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주제에 대한 짧고 강렬한 통찰을 기대하려 책들을 그러모았다. 시대배경과 인물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읽으면 다른 시선이 곁들 것이다.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은 베블런의 논문 두편으로도 충족된다. 존듀이를 프래그머티즘으로 그냥 달달 외우거나 잊혀졌는데 분석철학, 경험론, 대륙이론의 중도나 중개자로서 역할로 다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새대문제도 간간히 등장하여 혹세무민하는 책들이 아니라 좀더 깊이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시선들을 다시 한번 그러모우고 다른 시선의 새싹을 찾아내는 작업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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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국가일수록 자율의 갈망은 강하고, 학교의 교칙이 엄격할수록 조금이나마 개인의 특성을 드러내려고 교복치마 길이를 줄이고 바지통을 줄인다. 이 양쪽 경향은 각자 나름대로 특수한 형태의 공포와 공격성을 만들어낸다.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사회는 고인 물처럼 변화가 없었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율의 욕망이 자라났고, 이는 침입과 과도한 통제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공격성을 외부로 돌릴 수 있을 때면 획일화하는 중앙의 권위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선 개인이 중심이며, 이로 인해 안정감이 사라지고 불신이 늘어난다. 공격성은 더 빨리 외부로 향한다. 잠재적 위험인 타인에 맞서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 개인은 타인과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더 외로워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233 공동체 의식이 실종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부상한 주요 원인은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서로 반목하게 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오늘날의 경제 모델이다. 따라서 동일성과 차이, 공동체 의식과 자율성의 균형을 되찾고 싶다면 오늘날의 노동환경을 바꾸고 경제를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234

 

 

이제는 더 이상 권위와 권위자가 구분되지 않는다...상징적인 정통적 권위의 의미는 거친 폭력이란 뜻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양가성을 띠고 있다. 권력은 의심스럽다. 그래서 최대한 격렬하게 싸워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강한 지도자는 필요하다. 심지어 둘 다를 동시에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권위의 부활을 외치면서도 정작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벌을 받으면 난리법석을 떤다....우리 사회에선 권력과 권위, 지배자와 권한자의 차이가 실종되면서 권력을 입증해야 하는 경우가 너무 잦아졌다. 때문에 강자의 권리가 득세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다시 적자생존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인용된다. 236-237

 

경제위기가 찾아오기 전에 실시했던 탈진증후군 연구 결과를 보면 직장 생활로 인한 우울증은 힘든 노동이나 과도한 노동 부담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환경, 특히 인간관계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상호 존중과 인정의 결핍은 탈진증후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238

 

자율성, 장인의 기술, 목표 - 자립적인 조직에서 자기 일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으면 동기와 참여가 급상승한다. 이를 통해 장인의 기술과 능력도 자동적으로 자랄 테고, 다시금 일에 더 많은 재미를 느낄 것이다. 세넷이 장인정신이라 불렀던 전문 능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목표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혼자할 수 없는 일에 자신도 기여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소속감을 느낀다. 여기서도 다시금 동일성과 차이의 균형, 전체의 일부이지만 자율적이라는 느낌이 필요하다.....그런데오늘날의 노동환경은 정반대이다. 숫자의 독개는 자질을 갖춘 사람도 약간의 책임만 질 뿐 권력은 없다. 자기가 할 일도 결정 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한다. 239

 

지난 몇 년 동안 심리 보건 부문은 과도한 하향식 경영의 제물이 되었다. 평가, 측정, 직원 면담, 뉴스피크(회계감사, 갭 분석, 핵심성과지표, 벤치마킹 등) 같은 온갖 방법들이 동원되고, 지사장의 감시하에 코디네이터의 지휘를 받으며 만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학 교육을 받은 심리 전문가들이 우글거리는 일터가 심리적 동기 연구 결과에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41

 

독일 기자 권터 발라프는 위장 잠입 취재를 통해 외국인의 삶을 직접 몇 달 동안 살아보는 것이다. 그가 보기엔 기아임금 해결도 시급한 문제지만 이 못지 않게 인간답지 못한 대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느낌이 더 견디기 힘들다. 그러다보면 인생의 패자가 된 듯하고 수치심이 들며 최대한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으려 하게 된다. 한때의 침묵하는 다수는 이제 자신들의 힘겨운 상황을 최대한 외부에 알리려고 하지 않는 고립된 집단 속의 보이지 않는 다수가 되어버렸다. 이는 다시 연대감을 짓밟는다. 예전보다 더 연대감이 절실한 바로 지금 이 시점에 그렇다. 246-247

 

양적 판단이 횡행하는 평가체계는 노동의 품질을 떨어뜨린다. 결국 관료주의가 심해지고 그러다보니 정작 핵심 업무에 쏟을 시간은 점점 줄어들며 노동 압박은 날로 심해진다. 할당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에게 품질을 돌볼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경찰은 치안에 힘쓰지 못하고 교사는 수업에 신경 쓰지 못하며 의사는 환자를 치료할 시간이 없다. 결국 일하는 사람들은 의욕을 잃어버린다. 247

 

양극성장애(조울증)는 신자유주의 삶 자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해결책 역시 외부에서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 기적의 묘약이 있거나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새로운 영도자가 있다고 할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 탓에 진실을 놓치고 만다. 그사이 우리 모두가 많건 적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물이 들었다는 진실 말이다. 우리의 사고도 우리의 행동도 알게 모르게 물이 들었다....청소년들이나 청년들만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을 키운 것이 아니다. 부모들 역시 이런 방향으로 힘껏 떠밀려왔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일차적으로 바겐세일 사냥꾼이다. .....“최고의 상품을 최저가에!”....포스트모던 시대 인간은 이상한 분열에 시달린다. 새로운 형태의 인격 분열이다. 우리는 체제를 비판하고 체제에 적대적이면서도 변화를 꾀할 만큼의 힘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체제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생활방식을 고수한다...우리는 우리가 비난하는 그 체제의 일부이다....타인들만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 자신도 변해야 한다. 소비만 할 것이 아니라 다시 국민의 권리를 고민해야 한다. 선거만 할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도, 아니 무엇보다 생활방식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가장 먼저 만연한 냉소주의를 버려야 한다. 250-251

 

우울한 환자가 병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잇고 일부나마 자기가 책임을 지는 인생의 측면에 집중하는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우울한 소비자들, 오늘날 우리 모두인 그들에게 이런 호소를 하고 싶다. 모두가 소비 습관을 바꿀 수 있다고 호소하고 싶다.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시민이 되어야 한다. 정치가에게 공익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 역시 공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자면 물질을 포기하고, 다시금 새로운 윤리를 키워나가야 한다. 이 윤리는 항상 자율과 연대, 개인과 집단의 균형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252

 

bob 캠페인 - 키워드를 사용하자는 제안은 행동 변화에 관한 심리 연구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어 널리 회자되는 키워드는 숨어있던 직관의 문을 열어 행동을 자극한다. 이는 기존의 행동 변화가 합리적이고 인지적 방법으로 통해서만 되다고 믿는 생각과 대립된다. 인간을 여전히 합리적 존재로 생각하는 계몽주의 관점이다...행동을 바꾸고 싶으면 가치를 팔아야 한다. 나아가 이걸 가족, 모성애, 신의, 안전, 지위, 승리, 업적 등 정서의 포장지로 멋지게 둘러싸야 한다.....특정한 메시지는 그것이 깊이 뿌리내린 감정과 가치를 건드릴 때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에전에는 이를 무의식의 연상 복합물이라고 표현했지만, 요즘의 인지심리학은 딥 프레임이라고 정의한다....변화를 원한다면 합리적 요인보다 정서적 가치를 통해야 한다. 두뇌는 소용없다. 직관이 유용하다.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행복하게 살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253-257

 

지속적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며, 직관에서 나온다.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다면 이미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변화를 조직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실패부터가 이미 핵심 문제, 즉 과도한 개인화의 상징이다. 연대는 합리적인 논리로 강요할 수 없다.....자기배려이다. 나는 무엇을 좋다고 느끼나....원래 의미의 자기배려는 자신의 삶을 윤리적으로 살아가면서 공익도 더불어 생각할 책임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윤리를 자기 몸과 타인의 몸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아가 죄와 책임을 대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259-260

 

 

 

 

 

볕뉘.

 

 1. 읽는 시간보다 옮겨적는 것이 곱절이 걸린다. 무엇이 문제겠는가. 효율이라는 것 자체도 허망하다. 그러니 몸에 새기는 것이 더 제대로된 효율일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에 천착하는 것이, 성공보다 미완성에 천착하는 것이 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남기거나  남길 수 있는 저력을 만든다는 점에서  더 생산적일 것이다.

 

2. 저자는 벨기에 학자이다. 언급하는 일본 소장학자, 국내 소장학자들도 유사한 관점과 대안의 모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앞으로도 유사한 저작들이 나오겠지만 과거를 불러내고 대유하는 모습들이 좀더 다양해지면, 지금 여기를 훨씬 더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낙관이 든다.  뭔가 문제가 있다. 막연한 것이 추상화가 되었다면, 최근의 일련의 저작들로 추상이 좀더 구체적이고 형상화가 되리라 여겨진다. 그러면 여러 사회운동이나 사회활동에도 실질적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론의 형성에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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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새벽

달빛이 고여
별빛도 잠겨

꿈결로
몸속으로
비집고 들어서다

한해의 우울
겨울의 불안
12월의 동통


별이되어 있다

달빛으로 은은하다

어김없이
다가오는 너로
변함없이
되비추는 너로 선다

발.

1. 꿈 속에서 아귀를 마치다가 꿈끝이다. 끝을 잡고싶어 서성이다 꿈끝을 잘라 가지고 나왔다. 아직 채 여운들이 식지않아 뜰떠있다. 좀더 다른 새벽이면 좋겠다. 새벽이 몸에 들어서 새벽을 배고 새벽을 낳고ㆍㆍㆍ어제 걸린 창밖 초승달은 무고한지 모르겠다.

2. 선물받은 시집을 지금에서야 읽다. 시가 아니라 마음의 쪽지를 펼치길 바랬는데, 시집을 받고 행간의 마음을 펼치지 않은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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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아카데미 1월 일정안내]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름부터 흥미진진 기대되는 2016 `병신년`!! 올 한해도 부지런히 달려가볼까요.

▲ 미술로 보는 세계사(신규모집)
-미술사와 세계사를 연계한 책 읽기 모임
-1월6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8시
-장소 : 아카데미 책방
-텍스트 :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문의 : 김인희(역사논술강사) 010-9096-7179
*낮모임 가능, 연락주세요.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모임
-1월6일, 20일 격주 수요일 오전10시30분
-장소 : 아카데미책방
-텍스트 : 9권 갇힌여인

 

 

 

 

 



▲ 답사로 배우는 인문학
-1월14일(목) 저녁7시30분
-장소 : 아카데미 책방
-텍스트 : 처음 읽는 일본사

 

 

 

 



▲ 논픽션읽고쓰고비행하는모임 `카운터펀치`
-1월18일(월) 저녁7시30분
-장소 : 아카데미책방
-텍스트 :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SF읽기모임 `에퀴녹스`
*2016 오픈강좌 & 전시*
-1월21일(목) 저녁7시
-장소 : 아카데미책방
-텍스트 : 앤디위어 <마션>
-전시 : 걸작영화, 그보다 더 재밌는 원작소설 10선

 

 

 

 

 

 



* 정치철학세미나 1월 휴강

 

 

 

 

 

 



* 동시상영관 1월 휴강
일본답사 일정으로 인해 1월은 휴강합니다. 2월23일(화)에 만나요. 다음달 주제는 <영화 `신과 함께 가라`와 종교개혁 전후의 서양음악( 독일 코랄을 중심으로)>입니다.

* <답사로배우는인문학>팀이 드디어 일본으로 떠납니다. 1월27일~31일 4박5일간 규슈일대를 답사합니다. (사전모임은 1월25일) 모집 마감되었구요, 시즌2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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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성의 특징 - 일단 말을 잘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만남이 피상적이긴 하지만 요즘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그렇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처럼 느슨한 만남에서는 무조건 자기 능력을 자랑해야 한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고, 이런저런 직책을 맡았다고,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늘어놓아야 한다. 나중에 허풍으로 밝혀지더라도 이 역시 또하나의 능력이니 염려할 것 없다. 설득력 있게 거짓말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니까 말이다. 죄책감 따윈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에도 절대 책임을지지 않는다. 일이 잘못되면 항상 남 탓이다. 심지어 남탓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믿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효과가 입증된 도구적 폭력을 사용한다. 여기서 도구적이란 합리적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모험이 깨뜨린 도자기의 파편은 남들이 치우게 한다. 189-190

 

 

자기 인생의 경영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에는 새로운 인생 목표도 포함된다. 바로 성공이다. 요즘 청년들의 경우 인사말에도 성공이 들어간다. 시험도, 휴가도, 인간관계도, 직장 생활도 모두 성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잘 사냐?” 같은 고전적 인사는 상당히 엇길로 새는 질문이다. 잘 사냐?이 질문은 내심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반면 성공이라는 개념은 훨씬 더 개인적인 의미를 띤다....현대의 계명은 측정 가능한 효율성이다. 이는 현대의 최고 사제인 경영자들의 만트라이기도 하다. 다음 서열의 사제는 심리치료사로, 이들의 만트라는 적응이다. 적응을 시키기 위해이들은 독자적 버전의 등수 매겨 내쫓기시스템을 고안하여 이를 교묘하게 사이비 정신병 진단 뒤로 숨긴다. 181

 

신자유주의 도덕은 공익과 개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민주적 시스템같은 긴장 지대를 간단히 쓸어버리고서 그 자리에 조직과 개인의 대립을 밀어 넣는다. ..기업가로서의 개인이 기업가로서의 기업과 대립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 레몬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려 하고, 조금도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한다. 양쪽 중 한쪽, 즉 기업가로서의 개인에겐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나머지 기업가로서의 개인들 역시 같은 레몬의 마지막 한 방울을 탐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정적 변화의 영향으로 노동 윤리는 사라지고 공동체 윤리 역시 아주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우리 스스로 노동을 결정할 수 없는 이상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조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는데 뭐하러 애쓴단 말인가? 사방에서 자신의 성공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하는데, 뭐하러 사회적 의무 따위에 신경을 쓰겠는가?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과 우리가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만 하면 된다. 공동체 윤리의 자이엔 계약서가 들어선다. 점점 더 많은, 점점 더 불합리한 규정들을 담은 계약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하필이면 규제 철폐를 외치는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계약서 숫자가 늘어나면서 도덕은 사라지고 카메라의 숫자는 많아진다. 아동기로의 후퇴이다. 184-185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윤리가 실종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도덕적 기준은 순수 공리주의 성격을 띤다. 모든 것은 생산, 성장, 이윤의 개념으로 측정된다. 이를 위해 모든 조직이 쉬지 않고 평가를 실시해야 하니 순식간에 평가가 통제로 변질된다. 모든 개인은 예외 없이 의심을 받는다. 다들 자기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꼭대기에도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따라서 더욱더 의심스러운 개인이 앉아 있다. 이들 역시 통제와 평가의 대상이다. 물론 누가 이들을 평가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런 사회에 과거의 권위가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권위는 익명의 조직에 자리 잡은 관료주의적 권력으로 대체된다. 188

 

자기 존중은 대부분 타인의 인정에서 얻는다. 헤겔에서 라캉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사상가들 모두가 주장했던 바이다. 헤겔은 타인의 인정이 자의식의 기초라고 말했다. 라캉은 이게 너야라는 타인의 말이 정체성 발달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 뒤편에는 타인이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잠재의식으로 숨어 있다. ..세넷이 현대의 노동자들이 누가날 필요로 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을 때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무도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은 잉여인간이다.”라는 대답을 듣게 될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외쳐대는 사회에서는 굴욕감과 죄의식,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 죄의식은 상황을 내가 좌우할 수 있다고 스스로 설득하려는 노력이다. 진실은 그게 아니다. 진실은 더 단순하다. “당신은 중요하지 않다!” 191

 

요즘 유행하는 소위 자기관리뒤편에는 푸코가 말한 대로 영원한 경제 법정이 숨어 있다. 푸코가 보이에 우리에겐 강요된 삶정치를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삶정치란 사랑에서 시작하며 교육, 음식, 주거를 거쳐 의료 및 심리적, 사회적 서비스에 이르기 가지, 언론에서 환경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는 정치이다. 설명을 잘 살펴보면 푸코가 말한 정치란 분명 현재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192

 

규범과 가치는 인간 바깥, 즉 신에게서 온다. 우리는 이제 그 신과 함께 윤리도 폐기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틀렸다. 규범과 가치는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를 상실할 수 없다. 기껏해야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변화된 사회는 다른 윤리를 가진 변화된 정체성의 거울이다. 새로운 규범의 이름은 효율성이고 목표는 물질적 이익이며, 덕목은 소유욕이다. 194

 

패러다임의 힘은 대단하다. 패러다임은 특정 집단이 가진 강제적 확신의 총체이며, 해당 집단의 사고와 행동뿐 아니라 사회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자기 집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투쟁의 대상이다. 심리 문제가 유전자에 따른 신경생물학적 과정에 기인한 개인의 장애라는 주장을 계속 반복하여 듣다 보면 시간이 흐른 후엔 이 주장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다. (분만도중 산모사망률-제멜바이스, 정신의학의 인지부조화.) 205-206

 

지금은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 있고(성공해야 하고), 모든 이들이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이 팽배하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추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성공뿐 아니라 자식의 운명까지 책임을 져야하니말이다. 학교에서 잘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는 아이 자체의 문제이기도하지만 부모에게도 그야말로 재앙 덩어리이다. 그러니 무엇이든(사이비) 의학의 꼬리표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206-207

 

과거 우리가 학교나 직장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했던 집중력의 수준을 오늘날 우리를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 자극 반응 모델, SNS, 트위터 같은 온갖 패스트푸드 소일거리와 비교해보자. 집중력은 필요치 않다. 신속성과 유연성만 있으면 된다. 그러므로 ADHD라 불리는 이런 새로운 형태의 피상적 집중력과 즉각 반응은 그런 환경에 대한 적응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입증하나? 영국 작가 마크 피셔는 난독증이라는 말 대신 탈독증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주장한다. 읽기는 끝났다. 브라우저, 스캔, 항해, 서평을 해야 한다. 책 읽기는 효율적이지 않다. 책 쓰기도 학자의 경력에 도움이 안된다. 10년전 대학 1학년에게 받아쓰기를 시켜야 한다는 농담을 주고 받았지만 지금은 읽고 이해하기강의를 도입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209-210

 

[평등해야 건강하다] - 소득격차이다. 한 국가, 심지어 한 도시 내에서 소득 격차가 클 경우 사회관계의 질이 다른 곳에 비해 눈에 띄게 떨어진다. 공격성이 늘어나고 신뢰가 줄어들며 공포가 커지고 공동체 생확에 대한 참여도가 떨어지는 것이다....무기력과 무대책보다 더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없다. 212 한 국가 혹은 한 지역 내의 소득 격차가 클수록 심리장애, 10대임신, 영아 사망률, 가정 폭력 및 일반 폭력, 범죄, 마약 및 피임약 소비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불평등이 클수록 건강 상태, 교육의 결과, 사회적 유동성은 나빠지고 안정감과 행복은 줄어든다. 213

 

하이델베르크 대학 연구팀은 바쁜 대도시에서 성장한 사람과 농촌에서 자란 사람은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도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나아가 이런 다름은 공포장애, 심지어 정신분열증의 성향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자라는 환경은 두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우리가 심리장애에 더 취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15

 

개인 차원에서 이 사회가 우리에게 거는 기대는 향락이다. 가장 많이 누리는 자가 가장 규범을 잘 지키는 자이다. 여기서 향락이란 명백히 소비 및 제품과 결합되어 있다. 올바른 휴가지를 선택해야 하고, 올바른 자전거, 올바른 휴대전화, 올바른 노트북, 올바른 옷을 골라야 한다. 물론 옛날에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하지만 현대의 향락은 과거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수명이 짧고 더 많은 비용이 든다. 217

 

학교에는 두 종류의 학생만 남게 된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과 장애아들. ‘정상아동은 보기 힘든 희귀 자원이 되고, 과거의 평균은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터부이다. 이런 종류의 진단에서 중요한 것은 결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이때 사용되는 개념들은 오로지 주변 사람들이 아이로 인해 겪고 있는 문제만 부각시키기 때문에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DMS에 따른 치료가 아이가 겪는 어려움 자체에는 관심이 적다는 사실은 치료 목표에서도 읽을 수 잇다. 아이가 제 기능을 하자마자 치료는 중단된다...치료에 대해서도 아이들은 치료 자체를 거부한다.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218

 

우리의 언어는 뒤편의 숨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우리의 어휘 변화에는 항상 숨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리학과 정신의학이라는 말을 썼지만 요즘은 행동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예전 사람들에겐 심리 문제가 있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행동장애를 보인다는 식이다. 심리학자들 역시 주저 없이 바람직한 혹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말을 쓴다. 예전에는 진단을 내렸지만 요즘엔 평가를 내리고, 유치원 아이들마저 조기 진단의 대상이 되었다. 223

 

진단을 내리는 의사는 직감적으로 판단해 꼬리표를 붙인다. 꼬리표의 대부분은 과연 정신의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의학적 의미에서 질병과 건강의 차이점에 주목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들의 관심은 사회적 일탈 행동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의 차이에만, 그리고 당연히 윤리적 문제에만 쏠려 있다. 이런 진단 시스템의 작동 원리는 이렇다. 심리적 특성이나 행동 특징에서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과잉이나 결핍을 확인한다. 여기서 암묵적인 전제는 원인이 유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식의 진단은 치료의 목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과잉은 잘라내고 결핍은 채워야 한다. 225

 

프로이트 시대에는 노이로제나 히스테리 등 사람들은 너무 엄격한 규범과 시스템으로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전혀 다른 상황에 처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것이 허용되고 소비가 의무인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다. 문제는 자력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둘러 장애나 게으름의 꼬리표가 붙는다. 정체성은 확정되어 있지 않고 탈선은 더 잦아진다. 물론 이런 탈선 역시 빅토리아시대와 마찬가지로 미리 정해놓은 이상적 정체성의 과도한 형태일 뿐이다. 그런데 소위 이상적 정체성이란 것이 30년 전과는 정반대이다. 오늘날엔 훈육이 너무 적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정신과 의사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한다. 과잉를 잘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다.....실제로 슈퍼대디가 아니라 슈퍼내니이다. 책임은 엄마에게 돌아가고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기능이 사라졌기에 실종되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는 전통에 기초를둔(부모를 공경하라) 상징적 권위가 있었다..지금 우리는 익명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잇다...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기에 도덕적인 권위 역시 행사하지 않는 권력 말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런 권력에게는 더 이 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콜센터이다.....이로써 훈육의 수요가 증가하는 이유이다. 훈육은 신자유주의 정첵에 내재한다. 신자유주의가 상징적 권위 및 이에 대한 신뢰를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만인은 만인을 불신하고, 이는 지속적인 통제와 평가로 이어지며, 규제 철폐와 자유시장을 주장하는 온갖 외침에도 끝없는 규제와 날로 늘어나는 계약을 낳게 된다. 푸코는 아마도 이런 과정을 인식한 최초의 학자였을 것이다...오늘날 파놉티콘이라는 훈육에서 한 걸음 크게 나아간다. 감시탑에 아예 사람이 하나도 없어도 통제가 사방에시 실시되기 때문이다..쉬지 않고 정체 모를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각종 검사와 시험에 참여해야한다. 게다가 부단히 스스로를 평가해야 한다. 229-230

 

문제는 한 사회가 병을 주느냐 건강을 주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특정 사회가 일탈을 어떻게 규정하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규정이 윤리적으로 미심쩍어서 한 사회가 자기 자신의 기반을 공격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사회가 자기 자신의 결속을 파괴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곁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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