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 ~ 1935)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Mahomet et Charlemagne>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게르만 민족의 로마 제국 멸망은 고대 사회의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湖水)'로 만들었던 로마에게 게르만의 침입은 제국의 성격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반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을 이끈 원동력은 이슬람(Islam)의 진출에 있음을 앙리 피렌은 강조한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이 진출의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늘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로 메로빙거 왕조과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p334)...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전통적인 용어를 빌리면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800년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이 건설됨으로써 완성되었다.(p335)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이 가져온 서구 유럽의 봉쇄가 유럽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제국과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유럽에서 전통의 단절을 가져올 정도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팽창하는 정책을 택했을까? 


 무아위야와 그 부족은 칼로써 칼리프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혈연과 수니파 교리에 의해 결합된 전사와 상인의 사회이며 동시에 신정체제였다. 그 체제는 정치에서는 실용주의를, 종교에서는 절제를 강조했다. 칼리프 보위의 찬탈자가 성공하려면 아랍의 호전성을 잘 막아서 다른 곳으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하고 또 전쟁을 통해 국가 부흥의 과정을 공고히 할 줄 알아야 했다. 따라서 팽창 정책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새로운 체제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p150) <신의 용광로> 中


 이슬람의 팽창정책은 무아위야(Muawiyah bin Abi-Sufyan, 602 ~ 680)가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ibn Abu Talib, 601 ~ 661)를 제거하고 칼리프의 지위에 오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국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관심을 돌리듯, 무아위야 왕조는 정복전을 통해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슬람은 두 가지 선물을 받게 된다. 하나는 세계사에 유래없이 빠른 기간에 이루어진 광대한 이슬람 제국이며, 다른 하나는 이슬람 내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과 대립이다.


[그림] 푸아티에 전투(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Tours-732)


 732년 푸아티에(Battle of Tours-Poitiers) 전투는 이와 같이 팽창하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낸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푸아티에 전투가 없었다면 유럽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을 것이며, '기독교의 유럽'이 아닌 '이슬람의 유럽'이 되는 위기의 상황을 극복한 성전(聖戰)이었다는 것이 유럽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1215>의 저자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David Levering Lewis)는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카롤링거 왕조의 유럽 사람들은 카를 '마르텔(해머)'이 거둔 푸아티에 승리 덕분에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그 반대로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패배가 더 바람직한 게 아니었을까?(p433) <신의 용광로> 中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브로 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 ~750)과 북쪽의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481 ~ 870)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두 제국이었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 간의 관용과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꽃을 피워낸 이슬람 문명은 개방적인 반면,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서유럽 문명은 폐쇄적이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문화는 서로 융합하여 그보다 더 오랫동안 800년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어났다. 이슬람교는 시칠리아에서처럼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 강력한 상징적 특성을 보여주었는데, 남부 아랍의 힘야르족, 유대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메소포타미아인, 콥트인, 베르베르족, 아프리카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터키인, 몽골족, 심지어는 중국인에게 이미 그 점을 보여 주 바 있었다. 이슬람교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도덕적 갈등 없이 결합했다. 알안달루스에서는 이베리아-라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다.(p210) <중세 1> 中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무엇보다도 백성의 사회생활을 코란의 원칙으로 통치해야 했다. "알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진정으로 증명하라." 예언자는 그렇게 명령했고 아브드 알-라흐만은 그에 순응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라."... 이 문명화된 정책에서 곧 저 유명한 콘비벤시아 convivencia, 즉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용과 상호 의존의 기풍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곳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은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 하나의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공존의 문명을 누렸다.(p311) <신의 용광로> 中


 한 중세학자는 샤를마뉴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카롤링거 사회는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싸우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p434)...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남녀노소의 자유들은 처음에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 가속적으로 사라졌고,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농노로 전락했다. 경제와 정치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권력을 움켜잡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속과 교회의 유력자 대열에 합류했고, 그들의 많은 재산은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기계와 영주들의 화려한 생활양식을 지탱했다.(p435) <신의 용광로> 中


 이러한 사회 분위기 차이는 이슬람에서 상업(商業)이 발전하게 되고, 유럽에서는 농업(農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방대한 제국에 거주하는 인구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우마이야 왕조에서 상업이 융성했다면, 이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사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은 농업사회로, 이후 중세 봉건 사회로 나아간다. 상업사회인 우마이야 왕조와 농업사회인 프랑크 왕국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종교에 따라 경제적 길드로 편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도는 영리하고 활발하게 경쟁하면서 물건을 사고팔고 수입하고 수출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득을 도시에 쏟아 부었다. 아브드 알-라흐만의 은화는 국제무역 통화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아랍 공동체가 방대한 자원의 은과 구리를 통제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역동적 현상이었다. 대조적으로 피핀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는 정금 正金 통화가 거의 없었다.(p317) <신의 용광로> 中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던 시점에, 지중해 북쪽 해안 지대인 셉티마이아와 프로방스에 사는 갈로-로마인들은 경제적 동력이 멈춰선 상태였고 농업과 상업도 고대 로마 초창기 때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독교권의 문명과 비교해볼 때, 아랍 문명은 유기적 통합, 문화, 테크놀로지, 정치적 조직 등의 측면에서 메츠와 파리에 작용하는 원시적 힘보다 훨씬 우월했다.(p237) <신의 용광로> 中


 안-안달루스에서 중시되는 일은 비즈니스였고, 카롤링거의 유럽과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비즈니스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전쟁 준비가 곧 전사 계급의 존재 이유였다... 프랑키아에서는 모든 자유인이 마치필드(군사 소집)에 신고했야 했지만, 알-안달루스에서는 세금 거두는 사람에게 성실하게 납부액을 신고하기만 하면 되었다.(p491) <신의 용광로>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3차 산업 중심의 이슬람 제국으로의 편입이 1차 산업 중심의 프랑크 왕국보다 유럽에게 있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저자의 질문은 새롭지만, 의미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질문으로 느껴지도 한다. 


 서구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엄청나게 중요한 무슬림의 패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경제적으로 후퇴한, 분열된, 동포를 죽이는 퇴행적 유럽을 형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카를 이후의 유럽은 자신이 이슬람과 정반대되는 문명이라고 자처하면서 종교 박해, 문화 배타주의, 세습 귀족 정치를 미덕으로 여겼다는 설명이다.(p268) <신의 용광로>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신의 용광로> 둘 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는 점에서 각자의 의미가 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관점 대신 이슬람의 부상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면, <신의 용광로>는 이러한 앙리 피렌의 입장을 받아들이되,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의미를 달리 갖는다. 즉, 푸아티에 전투가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과연 그 순간이 의미있는 순간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유럽이 이슬람화되었다면 더 빠른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변수는 워낙 많기에, 이처럼  '만약(if...)'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듯.) 이보다는 무아위야조(朝)의 팽창정책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말하는 '마호메트가 없었다면 샤를마뉴도 없었을 것이고, 샤를마뉴가 없었다면 마호메트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내용 속에서 국제관계에서 적대적 공생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폐쇄사회에서의 종교(宗敎)와 권력(權力)의 결탁은 오늘날 분단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사진]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나스르 왕궁(출처 : 이슬람)


[사진] 알람브라 사자들의 안뜰(Patio de los Leones)의 중앙(출처 :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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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2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길에 아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독했습니다.

역사에서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아주 거대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
던데 무슬림 세력이 이겼다면
어땠을 지 궁금하네요.

<신의 용광로> 땡기는데 절판
책이네요...

2020-04-0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2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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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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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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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6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6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이 글을 아주 훌륭한 시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감동하는 어린이 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직관(바로 보고 곧 느끼는 것)의 지혜로움이 아무런 장애도 입지 않고 잘 나타난 시라고 본다. 어린이가 가진 이런 '바로 봄'과 '바로 느낌'을 방해하지 않고, 그것을 불러일으키고 꾀어내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시 지도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49)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이오덕(李五德, 1925 ~ 2003)의 <우리 글 바로쓰기 5>에는 좋은 어린이 시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진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어린이 시의 조건을 어린이 생각(지혜로움)이 잘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엉뚱해 보이지만, 좋은 시의 조건을 수식으로 표현한다면, '생각 * 표현 =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과 표현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0'이라면) 작품이 되지 않을테니 이들을 곱셈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서, '좋은 생각' 또는 '잘된 표현'을 '+1'로 '좋지 않은 생각' 또는 '서툰 표현'을 '(-)1'로 바꿔보자. 간단히 '+1'을 긍정으로, '-1'을 부정으로 표현했을 때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호의 법칙이 성립할까?


(1) (+)1 * (+)1 = (+)1 -> 좋은 생각의 잘된 표현이 갖춰지면 좋은 작품이다.

(2) (+)1 * (-)1 =(-)1 -> 좋은 생각을 서툴게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3) (-)1 * (+)1 = (-)1 -> 좋지 않은 생각을 잘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4) (-)1 * (-)1 = (+)1 -> 좋지 않은 생각을 서툴게 표현하면 좋은 작품이다.


 부호의 법칙 (1) ~ (4) 번까지는 일반적으로 수학의 세계에서 공리(公理, axiom)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번 명제에서는 내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번의 예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 속할 것이고, (1)과 (2)의 법칙은 받아들이는데 굳이 크게 무리가 없다 생각된다. 


 자연을 이렇게 따스한 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훌륭하다. 읽으면 저절로 웃음이 나는 좋은 시다. 여기서는 자연이 인간이고 인간이 자연이다. 자연과 인간이 아주 하나로 되어 있는 훌륭한 시다.(p33)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그렇지만, 문제는 (3)법칙에서부터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우리 글 바로쓰기 5>에서 여기에 해당되는 예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글에 대한 김 씨의 의견은 "아이가 어른의 눈치를 계산하지 않고 솔직한 자기 생각을 쓴 용기가 좋다. 그렇지만 이 글을 두고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썼기 때문에 좋은 글이라고 하며, 어른들의 잘못된 생활 태도를 지적하고 비판한 점을 칭찬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시작하여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길게 적어놓았다.(p156)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김 씨의 의견에 따르면 '좋지 않은 생각(-1)'을 '숨기지 않고 잘 표현(+1)' 했기에, '좋은 글이 아니다(-1)'가 성립한다. 이는 수학의 부호의 법칙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수학과는 달리 논란의 소지가 있기에.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도 이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이다.


  나는 김 씨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다.(p158)... 우리의 학교 교육은 자주성이고 자발성이고 창의성 같은 것은 철저하게 둘러막아버리고, 다만 지시와 명령만으로 아이들을 기계같이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기의 마음과 삶을 잃어버리고 어른들이나 그밖에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슬픈 버릇을 몸에 익혀버렸다.(p160)... 많은 아이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하지만 이 아이만은 행동만 하지 않고 생각을 했다. 자기를 움직이게 한 사람의 태도에 대한 생각이다. 어쩌면 이 생각은 이 아이뿐 아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같이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이 아이는 확실히 붙잡았고 그래서 그것을 글로 밝혔다. 이것이 소중하다. 이것저것 다 살피고 계산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우러난 절실한 느낌과 생각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이것이 귀중하다.... 만약 교사가 참 교육자라면 학생의 이런 비판의 소리에 마땅히 반성해야 한다.(p163)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이 명제에서 부호의 법칙 (3), (4)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김씨의 생각을 요약하면,어린이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견을 숨겨야 좋은 작품이라는 것으로 이는 수학의 법칙에는 들어맞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저자의 반대 입장처럼 다른 의견도 존재할 수 있기에, 부호법칙 (3)과 (4)에 대한 맞고 틀림은 각자의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현실과 이론의 세계는 다르니까. 

 

 법칙(-1)(-1) = 1은 음수의 곱셈에서 성립하는 법칙인데 이와 같은 법칙은 분배법칙a(b + c) = ab + ac를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1) (-1) = -1이 성립한다면, 분배법칙에서 a = -1, b = 1, c = -1로 각각 잡았을 때, - 1(1 - 1) = -1-1=-2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1(1 - 1) = -1.0 = 0을 얻기 때문이다. 음수와 분수에 적용되는모든 다른 정의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과 ˝부호의 법칙˝ (3)을 수학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p73) <수학이란 무엇인가> 中


 수학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책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 글 바로쓰기>의 저자 이오덕은 생각의 가치보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 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글의 내용에 무엇이 담겼는가에 대한 책임은 어른의 몫이고, 아이들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저자의 교육철학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이 시는 실제로 체험한 것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거짓스럽게 느껴진다. 자기의 마음과 삶을 정직하게 쓰려고 하지 않고 '이런 것을 써야 근사한 시가 되겠지'하고 썼으니 말이다.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을 상상으로 쓸 때는 바로 그것이 상상임을 읽는 이들이 알도록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른의 시와 어린이 시가 다른 점이다.(p37)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글쓰기는 인간교육의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저마다 쓰고 싶은 것을 정직하게 쓰게 하지 않고, 교육을 잘 한 것처럼 윗사람이나 학부모나 사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이 될 때는, 이 글쓰기가 아이들을 아주 좋지 못한 사람 - 꾀부리고 거짓말 꾸며대고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게 한다.(p101) <우리 글 바로쓰기 5> 中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의 <무지한 스승 Le Maitre Ignorant >에서 '보편적 가르침'과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강요가 아닌 해방이며, 이를 위해서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도와 교육의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여기에 정확히 해방이 대립된다. 해방이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정식을 거꾸로 뒤집은 평등의 정식이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이 뒤집기는 인간 주체를 코기토(Cogito)의 평등 안에 포함시킨다. 생각은 사유 실체가 가진 한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속성이다.(p33)... 보편적 가르침의 모든 실천은 다음의 질문으로 요약된다. "너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p77) <무지한 스승> 中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주의깊게 들어야 한다. 우리(어른)들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무조건 따를 것을 강요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배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에 따른 이들이 희생되었던 4.16 세월호 참사는 (비록 그것이 모든 원인은 아닐지라도) 어른들의 일방적인 강요가 비극적인 결과의 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라 생각한다. 가볍게 시작한 글이 무겁게 끝나게 되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 글 바로쓰기> <무지한 스승>을 통해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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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Paul Johnson, 1928 ~ )의 <모던 타임스 2 : Modern Times: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를 다룬 책이다. 1권과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의 성격과 태도를 상세히 묘사하며, 이들이 세계사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서술하는 방식은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 조운이 유선을 구한 장판전투(長坂戰鬪)나 관우가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오관참육(五關斬六)을 그리는 것과 같은 호쾌함을 주기에 전체적인 현대사의 사건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그림] 장판전투(출처 : 위키백과)


 그렇지만, 역사(歷史)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현대에 교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매카시즘(McCarthyism)을 다룬 장에 유독 시선이 머무른다. 1950년대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고발로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전역에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일게 한 이 사건에서 데자 뷰(deja vu)를 느끼게 된다.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 ~ 1957)가 여러 사람의 인생에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미국의 명예 훼손에 관한 법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그의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발표했다. 사실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무책임한 비방을 일대 스캔들로 만든 것은언론, 특히 통신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마녀 사냥으로 확대되었던 1970년대와 비슷하다. 둘째 일부 사회나 단체, 특히 할리우드와 워싱턴의 도덕적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곳곳에 만연한 불합리와 비이성에 굴복했다.(p176) <모던 타임스2> 中


 21세기에도 빨갱이, 좌파 등의 이야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온갖 거짓뉴스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든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Ike" Eisenhower, 1890 ~ 1969)는 '감추어진 손'이라 할만한 은밀한 통치 스타일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이런 통치 스타일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이 밝혀졌다. 아이젠하워는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다.(p178) <모던 타임스2> 中


 폴 존슨은 <모던 타임스 2>정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통해 미국을 번영의 시기로 이끈 아이젠하워가 어떻게 매카시즘을 잠재울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 ~ )가 왜 그토록 북한문제에 매달렸는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울 수 있다. 아직, 문재인과 트럼프 두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를 받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이들이 택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역사가 답해주고 있다...  


 평화는 미국 선거에서 언제나 필승의 카드였다...  공화당 후로보 대통령에 당선된 1952년의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불필요한 전쟁이자 반복된 실책으로 여겼다. 그는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이 전술은 효과를 거두었고, 9개월이 안 되어 불완전하나마 협정을 타결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반공 히스테리를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심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매카시즘이 선풍을 일으킨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고, 한국전쟁이 끝나면 매카시즘도 곧 시들해질 것임을 알았다. 그는 평화를 위한 노력에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p177) <모던 타임스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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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 ~ 1918)는  1874년 <모든 대수적 실수의 모임의 어떤 성질 uber eine eigenschaft des inbegriffes aller reellen algebraischen zahlen>이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의 논문을 출간하였다. 이 논문에서 대수적 실수의 집합이 가산 무한임을 증명한다. 이에 반하여 실수 전체의 집합은 가산이 아니며, 따라서 자연수 집합처럼 가산인 무한집합보다 더 높은 등급의 무한집합이라는 것이 이 논문의 혁명적인 결과였다.(p196) <The Princeton Companion to Mathematics 2> 中


  칸토어의 집합론 중 무한(無限)의 개념을 설명한 논문의 내용을 쉽게 설명한 내용을 <수학이란 무엇인가 What is Mathematics?>에서 찾아 옮겨본다. 칸토어는 모든 유리수를 a/b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리수 a/b를 a번째 열과 b번째 행에 대응시켜 정렬한 대각선 논법을 활용하여 유리수가 정열할 수 있는 무한집합임을 증명했다.


 [그림] 대각선 논법(출처 : 위키백과)


 무한에 대한 분석에서 칸토어가 처음으로 발견했던 사실은 유리수의 집합(정수의 집합을 부분집합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무한집합이다.)이 정수의 집합과 대등이라는 사실이었다... 칸토어가 관찰한 바와 마찬가지로 연속적인 원소들 사이의 크기관계를 무시하면 모든 유리수를 정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수열 r1, r2, r3,... 로 정렬할 수 있다. 바로 이 수열에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유리수가 결정되어 모든 유리수가 단지 한 번만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집합의 원소를 정수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수열로 정렬하는 것을 집합의 가부번화(denumeration)이라고 한다.(p103) <수학이란 무엇인가> 中


 반면, 여기에 무리수가 더해진 실수의 집합은 가부번화될 수 없음도 증명한다. 모든 실수가 가부번화되지 않는다는 증명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가부번화 할 수 없는 실수를 찾으면 된다.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명제의 가부는 한 마리 검은 백조(black swan)면 족하듯, 칸토어는 이 검은 백조를 찾음으로써 실수 집합이 가부번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칸토어에 따르면 실수는 정수와 유리수의 집합이 가지는 무한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고도의 무한의 형태이다... 무한소수 z=0.abcde.... 를 생각하자. 이 새로운 수 z는 나열할 수 있는 어떤 수와도 같지 않다. 왜냐하면 첫 번째 수와는 소수점 아래 첫째 자리수가 다르다. 그리고 두 번째 수도 소수점 아래 두 번째 수가 다르고 일반적으로  n번째 수와는 소수점 아래 n번째 수가 다르다. 결국 연속적으로 정렬된 소수의 표가 실수를 모두 포함하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집합은 비가부번이다.(p105) <수학이란 무엇인가> 中


 그리고, 이로부터 무한(infinity)의 종류는 나뉘게 되고, 무한의 집합에도 '더 큰 집합'이 존재할 수 있다는 밋밋한 논문의 내용이 도출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적어도 두 종류의 무한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정수의 가부번 무한과 연속체가 가지는 비가부번 무한이 그것이다. 정수의 집합은 실수 집합의 부분집합이지만, 실수의 집합은 정수의 집합이나 정수집합의 부분집합 어느 것과도 대등이 아니다. 따라서 정의에 의하면 실수의 연속체는 정수의 집합보다 큰 기수를 가진다.(p108) <수학이란 무엇인가> 中

 

 <10의 제곱수 Powers of Ten>에는 10 제곱미터 반경안에서 피크닉 도중 낮잠을 자는 남녀의 모습이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남자의 손등안을 조명하면서 10의 -16제곱미터의 세계(미시세계)부터 10의 24제곱미터의 은하계(거시세계)까지를 폭넓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보여준 세계는 영화가 만들어진 1977년까지의 인식범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늘날에는 틀림없이 더 많은 것이 밝혀졌을 것이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세계는 무한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게 모두가 무한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시세계의 무한이 거시세계의 무한보다 작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미시세계가 우리 몸안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다. 소우주(小宇宙 microcosm)와 대우주(大宇宙 macrocosm)는 이처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force)를 통합한다는 대통합이론(Theory of Everything)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지나치게 나간 것 같아, <Powers of Ten>의 공식사이트  http://www.powersof10.com/film의 주소를 공유하면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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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0-03-29 1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미르 D. 악젤의 《무한의 신비》는 칸토어 전기인데, 칸토어가 무한을 연구하면서 유태교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칸토어가 무한을 표현할 때 쓰는 기호는 알레프라는 히브리 문자죠. 연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라 추천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3-29 16:2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칸토어가 유태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몰랐는데, 황금모자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황금모자님 건강한 한 주 보내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03-29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주는 유한한데 경계가 없다”는 이야기를 근래 듣고 저도 ‘무한’에 요즘 관심 많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03-29 17:15   좋아요 0 | URL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다는 말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ㅜㅜ 공부가 더 필요한 것이겠지요. 무한 등은 평소 우리의 인식범위를 넘어선 개념이어서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공부하시다 좋은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한 13 : 2) ...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 27)


 The devil had already induced Judas, son of Simon the Iscariot, to hand him over(Jn 13 : 2)... After he took the mersel, Satan entered him. So Jesus said to him, "What you are going to do, do quickly."(Jn 13 : 27)


 그(루시퍼)는 여섯 눈구멍으로 울고 세 조각

 턱 위로는 눈물과 피맺힌 침을 뚝뚝 흘리더라.

 

 입이란 입은 이빨로 한 죄인을 

 발기는 게 삼을 찢는 듯한데, 이렇게

 세 놈을 아파 못 견디게 굴더라.


 스승이 가로되, "저기 드높이 가장 무서운

 벌을 받는 영혼이 유다(이스카리옷)이니, 

 그 골통이 쑥 들어가고 정강이만 쑥 내밀었구나.(p466) <단테의 신곡 上 지옥편 제34곡 52 ~ 63)> 中 


 기독교 역사 2000년 중 가장 유명한 죄인, 배신자인 유다 이스카리옷. <성경 The Bible>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도 설명되고 있듯 생전에는 사탄(Satan)의 유혹을 받은 존재로, 죽어서는 지옥에서 루시퍼(Lucifer)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이끈 배신자인 유다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때문에, 기독교 문명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좋지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유다는 '할 말 없는 죄인'에 불과하지만, 레오니드 안드레예프(Leonid Andreyev, 1871 ~ 1919)의 <가룟 유다>는 그런 관점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힘이 있어 보였지만 유다는 왜 그런지 나약하고 병색이 있는 듯 가장했고, 목소리는 일정치 않았다. 때로는 힘 있고 남성적이고, 때로는 듣기에 불쾌하고 기분나쁘며 남편을 욕하는 늙은 여편네의 째지는 목소리를 냈다... 붉은빛의 짧은 머리칼은 그의 이상한 두개골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두개골은 두 번의 칼질에 의해 절단된 듯 뒤통수에서부터 네 부분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어 불신과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두 개골을 갖고 있다면 고요와 평화는 있을 수 없으며 유혈의 무자비한 전투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릴 것이다. 유다의 얼굴 역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날카롭게 관찰하는 검은 시선의 한쪽 눈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며 그 주위는 많은 주름이 져 있었지만, 다른 쪽은 생기도 없이 밋밋하고 마비된 듯하고 주위에 주름살도 없었다.(p30) <가룟 유다> 中


 <가룟 유다>에서 유다의 외모는 이중적이다. '살아 있는 눈'과 '죽은 눈'을 가진 좌우 비대칭 외모를 가진 인물. 마치 마징가Z의 아수라 남작처럼 다른 면을 가진 유다는 그의 외모처럼 스승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인물이다. 스승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스승을 미워하는 제자. 한 인물 속의 애증(愛憎)의 감정은 결국 그를 파탄으로 이끈다.


 모든 이에게 예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한 송이 꽃, 좋은 향기가 나는 장미였지만, 유다에게는 날카로운 가시였다. 마치 유다에게는 심장도 눈도 코도 없어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부드럽고 순수한 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p45) <가룟 유다> 中


 자네(유다)는 아름답지 않고 자네의 혀 또한 얼굴처럼 유쾌하지 않네. 자네는 거짓말을 일삼고 항상 험담을 늘어놓네. 그러면서 예수가 자네를 사랑하기를 바라는가?(p60)... 도마, 난(유다) 그를 아네. 스승님은 유다를 두려워하는 거야! 스승님은 용감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유다로부터 숨고자 하네. 스승님은 바보, 배반자, 거짓말쟁이를 사랑하네. (p61) <가룟 유다> 中 


  스승의 사랑을 바라지만,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다. <가룟 유다>에서 유다는 똑똑하지만 거짓말을 일삼는 비열함도 함께 가진 이중적인 인물로 설명된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은 유다를  제사장 안나스에게 이끌어 스승을 팔아 넘기게 된다.


 그들은 스승님을 항상 사랑합니다만,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사랑합니다. 스승님이 살아 있으면 가르침에 대해 물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이 죽으면 그들이 스승이 될 것이고 그때는 다른 이들의 마음이 불편하겠지요!.... 그들은 불쌍한 유다를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은화 세 닢을 훔쳤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유다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파렴치한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p77) <가룟 유다> 中 


[그림] 스승을 넘기는 유다( 출처 :https://www.history.com/news/why-judas-betrayed-jesus)


 <가룟 유다>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는 유다의 모습이 제시된다. 예수를 유대 제사장들에 넘긴 후 유다가 자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성경에서는 유다의 죄책감에 초점에 맞추지만, <가룟 유다>에서 유다는 조금 다르다. 예수 죽음의 책임을 자신에게만 전가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에게 되묻는다. 가장 사랑받는 제자라 불렸던 요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 예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한 야고보와 요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가 잡혔을 때 예수 곁에 있지 않았음을 유다는 비판한다. 너희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하지만, 너희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유다의 물음은 통렬하다.


 자네가 말하는 훌륭한 희생이라는 게 정말 있는가? 희생이 있는 곳에는 통곡 소리와 배신자들만이 있네. 희생이란 한 사람의 고통이자 모든 이들의 치욕이네. 배신자들, 자네들은 이 땅에 무슨 짓을 한 건가? 자네들 자신이 모든 죄를 짊어졌네. 자네로부터 배신자 종족과 소심쟁이, 거짓말쟁이 가문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자네들은 이 땅을 파괴하려 했네. 자네들은 조만간 자네들이 예수를 못 박은 십자가에 입 맞출 것이네!(p136) <가룟 유다> 中 


 <가룟 유다>에서 유다 죽음의 동기는 죄책감이라기보다는 허무감에 가깝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사건. 예수 수난기. 유다의 분열된 마음이 가져온 이 사건과 유다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유다의 마음은 하나로 통일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유다의 죽음은 <성경>의 내용처럼 그 자신을 회개하지 않은 죄인으로 만든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가룟 유다>에서처럼 분열된 인격의 통합으로 이룬 완성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예수는 죽었다. 공포와 꿈이 실현됐다. 이제 누가 유다의 손아귀에서 승리를 빼앗겠는가? 실현됐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군중이 골고다에 모여 '구해 주소서, 구해주소서!' 외치도록 내버려 두자. 피와 눈물의 바다가 땅 위에 흐르겠지만 그들은 단지 치욕스러운 십자가와 죽은 예수만을 발견할 것이다.(p124)... 유다는 자신의 발밑에서 하늘과 태양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외로운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의 무력함을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을 심연 속으로 던져 버렸다.(p125)... 기괴한 열매처럼 유다의 몸은 밤새도록 예루살렘 위에서 흔들렸다. 그러나 죽어서 이상해진 얼굴이 어느 방향을 향하건, 핏기로 가득 찬 붉은 두 눈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고 한결 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p141) <가룟 유다> 中 


 <가룟 유다>에서 유다는 모순된 인물이다. 거짓말을 일삼는 교활한 인물이기도 하면서, 스승의 사랑을 원하는 지고지순한 인물이기도 하면서,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유다는 도마와 대화를 나눌만큼 이성적인 면도 가진 반면, 베드로와 힘을 겨눌만큼 튼튼한 신체도 가진, 문무(文武)를 겸비한 매우 복합적인 면을 가진 인물이다. 우리의 인식과는 다른 유다의 모습을 우리는 <가룟 유다>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유다의 다른 면을 외경(外經)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지난 2006년 세상에 알려진 <유다복음 The gospel of Judas>이 그것이다. 

 

 유다가 말했다. "선생님, 제 후손들이 그 통치자들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오라, 나는 [-2행 누락-], 그러나 너는 네가 그 나라와 그 모든 세대를 보면 많이 슬퍼질 것이다." 유다가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받아들인 그것은 좋은 것입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저 세대를 위해 저를 떨어뜨려 놓으셨습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너는 열세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들에 의해 저주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을 저주할 것이다. 예수가 말했다. "[오라], 내가 너에게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비밀]에 대하여 가르쳐주마. 왜냐하면 위대하고 끝없는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다복음> 中 (번역 출처 : http://m.pressian.com/m/pages/articles/320?no=320)


   Judas said, "Teacher, surely the rulers are not subject to my seed?" Jesus answered. He said to him, "Come ..... [about two lines are untranslatable] [b]ut because you will groan deeply when you see the kingdom and its entire race." When Judas heard these things, he said to him, "What benefit have I received because you separated me for that race?" Jesus answered. He said, "You will become the thirteenth and you will be cursed by the rest of the races - but you will rule over them. In the last days, they will < > and you will go up to the holy ra[ce]." Jesus said, ["Com]e and I will [te]ach you about the [things ..... that] no human will see.(p116) <Judas, 9 : 26 ~ 10 : 1> 中 


 영지주의(Gnosticism) 복음서로 여겨지는 <유다복음>이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이 안에서 유다는 예수에게 인정받는 첫 번째 제자이면서, 비밀을 전수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신앙적으로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유다 복음>의  인간 유다의 다른 면을 발견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도록 하자. <가룟 유다>와 <유다 복음>을 통해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惡人)이 아닌 인간 유다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사탄과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는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 1934 ~ )의 <악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다음 기회에 정리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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