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여행하는 내내 스코틀랜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이 쓴 [지질학의 원리]를 꼭 가지고 다녔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뉴턴이나 케플러가 행한 우주연구가 기독교적 세계관 추락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땅 밑에 숨은 지옥에서 튀어나왔다...문제는 화석이 불변의 자연관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67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흔히 다윈이 처음 쓴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쓰기 좋은 말로 바꾸어 사회에 적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말이다...진화 사상에 우리가 변화 조종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사회진화론이 19세기 말에 생겨난 것이다. 73

 

진화론적 이해는 하나의 사회 안의 계급과 인종에 국한되지 않았다. 식민주의는 자신들이 자연적으로우월하다는 서유럽인들의 믿음을 강화시켰다. 곧 서유럽 열강들은 이런 논리를 생존투쟁강자의 권리로 해석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독일 민족에겐 열등한 인간들의 영토를 점령할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히틀러의 주장은 시대정신의 정확한 표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까맣게 잊었지만 원래 파시즘은 최대한 완벽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당시의 학문(과학)들을 적극 활용했던 진보 이데올로기였다. 76

 

세속화된 종교들 역시 빠른 속도로 교체되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그리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라 선언했던 최후의 변종 자유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약속했다. 이 역시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한 사다리의 이상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이들 다양한 이데올로기 역시 더 나은 사회를 말하며 우리에게 노력(절제)를 요구한다...종교와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성이냐 믿음이냐를 선택하는 데서 갈린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79

 

오늘날 학문은 과도하게 이성적이다. 모든 열정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가치와 무관하며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공식 독법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시대 사람들이 들었다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라고 혀를 찰 것이다. 학자란 삶의 기본 문제에 해답을 찾는 사람이기에 학문 자체에 가치가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식에 대한 견해를 두 권의 윤리책에 실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식은 윤리에 종속된다. 가치가 없는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열정이 없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80

 

종교의 자리에 학문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학문은 앞에서우리가 던졌던 질문을 제기한다...학문을 과학주의 모델로 축소하면 종교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불쾌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차이보다는 일치하는 점이 훨씬 더 많다. 종교와 과학주의는 둘 다 개인에게 분열된 정체성을 안겨준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쁘고 죄가 많다. 혹은 비합리적이고 우매하다...둘 다 현재의 인간을 불완전하다고 본다...두 경우 모두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두 경우 모두 열정은 금지다. 82-83

 

새천년의 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젊은 몸이다. 영원한 젊음과 섹시한 몸이 메시지이다. 이 시기엔 특정한 심리장애도 급증했다. 자해와 섭식장애, 우울증, 인격장애 같은 것들이다. 앞의 두 장애는 몸과 관련이 있고 뒤의 두 장애는 정체성과 관련된다. 그 사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지만 개인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쏟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더불어 전통적인 정당 간 정책 대결이 사라지고 국민이 선출한사람들은 증시에 조종당하는 경제의 필리 소리에 맞추어 착실하게 춤을 춘다..“사회같은 것은 없다는 마거릿 대처의 정치 발언이 가장 많이 인용된다...사회의 해체는 서서히 공동체 의식을 무너뜨린다. 개인은 점점 더 경쟁자가 되어간다...‘자신 자신의 경험자기 자신의 창조에서 성공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의 텅 빈 거울을 통해 사회의 숨은 파편들을 알아보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86-87

 

인간의 본성은 환경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잇다. 대표적인 사례가 언어이다. 언어는 두말할 것 없이 유전적 기초이다. 하지만 어떤 유전학자도 영어 유전자, 프랑스어 유전자, 독일어 유전자가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하지 못한 아이는 절대 말을 배울 수 없다. 실현되는 환경에 따라 본질적인 특성들이 전혀 다른 현상 형태를 띨 수 있는 것이다. 어디서나 교육이 일어나고, 또 유전자의 영향을 받지만, 교육의 종류는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본성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필연적인 결론이다. 96

 

홉스와 대처의 입장은 자연상태의 인간은 외톨이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고독한 존재 인간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고 집단을 선택하려면 오직 이성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조건이 따라붙는다. 조건은 계약의 형태를 띠며, 계약에 동의한 사회질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개인이 명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이런 인간관은 학문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출발점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우리가 무리 동물이며, 혼자 살아가는 개인은 병이 들거나 배척당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배척은 지금도 전 세게적으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영장류들은 항상 위계질서가 엄존하는 집단에서 살고, 해당 집단 내의 사회관계는 생존과 번식에 매우 중요하다. 집단의 중요성 외에도, 영장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을 공유한다. 다른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우에도 정서적 기초(직관)가 합리적-인지적 외피보다 훨씬 더 사회관계에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의식적으로 사고할 시간이 없다. 98-99

 

영장류 실험에서는 시선 교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준다. 동료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교환 의지도 줄어든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앞에 앉아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매우 불리한 결정을 내리라고 하면 눈에 보일 때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그렇게 한다. 현대식 전쟁이 바로 그렇다. 103

 

영장류의 경우에도 공감이 큰 역할을 한다. 남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 말이다....쇼펜하우어는 이성만이 윤리적 기초라고 주장한 철학자들과 정반대로 공감을 윤리의 기초로 보았다. 사람들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영장류 연구는 정체성 문제의 답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몇 가지 확실한 결론을 허용한다. 인간은 안정과 협력을 보장하는 사회적 서열이 필요한 무리 동물이라는 결론 말이다.....교환 행동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에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마르셀 모스에 따르면 한 공동체는 증여의 은종으로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공동체가 아니다. 또 모든 문화는 무엇보다도 교환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따라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모든 정체성은 그것이 발달하는 공동체의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이 특정 공동체 내의 전형적인 교환 방식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말이다. 영장류는 무엇보다도 식량과 섹스를 교환한다. 105-107

 

에로스, 타나토스 - 이제 문제는 이 기본 충동과 더불어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영원한 에로스는 듣기야 좋은 말이지만 영원한 타나토스처럼 참을 수 없는 개념이다. 가까움과 거리, 향략의 문제는 역시 다시금 윤리의 문제로 귀결된다. 프로이트의 대답은 정말로 흥미롭다. 얼른 보기엔 전혀 관련이 없는 세 가지의 연관성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란 집단의 윤리규칙, 긴장된 신체를 다루는 개인의 규율, 사회관계(통합적이거나 혹은 분리적인)이다. 내가 아는 한 프로이트는 해당 개념들을 이렇게 편성한 유일한 학자이다. 109

 

인간이 향락의 경험에 극도로 이중적인 반응을 보인다. 프로이트가 살았던 당시를 살펴보면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빅토리아시대에는 거의 모든 것이 금지되었기에 시민계급의 삶은 경직되었다. 성적 긴장의 해소는 막대한 수치심을 동반했다. 그래서 사회는 악하고 개인은 선하다는 나이브한 결론이 나온 것이다. 111

각 사회가 사회관게의 조직과 규범 및 가치에서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일 수 있다면 정체성 역시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문화, 다른 정체성은 자동적으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정서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라는 것이 가변적인 것임에도 말이다. 오늘날의 정체성을 2세대 전의 정체성과 비교해보면 권위, , 교육, 노동의 일상 같은 중요한 영역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이러한 심대한 변화는 당연히 정체성의 변화를 몰고 왔다. 116

 

사회적 기준을 도외시한 채 심리의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를 밝혀냈다는 실험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다른 사회는 다른 규범을 적굥하고 비정상도 다르게 정의한다. 다시 프로이트를 인용해본다면 심리장애는 곧 도덕적 장애로, 아니 무엇보다 도덕적 장애로 보이는 것이다. ‘환자들은기존 규범과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거나 남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프로이트가 설명했던 장애들은 19세기 말 사회에는 전형적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증상들이다. 117

 

능력주의의 아름다운 이미지는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사회진화론과의 유사성을 깨닫는 순간 매력을 잃는다...백인은 우월하기에 모든 원시 인종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백인 남성의 짐이다.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집단 내의 약점을 적시에 제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학-과학적 관념은 1900년경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인종주의를 낳았고, 결국 나치는 이 이념을 잔인하게 실천에 옮겼다. 둘의 유사성은 쉽게 입증된다. 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 능력주의의 목표는 적자생존이다. 최고에게 상을 주고 나머지는 추려낸다. 사회진화론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나아가 이기적 유전자로 강조점을 옮겨갔던 것을 상기해보라......사회진화론과 신자유주의는 제일 잘 태어난 인간에게 살짝 더 이익을 얹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냥 두어도 어차피 그 사람은 성공했을 것이다. 135-136

 

능력주의는 등수 매겨 내쫒기로 표상된다. 시스템의 학술 버전인 학교도 똑같다. 종이 위에서는 늘 치솟기만 하는 생산성,그러나 현실에서는 일체의 생산성을 말살하는 개인의 좌절과 시기심의 혼합, 공포와 망상증의 혼합...이것이 실제 결과이다....오늘날의 학문 세계는 미셀푸코의 훈육이란 개념처럼 모두가 익명의 글로벌 감시자에게 속박되어 있다. 이 감시자가 앞에서 말한 최고 잡지의 얼굴을 하고서 높은 말 잔등에 앉아 만인을 감시하고 처벌하고 줄을 세운다...역설적이게도 이런 종류의 품질 감시는 네덜란드의 슈타펠 사건에서 독일 대학들의 박사학위 사기 사건에 이르기까지 엔론과 똑같은 거짓과 위조를 몰고 온다. 144

 

실적 평가는 투명성이라는 꼬리표를 좋아한다. 판단 기준이 명확히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진짜 일을 하는 사람들만 평가의 대상일 뿐 평가를 하는 사람들 자신은 평가에서 비켜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평가를 하는 관음증 환가들은 거울 뒤로 모습을 숨긴 채 기껏해야 자신을 둘러싼 거울이 고통을 증폭시킨다...이로써 우리는 신자유주의 조직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시장의 규제 해제와 자유화에 역점을 둔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실로 예상치 못한 결과이다. 그런 조직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통제 시스템 및 무겁기 짝이 없는 관료주의와 결합한 과도한 규제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결합은 창조성과 생산성에 치명적이다. 149

 

품질 평가에 양적 잣대를 들이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행동은 정말로 순식간에 특정 방향을 향하게 되고, 결국 일체의 다양성이 실종된다. 능력주의 정책이 맞닥뜨린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후보, 제품, 서비스 간의 차이가 적어질수록 순위를 매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능력주의는 승자의 숫자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최고로 뽑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적인 요인에 관심을 쏟게 된다. 제품에서 포장으로 중점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해당 전문 업체에 맡겨 제작한 화려한 보고서로 실적을 프리젠테이션한다. 엣날엔 홍보나 선전으로 취급하던 것이 지금은 잘 나가는 박사님과 로비스트가 비싼 돈을 받고 만들어준 문건이 된다. 155

 

2009년 영국 일간지 옵저버에는 임산부와 워킹망이 일터에서 점점 더 차별을 당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들 경험하는 바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여성 연구자를 위해 탁아소를 운영하는 대학이 과연 있는가? 능력주의는 전형적인 남성적, 남근주의적 경쟁의식과 완벽하게 결합한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의 등장]에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것은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이 주도하는 유혈 폭동인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158 하류층도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다....가난은 본인 탓이라고 밖에서는 떠들어대지만 막상 이들의 마음은 머무나 무기력하여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이 둘의 결합은 계속되는 모욕감을 낳는다.....이런 사회관계의 정적인 성격은 실패자들에게는 속수무책의 느낌을 주며, 이는 다시 무의미한 공격성으로, 무력한 자들의 힘없는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영의 저서 말미를 장식한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임상의학자로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인생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해 행동을 먼저 떠올린다. 2005년 프랑스 외곽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도 그런 경우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지역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158-159

 

두 세대 전만 해도 가정은 가까운 주변과 힘을 합하여 정체성 형성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가 가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외부 세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직 완벽하게 작동하던 철도망이 각자에게 자리를 정해주었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소통 가능성들이 열려 작별을 완벽하게 무력화한다. 이제는 유명한 작별 장면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도착하기 전에 문자가 먼저 올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당연히 아이의 발달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력을 점점 더 축소시킨다. 내부 세계와 외부 세게의 경계는 사라지고 외부 세계가 우위를 점한다. 162

 

미국-스웨덴 교육학자 엘렌 케이는 지난 세기를 아동의 세기라고 불렀다. 우리의 세기는 위험한 아동의 세기라고, 장애 아동의 세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중 진단(과잉행동증후군, 공격적이고 반항적인 행동장애, 자폐범주성장애, 섭식장애, 자해 등)이 넘쳐난다. 어쨌든 문제가 있는 아동 및 청소년의 숫자가 늘어나고, 문제와 싸우는 성인의 숫자도 날로 늘어난다. 163

 

아이가 사랑이 넘치는 안정된 환경에서 자랄 경우엔 5세만 되어도 외부규칙을 받아들여 내면화하고 이를 점차 정체성의 일부로 삼는다....아이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올바른 결정을 배우는 과정에는 부모 외에 다른 규범과 가치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수많은 책과 영화의 주제가 되는 그 유명한 어른되기를 지원한다.......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달리 이렇게 자동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믿을 만한 연구 결과로도 입증되었듯 네덜란드 성인 네명 중 세명은 요즘 아이들을 잔혹하고 비사회적이며 음험하고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한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네덜란드 아동의 14%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 18세 성인의 약 7%노동 불능판정을 받았다.....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환경과 보호자가 바뀐다. 심할 경우 하루에 몇 사람씩 바뀌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권위는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아이의 불안을 가중시켜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애착능력을 키우지 못한다. 자신도 믿지 못하고 남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168

 

이들은 성공한 젊은이들 및 실패한 젊은이들과 더불어 오늘날의 지배 서사와 이 서사가 교육을 통해 전달되면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모두가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모든 욕구, 모든 욕망은 완벽하게 충족되어야 하며, 소비를 통한 향락이 지상 최대의 목표라는 메시지 말이다. 공갈젖꼭지 아이들이 나머지 두 집단과 다른 점은 이런 만족을 오로지 남들이 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사실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은 몇 년 동안 정확히 이런 기대를 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다만 이 집단은 영원히 이런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울 뿐이다. 170 모든 것이 가능하며 타인이 항상 우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신비의 낙원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대답과 결과를 찾아야 하는 거친 현실로 이동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과정이며, 이때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거의 모든 문화는 권리와 의무를 가르치는 의식을 통해 이런 이행을 기념한다. 171

 

아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는 완벽한 존재이기에 아이에게 하지말라거나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아동학대라고 생각하는 사회...이런 사회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모든 모니터에서, 모든 광고판에서 익숙한 모토가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모든 결핍은 해소될 수 있다. 모든 것에는 안성맞춤인 제품이 있다. 무한히 즐기기 위해 굳이 내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삶은 큰 잔치판이다. ‘성공이라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말이다. 173

 

20세기가 남긴 교훈은, 독재는 어떤 형태이건 비판적이고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성장을 차단하는 이념을 강요하기 위해 교육제도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교육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지시해서는 안 되며, 일체의 교화는 자유의 강탈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는 교육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파시즘과 공삱의의 후과로 인해 권위에 대한 과도한 의심이 자란 나머지 교실에서도 서둘러 권위를 추방했다....자유롭게 가르쳐라 그럼 저절로 청렴한 성년 국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념의 아버지인 루소가 자기 자식들을 키우지 못해 고아원에 갖다 맡겼다는 사실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174-175

 

교육을 가치에서 해방시키고 일체의 도덕적 독재를 폐지하려는 노력을 통해 능력 지향적 수업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교실로 끌어들였다. 그러니 이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입에서 매사 그래서 무슨 득이 돼요?”“나한테 무슨 이익이 되나요?”라는 질문부터 튀어나온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전달한 메시지를 정말로 잘 이해한 아이들이니 말이다. 177-178

 

이 시대의 동전에도 피할 수 없는 이면이 잇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현실이다. 열 살만 되어도 벌써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향후 정체성은 패배감 위에 세워진다. 성공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루저이다. 이들 중 몇몇은 그나마 저항이라도 해보지만 대부분의 패자들은 불안증에 시달린다. 자폐 증상을 보이거나 우울증을 앓거나 자제하지 못하고 물건을 사댄다. 이 아이들을 둘러싸고 잇는 교사들 역시 자신을 패자라고 생각한다.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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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와 정체성을 둘러싼 모든 논란의 당사자들은 각자의 전형적 공격성과 공포를 포함하는 동일성과 차이의 필수적 균형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을 최대한 똑같이 만들고 싶은 사회는 최대한 큰 차이를 만들려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38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정체성 발달은 이중의 위험을 안고 있고, 이는 항상 공격성으로 귀결된다. 동화가 너무 일방적으로 진행되면 똑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이 탄생하고, 모든 공격성이 바깥을, 다른 집단을 향하도록 조절한다....두번째로 집단 형성의 측면이 너무 약해 구분과 개인주의가 너무 강조되는 경우에 나타난다. 경쟁심, 사회적 고립, 고독이 초래된다. 이를 두고 거울상을 향한 나르시시즘적 공격성이라고 부른다. 결과는 질투를 유발하는 끝없는 좌절이면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격성이 가까운 주변의 타인을 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9

 

개인의 성격을 그의 정체성 및 타인과의 관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듯 사회 역시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세가지 대립쌍: 가득 찬:텅 빈, 열린:닫힌, 안정된:불안한) - 검열로 구성원들에게 규격화된 서사만 제공하는 사회는 틀에 박힌 인간만 생산한다. 가득차거나 텅비어도 모두 전형적인 정체성 장애를 일으킨다. 브리타니아가 바다를 지배한다는 빅토리아시대 영국인들의 과대망상...보드카에 취한 공허한 러시아인들의 영혼이 그렇다..열린 혹은 닫힌 사회의 극단적인 형태는 늘 과장된 최신 유행만 쫓아다니는 히스테리 인성이다. 그 반대편에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과 정확히 거리를 두는, 전염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는 강박 노이로제이다. 마지막으로 안정된 사회와 불안한 사회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지배서사와 관련되어 있다. 지배 서사가 강할수록 교류는 안정되고 더불어 정체성의 형성도 안정된다. 하지만 너무 과도하게 안정되면 사회가 굳어 권위적으로 변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말한 권위적 인격역시 이에 속한다. 물론 오늘날엔 이런 위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우만이 말한 유동적 정체성이 탄생하고, 이런 흔들리는 정체성은 정해진 경계를 넘어 경계성 인격장애로 치닫는다. 불안한 정체성이 쉬지 않고 감정의 변화를 야기하는 질병 말이다. 42-43

 

규범과 가치는 자신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를 대하는 방식이다. 동시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기에 우리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로 보아야 한다. 정체성은 오로지 우리와 외부 세계의 상호작용,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타인들과의 상호작요에 기반을두고 있다. 이런 규범과 가치는 우리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쉽게 사라질 수가 없다. 둘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하지만 항상 같은 방향으로 변한다. 윤리적 차원의 변화는 정체성 차원의 변화를 일으키고, 거꾸로 정체성 차원의 변화는 윤리적 차원의 변화를 초래한다. 49

 

고대는 윤리를 고유한 성격의 발달, 즉 자아실현과 동일하게 보았다. 이런 본질주의적 인간관은 개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기독교 시대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윤리는 밖에서, 신의 심급에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공동체에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그리스 시민 쪽에서 내세의 구원을 바라며 스스로 고행을 택하는 신심 깊은 기독교인 쪽으로 바람직한 인간상이 이동한 것이다. 자아실현이 자기부정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54

 

고대에는 최고의 (자기)인식에 도달한 사람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편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관점은 전혀 다르다. 지배자는 신의 부름을 받은 자이며 전지전능한 신과 신앙인들 사이에 낀 중간적 위치에 있다. 서열은 명백하다. 신이 모든 것의 위에 군림하며 바로 아래에 신이 선택한 자가 있다. 공동체와 정치적 지휘권은 신보다 아래에 있으며, 국가의 법도 신의 왕국에서 통하는 법에 비추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사자 밥으로 던져준 이유도 그들의 신앙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제국의 법을 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종교 문제에서는 매우 관대했다. 그러나 국민의 불복종에 대해서는 결단코 참지 않았다. 56

 

칼뱅파와 과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자기 단련은 이상하게도 양쪽 모두에게서 인간적 요소를 몰아냈다. 종교는 인간의 상을 투영하지 못하게 했고, 과학 역시 엄격하고 객관적이고자 했다. 두 경우 모두 자기부정이 필요했다. 과학은 객관적 인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종교는 신의 진실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말이다. 종교와 과학의 공통점인 유일한 자기인식은 인간은 나쁘고 더럽고 주관적이라는 진실이었다. 이 시대 이후 윤리적 행동이라는 개념은 아직도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자기극복의 뒷맛을 남긴다...프로이트는 질병을 유발하는 그런 윤리의 효과를 깨달은 최초의 학자였다. 61

 

현재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고대인들과 다르게 우리의 자연적 성향을 거스르는 외적인 무엇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자연적 성향이 나쁘다는 뜻이다. 둘째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더 놓은 권력에, 만인을 항상 예리한 눈으로 감시하는 전능한 심판자에게 해명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 결과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탈출구를 생각해야 한다. 62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살아나온다면 그는 분명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당장 규범과 가치의 상실을 한탄할 것이다. 전형적인 기독교의 덕목인 사랑, 소망, 민음은 신식 헛소리로 치부해버리고 우리의 분열을 부족한 자기인식의 결과로, 자기부정을 장애로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즉각 현대인들이 인간의 천성, 인간의 본성을 부인한다는 내용의 글을 쓸 것이다. 이런 현상이 규범과 가치의 상실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사회 진화로 인한 정체성의 변화이며, 이로 인해 고대와는 다른 규범과 가치가 정체성의 구성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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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욱식 대표 아니 연구자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그의 옛 책부터 최근 저작까지 주욱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예측은 사실관계를 근거로 해서 펼쳐지고 있으며 일관된 기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탄탄하다.


2. 반면 88만원세대 저자 우석훈의 책은 기다려지지 않는다. FTA나 경제상황에 대한 예측이나 저서를 별반 신뢰할 수 없기때문이다(의문스럽다면 예측부분을 살펴보시면 될 것이다. 저자에 대해 디스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쓸 때 책임감을 말하려는 것이다.) 지식인은 선동가와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 것 같다. 연구자의 노력이 가미될 때.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노력이 준엄할 때 세상에 대한 평균적인 이해의 시선을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3. 한 친구가 물었다. 김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친구는 보수적이라고 했다. 보수적인 것만으로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보여줄 수 있다고,


4. 강신주에 대해 물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자인 사람 같다고 그래서 인기가 있다고 하지만 경제를 공부하지 않아 제 발목에 걸려 넘어질 거라고


개인의 자유만으로, 보수적인 신념만으로도 상식의 수준으로 세상에 대한 염증과 갈증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세상에 대한 안목과 수준을 더 넓히거나 높혀나가지 않으면 실망스런 순간이 순식간에 닥쳐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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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0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15-12-3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노력할께요^^
 

옛날에도 잘살고 신분이 귀했지만 이름이 닳아 없어져 버린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며 오직 평범하지 않은 사람만이 거론될 뿐입니다. 대체로 문왕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을 풀이했고 중니(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난을 당하여 <<춘추>>를 지었습니다. 굴원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이소>>를 지었으며, 좌구(좌구명)는 실명하여 그의 <<국어>>가 남겨졌습니다. 손자는 발이 잘리고 나서 <<손자병법>>을 지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좌천되어 세상에 <<여람(여씨춘추)>>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한비는 진에 갇혀 <세난><고분> 두 편을 지었으며, <<시경>> 삼백 편은 대체로 현인과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 울분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발산시킬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좌구는 눈이 없고 손자는 발이 잘려 결국 세상에서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물러나 서책을 논하여 그들의 울분을 펼치고 문장을 세상에 전해 주어 스스로를 드러냈습니다. 359-360

 

덕이란 인성의 근본이며, 악이란 덕행의 꽃이며, 쇠붙이, , , 대나무는 음악의 도구이다. 시는 그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그 소리를 읊은 것이며, 춤은 그 모습을 움직인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마음에 근본을 두고 난 다음에 악의 기운이 그것에 따른다. 이 때문에 감정이 깊으면 문채가 밝아지고, 기운이 성해지면 변화가 신묘하고, 온화함이 마음 속에 쌓이면 영화로움이 바깥으로 피어나니, 악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 악이란 마음의 움직임이며, 소리란 음악의 형상이며, 문채와 절주는 소리의 수식이다. 83-84

 

악이란 (인간의) 내심에서 움직이며, 예란 (인간의)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겸손을 위주로 하고, 악은 풍요로움을 위주로 한다. 예는 겸손함으로써 나아가며 나아가는 것으로 꾸밈을 삼는다. 악은 풍요로움으로써 절제하며 절제하는 것으로 꾸밈을 삼는다. 예가 겸손함만을 따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침체되고 말 것이며, 악이 풍요로움만을 따지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방종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자기 분발을 요구하고, 악은 반성을 요구한다. 예가 자기 분발에 이르면 즐겁고, 악이 반성에 이르면 편안해진다. 예의 자기 분발과 악의 반성은 이치가 한가지이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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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1. 사기본기를 읽다보니, <<공화주의>>나 <<공화국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나오는 '공화'의 출처가 잘못되었다.  주나라 려왕에거 여러차례 간언을 했지만  폭정을 견디다 못해, 백성이 들고 일어나 왕을 쳤고, 소공과 주공 두 재상이 정치를 대행한 것을 '共和 '라 부르고 14년뒤 려왕이 죽자 왕을 잇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고 한다.

 

2. 모임에서도 그렇듯이 깊이 읽는 이가 드물어 속내가 전달되기가 참 어렵다는 느낌이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여기지만, 늘 살짝 단맛이나 쓴맛만 보고들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 역시 그러했다. 8-9년전의 독서지만 깊지 못해 정작 느낌이나 깨달음을 건지지 못했다. 늦게나마 이렇게푹 담궈볼 수 있음이  다행이다. 혹 근처를 배회하는 독자들은 한나아렌트와 하버마스를  좀더 다른 관점에서 다뤄야 할 것 같다. 그 비판과 대안에 대한 모색도 저자들이 비슷한 관점으로 사상가들에 대한 다른 해석을 곁들이고 있어, 좀더 진전된 생각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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