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국과 승상은 원래 진나라와 전한시대 재상의 벼슬로, 후한 조정은 통치상의 이유로 한 명만 임명되는 상국과 승상직을 폐지하고 3명의 재상, 즉 삼공(태위·사도·사공)을 두어 서로 견제하게 해 재상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재상이 한 명일 때보다 세 명일 때 권력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동탁은 스스로 상국이 되었고, 이로써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아마 동탁은 전혀 깨닫지 못했겠지만, 그의 이 행위로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관찰되는 ‘찬탈’의 조건 하나가 마련되었다. 이후 숱하게 벌어지는 찬탈의 과정에서, 신하된 자의 상국 또는 승상 취임은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 거치는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단계로 자리매김한다.

동탁은 그 외에도 주비周毖와 오경伍瓊, 정태鄭泰, 하옹何?, 순상荀爽, 진기陳紀, 한융韓融 등 조야의 명망 있는 인물을 대거 발탁했다. 그러면서 직속 부하나 총애하는 무장들의 벼슬을 중랑장과 교위校尉에 묶어두는 지혜도 발휘했다. 이렇듯 집권 직후 동탁이 보인 행보는 적어도 외형상 공평무사한 것이었다.

『삼국지/제하후조전』에는 하후돈과 하후연夏侯淵, 조홍曹洪, 조인曹仁, 조휴曹休, 조진曹眞, 하후상夏侯尙 등이 함께 실려 있다. 조홍과 조인, 조휴는 조조와 같은 항렬의 동생들로, 이들은 나중에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면서 황실 일족이 된다. 즉 이 ‘특별한 조씨’들과 하후씨가 함께 실린 것은 후자도 황실 일족 혹은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을 암시한다. 즉 조씨와 하후씨는 사실상 동족으로 볼 수 있다.

후한시대에는 출세를 하려면 평판이 좋아야 했다. 특히 관리가 되려면 남들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 이를 ‘타천他薦’이라고 한다. 후한에는 ‘향거리선’이라는 관리 등용 제도가 있었다. 군국의 태수와 상은 인구 20만 명당 1명을 ‘효렴’으로 조정에 추천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면 조정의 사도와 상서가 이들을 시험한 후 관직을 주었다. 그 외에 ‘관리 아버지’를 둔 덕으로 벼슬을 얻는 ‘임자제任子制’와, 부서의 장이 추천해 사실상 사후에 중앙정부로부터 임명받는 ‘벽소제?召制’가 있었지만, 주된 출세 코스는 효렴으로 추천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효렴으로 추천을 받으려면 지방(고향)에서 평판이 좋아야 했다. 그리고 이 평판이란 ‘효렴’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듯이 주로 효심이나 덕망에 관한 것이었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견을 행파로장군行破虜將軍 예주자사로 추천했다. 하지만 말이 표를 올려 추천한 것이지, 사실상 원술이 손견을 파로장군과 예주자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대신 원술은 남양군을 넘겨받았다. 관직과 땅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거래는 서로에게 이익이었다. 막장은 동탁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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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송충기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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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자연과학이나 자연과학과 철학적으로 논쟁을 펼쳤던 저자들은 반동이라는 이 개념을 점점 더 빈번하게 사용했는데, 이런 현상은 뉴턴 Newton 제3법칙이 공표되고 나서 이 법칙이 공개적으로 정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모든 작용에는 항상 그것에 맞서서 작용하는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있다. 또는 두 물체의 서로에 대한 상호작용은 항상 크기가 같으면서 반대 방향을 향한다. 이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계몽주의 시대 뉴턴 수용의 중요한 동반 현상으로서, 이 자연 과학 기본 개념들은 재해석되어 생물학, 인류학, 정치학 등의 영역으로 전이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17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22번째 주제는 반동 - 복고(Reaktion, Restauration)다. 개념어의 역사 속에서 '반동 - 복고'의 개념은 처음에는 물리적 힘에 대응하는 대칭 개념으로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9)이라는 역사적 분기점을 통해 의미 전환이 일어난다. 작용에 수반하는 동반 작용이 아닌, 처음의 물리적 작용 - 혁명 - 을 부정하고, 원상태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으로 변이되는 움직임 - 반反혁명 - 을 확인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작용-반작용'이라는 개념쌍을 분리시켰다. 언어적 차원에서 '작용Aktion'의 자리에 '혁명'이 등장하면서, 이제 이 단어는 자체적인 활력을 갖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반작용 개념의 정치화를 위한 전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반작용 개념이 작용 개념과 언어적으로 단절되면서 자연과학적 은유와도 결별하게 되고, 이제부터는 실제적으면서 역사적/정치적인 기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18


 그것은 단순한 의미 변화가 아니었다. '작용 - 반작용'의 관계에서 반작용은 작용에 대한 긍정과 이에 수반하는 부수작용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 혁명 이후 변화된 '혁명 - 반혁명'은 혁명에 대한 부정과 쇄신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작용 - 반작용'이 정적인 상태에서 일어난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한 움직임인 반면,  '혁명 - 반혁명'이 인위적인 과거로의 퇴행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간적 방향성을 갖는다.


 복고가 단지 반동으로 축소된 것과 그래서 역사철학적 측면이 현격하게 변화된 것은 복고가 자신에게 요구된 정당성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복고 이데올로거들은 법질서와 법적 연속성이라는 이념에 의존했으며, 그런 만큼 그들은 혁명을 자의적 권력 탈취와 권력 행사, 즉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실재 상황들은 복고로 하여금 옛 상황의 복구를 위해 폭력 동원을 강요했으며, 그런 만큼 복고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슬로건들을 어겼고, 이미 기존의 법규들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40


 19세기 '혁명'이 자유주의 운동의 형태로 표현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반혁명'은 구체제 기득권의 체제 유지의 움직임으로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갈등과 대립은 '빈곤'과 '계급'문제의 해결이 아닌 '독일 제국의 성립'으로 마무리된다. 중앙집권적인 독일제국의 성립은 반혁명 세력이 주도라는 점에서 복고 세력의 승리였고 다른 한편으로, 독일 제국 아래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많은 주장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제국 내에서 수많은 목소리를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정치적인 노력은 성과를 거두게 되고, 독일 제국이    민족주의국가로 자리잡아 나가면서 '반동 - 복고'의 움직임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반동적 진행이 썼던 가면을 벗기는 것은 궁극적으로 빈곤 문제와 계급투쟁에서 시민계급의 입장을 그 중요한 실마리로 삼아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우선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최초의 몇몇 이데올로기 대변자들이 가졌던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하는 원칙이 반동 개념에 대한 앞에서 언급했던 무관심을 변화시키도록 영향을 미쳤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68

 우리는 '반동 - 복고'의 단어가 사용되어온 역사 안에서 자연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이 사회과학에서 차용되면서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물다양성을 설명하는 단어인 '진화(進化)'가 사회과학에서는 '우생학(優生學)'으로 변질되었듯이, 물리적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가 기득권들이 자신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해 온 역사가 바로 '반동- 복고'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자신들 스스로 싸움에 뛰어들 필요도 없이 승리했기에 패배한 것이다. 국내의 반혁명은 국가적 사건에서 오는 압력이 아니라, 유럽적 사건들의 압력에 의해 제압당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반동의 쇠퇴를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 즉 유럽적 연관성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94


 반혁명세력이 이제 막 기대치 않았던 자신들의 성과에 따라 자유주의의 투쟁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들 반혁명세력에 의한 자유주의적 목표의 실현은, 반혁명세력으로 하여금 위상 강화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95

귀족정이나 과두정 같은 고전적 정치 전통을 갖는 개념들도 아직은 이 시기에 ‘반동‘ 대신 사용되었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는데, 즉 반동 개념이나 근대적 정치 용어의 최종적 관철은 고전 정치학 용어들의 폐기나 재해석으로부터 연유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반동 개념에 대한 초기의 소극적 태도 또한 복수의 개념들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반영한다. - P37

반동의 사회사적 골격 Physiognomie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분제적 세력들의 공조와 협력이 군주제의 조력을 받아서야 비로소 발현되게 된다는 것이었다. 군주제의 위력은 여전히 국가기구(군, 관료제)에 대한 직접적 컨트롤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 P75

반동 개념과 반동에 대한 비난 간의 경제적 고려를 두고 맺어진 이 연계는 그 자체로서 혁명기의 정치적 실망 이후 시민계층의 주된 이해관계가 이동한 것의 표지이다. ‘반동‘에 대한 모욕적 언어 용법은 이 경우에는 새로운 정치적 행동에 대한 촉구라기보다는 언어적/정치적 회고담 Reminiszenzdlek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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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2-27 0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념사 사전이 22권까지 나왔군요! 저는 11권까지 나왔을 때 7권만을 소장하고 있는데...
워낙 유명한 저작이다보니, 계속 출간되는 거 같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22-12-27 11:17   좋아요 1 | URL
^^:) 네 이번에 5차분 5권이 추가로 번역되었습니다. 처음 출간때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 품절/절판된 책도 제법 되지만, 그래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어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말라카는 일본의 류큐(Ryukyu)와 무역 교류가 있었다.
이 관계는 장기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활, 후추, 안장, 그리고 소금 등을 거래하였다.

정향은 몰루카(Moluccas)*에서 나왔다. 커피, 육두구(nutmeg), 그리고 백단(sandalwood)은 각각 보르네오, 반다, 그리고 티모르에서 생산되었다.

이슬람 무역상인들에 대한 이들 상품의 공급은 실제로 유럽인들, 특히 포르투갈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향신료 무역은 포르투갈이 필사적으로 마카오를 차지하려고 했던 첫 번째 이유다. 기독교 복음 전파는 부차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그 당시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좋게 하고,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하였다.

고아* 무역상들은 1월에 말라카에 도착해서 4월에 돌아갔다. 그들은 고아와 말라카의 양쪽 항구 사이를 40일간에 걸쳐 항해하였다. 그들이 말라카에서 구입한 상품은 주로 구리, 단검, 금으로 코팅된 장식함, 금으로 된 동전, 사향, 비단과 칼 등이었다. 그들은 또한 알후추와 정향(cloves) 등도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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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2-27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래요.

겨울호랑이 2022-12-27 11:18   좋아요 0 | URL
<말라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동남아시아 역사의 일부를 알려주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양과 깊이가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초원님께서도 행복한 연말 되세요! ^^:)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송충기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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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Wirtschaft'와 '살림살이 Okonomie'라는 이 한 쌍의 개념은 한 학문의 모든 핵심을 포괄하고 근대 세계의 모든 것을 관통해온 핵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p12)... 그리스어 오이코스 oikos[집]라는 단어에서 발전된 살림학 Okonomik이라는 용어는 18세기 전까지는 다름아닌 '총체적 가정 ganzes Haus'에 대한 가르침이었다(p13)... 고대에 '오이코스'와 '오이코노미아 oikonomia'라는 용어는 각각 가정 家庭과 그것을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관계 속에서 관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에는 '살림살이'와 오늘날 '경제'라고 부를 만한 것의 용어가 역사적으로 더욱 더 벌어졌다(p14)... 18세기와 19세기를 지나면서 이 양쪽의 용어가 근대적 의미에서 경제 영역을 뜻하는 하나의 포괄적인 개념으로 통합되어, 경제 영역이 이제 생산과 교환의 영역을 포괄하고 서로를 연관시켰다. 바로 이 지점이 이 개념사가 특별한 문제의식과 특별한 인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15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21번째 주제는 경제(Wirtschaft)다. 본문에서 우리는 가정 경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경제'라는 단어가 가정을 넘어서 사회질서를 설명하기 위한 의미의 확장이라는 근대 이전의 단계와 근대 이후 변화된 개념어의 내용을 확인한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근대라는 변곡점 전후의 '제가 - 치국(齊家 治國)'의 관계 설정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은 당대 농부의 상황을 주로 다루었다. 이 서사시의 핵심은 농부의 일과를 묘사함으로써 '오이코스' 소유자에게 농사일과 사회적 태도에 구체적인 조언을 제시하는 것이다. 유럽적 전통 내에서 보자면 이것은 '가장귀감서 家長龜鑑書'의 원형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26


 '경제'라는 단어가 집과 '살림살이'라는 용어와 확고한 연관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당시 '가장귀감서 Hausvaterliteratur'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가정은 숭고한 존재로서 필요하다는 점이 이 장르의 원칙으로 관철되었는데, 말하자면 가정은 공간적이고 물질적인 통일체이자 동시에 인간의 연합체로서 그에 부과된 실제적인 활동 영역을 지닌 포괄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90


 근대 이전의 '경제'는 '가장귀감서'의 내용을 근간으로 한다. 농작물 재배와 농장 경영이라는 농업 활동과 이를 위한 가정의 질서 등을 규정한 <가장귀감서>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와 함께 노동집약적인 농업의 특성상 안정적인 사회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가부장적인 계급질서가 긍정되고 있음을 플라톤(Platon, BCE 428 ~ 348)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 ~ 322)의 저술안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는 중세에 이르러서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지지만, 중세에 싹튼 변화 - 상업혁명 - 은 근대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플라톤은 '돈벌이'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자 했는데,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윤리학>을 저술했다. 시민을 가능한 한 '행복하고', 서로를 '친밀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다. 경제적 이해의 당사자들을 무턱대고 억압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법적인 대립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는 플라톤의 목적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재산에 대한 근심'이 윤리적 가치 기준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평가는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돈벌이'와 '오이코노미아'를 등한시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35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살림학을 정치학에 종속시킨 것은 그가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 때문이다. 플라톤과 달리 그는 이 두 가지 '공동체' 형태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정치학과 살림학을 체계적으로 차별화했던 근거도 바로 거기에서 찾았다(p36)... '오이코노미아'에 속하는 것으로 그는 오로지 자연에 합당한 벌이를 들었는데, 거기에는 수렵말고도 무엇보다도 농업이 속하며, 또한 필요한 물품에 한해 물물을 교환하는 것도 그에 속한다. 그런데 물물교환에서 화폐 사용의 필요성이 나왔고, 결국 '상업적인 것'이 발전하고 말았다. 이것은 돈벌이 Chrematisik에 속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37


 중세에 예고된 근대의 변화. 고대 그리스에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교환은 인정되었지만, 화폐와 화폐로부터 얻어지는 이자 등은 부덕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반해, 중세로 넘어오면서 상인계층의 성장으로 교환 가치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자가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닌 '타인 소비를 위한 생산', '교환을 위한 생산'이 대규모로 일어나면서, 경제 활동의 정의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이 변화는 '중세 - 가정'과 '근대 - 국가' 사이에 큰 틈을 만든다.                                                                                                                                                     

 (중세에서) 모든 논의의 기저에는 교환과 분업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는 긍정적인 판단이 깔려 있다. 곧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가족공동체만으로는 이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시민 집단 multitudo civilis'을 필요로 한다(p81)... 당국에서는 빈민 구제를 제한하고 걸식에 엄하게 대응함으로써, 노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노동 의무를 부과하고자 했다. '노동'과 '빈곤'이 서로를 규정했던 과거 고대, 기독교, 중세의 견해와는 분명히 대조적으로, 이 두 개념은 이제 하나의 대립물로 나란히 하게 되었다. 곧 일하는 사람은 가난할 필요가 없으며, 가난한 사람은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84


 중세까지 '경제'라는 단어가 '가정질서'를 근간으로 한다면, 근대화(Modernization)는 이 단어의 의미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전과는 다른 가치관의 극적인 전회(轉回)는 사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며, 사회의 미덕(美德)이 절대가치가 아님도 함께 보여준다. 특히, 독일과 같이 다소 늦은 시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난 국가에서는 이전에 설명될 필요가 없는 경제발전의 명분도 함께 설명해야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경제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도입되는 등의 변화가 생겨난다.


 (18세기 이후) 가족생활과 살림이, 다른 한편에서는 생산과 생업이 서로 점차 분리된 길을 걷게 되면서, 사회적 단위로서 가정의 쇠퇴는 결국 용어와 장르까지도 분열시켰다. 곧 가장귀감서는 가사 안내서나 가족 기도서로 전화되었다. 그렇지만 '살림살이'와 '경제'라는 한 쌍의 개념이 생업의 세계로 들어왔고, 거기에서 실제와 이론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다시 새로운 개념으로 이어졌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104


 세이 Say가 세운 19세기 교과서적 전통에 따르면, '정치적 살림살이'는 생산 요소로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을 한꺼번에 고려하는 생산 법칙으로 시작되곤 하는데, 이로써 근대 경제적인 기제의 형성에서 생산의 결정적인 위치가 확립되고 그에 따라 보편적인 경제 개념도 정립되었다. 마찬가지로 생산이 단초가 됨으로써 근대 경제에 대한 생각에서 아주 독특하고 보편적인 개념, 곧 확대와 성장의 관념이 형성되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134


  1990년대 씌여진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서는 '경제'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최소비용 이윤극대화'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러한 개념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경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경제학적 분석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물과 투자율에 집중되었고, '경제적 성장'이나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에서, 살림살이 기제가 시간대를 걸쳐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일상적 언어와 결합된 이론과 개념을 찾았다. 경제 이론에서 경제 성장에 대한 생각이 지배적임을 잘 말해주는 단어가 바로 경기 변동이 움직이는 영역인 성장 궤적 Wachstumspfad이다... 실제로 성장의 관념은 생산과 보편적 성장가능성에 근거한 근대적인 경제 개념의 요체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1 : 경제>, P163 



초기 그리스 시문 詩文에서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오이코스‘를 잘 꾸려나가는지에 대한 서술이다. "오디세우스가 가계와 농장을 경영하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치밀하고 탁월하게 묘사된 이상형으로서, 호메로스의 시가 詩歌는 이것을 가능한 모범으로 삼아 고대의 사회적 관념을 제시했다." 그리스 초기의 귀족사회에서 오이코스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통합체였다. 그렇지만 호메로스 저작에서 오이코스는 사회적 통합체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더 자세히 말하자면, 생산과 소비를 위한 통합체 이기도 하다. - P25

근대에도 보편적인 경제생활, 특히 물질생활의 필요성과 재화의 생산을 지칭하는 사례를 18세기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고 19세기에 비로소 관철되었다. 요컨대 이 단어의 근대 초기의 역사를 더 천착해봐야 하는 이유는 우선 이 ‘경제 Wirtschaft‘라는 단어가 가정과 가사의 관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림살이 Okonomie‘라는 단어는 근대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식 의미의 가정학을 지칭하는 기술적 용어로 사용되고, 거기에서 ‘경제‘라는 단어 및 그 의미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 P89

국가경제라는 명칭 형태를 독일에서 밀어내고 대신 들어선 것이 ‘국민살림살이‘와 ‘민족경제‘라는 개념이다(p147)... 19세기 백과사전에 나오는 합성어에서도 가내경제라는 요소가 사라지고, 그 원초적인 형태 대신에 중상주의에서 중농주의를 거쳐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발전 경로를 보여준다. 이러한 근대적인 경제 개념은 학문적으로 형성되었지만, 이어 ‘사회‘ 및 ‘역사‘와 맺는 현실적인 관계에서도 그 쓰임새를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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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2-05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련해서 푸코의 흥미로운 언급을 옮겨봅니다. ˝18세기에 중요했던 어느표현이 이 점을 잘 특징짓습니다. 케네는 훌륭한 통치는 경제적 통치라고 말합니다...16세기에 ‘경제‘라는 말은 통치의 한 형식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 경제는 우리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련의 복잡한 절차를 통해 통치가 개입하는 현실의 한 수준, 어떤 영역을 지칭하게 됩니다...라 페리에르의 말에 따르면 통치가 담당해야 하는 사물이란 인간이지만 그것은 부 식량 자원 같은 사물과의 관계, 연결, 연루 속에 있는 인간입니다. 물론 특질 기후 가뭄 풍요 등과 더불어 국경을 갖춘 영토도 사물에 포함됩니다. 풍속 습관 행하고 사유하는 방식 같은 것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 마지막으로 기근 전염병 사고 등의 사고나 불행과도 관계를 맺고 있눈 인간이 바로 사물입니다...<사회계약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 ‘계약‘ ‘일반의지‘ 같은 개념으로 어떻게 통치의 일반 원리를 제시할 수 있느냐입니다. 주권의 법률적 원리뿐만 아니라 통치술을 정의하고 특징지을 수 있게 하는 요소들까지 모두 감안한 일반 원리를 말입니다.˝ <안전, 영토, 인구>

겨울호랑이 2023-02-05 23:3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글 안에서 푸코는 케네의 <경제표>를 하나의 변곡점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네요. 이전까지 정형화된 객체가 통치의 관심사였다면, 순환적인 경제 구조를 제시한 케네 이후 대상의 관계성에 보다 중점을 둔 것이 이전과 다른 점이라고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관계성에 주목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변화라 해석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법칙, 일반원리를 끌어내는 것이 현대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이 추구하는 바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김민우님 좋은 글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한 밤 되세요!
 

"누구든 말라카의 통치자가 되는 사람은 베니스의 목에 손을 얹게 된다."

말라카인은 계속해서 깨끗한 물과 하수 탱크 시설을 갖추고 살았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말라카에는 옛 영국령 동남아시아의 다른 해협 식민지에 비하여 치명적인 전염병이 적었다. 말라카인들은 또한 강 가까이에 살았는데, 이것은 하수 재활용 기법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튼튼한 저장소들은 화재에 강한 특성 덕분에 포르투갈의 공격에도 멀쩡하였다. 그들은 강어귀를 따라 귀중품들을 보관하였고 그중 일부는 도시 주변에 있는 과수원에도 숨겼다.

말라카의 농업은 말레이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활발하지 않았다. 약간의 불이익은 말라카 사람들이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서, 도시 외곽 지역은 늪지대에 있었지만, 말라카의 도시는 언덕 위에 있었다. 그 도시는 원래 강어귀에 있는 단순한 지역이었으며, 주요 일자리는 말라카강을 따라 전개된 어업밖에 없었다.

말라카에는 켈링 케이프(Keling Cape), 차이나타운, 자바 마을 등과 같은 대규모 상인 거주지역이 있었고, 그 지역은 모두 무역업자들의 주거지역으로 활용되었다.

말라카의 실제 영토는 쿠알라 링기(Kuala Linggi)에서 케상(Kesang)까지 포함하였다. 그 도시는 말라카강 어귀에 수산업 기지로 시작되었다. 마지막 싱가포르의 왕은 말라카가 발전하면서 유명해진 이곳에 약간의 잠재력을 불어넣었다. 제국은 지리상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도시가 설립된 최초의 지역과 통치세력이 방어하고 점령한 영토. 초기에 말라카인들이 세운 도시는 해안선을 따라 확장되었다. 곧 이 도시는 보호를 제공하기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무한한 경제적 잠재력으로 설립된 도시들을 차례차례 점령하면서 성장하였다.

지식은 말라카가 제국의 확장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술탄들은 학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통해 인재 개발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중요한 학문 분야는 무기생산, 외국어, 가축 사육(축산학), 항해, 건설, 이슬람 신학 등이었다.

무역상들은 인종에 따라 귀족들이 관리하였다. 이 사법체계는 특히 무역상들에 대한 공적인 재판을 수립하기 위해 민사 및 관세 사건을 포함하였다. 그래서 귀족은 관청이나 그의 공적인 거소(居所)에서 재판을 통해 각 사건을 다루도록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라카 술탄국에 있는 기관들의 호칭은 산스크리트어 어원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말라카 술탄국의 건국 관점에서, 오직 중요한 호칭만이 술탄국의 기관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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