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야만인이 문명인보다 자연스럽다고 여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야만 상태보다 폴리스에서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33

 

아퀴나스폴리스적 동물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동물로 번역한다...그런데 아퀴나스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훨씬 더 자주 사용할 뿐만 아니라 폴리스라는 한 단어로 표현되던 것을 사회와 그것의 정체(다스림)로 구별하고 있다....사회와 정치의 구별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유명한 말의 번역은 정치적 동물이 아닌 사회적 동물로 굳어졌고, 정치적 삶 또는 좋은 삶 없이도 사회적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36-37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의 원인은 경쟁, 불신, 공명심이며,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홉스에게 인간의 자연 상태는 곧 전쟁상태이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올바름과 사악함의 구별이나 정의와 불의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는 법도 없고, 법이 없는 곳에는 불의도 없기 때문이다. 45

 

홉스는 전쟁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기본 자연법의 원칙을 평화를 추구하라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하라로 규정한다. 후자는 자연권을 함축하고 있다. 홉스는 이러한 기본 자연법으로부터 제2의 자연법이 도풀된다고 말하면서 권리의 포기를 주장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면 강력한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자기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권리를 상호 양도하는 것이 계약이다. 47

 

게몽사상사들과 자유주의자들...이러한 사회 분화의 추세는 턱과 무관한 자유연애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평범한 사람들도 누구나 연애할 수 있고 교회나 가문의 허락없이 결혼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종교적 목적과 도덕적 가치 평가가 배제된 예술, 에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런 분화는 어쩌면 17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유 담론은 사회가 수많은 자율적 영역들로 분화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63

 

루소는 만장일치의 게약으로 탄생한 공화국을 공동자아”, “공적 인격등으로 표현한다. 개인에게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어인 자아’, ‘인격등이 공동적인 것 혹은 공공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관념, 이것이 루소의 계약론이 앞선 다른 계약론자들과 같는 차별점이다. 괴물이 곧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5

 

루소는 계약에 참여한 사람들을 집합적으로는 인민”, 참여 개인으로는 시민”, 법률에 종속되는 자로서는 신민이라고 부른다. 75

 

신이 죽고 세계의 궁극적 의미는 상실되었지만(탈주술화의 세계, 세계의 의미 상실은 베버에게 니체의 영향이다.) 학자는 나름의 가치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예술가는 나름의 가치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종교인은 나름의 가치로서 신성한 것을 추구한다. 베버는이러한 근대의 분화된 가치 질서를 가치 다신교라고 표현한다. “어떤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한에서, 신성할 수 있다는 것을 근대인은 받아들여야 한다....가치 다신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추하게 생긴 위인이 있을 수 있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과학자가 있을 수 있고, 과학적 진리에 반대되는 설교를 하는 성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진리,아름다움, 성스러움 사이의 연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97

 

아렌트공적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두 가지 현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공적인 것은 공중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모두에 의해 보일 수 있고 들릴 수 있으며 매우 널리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공적인 것은 우리에게 있어 공동의 것이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사적으로 소유한 장소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세계 그 자체를 뜻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이런 세계 안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것처럼 서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서로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110

 

아렌트가 볼 때, 중세에는 관조적 삶’, 즉 혼자 사유하고 명상하는 수도자의 삶이 활동적 삶을 대체해버렸다. 그래서 인간의 조건의 한 축에 상응하는 활동인 행위와 정치적인 삶이 위축되었다. 근대에 들어서자 관조적 삶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관조에 맞서 강조된 활동은 노동에 국한되었다. 근대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노동과 작업을 중심으로 인간의 활동적 삶을 회복하고자 한 마르크스의 시도가 인간의 조건 중 하나인 다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마르크스는 관조와 행위의 대립에 주목하지 않고 관조와 노동을 대립시켜버림으로써 활동적 삶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111-112

 

아렌트에게 정치적인 것은 다수의 인간들이 서로 간의 차이를 기반으로 토론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합의나 계약과 같은 결과를 낳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의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아렌트는 폴리스에서의 행위에 대한 개인적 관조의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한 소크라테스학파 이전의 그리스, 즉 오이코스에서의 소유를 기반으로 다수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던 폴리스의 전성기를 모델로 삼고 있다...이외에 미국 혁명의 전통을 높이 평가하고, 혁명초기 사라져버린 평의회들에 주목함으로써 그가 지향하는 정치의 상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113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가난한 자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필연성, 생존 과정 자체의 절박성 때문에 자유를 포기해야만했던 혁명이자 빈곤과 필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실패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유럽의 혁명운동들도 대부분 사회의 문제, 즉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했고, 그로 인해 공적 자유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는 빈곤의 곤경이 없었다. 그곳의 근면한 자들은 필요의 절박함으로 찌들지 않았고, 혁명이 그들에 의해 압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국 혁명에서 제기된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혁명의 방향은 자유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제도들을 설립하는 데 집중되었다.115

 

아렌트가 공적 영역을 정치와 동일시한데 반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은 정치적 공론장의 경우에도 정치 체계와 구별된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활동하는 결사체들을 정치 및 경제와 구별되는 시민사회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공공성 이론과 구별되는 하버마스 이론의 핵심적 특정이 바로 행정 중심의 정치 체계와 공론장을 구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3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정치사회로부터 뚜렷이 구분한다는 점일 것이다. 126

 

하버마스19세기 말부터 국가의 사회화사회의 국가화가 진행되면서 공공 부문과 사적 부분의 교착 경향이 일어나 정치적 공론장의 독자적 입지가 줄어들었다고 분석한다....20세기에 들어와서는 부르주아 공론장이 붕괴되어 갔다고 진단한다. 대중매체와 광고의 발전으로 문화를 논하는 공중에서 문화를 소비하는 공중으로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19세기 파리의 갤러리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무명 평론가들이 모여 논쟁하는 장소이기도 했다.(샤를 보들레르) 128 -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루카치는 자본의 상품의 물신숭배를 지적한 것을 모티브로 삼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대상성 형식이 물화된다고 비판했다....대상성 형식이 물화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것도 사물처럼 측정 또는 계산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정신, 감성, 사회적 관계 등이 모두 점수, 수치 등으로 매겨져 서열화될 수 있다....교육공학에서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도 물화의 사례로 볼 수 있다. 130

 

하버마스는 체계이론의 체계 개념을 수용하면서, 이 하위 체계들 중 언어적 의사소통이 불필요한 두 개의 체계, 즉 권력을 조절 매체로 하는 행정 중심의 정치 체계와 화폐를 조절 매체로 하는 경제 체계만을 자신의 사회이론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학문, 교육 등 언어매체가 사용되는 영역은 조절 매체에 의해 의사소통 부담이 경감되지 않기 때문에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된 영역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권력과 화폐라는 조절 매체는 언어적 의사소통의 부담을 경감시키며, 그에 따라 정치와 경제는 생활세계로부터 자립화된다고 본다. 쉽게 말해, 힘과 돈을 이용해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하는 영역이 말로 해결해야 하는 영역으로부터 떨어져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사회가 생활세계의 단계와 체계의 단계라는 2단계로 고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단계의 구별은 의사소통적 행위와 목적론적(전략적) 행위의 구별에 상응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체계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괴물인 반면, 생활세계란 우리가 함께 능동적으로 일구어나가는 인간적 세계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137-138

 

하버마스의 공론장이 제도로 개념화될 수 없으며, 더구나 조직으로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론장은 권한, 역할, 구성원 자격 규제 등을 갖춘 규범적 구조물이 아니다. 공론장은 외부에 대해 열려 있고 변화 가능한 지평이기 때문에 체계도 아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정보와 견해의 의사소통을 위한 네트워크로 서술하며, 그것이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실천의 일반적인 이해 가능성이라는 기초 위에서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론장에서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문외한도 부담 없이 의사소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공론장은 생활세계라는 드넓은 일상적 상호작용의 저수지를 기반으로 한다. 141

 

푸코의 비판이 계보학적이라 함은 우리가 존재하는 형식으로부터 우리가 행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연역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를 만들어주었던 우연성으로부터 우리가 존재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행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을 분리해낸다는 의미에서라고 말한다. 이 말 그대로를 해석해보자면, 고고학이우리의 현재적 존재가 과거로부터의 연속적 서사도, 역사적 진보도 아님을 보여준다면, 계보학은 더 나아가 우리의 존재에 부과된 이념을 거부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줌과 동시에 우리가 다르게 존재하고 행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는 주제 만들기 방식과 관련된 고고학적 연구와 달리 계보학적 연구가 실천과 변화를 통해 주제 만들기를 수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좀 쉽게 풀어보자면, 계보학은 고고학을 통해 족보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깨달은 후 족보가 부과해온 가문의 의무와 다르게 행하고 아예 가문으로부터 이탈해서 살 수도 있게 하는 태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위반할 수 있도록 동력을 제시하는 방법론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50-151

 

푸코는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에서 근대 에피스테메의 종말, 인간의 사라짐을 전망한다. 인간이 세계를 구성하는 초월적 주체라는 관념, 즉 인간중심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의 발전을 통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적 구조 혹은 잠재적 구조의 효과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적 반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중심주의는 근대에 한정된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에 놓는 배치가 흔들리게 되면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154-155

 

존재의 미학을 추구하는 주체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적 관계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이다. 그래서 삶의 기술로서의 절제는 자기가 잘 돌보는 일이지 그 대가로 어떤 보상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미래의 향락을 위한 금욕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자기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 또는 자기 배려에는 다른 외적인 목적이 없다.....푸코의 비판적 존재론과 존재의 미학을 통해 우리에게 괴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괴물이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분석하고 위반의 가능성을 모색하라. 하지만 괴물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형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말고 특정한 변형을 시도하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니 우선 자기를 잘 돌보라. 자기를 돌볼 때 괴물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규칙을 세워 절제 있는 삶을 살아라. 162-163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다는 루만의 주장은 사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루만은 지금까지의 사회학이 가졌던 인식론적 장애물의 첫 번째를 사회는 구체적인 인간들로, 그리고 인간들사이의 관계들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이라고 말한다. 루만에게 있어 사회의 요소는 오직 커뮤니케이션들인 것이다. 175

 

현대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으로밖에 답할 수 없다. ‘나는00이다00자리에 무엇을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나를 그런 것처럼 대해주는 사회적 관게, 즉 나를 역할로서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확인해주는 관계에 대한 욕구가 커진다. 루만은 현대 사회에서 확산된 이러한 독특한 사회적 관계를 친밀관계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에서는 역할에 따른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관계들의 가능성도 확인되지만, 인격들이 서로를 유일무이한 세게를 가진 자로 확인해주는 밀도 높은 관계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커진다. 178

 

루민의 매체이론에 따르면, 각 기능체계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차단된 것은 사회의 기능체계들이 탈도덕화 되고 각 영역별로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 누군가의 정보 선택 및 통지 기호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이해와 새로운 정보 및 통지 기호 선택으로 이어지는 일-종교도덕이 보장했다. 정치와 법은 이러한 포괄적 도덕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래서 악마적 예술이나 신성하지 못한 진리는 배척당했다. 그에 반해, 현대화 과정에 분화된 매체들인 권력, 소유, 진리, 사랑, 예술, 가치들과 권력의 이차 코드화 매체인 법, 소유의 이차 코드확 매체인 화폐 등은 각각의 맥락에서만 제안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거절이 개연적인 경우에도 수용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갖는다. 예를 들어, 권력은 민방위소집 통지서 한 장으로 밤새 술을 마신 30대 아저씨가 아침 7시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 있을 수 있게 하며, 화폐는 그냥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더럽고 힘든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피곤에 삐든 상태에서도 연인의 모든 제스처나 말과 뉘앙스에 집중하면서 맞장구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소집 통지서로 상품을 살 수 없으며, 돈을 많이 낸다고 재판에서 이길 수 없고, 권력으로 사랑을 쟁취할 수도 없다. 180

 

각 기능체계는 그 나름의 체계/환경 차이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전체 사회의 구조 유지나 그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무관심하다. 기능체계들 간의 상호견제가 약화되면, 목적 지향이 강한 기능체계들은 고유의 실적 추구에 전념할 뿐 전체 사회를 고려하지 않는다. 루만은 1990년대의 저서들에서 경제, 학문 등 목적 지향이 강한 체계들은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는데 반해, 목적 지향이 약한 면역체계인 범은 세계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국내법에 의존한 국제법에 머물면서 침식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법이 보장하던 규범적 기대의 안정화와 헌법적 기본권 보장은 약화된다.....기존의 코드들을 포함/배제라는 슈퍼코드가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부정의한 전쟁에 대한 파병에 찬성할 수 있고, 배제되지 않기 위해 진리를 무시할 수 있고, 배제되지 않기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할 수 있거나, 경제적으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사랑과 결혼을 포기할 수 있다. 포함과 배제의 차이가 첨예해질수록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명령인 보편적 인권은 외면당한다. 182-183

 

대안적 커뮤니케이션이 송수신자로서 오늘날의 사회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기여해야한다...이러한 기여를 통해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힘겹다면, 그 노력이 우리 자신을 너무 불행하게 만든다면, 좀 쉬어도 좋고, 좀 이기적으로 즐겁게 살아도 좋다...우리 각자, 즉 각각의 나는 유일무이한 개인이며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사회구조를 변형하기 위한 노력은 내 삶을 즐겁게 또는 아름답게 만들거나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자이자 자아실현의 계기이다....노력이 성공하더라도 그에 대해 보상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존재의 미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185

 

세 장면에서 괴물이 되진 말자는 충고를 듣는 인물들은 각각 어떤 규칙을, 즉 사람 취급받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때 그 말을 듣는다. 돈 문제로 예술 동료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 돈으로 인간 신체를 노예화하고 성을 사는 것, 사랑과 섹스 사이의 견결 고리를 희화화하고 사랑에서 최소한의 일관성에 대한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 등이 그러한 규칙들이다......이 영화에서 괴물은 되지말자는 다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첫째 장면에서는 돈이라는 가치가 미적 가치를 대신해서는 안 되고 우정을 파괴해서도 안 된다는 것, 둘째 장면에서는 생필품에 대한 욕구를 상징하는 매체인 돈이 사랑이라는 매체가 상징하는 섹슈얼리티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셋째 장면에서는 그런 사랑이 남발되지 않음으로써 그 상징적 가치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과 섹슈얼리티가 우정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1-192

 

필자는 괴물을 큰 괴물, 사회와 함께 살면서 각각의 고유한 사람 되기라는 힘겨운 과제를 포기하고 사회의 여러 조직들로부터 부여받은 역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간, 그래서 자신의 역할 수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인간으로 규정하고자 한다....문제는 자신의 여러 가면을 비교해 살펴보면서 이렇게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짐승, 사람, 괴물, 이 세 가지를 뚜렷이 구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오직 자신이 지금 과연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오늘은 짐승처럼 행동한 건 아닌지, 요즘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하는 길밖에 없다. 물론 이렇게 반성하는 것 자체가 곧 사람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모습들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남기 때문이다...아무리 노력한들 자기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의 통일합리성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200

 

학살 결정자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공적 역할을 부여한 맥락 이외의 다른 삶의 맥락에서서 자신의 가면을 되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히틀러와 당시의 독일 국가를 사회, 즉 큰 괴물과 동일시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그들은 나치 사회의 괴물로 사는 것이 곧 사회 속의 개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론을 가질 수 없었다. 202

 

필자가 이 책에 괴물과 함께 살기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개인은 사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함께 산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와 동일화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 속의 일부도 아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사는, 그래서 나에게 여러 가지 삶의 보람과 쓰라림을 동시에 안겨다주는 저 사회는 다맥락적이다. 나는 사회와 함께 살기 위해 학자로도, 선생으로도, 소비자로도, 소송인으로도, 당원으로도 살지만, 그 역할들 중 어는 것도 진정한 나는 아니다. “나는 나다라는 공허한 동어반복을 인정할때만,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비추어볼 수 있을 때만, 나는 사회와 함께 살며 사람되기라는 힘겨운 과정을 계속해갈 수 있다. 206

 

 

볕뉘. 읽고 난 뒤 오랜만에 옮기니  가물가물하다. 밑줄로 상기시켜 본다. 니클라스 루만의 관점에서 철학자들을 맥락있고 간결하게 설명을 잘해두었다. 발표 밑자료로도 쓸모가 있겠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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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자꾸 되뇌는가

 

   

 

말을 만들거나 정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다 안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말로 묶어두자마자 운신의 폭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겠다. 하루하루 살아나기도 힘든데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삶을 추상화시켜 또 다른 구석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 여유롭게 생각할 기회를 뺏거나 여러 갈래길을 오히려 막는 것은 아닐까? 삶에 밀려가는 강도는 개개인마다 가족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것에 남아있는 정서적인 연대도 점점 사라져간다. 사연만큼 서로 떨어져나가 혼자를 생산하기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삶이 오롯이 가족과 개인을 짓누를 수밖에 없다. 잘 살든, 못 살든, 혼자이든, 여럿이든, 부양가족이 많든 적든, 아프든지 아프지 않든지……. ... 각자생존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피폐함은 늘어나고 원심력이 현실에 더 영향을 미쳐 더 크나큰 어려움이 목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다.

 

삶의 버거움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뜩이나 조사하는 방법을 취해서도 안될 테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감추고 싶은 사실을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가뜩이나 예기치 않은 불운에 연루되어 빚마저 진 마이너스 삶들이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모임들 사이사이 양념처럼 나누거나, 책과 주제를 핑계로 가늠해보기도 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상을 미뤄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살림살이의 수준을 느낀다는 것마저 쉽지 않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도, 중요한 일의 순서도 모두 다를 테니까.

 

하지만 경제적 삶, 살림에 대한 규모나 틈을 엿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것이 제한하는 운신의 폭과 일상을 양적보다 질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모르는 것이 약인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현실을 드러내놓지 않으면 어쩌면 더 나은 일상과 출구에 대한 생각조차 헤아리기는 더 어려운 것은 아닐까?

 

좋은 삶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루어볼 여력이나 남아있는 것일까?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이론의 책장에서 가져다쓰는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 살펴볼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눌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 역시 책 속의 이야기일 뿐 지금 여기의 생생한 삶, 아픈 현실을 딛고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문턱너머의 이야기는 아닌가? 좋은 시절의 이론 속 탐구는 아닐까? 일상의 한 땀 한땀, 또 다른 아픈 생각들로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면 이 역시 무용한 것은 아닐까? 그날그날 먹을 우유와 끼니 걱정도 어려운데, 여유가 가미되거나 경제적 삶이 받쳐주는 삶들의 현실을 어긋난 삶의 주변머리들이나 하는 얘기는 아닐까? 그래도 나눈다는 것은 정녕 우리들 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좋은 삶, 좋은 이야기들이 고아한 고전의 풍미들 속에 멈춰져있다면, 단 한걸음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어 이 또한 자신에 대한 위안이나 위문은 아닌가? 곁의 살림에 대한 가늠이 없다면, 다른 이들의 삶들의 변화를 읽거나, 눈여겨볼 수 없다면 이 또한 유행을 쫓아가는 이야기는 아닌가? 돈도 시간도 빙빙 돌아가는 현실에 매여 있는데 좋은 삶이 가당찮은 말씀아닌가? 현실은 그저 빙빙빙 현기증나게 돌고 있는데 무슨? 당신같이 여유붙들어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아니 또 다르게 생각하여 만의 하나 곁의 살림살이를 가늠하게 되어, 그것이 숨 쉬듯 서로의 일상 호흡으로 다가온다면 또 다른 출구가 될 수는 없을까? 곁의 삶의 패턴을 읽거나 소화하게 되거나 활동반경의 겹침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참여의 한계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어떻게 매여있게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새롭게 살려나가는 일들의 영역을 서로 찾을 수는 없는 것인지? 살림살이가 일상의 데이터와 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확인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함이 각인되어 좀 더 가슴에 담는 말로 가슴에 새겨진 언어로 가슴을 뒤흔드는 몸짓으로 서로에게 다가서는 방법으로 전화되는 계기는 될 수 없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전제조건이 동일하다는 가정의 물음보다 선행되는 질문과 상황이 있다. 그냥 바라는 것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있고, 영역이 있고, 계획이 있기에 의도가 드러날수록 목적은 외면되는 것이다. 삶의 동선이 우연히 마주치거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만큼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겠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수밖에. 상황과 처지, 형편이 다 다르기에,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도, 그것을 너머선다는 것도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가늠할 수 없다. 이 간극이 줄어들지 않고 멀어지기만 하는지. 가까워지고 있는데,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는데 오해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방편을 삼은 것이 무리수인지, 뜬구름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들은 점차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 경제적 삶은 더 더구나 궁금증의 터부영역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적 살림, 그 쇠락의 파고는 어김없이 여기에 미치는 것이겠다. 점점 더 살림살이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안위를 찾을 수 있는 이들이 줄어드는 세상이다. 안온을 더 구할 수 있는데 기댈 수 있는 곳이 늘어나길 바라지만, 이 역시 이상이다. 갈증을 느끼지만 탄산수로 일시적인 해소만 할 뿐 끝내 약수를 구할 수 없는 현실. 어쩌면 그 현실을 직시해내고, 가능한 방법과 삶의 시나리오들을 강구해내지 않는다면 모임도 그 파고에 잠길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바라던 안위와 마주잡은 손의 따스함도 잃고 각자도생이란 형용모순인 말에 매여 버리는 것은 아닌가?

 

가까운 이들에게 삶을 걸고 삶의 맥락을 짚어낼 때, 일상의 결의 혼자에서 슬며시 곁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가까운 이들이 삶에 대한 단단한 벽을 좀더 말랑말랑한 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만의 갇힌 살림살이의 왜곡된 벽을 허물게 되어 살아지는에서 살아가는희미한 가능성을 맛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의 지평이 조금이나마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살림살이를 더 이상 고정된 것이나 내 삶을 짓누르는 등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덜어내야 하는 우리들 삶의 지혜로 가져올 수는 없을까? 자본주의라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살아지는것이 아니라 살아내는구명보트를 타는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삶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그때그때 살림살이의 수준과 굴곡을 가늠하지 못하면, 삶들의 형평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생동감 있는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로 번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것은 아닐까? 닫힌 주장과 닫힌 해석에 머물러 설득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이란 팔 할이 경제적 삶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경제행위로 귀결되고 경제행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이 전체를 하나도 볼 수 없고 총체성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판단 고리는 경제로 시작하고 귀결되며 경제의 맥락과 배후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질문이자 주장이겠다.

 

연금,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등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터와 생애주기 속에 있는 자신감들은 이런 평형감각 속에서는 다시 무게중심을 잡아야하고 잡을 수밖에 없다. 경제적 파이가 변했을 뿐만 아니라 변해가고 변해갈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탐색과 자전거타기와 같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겠다. 경제적 풍요와 빈곤에 대한 일상의 감을 갖지 않고서는 정치토론이 불가능하고 불용하다. 비정규직, 노인과 노약자의 삶을 비교해서 얻은 감을 느끼지 못하고서는 맥락있는 정책과 대안이 나올 수 없지 않을까?

 

뒷북만 치는 정치와 정책, 문화흐름들은 정작 경제적 삶의 저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요구의 수준도 제도의 틀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 조차 보려고도 바꾸려고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늘 피해자와 피해만 과장되게 나타나며, 같은 부류의 집단이 형평의 차이가 나는 집단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 평형감각조차 퇴화되어 버린 상태가 지금 여기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반대의 논거만이 충만하고, 단기적인 시각만이 돋보이고 좀 더 장기적인 실용적인 대안들이 회자되지도 살아남을 길도 없는 것은 아닐까?

 

행위 이면의 경제의 맥을 잡으려는 노력은 경제적 상처로부터 삶이 떨어져나가는 이들에 대한 아픔으로 이어져있는 것은 아닐까? 밀려드는 아픔들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중심부에서 탈락하는 이들에게 삶이 바래져버리는 것을 사전에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팔딱거리는 그물 같은 맥동 속에서야 모임의 존속도, 네트워크의 미래도, 변화의 조짐도 흐릿함에서 또 다른 가시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이력과 삶의 맥락을 다시 보게 되는 바닥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상과 삶의 질과 좀 더 다른 가치를 나누고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살피면서 궁구한 것을 그제야 현실 속에 적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의 파고와 아픔이 느껴지는 범위만큼에서야 자본주의를 벗어난 논의와 실천과 사유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역이란 실체 없는 것이 그제서야 구체적인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경제에 목매인 살아지는 존재에서 경제의 자장에 정치를 삶 속에 대입시켜볼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닐까? 중앙이 아니라 분권의 실마리는 살림살이에 좋은 삶들의 자흔들을 모아 흔들리는 자장 안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원심력이 아니라 구심력은 그렇게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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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들은 아닌가

-‘민주주의자본주의란 물을 다시 삼키다

 

 

물고기는 물밖으로 튕겨나온 뒤에야 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패인 수레바퀴 자국의 남은 물기로 온몸을 버둥거린다. 하루하루 일상은 어김없이 다시 온다. 왜 사느냐는 물음도 사치이고, 힘겹게 견디는 나날이 버겁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건조해지기만 한다. 그런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전제를 다시 한번 의심할 수 있을까? 삶이 목전에 위협을 느껴서야 다시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삶들을 비틀면서 감싸고 있는 물기축축한 사회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의심해볼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낙인처럼 패여있는 수레바퀴 안, 뻐끔뻐끔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물고기들은 아닐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를 그렇게 외치고 불렀건만 과연 무엇이 나아졌으며 우리는 국민이기나 한 것일까? 선거때만 돌아오는 주권은 있기나 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민의와 사회의 돌아가는 시스템 사이의 간극, 차이, 괴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것은 아닌가?

 

거시적인 안목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나만 잘먹고 잘살고, 우리가족 밥벌이 하기도 힘든데 왜 통찰을 가져야 한다고 주제넘은 소리를 들어야하는가? ‘지금여기300여년의 호흡으로 조금 떨어져서 다시 본다고 나아지는 것은 있을까?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어 분노의 나날을 지내는 것보다는 생산적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의 포화 속에 저자들은 이 질문과 박제화된 삶들을 분별해내게 할 수 있을까?

 

두 저자의 목소리는 남다른 데가 있다. 고병권 저자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되삼키고 있다. 또 한 저자는 항아리 속에선 항아리를 볼 수 없다라는 맑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르면 자본주의에 당한다고 경고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지는 이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마키아벨리가 여러 공국의 정치가로 조언을 하던 시대가 아니라 단일한 국가를 만들면서 법위에 존재하는 주권을 그려내고, 단체별로 조합별로 각각 힘이 다른 집단의 단결을 금지하면서 동등한 인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한다. 보댕, 홉스, 루소는 토지와 마을에 귀속되는 개인이 아니라 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법적으로 분리된 개인화가 되는 과정을 발명해내고 균질한 통일된 인민을 셀 수 있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 사상을 토대로 근대국가가 발견되었다. 그 한가운데 외톨이가 된 개인은 사회계약이나 맹약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권리를 양도하는 상상의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단결할 수도 없는 개인의 존재임과 동시에 국가의 인민이 되어가는 과정과 연결된 것이다. 그 과정은 동시에 국민이 되는 것이었다. 필연적으로 크고 힘센 짐승같은 민주주의의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의제인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여기 민주주의의 속성과 같은 시작이며 아무런 해결도 할 수 없는 현재 민주주의의 봉착점이기도 하다고 한다. 봉건주의, 절대군주시대와 달리 법위의 힘인 주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균질화된 인민이 법적인 힘을 갖고 대표를 통해 권한을 행사하는 것, 주권=인민=대표체계는 대의민주주의제의 출발이면서 자본주의의 탄탄한 지반을 다지는 것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그물망에서 난민은 국가도 없고 주권도 없고 국민도 아니면서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도 없는 존재이다. 살아있으되 아무런 주권도 법적인 힘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추방되는 이주노동자도, 선거권도 없는 청소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비정규직도, 선거때면 선거하지 않는 유권자는 결코 대의될 수 없는 것이 보고 있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 그물에 빠져나가는 사이존재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현 대의민주주의 그물에서 대표될 수 없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하수구에 빠진 채 민주주의의 밧줄을 잡을 수 없다.

 

발라낸 개인으로 성장한 자본주의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적인 접근으로 그 많은 변화를 헤아릴 수가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은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수많은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게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자본주의의 삶밖을 보고자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연구만한 시각이 없던 것이다. 위험한 자본주의라는 책은 저자가 맑스의 자본론을 40여년간 연구하면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여 대학생들에게 쉽게 강연한 것이다. 그 사유와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자본주의가 얼마나 세계화하면서 국지적으로 구도를 바꾸고 있는지 보여준다. 최근 TPP의 경제협력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공적연금의 민간보험화와 대학교육의 세계적인 균질화와 시장화에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틀내에 어떻게 한계지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력들을 세세하게 밝히고 있다.

 

 

두권의 책을 통해서 독자가 작은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 시스템과 300여년 움직여온 자본주의를 얼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전제가 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경계에 대한 시선을 놓치고선 좋은 삶도 함께하는 삶도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후배 고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 그중에서도 너를 제일 사랑한다. 부디 공부 좀 해라. 공부를 지독하게 하고 나서 지금의 그 발랄한 생리와 반짝거리는 이미지와 축복받은 독기가 죽지 않을 때, 고은은 한국의 장 주네가 될 수 있다. 철학을 통해서 현대공부를 철저히 하고 대성해라. 부탁한다.”

 

비교적 얇고 서술하는대로 읽어나가면 금방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수 있다. 그대 독서에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도 이 시선들로 인해 조금이라도 초점이 맞추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자들의 무등에 타고 잠깐이라도 멀리 바라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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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방식은 삶의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죽음이란 자기를 버리는 하나의 형식이며, 이 형식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살아 있는 동안 예행연습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38

 

자유낙하라는 소설은 추락이 인간의 자유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곤궁과 착취하고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간파한다. 추락은 우리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간이 자가당착에 빠진 동물인 이유는 창조력과 파괴력이 똑같은 원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언어를 쓰는 동물은 신적인 창조 능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창조의 강력한 원천이 대부분 그렇듯 이 능력은 근본적으로 위험하다. 언어를 지닌 동물은 지나치게 빨리 발전하다가 한계를 넘어 자기 자신을 무화시킬 위험에 늘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45

 

인간의 의미화 능력에는 엉뚱한 길로 빠질 끊임없는 가능성이 탑재돼 있다. 옆길로 샐 가능성이 없는 이성은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자유에 파멸이 내재해 있는 셈이다. 48

 

악을 인간 조건의 바뀌지 않는 존재론적 특성으로 여기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 유혹에 빠지는 일은 인간이 악 앞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하고 공존해야 한다....질병도 연속성이 있지만, 의사들은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명론적 체념에 빠져 치료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54

 

악은 자기가 완전히 독립적이며 무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고 믿지만, 사실 악은 혼자 생겨나지 않았다. 악 이전에는 늘 무엇인가 먼저 존재했다. 이것이 악이 영원히 비참한 이유 중 하나다. 82

 

파시즘은 타도해야 마땅하지만,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에 파시즘 타도라는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있을까? 결국 자유주의도 고매한 이론처럼 허약한 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인류의 사악함을 교양 철철 넘치게 혐오하며 외면하는 자유주의나 휴머니즘 따위의 신념으로 어떻게 파시즘을 쳐부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이열치열, 곧 악을 포용함으로써 격파시키는 방식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와 모더니즘은 둘 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보다 위험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파시즘 만한 깊이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 89

 

모더니즘과 파시즘은 모두 원시와 진보를 통합하려 한다. 정교함과 자연스러운 충동, 문명과 대자연, 지식층과 민중의 통합이 목적이다. 현대 기술의 추진력은 전근대의 야만적본능에게서 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합리주의적 사회 질서를 내던져버리고 야만의 자연스러움에 깃든 뭔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다...새 미개함이 옛 야만하고 다른 점은 바로 자의식이다. 92

 

악은 인과율을 거부한다. 목적을 고려해야 하는 악은 자아 분열에 빠지고, 정체성이 파괴되며, 처지에 안 맞게 너무 앞서가는 꼴이 된다. 그러나 무는 이런 방식으로 분할되지 않는다. 무가 시간 속에 있을 수 없는 까닭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시간은 차이의 문제인 반면 악은 지루할 만큼 영원히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108

 

오셀로는 수수께끼의 핵심을 뽑아내자는 생각에 빠져 애초에 수수께끼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115

 

악은 순수한 도착이다. 악은 일종의 장대한 우주적 심술이다. 악은 불의를 숭앙받을 만한 업적으로 만들려고 기성의 도덕적 가치를 뒤집겠다는 주장을 하지만, 정작 자기는 도덕적 가치나 업적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악이 은폐하던 비밀이다. 119

 

대개 누군가를 대량 학살로 치닫게 하는 부류의 타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자기의 자아 심층부에 자리한 끔찍한 공허를 드러나게 하는 자들이다. 이 경우 그자는 이 고통스러운 부재를 물신, 도덕적 관념, 순수성이라는 환상, 광적 의지, 절대 국가, 총통의 남근 이미지로 채우려 한다. 이런 면에서 나치즘은 다양한 부류의 근본주의를 닮았다. 타자를 제거하는 도착적 쾌락은 자기의 건재를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정체성 중심부의 공허는 죽음의 전조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려면 당신의 자아에 이런 투라우마를 구현하는 자들을 일소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심지어 이론상의 정복도 불가능한 죽음이라는유일한 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26-127

 

지구상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 나치에게 매혹적인 계획이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이 미적으로 완벽하다는 점이었다. 완벽한 파괴라는 관념에는 악마적 환희가 있다. 결함과 미진한 결말과 조잡한 근사치 따위는 악이 못 견뎌하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 관료주의와 태생적으로 친밀한 이유다. 반면 선은 사물의 얼룩덜룩함과 미완의 성질을 사랑한다. 128

 

악은 삶에는 어차피 아무 가치도 없지 않느냐고 귓가에 속삭임으로써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거짓 위안을 준다. 늘 그렇듯이 악의 적은 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가 잘 알고 있던 대로, 악이 선의 면전에 침을 뱉는 이유는 선이야말로 단연코 가장 충만하면서도 가장 깊이 향유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134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사악함을 기뻐하는 자들을 파괴적 기쁨과 비참한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라 묘사한다. 이것은 이른바 현대식 용어로 도착적 쾌락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139

 

알코올 의존자는 절망한다. 그 사람은 출구라고는 없어 보이는 갈망과 자기혐오의 영원한 회로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지옥에 살고 있는 셈이다. 143

 

절망에 빠진 자들은 자멸적일 뿐 아니라 오만하다. ...절망의 증거야 말로 이자들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며, 이자들이 자기이기를 바라는 이유, 고통에 빠진 자기가 되려는 이유다. 145

 

악은 재치도 임기응변의 수완도 전혀 없기 때문에 큰 슬픔이나 환희나 격정을 마주하면 아장아장 걷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악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이유는 믿음을 가질 만큼 충만한 내면의 삶을 갖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지옥은 형언할 수 없는 추한 것들의 현장이 아니다. 지옥이 그런 곳이라면 차라리 들어가겠다고 자원할 가치가 있으리라. 154

 

아퀴나스는 악을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결핍이라 여긴다. 아퀴나스에게 악이란 결핍이며, 부정이고, 결함이며, 상실이다. 악은 일종의 기능 부전이자 존재 심층부의 결함이다....고통이란 삶의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다. 155

 

악은 물질이나 세력이 아니다. 악을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포 영화처럼 악을 물신화하는 짓이다. 악은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속성이지 우리 너머의 어떤 외계 세력에게서 솟아나오는 무엇이 아니다. 또한 악이 우리에게서 비롯되는 이유는 악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악이란 존재로 더 충만한 것이 존재가 결핍된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다. 이런 면에서 악은 일종의 영적 슬럼화다. 156

 

악한은 삶의 기술이 결여된 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삶이란 색소폰 연주하고 같아서 끝없는 연습을 거쳐 능숙해져야만 한다. 악한 자들에게 삶이란 요령부득의 문제다....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이런저런 면에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고장 난 존재다.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삶의 기술에 엄청나게 무지하다면 나머지 우리들의 수준은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158-159

 

악은 몇몇 악의 실행자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만큼 엘리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악이 천지에 만연해 있다는 식으로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 금전 이득을 얻으려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핵무기를 사용할 채비를하는 따위의 평범한 악이 순수한 악보다 훨씬 더 만연해 있다. 악은 잠 못 이루고 애태워 걱정해야 할 만큼 특별한 것이 아니다. 160-161

 

신이 악을 허용하는 이유를 따져 묻는 짓은 신을 합리적이거나 윤리적인 존재로 여기는 처사인데 신은 전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신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일은 외계인이 삼각형 초록색 눈을 가지고 유황을 들이마시는 격이다....이런 식의 묘사는 빈약한 인간의 상상력만 부각시킬 뿐이다...기껏해야 신을 인간의 형상을 본떠 왜소하게 만들려는 맹목적 계몽주의 관점일 뿐이다. 신은 인간 논리의 범위 안에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176

 

많은 악은 나태와 두려움과 탐욕과 집착 등 고요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딱히 남부끄러울 것도 없는 동기에 따라 야기된다. 178

 

역사

 

헤겔은 역사를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지혜와 개인의 미덕이 희생되는 도살장이라 봤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 속 행복의 시대는 텅 빈 페이지들이다. 또한 헤겔은 악과 부정과 인간 정신이 창조한 가장 번영한 제국의 몰락’, 그리고 인간 존재의 형언하지 못할 불행에 관해 이야기한다.....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서의 행간에서 눈물과 아우성과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와 공포에 질린 대중의 비명과서로 죽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인간사의 영원한 불행에 관해 쓴 테오도르 아도르노 또한 견해가 똑같았다. ...인간 문명은 대부분 약탈과 탐욕과 착취의 역사였고,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 183

 

인간은 윤리적으로 모호하고 선악이 뒤섞여 있는 잡종이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왜 선이 정치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빈도가 그렇게 낮을까? 분명 사회사와 정치사의 성격, 곧 구조와 제도와 권력 절차의 특징 때문이다. 184

 

많은 부도덕한 행동이 물적 제도하고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죄가 인간만의 잘못이 아니듯 그 행동이 전적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이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실 나는 원죄 교리를 유물론식으로 이해해보자고 제안한 셈이다. 행위란 행위자가 사악하지 않아도 사악할 수 있다. 선도 마찬가지다. 악당도 이따금씩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선행은 분명 선인보다 중요하다. 188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놓고 신뢰할 만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절망적일만큼 일그러진 조건 속이 아니면 인간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조건이 달랐다면 인간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조건을 겪어보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않는가....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따분할 정도로 끈질긴 착취라는 주제의 이런저런 변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종들을 돌파해 진정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가 어떤 윤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존재인지 알아낼 기회를 갖게 된다. 분명 입맛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마땅히 인간은 결국 내내 괴물이었다는 사실만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자원을 향한 끝없는 투쟁이나 잔인한 권력의 강제에 따른 시각의 왜곡 없이 자기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는 서게 될 것이다. 190-191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정치 개혁에 더 큰 위협을 제기하는 요소는 악몽 같은 역사에 관한 인식이 아니라 무분별한 진보주의다. 193

 

이 책의 관점에서 보면 9.11 테러는 이라기보다는 부정이며, 이런 구분은 궤변을 훨씬 뛰어넘는 논거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실로 인류의 안정과 생존은 악과 부정 사이를 구별하는 데 달려 있다고 판명될 것이다. 악한 자들의 파괴 행동은 설득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이 하는 짓에는 합리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악한자들은 사람들이 사안을 보는 데 쓰려 하는 합리성 자체를 문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반면 합리적이거나 심지어 훌륭한 목적을 성취하려고 뻔뻔스러운 수단을 쓰는 사람들하고는 이론적인 논쟁이 가능하다.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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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성공 우울증이 발생한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20-21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빚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채무의 탕감도, 보상도 모두 타자를 전제한다. 따라서 타자와의 유대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보상의 위기와 채무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초월적 조건을 이룬다. 31-32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이 동의어다. 41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43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을 제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47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단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48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다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50-51

 

오늘날 우리는 주인과 노예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노예 주인 혹은 주인 노예일 뿐, 결코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가 종말에 이를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자유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역사는 우리가 정말 자유로워질 때, 우리가 주인도 노예도 아니고, 주인 노예도, 노예 주인도 아닐 때 비로소 종언을 고할 것이다. 54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아니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그 곁에 머물러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정신은 극단적인 데까지, 극도의 부정성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게 들어가 이를 자기 안에 끌어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완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56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58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60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나르시시즘적이고 상상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흘러넘치고, 그것의 경계를 해체한다.....나의 상상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도, ‘에게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질서를 폐기하는 것도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어저면 벌거벗은 삶의 끝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0-61

 

유혹에서 사랑으로, 욕망에서 성애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저 단순한 포르노로 전진해감에 다라, 그만큼 더 강력하게 비밀과 수수께끼는 위축된다...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70

 

욕망은 더 이상 무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적 선택을 통해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이 주체는 철저하게 선택을 통한 결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타인에 관하여 무엇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소망할 만한 기준인지 숙고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요구받는다. 더 나아가 상상이 고조됨에 다라 남성과 여성이 파트너에 대해 가지는 바람도, 함께하는 삶의 전망에 대한 요구도 변화했고 상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사람들은 환멸도 더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환멸이란 상상의 악명 놓은 하녀일 뿐이다. 73

 

근대적 자아는 자신의 소망과 감정을 점점 더 상상적인 방식으로, 즉 상품과 매체 이미지를 통해서 지각한다. 그의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소비재 시장과 대중문화에 의해 규정된다. 74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80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다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진다.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도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83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것 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84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건진리의 계기로서, 기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습관 속에, 새로운, 완전히 다른 존재방식을 도입한다. 사건은 상황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일으킨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킨다.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단절의 부정성에 있다. 사건적인 성격을 통해 사랑은 정치 또는 예술과 결합된다. 85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계산하는 사고 활동에는 아토피아의 부정성이 없다. 계산하는 사고는 긍정적인 것에 대한 노동이다. 어떤 부정성도 그것을 불안에 빠뜨리지 못한다. 89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가설이나 모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같이 강한 이론들은 데이터의 분석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강한 의미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이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근본적 결단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이다. 91

 

이론은 사물이 서로 뒤섞이고 통제할 수 없이 증식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로써 엔트로피의 감소에 기여한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즉 사물들의 흐름을 일정한 형태로 빚어내고, 이들이 범람하지 않도록 경계를 만들어준다. 오늘날 정보의 더미는 형식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92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 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는 정보의 더미,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소음으로 표출된다. 투명사회, 정보사회는 소음 수위가 매우 높은 사회이다. 하지만 부정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오직 동일자뿐이다.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94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체험은 완전히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 않다. 사랑이 긍정적 체험의 도식으로 전락할 때, 남는 것은 성애뿐이다. 성애 역시 가산과 축적의 원리를 따른다. 94-95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지니는 마력은 아토피아의 부정성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아포리아로 귀착되지 않는다. 96

 

볕뉘. 상가에 가고 오는 길 읽다.  장정일이 한병철에 대해 쓰는 컬럼을 보면 질투가 내장된 듯하다. 들뢰즈가 말한 대로 사랑보다 더 강렬한 것이 질투다. 질투는 그 상황을 선명히 찍어내고 돌려내어 있는 것보다 사실적으로 기억해낸다. 질투의 정신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대하라고 한다. 묘한 긴장에 대해 애써 판단하지 않으려한다. 긴장 역시 더 치밀하게 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묘한 라이벌?로의 의식이라 비평하는 비평가들은 없지만...조금 더 깊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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