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몇주전부터 이 말이 생각주위를 배회한다. 냉혹하게 말하면 블로그에서 뿜어내는 향을 보면서 박제화되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생각한줌도 전시만 될 뿐. 전람회의 그림처럼 그저 일상이 전시될뿐. 그 향은 번지지 않는다. 그 향은 인공감미료의 느낌만 낸다. 설령 그 틈을 비집고 나온 향기는 섞이지 않는다. 상가집의 향처럼 그저  

-1. 블로그가 개별자의 성처럼, 부드러운 점선이 아니라 실선의 영역내만 움직이며, 일상은 필터로 가공되어 전시된다는 느낌. 나르시스의 성에 갇혀 그 고민은 탈출하지 않으며, 설령 탈출하더라도 섞이지 않고 품어지지 않는다. 블로그가 숨쉬지 않고, 일상의 결이 한점도 섞이지 않는 방부의 나날이라면 

-2. 왜 일상의 날 것. 고민이라는 닻이나 결을 내지 못하는 것일까? 고민할 수도 없는 일상의 늪. 살아내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분투의 울음을 삭일 수 있을텐데. 방부처리된 일상은 균열의 틈조차 찾기 어렵다. 하루하루가 공주의 삶, 왕자의 삶은 아닐텐데. 전시나 과시의 아우라가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함이란 것을 알 수 있을텐데. 

-3. 문제를 피해가거나 회피하거나 고민이나 다름을 나누는 연습도 경험도 없는 것은 아닐까? 너무도 강한 나의 공간은 접근금지라는 푯말이 서있는 듯. 너의 숨결이 섞이지 않는다. 나란 강박은 모든 너를 물과 기름처럼 뱉는다. 그래서 블로그는 성이다. 나만의 영역이다. 강건한 휴전선의 출입문은 없다. 

-4. 일상의 아픔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무감각과 고요에 숨죽인다. 담쟁이처럼 손을 뻗고 아픔을 어루만지며 한걸음 내딛는 것이 아니라 감미료 짙은 일상의 향에 한쪽 구석으로 몰린다. 대기중인 아픔은 여전히 저어 멀리 몸을 뒤틀면서 잊혀지거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폐기된다. 

-5. 행여 이쁜 것만 교감되는 것은 아닌가? 슬프거나 아픈 것이 다독거려지거나 아플 것의 결로 스며들 수는 없는 것일까? 청각과 가슴이, 몸이, 촉각의 예민함이 발휘될 수는 없는 것일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보여지는 것만 등급을 나눠 추려진 것만 소통의 기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6. 이쁘지 못한 것. 잘나지 못한 것. 한마디 말은 다 못하더라도 울컥거리는 것에 대한 명민함. 때로 그 나눔이 그 잔영이 깊고 긴 자양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블로거의 저축하는 성곽이 아니라 아픔에 겨운, 나누지 못하면 미칠 것 같은 절박들이 저지선을 뚫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뚫고 나와 성곽의 그 무수한 표현도구가 나-너의 무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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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로거의 인문 (2)
    from 木筆 2009-07-24 10:38 
    1. 가끔 사람들이 그리워지면, 내 마음이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는지? 몸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마음만 온전히 남게 되면, 마음 속엔 온통 사람들이 머물고 있음을,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사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 이렇게 생각 속에서만 배회해서는 되지 않는 것이란 것. 2.  그런데 블로거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교차되지 않는 동선, 마음의 그림자만
  2. 서재 민주주의에 대한 잡생각
    from 木筆 2009-12-15 14:49 
    알라딘서재나 블로그에 대한 생각 #1. 내가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블로그와 사람들의 유격때문이다. 사실 블로그의 정보보다 오프의 만남에서 정보가 훨씬 풍부하기때문이다. 기껏 시각의 활자로 대면하는 것보다, 사람을 볼 수 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 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기때문이다. 설명으로 부족한 무엇들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오프모임의 만남이 친하다는 주례사 기조의 격려로 흐른다면 이것 역시 혈연이나 지연에 버금가는 습속일 것이다.
 
 
밀밭 2009-04-3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건 아니지 싶어요. 증언자들에 따르면 향이 참으로 그윽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다며 내 향인지 네 향인지 이젠 구분조차 어렵다 하더이다. 이상 큰밭에서 향기자였슴다.ㅎㅎ
 

blog.naver.com/nimbus707/10022093651 



-1. 슬로시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몇달이 되어간다. 남도에 내려온 뒤, 이곳을 경계로 몇군데가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궁금증은 번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관광이나 돈산업으로 전락할 도정의 하나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그렇다. 일터 출장으로 대전을 들러 동료들과 이런저런 반가움을 섞다보니, 참여홈컴잉데이도 놓친다. 열차편으로 내려오는데 기차시간이 한시간 반정도나 남아 아이스커피 한잔하며 시간을 때운다. 그러다가 잡지 기사에 치타슬로가 다시 걸려든다. 

 0. 5만명이하, 먹고살거리가 있을 것, 5백km이내의 농수?산물을 먹어야 함.(궁금하시면 위 연결블로그 참조) 

1. 여전히 의심의 눈길이 가지만 궁금증이 조금 번진다. 5백km이내의 먹을거리. 5만명이하의 삶. 자립. 구미가 당긴다. 그래서 위 로고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달팽이 집을 타고 있는 아름다운 집들을 바라다보니, 달팽이 이녀석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아래에서도 올려다보고하는 낙서를 덧보태고 싶다. 

2. 전남의 4곳이다. 청산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가보고싶은 곳으로. 그래서 위험하다. 신안, 담양, 장흥의 면들도 위험하다. 행정이 끼고 관광이 끼고 기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끼워넣는 행보가 겹치기때문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순박한 삶이 자본의 때가 덕지덕지 뭍을까 두려워진다. 

3. 소금하나로 5만명이 실직하지 않고 전통을 향유하며 즐기는 삶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현재까지 개인적인 상식으로... 

4. 5만명을 단위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둥바둥이 아니라...5만명의 따듯한 남쪽을 만드는 것이 과연 어려울까?  

5. 도시형인간들이 생각을 짜내 먹고살 도심의 치타시티, 마을을 기획해낼 수 없을까? 도심의 공간을 뻥튀기처럼 부풀려 5배가m의 먹을거리가 아니라 400km....40km의 공간이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6. 평준화되고 획일화되고 어디나 같은 도시 같은 먹거리에 나름 느린마을만들기는 구미가 당긴다. 자본에 행정에 포섭되지 말고 마을의 힘으로 일어서는 능력이 자란다면...한번 꿈도 꿔보고 생각이 깃들도록 튀어보고도 싶은 것은 아닐까? 

7. 살아지는 것들, 삶에 밀려가는 장막의 의외로 별 것이 아닐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늘 어둠이라고 장막이라고 생각만 할뿐 어둠 속에 보이는 실루엣을 선명히 하려는 노력들이 함께한다면 남쪽은 따듯한 남쪽은 돈도 명예도 힘도 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지는 것을 끝내고 살아가는, 살아오는 것들을 명료화하면 어떨까? 지긋지긋하지 않은가? 이 무한의 뺄셈의 개미지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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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그렇게 능력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마음도 몸도 서울로 향하지 않고 락향하듯 그렇게 자리잡은 남쪽에 둥지를 틀고 부풀려지고 생각의 거름이 풍부한 사람들에 섞여 공간을 균열내거나 다르게 산다면 당신의 재산은 따듯한 남쪽들의 물길을 돌리는 자양분도 종잣시험도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9.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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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9-04-3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5번 이하 공감*200.ㅎㅎ
제 주변 사람들도 만나면 그런 얘기들을 나누곤 한답니다. 꼭 남쪽으로 튀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ㅎㅎ

여울 2009-05-07 09:41   좋아요 0 | URL
많이들 회자되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극단에서 극단까지. 그래야 현실이란 결을 이겨내는 방법의 힘이 조금이나마 생길 듯합니다. 아마츄어타이~ 란!!! 소릴 들으면 그렇찮아요.

극단과 극단사이는 다르게 색다르게. 그렇게 색 달라야 아주 조금 현실이 무엇인지 아는 힘이 생기는 것을 아닐까요.
 

옴짝달짝 못하게 

유혹해 

웃게 만들거나 

맘대로 하게 하거나 

그런 놈, 년이 있다. 

평소엔 꿈도 꾸지 못하는데 

그 새악시는 

아무것도 아닌 듯 

스스럼없이 몸도 마음도 다 가져가버린다 

 

뱀발. 객지에서 뭔 일이람. 정신차려야제... ... 일터 동료들과 맘내놓고 한잔. 몸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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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책사이 소로나 샛길은 없는 것일까~. 학자와 학자 사이에도 그 길은 없을까? 잔잔히 스며드는 그  소통의 공간은 없을까? 독립된 성처럼 장벽을 드리우고 서있는 책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가? 그 공간을 채워주는 일들을 지식인들은 하고 있는가? 어디 장사될만한 것에 혈안이 되어 이식하는데 급급할 뿐, 그 앎들이 스며들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식의 사대주의 분위기에서 자유로운가? 그 앎들이 암초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소통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다닐 수 있는가? 사회학도 아니고, 경제학도 아니고, 코끼리 다리만지듯 느낌만으로 나눈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젊은? 소장?학자들의 고민의 결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제를 넘어본다.

[일상의 시화] 부문이나 분과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이 낱개가 아니라 모두 한묶음이라는 말. 그리고 마음이 박제화되는 것이 아니라 늘 말랑말랑하게 살아있게 만드는 시의 세계. 학문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것을 반성해야된다는 점.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어렵지 않은가? 지극한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도 있긴 하지만, 지금 여기에 비춘다면 얼음처럼 굳어있는 마음경직주의자가 대부분인 현실에 조명한다면, 그 얼마나 엄청난 바꿈의 말씀을 전하는지도 눈치채야할 것 같다. 등대에서 조망하면 본다면(그럴만한 능력이 생긴 것이 다행이라고 봐야되는지?!) 그렇게 단선으로 평가의 일획을 긋는 것이 평론가의 능력과 마음이겠지만, 인식의 시선을 몸높이로 가져내려와 본다면 새기거나 느껴야될 열정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보고 새기고 하면 평론이 일점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다점으로 풍요로움을 만드는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김우창

[몸으로끌면서] 이분은 어렵다.아니 너무쉽다.아니 무서운가.그의 인문의 흔적을 쫓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숱한 서양학자들은 그의 사유의 결에 아주 조금 필요한 부분으로 존재하는데 쉽고 명쾌하다. 에둘러 올라갈 필요없이 숱한 방황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무섭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동무의 그물은 넓고 크다. 외려 넓고 큼이 단점이기도 하겠지만, 생각과 연인과 친구의 벽을 넘으면서 넓다. 구체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그 추상을 작심하고 따라가볼만하지 않을까? 그가 뜬금없이 뱉는 생각의 다양한 결.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술과 사유. 그가 감추고 보이지 않는 일상의 다른 사물.정물.움직이는 물이 어떻게 포착되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지금을 넘는 것도, 이 시대, 이 자본주의시대를 타넘는 방식. 몸으로 끄을 면서... ... 자유롭되 자유롭지 않은...어쩌면 머리의 사유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말하고 있는 것은 가르키는 엄지손가락이 아니라 나머지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 몸의 사유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영민


[포월소내행복....]말을 만든다. 지금 관성에 짓눌려있는 단어를 되새김질한다. 잘게잘게. 그리고 그 단어의 폭이 여러층위이면서 그 설명을 듣다보면 어느새 나만의 사유가 너의 사유로 가까이 가고 있다. 그리고 일상의 뜨거움으로 남는다. 나의 너의 고정관념은 벌써 곧 빠질 치아처럼 흔들리고 있다. 보수는 진보는 이들의 말에 눈길을 주고 있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찾아내려고 하는가? 그저 일개 소부르조아 지식인의 영양가없는 말들인가? 마음에라도 그 말과 단어를 담갔다가 꺼내보았는가?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한번 마음에 적셔봐서 아니면 말구. 마음이 굳어 도대체 움직일 수 없다구. 그렇다면 아예 얘기하덜말던가?? 생각의 결을 넓히는 마술을 가진 분들이다. 늘 당연한 사물이 아니라 추상단어의 결을 넓히는 재주?(감히). 그러니 당신의 일상이 그로인해 풍요로울 수 있다는 점. 다른 센서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당신이 사랑하는 애인들에게도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점. 궁금하지 않은가? 김진석 김용석

[서로주체] 나르시스. 개인의 천국. 그로인한 불행. 서구철학과 학문의 맹점. 우리사유의 구할은 이것. 그러므로 몸에도 가슴에도 손과 발에도 맞을 수 없다. 더 이상 남을 것도 없다. 학자들이 인정을 한다면, 그 전제의 잘못을 시인한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출발한 학문의 맹점을 파고들어야할 의무가 있다면. 움직임이 없다. 말을 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너. 이기의 사유가 아니라 되기. 나의 사유, 너의 사유가 아니라 나-너의 사유. 너-나의 사유는 출발할 수 있을까? 그 사유가 일상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문턱과 저지선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까? [나]의 불안에 서있는, 붙임살이에 대해 사유가 번져나갈 수 있을까? 학문과 학문사이를 넘나들 수 있을까?  김상봉

[이기가 아니라 되기]머리의 공백을 너무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분. 하지만 너무도 이지적인 분들. 사유의 날은 서고 다가서면 베일 듯 날카롭다. 그 사유를 넘어서면 부드럽고 애잔하고 어깨와 웃음이 동생처럼 형처럼 정겹다. 천양 학자. 완벽.이란 단어가 겹친다. 그들이 현실을 몸을 끌면서 너머서고 있다. 소수자이기가 아니라 소수자되기. 그들의 사유는 머리에 멈춰서고 있지 않다. 끊임없는 하향의 향기. 가슴향이 난다. 손발의 소금내가 나기 시작한다. 했다. 되기란 용어는 아무나 쓸 수 없다. 쓴 적도 별반없다. 몸과 가슴, 손발의 뜨거운 효용성을 녹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정우 윤소영

[용광로] 사유를 머리로 녹이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과 손, 발로 녹이는 학자가 있다. 그래서 늘 그의 글을 읽다보면 먼저 데인다. 주춤거려지고 나의 정체를 무너뜨릴 각오를 하고 그녀의 생각을 넘겨야 한다. 아리고 아프고 말미 공황의 지경까지 생각은 흐뜨러진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큰 한숨을 쉰다. 며칠이 지나 몸은, 몸이 누리고 있는 권력은 머리보다 먼저 잊는다. 잊으려 몸부림친다. 머리의 악다구니로 다가서지 않으려 애쓴다. 다음글이 무서워진다. 그의 가슴과 손발의 공간엔 머리의 구획이 필요없다. 부문의 울타리가 필요없다. 열정과 동사, 형용사가 일상을 다 채우기에 머리의 성벽은 이미 무너져있다. 그러니 집착이고 머리사유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거울에 비춰 얼핏 보인다. 존재이전이 필요한 사유의 용광로이다. 정희진

[나쁜소년] 나는 그에게서 김수영을 본다. 그가 마누라에게 스스로에게 남편에게 김수영의 언설을 뱉으리란 것을 안다. 그리고 무뎌진 세월의 겨울을 그의 푸른 유리조각이 실금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조금씩 김수영이 되어가고 있는 밥벌이의 비루함을 끌며가는 후원군들이 있음도 안다. 밥벌이의 비루함이 그렇게 유리조각을 품고가다 그렇게 밥벌이의 신성함, 밥벌이조차 되지 않는 현실을 끌고 만나고 할 것이라는 허언도 만나게된다. 그리고 이미 바닥에 긴 채로 끌며 가는 찬연한 꽃들의 소리도 인지하게 된다. 아마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흔적의 탑을 쌓아왔음을 저 봄꽃 떨어지면 느끼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땅엔 김수영이 너무도 많다. 이땅엔 김수영의 방언이 너무도 많다. 다만 듣지못할 뿐, 맛보지 못할 뿐, 느끼지못할 뿐. 섞이지 못할 뿐. 그로인해 외로움을 한수 던다. 그로인해 김수영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로인해 김수영이 일상을 뜨겁게 달굴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게 된다.  허연

뱀발.  

1. 한결같이 [나] [개인]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그것에 중독되어 있음을 말한다. [너]로 향하고 [몸]으로 향하고, [가슴]으로 향하고 [몸]으로 끈다. 하지만 인문을 말하는 지식권력은 아무말이 없다. 그 성이 이미 무너졌음에도 굴하지 않는다. 그 잘난 인문을 읍조리고 팔고 있다. 성밖의 외로운 싸움과 인문의 길을 내는 분들의 외로움만이 더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 유행하는 학자의 생각꼬리를 잡아 이땅에 풀고 있다. 맥락도 이력도 밝히지 못하면서 소매를 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얼마나 든든하고 틈실한가? 현실에 우리에 착근하는 학자의 길이 놀랍지 않은가? 고진에 들썩이고, 지젝에, 또 다른 맥락없는 수입이 유행처럼 바닥을 훑고, 인문의 지평은 넓고 깊어지지 않는다. 사대의 그늘아래선, 일그러진 근대의 패턴을 되풀이하고선...(너무도 독선적이고 주제넘은 생각..시건방..말을 듣더라도 느낌을 나누고 싶을뿐...) 

2. 사차원의 세계에서 한결같이 이차원을 이야기하다니, 부대끼고 부딪치고 담쟁이 덩굴처럼 절망의 벽을 넘는 방법은 타넘는 것이라고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렇게 넘다보면 지금 우리를 옥죄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도 그것이라 한다. 얼마나 지금여기의 우리가 몰핀에서 벗어나는가가 관건인가? 지금여기를 느낄 수 있는 방법도 그것밖에 없다는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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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_9 내맘대로 독서 편린 결산 (1) (ing)
    from 木筆 2009-09-09 16:56 
    내맘대로 독서 편린 모음  지금 1. 통제가능하지 않는 과학기술에 대한 앎의 경고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에 잘 나타나 있다. 과학기술의 단맛만 우려낼 경우, 그 과학기술이 끌고가는 위험은 어떻게 되돌아올 것인지, 자본의 세계화와 같은 흐름으로 위험은 지구화되고 있다. 경제만의 세계화와 위험은 어찌 그리 짧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웅동체처럼 자신을 증식시켰는지 모른다. 2. 니클라스 루만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없는
  2. [깜짝이벤트] 누구일까요?
    from 木筆 2009-11-20 13:54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사상을 갖는 자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될 위험성에 빠진다.   같은 생각을 갖는 두 사람은 바보로는 취급될 수 있어도 미친 사람으로 취
 
 
 

 
  
 

 


 



식구들이 하룻밤 묵고 간다. 봄비때문인지 떠들썩한 한밤이 지나고, 멀리 진도를 돌아보고 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책의 행간에 그 마음이 언뜻언뜻 지워지지 않고 녹아있다 싶다. 

그러고보니 낙서도 횡하다. 대전 노은동같다는 녀석들의 말, 휘황하게 피어오르는 야간 조명과 바다, 섬의 변주... ... 기차로 보내고 나니 마음 끝이 허하다. 책장들도 손에 그다지 잡히지 않아 일찍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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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02-2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구들이 머물다가 떠난 자리의 쓸쓸함을 어떻게 달래셨나요.
떨어져 계신 동안 가족에 대한 정이 더 각별해지고 있겠어요..

여울 2009-02-24 08:57   좋아요 0 | URL
네, 그러네요. 더 자주 보는 것 같은데도 마음이 그러네요. 바닷내음, 배, 섬...그나마 마음달랠 꺼리들이 많아 다행이네요. 그렇게 마음붙이며 달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