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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뭐든 계속해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때맞춰 공교롭게도 만주군관학교에서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험에 응시하게 됐고, 예상대로 합격하여 1940년, 입교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p23)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中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며칠전 타계한 고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이다.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한 책 안에서 자신은 당시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군관학교 졸업 후, 자므스 부대와 간도특설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간도특설부대는 1944년 늦가을에 열하성의 승덕에 집결한 다음, 만리장성을 넘어 기동지구에 주둔하여 사방을 포위한 팔로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내가 간도특설대에 부임할 무렵, 간도지역은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이곳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 특히 김일성은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가 소련군에 입대한 후였다. 따라서 내가 간도특설부대에서 근무할 무렵 우리의 토벌대상은 모택동의 팔로군이었다.(p25)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中

  
 책에서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 대부분을 한국전쟁에 할애한다. 자신의 가장 빛나던 시기에 초점이 맞춰진 이 책에서 해방까지의 시기는 약 30페이지 정도다. 만주군인, 간도특설대로 활동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이 배우기를 좋아해 주위의 권유로 때맞춰 만주군장교가 되었을 뿐이며, 간도특설대 근무 시에도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과 교전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엔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 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 <친일인명사전> 中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권유로 인해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사실과 독립군과의 교전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의 행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교편 대신 선택한 길에 설 경우, 독립군과의 전투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행적이 아닐까. 또한, 독립군과의 직접 교전이 없었다고해도, 해방 이후 1948년 정보국 국장 중위에서 1950년 사단장에 이르는 초고속 승진은 간도특설대 당시의 풍부한 전투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주군 지원과 당시 경험으로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의 원인과 결과라는 점에서 친일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다.

사실, 그의 회고록을 읽다보면 그의 친일은 행동 뿐 아니라 생각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행동이 생각의 결과임을 고려해본다면 당연하겠지만. 회고록 여러 곳에서 남겨진 그의 언행은 그 무엇보다 친일행적의 생생한 증거임을 확인하게 된다. 백선엽. 그에게 조국은 어디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남산의 박문사 자리에 기존 사찰 시설을 활용하여 한 동안 정보교육을 실시했다. 박문사(博文社)란 일제 강점기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신라호텔 면세품 상가 자리에 세운 일본 사찰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당한 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인이 만든 절터에 중요한 군사기관을 세우는 것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p52)<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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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7-14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어찌 매번 시의적절한 리뷰를 올리실 수 있으세요?ㅎㅎ

겨울호랑이 2020-07-14 14:06   좋아요 1 | URL
^^:) 제가 시류에 편승한 독서를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보 2020-07-14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문(博文) 한자 옆에 히로부미라고 기입해 놓으면 이해가 될 수 있겠네요. 인간은 누구나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을 해석하는 법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4 21:20   좋아요 0 | URL
우보님 말씀을 듣고보니 그렇게 수정하는 것이 더 좋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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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가 김 알렉산드리아의 삶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운동으로 극우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로쟈 룩셈부르크를 연상시킨다. 이 책은 우리에게 잊혀진 조선의 로쟈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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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파에디아 - 키루스의 교육
크세노폰 지음, 이은종 옮김 / 주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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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  Vetus Testamentum 舊約聖書> <에즈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키루스 임금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가 자기 신전에 두었던 주님의 집 기물들을 꺼내 오게 하였다.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재무상 미트르닷을 시켜 그것들을 꺼내 오게 한 다음, 낱낱이 세어 유다 제후 세스바차르에게 넘겨주었다. 세스바차르는 유배자들을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오면서 이 기물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 <에스라기> 제1장 中


 키루스 대제. <키로파에디아 Cyropaedia: The Education of Cyrus>는 바빌로니아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안샨의 위대한 왕이며 테이스페스의 증손자, 키루스의 손자, 캄비세스의 아들 키루스로 자신을 소개한 키루스 2세 또는 키루스 대제(Cyrus II of Persia, ? ~ BC 530)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으로 그리스인 크세노폰(Xenophon, BC 431 ~ BC 354)에 의해 쓰여졌다.


 키루스는 이들 나라를 지배했다. 그들은 키루스와 다른 언어를 쓰고 나라도 서로 달랐지만, 키루스는 두려움을 심어 주어 광활한 지역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공포로 굴복시켰으며, 아무도 그에게 대적하려고 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를 기쁘게 하려는 욕망을 생생하게 불러일으켜 언제나 그가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있었다. 그가 복속시킨 부족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여행을 시작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돌아보기란 어려웠다.(p39) <키로파에디아> 中


 야만족들은 그들의 노래와 이야기 속에서 키루스가 가장 잘 생겼고, 가장 관대했으며, 배우려는 의지가 가장 높았고, 가장 야심찼으며, 칭송을 받기 위해 모든 노고를 견디고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은 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적, 정신적 자질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페르시아 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페르시아 법의 특징은 공공의 복리를 중시하는 데에 있다.... 페르시아 법은 부적절하거나 부도덕한 그 어떤 것을 처음부터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인다.(p41) <키로파에디아> 中


 <키로파에디아>는 키루스가 이룬 위대한 업적과 함께 그를 만든 페르시아의 교육에 주목한다. 공공의 복리를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강한 신체와 온전한 정신을 갖추기를 지향하는 페르시아의 교육 속에서 우리는 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절제를 강조한 스파르타 교육의 결합을 발견한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교육은 광대한 제국을 뒷받침할 관료제 - 제국의 하부구조 - 를 만들어냈고, 여기에 키루스라는 인물의 등장을 통해 페르시아는 주위를 평정할 수 있었다. <키로파에디아>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처럼 키루스가 이룬 업적과 페르시아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제2차 페르시아 전쟁(BC 480 ~ BC 479)까지 겪은 아테네인 크세노폰이 과거 적국이었던 페르시아의 황금시대를 굳이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공화정이 다른 형태의 정부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자주 전복되는지를 보았다. 군주정이나 과두정이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자주 무너지는지도 보았다.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개인이 순식간에 몰락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그 권력을 유지하면 우리는 그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똑똑하거나 운이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p37) <키로파에디아> 中


 <헬레니카 Hellenika>를 통해 펠레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의 참상을 서술한 크세노폰은 아테네(Athenai)의 패배와 30인 참주정(Thirty Tyrants)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이상적인 정체에 대한 고민을 크세노폰에게 던져주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정체(政體)에 대한 고민은 크세노폰의 과제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또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7)은 <국가 Politeia>를 통해 이상적인 정체의 모습을 스파르타(Sparte)에서 찾았다면, 크세노폰은 어디에서 찾았을까. 아쉽게도 <키로파에디아> 내에서는 이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키로파에디아>는 그 과정인 전제정(專制政)에 대한 결론이 담겨 있다. 거대 제국의 가장 빛나는 치세가 끝나갈 때 제국은 어떻게 붕괴되기 시작하였는가. 


 키루스의 제국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왕국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화려했다. 제국 그 자체가 곧 증거였다. 제국은 그 경계가 동쪽으로 인도양까지 닿았고, 북쪽으로 흑해, 서쪽으로 키프로스와 이집트, 남쪽으로 에티오피아까지 닿았다. 그렇게 광활한 영토를 하고 있었지만, 제국은 오직 키루스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통치되었다. 그는 백성을 존중하고 그들을 마치 자식처럼 아꼈다. 그리고 백성은 키루스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 그러나 키루스가 죽고 나자 그의 아들들은 곧바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했고, 도시와 나라들은 반역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했다.(p438) <키로파에디아> 中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의 영광 안에서 제국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 모순이 전제정에서 기원함을 <키로파에디아>에서 밝힌다. 동시에,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 일어나는 비극은 전제정이 이상적인 정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에, 크세노폰은 <키로파에디아>에서 과감하게 페르시아를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제정에 대한 비판이 이상 정체에 대한 해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기에, 이에 대한 답은 다른 크세노폰의 저작 속에서 찾아보는 것으로 미루며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나는 내가 이전에 세운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페르시아와 그 속국은 신들을 공경하지 않고, 친척에게 공손하지 않으며, 백성을 부당하게 대하며, 예전에 비해 전쟁에서 용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p443) <키로파에디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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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 일기
뱅자맹 라콩브 지음, 이나무 옮김 / 이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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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5월 17일. 베르사유. 내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단 한 사람이 바로 내가 어제 공식적으로 결혼한 남자라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이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가.  나는 폐하께서  왕자보다 내게 더 관심을  보이신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부님도 어머니도 나를이런 상황에 대비하도록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은 내가 남편과 친밀한  시간을  보낼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내가 조금 더  대범해지고,  내가 먼저 남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에는 오스트리아 황녀로 낯선 프랑스 땅으로 시집 온 이국의 공주의 시선이 잘 담겨있다. 개인의 감정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한 정략 결혼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에게 관심없는 남편과 그럼에도 왕비로서의 의무 사이에 많이 힘들어한다.

1775년 6월 25일, 베르사유. 무엇보다도  루이와  프랑스에 후계자를 안겨주어야만 나의 지위가 확고해진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은 계속해서 침실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그이가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해주기를 절망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부담을 안겨주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다정하고 매력적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니 심리적인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결혼 후 15년이 지나서야 겨우 의무감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는 그녀의 고백에서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그녀를 ‘로코코의 여왕‘이라 칭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수식어가 무색해짐을 느낀다.

1785년 6월 25일, 베르사유.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셨을까! 왕비의 임무를 완수한 이래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친구들과 함께 트리아농에  내 거처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배치되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 되었다... 심지어 거기에 너무도 매력적인 작은 마을도 만들었다. 농부 부부도 고용해서 염소와 양, 수탉과 암닭,  멋진 암소 등 진짜 농장에서 볼 수 있는 가축도 모두 기르게 했다!! 이런 전원의 삶이, 짐승 소리와  꽃피는 자연이  나를 감동하게 한다. 궁정의 예법이나 위선 따위와 멀리 떨어진 이곳의 삶은 무척 평화롭다.

일기에 담긴 마리 앙투아네트의 글에는 많은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일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그러나 사실이 아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를 말한 세상 물정 모르는 왕비의 모습 대신 남편을 사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국가를 걱정한 혁명기를 살다간 왕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789년 6월 7일, 베르사유. 루이와 나는  날이 갈수록  힘드는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하기만 정치상황이 쉴새 없이 나빠지고 있으니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왕에게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왕비인 나의 지지가  필요하다. 전국에 기근이 창궐하고, 삼부회 의원들의 영향을 받은 백성은 점점 더 과격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장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이 위태로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 남편은 프랑스의 국왕이고, 그것은 신의 의지다.  그의 백성 중  누구도 왕을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루이 15세의 정부 뒤바리 부인에 대한 부정적 묘사 속에 드러난 베르사유 궁정사회의 느슨한 분위기, 반면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급박함 속에 서 드러나는 지배층 인식의 한계 또한 느낄 수 있다. 개인과 공인으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짧은 일기를 통해 그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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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7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03-17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호님의 글을 보니...

읽다만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겨울호랑이 2020-03-18 08: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츠바이크의 치우치지 않은 판단과 통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퀴리 & 마이트너 : 마녀들의 연금술 이야기 지식인마을 29
박민아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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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와 리제 마이트너의 연구는 20세기 원자핵물리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여성이었기에 그 연구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기는 하지만, 여성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들의 과학적 업적은 과학사의 중요한 자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마리 퀴리의 방사는 연구는 ‘방사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폴로늄과 라듐 원소를 찾아내기 위해 채택했던 화학적 분석 방법과 물리적 분석 방법의 결합은 이후 방사화학의 표준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p114)

마이트너의 연구는 퀴리가 시작하고 촉진시킨 연구 위에서 시작되었다. 마이트너와 한의 프로트악티늄 발견은 퀴리의 새로운 원소 발견을 모델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분열 과정에서 손실되는 아주 작은 양의 질량으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식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마이트너는 핵 시대의 서장을 열였다. 요컨대 퀴리와 마이트너는 그들의 연구를 통해 원자핵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연금술의 세계에 속해 있던 것을 합리적인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과학자들이었다.(p115)

<퀴리 & 마이트너 : 마녀들의 연금술 이야기>는 책 표지처럼 20세기 초 열악한 여성의 지위에서 피어난 꽃처럼 세계과학사에 업적을 남긴 두 과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결합을 통해 방사선 연구에 발자취를 남긴 마리 퀴리와 핵 분열 연구의 선구자가 된 마이트너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는 점은 다른 지식인 마을의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녀‘에 대함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자는 ‘퀴리 부인‘ 위인 전기에서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피에르 퀴리 사후 라주뱅 스캔들을 통해 마리 퀴리가 부당하게 마녀 사냥을 당했음을 지적한다.

랑주뱅 스캔들에서 주목할 점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사건이 우파 언론에 의해 사회/정치적으로 확대 해석되는 방식이다. 우파 언론들은 여성, 외국인이라는 마리 퀴리의 정체성을 교묘하게 엮어 국수주의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했다. 마리 퀴리의 불륜을 도덕적으로 지탄하는 표면적인 논조 아래에는 타자를 설정하여 그에 대비되는 ‘우리‘의 결속을 강화하고 ‘우리 것‘의 가치를 높이려는 배타적인 국수주의적 의도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p143)

책의 제목 <퀴리 & 마이트너 : 마녀들의 연금술 이야기>가 말해주듯 이 책은 단순히 여성과학자의 업적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주된 독자층이 청소년 층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진정한 의도는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다음 세대의 변화 촉구가 아닐까. 이런 면에서 이 책은 과학사라는 역사가 현대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입문서적이라 여겨진다.

여성 과학자들에게 과학자라는 점보다 여성이라는 점이 부각되면 그것이 여성 과학자들의 사고와 행동의 범위를 제한할 수도 있고, 여성 과학자 본인이 여성이라는 틀 속에서 스스로를 검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p155)...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보는 사회적 시각의 변화라 할 수 있고 이는 다양성의 존중과 일맥사옹한다고 할 수 있다.(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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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1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1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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