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들이 점점 더 스스로를 더 이상 중립적인 평화 체계들로서가 아니라, 온갖 대립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의 참되고 영원한 평화를 약속한다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공통된, 특정한 사회적 체제들의 부분적으로는 잠정적인 현현들이고 실현들로서 스스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에야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 간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이념 전쟁이 되고(빅토르 쿠쟁Victor Cousin), 미래의 평화 제국을 위한 십자군 전쟁이 된다. 현대적 전쟁에 내재된 이 같은 목표 설정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어떤 평화 조약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즉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런 국가 간 평화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들 간의 지양된 폭력 행위" 라는 이런 종류의 평화를 위해서 그 사이에 "냉전" 이라는 개념이 창안되었기때문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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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6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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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국제관습법‘에 따라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한 법리(法理)를 가지고 말하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겠지만, 판결문에도 언급되었다시피 한일 양국간의 노력이 피해자들의 고통에 미치지 못했다면, 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번 판결에 대해 ‘역사의 재검토‘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관습‘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피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이번 판결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법원의 퇴행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종군위안부 문제도 옛날부터 있었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나온 페미니스트 운동이 제기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무시되었기 때문에 직접 일본에 가져와서 일본의 페미니스트가 일거에 커다란 문제로 만든 것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의 남성(가부장제)도 비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p187)... 종군위안부 문제는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한일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졌지만, 거기에는 이질적인 물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여성의 관점에서 전쟁을 재검토하는 것, 세계사를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의 재검토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고, 여성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고, 동성애자의 눈에 비친 역사가 있습니다. 아직 그것들은 소리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서히 침투하는 것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_가라타니 고진, <윤리 21>,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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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22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여성과 인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계속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로만 기능하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여성, 인권문제가 묻혀온 면이 많았어요.
어제의 판결을 보면서 착잡하긴 하네요. 한국도 일본도 갈길이 머네요.

겨울호랑이 2021-04-22 10:57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어제의 판결은 국내법과 국제법의 상충 문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대신할 수 있는가 등의 법리 문제 외에도 보편 가치의 면에서도 살펴야 할 여러 문제점이 담겨 있다 여겨집니다...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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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젠더 효과는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되고, 따라서 이 효과는 몸의 제스처, 동작,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양식들이 안정된 젠더 자아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법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젠더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의 모델이라는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9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는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젠더를 불연속적이며, 수행적 성과물로 정의한다. '남성'여성'의 안정적 이분법 체계를 기존 권력 구조의 산물로 규정하고, 그의 결과물인 '이성애'를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젠더 트러블>. 우리는 책을 통해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체계를 거부하고, 불안정적이고 불연속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난다.  버틀러가 본문에서 던지는 첫 질문은 과연 '섹스와 젠더는 구분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버틀러의 답은 '섹스는 젠더다' 이며 구분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엄밀하게는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기존 권력 구조의 정치적 조작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섹스를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라 지칭되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담론 이전의(pre-discursive) 섹스'라는 결과를 생산하면서, 바로 그 담론적 생산 작용은 은폐시키는 권력관계를 포과하기 위해 젠더의 공식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p98)...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다. 사실,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99


 '주체'의 문제는 정치학, 특히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중대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법적 주체라는 것은 정치학의 사법적 체계가 굳어지면 필경 '보이지 않는' 어떤 배타적 관행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의 정치적 구조화는 특정한 합법화의 목표, 배타적 목표를 갖고 진행되는 것이며, 이 정치적 조작(操作)은 사법 권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정치적 해석이 있기에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사법적 권력은 자신이 그저 재현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생산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87


 버틀러는 이분법 대신 '젠더'안에서 통합된 관념을 제시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섹스가 젠더라고 말하지만, 젠더가 섹스인 것은 아니다.(섹스는 젠더의 충분조건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구별/구분을 벗어나 통합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젠더 트러블>에서 저자는 우리 몸의 소화기관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몸은 하나가 아니다. 가늘고 긴 소화관이 입으로부터 항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분짓는다. 평소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 우리 몸은 '윗턱-아래턱'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느낀다. '음식'이라는 타자를 통해 우리 내면 안에 위치한 외면이 인식되는 것처럼 이분법 체계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 내면과 외면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상은 불안정하고 모호하다.


 내부와 외부의 구분도 그렇지만, 몸의 경계도 원래 정체성의 일부였던 것을 더러운 타자로 방출하거나 전환하면서 확립된다... 주체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분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은, 사회적 규제와 통제라는 목적을 위해 희미하게 유지되는 구분선이고 경계선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사실상 내부가 외부로 되어버리는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런 배설 작용은 다른 정체성-변별화 형식이 획득되는 모델이 된다. 사실상 이것은 타자들이 배설물이 되는 양상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완전히 구분되려면 몸의 전체 표면이, 있을 수 없는 침투 불가능성을 이뤄내야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37


 그럼에도 우리가 '외면'과 '내면' 또는 '남성'과 '여성'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사법적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우리의 인식이 이처럼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러한 상식은 필연적 결과가 아닌 우연적 산물에 불과하다. 때문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진품이 갖는 아우라(Aura)에 대해 강조한 것과는 달리, 버틀러는 '젠더 패러디'라는 용어를 통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 우연성은 규제에 의해서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이라고 추측되는 인과론적 통일성의 문화적 배치에 직면한 섹스와 젠더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애적으로 일관된 법 대신 연기에 의해 탈자연화된 섹스와 젠더를 보게 된다. 이 연기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선언하고 조작된 통일성의 문화적 기제를 극화하는 것이다...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4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이성애' 를 부정하는 버틀러가 '이성애'를 부정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드래그'로 대표되는 일종의 가로지르기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는 '수행적'이라는 동사(verb)로 활성화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로부터 기존 질서를 '명사(noun)'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차별점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가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자아를 지칭하는 장소에서의) 젠더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또 섹스가 (이성애적이어서 자신이 욕망하는 다른 젠더와의 대립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변별화하는 장소에서의) 욕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젠더는 섹스, 젠더, 그리고 욕망에 관한 경험의 통일성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이나 여성, 양 젠더의 내적 일관성이나 통일성은 안정되고 대립적인 이성애를 필요로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26


 영속적 본질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구성물, 즉 강제적인 속성의 정렬을 통해 일관된 젠더 연쇄로 생산된 구성물이라면, 본질인 젠더나 명사인 남성, 여성의 존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영속적 본질이나 젠더화된 자아의 외관, 즉 정신과 의사 로버트 스톨러가 '젠더 핵심(gender core)'이라고 부른 것은 문화적으로 설정된 일관된 선을 따라 속성들에 대한 규제가 생산해낸 것이다...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자유롭게 떠도는 일군의 속성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31


 이와 같이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서 규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젠더'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권력의 재배치'에 대해 말한다. 재배치되는 권력은 '문화/규범' 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들은 다시 '젠더'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젠더' 역시 '규범'을 만드는 또다른 변인(變因)임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범에 의해 결정지워지는 젠더가 아니라, 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젠더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젠더'가 '규범'을 만들고, 다시 '젠더'를 만드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결정되는 '젠더'. 마치 <주역 周易> <계사전 繫辭傳>에 나오는 '생생지위역 生生之謂易'이라는 표현처럼 새롭게 변화하는 젠더를 버틀러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젠더 트러블>의 논의를  통해 버틀러는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얻었을까. 아마도 잃은 것은 '젠더 정체성'이고, 얻은 것은 '정치성'이 아닐까. <젠더 트러블>을 통해 '~이 아닌'으로 정의되었던 기존 도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기존 질서에 '명사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체제에 '동사성'을 가져오고, '젠더'안에 동성애를 가져오면서, 기존 질서를 정(靜)으로 새로운 질서를 동(動)의 구분지으며 거대 담론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안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젠더 트러블>에서 받는다. 다만, 이렇게 거대 담론이 되면서. 페미니즘의 정체성이 약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 부분은 행동주의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성향과도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젠더 트러블>에 표현된 저자의 생각이 <젠더 허물기>에서는 어떻게 확대될지와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지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는 다음으로 넘기도록 하자...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63


젠더의 속성이 표현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이라면, 이런 속성들은 자신이 표현하거나 드러낸다고 하는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구성할 것이다. 표현과 수행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젠더의 속성과 행위둘, 몸이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보여주고 생산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수행적인 것이라면, 어떤 행위나 속성이 재단될 수 있는 선험적 정체성이란 없다. 그리고 진정하거나 거짓된 젠더 행위, 사실적이거나 왜곡된 젠더 행위 또한 없다. 결국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규정은 규제가 만든 허구임이 드러날 것이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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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4-21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앞에 서문 몇 쪽 겨우 읽다 어려워서 포기할까...하는 중입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4-21 15:44   좋아요 2 | URL
아... 처음 서문에 전체 주체가 압축되다보니 엄청 높아보이는데, 우선 본문을 부담없이 읽어보시고 서문을 다시 보시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버틀러의 용어가 다소 낯설게 다가오긴 합니다만, 그냥 끝까지 가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긴 합니다... 제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겠지만요...

황금모자 2021-04-21 16: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 철학 수용사로 박사를 받아서 헤겔 철학이랑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좀 더 와닿습니다. ‘Identity‘의 번역어 ‘정체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기서 ‘정‘자가 ‘올바를 정‘입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페미니즘/퀴어 이론은 그 반대의 기준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 방법은 결국 정-반-합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증법의 순환에 갇히게 됩니다. 버틀러는 이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이 아닌‘으로 설정되는 방식을 버리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수행성을 택한 것이지요. 버틀러가 제시한 가면의 비유, 드래그가 수행성의 일환입니다. 수행성 연구로 어빙 고프먼 - <자아 연출의 사회학>도 추천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4-21 17:01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황금모자님 설명을 들으니 더 명확해지네요. 고프먼의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에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성서 해석은 텍스트의 자료나 역사적 자료를 꼼꼼하게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이성적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성서해석과 성서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성은 <에티카>와 같이 철학이나 정치학 연구를 위해 필요로 하는, 추상적 사유 내지 이를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라기보다는 성서를 읽고 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과 같은 이성이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8 


  <스피노자의 [윤리학] 읽기>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모두 스피노자 철학 입문서로, 스피노자의 개인 철학과 정치 철학이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이해시켜준다. <윤리학 (에티카)> 에서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파악했다면, <신학정치론>에서는 이성을 사용해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고 급기야 인간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점이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비판적 이해를 통해 종교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신학정치론>의 가장 주요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1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전반의 내용 즉, 고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신의 뜻이 대리인을 통해 행해진 사례 - 모세 등 - 를 통해, '국가에 의해 제약된 종교', '개인의 자유에 의해 제약된 국가'를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제시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 드러난 정치철학은 '자유'라는 자연권을 기반으로 '종교'-'국가'-'개인'의 관계 정립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을 가지고 스피노자 선집에 담긴 스피노자 철학을 리뷰를 통해 보다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페이퍼의 마지막은 저자가 번역한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스피노자는 종교의 본질인 정의와 자비가 오직 통치자의 권리를 통해 법과 권리라는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 이럴 경우, 통치권은 주권을 보유한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에 종교는 오직 명령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권리를 통한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으며, 신은 지상의 군주를 도구로 해서만 인간을 다스린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4


 스피노자가 신학과 종교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이유는 바로 종교의 설립이 국가가 제정한 법령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았듯이 종교의 자유 역시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의 근거가 되는 생각의 자유는 일종의 자연권에 속한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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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인간에게 씌우는 신화는 잔인하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이나 모성애의 신화를 덧씌우며 개별 존재의 고유성을 인정하길 거부했을 때 여성의 존재가 부정당했던것처럼, 예술과 예술가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시선 속에서 소외된다. 예술은 표현의 자유 하에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반 고흐의 서사를 유독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가난에서 숭고한 예술이 탄생한다는 편견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것은 순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의 작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난하고 불행했던 삶이 후에 미화된 것이지, 가난했지만(또는, 가난했기에) 명작을 탄생시키지 못한 작가들은 과거에도 지금도 수없이 많다. 가난은 예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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