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막스 코즐로프 외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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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 <THE SADNESS OF MEN>에서 제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존 브레이버리 러바인과 나눈 대화와 예술 평론으로 퓰리쳐상을 받은 막스 코즐로프가 쓴 사진집의 서문을 함께 엮은 책이다. 이 책의 번역은 역시 필립 퍼키스 선생의 제자이자 본인 역시 사진가이기도한 박태희 선생이 진행하고 기획한 것으로, 책의 후반부에서는 대화록에 나오는 모호한 부분들을 직접 필립 퍼키스 선생과 함께한 대화를 통해 좀더 명확히 밝히고있다.

 

   가끔 살펴보면 이 책은 얇고 어려운 얘기를 나눈것 같지 않아 지나지키 쉬운 내용들이지만 책을 다시 들여다볼 때마다 '사진을 찍는 활동을 한다는 것'에대해 정말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처럼, 이따금 이 책을 들여다보면 필립 퍼키스 선생은 늘 사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췌한 부분은 내가 만든 키워드에 따라 다시 배열해서 묶어보았다.

 

 

  #바라보기.사진 찍기.셔터 누르기.인화에 관해

"나는 정보 전달을 위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내 사진의 주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옵니다. 세상에 대한 동정을 담아내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려 합니다."  (41)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릅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법과도 같은 변화를 말합니다. (중략)... 사진에 담긴 형식 혹은 사진의 순간성 혹은 사진에 찍인 바로 그 순간의 무엇, 찍힌 순간의 모습, 프레임 안에 담긴 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초월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44)

 

"35mm 카메라를 쓴다면 노출은 더 주고 현상시간은 줄여야 그림자 부분이 잘 살아나는 필름을 만들 수 있다."   (24)

 

"대상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저 시선을 끄는 것을 향해 셔터를 누릅니다. 그 다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결정하는 과정이 편집과 인화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최대한 '백치'상태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와 이게 뭐지? 멋지다. 저 나무덤불에 떨어진 빛을 봐! 저사람의 손 모양 좀 봐!' 이런 식입니다.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화와 편집을 할 때는 찍은 것들이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지 고민합니다. 인화를 할 지, 그냥 필름으로 남겨둘지도 결정합니다."   (41-42)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 입니다. 대상에 반응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우린 항상 무언가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이란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매체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진가이므로 삶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르겠어요.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인화는 기억을 바깥으로 공표하는 과정입니다."    (81)

 

"(tone)안에, 그 단계들 안에 수많은 감정이 존재한다."   (25)

 

 

  #사진 배열(sequencing)에 관하여

"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   (9)

 

"주제나 소재보다는 사진과 사진 사이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흐름을 중시하려 했어요. 음악의 선율이나 시적인 감수성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풍경, 인물, 거리, 멕시코... 그래서 독자들이 편집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게 될지는 전혀 예측을 못하겠군요. (중략)... 난 다른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모호하고 혼란스러워도 만일 내 사진과 어떤 공감이 가능하다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82)

 

  #프로와 아마추어

"아마추어가 되길 원하는지 프로페셔널이 되길 원하는지 스스로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선 누구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꼭 내 삶의 전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중략)...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강의를 하고 상업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내 가족을 부양합니다. 하지만 내 작업과 돈 버는 일을 혼동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 일을 섞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하고 돈을 버는 일은 프로처럼 하세요. 두 가지를 혼동하지 마세요. (중략)... 누구나 위대한 사진가로 인정하는 스티글리츠는 평생 자신을 아마추어 사진가라고 불렀지요."   (83-84)

 

  #사진과 사색하는 삶

 

"사진은 시각적인 '하이쿠'라고 할 수 있다. (존 러바인)"   (46)

 

"나는 사진 작업을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무한한 수수께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진은 답이 없는 수수께끼같아요."   (35)

 

"내 작업에서 소통이란 주제 그 자체보다는 심리적, 정신적 공명에 대한 것입니다."

(37)

 

"사진은 목격한 대상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 속에서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한 존재에 대한 가치는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있지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행동가이며 생산자이고 아이디어 맨이지요. 충만한 감성으로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사색에 잠기거나 하는 대신 말입니다."   (45)

 

 

 

‘사색하는 삶’의 중요성은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에도 등장한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시간성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 한병철 교수는 우리의 시간이 원자화 되어 사건과 사건사이의 중력이 소멸되어버렸고, 그로 인해 시간의 역사성, 시간의 서사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을 나의 언어로 바꾸면 시간의 원자화사건과 사건사이에 존재했던 끈적 끈적함이 사라진 결과인 것이다. 사건사이의 유의미성이 소실되고 시간이 파편화되어버린 사회에서 우리는 항상 시간에 끌려다니고 시간에 쫒길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만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손으로 스마트 폰의 화면을 전환하고 언제나 정보를 찾아 다니는 상황, 디지털 사진기로 대상을 포착하고 즉시 화면을 쳐다보며(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닮았다해서 외국 사진가들은 chimping이라고 한다) 삭제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사진의 과정이 그러하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를 썼던 것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애도 과정에서 보게 된 어린 시절의 어머니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햐야할지를 오랜 시간동안 사유한 끝에 나온 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통적인) 사진의 과정, 다시말해 셔터를 누르거나 사진을 인화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혹은 사진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기존 사진 매체의 제약으로 인해 사진가 개개인의 사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것이다. 현재 디지털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가 중에서도 아날로그 사진에 익숙한 작가들의 작업 흐름은 분명 디지털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이는 디지털 매체가 우월하냐 아날로그 방식이 우월하냐와 같은 맥빠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나를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하는 과정이 내 앞에 있는 어느 대상, 어느 사진이 나에게 주는 반응이 사진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라고 바르트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생각한다. 필립 퍼키스 역시 이 책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하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혹은 영화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에서 보듯, 마들렌 과자 하나가 등장인물의 옛 기억을 불러일으키고있다. 한 인간의 몸에 저장된 기억은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이다. 미국 CIA가 연구비를 지원한 전기 충격(고문) 기술에관한 연구(1950년대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진행됨)를 보면 인간이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자극(현재 내가 어디 있으며, 지금이 언제인가를 인식)과 기억(나는 누구인가)이라고 했다. 자의든 타의듵 외부의 자극을 통해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하는 행위는 나에게 의미있는 사건들 사이의 유의미성, 서사성을 이루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한병철 교수는 이 과정을 사건과 사건 사이의 중력이 회복된다라고 말할 것 같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필립 퍼키스는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그저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관찰하거나 사색에 잠기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파편화된 시간들의 연속 속에 우리 자신을 그냥 내던지는 일일 것이다. 사색하는 삶은 이 시간의 원자화에 저항한다. 결국 우리의 시간은 사진을 바라보고 이에 반응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50년 넘게 아날로그 사진, 오로지 흑백의 톤(tone)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흑백 사진만으로 작업해온 필립 퍼키스의 간결한 대화록은 다시 꺼내  볼 때마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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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
장석주 지음 / 프리미엄북스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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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은 불혹에 이른 작가가 젊은날의 고뇌를 기록한 산문집이다. 올해 예순에 이른 시인이 20여년 전 써내려간 ‘생에대한 의지’가 담겨있다.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비관적 분위기는 시인의 젊은 날 고독과 고뇌의 흔적이자 강한 삶에의 의지로 느껴졌다. 지금 작가의 사진에 나타나는 편안한 이미지 속의 단단함은 젊은 날의 ‘절망’이란 수분의 과정없이 맺기 힘들었을 열매이다.

     장석주 시인의 산문들은 ‘네 삶을 전복시킬 열정을 가져라’, ‘자유로운 정신을 가져라’,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생을 긍정하고 나아가라’라고 소심한 나를 향해 일갈하는 듯하다. 시인은 말한다.

     5월에는 희망이 없다면 절망이라도 해야 한다. 나는 몇날 몇밤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기진맥진할 때까지 매달리고 싶다. 절망이라도 좋다. 그 극한에까지 다가가고 싶다. 그리고 죽은 듯 열흘쯤 깊은 잠에 빠져보고 싶다.

  젊은 날 무언가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실패하고 좌절하여 절망의 나락에 끊없이 떨어져본 경험이 있는가? 치기어린 극한의 경험으로 나 자신을 몰아가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오히려 불행한 젊음일지 모르겠다. 나의 학창시절, 나의 젊은 날을 다시 회상해본다. ‘나는 소심한 인간이다’라고 뒷걸음치듯 내 모습 뒤로 숨어버리던 젊은 날의 내 모습.‘절망’하는 일마져 두려워했던 소심한 한 인간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인의 글은 내면에서 밀어내듯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삶에의 강한 의지을 열망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다. 마치 젊은 날이 우울하도록 예정되어있던 것마냥 한 치 앞길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고뇌를, 절망을 시인은 결코 그대로 방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모하게 희망을 가져라라고 표면적인 충고를 하지 않는다. 니체가 스스로를 극복하기위해 권력에의 의지를 가지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 절망을 단단히 붙들고 다시금 희망의 씨앗을 심는다. 예컨대 장석주 시인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말로 그 씨앗을 심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가는 걸 중단해야할 이유는 없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나는 언젠가 이 산문집을 다시 손에 들게 될 것이다. 사회에서 내가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의기 소침해질 때,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홀든 콜필드가 뉴욕 맨하탄의 거리를 방황하며 끝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처럼 나역시 이 세상에서 나 혼자임을 느낄 때, 나는 다시 이 책으로 돌아올 것이다. 장석주 시인의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은 내가 비관적이 되거나 목적없이 방황하며 고독할 때 생에의 의지를 다시 일깨워주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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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노래 - 가토 슈이치 자서전
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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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리뷰는 일반적으로 객관성을 지향하는 서평쓰기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좀더 주관적인 독후감에 가깝다. 책을 소개하고 판매를 고려한 서평쓰기보다는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책과 나와의 밀당과정을 써보고 싶었다. 글의 구성은 다소 느슨한데, 이유는(사실은 졸렬한 글쓰에대한 나의 변명) 책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하나의 생각이 들면 그걸 붙들고 남겨둔 메모를 그러모았기 때문이다.

 

 

    <양의 노래> 받자마자 명절 연휴 사흘 뜨겁게 읽어 나갔다. 대부분의 원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리버럴리스트였던 가토 슈이치가 1960년대 후반, 저자가 40대일 쓰여졌다. 저자의 어린시절부터 중년까지 (1920년대 -1960년대) 대부분을 이루고, 나머지 30 정도(1990년대 까지) 간략하게 그동안의 경과보고를 포함하고있는 자서전이다. 가토 슈이치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책을 좋아하게되었다고 한다. 문학소년이 조숙한 아이는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고, 아울러 여러 문인,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성장하였다. <양의 노래> 저자가 독자적인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거짓에 어떻게 대면하고, 이와 길항하여 저자의 지적 발견과 사상적 성숙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에대해 담담하게 기술하고있다. 특히 태평양 전쟁 전후, 수많은 일본의 예술인, 문인,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20세기 전반 일본 지식인들의 세계를 자발적 아웃사이더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의 노래> 마치 미국 현대사의 장면들을 개인의 이야기와 곁들여 집약해놓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 보는 했다. 개인이 고국 일본 아니라 세계 역사의 소용돌이 복판에서,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목격하고, 흐름을 몸으로 체험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이르러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 미공군의 도쿄 공습 당시 저자는 도쿄에 있었으며, 하루 아침에 사라진 도시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사로서 방사선에 피폭된 환자들의 혈액을 직접 관찰하고, 다친 환자들을 치료하는 활동도 하였다. 한편, 1968 8 체코의 프라하의 당시 소련의 전차가 체코로 침범해오기 직전 가토 슈이치는 불과 수일 전에 프라하에 있었다. 자서전을 쓰던 60년대에 저자는 캐나다 밴쿠버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당시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도 하였다.

   가토 슈이치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근저에까지 내려가 사건들의 의미를 철저히 따져 묻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이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평생 지속했다. 이는 저자 자신이 어느 민족, 국가에 속하는  특수성의 제약을 뛰어 넘어 모든 가치 앞에 인간이라는 기준을 두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가토 슈이치는 평생을 인간의 가치 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던 지식인었다고 있겠다.

   

가토 슈이치의 어린 시절 가정환경

   가토 슈이치의 어린시절과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아웃사이더 지식인 형성하는 여러 요인들을 발견할 있다. 가토 슈이치의 부모님들은 부모로서의 권위를 자녀들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버지는 의사로서 바쁘게 일만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책을 읽고, 피리를 불줄 알았으며 아들과 친밀한 대화를 아는 가장이었다. 작은 부정에도 민감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품성은 가정교육, 가정의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미 어린 시절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긴 부분은 가토 슈이치에게 어린 시절 최초의 영웅 일본 문인이 아니라 찰스 다윈이라고 밝힌 대목이었다. 찰스 다윈의 저작에대해 가토 슈이치는 “...... 그것은 거의 시적인 감동이었고…(중략)…어린 나는 속에서 자연과학을 배운게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즐거움을 알았던 .”이라고 회상하고 있다. 책읽기 지식을 얻는 활동보다도 사유를 자극하는즐거움을 주는 활동이었던 모양이다.

   한편 태평양 전쟁 이전, 저자는 수재들이 모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다양한 문학책 읽고, 연극과 음악에 접하며, 격렬하고 집요하게 토론하고 질문하는 지적,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했음을 있다. 대학입시에만 올인하여 소진되어가는 요즈음 고등학생들의 학교 생활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조숙한 모습에 놀랐다.

   학창시절에 전통 일본 문학 세계 문학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이해하는 눈을 키울 있었던 것도 어떤 면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이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기위해 마련한 번역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부분에 있어서는 장단이 있겠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있겠으나, 100년전에 이미 존재한 엄청난 번역 문학 기억해내는 부분에서는 우리 사회와 격차를 느낄 있었다.

 

가토 슈이치에게 미친 예술의 영향_연극과 음악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어려서부터 문학책을 즐겨읽었던 가토 슈이치는 더욱 폭넓은 예술 장르에 접하게 된다. 연극과 음악, 미술이 대표적인 예인데, 다양한 예술과의 접촉은 가토 슈이치에게 평생동안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으며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저자는 전통 문학 아니라 일본의 전통 연극을 통해 보편적인 예술로서의 연극 발견하는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나는 전쟁 기간에 스이바도바시의 노가쿠당에서 발견했던 것이 아니라 연극이라는 단어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중략)……배우의 육성이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작은 동작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략)……실제로 나는 거의 세계 극장에서 일류 연극을 보게 되었지만, 그것은 내가 먼저 우메카와 만자부로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곤고 이와오가 추는 춤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코 반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한국인의 눈에는 우리 문화가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이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문화와 바탕을 이루는 태도 혹은 정신에대해 감탄하고 애정을 가질 기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신적인 단절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한다. 우리의 문화에대한 애정마져 갖지 못한 , ‘타자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여기에 나에 대한 존중, 것에대한 사랑이 제대로 싹틀 있을까? 나는 우리의 에대한 지식을 배우는 이전에 우리의 것에 대한 애정 갖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연극에서 나아가 가토 슈이치는 피아노 음악을 통해 예술의 세계를 새롭게 발견했다. 특히 전통적인 일본의 가극과 연극을 아는 상태에서 세계에 나갔을 예술에 대한 눈을 더욱 키우고, 시야를 넓히는 경험을 얘기한다. 이러한 경험 이후 다시 고국 일본의 예술을 접하며 성숙해진 눈으로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예술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전통 예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고 있겠다. 저자가 유럽으로 갔을 서양에서발견한 예술의 형식은 연극 뿐이 아니니라 회화, 조각 건축의 세계였다. 결국 가토 슈이치에게 있어 문학, 연극,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은 평생의 기반이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술은 마치 몸의 일부 처럼, 때론 세계를 해석하는 눈으로서 가토 슈이치와 평생 함께했다고 있다.

 

주변인으로서 삶을 선택하다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가토 슈이치는 중년의 나이에 의학을 그만두고 문필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 삶을 선택한 결정의 이유가 나에겐 놀랍기만하다.

   병원을 오가며 밤새워 글을 쓰면서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시간을 들이는)그런 짬을 낼 수는 없다. 나는 의학 연구실에서 생활해왔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유로 연구실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의학 연구는 전문화의 극단을 달리던 학문이다. 일에 몰두하면서 1년을 보낸 뒤, 나는 종종 그 1년을 마치 없었던 시간처럼 느꼈다. 1년 동안 오고 간 계절과, 주변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 전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구실 바깥의 나는 산사람이 아니었다. (중략)……나는 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는 또 주변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혈액학 전문가에서 문학 전문가로 변신한 게 아니다. 전문 영역을 바꾼 것이 아니라 전문화를 폐기한 것이다. 그리고 내심 비전문화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또 다른 지식인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둔 이유와도 비슷하다. 다카시는 직장생활을 바쁘게 하면서 읽지 않고 쌓여가는 책을 두고볼 수 없었노라 고백했다. 다카시 역시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삶이 아니라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가토 슈이치의 포부 또한 다치바나 다카시와 유사하다.

  

이방인으로서의 시선_정신적 자유의 추구

   파리를 산책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했던 발터 벤야민처럼 산책하는 이방인으로서 가토 슈이치의 면모도 흥미롭다.

   “’일본관시절, 나는 파리 시가를 즐겨 걸어다녔다. 그곳엔 내가 그때까지 살았던 공간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공간이 있었고, 공간의 질서감은 아무리 바라봐도 싫증나지 않았다. 아무 용무도 없으면서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거리를 거닐며 돌아다닌걸까. 지금 회상해봐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중략)..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외재화外在化되었다. 다시 말하면 감각적으로 대상화된 한 문화의 핵심을 보고 있던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중략)……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통되었던 것은 매사에 도쿄와 파리를 비교해 생각하는 습관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단이 보여줄 수 있는 부조리함과 폭력성에 저항감을 가졌던 가토 슈이치의 시선은 자신이 속한 사회속에서 주변인 혹은 경계인, 여행자의 시선으로 옮겨가고 있다. 노년이 된 가토 슈이치는 자신을 모습을 회고하며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또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나는,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늘 일본 사회의 주변에 머물렀다. 우연과 주변사정이 절로 나를 그렇게 만든 측면도 확실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그런 위치를 선택했던 측면도 있다. (중략)……또 오랜 외국생활이 거의 필연적으로 일본에서의 나를 사회적 영향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끔 했던 것도 분명하다. 사회의 주변에 살면 영향력을 잃는다. 그러나 정신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다. 소용돌이 한복판에 선 사람은 전체 상황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조망하기가 곤란할 테지만, 주변이라는 위치는 전체 상황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목적에서는 무척 용이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주어진 환경을 바꾸기보다는 먼저 그 환경을 이해하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정신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길 원했다는 점은 물질적 부가 넘처나는 대신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사색적 삶을 박탈당한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가토 슈이치는 이미 반세기도 전에 이렇게 바쁘고 소진되는 삶에 저항했다.

   태평양 전쟁이 그 절정으로 달려갈 때 일본의 언론과 정부는 거짓 선전과 과장된 구호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가토 슈이치는 주변인의 시선으로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예컨대 일본인들이 서양의 양식과 적성국의 언어를 읽고 공부하는 것에 대한 반감기류를 들 수 있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 양복을 입고 신세대임을 과시하듯 활보하던 거리가 국민복으로 획일화되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태평양 전쟁 직후 새로운 사회 국면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에대한 기록은 우리가 겪은 한국 전쟁과 이후의 사회상의 그것과도 너무나 유사한 같다.

   수완있는 여자들은 점령군 장교에게 줄을 대서 ‘PX’에서 옷을 입고 시영 승합버스라도 타고 다녔는데, 그들의 얼굴은 의기양양 절정의 기쁨으로 빛나는 보였다. 전화로 폐허가된 도쿄에서는 그럴싸한 치장대신 진실이 있었고, 일부러 만들어낸 겉치례 대신 본바탕 그대로인 인간의 욕망이 식욕, 물욕, 성욕까지 고스란히 거리낌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무시무시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울러 우리가 산책하는 이방인의 눈으로 여행을 한다면, 관광객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토 슈이치는 여행자란 그 지역 사람들과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서 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상의 습관 체계로부터 벗어난 여행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여행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을 낯설게 보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따라서 내가 속한 사회, 체제의 내부와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고 고찰해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예술 및 역사에대한 이해가 이 작업의 틀이 되어 줄수 있다고 믿는다.

   가토 슈이치는 여행이 줄 수있는 혜택으로 주어진 조건의 한계를 벗어나 선택에 의해 정신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왜 외국의 도시를 찾았던 걸까? 아마도 그것은 환경에 대한 호기심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태어난 해는 1919년이지만, 만일 1819년에 태어났더라면 어떤 환경을 경험했을까? 이 물음은 역사에 대한 회고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도쿄였는데, 만일 그곳이 베이징이나 멕시코시티였더라면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 물음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유혹이다. 인생은 우연으로 가득하다. 우연으로부터 받은 내적 조건은 DNA이고 외적조건-그것은 다시 내면화되어 한 인간의 형성을 결정할 것이다-은 특히 태어난 시간과 공간이다. 그런 조건의 특수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며 초월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적 수준에서 혹은 역사적 지식을 통해서 또는 환경의 선택을 통해서 조건의 특수성에 도전하는 것은 정신적 자유의 증언이리라.

   앞서 언급했듯이 정신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기 위해 의사의 신분을 폐기하고 문필가가 되기로한 저자에게 여행은 마음껏 숨실 수 있는 신선한 공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주어지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당신에게 무엇이 보이고 거리의 풍경은 어떻게 보이겠는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미군의 도쿄 공습이 엄습해오는 분위기에서 가토 슈이치는 도쿄의 평온한 일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경험을 기록한다.

   도쿄는 아직 폐허가 아니었지만, 나는 눈 앞에 있는 거의 모든 것에서 도쿄가 폭격으로 불탄 뒤의 황량한 폐허로 변해버린 환상을 겹처서 본 적이 있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과일 가게 앞에 쌓인 과일, 겨울 오후의 햇살, 산시로 연못 부근의 고요한 양지, 석양의 해, 혼고 거리의 책방과 카폐 창에 켜지기 시작한 불빛, 헌책방 안쪽에서 화로를 끼고 장부를 들여다 보던 가게 주인 등의 모습은 연합군의 공습 직전 가토 슈이치가 새롭게 바라본 일상의 모습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채 주변의 일상이 조만간 폐허가 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 순간 아름다움을 보았던 지식인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가토 슈이치의 이러한 감수성과 여행자로서의 시선 뿐아니라 세계를 여행하며 만나게 된 지역의 지식인들과 대화 및 토론을 통해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믿음과 관점이 더욱 성숙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안과 밖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저자가 학창시절부터 부지런히 교양을 쌓고 수많은 문인 및 예술인을 만나 영향을 주고 받으며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고 의문을 던지는 일을 끊임없이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한다.

 

하워드 진과의 대비

   미군의 도쿄 공습 당시 지상에서 역사를 목격하던 젊은이의 눈에 비친 대목을 읽으며 나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의 한 명이었던 하워드 진을 떠올렸다. 하워드 진은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양심을 대변했던 지식인으로1922 (가토 슈이치는 1919년 생)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청소년시절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자본론>을 읽고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하워드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임무를 수행했다. 하워드 진은 당시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폭탄이 투하되는 목표 지점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제대 후 당시의 경험을 성찰하게 되었다. 폭격으로 인해 희생되었을 사람들, 부상자들과 이들의 고통에대해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미국의 적성국인 일본의 국민이었던 가토 슈이치, 그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도시에 투하될 때 도쿄의 한 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하늘에서 죽음을 몰고오고, 다른 한 사람은 땅에서 죽음에 직면한 상황. 나는 훗날 공통적으로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위해 발언하고 활동했던 이 두 지식인이 적으로서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던 역사의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타협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가치 & 반전주의자로서의 면모

   가토 슈이치는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결정하지 않았다. 전차 안에서 마주하던 사람좋아보이는 아버지, 남편은 어제까지 중국 대륙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던 존재인지 모른다고 독백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정하는 일에 의문을 제기했다.

   많은 인간을 악마로도 만들고 천사로도 만드는 사회 전체, 그 역사와 구조를 고찰하는 편이 더 온당할 거라는 판단에 도달했던 것 같다. 그것은 즉흥적으로 떠올린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내 생각은 이후 내 사고방식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어떤 인간도 악마가 아니기에 나는 사형에 반대하며, 전쟁은 어떤 인간이라도 악마로 만들기에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고.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분노하라> 저자 스테판 에셀은 부조리함에 대해 용인하거나 참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분노 표출해내라 촉구했다. 우리는 부당한 일에 분노하기 잊고, ‘짜증 쌓여가는 현대 사회 속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가토 슈이치도 옳지 않다고 믿는 일에 분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다 인간과 그래도 알고 싶다 인간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전자가 틀렸다는 논리는 없다. 다만 나는 자신이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 (중략) 25만명의 어린아이…(중략) 나에겐 멀리 있는 아이들의 죽음이 마음에 걸렸었다. 전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 나는 일에 분노하고 일로 흥분한다…”

   가토 슈이치가 느꼈을 분노와 흥분에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을 있는 모든 사항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고 하는 바램이 들어있었다. 나아가 가토 슈이치는 그래도 알아야 한다라고 나에게 호소하고 있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가 생업을 뒷전으로 하고 시위의 현장에 나갈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혹은 나와 동떨어진 곳일지라도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관심을 가져야하며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판단하고 문제를 붙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있다.

   현재 일본 후쿠시마 지역의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우경화, 강경파 득세와 반한, 반중 분위기의 역전 현상을 이해하는데 가지 실마리를 주고 있다. 전쟁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은 , 정부 권력자 그리고 그에 편승한 미디어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억압하고 의문을 던질 기회를 노골적으로 박탈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알게 모르게 용인하고 결과적으로 부추기는 것은 결국 우리의 무관심 내지는 알고 싶지 않다라고 회피하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래도 알려고 노력해야한다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재일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대학교수가 된 서경식 교수는 최근의 저서 <내 서재 속 고전>에서 바로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를 본인의 고전으로 선택했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가치는 가토 슈이치가 확신하고 있었던 것만큼 부동의 것일까. 아우슈비츠 이후, 그리고 지금도 매일매일 그 가치는 근저에서부터 위협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가토 슈이치의 저서를 내가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무릇 고전이라함은 외부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 속에서 어느 순간 다가와 책이라는 도끼로 머리를 치듯 그렇게 충격을 주는 책이 아닐까. 아울러 시간이 지나 다시금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책, 그 때마다 선명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을 줄 수 있는 책이 고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내 고전의 세계에 첫 발을 내 딛은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문구가 있는데, 가토 슈이치가 규수 탄광에서 광부들과 함께 갱도 안으로 들어가본 이후 남긴 말이라고 한다. “방관자로서의 판단은 항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지성인이 지금 삶에서 좀더 능동적인 삶의 주체로서 깨어있으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유럽의) `중세`는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것만큼은 도쿄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중략)... 드디어 나는 중세 이래로 프랑스 문화가 면면이 이어져 오늘에 도달한 사정은, 일본 문화가 가마쿠라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는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348면)

나는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면서, 이를 표현 전체가 시사하는 바 일종의 심리적 상태를 나 스스로 형용하려 했다. 일상생활의 습관 체계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 감정생활의 깊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연 나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희생하며 또 무엇을 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걸까? (386면)

인종 우열 논쟁의 거의 모든 것은, 요컨대 논자의 지식 부족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행은, 지식의 부족이 종종 역사를 움직여왔다는 사실이다. (414면)

도쿄에서 의사 일을 시작한다면 너무 바쁜 나머지 자아를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망각하지 않고 다시 자아를 발견하는 것, 그 발견을 위해 잠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43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516면)

매일 푸른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거부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입장은 모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방관자로서의 판단은 항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된다....(4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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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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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과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 그리고 시인에게 절실했을 삶의 물음들을 엿볼 수 있었다. 전영애 시인과 라이너 쿤체 시인과의 따뜻한 인연을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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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에서 출간된 도서들 중 개인적으로 관심이가는 책들을 5권만 추려보았다. 따라서 아주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한 것은 당연하고, 또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심이 가지 않는 책을 선정할 수는 없기때문이다.

  우선 가장 관심이 가는 책으로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를 선정하였다. 아울러 프랜시스 크릭의 <생명 그 자체>, 고미숙 외 8명의 저자가 함께한 <도시 인문학 강의: 서울의 재발견>, 헬렌 S. 정의 <니체 운명 수업>,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5권의 목록에 넣었다.

 

 

 

 

 

 

 

 

 

 

 

 

 

 

 

 

 

 

1.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지음/ 이목 옮김

 

가토 슈이치는2008년 만 여든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리버럴리스트로 알려져있다. 국내에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일본문화의 시간과 공간> 등으로 알려져 있다. 1966 11월부터 1967 12월까지 진보적인 <아사히 저널>에 연재되고, 1968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이 책은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이다.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에서 보여주었던 개인적인 독서편력과 배움의 과정 뿐 아니라 저자의 다른 면모를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현해탄을 건너 국내에 출판되기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것이어서 더욱 반갑다. 지난 8월에 출판된 서경식 교수의 <내 서재 속 고전>에도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가 소개되어있어 내가 읽은 <양의 노래>와 서경식 교수의 <양의 노래>가 어떠한지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2. <생명 그 자체> 프랜시스 크릭 지음/ 김명남 옮김

 

프랜시스 크릭은 제임스 왓슨과 함께 50년대 생명의 기초 단위인 세포 내 유전 물질,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이다. 프랜시스 크릭이 지은 책 <열광의 탐구What mad pursuit> DNA구조 발견의 체험기로서 연구 과정과 노벨상급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급박했던 순간들이 잘 드러난다면, 이 책은 크릭이 지구의 생명 탄생에 관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 하다. <열광의 탐구>에보면 지구 생명체의 기원으로서 이 책의 핵심 담론이 되는 정향 배종 발달설(directed panspermia)에관해 한 페이지 약간 못미치게 언급을 하고 있다.

 프랜시스 크릭은 이 책 <생명 그 자체> 에서 사람들이 믿기 힘들어할만한 이 생명 이론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오랜 시간 생각을 발전시켜온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열광의 탐구>에서 언급된 정향 배종 발달설이 황당무계한 이론인 듯 하면서도 그 가능성과 무게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첨단 생물학계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는지 더 이상 나아간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이 책을 통해 프랜시스 크릭으로부터 직접 해답을 듣게 되었다.

 참고로 스티븐 핑커의 묵직한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올해 출판문화상 (번역부분)을 수상한 김명남 전문번역가가 함께한 책이어서 더욱 기대가 된다.

 

 

 

 

 

 

 

 

 

 

 

 

 

 

3. <도시 인문학 강의: 서울의 재발견> 고미숙 외 8명 지음

 

이 책은 2013년부터 우면산 숲속 강의실에서 진행한 도시인문학 강의를 묶어 출간한 것이라한다. 도시의 과거와 내가 사는 도시의 면면을 아는 일(현재), 도시의 미래에대해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근 서울, 그리고 도시에관해 상당히 많은 관심과 서적이 출판되고 있어 반갑다. 스스로 이방인이라 자처하며 서울을 산책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점들 이방인의 시각으로 기록한 정수복 교수의 <도시를 걷는 사회학자>를 비롯하여 문학비평가 류신 교수가 문학과 예술의 눈으로 산책하며 바라본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참신한 시각을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반면 이 책 <도시 인문학 강의>는 각기 다른 공부를 하는 전문가가 모여 서울의 과거, 현재, 미래에대해 고민하고 묻고 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있다. 서울에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이들에게 갖는 도시의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니체 운명 수업> 헬렌 S. 정 지음

 

1844년 출생, 1900년에 사망한 니체. 19세기 후반부를 온 몸으로 살다간 전복적 철학자 니체는 어떤 이유로 끊임없이 사후 100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일까. 초인(위버멘쉬), 영원회귀, 운명애(아모르 파티), 권력에의 의지와 같은 용어는 니체를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들이다.

 이 책 <니체 운명 수업>은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기본적인 개념에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한편, 니체의 철학이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연관을 가지고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을지를 소개해주려는 저자의 노력이 녹아있는 듯하다.

 참고로 올7월에 나온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 8월에 나온 박정진 선생의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5.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고상만 지음

 

이 책의 근간은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현재의 국정원)가 장준하 선생을 감시하고 탄압한 기록에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던 대학 신입생때 접했던 장준하 선생의 항일대장정의 기록 <돌베게>는 나에게 큰 충격을 준 책이기도 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것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미래로 나가아야할지 그 방향을 가르쳐준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의 세대는 우리의 과거, 우리의 역사를 잊지말고 교훈을 얻어야할 일이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통해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겠다. 인간이라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국가와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지,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어떻게 이를 바라보고 받아들여야할지 등등에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될 것이다  

 지난 5월 장준하 선생의 <돌베게>가 개정판으로 나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와 함께 읽는다면 장준하 선생의 인간적 면모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좀더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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