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관심사가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다. 잘 어우러지면 좋을텐데. 늘 가깝고 멀다. 멀면서 가깝다.  몇몇 친구들의 추천책을 가져오다. 마음을 읽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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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아카데미 올해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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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특질

 

1. 종교비판

 

밀레토스이 자연철학자가 신 없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리디아니 페르시아의 침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 폴리스에서 빈부차이가 생기고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여 이소노미아가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폴리스가 신들이나 씨족적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계약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확인시키려고 했다. 자연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사회철학이다. 108

 

2. 운동하는 물질

 

자연철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시원물질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물질과 운동이 분리불가하다.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주술적인 사고를 도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술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기 위해 스스로 운동하는 시원물질을 생각한 것이다. 111

 

밀레토스학파가 물질의 자기운동을 생각한 것은 물질의 자기운동의 배후에 무언가를 상정하는 것, 즉 제작자로서의 신들을 상정하는 신화적 사고를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인에서는 밀레토스학파가 내쫓은 신들이 되돌아온다. 물론 아리스토펠레스는 신들을 부활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운동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을 발견한 셈이다. 113

 

자연철학에는 질료가 스스로 운동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이 생각은 화형에 처해진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에 의해 능산적 자연으로 파악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집고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브루노는 그것을 지지했지만, 동시에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하며 태양계는 무한한 우주에 존재하는 다수의 세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것은 우주는 무한한고 우리의 세계는 다수의 세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낙시만드로서의 생각을 부활시킨 것이다...부르노의 능산적 자연이라는 사고를 전면적으로 전개한 이는 스피노자이다. 114-5

 

3. 제작과 생성

 

이오니아학파는 목적인을 거부한다. 자연의 생성은 목적을 가지지 않기에 제작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생성을 이처럼 생각하는 것이 제작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는 제작이나 기술을 중시하고 그에 기반하여 생성을 생각했다. 116

 

생물 고찰을 주로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는 탈레스에서 원자론의 데모크리토스에 이르기까지 목적론을 거부하고 우주의 생성, 생명의 발생, 생물의 진화, 그리고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118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아테네철학이 이오니아적 사고를 압도하고 억압하게된 것은 그들의 동시대나 헬레니즘시대보다는 오히려 기독교가 확립된 시기였다. 즉 아테네의 철학은 기독교의 신학 안에서 계속 살아남은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오니아적 진화론은 서양에서 근대물리학이 발전해도 부활하지 않았다. 다윈의 종의기원에 이르러서야 근본적으로 부정된다. 121 다윈의 획기적 의의는 우연성을 근저에 두고 모든 목적성을 거부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때 다윈은 자신도 모르게 이오니아학파의 사상을 회복시켰다. 122

 

젊은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에게서 목적론과 기계적 결정론이라는 쌍방을 원자운동의 편차에서 비판하려는 시도를 발견했다.....양자역학은 어떤 의미에서 질료와 운동은 불리할 수 없다는 이오니아학파의 사고를 회복시킨 것이었다. 즉 양자는 입자(질료)임과 동시에 파동(운동)이다. 123

 

4장 이오니아 몰락 이후의 사상

 

자연철학은 물질이 자기운동하는 것, 물질과 운동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사회철학으로서 볼 경우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개인들이 존재하는 것과 이동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바꿔 말해, 이동의 가능성이 없다면,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127

 

이오니아 도시들의 구성원은 이동해온 자들로, 그들은 또 언제든지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조건이 자유롭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이소노미아(무지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식민자의 이동이 계속 이어짐에 따라 이동할 프런티어가 소멸되어 갔다. 그와 더불어 폴리스 내부에 빈부의 격차와 지배관계가 생겨났다. 기원전 6세기 전반에는 이오니아 각지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28

 

아테네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귀족정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태어났다. 참주가 민중의 지지를 얻은 것이다. 한편 사모스 섬에서는 원래 이소노미아가 존재했었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데모크라시 안에서 참주가 출현했다. 129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생활이란 실은 바로 혼의 죽음이다. 다시 신적 본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윤회전생의 바퀴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혼은 지혜(소피아)를 구해야 한다.이런 의미에서 철학(필로소피)이란 윤회전생의 바퀴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방법이다. 129

 

피타고라스교단에서 구성원은 청정을 지키고 육식을 끊고 침묵 속에서 자신의 혼을 주시하는 수행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교단과 달리 피타고라스학파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예를 들어, 크로톤에서 피타고라스학파는 화폐주조에 종사했고 신흥 상공업계급과의 결부를 기반삼아 폴리스의 정치와 관계했다 131

 

피타고라스가 남이탈리아에서 만든 교단조직의 존재방식은 그가 이오니아의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대중의 자유로운 의지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지도자가 육체’(감성)의 속박을 넘어선 철학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는 그저 독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33

 

아시아로부터 발전된 과학지식을 얻고 스스로도 개발했지만 이오니아에서는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할이 진행되지 않았다. 탈레스는 이집트에서 토목기사로서 일한 인물이자 삼각함수를 사고한 수학자이자 일식을 예언한 천문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특별히 만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탈레스는 확실히 걸출했기 때문에 지자’(현인)로 꼽혔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이오니아에서는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꿔 말해, 이오니아에서는 지중세계가 성립하지 않았다. 135

 

정치가를 지망했던 플라톤에게 있어 소크라테스가 민주파에 의해 처형된 사건은 첫 번째 큰 좌절이었다. 출신 때문에 귀족파로 지목된 플라톤에게 이 사건은 공인으로서의 진로가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후 아테네를 떠나 피타고라스처럼 각지를 방랑하다 마지막으로 남이탈리아의 탈라스에 있는 피타고라스학파 학원에 견학을 갔다. 그는 거기에서 그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민주정에 대한 의문과 극복에의 열쇠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137

 

헤겔은 피타고라스가 수를 실재로 간주한 것을 관념론의 초기적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수는 개념과 사물의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수는 사상의 시작이지만 가장 낮은 시각이다. 즉 피타고라스는 아직 사상=개념에 이르고 있지 않다. 그것이 개념이 된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라고 헤겔은 말한다. 하지만 실제는 반대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피타고라스의 사고, 즉 수를 실재로 삼는 사고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142

 

2.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의 이중세계라는 관점을 부정한 것이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는 끝까지 물질성과 그것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자연철학의 시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은 물질임과 동시에 운동이다. 크세노파네스는 의인적인 신 관념을 비판하며 소나 말이 신을 생각해 그린다면 소나 말의 모습을 그릴 것이라고 야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그가 의인적인 신들을 비판하는 근거로서 유일한 신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유일한 신은 신들과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하며, 모습에서도 사유에서도 죽어야 하는 자들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유일한 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크세노파네스에게는 이런 자연=세계야말로 신인 것이다. 150

 

헤라클레이토스가 유니크한 것은 만물에서 하나가 생겨나고, 하나에서 만물이 생겨난다.”는 사고에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하나는 만물의 다양한 겉모습 너머에 본질로서의 동일성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만물의 성은 물질성이나 운동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자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152

 

3. 파르메니데스

존재의 진실은 되다이며 존재는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되다라고 말합니다. ‘되다가 원리인 것입니다...‘있다’(존재)에서 ‘-되다로의 이행은 위대한 사상의 힘을 보여줍니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까지의 철학에서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 것-운동의 관념-이 보충됩니다. 여기서는 운동 그 자체가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156-7

 

이것도 사실은 아니다.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아르케(시원)에서 운동하는 물질을 발견했다. 즉 물질과 운동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분리한 이가 피타고라스이다. 157

 

제논은 당신들의 비겁에 질렸다고 말한다. ...그의 선동은 시민을 움직여 참주타도를 실현시켰다. 이와같은 인물이 스승으로 우러러본 파르메니데스가 헤라클레이토스 못지 않을 정도로 격하게 투쟁적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159

 

파르메니데스는 공허나 무로부터 세계의 생성을 보는 사고를 부정한다. 공허는 있지 않은것이다.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 한편 있는 것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물질의 항존성을 의미한다. 공허나 무로부터의 세계생성이라는 사고를 부정하는 것은 전이오니아적 사고(헤시오도스)와 포스트 이오니아적인 사고(피타고라스)에 대한 비판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오니아적인 사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160

 

신화에서는 모든 것이 사후적으로 보인다. 즉 이미 일어난 사건이 신들의 의지나 목적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가 부정한 것은 신들이라기보다 호히려 사건을 사후적 내지 목적론적으로 보는 관점 자체이다. 그들에 의해 물질운동이 목적론적이 아닌 것으로서 파악된다. 그러므로 거기서 진화론적인 관점이 생겨났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에게 운동은 사후적인 관점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사후적으로 발견되는 세계야말로 진정한 세계이다. 161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크세노파네스 =일자도 간접증명을 통해 제시되었다. “만약 신들이 태어났다면, 그 탄생 전에는 무로 있었을 것이다. 또 만약 신들이 죽는다면, 신들은 무가 될 것이다. 신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란 생각할 수 없다.(불합리하다) 그러므로 신들은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법도 그것과 같다. “는 불생불멸이다. 왜냐하면 가령 가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하자. 생성된다면 로부터이고, 소면한다면 로이다. 그런데 는 말도 생각도 할 수 없다.(불합리). 그러므로 는 불생불멸이다.“ 164-5

 

원자론을 자연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철학으로서 볼 때 중요하다. 오늘날은 원자론, 즉 개체에서 전체를 설명하는 이론이 사회철학의 주류이다. 이에 대해 전체론, 즉 개체에 대해 전체의 선행성을 주장하는 관점으로부터의 비판이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헤겔처럼 개체와 전체의 변증법적인 상호규정을 보는 관점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개체와 전체를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에는 개체와 개체가 관계하는 차원이 결락되어 있다. 개체와 전체라는 관점 자체가 개체와 개체의 관계에 의해 성립하는 구조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이다....이 책에서 네 가지 교환양식이 결합과 분리로 사회사를 보려고 한다. 그것은 전체와 개체라는 관점에서 사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개체가 관계하는 형식들을 기본으로 하여 사회구성체를 보는 것이다. 174

 

엠페도클레스 이후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사상가들은 더 이상 폴리스에 입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가 일종의 제국으로서 군림하게 되고, 각 폴리스의 자율성이 내적, 외적으로 상실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때까지 사상가는 각자의 폴리스에 있으면서 다른 폴리스의 사상가들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갔다. 몰론 거기서 폴리스(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들 대부분은 지식을 파는 상인으로서 활동했다. 175

 

 

볕뉘. 사람과 삶을 읽지 않고는 한 걸음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무지를 통감한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피타고라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 순환의 맞물림과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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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공공성

 

아렌트는 파리아’, 즉 공공적 공간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공적 공간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사회의 항쟁은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문제는 단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이 현실적인 존재인가에 있다. 사회가 추방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리고 현재 주고 있는 최대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현실성과 존재의의를 의심하게 하여, 그를 그 자신이 보아도 비실재의 위치로 환원하는 것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의심하는 데 있다. ‘사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잉여자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15

 

공사를 나누는 경계선은 담론에 의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담론 이전의 것, 정치 이전의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처럼 성별역할분업을 정당화하는 담론에 의해 공공성에서 배제되어왔던 가사노동이나 부양 등을 정치적인 쟁점으로 재파악하려는 대항담론의 좋은 예이다. 가정폭력, 성희롱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 사적인 불운’,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여겨졋던 많은 일들이 공공적인 부정의로 재파악되었다. 또 가족이 해야 하는 사적인 일로 여겨진 돌봄에 대해서도 불완전하게나마 공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35

 

담론자원 - 자신들의 필요에 대해 바깥으로부터 부여된 해석을 문제 삼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의문시하며, ‘정상이 아니다’, ‘열등하다’, ‘뒤쳐져있다는 식으로 폄하되어왔던 자기 삶의 존재 방식을 긍정적으로 재파악하는 등, 재해석 재정의의 실천이 시도될 것이다. 37

 

대항적 공공건의 대부분은 그것을 형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생명을 배려하는 친밀권이라는 성격도 갖고 있다. 자기 말이 타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응답받는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 회복되는 자존 또는 명예의 감정은, 타자로부터의 멸시나 부인의 시선, 혹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자기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37

 

고독이란 문제를 사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결국은 문화 자체의 질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쓸모의 유무에 따른 유용성의 기준이 타당한 공간은 확실히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공간이 터무니없이 팽창하여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삼켜버리고 있는 데 있다. 아렌트는 많은 인간을 끊임없이 잉여자로 만드는 공리주의적 사고의 침윤을 문제 삼았는데, 그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쓸모없는 자를 즉시 잘라버리는 것이 정답으로 여겨질 정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40

 

하버마스 비판 55-56

 

공공적 공간은 공통세계에 대한 다원적인 관점이 존재할 때에만 그것들이 서로 교환되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관점의 복수성을 잃었을 때, 공공적 공간은 종언을 맞이한다. 세계를 오직 하나의 관점으로 남김없이 설명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복수성을 파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전체주의라기보다도 대중사회 소비사회의 획일주의이다. 거기서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균일화 때문에 복수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공통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것을 둘러싼 판단이 회피되는 냉소주의가 관점의 축소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66

 

매우 흔한 현대의 현상, 즉 판단을 전적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광범한 경향...자신의 범례,자신이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을 선택하는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 그리고 판단을 통해 타자와 관계하는 것에 대한 주저 무능력으로부터 진정한 걸림돌이 발생한다....이 점에서 공포가,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이 존재한다.” 67

 

아렌트가 보는 한, 근대사회의 인간에게 근본 경험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기소외가 아니라 세계소외이다. 즉 신앙을 잃은 결과,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 과정으로 내던져졌다는 경험이다. 이 생명 과정은 나의 내부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내부에도 있다. 즉 근대 인간이 세계에 대한 배려의 상실을 대신해 손에 넣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만인에게 동일한 생명에 대한 배려이다. 67

 

어떤 사람의 의견이 상실된다는 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관점이 상실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공공적 공간에서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세계가 빈약해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고, ‘세계는 이렇게 보인다가 복수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69

 

푸코와 아렌트

프랑스혁명은 -정치의 역사적 개막을 의미하지만, 아렌트가 보는 한, 그것은 필연성=빈궁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절박성때문에 자유의 창설에 대한 관심을 격퇴해버린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75 조에, 비오스

 

자기의 욕구를 (명료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든가, 대화 장소로 이동할 자유 혹은 시간이 없다든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든가,자기의 말을 들어줄 타자가 주변에없다든가, 오랜 동안 심각한 곤경에 처해져 있었기 때문에 희망을 품는 것조차 기피한다든가(‘적응적 선호 형성’)하는 등등, 새로운 욕구 해석의 제기는 새로운 자원의 배분을 청구한다. 81

 

존 롤스, “자유주의의 핵심적 가정은 모든 평등한 시민은 서로 비교할 수 없고 서로 타협할 수 없는,참으로 다양한 선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선의 구상이란 자기의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지도적인 가치에 관하여 개개인이 가지는 해석들이다. 그것은 가치가 상쟁하는 신들의 투쟁의 시대에는 각인각양이어서 거기에서 공약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약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 어떠한 선의 구상을 가지고 있건, 어떠한 삶의 계획을 추구하건, 누구나가 축소되기를 바라기보다는 확대되기를 바라는 가치이다. 존 롤스는 그러한 가치를 기본재=기본적인 선이라고 부른다. ”기본재는 시민이 가진 욕구가 무엇인가를 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민이 그 견해를 추구해가는 경우, 모든 사람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확실히 간주되는 것이다.“ 정의는 이러한 기본재(자유, 기회, 소득과 부, 자존의 기초)를 어떠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우선순위로 분배하는가에 관한 기본원리이다. 85

 

공공적 가치를 입장에 다라 나뉘는데 센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으로 해석한다. ‘잠재능력이란 어떤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열려 있는 삶의 폭’,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의미한다. 센이 공공적 가치를 기본재로 정의하는 롤스의이론을 비판하는 것은 사람들이 기본재를 이용하여 실제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똑같은 기본재가 주어졌다고해도 건강상태, 연령, 장애의 유무 등의 차이에 의해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에는 커다란 간격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어는 정도 이상의 재화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재화를 사용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어떠한 상태에 둘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욕구를 재화의 필요가 아니라 행위와 존재에 대한 필요로 재정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이는 삶의 폭이 상실된 사람들에게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을 보조하는 직업...동성애자는 공공시설 숙박이 거부되는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놀 기회를 박탈당하는가...센이 잠재능력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적절한 영양을 얻는 것, 병에 걸리지 않는 것, 요절하지 않는 것,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 커뮤니티에서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86-7

 

센의 접근법에 따르면 빈곤이라고 일컬러온 사태는 재화의 결여가 아니라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로 파악되어야한다. 박탈이라는 척도는 제3세게의 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도 실제로 공헌해왔지만,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 척도를 이용하면 소위 선진국에서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이 박탈되어 있는지도 뚜렷하게 부각된다. 느긋하게 휴양할 수 있는 것, 오염되지 않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 소음에 고통받지 않는 것, 자통차 사회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이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가지는 것 등등이 박탈되어 있는 것이다...장기간에 걸친 고독은 기본적인 잠재능력의 박탈의 하나로 꼽아야 할 것이다. 87-8

 

사회국가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회보험의 성립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회국가는 1880년대부터 1890년대에 걸쳐 탄생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국가는 자본제 경제의 진전을 조건으로 하고, 그것이 야기하는 다양한 부정적 산물에 대한 대응으로서 성립되었음을우선 지적하고자한다. 사회보험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노동재해나 실업과 같은 폐해에 대응해, 위험을 개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합화함으로써 대처하는 제도로서 만들어졌다. 88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분명하게 이반되기 시작한 결과 사회적=국민적 연대에 심한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강력한 균형책을 취하지 않는 한, ‘하나의 국민이란 표상은 더 이상 성립하기 어렵게 되어 오히려 두 개의국민, 두 종류의 시민이라는 이미지가 조성된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이고 복지에 의존하는 부문의 두 개로 나뉘어 양자 사이에는 원한의 정치’(강자가 약자에 품는)가 항상 잠재하게 된다. 시민의 대부분은 사회적 연대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가지게 되어 사회국가는 다수의 지지를 잃어간다. 사회국가는 국민의 통합이 아니라 역으로 그 분단을 야기해온 것이 아닌가하는 관점이 지배적이 된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의심, 단념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92

 

이를 보완하고자 한 OECD의 능동적 사회로 변화되면 공적부조를 받음으로써 생존하는 사람들은 자기 통치 능력이 결여된, 혹은 그런 의욕이 없는 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잉여자로서만이 아니라사회의 질서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위험한사람들로서 표상될 것이다....“반영속적이고 준범죄적인 사회층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의 대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규율의 대상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대상이 된다. 즉 사회의 안전에 위협을 주지 않도록 가능한 한 낮은 비용으로 일괄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95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에서 주로 인종 종족에 의한 거주지의 분리는 실제로 심각한 문제인데 사회적 공간의 분리를 어떻게 막는가는 정치적인 삶에서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비록 인터넷 상의 공공성이 현실적 공간의 틈을 중개할 가능성을 얼마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회적 조건을 살아가는 타자가 현실에 접할 기회를 잃어간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이는 편협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97

 

최근 사회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왔는가를 살펴보면, 사회적 연대의 공동화이고 사람들의 사회적, 공간적 분리이다. 자유주의적인 정의론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회적 연대의 자원은 눈에 띄게 부족해지고 있다. 우리는 운명을 함께 나누어 가진다라고 하는 롤스의 말이 빈말로밖에 들리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서로 차단된 공간을 살아가게 된 현상황에서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기민으로 만들지 않고자 한다면 앞으로 어떠한 생명 보장의 방법을 구상해야 할 것인가? 98 답은 99-101

 

친밀권

 

공공권과 친밀권을 분석적으로 구별하는 적절한 기준은, 공공권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하는 데 반해, 친밀권은 구체적인 타자의 삶/생명에 대한 배려 관심에 의해 형성 유지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안면 없는 일반적인 타자,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 친밀권의 관계는 간-인격적이어서, 그러한 인칭성을 결여한 공간은 친밀권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둘째로 친밀권의 타자는 신체를 갖춘 타자이다. 친밀권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타자의 생명 신체에 대한 배려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체이다. 거기에서 비오스라는 삶의 위상은 조에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106

 

자조그룹은 정보나 의견의 교환을 통하여 직면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외부를 향하여 문제를 제기해가는 공공권의 측면을 가지기도하지만, 그 경우에도 서로의 삶의 구체적인 곤란에 주의를 기울이는 측면은 역시나 불가결하다. 이것보다도 좀 더 느슨한 연결, 즉 기회 있을 때마다 서로 방문하는 친구들 사이의 관계나 의논 잡담을 즐기기 위한 살롱적인 관계도 친밀권에 포함된다. 타자의 구체적인 삶/생명에 일정한 배려나 관심을 갖는 것이 친밀권의 최소 조건이다. 108

 

새롭게 창출되는 공공권의 대부분은 친밀권이 전환되어 생겨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90년대 후반부터 각지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주민 사이의 대화의 친밀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민투표가 쟁점으로 삼아온 것은 원자력발전소, 산업폐기물처리장, 군사기지, 토목건설 공공사업 등이다. 그것은 위험을 주변에 강요하고, 생태게를 파손하고, 부정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주는 사업을 감행하는 문화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새로운 가치 판단을 공공적 공간에 던지는 문제제기는, 다수와는 다른 가치관(생명관,자연관,인간관)을 유지 재형성해온 친밀권에서부터 생겨난 것이 많다. 미나마타병 환자와 교류한 경험도 이의 하나이다. 109

 

새로운 가치의 제기가 담론의 정치라는 형태를 곧바로 취한다고 할 수 없다. 가치관을 달리하는 타자에 대하여 호소하거나 설득하는 언어를 가지고 마주하기보다도 오히려 다른 식의 작품 제시라는 스타일, 다른 식의 행동양식의 제시, 다른 식의 삶의 방식 제시라는 스타일을 취한다. 그러한 다른 식으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에 의해 담론의 차원으로 번역되거나 그것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의 실천을 촉발해간다. 110

 

친밀권의 감정의 기제는 양의적이다. 지지하는 것과 잡아매는 것, 배려하는 것과 집어삼키는 것, 주목하는 것과 감시하는 것...요약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과 상대적으로 위험한 것은 표리의 관계에 있다. 친밀권이 동화와 억압의 공간으로 전환할 위험성은 항상 잠재해 있으므로, 거기에서부터 벗어날 자유는 제도적으로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무시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묵살되지 않는 사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존감에 있어서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아렌트는 자신의 행위나 말로 공공적 공간에 현상하는 용기를 정치적 덕성으로서 중시하는데, 부인이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덕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에서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을 배경으로 가질 터이다. 112

 

아렌트는 주체 내부에 있는 복수의 가치 사이의 대화를 사고라고 부른다. 이 시각에서 보면 주체에게 위기는 다양한 가치를 질서 짓는 어떤 중심적 지배적인 가치가 결여되어 있음(정체성의 위기)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주체를 지배하는 정체성이라는 위기이다. 복수성은 공공성에서 정치적인 삶의 조건임과 동시에, 주체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타자를 잃는다는 것은 응답받을 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상실을, 언어를 가진 동물로서의 정치적인 존재자에게 죽음을 초래한다. 114

 

복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기에 가장 정치적인 로마인의 언어에는 살다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 또는 죽다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동의어로 사용된다. - ‘사이의 상실 115

 

공공성은 생명의 보장이나 공통 세계의 정의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차원은 개별적 삶의 공약 불가능한 위상에 대응한다. 이 차원에서 공공성은 사람들이 소유활 수 없는 세계의 제시(언어나 행위에서의 현상’)를 보고 듣고, 향수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차원에서 정치는 이미 공약 가능한 가치의 정의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다른 가치나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윤리로서의 정치라고 할 만한 요소도 포함할 것이다. 117

 

푸코 - 내게는 이러한 문제 설정이 우리 사회에서 분명 대단한 중요성을 지녔던 실천들의 총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존재의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이 그것을 통해 스스로 행동 규칙을 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그들의 특이한 존재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그들의 삶을, 어떤 미학적 가치를 지닌, 그리고 어떤 양식의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중하고도 자발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성의역사2:쾌락의 활용 117-118

 

아렌트는 그 윤리를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한 적이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존재하라 Be as you would wish to appear to others” 이것은 다름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타자에게 현상하기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에게 현상하라 Appear to yourself as you wish to appear to others" 118

 

 

볕뉘.  한나아렌트, 하버마스, 비롤리, 롤스, 필립페팃 등 공공성 최신 논의를 끌어내면서도 그에 대한 아마티아센, 너스바움 등 최근 학자들의 연구흐름들을 감안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론적 인 탐색뿐만 아니라 공공선의 변화에 대한 개념(친밀권의 공공성 탐색)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유를 구체적으로 모색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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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민주주의란

 

플라톤은 폴리스는 5,000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2만 내지 3만으로도 전원 출석하여 민회를 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선거로 뽑는 500명의 평의회에서 민회에 올린 안건을 심의하고, 거기를 통과한 중요문제에 대해 아테네의 신전 앞 광장에서 민회를 열었다. 재판은 6,000명의 민중법정 형태로 이루어졌다. 66

 

전문가만으로 이루어지거나 투표율 100%라고 모두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중요한 것은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참가하고 있다는 기분이 고조되며, ‘모두가 어우러져 결정했다라는 마음이 들게 된다. ‘모두가 어우러져 만들어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두가 어우러져 행하지 않으며, 모두에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 인간은 납득하지 못한다. , 활성화된다는 것은 모두혹은 우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인 것이다. 74

 

폴리스=도시국가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폴리스는 정치를 행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곧 제의이기도 하며, 신의 의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의식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검을 지닌 남자들이 모인다. 폴리스는 폴리틱, 즉 정치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한편 오이코스란 집의 영역이다. 그곳에서는 노예와 여성이 일하며, 아이를 낳고 기른다. 오이코스는 오이코노미코스(미코스는 관리)형태를 취해 오늘날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의 어원이 된다. 그러나 이를 정치의 영역과 경제의 영역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근대적인 관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는 자유와 항상의 영역’, 오이코스는 필연과 무상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77

 

무연의 영역, 자유의 영역, 공의 영역은 아무나 들어와도 되는 퍼블릭의 영역이다. ‘이것은 퍼블릭 하다라고 쓰여 있을 경우, 유럽에서는 누구나 사용해도 된다는 말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반인이 마음대로 쓰면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목욕탕에서는 누구나 나체가 되어 신분이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아질이라 하여, 무연의 영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85

 

의석비율에 민의가 드러나지 않고 정치가 기능부전에 빠졌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런 문제를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아테네 진영과 스파르타 진영간의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뒤, 민회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파고든 사람들 가운데에 플라톤이 있었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적인 제도에 의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진리를 부르짖는 스승을 사형에 처한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폐해를 그대로 담아둔채로는 기대를 걸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생각해낸 것이 철인왕통치이다. 98

 

플라톤은 국가(그래봤자 수만 명이었지만)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타락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이에 들어맞는, 지혜의 덕을 체현한 왕이 이끌어가는 왕정이 있다. 그러나 통치하는 중에 용기를 덕으로 삼는 전사들이 끼어 들어오면, 복수의 인간에 의한 명예정(귀족정)으로 옮겨간다. 그런 복수통치에 부유층이 참여하면 과두정이 된다. 과두정은 빈부의 격차를 초래하므로 빈자가 부자를 무찔러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정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민주정은 참주정으로 이행한다. 106

 

미국에서도 상원은 인구수에 비례한 것은 아니다. 상원이라는 말도 Senate인데 원뜻이 원로원이다. 민중의 대표인 하원과 귀족(미국에는 귀족이 없다)의 대표인 상원이 의회를 구성하고, 하원은 민중의 소리를, 상원은 지혜를 담당한다는 취지이다. 하원은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좋으므로 특권화되지 않도록 임기가 짧고, 상원은 임기가 길어 차분히 오래도록 지혜를 쌓아나가라는 제도이다. 112

 

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홉스는 물체론, 그리고 인간론, 마지막으로 정치론을 집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퓨리턴 혁명 등의 정변에 휘말려 정치론만을 우선적으로 완성했다. ..데카르트가 왕에게 이성이 있지만 농민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뉴턴은 형태나 감촉 따위는 무시해도 좋으며, 질량이라는 본질만으로 환원하면 법칙을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홉스는 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므로 신분이라든가 성별은 무시해도 좋으며, 그렇게 하면 인간 세계의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홉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다. 이 세상은 모두 물체의 운행과 원인 결과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정치체제도 그 생각 아래 논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왜 국가가 필요한 것인가?’왜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옛날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국가란 가족과 같은 것이니까’, 혹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으므로등의 말로 마감하고 사고지점을 멈춰버린다. 하지만 이 점을 파고든 사람이 홉스였다 홉스는 우선 자연상태라는 것을 설정한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정치나 국가를 갖고 있지 않다. 이 상태에서 인간에게는 생명을 지키는 자연권이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감각을 근거로 행동한다고 간주한다.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을 (플라톤의 선과는 다름)’으로 간주하며, 선을 추구하기 위해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심신능력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다...이것이 농민이 철로로 기사를 때려눕히는 전란과 혁명의 시대에 태어난 홉스가 갖게된 의문이자 답이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은 자연권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싸움은 종식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은 그러한 경험에서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그렇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바로 그렇게 된 시점에서 전원이 일단 자연권을 방기하고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연권, 즉 생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인공적인 권력을 만드는 계약을 체결한다. 138-141

 

홉스가 생각한 정치체제는 어디까지나 인공적 산물로서, 자연권을 지켜주지 않으면 계약해제도 가능하다. 또한 전원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애국심을 가졌다든지 마음의 고향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원어는 코먼웰스 commonwealth'이므로, 말하자면 공공의 복지라든가 공공재이다. ’공통의 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고 할만한 뉘앙스를 품고 있고, 라틴어의 공공체 res puplica, 즉 공화국 republic에 가까운 의미이다. 141

 

루소 또한 사회계약론을 우리를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한 수단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사회계약은 홉스나 로크가 말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목적이 다르다. 홉스나 로크는 자연권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어서, 계약을 맺어 국가를 만드는 것이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그러나 루소의 경우는 계약할 때 일체의 자연권, 즉 몸도 마음도 재산도 전부 공동체에 양도하여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집단 출가와도 같은 것이다 개인 소유의 물건은 모두 놔두고 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는 것이 모두 사라진 상태가 되면, 공동체로서 공통자아가 생겨난다. 그것이 일반의지를 가진다고 설파했다. 일반의지라는 것은 구성원의 의지의 단순총합인 전체의지와는 다르다. 뒤르켐의 사회가 개인의 집합을 초월한 실재인 것처럼, 일반의지 또한 개인 의지의 집합을 넘는 사물이다. 뒤르켐은 사회를 사물 chose'로 다루어야만 한다고 했는데, 루소 또한 일반의지를 사물chose’로 비유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합창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합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저 집합체에 지나지 않을 때에는, 자신과 타인의 개별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제대로 이루어지면 개별적인 목소리가 녹아들어,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지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일반의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146-7

 

홉스, 로크, 스미스, 벤담, - 이들의 사상을 꿰맞추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에게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럼에 투쟁이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개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할수록 사회는 풍요로워져 공존공영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은 수량화할 수 잇고, 그것은 경제 영역에서는 시장의 화폐 거래량, 정치 영역에서는 득표수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정권을 차지 않다. 이렇게 다수결로 법률과 정책이 결정되는 제도를 만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 다만 정치는 가급적 민간에 개입하지 않는 편이 좋으며, 소수의견의 존중은 필요하다. 대체로 이런 정도일 것이다. 159

 

미국은 우선 타운이 있고, 타운이 연합하여 스테이트가 형성되고, 스테이트가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기 위해 연합함으로써 유나이티드 스테이트가 된 나라이다. 토크빌이 주목한 것은 이 타운십에서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 참가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권력의 분권화가 이루어져 스테이트와 타운에서 자치를 행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강력한 권력을 지니지 않아도 원활히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또 타운십의 성원들이 돌려가며 맡는 공무가 대단히 많다. 정부가 경찰이나 법원을 만들지 않아도, 구성원들이 교대제로 이루어진 보안관과 배심원을 맡는다. 타운십에는 행정을 실시하는 행정위원,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위원 외에 징세관, 회계관, 경찰관 등이 있는데 이들은 민회에서 선발되어 돌려가며 맡는다. 이러한 공무원에게 고정된 보수는 없고, 봉사행위를 한 정도에 따라 보수가 지불된다. 공무를 고의적으로 맡지 않는 경우 벌금이 부과된다. 163

 

하지만 지금은 토크빌이 생각하는 미국과 달리 스타트 지점부터 재력과 지위에 격차가 벌어져 있고, 지역사회에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고, 허다한 역사적 연고가 얽혀 있고, 이념적인 결속도 잘 안 되는 사회라면 과연 어떨까? 그런 사회는 귀족이나 명문가, 아니면 사장이나 노조위원장 같은 중심적 인물이 우리의 대표라고 여겨지는 동안만 자유민주주의가 성립할 뿐이다. 165

 

근본적으로 대의제는 봉건제의 산물이다.....자유주의와 대의제와 민주주의, 이 세 가지를 조합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인류 역사상 특정한 사회조건 아래에서 100년 정도 그렇게 유지되는 시대가 있었을 따름이다...점점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이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란 일종의 혼합정체이다. 투표를 통한 대의제란 말하자면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다. 자유주의란 권력은 개입하지 말라. 생활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국정 따위는 내 알바 아니다. 좋은 왕이 치안과 외교만을 담당하라는 사고방식이다.....대의제 자유민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대의제가 봉건제의 산물임을 고려하면, ‘데모나 국민투표는 봉건주의의 파괴행위라고는 할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는 할 수 없다. 165-7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선 사람도 20세기 들어 그 현황과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는 원래 종교적인 구제 목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싹텄지만, 지금은 그런 목적합리성이 상실되고, 영혼이 사라진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이미 마련된 제도와 절차를 지키면 된다는 형식합리성이 자기회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베버는, 사람들이 일단 납득은 하지만 본래의 정신은 상실되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전통적 보수주의자나 전체주의자도 전통이나 공동체가 지닌 덕을 상실했다고 보았고 똑 같은 한표라는 제도로 중우정에 빠질 뿐이라고 했다. 전체주의자는 유태인을 비롯한 자본가가 민족의 정신, 정수를 파괴하려 든다고 했다. 168

 

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불확정성의 원리 - 주체가 객체를 관측한다 함은 어떤 의미인가? 온도계를 써서 뜨거운 물의 온도를 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180

 

일단 나와 너가 있고, 그것이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개체혼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에 비해 관계 속에서 구성되어 상대방과 내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계론이라 부르도록 하자. 인간은 좀처럼 개체론적인 발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역시 네가 나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 살펴본 바를 헤아려가며 따진다. 그럴 때 잠깐 일단 머릿 속을 비워보자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럿이 곧 에포케인데, 흔히 판단정지라고 번역된다. 이런 생각을 후설은 1차 세계대전 전부터 주장해왔지만, 전후가 되어서야 널리 받아들여졌다. 전쟁이 경험, 과학의 변화, 독일 사회의 동요 등이 겹쳐 절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감각이 퍼졌던 것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0

 

센카쿠 열도 문제라고하면 흔히 일본과 중국의 문제인 것처럼 언급되지만, 일본과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며, 일본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며, 중국과 타이완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것을 중일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편견을 가지고 구축된 인식이다. 이러한 문제를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우익단체가 끌어들이고, 매스컴이 끌어들이고, 여론조사에서도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정치가가 국익이라고 의식하게끔 되었는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국익이 구축되어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식 위에서면 문제의 해결방법이 달라진다. 195

 

이 관계를 바꾸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변증법이다. 헤겔이 주창하고 마르크스가 이어받았다. 변증법리라고 옮겨지는 독일어 dialektik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의 독일어역이고, 영어의 대화 dialogue와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답법, 특히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대체로 이런 생각이다. 불완전한 인간은 혼자서는 진리에 좀처럼 도달할 수 없다.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이게 진리야, 네 생각을 바꿔!”라고 말한댔자 반발이나 살 뿐이다. 게다가 자신도 사실 진리에 도달해 있다는 보증이 없다. 그래서상대방의 주장에 내재하는 모순을 지적하며 질문을 던져가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하면 처음부터 설교에 마주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모순에 눈을 뜨며 내면적으로 생각을 바꾼다. 물론 상대방이 내게 질문을던지면, 마찬가지로 대화한다. 그렇게 해서 상호 간에 발전을 이루며 진리에 도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리에 도달해 있지 않으며, 스스로가 모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198-9

 

근대화와 전통은 자본가와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동전이 양면과 같다. 그렇게 때문에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전통이 이겨 근대화를 멈추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근대화가진행되어 전통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없다. 아무리 옛날 생활방식이 사라져도,아니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흔적과 역사를 찾아낸다. 그리하여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이어진다. 근대화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전통은 다시 만들어지고, 전통이 강고해질수록 근대화 욕구 또한 깊어진다. 근대화와 전통은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202

 

나와 사회와 관계가 없다든가 내가 나서도 사회가 바뀌지않는다라는 것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며, 단순히 불가능이다.자신이 존재하면서 걷거나 일하거나 말하거나 하면,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를 바꾸게 된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불만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 또한 사회를 바꾼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도록 행동하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마는 행동을 계속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을 뿐이다.....나도 너도 관계의 일시적인 현상 형태에 불과하고 상호 간에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활동가도 태어나면서부터 활동가였던 것은 아니며, 보통사람 또한 영원불변하며 보통 사람인 채 지내는 것도 아니다.....변증법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19세기 독일 사상가들이 주창했는데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독일은 유럽의 후진국으로서, 영국이나 프랑스 사상을 배운 상층부의 지식인과 대중 사이가매우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고, 그러면 그것 자체가 권위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그런 괴리 현상을 강화시킬 따름이었다. 이는 실로 불행한 의식이다. 그래서 외부에서 들여오는 설교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바뀌어가는 변증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203-205 물화, 현상학, 변증법의 유용성

 

재귀적인 근대화(선택의 증대) -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둘 낳는다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왜 직장을 그만둬야 해’‘가사는 왜 내가 맡아야 하지’‘왜 아이를 나아야 하나’‘이런 남편과 이이와 함께 살아야하지라는 선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되어가고 있다. 단순히 선택지가 늘었다라기보다는 선택할 수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라고 보아야한다. 사회가 크게 바뀐 것이다. 208-210

 

여러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재귀성이 증대한 사회에서 인기를 누린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다양한 주장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각국에서 내놓은신자유주의의 기본적인 발상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자신의 돈, 자신의 가족, 자신이 속한 민족뿐인 것처럼 보인다. 221

 

볕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되짚으며, 사회를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서 여러 현대철학의 장점들을 결합하려하고 있다.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어 여러 예로 말하기 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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