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가 다르다면, 소통이 다르다면, 계급이나 계층의 말과 표현이 다르다면1), 모든 언어가 가진자의 언어와 시녀의 언어로 포획되어 있다면
2.
소통의 출구. (정보-통지-이해) 2), 이해가 되지 않는 한 소통은 없다. 다른 삶, 다른 언어, 다른 소통의 경로가 있다면, 고급언어로 희화화된 말만이 난무하고, 그들의, 우리의 삶의 언어와 한번도 섞이지 않는 현실.(소통이 된 적이 없다고 보여줄 수 있는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그 문법이 아래까지 스며들 수 없다고 이 역시 증명할 수 있는가? 소통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 가운데
3.
날 것의 말과 언어를 사문화된 지식의 언어로 두드리고 때려 비명만 전쟁소식처럼 전달될 뿐, 소통은 되지 않는다. 쪽방의 삶, 비정규직의 삶(얼마나 더 돈을 선망하고, 더 자신의 존재가 싫고 하찮고.....표현하는 정보 소통의 채널하나 없는 상황에, 운동-활동단체가 대변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거꾸로 되먹임되지 않는 현실. 운동이 아니라 외침이나 성명에 그치고 마는 현실은 아닌가?), 아내폭력...소수자. 그 날것의 세계를 지금의 세계와 접목시키거나 드러나게 하거나 전염되게 하는 문제는 순화된 언어로 관조하는 활동으로, 지켜보고 대변하는 시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노숙자의 삶이 현실의 왜곡, 문제점을 찢고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현실을 가를 수 있다는 점은 설문이나 취조나 연구로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늘 연구하고 취조하고,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호흡과 그들만의 비틀기가 자극되고 삶이 발효되어 바뀌어질 수 있다면... ...
4.
조폭의 세계 역시 폭력의 일상만 잇는 것이 아니라 거친 언어와 순치되지 않은 날 것의 시선이 잠들어 있기 마련. 먹고싸고누고생각하는 일상, 자본의 결을 저미는 삶과 언어가 있기마련. 그 대면의 접촉면이 표현의 창끝이 교도소로 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열에 아홉은 다른 결,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 드러날 수는 없는 것인지?
5.
반정규직, 비정규직. 늘 원망하고 벗어나고 싶은 일상. 도대체 생각하고 싶지 않는 현실의 존재감. 늘 존재를 타넘는 일상. 생각조차하기 싫은 현실들. 그 연대의 고리는 어디서, 어떻게 자랄 수 있는 것일까?
6.
과정이 패턴이 각인된다면, 흐름의 힘들을 서로 기억하고 박자를 맞출 수 있다면, 그 흐름의 언어들이 세상의 구할을 넘나들고 넘실거리게 하는 현실이라면, 단 일할의 순화된, 사문화된 언어가, 이 흐름의 언어들을 거세하고 마취하고 있다면, 마취의 언어로 온통 미디어를 도배하고 있다면, 세상의 구할의 움직임을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서로 만나고 있지 못하다면.
7.
다른 언어, 세상의 쓴 맛은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도 상식의 호흡으로 방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은, 늘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9회말 역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3)
8.
2030 자본주의에 평균적으로 감염된 서울 4년제 대학 및 졸업자 정상 남성의 삶언어로 세팅된 사회에 다른 삶의언어가 자랄 곳이 없다. 그러니 소통이란 것이 애초에 없는지도 모른다. 식민지처럼 의식은 감염된 언어를 늘 구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수자.이주노동자.장애인. 다른 삶의 언어는 지금의 언어에 이식되지 않는다. 그들만의 언어로 재단하고 바라보고 처분하고 폐기하고 대변한다고 한다. 삶언어를 만드는 일. 삶언어의 소통고리를 만드는 일. 상식의 호흡으로 아픔이 전달되는 사회. 통역이 필요한 사회. 삶언어가 통역되는 사회. 통역관이 필요한 사회. 다른 삶이 상식의 호흡으로 통역되고 전달되는 세상. 감염된 언어의 결을 뚫고 다른 삶의 언어가 쟁쟁이 울리는 사회. 자본주의에 평균적으로 사육된 2030 남성의 사고언어가 아니라.( 아무런 삶도 없는 고시패스한 친구들이 깨닫는 것 하나 없고 아는 것 허투루 써서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삶이없는 해석과 지시는 무덤같다. 세상에 유리상자를 씌우는 일말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1) 부르디외
2) 니클라스루만이 말하는 소통의 3요소
3) 로쟈: 개혁과 혁명의 차이
뱀발.
어제 일터일로 서울 출장이다. 버스안에서 책을 펼쳐보다, 각주)로 모임에서 사람들 생각에서 얻은 것을 단 것을 보았다. 내식인 줄 알았더니 벌써 2004년의 그의 일이다. 심취하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일터 일로 이야기나누고 나누고 술 한잔하며 나누다가 배여있는 욕심들을 몇시간이 지난 뒤에 발견한다. 버스로 내려오는 길. 이 생각이 스친다. 그러다 집에 잠이 든 새벽, 생각이 되새김 되어진다. 그런데 아침 생각하려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기고 싶은데 기억할 수 없다. 그러다 문득 되새김된다. 그나마 짬짬이 흔적을 남기는 워드패드가 살려낸다. 여물지 못한 생각꼬리들 그냥 둔다. 하나하나 이어나갈 용기가 나지 않고 두렵다. 주)를 다니 더 그렇다. 자전거 출근 8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