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할머니 산소가 있는 전라도 강진을 갑니다. 하루동안의 짧은 일정이지만, 산소에 들르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강진과 해남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돌아본지도 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산 유배지, 김영랑 생가, 백운동 별서정원 등을 들렀고 이번에는 병영(兵營) 성터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병영성터는 황금색 벌판과 어울어져 마치 황금성처럼 보였습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병영이 위치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군사요새임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병영과 관련한 내용을 해설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병영(兵營) 조선의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원래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년) 도강고현(道康古縣)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라도는 물론 제주의 군대를 총괄하는 본부였기에 소속 군인들과 몰려든 상인들로 제법 큰 고을을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곳에 8년 동안 억류되기도 하였다.(p247) <해설 대동여지도> 中


 전라도 육군을 총괄하는 군사기지인만큼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성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원래 성터만 남은 곳이었으나 최근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제법 모습을 갖춘 읍성(邑城)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을 연상케 하는 성의 외관입니다. 복원된 성에는 성곽 일부분을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제압하는 옹성(甕城)도,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는 해자(垓字)도 갖추어져 있어 작지만, 완벽한 요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읍성(邑城)은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가 들끓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관아가 있어 나라를 다스리던 지역에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계승된 것이다. 세종, 성종 때에 많은 읍성들을 축조하였는데, 기존의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5개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04개소의 읍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읍성의 모양은 방형과 원형이 많은데, 이는 산 위에 건축되기보다 평지나 구릉지에 축성되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부정형의 읍성도 있다. 성내에는 관아, 객사, 향청, 훈련원, 중영, 군기고 등을 두어 나랏일을 보고 평시나 비상시 성을 방비한다. 현재 전국에는 동래읍성 등 109개소의 읍성이 남아 있다.(p229) <한국건축사> 中


 역사 속에서 병영은 하멜(Hendrik Hamel, 1630 ~ 1692)과 그 일행이 머물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하멜과 일행은 1656년부터 1663년 대기근이 일어나 남원, 순천, 좌수영(여수)로 분산되기까지 약 7년간 머무르게 됩니다.


 1656년 3월 어느날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에는 태창(泰倉 큰 창고) 혹은 전라 병영(兵營)이라 불리는, 성채가 있는 어떤 큰 고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관찰사 다음으로 권위가 있는 전라도 군사령관인 절도사 節度使의 관저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제주로부터 9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해안과 가까운 곳이었다.(p55) <하멜표류기> 中


 <하멜 표류기> <조선왕국기>로 처음으로 서양에 조선을 소개한 하멜이기에, 그가 한동안 병영에 머물렀다는 사실때문에, 병영성 근처에는 하멜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영과 조선에서의 기억은 하멜에게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닌 듯 합니다.


 신임 좌수사가 7월에 부임해 왔는데 그도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일을 시키려 했다. 우리들 각각에게 매일 일백 패덤(fathom 약180m)이나 되는 새끼를 꼬라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전임자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종류의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 후임자들도 계속 똑같이 할 것이며, 일단 그런 관행이 이루어지면 쉽사리 바꾸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모색했다. 이 심술궂은 사람들 밑에서 매일 슬픔에 젖어 노예 상태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p68) <하멜표류기> 中


 그렇다면, 조선에게 하멜은 좋은 방문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이 역시도 아닌듯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하멜은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 일지를 썼으며, 조선의 풍습, 지리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의 초기 탐색 과정임을 생각한다면 조선에게도 하멜은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원전인 <하멜일지>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이며 보고서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서문)... 조선을 서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만의 안쪽과 입구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절벽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로 水路 안내인은 우리에게 서해안이 가장 접근하기 좋다고 말했다.(p141)<조선에 관한 기술> 中


 하멜과 조선과의 관계는 하멜의 말처럼 포로 - 간수의 관계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원수일지도 모를 이들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필요에 의해 친한 관계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병영성을 떠나왔습니다... 



 러나 우린 이교도의 국가에 잡혀 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고 죽지 않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p66) <하멜표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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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6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정민 선생님과 함께 한 강진 답사
에서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하멜 표류기가 사실은 하멜이 소속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인가에서 보험금
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라는 이야
기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06 09: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하멜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어 의도치 않게 조선을 소개한 역사적인 책이 되버린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머뭇거림은 내가 영원히 뉴요커들의 특징으로 여길 성격, 즉 소심함을 본능적으로 또한 즉각적으로 밀어내는 특성을 자극할 뿐이었다. 처니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를 모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한번 해봐. 그리고 즐겨봐. 이것이 그녀가 말하려는 메시지였다.(p113)

 아이가 없을 때는 이런 일로 인한 좌절감을 사소하게 넘길 수 있었지만, 풀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로서 절반 동안만 곁에 있어주는 배우자를 두고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인내심이 차츰 줄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아예 바닥났다. 버락이 집에 오면, 화내는 나를 만나거나아예 못 만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집 안의 불이란 불은 다 끄고 부루퉁하게 잠자리에 든 뒤였다.(p273)

남편이 정치인인 탓에, 정치와 권력이 돌아가는 양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해왔다. 그래서 모든 선거구에서 투표자가 몇 명씩만 빠져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후보자가 당선되느냐 저 후보자가 당선되느냐만이 아니라 이 가치 체계와 저 가치 체계 중 무엇이 채택되느냐가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p366)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는 거대하게 쩍 벌어져 있고, 평생 아물지 않을 흉터를 남긴다.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p540)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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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5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우주가 과학의 법칙에 따라서 무(無)에서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근간이 되는 기본 가정은 과학적 결정론이다. 일단 우주의 초기 상태가 주어지면, 이후의 그 진화는 과학의 법칙이 결정한다. 이 법칙은 신이 결정한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법칙에 간섭하거나 법칙을 깰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법칙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신에게 남는 것은 우주의 초기 상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뿐인데, 이 초기 상태마저도 지배하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은 애초에 아무런 자유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p62)

시간을 아무리 거슬러올라가도 빅뱅 이전으로는 갈 수 없다. 빅뱅 이전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마침내 원인이 없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원인이 존재할 수있는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것은 창조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창조자가 존재할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p73)

허수 시간에서 경계가 없다는 것이 우주의 경계조건이라면, 우주는 단 하나의 과거만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허수 시간에는 수많은 역사들이 있고 그 역사들 각각은 진짜 시간에서의 역사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주에 대해서 과잉 역사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그럼 무엇이 우주의 가능한 역사들 중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특별한 역사의 집합을 선택한 것일까?(p94)

간편하고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지금도 가능한 방법은 기계를 보내는 것이다. 이 기계는 장거리 성간(星間) 여행을 견디도록 설계된다. 이 기계 장치가 새로운 별에 도착하면, 그 별에 착륙해서 채굴을 하고 더 많은 기계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제작된 기계들이 더 많은 별들을 향해 떠난다. 이 기계들이 화학적 고분자가 아닌 전자 소자 기반의 새로운생명 형태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DNA 기반의 생명을 대체할 것이다. 마치 DNA가 원시 형태의 생명체를 대체했던 것처럼.(p125)

 우리가 새로운 우주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최초의 민간 우주비행사는 선구자들이 될 것이고, 최초의 민간 우주여행은 대단히 비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지구에 사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우주여행을 할 수있게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주로 나가게 되면, 지구 위에서의 우리의 지위와 지구를 관리하는 관리자로서의 책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우주 안에서의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우주에 있다고 믿는다.(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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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1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시백 작가의 <35년> 3권은 1910년부터 1925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작품이다. 일제무단통치부터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난 이 시기의 변환점은 역시 3.1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단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3.1혁명과 이의 좌절. 그리고 이어지는 투쟁이 시대의 큰 흐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5년 1권 : 1910 -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1910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임명으로 시작된 일제의 조선지배는 시작되었다. 사상, 언론, 종교, 교육의 모든 분야에서 내선일체(內鮮一體)을 지향하며 기존 질서를 뿌리부터 흔든 일본의 통치는 민족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일제는 강제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토지수탈은 지주-소작제도의 정착과 함께 많은 이들을 국외(특히 간도)로 떠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훗날 해외독립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35년 2권 : 1916 -1920 3.1 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2.8 독립선언, 1919년 3.1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의 야만적인 진압으로 인해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대중들이 깨어나면서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군 투쟁과 1920년대 대중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5년 3권 : 1921 - 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3.1혁명의 결과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친일파로 포섭하고, 보이지 않는 차별, 검열 등으로 민중에 대한 통제는 더 강화되었다. 또한,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수탈이 이 시기로부터 본격화되었다. 한편, 국외의 무장독립투쟁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성과를 올렸으나, 경신참변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민간인 학살 등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고,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그 세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이후 독립 투쟁은 약산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의열단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뒤를 잇게 되었다.


 <35년>이 배경으로 하는 일제시대는 어둡고 희망이 없던 시대로 느껴진다. 원치 않은 식민지배의 역사는 아픔을 전해 주기에, 찢겨진 상처를 바라보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시기 역사를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대 조선에 신작로와 각종 근대화 설비를 가져다 놓으며, 일제 시대 이후 생활양식이 크게 변화한 것처럼, 우리 삶과 현대의 많은 문제들이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시대로부터 결코 눈을 뗄 수 없다. 조선의 근대화를 부르짖은 개화기 지식인들과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들이 1920년대 이후 변절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민족 신문인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1925년 일제탄압으로 인해 어용신문으로 변질되는 모습에서 현재 언론 모습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1921년 자유시 참변을 통해 한국전쟁 이전 동족상잔의 비극도 확인하게 된다. 또한, 1920년대 일제에 의한 학교설립 규제가 오늘날 사학재단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일제의 잔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많은 사건들이 오늘날 우리 삶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고통스러워도 이 시기로부터 눈을 돌려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박시백 작가의 <35년>은 암울한 시기의 역사를 만화로 그려내면서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문제점과 함께 과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결코 무기력하게 일본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국내, 하와이, 연해주, 만주 등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음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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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달 31일 칠레는 계속되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11월에 예정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담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칠레 지하철 요금 인상으로 촉발된 이번 시위는 사망자까지 나오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제각기 달라보인다. 누군가는 APEC 회담 연기로 미중 무역합의가 미뤄진 것에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라는 시위의 원인에 대해 주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달라 보이는 이 시선에는 공통된 인식의 기반이 자리한다. 세계화와 경제 불평등이 그것이다.


[사진] Chile Protests(출처 : https://www.bbc.com/news/world-latin-america-50191746)


 관련기사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15091.html


 칠레와 APEC. 사실 이들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04년 이미 APEC을 개최한 경험이 있는 칠레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와도 2001년 FTA를 체결한 국가이기도 하며, 이를 바탕으로 남미에서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글쓴 이가 칠레 경제 전문가도 아니기에, 현 상황을 분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 관련 책 내용을 통해 칠레 현대사의 문제점을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은 가능하다 생각되기에, 여러 권의 책에서 해당 내용을 옮겨본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아마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한 국가일 것이다.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지난 25년 동안 가장 뛰어난 경제 실적을 기록했다.(UNDP 2002). 그렇다면 칠레의 상대적인 경제적 성공은 과연 신자유주의 개혁이 이뤄낸 것인가?(p567) <변화하는 라틴아메리카> 中


 <변화하는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 Transformed : Globalization and Modernity  >의 저자들은 2000년대 초반 칠레가 거둔 높은 경제성장지표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개방의 산물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한다. 그리고, 근거로 칠레인들이 느끼는 높은 사회 불안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국제연합개발계획(UNDP) 칠레 사무소의 선구적인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칠레인들의 불안감은 높은 편이다. 안전보장이란 대중의 주관적 경험뿐만 아니라 객관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p568)... 칠레는 라틴메리카에서 매우 낮은 범죄율과 특히 가장 낮은 살인사건 발생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칠레인들은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큰 편이다. 이런 현실은 급속한 근대화과정에서 뒤처진 이들이 느끼는 사회/경제적 불안감의 표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p568)  <변화하는 라틴아메리카> 中


 칠레인들이 느끼는 사회적 불안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칠레 현대 정치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칠레에서 교회의 지위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대립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구리, 초석 등 원자재 산업의 이권과 맞물리게 된다. 즉, 칠레 정치 위기는 단순한 사상이 대립이 아닌 종교, 경제가 한데 얽혀서 발생한 복합적인 문제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칠레가 19세기에 국제경제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다. 1859년 내전을 치르면서 지배층은 이제 조용히 기틀을 다질 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정치 문제는 교회의 지위와 헌법 두 가지였다. 교회의 지위와 관련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종교의 평등을 부르짖었고, 보수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고자 했다.(p483) <현대 라틴아메리카> 中


  19세기 칠레 주요 정당들을 갈라놓은 유일한 쟁점은 교육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역할을 둘러싼 문제였다. 이 정당들의 주된 관심사는 현상유지와 관직의 분배였고, 부패와 비효율이 이 시대 정치 영역에 만연했다.(p322)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하) > 中


 정치가 부정과 무관심 속에 정체되어 있었을지라도 칠레 사회는 깊은 변화를 경험했다. 수출 부문이 이런 변화에서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원자재 수출은 막대한 이윤을 남겼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만이 칠레로 유입되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수출 산업이 정부 운영에 필요한 세입을 마련하고 증가하는 중산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과두지배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구태의연한 지주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의 성장과 경제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했다.(p323)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하) > 中


  19세기 발명된 유선 통신 기술은 칠레에게 기회가 되었다. 유선 통신의 발전은 대륙간 해저케이블선의 연결로 이어졌는데, 20세기 초반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유럽 제국은 안정적인 제국 통치를 위해 대륙간 해저 케이블선을 매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많은 구리 공급을 요청하게 되었고, 구리 생산국이었던 칠레는 이로 인해 많은 외화를 획득하였으나, 동시에 칠레 자국에 미국의 영향력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국내 정치에 개입된 외세의 영향은 이후 가속화되어 20세기 중반 알렉산드리와 아옌데로 대표되는 칠레 좌/우파는 차례로 집권하지만, 칠레 국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집권으로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1958년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낮익은 이름이었다. 바로 아르투로의 아들 호르헤 알렉산드리였다.(p495)... 신임 대통령은 보수적인 정치경제관을 대변했다. 그는 정통적인 통화정책과 외국투자 개방을 비롯한 자유기업 경제를 신봉했다. 알렉산드리 정부는 치솟는 인플레이션에 정통적인 IMF식 안정화 정책으로 맞서 싸웠다. 이를 위해 예산 삭감과 화폐 가치의 평가절하(고정 환율로)와 신규 외국 투자 유치를 시도했다.(p496)... 알렉산드리는 고르지 못한 경제성장 때문에 생긴, 늘어나는 사회 문제를 정통 경제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대규모 공공사업들에 착수했는데 그 재원은 주로 외국에서 끌어들인 것이었다... 농촌 빈민들이 점차 산티아고를 비롯한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주택 문제와 식량 문제, 교육 문제에 시달렸다. 게다가 일자리도 거의 없었다. 이들 '주변인'들은 개발도상국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적 도시화의 서글픈 뒷모습이었다.(p497) <현대 라틴아메리카> 中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옌데가 다수표를 차지했다.(p501)... 미국 정부는 칠레의 선거 결과에 극심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미국은 왜 이렇게 강한 반발을 보였을까?  한창 진행 중이던 냉전의 맥락에서는 칠레 사회주의의 승리는 국제공산주의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p502)... 또한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랠스턴 퓨리나와 포드, ITT 같은 미국의 대표적 기업들이 칠레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회사 중역들은 물론 국유화나 정부 수용 계획에 반대했다. 칠레는 한 마디로 위험스런 나라였다.(p503) <현대 라틴아메리카> 中


 아옌데의 집권과 죽음에 대해서는 장 지글러((Jean Ziegler, 1934 ~ )의 <왜 세계는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의 한 대목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사진] 공격받는 아옌데의 대통령궁 사진(출처 : http://www.abim.inf.br/chile-11-de-setembro-de-1973-uma-segunda-independencia-nacional/#.XcfL4jMzaUk)

 

 1970년 칠레의 인민전선은 101가지 행동강령을 발표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칠레가 처한 높은 유아사망률과 어린이 영양실조라는문제를 놓고 본다면 어쩌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아옌데가 내건 이 공약이 벽에 부딪힌 것은 칠레의 농장을 장악한 네슬레가 1971년 협력거부 방침을 결정하면서부터이다. 아옌데 정부는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하는 다국적기업에 의해서 고립되고, 결국 CIA와 결탁한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습격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된다.(p13)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中


 이후 집권한 피노체트(Augusto Jose Ramon Pinochet Ugarte, 1915 ~ 2006)의 독재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반대파에 대한 과도한 정치탄압에 대해서 인권 측면에서 대체로 부정적이지만, 그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길의 결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목소리가 칠레 내에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를 선택과 칠레의 명(明)과 암(暗)은 비교적 명확하다.


 칠레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안정적인 기조 아래 고도성장을 구현해 왔다. 신속한 민영화와 규제철폐, 그리고 대외개방과 수출산업의 육성으로 칠레는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빨리 구조개혁을 마무리 지었고, 또 그에 따른 과실을 추수할 수 있었다. 대체로 중남미 타국들이 1982년 외채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던 데 반해 칠레는 1973년 10월에 아옌데 인민연합 정부를 무너뜨린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경제개혁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p230) <대홍수> 中


 1990년대 칠레가 이룩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물가상승을 수반하지 않는 급속한 성장이었다. 콘세르타시온이 집권한 처음 8년(1990 ~ 1998) 동안 칠레는 연평균 6.7퍼세트의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외채가 대폭 줄어들고 새로운 외국 자본 유치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민영화는 사실상 최대 규모로 진행되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높은 저축률과 투자율이었다. 이것이 생산성을 계속 유지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성장의 열매를 나누는 분배는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다. 절대 빈곤 수치는 여전히 높았고 소득 불평등이 갈수록 커져 칠레가 역내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로 바뀌었다.(p518) <현대 라틴아메리카> 中


 피노체트 집권 이후 계속된 신자유주의 결과 칠레는 높은 GDP 성장률을 보였지만, 반대로 부작용도 적지 않았는데, 이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과도한 민영화와 국영기업의 외자(外資)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칠레의 경제 개혁에 대한 내외의 예찬에도 불구하고, 이 모델에도 문제점이 산재해 있다. 그 중의 대표적인 사례 하나가 바로 졸속의 민영화 조치로 인해 겪게 되는 주기적인 전력부족 사례이다.(p231)... 스페인계 자본이 가장 큰 발전회사 그룹인 엔데사(Endesa)의 지분을 사들여 전력산업의 핵심부를 아예 통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수익을 내는 전력산업의 탈국적화가 순식간에 진행되어 버린 것이다... 칠레의 전력산업 민영화 사례는 민영화론자들이 그리는 낙관적인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세심한 규제의 규칙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효율성의 증대로 발생한 소비자 잉여가 결국 내외 독과점업체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p232) <대홍수> 中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19세기 원자료 개발 시 들여온 산업자본 문제가 정치대립으로 이어지며, 칠레 정국은 불안해졌고, 피노체트 집권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으로 인한 높은 경제 지표 달성과 소득 불균형, 과도한 민영화로 인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 지배 확대 등이 칠레인들의 불안함의 원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공공요금(지하철 요금) 인상안은 이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의 칠레 경제가 보여주는 것은 GDP의 한계를 잘 표현한다 여겨진다.


  의회가 국왕을 신뢰한 만큼 국왕이 의회를 인정했다면 입헌군주제 수립도 가능했으리라. 불행히도 7월 11일 궁정 반대파가 국왕을 제압하면서 네케르는 파면되었다... 시내가 유언비어로 뒤덮이면서 파리 시민은 쿠데타를 염려했다. 빵이 귀해지고 앞으로 3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 시내에는 12만명의 극빈자가 있었는데 국민의화가 그들을 구원하려는 것을 궁정이 반대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p424)... 7월 12일 무기 판매점을 약탈한 군중은 병기고 습격을 계획해 앵발리드에서 소총 2만 8,000정, 대포 5문을 약탈했고 이어 화약이 바스티유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든 군중이 바스티유 요새로 몰려갔다.(p426) <프랑스사> 中


[그림] 바스티유 습격(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237213105352248408/)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바스티유 습격을 떠올리게 하는 이번 칠레 반정부시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사망자까지 발생한 이번 사건의 배경에 깊은 정치, 경제 문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하다. 칠레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가, 어쩌면 세계 전체가 겪고 있는 경제불평등 문제에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변화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저자들이 지적한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를 제시하며 문제를 공유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정책입안자들과 사회가 해결해야 할 네가지 주요 쟁점이 있다. 첫째, 소득이나 토지, 금융, 기술, 사회적 써비스 같은 자원의 획득과 활용 등 여러가지 차원의 불평등, 또한 인종, 젠더, 계급 차별에서 발생하는 불평등. 둘째, 신자유주의적 변화와 세계화로 가중된 취약성과 불안정. 셋째, 불평등, 취약성, 불안정을 해결할 대안적 발전 계획의 부재. 넷째, 승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가 패자로 남게 되는 배제적인 세계화 과정.(p570) <변화하는 라틴아메리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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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0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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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0 2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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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0 1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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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0 2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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