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 기본소득에 대한 철학적 옹호
필리프 판 파레이스 지음, 조현진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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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파이레스는 사회보험제도, 조건적인 보장소득안 같은 여타의 사회보장제도와 무조건적 기본소득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히 한다. 즉 기본소득 제도는 수혜자가 수혜 자격을 얻기 위해 과거 소득으로부터 기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사회보험과 다르며, 자산 심사 여부나 노동 의향 및 작업 교육의 의향이 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수급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조건적인 보장소득과 다르다. 그러나 판 파이레스는 기본소득이 데모그란트나 시민 소득과 같은 현존하는 최저소득보장안과 무조건적으로 지급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고 서둘러 덧붙인다. 그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이 초기에는 낮은 액수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조건부 이전 제도들을 대체하지 않고 그런 제도들과 공존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_ 필리페 판 파이레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 p427 해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다른 책들처럼 파이레스 또한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를>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기본소득의 장점과 당위성에 대해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기본소득 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파이레스 또한 기본소득의 시행 대신 기존의 보장제도가 폐지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초기에는 부담이 많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제도와 병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는 결국 밑돌 빼서 윗돌 막기 식에 불과하지 않을까. 기본소득이 본격화할 시점에도 이들 제도가 병존할 수 있을까. 지속되지 못할 제도라면 포플리즘이란 비난을 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1988년 국민연금이 대통령선거와 연계되면서, ‘적게 내고 많이 가져가는‘ 구조로 설계되어 끊임없이 연금 고갈 문제로 시달리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기본소득으로 4대 보험이 철폐된다면 사회구조의 병폐는 없앨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소득이 가져올 다른 문제(취약계층의 희귀질병 환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 등) 가 있기에, 기본 소득이 실질적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희귀질병이 아니어도 아제는 국민 4명 중 1명이 걸린다는 암 치료비에서 공단 부담금을 모두 기본 소득에서 부담한다면, 병원갈 일 많은 노년에 노령연금도 건강보험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비용으로 살아가야한다면... 마치 기업연금의 DC(확정기여형) 도입으로 DB(확정급부형)이 사라져가면서 결과적으로 퇴직소득이 줄어든 결과의 재판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또한, 코로나 19라는 재난 상황에 전국민에게 1회 10만원 정도의 금액 지급에도 퍼주기 논란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1인 당 수 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조달할 것인지... 기본소득.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분명히 매력적으로 들리는 단어지만, 이의 실행을 말하기 전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PAY AS YOU GO.

어느 정도의 기본소득이 국민에게 지급되며, 이를 위해 얼마만큼의 금액이 필요하고, 이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할 것인지. 이에 대한 고민을 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2016년 스위스에서 부결된 기본소득 국민투표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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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3-05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부결됐지만 첫투표에서 의미있는 숫자의 찬성표를 받았다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장차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로봇시대 인간의 일>이라든지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복지국가가 내게 좋은19가지>등 그에 관한 긍정 메세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정보공개의 불평등이 개선될 것이라는게 제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생각해보고 논의는 해봐야할 주제라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3-05 23:23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시점에서 기본소득이 주는 메세지, 희망이 분명히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이러한 개념이나 사상이 현실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여러 제약들이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 또한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실행된다면, 기존의 연금제도와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을 합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자금과 영향력을 미치게 될 제도인만큼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또한, 재원 뿐 아니라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월급제 공산주의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해본다면, 기본소득은 아직 하나의 이론이지 현실로 나오기에는 이른 감이 있어 보입니다...
 
당신의 선택은? 글로벌 이슈 Taking Sides 시리즈 3
제임스 E. 하프 & 마크 오언 롬바디 엮음, 강미경 옮김 / 양철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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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선택은? - 글로벌 이슈 Taking Sides: Clashing Views On Global Issues>는 크게 인구, 자원과 환경, 세계의 힘과 움직임, 안보 등의 4개 대주제별로 약 20개의 이슈를 소주제로 관련정책에 대한 지식인들의 찬(贊), 반(反) 의견을 제시하는 책이다.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라면 책을 통해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알고 있는 주제라 한다면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진영의 논리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반면, 세분화된 이러한 주제들이 과연 별개의 문제로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갖게 된다. 코로나 COVID-19의 경우 직접적으로는 11번 소주제(세계적인 유행병 대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다른 주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만약, 코로나의 원인을 오염된 환경에서 찾는다면, 환경 위협, 지구온난화 문제, 물부족 위협, 자연재해 대처 능력과 연결될 수 있다. 또, 이를 미-중의 대립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차세대 초강대국으로의 중국 문제 등 안보 문제와 접점을 가질 것이다. 한편 코로나 진행 단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세계 도시화를 통한 인구밀집이 가져온 확산속도 또는 선진국 노령화로 인해 노인층에 대한 치료 거부도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출생률 감소에 의한 연금재정 고갈문제도 연결된다.

또한, 최근 아프리카 지역에서 보이는 코로나 19 확산의 원인을 가난에서 찾는다면 개발도상국의 인구 증가 정책, 마약 공급지로서 중앙아시아 문제, 인신매매 문제 등도 연결주제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거의 모든 문제들이 세계적인 문제 하나에 연관된다는 사실은 개별 주제에 대한 찬반보다 글로벌 이슈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좀 지난 책이라 현재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란의 핵위협 문제)도 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글로벌 이슈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읽을만한 책이라 여겨진다. 책에서 다루는 소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출산율 감소 문제
2. 개발도상국의 인구 증가 정책
3. 선진국의 노령화 추세
4. 세계의 도시화
5. 환경 위협의 진실
6. 석유에 의존하는 에너지원
7. 식량자급자족
8. 지구온난화 위협
9. 세계 물부족 위협
10 .마약전쟁
11. 세계적인 유행병 대처
12. 인신매매 근절대책
13. 세계화 문제
14. 세계 경제 위기 문제
15. 새로운 냉전기
16. 핵 위협
17. 종교 및 문화 극단주의
18. 핵 이란 문제
19. 차세대 초강대국으로의 중국
20. 자연재해 대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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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김영사 모던&클래식
존 스타인벡 지음, 안정효 옮김 / 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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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를 봐도 미친 듯 싶었다. 형성되어가는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안전과, 이익과, 미래를 위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닥치는 대로 싸웠다. 아메리카인은 땅이 소중한 줄을 알지 못해서, 그 땅을 마구 파헤치고, 약탈하고, 때로는 파괴하기까지 했다... 가족이 이루어지자 그 가족은 다른 모든 가족과 맞섰다. 마을이 이루어지자 그 마을은 다른 모든 마을과 맞섰다.... 불가피한 필요성에 따라 데려온 사람들은, 불안정하고 궁핍하지만 힘센 자들의 새로운 무리를 이루었고, 그들은 저항과 미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시 새로운 다른 사람들의 무리가 몰려온 다음에야 겨우 이웃이 되었다.(p88).. 그래도 한 세대나 두 세대, 그리고 아무리 오래 걸려도 세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인종 집단은 예외없이 그들의 복수성 複數性, pluribus을 상실하지 않은 채 한 덩어리 속으로 흡수되었다.(p89)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中


 존 스타인벡 (John Ernst Steinbeck, 1902 ~ 1968)은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America and Americans>에서 미국의 기원을 이주자와 이전 거주자들의 대립으로부터 찾는다.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 ~ 1506)년 산타마리아호(La Santa Maria와 3척의 배를 타고 중남미로 건너갔을 때부터,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flower)가 청교도 개척자들을 싣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갈 때부터 대립은 시작되었다. 


[사진] 메이플라워호(출처 : https://www.britannica.com/topic/Mayflower-ship)


 여러 가지 보편적인 특성이 많지만, 그것들은 상반되는 특성들 때문에 서로 상쇄한다. 아메리카인들은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숨을 쉬고 힘을 발휘하지만, 우리들이 스스로 엮어낸 신화에 대한 열정적인 믿음만큼 모순이 심한 측면은 또 없다.(p116)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中


 그렇지만, 미국은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집단과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하는 대신 새로운 이주자 또는 적에 대항하여 단결하는 방편을 택한다. 성조기(星條旗, Stars and Stripes)의 깃발 아래 현재의 모든 문제는 수면 아래로 끌어내려지고, 눈앞의 문제만이 중요한 사회가 된 것이다.


 아메리카인들이 한 민족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직면한, 가장 중대하다고까지는 못하더라도 아주 심각한 문제를, 내가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회피했거나, 적어도 뒤로 미루어왔다는 생각이 든다.(p265)... 인간은 독립적인 개성이 강하면서도 무리를 지어 다니며, 사람이 우글거리는 도시와 집단 주택의 소음과 불편 속으로 떼를 지어 다니며, 사람이 우글거리는 도시와 집단 주택의 소음과 불편 속으로 떼를 지어 몰려든다.(p267)... 우리는 홀로 있기가 두렵고, 같이 있기도 두렵다. 우리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뿌리가 깊고, 필연적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그 무엇 때문이다.(p268)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中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부유해진 미국이 과거로부터 쌓여온 모순을 해결하기는 더 어려웠다. 그리고, 스타인벡은 이러한 풍요로운 미국에서 오히려 미래없는 사회 모습을 발견했다. 풍요로움이 가져온 공허함. 이것이 스타인벡이 발견한 미국의 문제점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평범하고, 민주적이고, 대부분이 신교도이고, 물질주의적이고, 속되게 하나같이 잘 먹고 잘 살아가던 19세기에 돈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부유해지자, 우리들이 한때 거부하고 몰아냈던 화려함과, 치장과, 의식과, 멋진 명칭과, 풍채와, 예절에 대한 깊은 갈망이 머리를 들었으리라. 그런 갈망이 존재했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다.(p184)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中


 나는 국가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안락함과, 풍요와 안정을 열거했다. 거기에서 권태롭고 짜증스러운 냉소주의가 자라나며, 그런 냉소주의로 인해서 현존하는 세계와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한 반발이 무기력한 자기만족 속에 잠겨버린다.(p285)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中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에서 스타인벡은 대립과 갈등으로부터 시작한 사회가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계속 미루다가 20세기의 풍요로움 속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미국사회의 모습을 결코 밝게 보고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은 비극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지난 세기와 21세기 초반에 거친 세계패권국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다. 구대륙에서 꿈과 희망을 잃고 신세계로 떠난 이들이 이룬 것이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 아닌, 전쟁의 제국이었다는 사실은 인류 모두에게 아픔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의무도 없고, 충족시킬 목적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믿는다. 인류에게는 최초의 목적이 우호적이지 못했던 자연계에서 끊임없이 생존하려는 것이었다... 우리의 필요성은 충족시키기가 불가능할 만큼 컸다. 우리의 꿈은 너무나 터무니가 없어서, 그 실현성은 천국에서나 찾아야 했다.(p278)... 우리는 절대로 길을 잃지는 않았다. 과거의 길들이 끝났으며, 우리는 아직 미래로 향하는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p284)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中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을 통해 우리는 스타인벡의 뛰어난 통찰과 함께 그가 지적한 문제들이 지금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확일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좌절감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스타인벡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이 아무도 가지 않는 새로운 길을 찾는 시작점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리뷰의 마지막은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되, 청교도 이주로 시작된 미국에 맞게 해당 성경 구절로 끝내려 한다. 해당 구절들은 대립으로 시작한 기원과 신생국에서 세계 패권국으로까지의 성장, 그리고 물질문명의 종착점에서 미국 지성인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구절들이라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 : 51 ~ 53) 中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욥 8 : 7) 中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코헬 1: 2 ~ 4)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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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20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교도 정신으로 시작한 나라
가 새로운 시기에 접어 들어서는
기득권 탐욕의 나라로 시대적
전환을 맞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3-20 09:0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이제는 탐욕의 제국이 되버린 미국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박해받거나 본국에서 밀려난 이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세운 나라이기에 태생적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기억의 장소 4 - 프랑스들 2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90
피에르 노라 외 지음, 김인중.유희수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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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우파 개념의 역할을 평가하는 기준은 더 이상 그 유인 능력이나 배치 능력이 아니다. 그 개념은 이제 대립요소들로 구성된 한 우주를 표상해야 할 새로운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립요소들이 과거보다 덜 격렬하게 표현된다고 해서 그 대립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p111)... 이들의 대립관계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좌파와 우파가 중간지점에서 서로 화해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회의 대립관계를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으로 형상화하게 될 것이다.(p112) - 우파와 좌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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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제2판 34곳 삭제판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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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묻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와 국가와 가부장제의 강제성을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구조의 실천과 유지에 가담한 이들의 강제성도 함께 추궁되어야 한다.(p26)... 하지만 위안부들의 불행을 만든 주체가 일본군뿐 아니라 그녀들을 보낸 사람이나 학대한 사림들이기도 한 이상, 그런 그들의 죄나 범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p27)...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p33)...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식민지화와 식민지로 이식된 공창 제도가 있었고, 중간매개자들은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존재였다.(p34)

「제국의 위안부」에서 저자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제국주의 문제만이 아닌 가부장제와 경제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전체를 바라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위안부 사건을 ‘국가에 의한 폭력‘ 아닌 새로운 틀 - 가부장제, 가난 - 로 바라봤다는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게 힘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분명 피해자였지만, 그러면서도 ‘일본 제국‘안에서 ‘두 번째 일본인‘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식민지인의 모순이었다.(p90)

전쟁터에서 강간의 대상이 된 ‘적의 여자‘와 위안부는 군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가족과 떨어져 전방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부인‘처럼 신체적•정신적으로 위무하고 사기를 북돋는 역할, 그것이 위안부의 원래 역할이었다.(p57)

저자는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조선의 위안부는 제국의 2등 민족으로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의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의 모습은 실제가 아니며, 위안부들과 일본군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좋았음을 일본군 생존자의 말을 통해 뒷받침한다.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p51)

눈앞에 주어진 ‘거짓 애국‘과 ‘위안‘에 몰두하는 것은 그녀들에겐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본군과의 연애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그런 딜레마를 안을 것을 포기한 이들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p62)

저자는 ‘무자비한 일본군‘의 모습은 왜곡되었으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오히려 이들을 일본인에게 팔아 넘긴 ‘조선인‘과 ‘식민 조선 사회‘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책임을 줄이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가.
책 전반부에 미담(?)으로 가득한 일본군과 위안부 이야기는 둘째로 하더라도, 저자는 위안부 문제에서 남성(가부장제) 책임을 지적하면서도 거의 일본군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피해자 이야기는 이미 정형화되었다고 판단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해자 입장만 강조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가부장제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기에 저자의 주장을 명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

˝면장을 맡게 된 게 불운˝이라기보다는 한국이 병합된 것이 불운이었다. 20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면장‘이건 ‘읍장‘이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국가정책에 대한 ‘협력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p41)

위안부 강제 동원과 관련하여 국가에 의한 강압이 있었다는 저자의 말은 위안부 문제에 있어 부동의 ‘제1원인‘이 일제에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일제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에 대해 다른 원인을 들고 나오는 태도는 세대, 젠더 이슈로 본질을 가리려는 현대 정치권과 언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사 문제는 사건의 당사자들이 살아있는 오늘날의 문제이며,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신중하지 못했다 여겨진다. 피해자들이 한 목소리로 당대의 사건을 증언하는데, 객관적이고 과학적, 실증적 접근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공감하기 어렵다.

‘모든 백조가 하얗다‘는 명제를 깨뜨리는 것은 한 마리의 검은 백조면 충분하다. 여기에 대부분의 백조가 하얗기 때문에 위의 명제가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은 과 같은 ‘일제의 책임 물타기‘는 논리적이지 않다.

또한, 저자의 말처럼 ‘자발적인 위안부‘가 평균적인 모습이라면,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은 ‘대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에도 맞지 않는다. ‘자발적인 집단‘과 ‘피해자 집단‘의 기대수명이 다를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났을 때 생존자가 발생할 확률은 거의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위안부 생존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소수라는 반증이 아닐까. 소수의 피해자 집단에서 주로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이 나온다는 측면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과학적이지 않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제국의 위안부」는 저자의 doxa가 강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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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5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5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9-09-22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아줌마 최근에 보니 이영훈 옹호하는 글 쓰고, 정규재 TV에도 나오며, 수많은 수꼴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전 이 인간이 이영훈이나 류석춘보다 더 악질적이라 봅니다. 딱 이렇게 비유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성을 이용하여 중립인 척 하면서, 대뇌는 엄청나게 우측으로 가 있는 철면피. 과도한 민족주의는 당연히 잘못됏지만, 박유하는 탈역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정체를 모르는 자칭 진보주의자들 은근 많네요.ㅠㅡㅠ

겨울호랑이 2019-09-22 20:49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사실 뉴라이트 식민사관을 가진 이들이 이영훈 교수뿐이겠습니까.. 연세대 류석춘 교수 역시 며칠전 망언을 한 것을 보면 이 시대의 지식인 모두가 양심을 갖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