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자유, 자치 그리고 적극적 시민

 

공화국은 인민의 일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결합해 있는 사람들의 집단 모두가 인민인 것은 아니다. 인민이란 법과 권리에 대한 공통의 합의에 의해 그리고 상호 이익이 되는 것에 참여하려는 갈망에 의해 결합한 상당한 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_ 키케로

 

기독교가 수많은 공동체 위에 강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사 속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인간을 끌어당긴 가치나 열망 등을 제공해주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결코 세계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대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그토록 중시했던 여러 이상들에 대한 관심을 기독교가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예컨대 정치적 평등의 이상은 기독교에서도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비록 전혀 다른 맥락 속에 삽입되었지만 말이다. 당시는 대부분의 사람이 최저 생존 수준 또는 그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경제적 잉여의 수준이 극히 낮았던 시기였다. 그런 세계에서 신 앞에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어느 누구도 도덕적·정치적으로 우월한 권리를 갖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정치적 평등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기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종교적으로나마 평등을 꿈꾸는 것이 최소한 좀 더 나은 삶의 비전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68

 

세속적 지배의 영역과 여적 지배의 영역 간의 구분은 아퀴나스에 의해 재검토되었다. 아퀴나스는,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수세기 동안 서구에는 잊혀 있다가 13세기 중반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을 기독교의핵심 교의와 통합하고자 했다. 아퀴나스의 저술에는 혼란스러운 측면이 많은데, 군주제가 최선의 통치 형태이지만 무제한적 권위를 부여받아서는 안 되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군주의 지배는 자연법-, 인간의 이성에 드러나는 신법의 일부’-을 군주가 준수하는 한도 내에서만 정당화된다. 국가는 종교적 교의를 해석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회는 통치자에 대해 심판하는 위치에 설 수 있다. 나아가 통치자가 자연법을 계속해서 침해한다면 그에 대한 반란은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발전하는 데 핵심이 되는 제한 정부 사상은 아퀴나스에 의해 일찍이 제시되었던 셈이다. 비록 그의 궁극적 관심은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이었지만 말이다. 69

 

중세, 기독교적 만국사회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의해 형성되고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사회는 분쟁과 갈등을 해결할 권위를 신에게서 찾았으며, 종교적 교의가 일차적인 정치적 준거점이었다. 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속성에 대한 가정이 기독교적 만국 사회를 압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등장과 종교개혁이 야기한 갈등에 의해 서구 기독교 왕국이 도전에 직면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정치적 통제 형태가 전반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기반이 형성되고 근대국가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70

 

11세기 말 공화주의는 어느 정도 부활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공동체들은 그들 자신의 집정관’, 즉 황제와 교황의 법적 통제권 주장에 맞서 자신들의 재판 업무를 관장할 행정관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집정관 체제는 새로운 정부 형태로 대체되었다. 사법 및 집행 업무에서 최고권을 행사하는 포데스타라는 행정관을 장으로 하는 통치 평의회를 갖춘 정부 형태가 그것이다. 그런 평의회는 피렌체, 파도바, 피사, 밀라노, 시에나 등에 존재했으며, 이에 바탕해 12세기 말에 이르러 실질적으로 이들 도시는 독립적인 도시국가 또는 몇몇 논평가들이 선호하는 개념인 도시 공화정이 되었다. 더욱이 포데스타는 선출직이었고 임기가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평의회에 책임을 졌다. 71

 

고전적 아테네 민주주의 시기의 정치 참여의 범위와 깊이라는 잣대로 보면,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은 그다지 특별하거나 혁신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장들과 권력들이중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봉건 유럽의 권위 구조에 비추어 볼 경우, 그런 발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통치 조직이란 신이 부여한 권력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지배적 가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오랫동안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전제적 절대주의적 지배자들에게 도전했던 사람들에게 이탈리아 도시 공화정이 영감이 원천이 되어 왔던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73

 

아테네에서 그랬듯이 시민은 아주 배타적인 남성 집단만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대개 귀족이 포데스타로 지명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종 시민들의 불만과 소요를 가져왔고, 배제된 시민 집단은 결집하여 자신들만의 별도의 평의회와 기구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다시 정치 갈등을 고조시켰고, 그 결과 폭력과 무정부적 상태가 간헐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터규 가문과 캐풀렛 가문 사이의 전투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화정이 무질서와 허약성을 초래한다고 결론내리고, 강력한 군주정체로 복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고 18세기 말까지 자치적 정체로서 생존한 도시 공화정은 베네치아가 유일했다. 73

 

공화정이 전개된 처음 1세기 동안 공화정 지지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13세기 중반에 재등장한 뒤에야 민주주의는 유럽 정치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대로 민주주의란 단어는 경멸적 의미를 띠었고, 사회 하층의 정치와 연관되었다. 즉 공공의 이익보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통치,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전제적이 되어 모든 사회적 차이나 기득권을 없애 버리고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권력 형태라는 것이다. 사실 르네상스 공화주의의 몇몇 특징들은 민주정치의 형태라기보다는 귀족주의적 또는 귀족적 공화주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분명히 도시 공화정의 옹호자 중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부르지 않았다. 74

 

그렇지만 도시 공화정이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크다. 기독교 군주제주의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자치가 가능하다는 중요한 본보기를 제시한 제도적 혁신이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며, 또한 새로운 정치에 대해 숙고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준 광범한 정치 협정과 텍스트 등을 볼 때에도 그러하다. 도시 공화정은, 고전 시대 이후의 정치사상에서 자기 결정과 인민주권을 지향하는 논의와 주장이 계발된 최초의 사례로서 기록된다. 75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 생활의 독특한 발전은 정치권력, 인민주권, 시민의 관심사 등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인식을 촉발시켰다. 많은 도시 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념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찾았다. 하지만 특별히 그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로마 공화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은 불안정, 내분, 내적 유약함 등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달리 로마는, 자유를 덕성뿐만 아니라 시민적 영광 및 군사적 힘과도 연계시킨 통치 모델을 제시했다. 로마는 정치적 참여와 명예와 정복을 결합한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로마는 군주제의 주장을 폐퇴시킬 수 있는 정치 개념을 제공했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공화주의자들에게 자유란 전제군주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통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공동 관심사를 운영할 수 있는 시민들의 권리 역시 자유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이해관계보다 공동선을 기꺼이 우위에 두는 영웅적 정신이나 애국주의, 공적 정신 등을 의미했다. 76

 

계발주의사상가들은 시민이 인간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데 있어 정치 참여의 본질적 가치를 강조한다. 반면 보호주의 사상가들은 시민들의 목적과 목표, 즉 그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 참여의 수단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계발 공화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전적 민주주의의 유산과 그리스 폴리스 사상가들 속에서 발견되는 주제들이다. 특히 폴리스 사상가들이 자기실현의 수단으로서 폴리스와 정치 참여의 본래적 가치에 대해 탐구했던 내용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정치 참여는 좋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화정 로마와 그 역사가들의 영향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보호 공화주의이론은 시민적 덕성의 심각한 취약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민이 귀족이든 군주든 어느 한 주요집단의 정치 참여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시민적 덕성은 부패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보호 공화주의 이론가들은 시민들의 개인적 자유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집단적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79

 

공화주의, 선출제 정부 그리고 인민주권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저작 <<평화의 옹호>> 권력의 충만함을 내세우는 교황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교회를 능가하는 세속 통치자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법은 인민의 의사가 총회에서 표출되는 것을 통해, ’모든 인민 또는 인민의 좀 더 중요한 부분에 의에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책은 당시에 건전한 사람들이 진저리친 책이었다. 교황이나 추기경, 사회질서 유지를 특히 걱정했던 저술가들이 이단자들을 비난할 때면...“저주받은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을 지녔다라고 고발했다.‘ 마르실리우스주의자라는 것은, 수세기 뒤에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붙여진 것과 비슷하게, 전복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80

 

당시에 거의 모두가 그러했듯이, 마르실리우스의 시민권 개념도 정치 참여개념을 수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소규모 공동체에만 적응될 수 있는 것-도시 공화국의 자치-이었다. 몽테스키외와 같은 후대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대규모의 확대된 영토에 대한 공화주의 정부의 적실성에 대해 고찰한 공화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모든 성인을 포괄하는, 현대의 지배적 민주주의 형태인 자유민주주의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제도나 절차를 주창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르네상스 공화주의자들은, 인민 정부란 그들의 지역공동체에 대해 확고한(소유권에 기초한) 이해관계를 가진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자율적 통치 형태라는 점을 당연시했다. 그들만이 지역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공적 관계와 의무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고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5-6

 

시민으로서의 삶으로부터 시민적 영광으로

 

마키아벨리는 선출제 정부와 참여 정치형태를, 시민의 복지와 시민의 영광의 가능성에 연결시켜 주창했다. 이런 연관성은 아마 다른 어느 곳보다도 그의 출생지인 피렌체에서 쉽게 도출되었을 것이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기에 가장 발전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세계의 정치사상과 새롭게 등장하는 유럽 정치 질서 모두에 굳게 발 딛고서 공화주의적 전통의 논의, 즉 보호 공화주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립과 자치와 영광스러운 노력의 조건을 시민의 참여로 찾으려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정치 문화는 이런 여러 관념들을 명료하게 표출해 주었고,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에 풍부한 맥락을 제공해 주었다. 87

 

그 이전의 마르실리우스나 그 이후의 홉스나 로크 등과 달리,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표방하고 지켜야 할, 조직체의 어떤 주어진 원칙(예컨대 국가를 개인의 선한 생활이나 자연권을 촉진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고정된 관점)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정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해 주는 어떤 자연스러운 틀이나 신이 부여한 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에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권력을 획득하고 이용하고 보유하기 위한 투쟁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사회생활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다...그가 염두에 둔 것은 시민적 영광을 얻기 위해 필요한 바는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는 마음, 즉 덕성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할 수 있는가이다. 89-90

 

마키아벨리는 역사 연구를 통해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요소를 결합한 혼합정체만이 덕성의 기반이 될 문화를 촉진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의 논리 역시 이론적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개별 정체의 결점을 보완하도록 조직된 혼합정체는 경쟁적 사회집단 특히 부자와 빈자의 이해관계의 균현을 잡아주는 데 가장 뛰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후대의 주장 - 국가 내의 권력분립이나 정당 경쟁에 기초한 대의 정부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자와 빈자가 모두 통치 과정 안으로 끌어들여진다면, 그리고 그들 간의 공직 배분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이 표출될 정당한 통로가 마련된다면, 그들은 일정한 형태의 상호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당시 지배했던 전통적 사고와 달리, 적대적인 사회 세력과 이견의 존재가 선하고 효율적인 법률의 가능성을 침식시키기는커녕 그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나 자치적 정치체제만이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으 이익을 촉진하고 방어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갈등과 불일치 역시 자유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91

 

파벌의 특수이익을 억누르기 위해 혼합정체가 필수적이지만, 경재 국가들의 도전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안은 자신이 봥쇄당하기 전에 그들을 봉쇄하는 것이다. 팽창정책은 한 집단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힘의 이용은 자유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92

 

부자나 귀족만 공적 업무에 관여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맥락에서 정치 참여를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장인과 소상인을 포함하는 통치 과정을 원했다. ‘인민또는 시민이란, 공공 업무에 실질적으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생각되는 자립의 수단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 노예, ‘부양가족등은 그런 이해관계를 가진 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94

 

공화국과 일반의사

루소는 18세기의 마키아벨리로 묘사된다. 루소는 공공 영역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체제를 공화정이라 불렀다. ‘공화죽의 적절한 형태에 대한 루소의 언급은 분명 그 이전의 선배 공화주의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마키아벨리처럼 루소는 민주주의 개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고전 아테네에 연결지었는데, 루소가 보기에 아테네만으로는 정치적 이상이 되기에 불충분했다. 왜냐하면 아테네는 입법 기능과 집행 기능의 명백한 분리를 구체화하는 데 실패했고, 그리하여 불안정과 파멸적 내분, 위기 시의 우유부단함 등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96

 

루소는 마키아벨리를 존경했지만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당대의 실제 공화국의 권력 구조와 타협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루소는 최소한 이상적 정부에 대한 이론적 저술 작업에서 그와 같은 타협을 일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진정한 형태의 공화국에 대한 여러 면에서 독창적인 해석을 발전시켰다. 97

 

루소는 개인을, 자신의 삶을 규율하는 법을 직접 제정하는 데 원칙적으로 관여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개념을 주장했다. 모든 시민은 무엇이 공동체에 최선인지를 결정하고 적절한 법을 제정하기 위해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치자는 통치자여야 한다. 루소에게 자치의 이상은 그 자체 목적으로 설정된다. 공적 업무를 살펴 처리하느 데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정치질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단지 국가만으로는 안 되고 어떤 유형의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 국가의 업무가 일반 시민의 업무 속에 통합되어 있는 사회가 그것이다. “주권은 대표될 수 없으며, 같은 이유에서 양도될 수 없다.....인민의 대리인은 인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민의 대행인을 뿐이며, 아무 것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인민이 자기 스스로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무효다. 그것은 전혀 법이 아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에만 자유롭다.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인민은 노예가 된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98

 

루소는 어떤 시민도 타인을 살 만큼 부유하지 않고, 자신을 파아야만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도 없는상태를 바랐다. 주요한 이익 다툼이 조직적 파벌 분쟁 - 일반 의사 형성의기반을 절망적으로 붕괴시킬- 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건의 전반적 유사성밖에 없다. 그는 절대적 평등주의자는 아니었다. 평등을 권력과 부의 정도가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권력이 폭력으로까지 나아가서는 안 되며 법과 권위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101

 

모델 2.2에 요약되어 있는 루소의 공화 정부 개념은 , 여러 면에서 자유주의 전통을 통틀어 자유와 참여를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더구나 정당한 정부의 원리와 집합적 이익을 위한 자치의 원리를 연계시킨 것은 그 당시 정체(특히 구체제)의 정치적 원리에 대한 도전이었을뿐만 아니라, 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원리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의 자치 정부 개념은 가장 급진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일부 핵심 가정 - 특히, 민주주의란 시민에게 이따금씩만 책임지는 특정한 유형의 국가에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생각 -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102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공화주의 사상사는 여성성과 여성을 기분 나쁘게 무시하고 있다. 이런 남성 풍조에 맞선 인물이 울스턴크래프트(1759-97)이다. 그녀는 프랑스혁명 및 18세기 말 유럽 전역에 확산된 급진주의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면서, 루소 저작의 여러 부분에 대해 경탄했다. 그런 사건들과 루소가 제기한 쟁점 등에 고무되어 사회 정치 이론에서 가장 놀라운 팸플릿의 하나인 <<여권의 옹호>>1791년 저술했다. 이 책은 그녀가 참여한 급진 서클-고드윈이나 페인도 일원이었다-내에서 열광적으로 수용되었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볕뉘. 자유주의, 공화주의의 정치사상과 사상가를 역사적인 배경과 인물에 충실하게 접근하여 정치사상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시각을 폭넓고 깊게 인식하게 만든 책이다. 꼼꼼하면서도 비교의 관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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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싫어하면서 배운다를 너머서 국민들 사이에 정치적 우정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그리고 그 조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공화주의의 문제의식이다. 서문 11-14

 

루소 자유로운 인민은 복종은 하지만 예종은 하지 않으며, 지도자는 두지만 주인은 두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민은 오직 법에만 복종하며, 타인에게 예종하도록 강제될 수는 없는데, 이것은 법의 힘 때문이다.” 17

 

노예를 두지 않은 최초의 공화국들이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아직 완전한 시민권은 시민들 중 소수의 특권층만 누리고 있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루카, 시에나와 기타 몇몇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벽 안에는 군주도 왕도 없이 시민들이 하나의 법제도 아래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다. 바로 이 성벽과 공회당 안에서, 그리고 법률가, 역사가, 정치사상가들의 서재 안에서 근대적인 공화주의의 사상이 태어났다. 33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그들이 말하는 자기 통치의 원리, 즉 자치의 원리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로마법의 원리에서 도출해냈다. 모두 그러한 의사결정에 똑같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공공선의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35

 

공화주의는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론체계였다기보다는 헌법적 제약 속에서 운영되는 대의제적 자기 통치에 관한 이론체계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38

 

자유주의에는 공화주의에서 볼 수 없는 창작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자연적인(양도불가능한 또는 생래적인) 인간의 권리라는 독특한 개념이다. 이 자연권 이론은 자유주의의 기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명백한 이론적 약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권리도 오직 법과 관습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권리는 역사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법과 관습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그것은 도덕적 요청 정도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마키아벨리는 후세의 사상가들과 달리 자연권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유만이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선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즉 좋은 청치제도와 군사제도를 갖추어야하며, 개인들이 충분히 시민적비르투를 체화하고 있어야 하며, 또한 운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힘세고도 공격적인 국가들이 너무 가까이 있지 않아야 한다. 40-41

 

공화주의는 우리가 타인에 예속되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 자유주의는 우리가 외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때 자유롭다고 한다....고전적 공화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은 요컨대 예속이 간섭보다 자유에 대한 훨씬 고통스러운 침해라는 것이다...자유라는 것이 우리가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생래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거나 우리가 공공 회의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기만 하면 그대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노력을 해야만 가지게 되면, 또 그만큼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신, 바로 이런 정신을 진작시킨다. 44-47

 

공화주의는 정치적 자유의 사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실현과 유지에 꼭 필요한 열정들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다. 공화주의 사상가들이 수세기에 걸쳐 변함없이 이야기해 오고 있는 지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직 시민들이 시민적 비르쿠라 불리는 품성을 가지고있는 곳에서만 자유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적 비르투란 숭무적이면서도 웅장하고 금욕적인 덕성이 아니라, 상업적 공화국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세련되면서 평범하고 관용적인 덕성이다. 그것은 엄격성과 유머, 정직과 융통성, 무거움과 가벼움 등을 조화롭게 가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마키아벨 리가 그의 전저작과 전생애를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49-50

 

공화주의적 애국자들에게 있어서 나라사랑은 계속해서 불어넣어야 하며, 또한 정치적 수단에 의해 끊임없이 강화되어야 하는 인공적인 열정인 데 반해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문화적 오염, 문화적 동화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자연스러운 생래적 감정이다. 54

 

정치사상은(또는 정치철학) 철학이나 법학과 같은 사이언스(학문)’에 속하는 분과가 아니라 레토릭’(말하는기술 또는 수사학)에 속하는 분과라는 점이다. 오늘날은 저작활동을 하고 논문을 쓰지만 마키아벨리나 다른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정치사상을 말하는 기술에 속하는 활동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즉 그들은 단지 독자들의 합리적 이성적 동의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까지 움직여냄으로써 어떤 정치적 아이디어에 대해 그 독자들에게 찬반을 설득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서 저술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성을 말하는 기술로써 보강하고자, 라치오ratio'오라치오oratio'로써 보강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모범사례, 비유, 실제 이야기, 격정적 권고 등 고전 레토릭의 모든 수단들을 즐겨 동원했다. 59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은 공공 회의장에서 실제로벌어지고 있는 것은 합리적 이성적 논의가 아니라, 서로 당파적 입장에 서서 레토릭의 여러 기법들을 총동원해 가면서 갑론을박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무엇보다도 듣는 사람들의 열정, 감정을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필립 페팃이 잘 지적하였듯이, 합리와 이성의 공화국이 아니라 수사와 웅변의 공화국이다....17세기까지 압도적인 지위를 누렸던 말하는기술에 입각한 정치사상하기가 복원되어야한다고 믿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에 있다...60-61

 

2장 자유의 새로운 이상향

 

간섭 또는 방해를 받는다는 것과 예속되거나 사적 주종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의 차이 시민들이 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독재자나 과두지배계급에 의해 핍박받는 경우, 여성이 자신의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면서도 전혀 저항할 수 없거나 사후적으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 근로자들이 고용주나 감독자의 크고 작은 횡포 아래 놓여지게 되는 경우, 퇴직자가 자신이 당영히 받을 권리가 있는 연금을 수령함에 있어서 담당공무원의 변덕에 좌우되는 경우, 환자가 건강을 되찾는 것이 의사의 호의에 달린 경우, 젊은 학자들의 직업적 미래가 연구성과의 질이 아니라 선배 학자의 변덕에 좌우되는 경우, 시민이 검사의 자의적인 말 한마디에 의해 언제라도 감옥에 수감될 수 있는 경우 등 이 모든 경우에서 간섭은 보이지 않는다....위의 예와 같이 예속상태에 있는 사람들은(그들이 아내이건, 근로자건, 퇴직자건,병자건, 또는 젊은 학자건 간에) 우리가 자유를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방해나 제한으로부터의 자유로 이해하는 경우, 한마디로 100퍼센트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잇다. 하지만 이들은 타인의 자의에 노출되어 있고, 따라서 프라우투스가 자신의 희극에서 묘사한 노예들의 삶과 같은 그런 예속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92-93

 

예속을 파가노는 자유의 부정과 그것이 가져오는 공포라고 정의했다. “폭압적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더라고 여전히 자유에 대한 공격이 된다. 자유는 너무나도 상하기 쉬워서 약간의 그림자만으로도 그 색이 어두워지고, 살짝만 입김이 닿아도 뿌옇게 그 투명함을 잃는다. 다른 사람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나에게 폭압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나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공포는 자유가 솟아나는 그 샘 자체를 파괴한다. 그것은 강물이 흘러나오는 발원에 깊숙이 퍼뜨린 독이다.” 94 “인민의 정치적 자유는 자신의 안전을 믿는데서 나오는 마음의 안정상태이다. 이러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도록 정치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95

 

4장 공화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는 자신의 핵심 원리인 자유의 이름으로 비판받았던 적은 (형식적 자유가 아닌 진정한자유 또는 실체적자유의 이름으로 도전 받았던 적을 제외한다면) 한 번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자유주의자들은 힘센 자들의 주종적 지배에 맞서 싸우려 할 때, 이러한 목적에 걸맞지 않는 그들의 자유 개념, 간섭의 부재라는 의미의 자유 개념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 대신 정의나 평등 같은 다른 이상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125-6

 

공동체의 최고의 목적은 자유주의자들이 개별 구성원들의 생명, 자유, 소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이미 사람들이 자연적 자유를 포기하고 정치공동체를 만들게 된 제일 이유는 바로 소유의 안전이었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도 공동의 편익이 자신의 것들을 자유롭고 걱정없이 향유하고, 자기 아내와 자식들의 명예가 침해받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유토피아 담론에 맞서 사회갈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유익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혁신적인 생각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는 민중파와 귀족파 간의 사회갈등이 로마를 자유롭게 유지한 첫 번째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다양성을 옹호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야지 남의 방식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구절을 더 새겨야할 것이다. 127-9 공화주의와 자유주의는 원작과 개작의 관계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의 가장 쓸 만한 교리적 원리들은 공화주의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었고, 자유주의가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원리들은 시간이라는 시험을 그리 잘 견뎌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이론에서 정치적 자유에 대한 공화주의적 관점을 상실해버렸고 예속상태를 제거하는 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131-2

 

마키아벨리를 필두로 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달리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생래적이거나 자연적인 권리에 대해서는 더더욱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적 권리 개념은 공화주의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와 시민적 삶의 이상이 완벽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토크빌은 어느 개인도 비르투가 없이는 훌륭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나라도 권리에 대한 존중 없이는 위대해질 수 없다. 심지어 권리에 대한 존중과 비르투 어느 하나가 빠져서는 사회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강제력 하나만으로 뭉쳐놓은, 이성과 지성을 가진 존재들의 조직이라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135

 

자유라는 이상을 단지 간섭의 부재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일정한 사회적 의무들 자선기관에 기부하기, 사회연대 프로그램 후원하기, 주요 시민사회 단체에 참여하기 등 을 이행하는 데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행동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믿거나, 이러한 행동을 통해 공동체가 좀더 품위 있고 평온해질 수 있다고 믿거나 또는 공익에 봉사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오만한 통치자, 오만한 시민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을 설득하여 공익을 위해 돈을 내거나 시간을 내서 봉사를 하도록 하는 법률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것을 자유에 대한 제한으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자유는 간섭의 부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기술했듯이 봉사의 면제이기도 하다...하지만 공화주의적 이상을 받아들인 시민은 공공 봉사 의무를 자유의 필연적 동반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136-7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시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자치적인 종족-문화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레스 푸브리카또는 키비타스의 멤버십에 따르는 여러 시민적 정치적 권리들을 행사한다는데 있다고 믿었다..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공공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인데, 공동체주의자들은 도덕적 선 관념을 공유함으로써 이것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138-9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공화국의 공적 삶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를 유지하고 시민들에게 시민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중요하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권장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화국의 주된 가치나 목적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를 지키고 최고의 시민들을 선발하여 책무를 맡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직접 참여 여부보다는 통치와 결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공공선에 진정으로 봉사하려 하느냐 여부이다. 140

 

공화주의적 평등은 단지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평등만으로 이루어져 있진 않다..모든 시민들에게 존엄과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조건들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한다...어는 시민도 가난을 이유로 공적인 명예로부터 배제되거나 오명을 얻게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아버려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사적인 혜택들을 미끼로 다른 시민들의 굴종을 사버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140-141

 

공적(그리고 사적) 구호(자선)는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경우라 하더라도 시민적 삶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아프거나 늙는 것은 결코 범죄가 아니다. 공화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라, 시민들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려 노력하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다. 따라서 공화국은 동정행위로서가 아니라 시민이 가진 당연한 권리에 따라 그러한 구호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화국은 시민들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또한 그 의무를 다른 사적 개인들에게 떠 넘겨서도 안 된다...“기독교적 자비는 배고픈자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먹였고, 헐벗은 자들을 보면 그들을 입혔으며, 아픈 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그 가난과 헐벗음의 원인들을 어떻게 제거할까에 대한 사고는 전혀 없었다.“ 142-143

 

공화주의적 덕성

 

몽테스큐는 시민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거나 사생활의 쾌락에서 헤어나게 되면 그들은 공동체를 사랑하게 되는데, 이는 수도원의 금욕생활을 통해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열정의 분출구가 막혀버린 수도사들이 자신의 종단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시민들은 엄격하고 검약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이와같이 몽테스큐는 물적 탐욕과 정치적 야심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사적 이익 추구 역시 시민적 덕성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보았으며, 시민적 덕성이 꽃피는 이상적인 토양은 엄격하고 검약하게 살아가는 작은 공화국이라고 믿었다. 147-8

 

피렌체 공화국의 통령을 역임했던 살루타티는 카토의 대리석 같은 엄격함을 닮을 필요가 없는데, 그는 공화국에 봉사했는지 몰라도 자신의 가족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고 한다...15세기 피렌체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시민적 덕성은 사생활의 포기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것은 사생활을 즐겁고 안전하게 만드는 사생활의 주춧돌이었다...알베르티는 가정에 관하여 제3권에 이렇게 말한다. “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좋은 시민은 평온함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평온함보다는 다른 좋은 사람들의 평온함을 더욱 존중한다고 말하겠네. 좋은 시민은 개인적 쾌락을 즐기지만, 자신의 쾌락보다는 다른 시민동료들의 사적 쾌락을 더욱 존중할걸세. 좋은 시민은 자기 가정의 화합, 안녕, 평화, 그리고 평온함을 바라지만 자기 고장과 공화국의 화합, 안녕, 평화, 그리고 평온함을 더더욱 기대하네.” 149-151

 

시민적 덕성도 부와 완전히 양립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신사에게 있어서부는 덕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물론 덕이 없이는 부는 여전히 약하며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면 부패하지 않은 시민들은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중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으며, “양자를 견줘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양자 모두 놀랍게 성장하게 된다.” 덕성을 지닌 시민들은 자유를 만끽하는 삶에서 나오는 평안을 사랑한다.....영광에 대한 갈증이 시민적 덕성에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믿었다....“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군주라면 부패한 국가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 좋은데, 물론 그것은 카이사르처럼 더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물루스처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라고 기술한다.....이러한 덕성은 개인들의 열정과 이익을 희생시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와 사적인 사교생활에 안정된 정치적 토대와 도덕적 고양을 주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덕성은 세상살이에 있어서 다양성을 적극 포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이며, 그래서 멋진 것이다. 공화국을 경험한 적이 없는 18세기 프랑스의 한 사상가가 시민적 덕성을 저 멀리 있는, 그리고 너무 이상적이고 빛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상상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공화국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것이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좀더 가볍고 그래서 실현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156-9

 

6장 공화주의적 애국

 

루소는 조국을 자유, 비르투와 연결짓는다. “자유없이 애국은 불가능하며, 비르투 없이 자유는 불가능하며, 시민들 없이 비르투는 불가능하다.” “자유와 진정한 시민이 없는 곳에서는 빠트리’, 즉 조국(나라)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고 단지 뻬이’, 즉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만을 논할 수 있다.” 169

 

조국을 구성하는 것은 성벽이나 사람들이 아니다. 조국을 구성하는 것은 법과 관습, 구성원들의 습관, 그리고 정치방식, 또 이런 것들로부터 나오게 되는 특정한 생활방식이다. 조국은 국가와 그 구성원들 간의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가 변하거나 끊어지게 되면 국가도 그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170

 

토크빌 뉴 잉글랜드 지역 타운들에서 직접 목도한 애국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애정은 권력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애국심은 정복당한 나라에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 뉴 잉글랜드 사람들이 자신의 타운에 대해 애착하게 되는 그것이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구성원이며 또한 노고를 무릅쓰고라도 한번 운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롭고도 힘 있는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172

 

조국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조국은 이 토대 위에 건립한 이념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사상이며, 그 땅의 자식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다. 당신의 형제 중 어는 하나라도 투표권이 없어 나라 일에 자신의 의사를 전혀 반영할 수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교육바디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한, 그리고 어는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고 또한 일하고자 하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가난 속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야 하는 한, 당신에게 당신이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조국은 없다. 모두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바로 그 조국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173

 

공공선이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들이다. 그것과 우리를 묶는 것은 애국이니 우리를 낳고 고통과 눈물 속에서 보살펴 주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니 하는 그런 거창하기만 하고 내용이 없는 상투어가 아니다....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들의 이익이라는 것과 공공선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공공선을 내 것처럼 아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가장 사랑스럽고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일들이, 그리고 이 일들의 성사를 위한 조건들이 바로 이 하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80-181

 

볕뉘. 레토릭있게 두루 공화주의에 대해 느낌 수 있게 쓴 책.  예전에는 너무 쉽게 넘겨버렸는데, 저자의 의도까지 읽는다면  공화주의라는 원작에 자유주의는 개작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생명, 소유, 갈등에 대한 이야기는 키케로, 말키아벨리 등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요소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만을 이야기할 뿐, 힘센자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다른 수사를 덧대는 이론적인 강점도 없다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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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재앙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두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취급해야 해요.

 

-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 내 실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ㆍㆍㆍ우리에겐 실수가 주어지고 악몽이 주어지죠. ㆍㆍ하지만 그것들에 대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ㆍㆍ불행조차도 말이에요. 패배,굴욕,실패ㆍㆍ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을 시로 녹여내는 겁니다.

 

 

                                                      - 마음산책, 「보르헤스의 말」가운데서


발. 실수를 이리 자주하고 있는 것인지, 변명삼아 위안삼아본다.  첫 구절은 테리이글턴이 쓴 「악」 의 논조와 유사하다. 그는 악과 부정을 달리 나눈다. 9ㆍ11테러나 IS는 근원이 파악되는 부정에 가깝다. 악은 구조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것에 근사한다. 재앙이나 악에 깊이 제대로 천착하지 못한다. 역사에서 문제의 절반이상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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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회가 되어 지인들과 이 드라마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며칠 전 이 곳에 온 부부와 하룻밤을 지새우며, 이전에는 그 집에서 다른 지인들과 함께 나누었다.

 

 

2.

 

 

'이제 그만 두고 싶습니다. '
「송곳」이 단풍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문득 군제대이후 일터로 우르르 찾아온 군대 후임들이 생각난다.

 

 

나도 한 곳에서 참 오래 머물렀다.

 

 

 

 

'참 한시인이 단풍은 떨어진 곳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했지. '

 

 

쇠감옥. . 감옥의 감옥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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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서문에 봉★★ 박★★ 감독에게 라이벌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온다. 대답은 영화계의 거장이 아니다. 개그콘서트, 게임, 스포츠, 등산, 영생교 등등 대중음악계이기도 하고 음식계이기도 하고 룰? 이 다른 다 방면이었다.

울타리밖을 생리적으로 달가워않는 지금여기는 늘 갇혀있다.

삶은 계란이 아니라 정치다. 정치는 삶이다. 삶은 운동이자 정치다. 한번이라도 함께 아름다움을 느껴 본적이 있느냐 그렇다면 곁의 아름다움을 질투라도 해 본적이 있느냐. 해 봤다면 또 다른 곁의 시큰거리는 아픈 아름다움에 여운이 맺힌 적이 있느냐고 되물어온다.

마음이 겹쳐도 삶은 확인할 수 없다. 삶이 겹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아름다움이 다가서도 삶은 겹치지 않는다. 삶은 겹쳐도 마음을 나눌 길이 없다.

영결식 `청산에 살으리라`란 가곡이 눈발에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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