되기도하고, 온전한 헤어짐을 방해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면 보이게되는 그 혹은 그녀의 행적을 보면 완전히 한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인간관계에비해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의 공간에서는 인간대 인간의 경계가 다분히 현실의 경우에비해 더욱 모호해진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가상 공간에서의 강박적 중독과 더불어 우리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다섯 가지 감정조종자들(파괴자 타입, 나르시시스트 타입, 순교자 타입, 유혹자 타입, 스토커 타입) 중에서 나 자신은 어디에 가까운지 자문해보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약간 순교자 유형에 가까운 듯 했다. 특히 이전의 싸이월드나 트위터를 많이 이용할 때 나의 모습을 반추해보면 그렇다. 이 유형은 다른 사람들처럼 가상 공간에서 자주 머무르며 나 자신을 희생자로 묘사하고 친구들의 격려와 동정 내지는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유형이다. 또는 죄책감을 이용하여 관심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다소 기대기도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심리학>을 읽으며 그동안 무관심했던 나자신의 모습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된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미디어의 영향력에서 좀더 자유롭게 되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나에겐 한국형 인스턴트 메시지 서비스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건 현재 나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다.    

   아울러 <페이스북 심리학>에서는 디지털 네이티브인 현재 10대들 그리고 앞으로의 세대들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미국 10대의 경우 페친수는 평균 300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의 공간은 우려스럽다. 이들은 이 시기에 자아정체감을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중요하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자아정체감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십대들은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불안과 혼란을 느낀다. 라고 10대 시기의 심리적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데이트 사이트에서 이성에게 작업을 걸고, 섹스 파트너를 더욱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좀더 커서는 운동장에서 몸을 부대끼며 운동하고 놀던 우리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가상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상대방을 온라인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대와 새로운 세대들은 식도락가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빈혈상태를 (창백하게) 만들어 판매하는 송아지같은 존재들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는 나만의 기우일까. 이것은 인간으로서 건강한 남자로 혹은 건강한 여자로서 생을 향유하는 그런 존재들이 될 수 있을까하는 우려다. 나는 문정희 시인의 시 다시 남자를 위하여에 나오는 그런 '수컷 잡놈'이 나올 수 없는 시대만 같아 안타깝다. 스크린을 통해 이성을 파악하고,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이 아니라 ‘진짜 멋지고 당당한’ 수컷 잡놈을 이제 더이상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편 <페이스북 심리학>은 다분히 미국중심적이다. 모든 실제 사례가 미국인들에게 한정되어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통해 나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즉시 연결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특히 이질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서로의 생활양식이 유형화되어가는 현대에는 문화와 지역마다 전달되고 유행되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의 페이스북 이용실태를 들여다보면 그 극단적인 사례들마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며 배울점이 있을 것이다.           

   내가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기 전에 내 페이스북 계정을 폐쇄하였지만, 나는 페이스북’이용자들을 비난하거나 편견을 가질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모습들은 과거의 한 때 나의 모습이기도 하며, 잠시도 쉬지 않고 타임라인을 확인해야 안심을 하던 과거의 내 모습이기때문이다. 페이스북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잘 향유하고, 연결되어있음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정을 나누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유익하고 좋은 정보들도 많다. 하지만 매 순간 이런 정보들을 나 스스로 알아야할 사항이 아닌다음에야 나는 페이스북이라는 창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런 정보들을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조금 늦게 그 정보를 알게되면 뭐 어떤가. 나는 나의 고립됨을 기쁘게 맞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수재나 플로레스도 페이스북에서 상처를 받거나 중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페이스북을 잠시 떠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우리의 감정이 이용당하거나 소모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온전한 의지대로 페이스북을 이용하는데에 이 책은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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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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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피터 싱어 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창세기 첫 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하는 유일한 권리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민음사, 445면에서 발췌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이자 실천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와 농부에서 변호사가된 짐 메이슨의 두 번째 공저 <죽음의 밥상>의 원제목을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우리가 먹는 것의 윤리학정도 될 것이다. 위에서 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용한 부분은 <죽음의 밥상>에서 저자들이 언급하는 윤리적 쟁점 중의 하나인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그대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에는 흔히 성욕과 식욕을 언급한다. 이 두 가지 기본 욕구는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볼 때, 거의 언제나 윤리적인 문제를 중요시 해왔다.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혹은 먹지 말아야할 지를 규정하는 것이 윤리적인 문제의 맥락 속에 있었다.

   <죽음의 밥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주 단순화하면, 먹을거리의 선택은 윤리의 문제다. 하지만 광신은 필요없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세 가정의 먹거리 선택을 들여다보고 이들이 먹는 식품에 기반하여 먹거리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가족의 식단은, 전형적인 미국인 가정의 식단으로 맥도날드를 이용하고, 월마트에서 닭고기, 소시지 베이컨 등의 장을 보고 디저트로 선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캔콜라를 마시곤하는 가정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의 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4인 가정의 먹거리 선택과 많이 유사한 면이 있다. 두 번째 가족의 식단은 좀더 세심하게 선정된다. 부부는 칼럼니스트이자 환경운동가, 생물학자로서 교육 수준이 높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환경문제나 먹거리 선택에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채식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되, 인도적으로 대우를 받는 동물로 육식을 하는 가족이다. 세 번째 가정의 식단은 아이들까지 모두 온전한 채식주의자 가족이다. 유제품 뿐만 아니라 벌의 도움을 받는 벌꿀마져 먹지 않는다. 이 책은 미국의 세 가지 유형의 먹거리를 선택하는 가정을 통해 현대 미국인의 먹거리 문화와 식품이 만들어지는 환경, 그리고 이 먹거리의 선택이 타자(동물, 노동자, 소비자, 자연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따져보고 있다. 미국인의 가정과 식단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다소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까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고, 음식을 생산하는 과정은 더이상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다. 따라서 미국인의 식단을 통해 우리가 배울점은 여전히 많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미국인의 육고기 소비는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순으로 이어지며, 해산물은 새우, 연어 등으로 이어진다. 우선 육고기 생산과정에서 닭, , 돼지는 일반적으로 공장식 집약 농장에서 길러진다. 이 말은 곧 농가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대신, 수많은 동물들이 한 농장에서 상당한 밀집도로 모여 길러진다는 의미다. 또한 대기업형 농장이 점점 독점화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물들로부터 얻어내는 고기 생산 방식에는 상당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동물의 처우에 관한 문제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문제, 심각한 공공의 자원 수탈 및 환경 파괴 및 오염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제반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공장식 집약 농업 방식에 있다. 저렴한 고기 생산을 생산하는 일은 결국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이러한 농업 방식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에 대한 대체 비용을 타자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환경 오염을 완화하기 위한 연방 정부의 추가 예산(곧 세금 증가로 이어진다)의 필요, 환경오염 및 저질 음식으로인한 건강 문제와 의료비 및 보험료 수가 인상 등의 비용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공장식 농장을 운영하는 인간의 탐욕 은 또 새로운 대가를 많이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도 익히 경험하여 알고 있는 조류 독감과 같은 문제가 그렇다. 공장식 집약 운영하에서 닭들은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더 악성으로 변이되기 쉽고, 유전적으로 동질적인 닭들이 대부분이기에 감염 이후 집단에 대한 확산력이 매우 크다. 또 밀집되고 불결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닭들의 스트레스 증가 및 저항력, 면역력의 약화로 훨씬 더 조류독감 같은 문제에 취약한 것이다. 곧 조류 독감 가능성에 대비하려면 또다시 백신이나 약품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비롯하여 연방 정부 및 주 정부의 예산이 들어가고, 결국 이러한 비용은 또  다시 우리에게 전가되는 덧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이상 우리 개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시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내가 사는 환경을 생각하여 더불어 살아야하는 입장이 필수불가결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물들의 인도적 처우 문제와 육식을 하는 일의 윤리성에 관해서이다.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말아야한다이며, 저자는 끊임없이 농장에서 자라는 동물들의 고통과 관련하여 윤리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연체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에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고 있다. 문어와 오징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해야하며, 따라서 이들을 먹는 일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따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토막나 꾸불꾸불 움직이는 산낙지를 먹는 한국인의 경우, 아마도 피터 싱어는 낙지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므로 피하라고 권고할 것이다. 문어의 고통까지 생각하는 저자는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한 좀더 윤리적인 먹거리를 선택하여 먹어야한다는 것이다.

   해산물 또한 육고기 생산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규모가 커진 상업적 어로는 어족을 붕괴하고, 환경을 오염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양식 수산물은 육지에서의 대규모 농장처럼 엄청나게 밀집된 개체들로부터 나오는 오물 등으로 환경오염이 극심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먹어보곤 했던 대구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어족이 붕괴되어 원래 수준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안타까운 예이다. 특히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대구는 레이더를 이용한 공장선에의해 싹쓸이 당하다시피 지구의 바다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은 대구를 앞으로는 먹어보지 못할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현재 가장 많이 소비되는 해산물은 새우라고 한다. 새우를 잡는 어로 방식은 트롤망 어선을 이용하여 무거운 추가 달린 그물이 해저를 훑어 가며 잡아들인다. 수만년 형성된 산호초를 초토화 시키는 것은 물론, 그물코가 작기에 원하지 않는 부수적 포획물이 새우 수의 14-15개까지 잡히고 있다. 그물에 걸리는 해양생물에는 대형 포유류를 비롯, 멸종 위기인 바다 거북 등도 포함한다. 아울러 새우 양식은 바닷가의 해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망그로브 숲을 벌채하기도 하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의 지하수를 고갈시키기도 한다. 텅 빈 지하수에는 염수가 들어차 마을이 황폐화된기도하고, 결국 사람이 떠나버리는 마을을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의 밥상>을 읽으며, 새우를 먹는 일에 이렇게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책을 읽기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은 육고기 및 해산물 등의 먹거리 윤리를 얘기하면서, 윤리적인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베건 식단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건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동물성 음식을 일체 거부한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그렇다치고 아이들을 베건으로 키우는 일은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에 저자들은 문제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소아과 협회와 영양협회의 발표를 인용하며, 베건 식단이 정상적인 아동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들 식단은 인생의 모든 시기에 적절하다. 심지어 임신, 수유기, 아동기, 청년기에도 말이다. 이런 베건 식단은 동물과 관련한 제반 윤리적인 논점에서 자유롭다. 나아가 저자들은 잘 짜여진 베건 식단을 통해 단백질, 철분 섭취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콩류의 음식이 들어간 식단을 통해 추가의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체내 생성이나 음식물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비타민 B의 경우, 보강제를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아울러 베건인 운동선수(울트라 마라톤 우승자, 육상 메달리스트 칼 루이스 등)를 예로 들며,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곧 베건 식단은 우리에게 건강한 식단이며, 환경문제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곧 저자들은 여러 먹거리의 선택과 이 행위가 주는 영향등을 고려하며 먹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한 양심적 잡식주의자들보다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식생활을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아지만 이런 논점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경우, 곧 유기농산물이나 인도적으로 길러진 고기나 달걀등에 추가로 값을 지불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더 적절한 윤리적 쟁점으로 보인다. 물론 저자는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조건에 접근하기 힘든 점을 고려하여, 얼마간은 육식을 하여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허용하는 보다 유연한 자세를 견지한다. 이쯤되면 우리는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의 너무나 유연한 윤리관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이런 가능한 비판에 대해 저자들은 역시 분명한 입장을 제시한다. 윤리적 사고는 상황이 관건이다.라는 것. 예컨대 부유한 사람들이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는 일이 가난하여 이를 구입하지 못하는 이들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먹을 거리에 대해 보다 타당한 접근은 우리가 무언가를 먹거나 먹기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이 음식을 안먹는 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의 선택은 나와 타자 곧 다른 이들이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라는 것이다. 곧 이것을 나는 태도의 문제라고 이해했다. 저자는 개인이 규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는가가 핵심이 아니다. 동물 학대를 지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의 밥상>은 고착화된 원칙을 지키느라 도그마에 빠지지말고, 주어진 상황을 언제나 민감하게 고려하여야 윤리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던저 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것은 곧 윤리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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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반다나 시바 지음, 류지한 옮김 / 울력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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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책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가지 이야기를 상상해보자. 가령 여러분이 농부이고 규모는 아니지만 전통적 방식으로 다양한 작물과 과일 등의 농사를 지어 자신과 가족의 먹거리를 해결해왔고, 아울러 판매를 통해 자식들의 교육까지 그럭저럭 해결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날 미국의 몬산토라는 회사가 등장하여, 여러분이 비축해둔 쌀이나 , 옥수수등의 종자를 문제삼으며 종자들을 심는 것은 불법이다. 농사를 하려거든 앞으로 우리의 종자를 구입해야한다.’라고 경고한다. 여러분의 텃밭에 몰래 작년에 비축해 종자를 뿌려두었는데, 몬산토 회사가 마을에 무상으로 설치해둔 감시 카메라 전화를 통해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 신고자는 회사로부터 포상 받았지만, 여러분은 몬산토 사가 지정하지 않은 종자를 몰래 자신의 텃밭에다 심었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범법자가 되어 미국의 회사로부터 고소당하고, 재판을 통해 징벌적벌금을 회사에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억울해서 항소를 하니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국가가 농민을 보호해줄 있는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정부나 시민단체에 호소를 해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11조항, “수출입에 대한 일체의 규제는 불법이다. 심지어 문화적, 생태학적, 경제학적 이유에서 규제가 불가피한 경우에도 불법이다.” 의거하여 여러분은 도움을 받을 길이 없다. 결국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지불해야하는 일이 고스란히 여러분의 몫이 되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여러분의 밭에 심을 있는 종자는 몬산토 사가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 받고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뿐이다. 수확량이 많아 지는 것도 아닌데, 기존의 해충에는 더욱 취약하여 제초제는 더욱 많이 사야한다. 그것도 몬산토 회사가 유전자 변형 작물에 기반하여 최적화 제초제를 사야만 한단다. (참고로 몬산토 사의 수입원은 종자 판매가 아니라 제조제 판매를 통해서이다.) 제초제의 가격은 기존에 쓰던 국내 회사의 제품보다 2배나 비싸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러분은 다시 빚을 내어 제초제를 몬산토 사로부터 대량 구입해야 했다. 여러분의 빚은 해부터 끝없이 증가하기만 한다. 여러분은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 악순환 속에서 어떻게 것인가?

   실제 미국이 멕시코와 FTA 체결한 이후 빛이 늘어나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농민들이 대기업의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끝이 나지 않는 절망 속에서 택한 결단이었다. 정부가 농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유 무역 감옥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있을까? 평생을 일궈온 땅을 버리고 도시로 떠날 것인가? 나의 가정은 단순한 상상일지는 몰라도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 혹은 앞으로 우리 농민들이 충분히 겪을 있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 특히 반다나 시바의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화 식량문제 관련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다면 말이다.

   위의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거대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무한 경쟁체제로 몰아가는 상황을 통해 우리들이 앞으로 충분히 겪을 있는 일이다. 반다나 시바의 책은  ‘세계화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에 우리는 그저 생각없이 좋아요 클릭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앞에서 지어낸 에피소드에는 어설프고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세계화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을 있는지에 관해 핵심적인 내용을 담았다. 책과 관련한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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